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8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 -1- 쇼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

 

 

 

"평안하세요 (ごきげんよう)"
"평안하세요 (ごきげんよう)"

 

상쾌한 아침인사가, 청명한 하늘에 메아리친다.
마리아님의 정원에 모여드는 소녀들은 오늘도 천사처럼 티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높다란 문을 빠져나간다. 더러움이 스치지 않은 몸과 마음을 감싸는 짙은 색 교복. 스커트 주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얀 세일러 칼라가 펄럭이지 않도록, 천천히 걷는 것이 이 곳에서의 몸가짐. 물론, 지각 빠듯한 시간에 뛰어가는 경박한 학생이 있을 리도 없다.
사립 리리안 여학원 (私立リリアン女學園).
메이지(明治) 34년[1901년]에 창립한 이 학원은, 원래 귀족의 영애들을 위해 설립된 전통있는 카톨릭계 아가씨 학교이다. 도쿄도 내. 무사시노의 옛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녹음이 우거진 이 지역에서, 신의 가호를 받으며 유치부에서 대학까지 일괄교육을 받을 수 있는 소녀들의 정원.
시대는 변해, 원호가 메이지에서 3번이나 바뀌어 헤이세이(平成)가 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18년의 세월을 온실 속에서 자란 순종배양 아가씨가 포장돼 출하되는 시스템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그야말로 귀중한 학교이다.

그런 평범한 아가씨 중 한 명이었던 그녀─후쿠자와 유미가 어느 날 갑자기 고등부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존재가 된 지도 벌써 1년. 돌이켜 보면 요 1년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 모든 시작은 마리아상 앞에서의 만남. 그 때 사치코님이 비뚤어진 타이를 바로매어 주시면서─윽 한가하게 추억얘기나 늘어놓고 있을 때가 아냐.
이런저런 문제를 떠안고 있건 말건, 그리고 그 문제들이 해결되었건 못되었건 상관없이 학원제는 찾아온다. 변명해 본들 하나님이 움직이는 태양을 멈춰 주실 리도 없으니, 달력 앞에서 한숨쉬고 있을 틈이 있으면 손을 움직여! 머리를 굴려!

아아, 바쁘다 바빠.

 

 

 

<<쇼크(제곱)>>

 

 

1.

 

