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2권 어린 양들의 휴가 -3- 책갈피 잎의 여름인사

- 책갈피잎의 여름인사(押し葉の暑中見舞い) -

 

 

1.

 

이제 곧 도착할거라는 사치코님의 목소리에, 유미는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창밖의 풍경이 완연히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또 자버렸다는 걸 알았다. 시계를 보니 10시 다되어간다. 순조롭게 간다면 2시간 안걸린다지만, 여름 시즌이고 휴식 포함해서 4시간이면 그럭저럭이라고 봐야 한단다. 무슨 나무인지 모르지만, 빽빽이 들어선 키 큰 나무들이 길의 좌우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한여름의 햇볕을 차단하고 있다. 울창하다고까지는 못하지만. 가지랑 잎의 그림자가 자연천정을 만들어 레이스처럼 도로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나무에 둘러싸인 돌층계와 이끼낀 오래된 돌담은 그야말로 가이드북에 실린 풍경사진 그대로였다. 관광객일까, 수풀 안에서 교대로 사진찍는 젊은 여성그룹과 손을 잡고 산책하는 커플의 모습도 하나둘씩 볼 수 있었다. 
"이 부근은 옛날부터 별장지야."
사치코님은 자랑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으로 볼 때, 이 근방을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 뭐 좋고싫은게 확실한 사치코님이 매년 방문할 정도니까 상당히 좋아하시는거겠지. 그런 곳에 초대받은 자신은 얼마나 행운아인가. 유미는 기쁘게 생각했다.

여긴 언니가 좋아하는 세계.
일주간의 일정 속에서, 하나라도 더 많이 언니가 좋아하는 것에 접하고 싶다. 그건 언니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테니까.
유미가 먼저 잠든 덕택에 거리낌없이 수면을 취해서인지, 사치코님은 작게 하품을 하고선 무릎 덮개를 정리했다.
"넌 멀미약을 안먹어도 잘 자더구나. 그리 걱정할 것도 없었네."
"하아."
약을 거절했을 때 사치코님이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건, 아무래도 유미를 그냥 내버려둔채 자신만 잠든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나보다. 사치코님 의도대로는 안됐지만, 결과적으로 다 잘된 셈이겠지. 수면부족의 유미는 약에 의지하지 않고 건강하게 수면을 취했으니까.

작은 길로 접어들어, 완만한 비탈길을 아주 잠깐 오르니, 드디어 목적지 건물이 나타났다. 차가 부드럽게 멈춘다.
"여기야."
"...와아!"
그건 마치 동화나라에 들어선 듯한 풍경이었다. 숲속에는 하얀 벽에 갈색 삼각지붕이 얹힌 집이 있었다. 오가사와라 가문 소유의 별장이니만큼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여기라면 OK.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다, 마치 기숙학교같은 분위기였다.
"낡고 작아서 놀랬지?"
"아뇨, 그럴리가요."
확실히 디자인은 오래됐을지 모르지만, 낡은 건 아니었다. 벽에는 금도 없었고, 현관문에는 부서진 곳을 수리한 흔적이 보였다. 제대로 손을 봐서, 소중히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벽의 일부에는 담쟁이 덩굴도 뻗어 있었고, 현관옆 돌에는 이끼가 벨벳처럼 뒤덮여 있어서, 도리어 골동품같은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작다고는 하지만, 오가사와라 본가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지, 건물만 보자면 유미네 집과 비슷비슷, 아니 그보다 좀 더 클 정도다.
차에서 내리자 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초록이 많은 탓일까, 고도가 높은 탓일까, 기온은 도쿄에 비해 확실히 낮았다. 오히려 시원할 정도다. 과연 피서지라 불릴만한 지방. 이미지뿐만 아니라, 정말 뜨거운 여름을 피할 수 있는 장소답다.
"문이나 담이 없네요."
유미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네. 구색갖출 정도로 돌을 쌓아두긴 했지만, 사유지라는 표시같은 걸까.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가능한한 자연 속에서 지내고 싶다는 희망이셔서 높은 담같은 건 두르지 않으셨어. 여기가 우리 별장이란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다, 그나마 아는 사람들도 옛날부터 교류해 온 이 근방 사람들이라 안심할 수 있고말야. 설사 도둑이 들어온다 해도 귀중품이나 돈은 놔두지 않으니까 훔쳐갈 것도 없지."
사치코님은 즐거운 듯 웃으셨다. 허술한 경비라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생활을 동경하고 계신 건지도 모르겠다.

