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 황동규 시집

1957~1964

 

 

땅

 

때로 날이 끝난 곳에서

하나의 이름이 떠오른다.

모든 기억을 부를 수 있는 이름

모든 것이 쓰러져 버리는 이름

오 배에 닿는 외로움.

땅이여, 어디에 엎드려도 나를 밀어내지 않는

어디서나 내 조용히 떨고 다닌

언젠가 훈훈한 술집에서 나올 때

네 위에 갑자기 나를 쓰러뜨려

서 있는 것의 맛을 알게 한

땅이여, 나의 젊은 날에는 언제나

녹슬 만큼 굳은 노래 하나 없고

그림자처럼 오가는 사람들 뿐, 사람들 뿐.

 

다만 기다리라, 내 언젠가 그 그림자들 속에서 미친 듯이 나타나

너에게 배신과 열망의 입을 맞추고

죽고 새로 나는 길 위를 껴안듯이 걸어갈 때를

그 때 잠 깨인 나의 목소리를.

 

 

나무들이 날리는 눈을 쓰며 걸어가는 친구여

나는 요새 눕기보단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

- 황동규, 어떤 개인 날 中

 

 

 

갈매기

 

나랫소리 이는 곳에 노랫소리처럼 들려 오던 것

그것은 수심(水深)에서 수심에서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거리

 

나도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웃음을 울고 싶었다

흐르는 구름처럼 그런 울음을

 

그것은 수심에서 수심에서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거리.

 

 

 

새벽 빛

 

 

1

 

집 앞에 반쯤 눈 덮인 들판

반쯤 눈 뜬 하늘

혼자 사는 일은

끊임 없는 갈증, 방향 없는 돌아옴.

창이 어두워 올 때

내 앞의 촛불보다 먼저 잠들었을 때

창 가까이 별이 돌아가고

나의 손 펼친 잠이여

병자(病者)의 광학(光學)

나의 잠 속에는

잘 아는 길을 헤매 다니는

먼 우레소리 들린다.

무엇엔가 가까이 하는 자는

자기 눈물의 맛을 보는가.

닫힌 창에 뻗쳐진 손을

찾게 되는가.

병자의 광학,

나의 어두운 눈에 외로운 두 손에

반쯤 눈 덮인 들판

반쯤 눈 뜬 하늘.

 

 

2

 

들 한가운데는

얼어붙은 연못이 있어

내 갔었네, 해질 무렵이면

내 몸 속 잔뼈에

희미한 불들을 감추고.

새 하나 날지 않는 공간

빈 나무 하나 비쳐 있을 뿐

아픔에 살이 익어 더 어둡지 않는 우리들이여

나의 방황은 거기에 있네

새 하나 날지 않는 공간에

저녁 무렵에.

 

 

3

 

갑자기 놀라 잠이 깰 때면

복잡한 소리를 내며 도는 지구의 소리.

때로 꿈 속에도 들었다

세상의 무딘 고동 소리

저음으로 답하는 사람들의 소리.

또 돌산을 오르는 나.

진실로 같은 틀로 나고 끝남을 알게 된다면,

다시 나고 싶지 않으리라

이끼풀까지도,

다시 살고 싶지 않으리라

몸 속을 훤히 밝히는

저 새벽 빛을

이 돌산의 고요함을

돌산과의 아무 소리 없는 이 상봉을.

광대 같이 홀로 흐느끼는 나의 얼굴

나의 죽음이여, 내가 자리를 때로 벗어나

어느덧 낯선 사내 같이 웃을지라도

미소 담긴 얼굴로 답하여 다오.

그 미소 속에 더 탈 수 없는 것도 타고

이미 익은 살도 다시 어두워지리.

아프리, 저 새벽 빛.

 

 

 

14행(行)

 

고(故) 김정강(金正岡)을 위하여

 

이제 죽은 자를 경애하지 말고

죽은 자의 죽음을 생각하라.

무성한 잎은 잠자는 나무의 꿈이요

꿈 속의 한 안쓰러움이로다.

 

내 꿈 많은 날의 지상의 윤곽을 아노니

지도 지닌 자들의 잠든 얼굴이요

눈에 오는 소금기

지극히 가까운 자의 목마름이로다.

 

친구여, 죽음과 생시 둘 다 사랑할 수는 없노니

허리 위의 잠

오늘도 거리엔 말 없이 등불 켜지고

허리 위의 잠

내 그토록 잠든 사내를 사랑하므로

나는 때로 잠자는 법을 잊는다.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겨울 밤 노래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를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오후에는 배가 안 고프고

언덕에서 내려뵈던 깊은 황혼

캄캄하게 그 황혼 속을 달려가던 사내여 오라.

 

겨울날 빈 터에 몰려오는 바람 소리

그 밑에 엎드려 얼음으로 목을 축이고

얼어붙은 못가에 등을 들판으로 돌리고 서서

못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바라볼 때

몸과 함께 울던 우리의 옷을 보라.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

그 떨리는 손에는 네 목을 잡고

머리칼 날리며 빙판에 서서

서로 마주 보며 네 목을 잡고

내 들려주리

쓰러지지 않았던

쓰러지지 않았던 사내의 웃음을.

 

어둡다 말하면 대답 소리 들리는

쇳날을 만지면 살이 떨어지는

그런 떨리는 노래는 이제 우리에게.

서로 붙잡은 우리의 어지러움

어지러움 속으로 길은 헐벗고 달려가고

그 길 끝에 열려 있는 술집은 이제 우리에게.

 

친구여 너는 술집의 문을 닫아도 좋다.

문을 닫아도 바람 소리 바람 소리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오후에는 배가 안 고프고

그 때 땀 흘리던 우리의 배를 기억하라.

열린 채 땀 흘리던 우리의 배를 기억하라.

 

하면 아침이 눈길 위로 올 때까지

우리 서로 얼음 냄새를 풍기며

때로 주먹으로 벽을 두드리고 기름 냄새를 맡으며

줄어드는 심지를 바라보며

단추 떨어진 우리 젊은 날의

어둡다 말하며 벗어던진 옷을 말리자.

 

 

 

시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 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 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 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石燈)결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 내 며칠 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기도

 

 

1

 

내 잠시 생각하는 동안에 눈이 내려 눈이 내려

생각이 끝났을 땐 눈보라 무겁게 치는 밤이었다.

인적이 드문, 모든 것이 서로 소리치는 거리를 지나며

나는 단념한 여인처럼 눈보라처럼 웃고 있었다.

내 당신은 미워한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며는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2

 

내 꿈결처럼 사랑하던 꽃나무들이 얼어 쓰러졌을 때 나에게 왔던

그 막막함 그 해방감을 나의 것으로 받으소서.

나에게는 지금 엎어진 컵

빈 물 주전자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닫혀진 창

며칠 내 끊임없이 흐린 날씨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곤 세 명의 친구가 있어

하나는 엎어진 컵을 들고

하나는 빈 주전자를 들고

또 하나는 흐린 창 밖에 서 있습니다.

이들을 만나소서

이들에게서 잠깐잠깐의 내 이야기를 들으소서.

이들에게서 막막함이 무엇인가는 묻지 마소서.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맡기소서.

 

 

3

 

한 기억 안의 방황

그 사방이 막힌 죽음

눈에 남는 소금기

 

어젯밤에는 꿈 많은 잠이 왔었다.

내 결코 숨기지 않으리라

좀 더 울울히 못 산 죄 있음을.

 

깃대에 달린 깃발의 소멸을

그 우울한 바라봄, 한 짧고 어두운 청춘을

언제나 거두소서

당신의 울울한 적막 속에.

