손순효의 재치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은 훌륭한 인재를 고루 등용한 것은 물론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한 왕이었다. 성종은 인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아끼고 소중히 여겼는데, 그 중에서도 손순효를 가장 가까이 하고 그 재주를 아꼈다. 손순효는 당대의 문장가로서 그 명성이 자자했지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말도 없는 사람이 술만 들어가면 가슴 속에 품었던 광기가 되살아나는 듯 그야말로 말술을 마시며 사람이 돌변했다. 주사가 심한 손순효를 다른 신하들은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으나 성종은 언제나 변함 없이 자애롭게 대했다.

한 번은 성종이 명나라에 급히 국서를 보낼 일이 있어 손순효를 찾았다. 왕명을 받은 신하는 다급하게 손순효의 집으로 달려갔으나 손순효는 집에 없었다. 게다가 집안 사람들 중에도 그 행방을 아는 이가 없었다. 촌음을 다투는 어명인지라 신하는 물론 집안 사람들이 모두 손순효를 찾아 나섰다. 한참을 수소문하고 다닌 끝에야 마침내 손순효를 찾아 낸 그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소 잘 들르던 주막집에서 만취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술을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얼굴은 주독이 올라 시뻘갰으며 아무리 몸을 잡아 흔들어도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손순효의 몰골은 나라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했다.

"나리, 황급히 입궐하시라는 어명이옵니다."

"……?"

손순효는 술이 덜 깬 몽롱한 표정으로 그저 멍하니 어명을 전하는 신하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리! 어명이 내리신 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한시 바삐 입궐하셔야 할 줄로 압니다! 서두르십시오, 나리!"

신하가 당황한 나머지 소맷자락을 잡아 끌자 손순효는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대궐로 향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어명을 받고도 술에 취해 한참을 지체했으니 아무리 성은이 크시다 한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 힘들 것 같은데….'

대궐에 당도하여 내전으로 들어가는 손순효의 마음은 애가 닳아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전하! 찾아 계시옵니까?"

손순효는 내전에 들어가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엎드렸다. 금방이라도 성종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차마 얼굴을 들어 용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기에 이리 늦었소?"

성종은 전후 사정을 다 알면서도 넌지시 물어 보았다.

"그것이…, 저… 소신이 그만…."

"또 술을 드신 게요?"

성종의 목소리에는 조금씩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전하! 소신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손순효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잘못을 빌었다.

"지금껏 술이 덜 깬 걸 보니 어지간히 많이 마셨나 보구려."

"……."

"과인이 그토록 과음하지 말라고 일렀거늘, 경은 과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구려!"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성종은 소리 나게 무릎을 쳤다.

"변명은 그만 두시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지금 중요한 국서를 명나라에 보내야 하는데, 그래 가지고 어디 붓이나 제대로 잡을 수 있겠소?"

"전하! 하명만 하시옵소서. 소신이 미련한 글재주나마 성심을 다해 써 올리겠나이다."

성종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붓과 먹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손순효가 종이를 펼치고 붓을 잡자 성종은 천천히 국서의 내용을 읊었다. 얼마 후 손순효는 국서를 적은 종이를 성종에게 올렸다. 성종은 국서를 받아 들고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음…, 과연 손순효로구나! 명필에 명문이로다.'

성종은 마음 속으로 감탄했다. 손순효가 비록 술이 과한 것이 흠이긴 하나, 이만한 문장은 신하들 중에서 찾아 보기 힘들었다. 국서를 다 읽은 성종은 손순효를 바라보며 노기가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

"과인이 또 한 번 당부를 하오. 부디 술을 줄이도록 하시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며칠이 지났다. 손순효는 다시 성종의 부름을 받고 어전으로 나갔다. 성종은 한껏 부드러운 표정으로 손순효에게 은으로 만든 잔을 하사했다.

"과인의 성의니 받도록 하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손순효는 성종이 직접 건네 주는 은잔을 받았다.

"앞으로는 그 잔으로 하루에 술을 석 잔씩만 마시도록 하오."

"명심하겠사옵니다."

은잔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온 손순효는 한 마디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성종이 하사한 은잔이 겨우 간장 종지만했기 때문이다. 말술을 먹는 손순효가 그 잔으로 그것도 하루에 석 잔만 먹어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게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명을 어길 수도 없는 일이라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손순효는 마침내 은세공 하는 곳을 찾아가 성종이 하사한 은잔을 최대한 얇게 펴서 큰 대접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날마다 그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라 석 잔씩 마셨다. 결국 어명을 어기지 않고도 술을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성종이 국사를 의논할 일이 있어 손순효를 따로 불렀는데 손순효의 얼굴에는 예전과 같이 발갛게 주독이 올라 있었다. 성종은 손순효가 자신의 명을 어겼다고 생각하니 조금씩 부아가 났다.

"경은 과인의 말이 허튼소리로 들리나 보오?"

성종의 말에 손순효는 깜짝 놀라 아뢰었다.

"전하!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성종은 불쾌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과인이 며칠 전 은잔을 주며 그 잔으로 하루에 석 잔만 마시라고 일렀거늘 얼굴을 보아하니 그렇지가 않은 것 같기에 하는 소리요!"

"아니옵니다, 전하! 소신은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그 잔으로 하루에 꼭 석 잔만 마셨습니다."

성종은 더욱 노기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도 얼굴이 그 모양이란 말이오?"

"전하, 그게 실은… 잔의 크기가 좀 커져서…."

성종은 더욱 화가 났다. 자신이 하사한 잔은 술고래인 손순효가 서른 잔을 마셔도 끄떡 없을 만큼 작지 않은가?

"그래요? 그렇다면 그 잔 한 번 다시 봅시다! 여봐라!"

성종은 내관으로 하여금 손순효의 집에 가서 자신이 하사한 은잔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런데 잠시 후 내관이 가져온 잔은 대접만한 은잔이었다.

"아니…, 이 잔이 과인이 하사한 잔이란 말이오?"

성종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하! 소신,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전하께서 하사하신 잔으로 술을 먹자니 양에 차지 않고, 그렇다고 어명을 어기는 불충을 저지를 수도 없는 일이라 소신이 은세공 하는 곳을 찾아가 잔의 크기를 조금 늘였습니다."

몸둘 바를 몰라 하는 손순효의 말을 들은 성종은 그저 어이가 없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손순효의 말대로라면 어명은 어명대로 지키고 술은 술대로 맘껏 마신 것이니 가히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허허! 경은 문장에만 능한 줄 알았더니 재치 또한 뛰어나구려. 허허허…!"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손순효는 머리를 조아렸다. 한바탕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성종은 다정한 목소리로 손순효에게 말했다.

"잘 들으시오. 혹 앞으로 국정을 돌보는 과인의 눈이 흐려지거든 경이 이 은잔을 닦든 맑게 해 주고 또 백성들의 소리를 듣는 귀가 좁아지거든 경이 이 은잔을 크게 늘렸듯 부디 과인의 귀를 크게 열어 주기 바라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곧이어 성종은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여봐라! 술상을 들여라! 과인도 오늘은 이 은잔으로 술 한 잔 마셔야겠다.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