운전수 아저씨가 크랙션을 울리자, 집안에서 초로의 남녀 한쌍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오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사치코님을 둘러싼 사람들이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소중한 아가씨와 1년만의 대면. 당연히 유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키요도 겐스케도 건강해보여 다행이야."
"말씀 감사합니다. 자자, 피곤하실텐데 어서 안으로 들어가 편히 쉬십시오."
그래 하며 끄덕인 뒤, 사치코님은 돌아서서 유미를 앞에 세웠다.
"동생 유미야, 일주일동안 잘 부탁해."
갑작스런 소개에 유미는 당황하며 머리를 숙였다.
"후쿠자와 유미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계속해서 사치코님은 초로의 남녀 앞에 손바닥을 위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사와무라씨 부부야."
"어서 오십시오. 유미님. 키요라고 합니다. 자기 집이려니 생각하시고, 편히 지내십시오."
"겐스케라고 불러주십시오. 여기 생활은 아직 익숙치 않으실테니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분부내려 주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어쩐지 친해지기 쉬운 사람들이라 안심했다. 키요씨에 겐스케씨. 키요씨에 겐스케씨. 신세질 분들이니까 확실하게 인풋해둬야지. 그건 그렇고 두 사람 다, 건물에 필적할만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름.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트렁크 속에 든 짐을 현관까지 다 옮긴 운전수 아저씨가 정중히 말했다.
"어머나, 벌써 가시게요. 마츠이씨? 지금 차내올테니까 마시고 가요."
키요씨가 청한다.
"아뇨. 저녁때 나으리를 모시러 가야 해서요. 아가씨,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후쿠자와님, 도시락 잘 먹었습니다. 맛있더군요."
운전수인 마츠이씨는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쉴 때 정말로 유미가 가져온 도시락을 드셨나보다. 마츠이씨가 꺼낸 보온케이스는 키요씨가 받아서 "나중에 씻어놓겠습니다"라고 했다.
"일주일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검은 차는 원래 왔던 길을 되돌아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미는 운전수 아저씨도 계속 함께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가 사라진 부지내는 마치 통나무다리를 떠밀어 보낸 작은 시내처럼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우선은 1층 객실 밖으로 나와 있는 넓은 테라스에서 홍차를 마셨다. 키요씨가 구운 스콘에는 아는 사람한테 받았다는 직접 만든 딸기잼이 들어 있었다. 사치코님이 오신다니까 준비해놓은 듯하다.
"나으리와 도련님께선 별고없으신가요?"
키요시가 차를 한잔 더 따라주면서 말을 걸었다.
"고마워. 할아버님도 아버님도 모두 건강하셔."
겐스케씨는 없다. 밖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야코 아가씨의 실가쪽 어머님 일은 참 안되셨습니다. 필시 무척 낙심하고 계시겠지요."
"이젠 괜찮아.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해오셨으니까, 미리 각오하고 계셨던 듯 해."
아마 키요씨는 옛날부터 오가사와라 가문에 종사해오셨나보다. 여기서는 사치코님의 할아버님은 '나으리', 아버님은 '도련님'. 그리고 사야코 고모님은 사치코님과 마찬가지로 '아가씨'인 셈이다. ......복잡.
"참 그렇지. 유미님 댁에서 사치코 아가씨 앞으로 택배가 왔습니다."
"어머, 뭘까?"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키요씨는 일단 방안으로 들어갔다가, '영차'하며 귤상자보다 조금 작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뭐야, 대체 뭐야, 이 무거워 보이는 짐은.
"쌀같은데요."
택배용지에 적힌 품명란을 보면서 키요씨가 말했다.
"뭐?"
사치코님이 되물었다. 엄마한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유미도 깜짝 놀라며 확인했다. 
"싸, 쌀말인가요?"
"네. 쌀요. 열어 볼까요?"
키요씨는 사치코님의 양해을 얻은 후, 상자의 포장용 테이프를 좌악하고 뜯어냈다. 그러자 눈에 확 들어온 건.
"우오누마(魚沼)산 코시히카리(コシヒカリ)"
5킬로그램 들이 비닐팩에 쓰여진 커다란 문자는 그 내용물이 의심의 여지도 없이 백미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추욱. 시원한데도 유미의 등에는 땀이 흘렀다. 엄마,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만 일본인의 주식을 보내버린 모양이다.

"쿡"
쿠?
"쿠쿠쿠쿠쿡"
쿠쿠쿠쿠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의 출처를 따라가 보니 세상에 사치코님이 쥐어짜낸 소리였다. 사치코님은 글자 그대로 쿠(く)자처럼 몸을 굽히고는 배를 껴안고 웃고 있었다.
"유미 집은 좋겠어. 그런 가정에 태어나 자랐으니까 유미나 유키같은 애가 있는 거겠지."
"저, 저기.."
칭찬인지, 놀리는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니는 퍽 즐거워 보였다.
"키요. 여기 머무는 동안 밥은 꼭 이 쌀로 해줘. 유미 어머님이 만드신 주먹밥은 정말 맛있었거든."
"알겠습니다."
키요씨는 즉시 쌀이 든 상자를 부엌으로 옮겼다.
티타임이 끝난 후, 사치코님은 객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해 주셨다. 20장 정도의 다다미가 깔린 객실은 소파는 없지만 커다란 식탁 테이블에 의자가 6개, 벽에는 난로와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었다.
"신청곡 있어?"
손가락 연습 겸 건반조율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하논을 연주한 후, 사치코님은 피아노 피스 안을 엄지손가락으로 휘리릭 넘겨 보았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
유미는 생각도 하기 전에 말이 먼저 나왔다.
"아베 마리아 말이구나."
사치코님은 웃으며 끄덕거린 뒤, 피아노 피스를 덮고는 의자에 앉았다. 악보가 필요없을 정도로 자주 연주하는 곡인가 보다.