 

 

 

얼음의 비밀

 

 

어느 겨울날

 

눈이 그쳤을 때, 바람이 불 때, 내 외롭지 않을 때

나는 갔었다, 너의 문 닫는 집으로

얼은 벽에 머리 부비고 선 사내에게로

너의 입가에서 웃음으로 바뀌는 너의 서 있는 자세에로.

나를 성에 사이로 이끌던

헐벗은 옷 틈새의 웃음소리, 내민 살의 내민 살의 웃음소리.

네 앞에 누가 잠잠할 수 있을 건가

누가 네 머리 부비는 웃음을 끊고 싶지 않을 건가

허나 배반하고 말았다, 눈을 가리고 얼은 듯이 쓰러지며

배반하고 말았다, 나를 벗어나려 하는 말들을.

 

 

얼음 위에서

 

네 웃으며 집을 나간 후에 지친 듯이 눈이 멎고 저녁은 사라지고

내 혼자 바라보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너의 모습,

친구여, 어둠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친구여, 이미 취한 것도 아닌 비틀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배 밑에 깊숙이 얼어 있는 땅의 맥을 짚어 보는,

쓸쓸히 기다리는, 그러나 아무런 대답 없는,

우리의 모든 사랑이 일시에 배반당하는 것 같은,

그래 머리를 먼 땅 위에 부딪고 마는 친구여,

그 때마다 나는 이른 잠에서 불현듯 깨어 불을 켜고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외롭지 않다.

너는 머리를 흔들어라.

기다린 건 언제나 오지 않았다,

친구여, 엎드린 얼굴을 들고 이제

흥미 없이 일생을 살아 버리는 자의 웃음을 보여다오.

그 웃음이 끝날 때에는 내 조용히 새로운 웃음을 만들어 주마.

 

 

겨울날 단음(斷音)

 

1

 

좀 늦었을 뿐이다, 좀 늦었을 뿐이다,

나의 뼈는 재멋대로 걸어가고.

차가운 얼굴을 들면 나무들은 이미 그들의 폭을 모두 지워버려,

폭이 지워지면 앙상히 드러나는 날들,

내 그를 모를 리 없건만,

오 모를 리 없건만,

외로운 때면 언제나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제 누가 나의 자리에 온다고 하면, 보리라,

각각으로 떨어지는 해를, 어둑한 나무들을,

그 앞에 그대를 향해 두 팔 벌린 사내를,

그의 눈에 잠잠히 드는 지평을,

그리고 그의 웃음을,

그대는 보리라.

 

 

2

 

어두운 겨울 날 얼음은

그 얼음장의 두께만큼 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은 오랫동안 나를 버려 두었다.

 

새로 누웠다가 일어나

겨울 저녁 하얀 입김을 날리며 문을 열 때면

갑자기 내 입김 속에 들어오는 조그만 얼굴

얼굴을 가리는 조그만 두 손

나는 알겠다, 언제부터인가

육체의 쓴 맛이 머리칼 곱게 빗고 흙 내음을 맡으며

얼마나 오랜 나날을 닫힌 문 속에 있었는가를.

 

나는 여기 있다

미친 듯이 혼자 서서 웃으며

나는 여기 있다

너의 조그만 손등에 두 눈을 대고

네 뒤에 내리는 설경(雪景)에

외로울 만치 두근대는 손을 내민다.

 

 

3

 

요즘 와서는 점점 더 햇빛이 빨라져

조금 살다 보면 어느 샌가 어둠이 내려,

 

만나라 친구들이여,

눈 멎은 저녁 모퉁이에서

갑자기 서로 떨리는 손들을 내밀고,

찾아라 서로 닮은 점들을,

서로 닮은 곳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잘들 있었는가.

그대들은 어느 곳에 상처를 받았는가.

나도 닮은 곳에 얼음을 받지 않았는가.

혹은 내가 팔을 벌렸던가.

 

만나라 친구들이여,

내 얼은 거리에 등을 붙이고 서서

서로 만나는 그대들을 맞으리니.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1

 

내 그처럼 아껴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던 어린 나무들이 얼어 쓰러졌을 때 나는 그들을 뽑으러 나갔노라.

그 날 하늘에선 갑자기 눈이 그쳐 머리 위론 이상히 희고 환한 구름들이 달려가고,

갑자기 오는 망설임, 허나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은 목, 오 들을 이 없는 고백.

나는 갔었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그 어린 나무들의 자리로.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내 젊음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노라.

나직히 나직히 아직 취하지 않은 술집에서 불러내는 소리를.

 

날 부르는 자여,

어지러운 꿈마다 희부연한 빛 속에서 만나는 자여,

나와 씨름할 때가 되었는가.

네 나를 꼭 이겨야겠거든 신호를 하여 다오.

눈물 담긴 얼굴을 보여 다오.

내 조용히 쓰러져 주마.

 

 

2

 

갑자기 많은 눈이 내려 잘 걸을 수 없는 날

나는 너를 부르리.

그리고 닫힌 문 밖에

오래 너를 세워 두리.

희부연한 어둠 속에 너의 머리 속에

소리 없이 바람은 불고

문이 열리면

칼로 불을 베는 사내를 보게 해 주리.

타는 불 머리의 많은 막막함

흩어진 머리칼 아래 무심한 얼굴

혼자 있는 사나이의 청춘

그물 속의 불빛 그물 속의 불빛

뒤를 보려무나

그 사이에 나는 웃으리,

금 간 얼음장에 희부연한 빛으로.

그물 속의 불빛 그물 속의 불빛

나는 너를 보리.

 

 

3

 

나무들이 요란히 흔들리는 가운데 겨운 햇빛은 떨어지며 너를 이끌어 들인다,

옅은 들판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에게로.

잘 왔다 친구여, 내 알려 줄 것이 있다.

저 캄캄해 오는 들판을 바라보라.

들판을 바라보는 그대로 너를 나에게 오게 하는 법을 배웠느니라.

  

이제 무엇을 말하겠는가. 혹은 다시 보겠는가.

네 허전히 보낸 나날의 표정 없는 얼굴을.

네 그처럼 처음을 사랑했던 꿈들을.

 

보여라, 살고 싶은 얼굴을.

보아라, 어지러운 꿈의 마지막을.

내려서라, 들판으로, 저 바람 받는 지평으로.

 

 

비가(悲歌) 제1가

 

빈 들의 봄이로다.

밤에 혼자 자며 꿈결처럼 들은

그림자 섞인 물소리로다.

저녁 들판에

돌을 주위에 쌓아 놓고 든 자여

돌성(城)은 너의 하숙이로다.

젊은 자들은 반쯤 웃는 낯을 짓고

나이 든 자들은 작은 이름만을 탐내니

그들의 계집이 캄캄히 들에 나가

병차(兵車) 앞에 엎디는 자식을 낳도다.

 

너는 아직도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사랑은 많은 물소리 같고

나의 혼령은

들판 구석구석에 스민 황혼이로다.

너는 아직도 알지 못하겠느냐

지금 내 사랑은

이미 인간이 아니로다.

우리들 서로의 눈에 어리는

우리들 인간이 아니로다.

나의 사랑은 빚진 자의 집이요

빈 들의 물소리로다.

생시를 버린 꿈이 있다면

그것은 너의 눈물이로다.

 

땅이여, 내 누워

잠이 깨곧 깨곤 할 때

꿈 가까이 봄은 어둡고

가만히 다닌 봄

그 봄이 다시 오리니

캄캄히 꽃 피우는

나무들을 찾아 들어

눈을 감고

같은 자리에 나서 죽는 그 자태를

배울까 못 배울까.