그 일은 이 한 마디에서 비롯되었다.
"아참 그렇지. 학원제 연극말인데"
시간을 잠시 거슬러 올라, 수학여행 가기 전날. 올해 학원제에서 공연할 산백합회 주최 연극 제목이 최초로 1, 2학년들에게 공개되었다. 체육제도 무사히 끝낸 어느 날 점심시간, 한창 장미관에서 점심을 먹으며 간단한 회의를 하던 도중,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인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이 갑자기 일어나서 말했다. 아참, 그렇지. 학원제 연극말인데, 라고. 별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나온 말이라 그 「연극」이 자신들이 할 연극이란 걸 쇠르(동생)인 후쿠자와 유미도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왜냐니, 그야 언니의 말투가 마치 저어기 모클럽의 화제라도 꺼내는 듯한 분위기였으니까 그렇지. 
"올해는「토리카에바야 이야기(とりかえばや物語)」를 할거야. 이상"
그리고 착석.
"토리카에바야...."
"....이야기"
"아!"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순서대로 설명하자면.
우선 처음의「토리카에바야...」가 로사 페티다 앙 부통(황장미 봉오리)인 시마즈 요시노양. 얼핏 친구의 말을 잇는 듯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약간 얼이 빠져 있는「....이야기」가 유미. 그리고 마지막「아!」는 한 사람인 것 같지만 실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딱 겹친 것. 자매경력 갓 3개월의 따끈따끈한 하모니는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인 토도 시마코양과 동생 니죠 노리코짱의 이중주. 점심시간이기도 해서 장미관에 있던 사람들은 장미패밀리로 통하는 정식 멤버뿐이다. 1학년 동백나무반 도우미 두 사람은 이곳에 없다.─ 따라서 홍, 백, 황이 각각 2명씩. 합계 6명.
"「아!」라니?"
백장미자매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은 로사 페티다(황장미님)인 하세쿠라 레이님.
"요시노나 유미짱과는 반응이 다른데. 백장미자매양"
앞의 두 대사는 단순히 사치코님이 발표한 타이틀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지만, 마지막 「아!」는 누가 들어도 뭔가 짚이는 게 있구나 싶은 탄성이다. 자, 문제 나갑니다. 「토리카에바야 이야기」라고 하면?
"아!"
뒤늦게 유미도 외쳤다. 그러자 회의를 위해 조금 떨어져 앉은 사치코님이 「반응이 늦어」라고 말하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황장미 자매 입장에선 상황파악이 잘 안되는 모양이다.
"이거예요"
시마코양이 자기 손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도서관의 책?"
레이님이 손을 뻗기도 전에 요시노양이 먼저 집어들고 차르르 페이지를 넘겼다.
"아아, 그 책이구나"
"요시노도 알고 있었어?"
"유미양이 반납한 책을 노리코짱이 빌리는 걸 봤거든. 아아, 역시나. 시마코양도 나중에 이 책을 빌렸구나"
그 책은 일본 고전문학을 집대성한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여러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었다.「토리카에바야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아하. 그래서 「아!」였군"