 

 

비가(悲歌) 제7가

 

아아 이루소서 다시는 내가 나로 환원되지 않도록!

- 미켈란젤로 <시집> 135P

 

머리 가까이 어둠 속에

숨죽인 바다

눈 감은 물결 소리

감은 눈에

어두운 하늘가에

말없이 떠도는 구름.

 

돌베개여 돌베개여

돌베개에 쓴 잠이여

네 가볍게 흔들리는 머리에

내 머리칼을 묻고

조심히 가는 나날의

포장(布帳)을 들춰 본다.

 

실로 배반한 자를 찾음이 부질없도다.

남을 등지기에 앞서

자기 하늘에 장막을 씌웠노니

포장 속에 우는

어두운 바람 소리

희미한 황혼

내 텅 비인 마음으로

옷을 갈아 입고

보이지 않는 산을 여러 번 오르내렸노라

빈 산

그 위의 하늘

큰 황혼 진 읍내에

오르는 연기,

실로 오랜 기다림

그 긴 기다림 밀려

막막히 사라지는

연기와 같은 몸짓이 될 때까지

나는 보았노라

초저녁 읍내에 부는 스산한 바람 소리를

바람 속에 올리고 또 내리는 불빛을

이제 시야 속의 어지러움을

조심히 꺼리노라.

 

돌베개여 돌베개여

내 머리 속에는 벌써

식물의 우수(憂愁)가 자라고

그 뿌리는 벋어내려 헛쇠이

표본 상자 속의 모래를 부술 뿐이다.

너의 기다림은

돌베개 위의 가벼운 잠이요

새벽 하늘에 무심히 무심히 흐르는

한 줄기 가벼운 구름이로다.

동녘 하늘가에 짧은 황도광(黄道光) 뜰 때

내 사는 나날의

바람 낀 모든 장막이 들릴 때

바람 뒤에 비치는 비인 물결 소리

바다 바다

내 텅 비인 마음으로 기슭에 나가

새벽 바다를 조심히 보지 못하노라.

 

죽은 친구 집 문 앞에

말 없는 들

마음을 끄노니

남 몰래 가 넉넉히

거닐고 거닐고, 할 따름이로다.

 

 

비가(悲歌) 제11가

 

내 노래한다 겨울 항구를

한겨울의 우울을

어두운 선창에는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눈

배 떨어진 항구의 밀집한 밤을,

말없이 섬들을 잠시 꾸미는 잔 별들을,

사리 달이 질 때, 네 떠날 때,

내 들었노라

달을 받는 큰 물의 배음(背音)을

들었노라

저 습기 찬 커다란 원의 흔들림을,

 

가만히 생각해 보라

네 마음 속에는

다빈치가 잡은 성(聖) 안느의

조용한 어린 계집앳적 얼굴을 가진

가난한 소년이 살고

낡은 초가집을 심은 마을

몇 그루의 어린 나무가 그의 뒤에 서서

거부하는 거부하는 몸짓으로

그를 언제나 항구로 내몬 것을.

항구에는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눈

가만히 생각해 보라 항구의 하루를.

찢겨진 그물

색구(索具), 해초, 몇 마리 생선의 안착

뒤집어 논 목선 몇 척

생선 뼈 박힌 주막

가만히 생각해 보라

며칠 밤 가설 철도와 같은 잠을.

마지막 배가 뜨고 불이 꺼진 후

머리보다는 배로 온 잠을.

 

나는 안다

우리는 비유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님을.

이름 모를 들꽃을 뽑을 때

안쓰러이 따라오는 뿌리와 같이

좀 더 간단하고 그리운 어떤 것임을.

나는 안다

모든 출발에 따라가는

뽑혀진 뿌리의 길이를

지도(地圖) 지닌 자들의 잠을

그들의 얼굴을 지키는 어두운 등불을.

한없이 봄날에

등을 잡고 아깝게

서 있고 서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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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1971

 

 

 

남해안에서

 

김영태(金榮泰)에게

 

사직동에 숨은 너의 집에

전화 벨이 울던가.

다섯 평 미만의 얼굴

때 묻은 눈 남은 너의 마당에

꿈처럼 울던 철사의 새들.

 

나의 새는 망가졌다

방법의 차이다

시계의 초침이 멎었다

동백이 떨어지고 사흘

편지 한 장 띄우지 않았다

항해를 단념한다

윗도리 벗은 채 파랗게 얼어

아이들이 뛰는 영하 1도의

그 1도, 값 내린 멸치 도처에

언덕처럼 쌓아 놓고 밥의 언덕을 퍼 먹는

사내들의 힘줄 선 억센 턱.

 

꿈에 보이는 군중들은 말이 없다.

꿈과 생시는

의자 위치만 바꾸어도 총성이 들릴 것 같은

그런 거리다.

 

 

 

들기러기

 

슬퍼하지만은 않았다

북한강 상류

사방에 눈 몰린 산

그 너머를 향한 야포의 행렬을.

 

들기러기 날아 내렸다.

잠자고 깨고 불현듯 없는 꿈

꿈의 자리에 올려진 포대경

 

들기러기 흩어져 사는

다섯 달 겨울

사면에서 깃 높이 펴고

살 부비며 떠는 들기러기들

탄대 안의 무서운 조망

보고 울고 웃다 기합받았다.

 

포신 높이 쳐든

155밀리 포의 구애 자세를

없는 지도를

전생애로 꿈꾸고 꿈꾸었었다.

군번도 동상도 생명도 잊고

겁 없이 기다리고 기다렸었다.

 

 

 

호구(虎口)

 

홍성원(洪盛原)에게

 

조국은 닫혀 있다.

황토산에 뿌리는 빗발, 몇 개의 연기

다리가 뜬 몇 개의 강

군용 송신탑

비 맞는 급수차의 행렬

우리는 오래 기다렸다.

 

밤에 남해안을 돌아보라.

물살에 몸을 댄

발동선에 가만히 비 뿌릴 제

증기처럼 달은 혼의 마개를 뽑고

마개를 뽑고 정신 없이 술이 깨어

네 몸 둘 곳을 찾아 보라.

거울 속에서 찾는 너의 친구

거울의 깊이에 겨울 비 뿌린다

잔광이 없는 바다.

 

동대(同代)의 생에 문득 옷을 걸치고

밤에 남해안을 돌아 보라.

몇 개의 불빛 몇 개의 침묵

잠시 손을 들어 한없이 듣는 단조(單調)의 의미

우리는 오래 기다렸다.

 

 

 

전봉준

 

 

1

 

손금 접어두고 눈 오는 남루

한천(寒天)에 법도 없고 겁도 없는 논

땅 위에 깔리는 허연 눈가루

마음에 짓밟는 형제의 손.

 

 

2

 

눈 떠라 눈 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동편도 서편도 치닫는 바람

먼저 떠난 자 혼자 죽는 바라

동렬(同列)에 흐느낄 때 만나는 사람.

 

 

 

철새

 

고통, 덜 차가운 슬픔.

원고의 번역을 밤새 따라다니는

합창 같은 자유.

모든 나무의 선(線) 그 흔들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시월

무사무사(無事無事)의 이 침묵.

아침, 거품 물고 도망하는 옆집 개소리.

하늘을 들여다 보면

무슨 부호처럼

떠나는 새들.

 

자 떠나자

무서운 복수(複數)로 떼 지어 말없이

이 지상의 모든 습지

모든 기억이 캄캄한 곳으로.

기억이 캄캄한 곳

야만스레 입 벌린 태양

그 입 속으로 입 속으로

날아드는 형제들

모래 위에 깃 무수히 남기고

피 한 방울 없이

일족(一族)이 물구나무 서 우는 곳으로.

 

물구나무 선 우리들

이 시월

눈 비비고 놀라 다시

들여다 보는

들여다 보는 하늘에 나타나는 부호

새들이 떠나고 있다.

 

 

 

허균 1

 

또 가을이다.

이상한 산이 바뀌지 않는다.

그대의 슬픔에서 수많은 철새가

비산(飛散)한다 깃을 풀고, 거듭 광풍의 일보 전

한지에 자꾸 번지는 눈물 자국

우리의 주인공이 다시 죽는다.

 

도시의 중심에서는

쥐 얼굴에 범 눈을 지닌 자들이

한 획의 실수도 없이

농담도 없이 인기척도 없이

도장을 찍고

그대와 최후로 만날 약속을 한다.

 

문을 열고 보아라, 잠시 조용하다

달빛에 가려진 구름 뿐

순진한 조정도 육도(陸島)도

없다 그대도 나도 없다.

슬픔도 없다. 책에서 보지 못한

개가 한 마리 씩씩하게 지나간다.

 

 

 

허균 2

 

가르치려는 자들은

복잡하게 한다

죽음을.

 

우리 같이 보자

행인들

돌 든 학생들

혹은 벽에 기대 선 꽃들

쓰러지며 보도에 흘리는 꽃물

그대의 죽음은 단순하다.

 

불을 끄고 문을 닫을 때

어두워지는 벽면처럼 단순하다.

벽에서 사라지는 그대의 생애

하나의 막이 풀려

방바닥에 흘러내린다.

 

창 밖에선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임자 없는 손이 눈을 어루만진다.

자꾸 떨리는 손

그대의 죽음을 어루만질 수 없다.

 

 

 

열하일기 8

 

누이여, 네가 넘어지고

너의 타향이 나의 꿈에 나타난다.

언제까지 한 계절씩 절망할 것이냐.

계절의 경계선에는 낯선 새들이 날고

그들이 토하는 불빛도 보인다.

전라도 충청도 아아 온갖 지명으로 지워진

억새 속에 누워

간신히 지지 않는 해를 바라본다.

철교 위에서 기차가 뒷걸음질치고 있지 않느냐

달구지가 뒷걸음치고 있다.

새들이 아슬아슬하게 뒤로 난다.

멀어질수록 너는 더 커지는구나.

너의 숨소리가

십만 평의 얼굴이 되어

모든 지평에 숨고

너의 강이 나타난다.

다시 더 나타날 강이

이제 없다.

네가 잔기침을 하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빛나는 마른 번개.

 

 

 

내가 아픈 불두화(佛頭花)가

붉은 귀를 내밀었다.

자꾸 귀 막으면

꿈이 점차 처절해진다.

새가 하나 떨어진다.

개가 딴 곳을 보며 짖는다.

아니다, 다른 곳에서도

새가 떨어진다.

날개가 먼저 떨어지고

다음에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신기하다.

날개 없는 새들이 날고 있다.

상처 없는 입을 봉한 채

나는 걷고 걸었다.

우리는 걷고 있었다.

 

- 신초사(新楚辭) 中

 

 

 

아이오와 일기 1

 

마종기(馬鍾基)에게

 

커튼으로 가린 방

방 전체가 틀이다.

맥주병에서 꽃이 시드는 소리

시카고 미술관에서 몰래 꺾여와

내 감기를 지키는 꽃.

 

며칠은 커피를 끓이지 못했다.

가스 오븐에서 담뱃불을 붙이고

눈썹을 태우고

소리질러 봐야 내 목소리 뿐이다.

 

가방에는 자살 도구

혹은 아내의 편지

딸이 웃는 사진

 

아이오와 강엔 밤새 비가 내린다.

커튼을 열면 보이지 않는다.

트랜지스터에선 암호처럼

이국 목소리가 들려온다.

 

월남 중동 아니면 고국의 어디에선가

살아 있다고 사람들이 운다

알리바이도 없이.

 

눈물은 손톱처럼 떨어져

메마른 손에서 빠져나간다.

살아 있다고

몸에 기름을 붓는다.

한 나라의 목숨들이 철새처럼

촛불을 끄고

마지막으로 우는 악기를 어루만지고 떠나더라도

바라보면

비 내리는 공간

뒤돌아보면

이틀 전에도 하루 전에도 죽지 않고

내 감기를 지켜 준 꽃.

 

가방에는 자살 도구

아내의 편지

혹은 딸이 우는 사진

그리고 오늘 죽는 꽃.

 

싸고 있던 담요를 벗어 버리고

뜨거운 이마로 꽃잎을 차례차례 떨어뜨린다.

 

 

 

아이오와 일기 2

 

아내에게

 

팬츠 바람으로 장갑을 끼고

밤 비에 적어가는 주차장을 내려다 본다.

잠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리라 허락하리라

허락하리라 모든 것을

그대 살고 있는 괴로움이

다시 나를 울릴 때까지

슬퍼하는 기사(騎士)를 태운 말처럼

내 그대 마을 건너편 언덕에

말 없이 설 때까지.

 

몇 개의 초가집이 솔가지를 태워

그 연기 날개처럼 솟아

그대 사는 하늘의 넓이를 재고

 

그 하늘 아래 앉아

서로 이를 잡아 주는 그대와 나.

 

보이지 않는다

다시 보인다

지워지지 않는다.

 

 

 

입술들

 

 

1

 

돌 위에 돌이 한참 떠 있고

자줏빛 부리의 새 한 마리

돌 위에 앉아 울고 있었다.

날카로이 열린 부리가 쪼으는

하늘의 옆모습.

 

 

2

 

두 송이 꽃이 함께 죽어가고 있다.

혼자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사뭇 가벼운 이 죽음의 입술들.

두 송이 꽃은 벌써 지워지고

바람 속에 남아 있는 우리의 얼굴.

 

 

3

 

뒤돌아 보면 아무도 없다.

삼각산보다 작은 평화를 위해

평화의 한 골목을 위해

소리내지 않고 울듯이

소리내지 않고 말하는

우리들.

한없이 작은 벌레들이 바람에 날리며 우는

울며 울며 남아 있는 이 가을

벌레의 눈에 차례로 비치는

우리들.

 

 

4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보 위로 눈이 내린다

다시 쥐지 못하는 주먹

 

아이들의 하얀 비명

 

아이들이 숨어 있다.

찾아 보라, 아이들이 숨어 있다.

숨바꼭질하다 돌아오지 않고

입 틀어막혀서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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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1974

 

 

 

초가(楚歌)

 

나는 요새 무서워져요. 모든 것의 안만 보여요.

풀잎 뜬 강에는 살 없는 고기들이 놀고 있고

강물 위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에선 문득 암호만 비쳐요.

읽어 봐야 소용 없어요.

혀 잘린 꽃들이 모두 고개 들고,

불행한 살들이 겁 없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어요.

달아난들 추울 뿐이에요.

곳곳에 쳐 있는 세(細)그물을 보세요.

황홀하게 무서워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처럼 떠 있는 것도 두렵잖아요.

 

 

 

세 줌의 흙

 

 

자장가

 

장난감 말이 쓰러져 뒹군다. 아니, 잠이 깬다.

몇 마디 아픈 말이 뱉어지지 않는다.

잠시 비 뿌리며 밤개 짖는 소리,

몇 개의 평면으로 사라졌던 아내와 아이들이 다시 돌아와 꿈틀거린다.