레이님은 요시노양이 넘겨준 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유미짱은 어떻게 이 책을?"
"언니가 읽어 보라고 하셔서요. 이걸 연극으로 하실 생각이셨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바보네. 말해 줄 리가 없잖니"
"에, 왜요?"
"말해줬다간 반대할 거 아냐? 그래서 레이랑 상의해서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거야"
"어째서 저희들이 반대한다는 거죠?"
그야 「토리카에바야 이야기」는 고전문학이긴 해도, 남녀 연애스토리가 도처에 깔려 있는데다 개중에는 고등학생에겐 좀 자극적인 묘사같은 것도 있긴 하지. 하지만 그런 이유로 반대한다면 유미보다 오히려 사치코님이 먼저 하셨을 텐데.
"... 그게 아니지"
요시노양이 나직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니?"
"아까 유미양이 한 말에서,「희들」을 빼고 다시 해보라구"
영문도 모른채 유미는 요시노양의 말대로 해봤다.
"왜 저... 제가 반대해야 하죠...? 에? 뭐야, 나만?"
아까까지만 해도 같이 「우물 안」동지였던 멤버들, 즉 요시노양을 필두로 시마코양, 노리코짱이 이미 상황을 파악한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시했다. 하지만 아직도 파악이 안 돼,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킨 채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유미. 그런 친구를 딱하게 여겼는지 요시노양이 힌트를 줬다.
"유미양, 이 책 읽었지?"
"읽었지"
"그럼 연상퀴즈. 「모모타로(桃太郞)」 하면?"
"도, 도깨비 퇴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플레이보이 일대기"
"어라, 그걸 일대기라고 해야 하나... 뭐 아무튼 간에. 「타케토리 이야기(竹取物語)」?"
"아, 아름다운 우주인, 달에 돌아가다 편?"
대체 뭐하자는 건데. 이유도 모르고 대답하는 동안, 드디어 본론에 돌입했다.
"그럼 「토리카에바야 이야기」는?"
"쏙 빼닮은 남매가 역할을 서로 바꿔서─ 어? 에엑!?"
그제서야 둔한 유미도 겨우 깨달았다.
"서, 설마"
"설마 라고 생각하는 사람, 여기서 유미양 정도밖에 없다구"
유미를 제외한「The 우물 안's」멤버 세 사람은 참으로 딱하다는 눈초리로 유미를 보고 있었다.
"안됐지만 결정났으니까"
웃음을 머금은 요시노양이 유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하긴 모처럼 유키씨가 도와주러 오는 걸"
그런 식으로 스리슬쩍 넘어가지 말아줘, 도와달라구 제발, 시마코양.
"과연 로사 키넨시스. 기발한 착상인데요"
노리코짱마저. 그러고 보니 다들 일단은 동정하면서도, 자신이 희생양이 되지 않았다는 행운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얼굴이야.
"바꿔주고는 싶지만 공교롭게도 우리들한테는 유키군처럼 쏙 빼닮은 동생이 없는 걸 어쩌라구"
뭔가 이유를 갖다붙여서 절대로 안바꿔줄 속셈이다. 요시노양의 귀여운 얼굴이 지금은 악마처럼도 보인다.
"언니이... "
이판사판. 유미는 요시노양에게 지지 않을 만큼 깜찍한 표정을 애써 지어보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렇게 결정됐으니까. 각오를 굳히렴, 유미"
멋지게 퇴짜. 애정의 깊이나 많고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단순히 사치코님은 레이님과는 달랐을 뿐이라는 얘기.
"대답은?"
"... 네"
이렇게 해서 작년엔 접전 끝에 무승부로 모면할 수 있었던 주인공의 자리를, 올해는 단숨에 꿰어차고 말았다.
─후쿠자와 유미, 17세의 가을.