들키고 싶지 않구나.

눈을 감고 그들이 다시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그래요,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서 먹구름이 조금씩 꺼지고 있는 것을 들여다 봐요.

가장자리에선 잔비가 뿌리고 비 맞는 어떤 섬에서도 그대를 그리워하는 흙이

귀면(鬼面)으로 취해 기다리고 있어요.

자세히 봐요, 그대도 흙이에요.

조금은 부끄럽고 조금은 분한 대로 흙이 진하게 흙이 되려 하고 있어요.

몇 마디 말은 내가 쫓을게요, 멀리 멀리, 또 멀리.

따뜻한 빗물 속에서 흙이 흙에 녹고 있는 것을 보세요.

이제 아무 것도 안 보이죠. 자 뒹굴어요. 그리고 눈을 떠 봐요.

장난감 말이 쓰러져 뒹군다.

몇 마디 아픈 말이 뱉어지지 않는다.

 

 

들불

 

얼굴 가린 비들이 내리고 있어요.

잿빛 복면들이 불빛 속에 빗물에 젖어 빛나요.

울타리 넘어 번지는 들불을 따라 정신 없이 달리다

도처에서 들불이 죽는 것을 보고 있어요.

어떤 불길은 힘없이 쓰러져 잦아들고

어떤 불길은 마지막으로 치솟아 분노에 찬 얼굴처럼

공중에서 눈 휩뜨고 떨며 떨며 오래오래 사라지지 않아요.

작은 불길은 북 치던 손 사라진 잔북소리들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울고,

울음의 앞에서도 뒤에서도 얼굴 없는 비가 자꾸 내려요.

내리고 있어요.

 

 

서울 1972년 가을

 

이 악물고 울음을 참아도 얼굴이 분해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마른 풀더미만 눈에 보인다.

밤에는 눈을 떠도 잠이 오고 바람이 자꾸 잠을 몰아 한 곳에 쌓아 놓는다.

1972년 가을, 혹은 그 이듬해 어느 날,

가는 곳마다 마른 풀더미들이 쌓여 있다.

풀 위에 명새가 죽어 매어달리고

누군가 그 옆에서 탈을 쓰고 말 없이 도리깨질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마음 모두 빼앗긴 탈들이 서로 엿보며 움직이고 있었다.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더 조그만 사랑 노래

 

아직 멎지 않은

몇 편의 바람.

저녁 한 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 귀뚜라미의 귀가 보여

《 완전히 망가진 여름이지

《 그럼 넌?

《 다들 망가질 때 망가지지 않는 놈은 망가진 놈 뿐야.

 

- 황동규, 돌을 주제로 한 다섯 번의 흔들림; 1974년 여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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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변증과 지성

 

황동익

 

 

아마 이 시집의 선량한 독자를 위해서 황동규에 대한 나의 우정을 먼저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정>이라 했지만 그것은 그의 문학보다 인간에 내가 더 접근해 있으며 그와의 깊고 오랜 사귐을 통해 그의 시를 보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958년 2월의 동숭동 교양학부 캠퍼스에서였으며, 다음 달 계룡산 갑사의 한적한 여관 방에서 막 녹기 시작한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로 이틀 밤을 지낸 이후 근 17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그의 말을, 그의 시를 들어 왔다. 때로는 르네상스 음악실에서, 때로는 갈채 다방에서, 때로는 회현동 그의 집 이층, 책과 먼지로 어수선한 방에서 그는 많은 것을 말했고, 많은 시들을 읽어 주었다. 그가 육군 졸병으로 근무할 때, 대학원을 다닐 때, 그리고 영국으로, 미국으로 유학 가 있을 때에도 도전적인 그의 음성은 여전히 내게 달려왔고 활자화되기 전에 나의 감상을 요구해 왔다. 따라서 그의 개인 시집으로서는 세 번째인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의 시편들을 다시 읽을 때 나의 연상은 이 시들의 이미지들에 앞서 순진한 교복을, 뻑뻑한 군복을, 덜 세련된 양복을 입고 혹은 술을 마신, 절대로 질 수 없게 논쟁하는, 아끼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전날의 그의 얼굴들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중요하게 변해 왔다. 나는 60편의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정신의 변모를 분명히 보았고 그 변모가 그의 표정과 당연히 연결되는 것을 확인했다. 나의 이 같은 우정이 그의 시에 대한 공정한 해설을 훼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훔쳐 보아 온 나의 우정이 그의 시에 대한 객관성 못지 않게 귀중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선량한 이 시집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1

 

황동규의 초기 시는 인간의 절대를 향한 비극적인 자세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것은 지극한 내면적 고뇌이며 따라서 그의 치열한 개인적 정서이고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그 비극과 대결하려는 지적 의지를 이룬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 <즐거운 편지> 中

 

나는 갔었다, 너의 문 닫는 집으로

얼은 벽에 머리 부비고 선 사내에게로

너의 입가에서 웃음으로 바뀌는 너의 서 있는 자세에로

- <얼음의 비밀> 中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 주며는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져 있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 주겠습니다.

- <기도> 中

 

기다림, 기대 서 있음, 쓰러짐과 같은 황동규의 몸짓은 삶의 외향, 의식의 바깥으로부터 자기를 폐쇄시켜 피할 수 없는 스스로의 내부와 치열한 씨름을 벌일 태세를 예비한다. 그것은 따라서 명징한 영혼의 부르짖음, 거의 운명적으로 치솟는 갈구, 그것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을 내포한다. 20대 초에 씌어진 그의 시들이 <겨울 노래>, <겨울날 단장>, <얼음의 비밀>, <눈>과 같은, 그리고 <겨울 밤 노래>와 같은 추위에 내맡긴 한밤을 노래했다는 것이 이와 깊이 관련을 맺는다. 얼음, 눈, 언 땅과 같은 이미지들은 어두운 밤의 한 정신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 추움과 어두움의 힘을 빌려 자신의 영혼을 채찍질하여 비극적인 정서를 극대화시킨다.

 

날 부르는 자여,

어지러운 꿈마다 희부연한 빛 속에서 만나는 자여,

나와 씨름할 때가 되었는가.

네 나를 꼭 이겨야겠거든 신호를 하여 다오.

눈물 담긴 얼굴을 보여 다오.

내 조용히 쓰러져 주마.

-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中

 

그가 <씨름>을 기다리며 벌써부터 <쓰러져 줄> 것을 선언하는 것은 그가 씨름을 포기하려 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와의 대결이 애초에 그의 패배를 예정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 보다 확실한 비극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떤 것에의 패배 자체가 아니라 예정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다는 역설에의 의지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운명적이다. 황동규의 많은 시가 고아(古雅)한 어미(語尾)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하고 있다는 것은 이 운명에의 각성과 사랑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운명이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이 아니라 <어지러운 꿈마다 희부연한 빛 속에서 만나는 자>, 환원하면 삶의 내부, 혹은 삶의 추상이다. 그것은 다분히 서구적인 정신이며 고독한 존재로서의 무고한 사랑, 막막한 부재에 대한 열망, 기대로밖에 남을 수 없는 기대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 <즐거운 편지> 中

 

막막히 한겨울을

바라보는 자여,

무모한 사랑이 섞여 있는

그런 노래를 우린 부르자.

- <겨울 노래> 中

 

나는 외롭지 않다. 너는 머리를 흔들어라.

기다린 건 언제나 오지 않았다. 친구여,

엎드린 얼굴을 들고 이제 흥미 없이 일생을 살아 버리는 자의 웃음을 보여 다오.

- <얼음의 비밀> 中

 

황동규의 고뇌는 다중(多重)의 중첩에 있다. 그는 사랑을 사랑하면서 사랑의 종말을 사랑하고 그 사랑들의 무모함을 다시 사랑한다. 그는 기다리면서 그 기다림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기다림들에 대한 처절한 열망을 몸으로 깨닫고 있다. 그는 동시에 많은 것들을 본다. 그는 절대를 보고 '잠깐 잠깐의 고요한 부재(<눈>)'을 보고 그 절대와 부재 사이에 쓰러져 있는 자신을, 그 쓰러짐의 치열한 아름다움을 본다. 그의 시에서 '보여준다', '바라본다'는 말이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은 이 같은 다중의 비극에 대한 견자(見者)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가 '그대', '너', '친구여'와 같은 이인칭을 즐겨 쓰는 것 역시 예컨대 쓰러진, 기다리는 자세의 또 다른 자기를 목격하기 때문이다.

쓰러진 자기 자세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또 하나의 자기가 비가(悲歌)로 노래할 때 그것은 강력한 소멸에의 의지를 수반하기 쉽다. 황동규는 '깃대에 달린 깃발의 소멸(<기도>)'을 볼 뿐 아니라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시월>)'는 따뜻한 유혹을 느끼며 마침내 '어디에 엎드려도 나를 밀어내지 않는(<얼음의 비밀>)' 언 땅에서 아늑한 친화를 얻는다. 그의 처녀 시집 <어떤 개인 날>의 도처에서 보이는 쓰러짐에의 열망은 그의 초기 정서에서 비극적인 자세의 성격을 분명히 해 주거니와 이 소멸에의 사랑은 적극적인 비극에로의 지향보다 자기 정서에의 폐쇄적인 몰입이란 함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닫힌 고뇌를 반복하여 개성적이라기보다 개인적인 내부 체험을 상습적인 이미지로 노래하게 만든다. 가령, 그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얼음', '언 땅'과 같은 것은 의식의 명징성을, '눈'은 의식의 각성을 환기시키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혹은 또 다른 이미지로의 발전에 폐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초기 시는 순수한 자아에 대한 열망과 닫힌 사랑을 노래하는 견고한 영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는 황동규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초기 시 중의 뒷부분부터 굳게 닫혔던 내부의 문을 열고 또 하나의 자기에게로 향하던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한다. '얼은 벽에 머리 부비고' 서 있던 그가 '얼마나 오랜 나날을 닫힌 문 안에 있었는가'를 깨닫고 '외로울 만치 두근대는 손을 내민(<겨울날 단장(斷章)>)' 것이다. 그는 얼어 쓰러진 어린 나무를 '뽑으러 나가'면서 '보여라, 살고 싶은 얼굴을. 보아라, 어지러운 꿈의 마지막을. 내려서라, 들판으로, 저 바람 받는 지평으로(<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라고 외친다.

황동규는 문 밖에 자기와 동질의 삶을 가진, 자기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인간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찾아라, …서로 닮은 곳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잘들 있었는가. …혹은 내가 팔을 벌렸던가(<겨울날 단장>)' 그리고 그는 <어떤 개인 날─미명(未明)>에서 '침몰 속에 우는 배의 침몰'을 보고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

 

는 것을 예감하며 '문 닫은 집들 사이에 내 나타난' <박명의 풍경> 속에서

 

내 진실로 생을 사랑했던가, 아닐 건가

 

라고 뼈 아픈 자기 각성을 가한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비가(悲歌)>는 황동규 자신의 비극적인 내부와 황막한 외부와의 조응을 예언시편처럼 드러낸다. 그것은 쓰러짐을 향락하던 아늑한 고뇌가 문을 열고 내다 볼 때 밖의 스산하고 구체적인 풍경에 또 다른 전율감에 휘말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사랑은 이미 인간이 아닌', '빚진 자의 집이요' '빈 들의 물소리'로 옮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자들은 반쯤 웃는 낯을 짓고

나이 든 자들은 작은 이름만을 탐내니

그들의 계집이 캄캄히 들에 나가

병차(兵車) 앞에 엎디는 자식을 낳도다.

- 비가 제1가

 

찢겨진 그물

색구(索具), 해초, 몇 마리 생선의 안착

뒤집어 논 목선 몇 척

생선 뼈 박힌 주막

- 비가 제11가

 

그가 바깥에서 직접 목격한 것은 허황한 세태와 그 희생된 사람의 산고, 그리고 가난하고 황폐한 생활 풍경이었다. 그는 이러한 풍경들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며 이 가운데 살아 있어야 할 '우리는 비유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님을(<비가 제11가>)' 안다. 이러한 각성은 '이제 죽은 자를 경애하지 말고/죽은 자의 죽음을 생각하라(<14행>)'는 처절하고 진지한 근원 탐색을 요구하며, '수월히 살기가 가장 수월쿠나/너무 수월하매/잠 못 드는 밤이 잦았더라', '해탈처럼 쉬운 건 없지/매일 밤 해탈에 탈피(脫皮)까지 하고/아침이면 한 바퀴 돌아/제 자리에 와 있더라(<네 개의 황혼>)'라고 자조 섞인 고통을 동반한다. 밤마다 끊임 없이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이며 생각해 보지만 그는 종내 자기 생각의 출발점에 되돌아가 있고 이 황량한 풍경의 근원을 밝히지 못한다. 이것은 그가 지극히 지적인 탐구와 고뇌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가장 수월한 질문이 가장 난해하고 때로는 불가능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며, 황동규는 결코 수월히 대답하지도, 손쉬운 '해탈에 탈피'도 거부한 것이다. 이후의 그의 현실에 대한 시적 체험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그의 강렬한, 보편적인 삶에 대한 탐구의 제2기 시작(詩作)에 들어서게 된다.

 

 

2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전문 인용한 <기항지 1>을 그의 초기 시들과 비교할 때 황동규의 체취는 여전히 진하게 나타나지만 그러나 현격한 거리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먼저 극복되는 것은 어휘의 선택과 문체의 변화다. 단순하게 상용되던 자연의 이미지가 극히 억제되고 '항구', '지전', '담배', '용골'과 같은 구체어(具體語)가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즐겨 쓰던 고아체(古雅體) 어미(語尾)가 지워지고 산문체로 안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이어 그의 전기 시들에 나타나는 급박한 리듬, 주관적인 심정의 토로로부터 침착하고 담담한 묘사로 시의 진행이 이루어진다. 이 같은 문체 혹은 기법의 변화가 시의 사상 혹은 내용의 변화와 보조를 같이 한다는 것은 췌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언어와 작법의 변모를 통해 내적 삶에 침몰하던 그의 개인적 시세계로부터 삶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현실로 방향을 바꾸어 그 현실의 현장에 들어간 것이다. 그의 이 같은 탐구의 방향 전환은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는, 무심한 듯한 첫 행에 잘 나타난다. 그는 이후에 자주 등장하는 '항구'의 소재를 오늘의 삶의 현장으로 전용하면서 '조용한 마음으로/배 있는 데로 내려'가는 시인과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 용골, 혹은 삶의 구체성과의 해후를 묘사한다.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 행에 문득 나타나는 '하늘의 새들'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다 위를 나는 새는 그 삶의 현장 위에서 자유롭고 아담하게 날지만, 우리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이상적인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상의 함정으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는 불구성의 고통을 그린 <신초사(新楚辭)>에서 '새가 걸어 나온다. 풀어 놓아도 날지 못한다'고 한탄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핍박에 신음할 때 <바다새들>은 '형틀처럼 날개 지닌 조그만 자들'로, 계엄 하의 공포스런 분위기를 주제로 한 <세 줌의 흙─서울 1972년 가을>에는 '풀 위에 명새가 죽어 매달리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새는 시인의 가장 활달하고 자유로운 이상의 상징인 것이다. 그가 <기항지 1>에서 확인한 것은 항구와 이 새와의 엄청난 거리다. 그리고 '걸어서' 여행하던 <남해>에서 그는 서울의 위장된 자유, 즉 '꿈처럼 울던 철사의 새들'보다 더 구체적이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나의 새는 망가졌음'을 확실하게 발견한다. 그 망가짐은 우리의 가난으로부터 약소 민족이란 자각에 이르기까지 더욱 더 깊고 넓어지며 그에 대한 고통은 바닷가에서나 외지를 여행했을 때나 더욱 강렬해지기만 한다.