 

 

2.

 

"왜 하필 나람?"
6교시 수업이 끝난 뒤, 에고 오늘 수업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며 책상 위에 엎어진 자신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은, 맘 속에서 무한반복 중인 의문이었다. 사치코님의 폭탄발표 쇼크로 수학이나 정치경제처럼 졸린 시간에도 눈이 말똥말똥했다. 수업내용이야 거의 머릿속에 안들어 왔지만.
"왜 하필 나람, 이라니, 「토리카에바야 이야기」 말야?"
무심코 튀어나온 유미의 혼잣말에 반응한 요시노양이 옆에 와 있었다.
"응, 그렇지 뭐어"
그러자 요시노양은 「잠깐 나좀 봐」라고 신호하듯 고개를 복도쪽으로 끄덕끄덕했다. HR까지는 약간 시간이 남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교실 밖으로 나오니 어째선지 시마코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상은 1년쯤 전부터 해온 것 같다고 아까 레이짱이 그러더라. 물론 유키군의 존재를 안 게 올해 정월이니까 사치코님도 처음부터 「토리카에바야」를 할 생각은 아니었을 거야"
아까라니, 대체 언제? 그런 생각하면서 유미는 요시노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쉬는 시간, 유미가 쇼크로 얼이 나가 있던 사이에 요시노양은 여기저기 들쑤시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소집은 방과 후에 있을 모임에 대비한 정보교환의 장, 인 셈일까.
"그러고 보니 나도 생각난 게 있어"
시마코양이 말했다. 뭔데 뭔데 하며 좌우에서 다가서는 2학년 소나무반의 두 사람.
"작년 학원제 때 에리코님이 말야"
"에리코님?"
요시노양이 정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양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걸 보고 놀란 시마코양.
"가, 갑자기 왜 그래?"
"아, 지금 요시노양은 에리코님이란 이름에 과민반응하게 되어 있거든. 신경쓰지 말고 얘기 계속해, 시마코양"
유미가 요시노양 대신에 설명했다. 순서대로 전부 말했다간 꽤나 시간 잡아먹을테니 대폭 압축해서 말했지만, 결국 이런 얘기다.
요시노양은 현재 졸업한 선대 로사 페티다인 토리이 에리코님에게 끊임없이 압박받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 그, 그러니? 아, 그래서, 뭐였더라, 그렇지 에리코님이 작년에, 내년에는 일본 이야기로 하는 게 어떠냐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애"
"아, 어쩐지 나도 들은 것 같다. 확실히 내년엔 「카구야히메[타케토리 이야기의 주인공]」로 해, 그랬지"
유미도 기억해 냈다. 사치코님의 길고 숱이 많은 찰랑찰랑 스트레이트 헤어는 말아올리기 힘드니까 그걸 비꼬아 말했던 것이다.
"힌트는 있었단 거네"
"그럼 「카구야히메」 하면 되잖아. 왜 「토리카에바야」냐구? 「타케토리 이야기」면 다들 잘 아는 얘기니까 그게 더 낫지"
"바보야. 사치코님이 「카구야히메」를 뭐하러 하겠어?"
요시노양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땜에?"
"노리코짱, 이 불쌍한 유미님께 가르쳐 드리련"
돌아보니 뒤늦게 온 노리코짱이 서 있었다.
"로사 키넨시스는 올해 자신이 주인공을 맡지 않으려는 심산이겠죠. 만약 「카구야히메」를 하면 용모로 보나 뭐로 보나 로사 키넨시스를 주인공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커요. 그런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절대로 주인공이 되지 못할 이야기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그게"
"「토리카에바야 이야기」"
"항의하고 올래"
유미는 복도를 쿵쿵 걸어가기 시작했다. 목표는 3학년 소나무반. 언니네 반. 노리코짱의 추리가 사실이라면 자기가 주인공 안할려고 동생을 제물로 삼은 거잖아.
"관두시지"
요시노양이 손목을 잡았다.
"말로 사치코님한테 이길려고?"
"으...."
확실히. 「그게 왜 잘못됐다는 거니?」 라는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릴지 몰라.
"그, 그럼 말야, 「토리카에바야」의 무거운 테마, 그러니까 주인공한테 임신, 출산같은 일이 벌어지는 스토리는 고등학생 연극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 볼래"
"그런 건 대부분 짤라 버리고 누나랑 동생이 역할을 바꿔서 일어나는 해프닝이라든가,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묻는 연극으로 하겠다고 사치코님이 말씀하셨잖아. 똑똑히 들었지?"
듣고 말고. 하지만 역시 저항하고 싶어.