 

하숙집 아주머니의 잠꼬대

「이젠 정말 아무 뜻도 없십니다,」

그네가 조심히 어시장에 가는 새벽녘의 행복도

…

수리 안 된 침묵, 사이사이의 수심가(愁心歌)

결사적인 행복이 없는 즐거움을,

- <겨울 항구에서> 中

 

쌀이 불쌍하다.

우리는 논에서 죽었다.

…

한 치 한 치가 어두움의 땅이다.

움직인다.

- <논 1> 中

 

오광대, 채색된 웃음.

수척한 사내들이 내려온다.

…

우리의 아이들은 경상도를 버릴까

전라도, 충청도, 아아 우리들을

버려! 복수(復讐)에 물두는 신(神)들처럼

왁자지껄 떠올라

수문에 이리저리 오줌을 갈기며

논의 금들을 떨며

지워!

- <논 3> 中

 

슬퍼하지만은 않았다

북한강 상류

사방에 눈 몰린 산

그 너머를 향한 야포의 행렬을

…

탄대 안의 무서운 조망

보고 울고 웃다 기합받았다.

- <들기러기> 中

 

철조망을 지닌 이웃을 떠나 보낸다

철조망에 널어 논 흰 빨래를,

- <브라질 행로>

 

병장 이하의 계급으로 돌아다녀 보라.

김해에서 화천까지

방한복 외피에 수통을 달고.

도처(到處) 철조망

개유(皆有) 검문소

- <태평가> 中

 

행복을 받아들일 여유마저 없는 항구의 하숙집 아주머니의 지친 생활과 허망한 삶, 금 간 논바닥에 억지 웃음이나마 지으며 오줌을 갈기는 농민들의 분노, 슬퍼하기보다 이제 해학적으로 바라보이는 철조망─ 이 가난과 분단의 대결이란 현실은 시인에게 참혹한 절망과, 그렇기 때문에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는 '난해한 사랑'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그렇다. 시인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해 풍자로도 무시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황동규는 <어떤 개인 날>에 내리던, 자기 개인 속으로만 받던 비극적인 그 눈이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이 땅의 '철조망에 널어 논 흰 빨래들', 즉 백의 민족 모두에게 내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은 우리가 약소 민족임을 거듭 환기시키며 그가 외국에 갔을 때 더욱 절실하게 인식된다. 영국의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소년들, 텅 비어 있는 공원의 모습이 '철원 앞뒤의 포대보다도/이북보다도 이남보다도/내 생명보다도/강해 보인다(<외지에서 1>)'는 것을 깨닫고 서양의 미술관을 구경하고는 '주어가 없는 그대와 나', '칼날처럼 벗은 우리 조국' 때문에 괴로워 방황하면서 '정신의 아픔에 한없이 깊은 침묵을 주는/젖은 칼을 머리에 쓰는(<낙법>)' 통절한 고통을 느낀다. 자유로이 공부를 하다 문득 나선 바닷가에서 '박물관에 가지 않고 우는 배만 큰 아이들/마음 속의 박물관/두 손으로 몰래 몰래 가릴 수 있을까(<북해>)'라고 치열한 수치감에 젖는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 <삼남에 내리는 눈> 中

 

황동규는 전봉준을 주제로 한 이 시에서 오늘의 약소 민족적 비극을 역사적으로 현재적으로 동시에 파악하고 있다. '왕 위의 큰 왕' 열강들의 횡포, 그들의 제 나라 드나들 듯 하는 군마를, 그 때문에 우리의 땅덩어리는 갈라지고 우리의 문은 망가져 버린다. 이런 상황은 전봉준의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렇다면 전봉준의 패배에 이은 망국처럼 이제 다시 우리에게 하나의 상태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눈 떠라 눈 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동편도 서편도 치닫는 바람

먼저 떠난 자 혼자 죽는 바라

동렬(同列)에 흐느낄 때 만나는 사람.

- <전봉준> 中

 

'참담한 시대'의 다가옴에 대한 충격적인 경고는 그 위기의 시대에 같은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추를 요구한다. 같은 줄에서 흐느끼는 사람으로 전봉준을 만난 황동규는 이순신도 만나고 이중섭도 보며 허균을 생각하고 '왕도(王道)'를 연구하고 <열하일기>를 적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그들과 만난 후 자신의 현실적인 무력감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이 있고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육체의 연약함이 있는 것이다. 안락한 가정의 평화에 매여 우리는 벌레처럼 왜소해지는 것이다.

 

뒤돌아 보면 아무도 없다.

삼각산보다 작은 평화를 위해

평화의 한 골목을 위해

소리내지 않고 울듯이

소리내지 않고 말하는

우리들.

한없이 작은 벌레들이 바람에 날리며 우는

울며 울며 남아 있는 이 가을

벌레의 눈에 차례로 비치는

우리들.

- <입술들>

 

 

3

 

최근의 황동규는 이제까지 그가 가졌던 것과 또 다른 괴로움을 괴로워하는 것 같다. 그가 <계엄령 속의 눈>으로부터 <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시편들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정치적 폭력에 대한 공포감과 여기에 정면으로 맞서 대결할 수 없는 무력감 사이에 치이는 갈등이다. 약소 민족에 대한 분노 어린 자각은 <세 줌의 흙> 속의 '서울 1972년 가을'과 같은 문제가 시사하듯이 '누군가 말 없이 도리깨질을 하고' 있는 구체적인 정치 상황으로 응축되고 <신초사>, <아이오와 일기>에 나타나던 소시민적 퇴화가 <수화(手話)>에서 '아래털을 밀고', '마누라를 세 번 조지고 다음 날 오후엔 또 오입을' 하는 냉소적인 자학으로 변한다. 이 즈음에 등장하는 그의 '탈'이라는 이미지는 사고(事故)란 뜻과 가면이란 뜻을 교묘하게 2중적으로 사용하면서 이 참담한 시대에 대한 2중의 해석을 만든다.

 

탈이로다, 탈이야

구정부터 탈을 쓰고

탈끼리 놀다

오광대 별신굿

큰 집 울 밖에서

정신 없이 뛰다

연말에 탈 벗으면

얼굴의 뒤꿈치도 보이지 않아

동네마다 기웃대며

자기 얼굴 찾다가

오기로 탈을 겹으로 쓰고

구설수 낀 주민들을 찾아 볼거나.

탈 면에 뜬 허한 웃음의 가장자리는

밤술의 공복으로 조심히 닦고.