"그럼... 시대물은 세트도 의상도 고생이야"
"수예부도 미술부도 기합 잔뜩 들어가 있다던데. 의뢰하기도 전에 그쪽에서 먼저 일이 없는지 접근해 왔다고 그러더라"
상세한 내용은 알려주지 않은 채 발주한 의상, 소도구, 세트를 묵묵히 제작해 주고 있다나 보다. 타이틀은 몰라도 헤이안시대의 이야기가 될 거란 건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 으.. 그러니까.. "
"그런 걸 두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거야"
"우...."
"백보 양보해서「토리카에바야」를 공연못하게 됐다고 쳐. 다른 연극으로 바꾼다 해도 주인공은 유미양이야"
"어째서?"
유미가 되묻자,
"「왕자와 거지」"
요시노양의 말을 받아 시마코양도 한 마디.
"「쌍둥이 롯떼」[에리히 케스트너. 1949. 따로 떨어져 사는 쌍동이 루이제와 롯떼가 부모의 화해를 위해 바꿔서 생활한다는 이야기. 애니로도 제작]"
"「11월의 김나지움」[하기오 모토. 1971. 소녀코믹. "토마의 심장"의 원형이 된 작품. 기숙학교에 전학온 소년과,
그와 꼭 닮은 학원 아이돌 존재와 같은 소년의 스쳐지나가는 이야기] "
뒤를 이어 노리코짱.
"쏙 빼닮은 두 사람이 역할을 바꾸는 얘기는 동서고금 얼마든지 있다구. 그 무대를 헤이안시대로 옮겨서 한 건 낙찰!"
한 건 낙찰이라니 요시노양. 어이어이, HR을 앞둔 짧은 시간을 이용해 모아놓고서 기껏 한다는 얘기가 「한 건 낙찰」이야?
"아, 이만 가봐야겠네요"
노리코짱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정말이네. 유미양, 우리들도 되도록이면 서포트해 줄테니까. 그럼"
시마코양도 2학년 등나무반 담임선생님이 복도 저 편에 모습을 드러내자 자리를 떠났다.
"........"
주인공 탈출을 위해 함께 나서주는가 했더니, 결국 이 모임은 유미를「단념시키기」가 주목적이었던 게 아닐까. 순간 왠지모를 탈력감이 엄습해왔다. 남은 두 사람은 선생님이 아직 오지 않은데다 다시 교실로 들어갈 뚜렷한 계기도 없어서 그대로 복도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런데 유미양. 곧 있으면 사치코님과 쇠르(자매)가 된 지 1주년이지? 무슨 약속이라도 잡았어?"
요시노양의 머릿속에선 이미「토리카에바야 이야기」에 마침표가 찍혔나 보다.
"특별히 없는데"
유미는 고개를 저었다. 거꾸로 요시노양네는 뭔가 했었냐고 물어봤더니 「한 것 같기도 하고 안한 것 같기도 하고. 아냐, 역시 그건 이벤트였는 지도 몰라」라며 알쏭달쏭한 대답. 1학년 신입생들이 입학한 그 날, 레이님은 집에 돌아와서 직접 만든 케익을 들고 시마즈댁을 방문, 요시노양 방에 앉아 둘이서 쇼트케익 하나를 자르지도 않고 포크로 푹푹 찍어먹었단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때 레이짱은 결혼기념일에 꽃을 사들고 온 남편같은 심정이었을 거야"
목에 걸린 로사리오의 줄을 만지작거리며 요시노양은 웃었다. 하지만 그 땐 레이님의 기분도 모르고「어라, 웬 케익?」이란 식으로 대했단다. 물론 케익은 맛있게 먹었다지만.
"우리들 경우는 말야, 쭉 이웃사촌이었으니까 굳이 로사리오를 주고받지 않아도 쇠르(자매)가 되리라 마음먹고 있었고, 그러니 딱히 기념일이라 할 만한 날도.... 이해되지?"
결혼기념일이라고 꽃을 사들고 왔더니 정작 아내는 까맣게 잊고 평소랑 다름없는 저녁식사를 차려놨더라는 딱한 남편. 그것이 레이님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먼저 잠든 바람에 자신이 반찬을 데워서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했던 건 아니잖아. 사이좋게 케익을 먹었으니까.
"하지만 말야, 유미양네 경우는 우리랑은 분명히 다르잖아"
"응, 그야 그렇지"
"몇월 몇일이라기 보다, 학원제 밤이 딱 1년이란 느낌이 들지?"
".... 응, 그야 뭐"
"두 사람에겐 특별한 날인 걸. 사치코님한테 아앙 졸라서 멋진 기념일을 보내라구"
남의 일이라고 간단히 말한다니까. 그 아앙~ 자체가 유미한테는 하이레벨인데 말야. 설령 그걸 클리어했다 치더라도 그 다음엔 뭘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고.
멋진 기념일이란 과연 뭘까? 둘이서 뭘 해야지, 잊지 못할 1주년 기념행사가 되는 걸까?
"아─, 여기 있었네. 요시노양, 유미양"
학원제 실행위원이 교실에서 얼굴을 내밀고는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HR하기 전에 가게 담당 시간표 짤 거니까 들어와 줄래?"
"아, 응"
대답하고선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떼었다.
"휴우, 이런이런"
학원제 준비는 반에서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2학년 소나무반의 올해 기획물은 축제가게. 시마코양네 반인 2학년 등나무반과의 합동기획이다.

 

 

3.

 

또 한 사람의 주인공 역시 얘길 전해 들었을 때「서, 설마」 라며  유미와 똑같이 중얼거렸다.
"그 설마야"
음, 과연. 나도 몇 시간 전에는 저런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유미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뭐야 그 태도. 같은 입장에 처한 것치고는 여유가 넘치잖아"
여유의 부스러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유키는 유미를 비난하듯 쳐다봤다. 그렇구나, 그런 식으로 보이는 거다.
"나도 뭐 처음 들었을 때는 유키랑 똑같은 반응이긴 했어"
집에 돌아오니 쇼크를 받은 그 시점에서 시간도 장소도 조금 거리를 두게 되어 다소나마 진정이 되었을 뿐이다. 충격이란 건 의외로 지속성이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후에 따라온 것이 체념이라는 이름의 태도 돌변. 그래도 이 얘기를 끄집어낸 시간대가 나빴던 건 아닐까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할머니들 드시는 소화제도 아닌데 식후 30분이란 것도 약간 그래. 시간을 좀더 둘 걸 그랬어. 살짝 반성. 지나친 쇼크로 유키의 위장이 오늘밤 반찬이던 일본식 햄버거를 소화시키는 걸 잊어버렸다간 큰일이니까. 하지만 식사 후 뒷정리를 돕고나서 2층으로 올라갔더니 유키는 벌써 목욕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유키가 목욕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간 분명 엄마가 「유미도 목욕해야지」 그럴테고, 그 말대로 했다간 곧 유키가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 시작할 테니 아마 느긋하게 얘기하긴 그를 테고, 그 다음에는 유미가 매주 시청하는 버라이어티 방송을 봐야 하고. 따라서 지금 붙잡아놓지 않으면 오늘 안에 유키한테 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언니는 오늘 안에 유키한테 얘길 해두도록 유미한테 지시했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리리안의 2학년들은 수학여행 가니까, 그 전에 하나데라에 대본을 넘겨줘서 약 1주일 동안 대본을 훑어보도록 할 계획인 것이다. 이 시기까지 발표를 미룬 건 아마도 주인공 두 사람(후쿠자와 남매)이 불만을 늘어놓을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겠지. 유미는 이탈리아에 가버리면 굳이 국제전화를 써가면서까지 해서 항의하러 들진 않을 테고, 전달자 역할인 유미가 없으면 유키가 멋대로 행동할 일은 없을 테니까. ─ 꽤 머릴 굴렸어.
"사치코씨한테 한 방 먹었구만"
유키는 넘겨받은 대본을 가볍게 두드리며「이거면 나랑 유미말고는 할 사람이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준비해 둔 타올과 파자마를 침대 위에 두고 책상 앞 의자에 몸을 던지며 그대로 빙글 한 바퀴 돌았다.
"흐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유키는「토리카에바야 이야기」의 내용을 알고 있구나"
유미는 유키의 침대 위에 굴러다니는 쿠션을 집어들고는 바닥에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았다. 
"읽어본 적은 없어. 하지만「겐지 이야기」를 전권 독파 안해도 대강의 내용은 알잖아. 그런 셈이지"
또 등장했네요 「겐지 이야기」. 이런 상황에 인용하기 쉬워서? 아니면 「토리카에바야 이야기」랑 비슷한 분위기라 예로 들기 편해서? 아냐, 단순히 요시노양과 유키의 사고회로가 닮은 것 뿐일지도 몰라.
"난「겐지 이야기」가 플레이보이 일대기라는 정도 밖에 몰라. 고문 시간때「와카무라사키」[若紫. 겐지 이야기 중 5편]는 배웠지만"
새끼참새를 이누키가 놓치고 말았구나(雀の子を犬君が逃がしつる)라는 문장 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분명 「이누키(犬君)는 사람 이름이지 개가 아닙니다」라고 선생님이 역설하셨지.
"일대기? 꼭 그렇게 볼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카오루[겐지 이야기 후반 10편의 주인공]가 있으니까"
"카오루?"
그러고보니 「일대기」란 발언에 요시노양도 이의를 제기했었지.
"겐지 이야기는 마지막에 카오루를 중심으로 얘기가 진행되니까. 우지쥬죠(宇治十帖)라고 들은 적 없어?"
우지쥬죠[宇治十帖. 겐지 이야기의 후반 10편. 겐지와 주요 주인공들이 다 죽은 뒤, 그 자손과 주변인물들의 이야기].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카오루는 누군데?"
"히카루 겐지 아들. 아니지. .... 아내가 바람피워서 생긴 애라고 할까... 뭐 여러가지 사정이 있지"
유키가 우물거린다. 남매간에 그런 생생한 이야기를 하는 게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유미도 그리 나서서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읽은 적 없다는 것치고는 꽤나 자세히 안다 너"