- <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 탈> 中

 

말을 할 수 없으리만큼 병들고 눈에는 흙이 묻고 해도 '해 형상의 해'로 변하고 '꿈판도 깨'지는(<계엄령 속의 눈>), '구름에는 암호만 비치고 꽃들의 혀가 잘리고 살들은 불행해지고 곳곳에 세(細)그물이 쳐진(<초가(楚歌)>)', 이 상황에서 시인은 그 핍박이 무섭고 항복할지도 모르는 자신이 무서워지는 것이다.

 

내가 보아도 내가 무서워지는

몰려 다니며 거듭 밟히는

흙빛 눈이 될까 안 될까

- <계엄령 속의 눈> 中

 

나는 요새 무서워져요. 모든 것의 안만 보여요.

(중략) 황홀하게 무서워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처럼 떠 있는 것도 두렵잖아요.

- <초가(楚歌)> 中

 

이 전율하리만큼 '황홀한 무서움' 때문에 시인은 가면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한 남자가 되려고 결심'하고 '눈도 코도 입도 아조아조 비벼버리(<계엄령 속의 눈>)'기 때문에, 그러나 '이 악물고 울음을 참아도 얼굴이 분해되지 않(<세 줌의 흙─서울 1972년 가을>)'기 때문에 혹은 '말없이 도리깨질을' 하기 위해 모두가 탈을 쓴다. 이 탈들은 '마음 모두 빼앗기고 서로 엿보고 움직이(<세 줌의 흙─서울 1972년 가을>)'는, 그리고 겉으로는 '허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 탈을 벗어 던질 수 없는 절망감 때문에 공복에 술을 마시고 드디어는 그 수치감에 몰려 털을 깎고 오입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는 한 발 물러서며 낄낄대며 목을 조이는 시늉을(<수화>)' 하고 '여하튼 살아가기로' 마음 편히 작정해 보지만 '잃어버린' 양심의 '바늘은 마음 한 구석에 박혀/더듬을 때마다 찌르는(<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송장헤엄>)' 것이다.

질식할 듯한 이 수난 속에서 '살 어디에고 빈 틈 없이 새겨지는 이 저림들(<소리>)'로 정치적 좌절감에 빠져 있던 황동규는 <조그만 사랑 노래>와 <김수영 무덤>, <돌을 주제로 한 다섯 번의 흔들림> 등 최근작에 이르러 또 다시 새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그의 언어에는 그 동안 밀려 있던 서정성이 다시 부여되면서 내면적인 천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몇 편의 시에서 강조되는 것은 '흔들림'과 '더불어'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 다니는

몇 송이 눈.

- <조그만 사랑 노래> 中

 

빗소리 속에도 바람이 부는지

풀들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가지들이 흔들리고

이 악물고 그대가 흔들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풀들이 흔들린다.

- <김수영 무덤> 中

 

…먼저 입과 코가 지워지고 눈이 지워지고

기억의 가장자리 표정이 지워지고

드디어 '너'도 '나'도 지워진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 보라.

어느 샌가 '우리'만 남아,

아 항상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

- <돌을 주제로 한 다섯 번의 흔들림─항상 더불어>

 

이 '흔들림'은 상황의 시련을 겪고 죽음과 같은 공포를 체험한 뒤에도 아직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의식할 때 오는 정서 작용이다. 이미 죽어 버렸다면, '뿌리 뽑힌 것들은 흔들리지 않기(<김수영 무덤>)'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직 남은 말들은 하나씩 힘을 풀고/눈송이로 떨어진다'. 황동규에게서 '눈'은 초기로부터 이제까지 여전히, 의식의 꽃, 정화의 상징으로 작용해 오는데, 그 눈송이들이 시인의 '머리에도 어깨에도 손등에도 마음 위에도'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마멸되고 파괴되더라도 끝까지 함께 살 그의 동료들의 존재를 확인한다. '나', '너'와 같은 구체적인 개인은 닳아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연대는 항상 '더불어' 같이 해야 한다는 명제를 그는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쇼가 진행되던 <돌을 주제로 한 다섯 번의 흔들림─1974년 여름>의 '가설무대 연극'으로 우리가 깨어져 나가더라도 그 깨어짐을 통해 우리는 다시 소생할 절망적인 희망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 귀뚜라미의 귀가 보여

《 완전히 망가진 여름이지

《 그럼 넌?

《 다들 망가질 때 망가지지 않는 놈은 망가진 놈 뿐야.

 

 

4

 

우리는 초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로 정신의 궤적을 추적하며 황동규를 읽어 왔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현대 문학>에 추천을 받아 등장한 이후 18년 동안 그는 몇 차례의 변모를 통해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원숙으로 채찍질해 왔다. 초기의 고뇌에서 자기 삶의 내부로 비극의 비전을 비쳤던 그는 차츰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수행하면서 민족의 약소함과 황량한 우리 삶의 풍경을 묘사했고 이 참담한 상황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드는 힘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무력감을 표명했다. 아마 이러한 정신의 전개는 사랑의 변증법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사랑은 당초 자기 개인만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사랑은 이웃으로 번지고 드디어는 삼남(三南)─이 가냘픈 한국과 그 곳에 괴로이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로 확산되었다. 이 사랑을 확실히 하고 더 큰 사랑으로 만들기까지 그는 많은 고뇌와 절망, 안타까움과 자조를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극복했다.

그는 가장 확실한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변증을 시를 통해서 수행했고 언어로써 그것을 증명했다. 그의 섬세한 감각, 날카로운 감수성은 고도로 세련된 지성으로 정련된다. 그의 시가 격앙될지언정 흥분하지 않고 분노할지언정 아우성치지 않으며 시정(市井)의 밑바닥을 그릴 때에도 그의 말은 남루해지지 않는다. 그는 예컨대 '도처 철조망'과 '하늘의 눈송이'를 동시에 가지며, 현실과 이상, 서정과 사상을 지적 언어로 융합시키는 것이다. 그의 작시법은 초기의 <시월>부터 최근작 <수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에서 자유시와 산문시를 자유로이 구사하고 변주하는 특이한 힘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그가 내용과 정서, 리듬과 분위기의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자신을 극히 자유롭고 유동적으로 개방시키고 있음을 반증한다. 특히 동어 반복을 이용한 그의 운율 조작은, 가령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달밤>)', '좀 늦었을 뿐이다 좀 늦었을 뿐이다(<겨울날 단장>)', 와 같은 초기의 단순한 리듬 강조에서 '수월히 살기가 가장 수월쿠나/너무 수월하매(<네 개의 황혼>)', '탈이로다, 탈이야/구정부터 탈을 쓰고/탈끼리 놀다(<정감록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의 해학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우리가 습격하는 우리의 집들, 소리 소리 우리'처럼 유성음의 중첩을 통한 전의(戰義)에 부딪혔을 때 탁월한 성과를 얻는다. 그는 소리의 강조와 변화가 이미지ㅡ이 강조와 변화를, 따라서 의미의 강조와 변화를 수반하는 시적 질서를 획득한 극소수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시작(詩作) 생활 18년을 넘는 황동규가 이 같은 언어 실험을 동반하면서 그의 시 정신을 다시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는 현재의 그로서 극복할 일이다. <어떤 개인 날>의 한 고비를 넘고 <평균율> 시대의 한 고비를 넘고 하는 동안 그는 낮은 길을 잠시 잠시 걸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몇 년조차 그의 낮은 길 중 하나로 볼 수도 있으며, 그것을 다시 극복하여 새로운 시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어떻게 변증할 것인가, 당장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벌써부터 커다란 기대를 걸 수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60년대 이후 한국 시는 그의 성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며 이제부터는 그의 시가 한국 시의 성장을 받아들이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하여 한국 시와 '항상 더불어'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