"그러고 보니 그렇네"
유키는 의자에 기댄 채 「으음」하며 기지개라도 펴는 양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뭔가 생각났는지 원래 자세로 돌아와서는 씁쓸히 웃었다.
"아마 원인은  카시와기 선배일거야"
"카시와기씨... ?"
"「겐지 이야기」에 카시와기[겐지의 정실부인과의 관계로 자멸하는 인물]란 인물이 나오지? 그래서 애들 중 몇 명이 「빛나는 그대」[光の君. 히카루노키미.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이름에서 따온 별명]라고 불렀다구. 겐지 마니아 녀석들이 학생회같은 곳에 모여서 말야. 분명 그러다 보니까 「겐지 이야기」에 친숙해진 거야."
"그래도 그렇지 「빛나는 그대」라니"
입밖에 내는 것조차 챙피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네이밍. 하지만 딱 들어맞는 이미지. 카시와기씨란 사람은 핸섬하고 매너 좋고, 도련님인데다 머리도 좋고. 아아, 그렇지 참. 그래도「여색」의 「여」는 「남」으로 바꾸는 편이 좋을 지도 몰라.
"아아~"
유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뭘 당하든 작년 카시와기 선배에 비하면 편할 거라 생각했건만"
"작년 말이지"
하나데라 학원 고등부와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 학생회는 매년 학원제 때 서로 도와주는 것이 관례로 정착돼 있다. 작년 리리안 학원제에서는 하나데라 학생회장이었던 카시와기씨가 연극 신데렐라에서 왕자님 역을 맡았었고.
"출연도 적었고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도 않던데?"
"그건 카시와기 선배니까 그렇지. 작년 이맘때쯤 그 사람이 뭘 하는지 들었을 때 우리들 진짜로 떨었다니까"
"왜?"
"사교댄스같은 걸 어떻게 추냐!?"
"아아, 하긴 그렇다"
실제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 무리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남들 앞에서, 그것도 여학교 체육관 무대 위에서 그런 꼴을 당한다는 건 최악까진 안가더라도 견디기 힘들겠지. 그걸 카시와기씨는 아무렇지 않게 해치웠으니, 그 점에 관해선 남자로서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다. 보고 배우고 싶지는 않다지만 말이다. ...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유키는 신데렐라의 왕자님보단 편할 거라고 지레짐작한 거네"
"주인공으로 더블캐스팅할 줄 누가 알았겠어. 이웃 학교 도우미를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뭐, 일리는 있다. 그래도 말야, 유키라면 댄스보다 대사 외우는 편이 낫지 않아?"
"정도에 따라서지. 사치코씨는 내가 연기력 없다는 걸 알텐데"
맞아맞아. 전에 유키가「여어, 사치코씨」이 한 마디를 못해서 오들오들 떨었던 걸 사치코님은 바로 곁에서 보셨을 텐데 말야.
"얼굴로 뽑힌 거니까 어쩔 수 없지"
"태어날 때 엄마 얼굴을 택할 걸 그랬어"
후쿠자와 남매는 두 사람 나란히 아빠닮은 너구리 얼굴.
"원하는 쪽을 택할 수 있다면야 나도 엄마 얼굴 택했을 걸"
"그럼 결국 그대로잖아"
얼굴 생김새는 지금과 다를지 모르지만, 결국은 또 다시 쏙 빼닮은 두 사람이「토리카에바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뽑히는 셈이니까.
"포기하고 대사나 외울까"
"그래야겠네"
얼굴이 어떻다느니 하는 얘길 해본 들 입만 아플 뿐이다.
"아무튼 목욕하고 올게. 그래서 이만한 일로 꺾일 것 같은 정신에 기합넣고 올테니까"
유키는 가볍게 자신의 양 볼을 찰싹 때리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 다녀와. 미안해, 큰 역을 맡겨서. 하지만 다행이야"
계단까지 유키를 배웅한 유미가 자기 방 문을 열려던 차에, 유키가 3번째 칸쯤 계단을 내려가서는 뒤돌아봤다.
"유미는 여자니까 이해못하는 지도 모르겠는데"
"응?"
"마음이 무거운 건, 주인공이라든가 대사가 많아서라든가 그래서가 아냐"
뭐, 뭐야. 중대한 고백이라도 해버릴 듯한 분위기구나 소년. 유미는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토리카에바야」를 하면 말야. 나, 여장해야 하잖아"
"에?"
"그거, 상당히 괴로워"
그렇게 말한 유키는 돌아서서 바이바이 손을 흔들고는 주위를 잔뜩 찌푸린 공기로 물들이며 1층으로 내려갔다.
"... 그렇게, 괴로워?"
혼자 남은 유미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무대에서 사교댄스와 무대에서 여장. 남자로서 어느 쪽이 더 창피할까?
후쿠자와 유키 16세.
그의 마음 속 천칭은 지금, 종잡을 수 없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리 간단히 멈출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