그 곡은 유미에게 특별했다. 작년 봄, 당시 로사 키넨시스 앙 부통(홍장미 봉오리)였던 사치코님이 성당에서 유미를 비롯한 신입생 1학년을 위해 오르간을 연주해 주셨던, 바로 그 곡이 구노의 아베 마리아. 그 때 유미는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오가사와라 사치코라고 하는 한 살 위의 언니에게.
추억이라면 또 있다. 사치코님은 기억못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자매가 되기 얼마 전에 음악실에서 짧은 구절이긴 했지만 함께 피아노를 쳤던 곡도 바로 이 곡이었다. 연탄이라고 하기에는 좀 쑥스럽다. 그냥 유미가 장난삼아 연주했던 멜로디에 사치코님이 왼손을 맞춰 주셨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미에게는 소중한 기억. 그렇기에 수많은 아베 마리아 중에서도 구노의 곡이 가장 좋았다.

사치코님의 손가락은 막힘없이 움직였다. 마치 건반 위를 우아하게 춤추는 것처럼. 마리아님을 찬양하는 곡은 아름다운 언니에게 딱 어울린다. 곡이 끝났을 무렵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키요씨도 겐스케씨도 객실에 함께여서, 세 사람은 언니에게 커다란 박수를 선사했다.

 

 

2.

 

2층에는 방이 3개. 이 중 2개가 사치코님과 유미가 쓰도록 되어 있다. 
"두 사람이 같이 써도 괜찮은데."
오히려 그 편이 더 좋다고 유미는 생각했지만, 언니는 "모처럼 방이 남아도니까" 라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난 밤중에 책을 읽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불빛때문에 유미 잠자는 데 방해되잖아."
"....알았어요."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사치코님은 자기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해석도 성립한다. 언니의 휴가를 방해하지 않는다. 라는 목표를 은밀하게 세운 유미로서는 얌전히 물러나는 게 올바른 선택이다.
"짐정리 하도록 해."
그렇게 말하고선 사치코님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좀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뒤쫓을 용기가 없다. 혼자 복도에 남아 있어봤자 할 일도 없고 해서 유미는 얌전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방은 다다미 8장 정도의 크기로 화장실과 욕실, 전화와 TV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오래된 호텔같은 분위기였다. 침대는 세미더블이 하나. 앤티크가구 스타일의 벽장이랑 장롱이 하나씩. 그리고 책상과 의자 한 세트. 벽은 흰색이었다. 기둥과 대들보는 짙은 갈색. 창이 열려있어서 기분좋은 바람이 솔솔 레이스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후우"
유미는 바구니를 상에 놓고는 침대에 데구르르 굴렀다. 아무튼 도착한 것이다. 사치코님의 별장에. 앞으로 1주일,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실제로 별장에 와보니 긴장감보다는 설레임이 앞서는 기분이다. 관리인 키요씨와 겐스케씨 외에는 사치코님과 단 둘. 학교에서는 모두의 로사 키넨시스지만, 앞으로 1주일 동안은 언니를 독점할 수 있다.
와- 하고 누운 채 만세를 외칠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순간 이 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맞는지 아니면 옆의 언니방인지 헷갈렸지만, 이내 "유미님, 실례해도 되겠습니까?"라는 키요씨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허둥대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보시기 어떠신지요?"
키요씨는 유미가 가져온 보온케이스를 앞에 내밀었다. 고맙게도 안의 플라스틱 용기는 이미 깨끗하게 씻겨있었다.
"지금 돌려드려도 걸리적거리기만 하겠네요. 사용하실 예정이 없으시다면 돌아가실 때까지 부엌에다 보관해 놓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뇨 뭘요, 라며 키요씨는 웃으면서 보온병을 다시 거둬들인 뒤, 잠시 뜸을 들이고는 케이스 안의 용기에 시선을 던지면서 "그런데"라고 운을 뗐다.
"좀 관계없는 질문입니다만, 유미님."
"네?"
관계없는 질문이라니? 유미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도시락 내용물은, 원래 뭐였습니까?"
"도시락 내용물요? 음 그러니까.. 주먹밥이랑 방울토마토구이랑 흰살생선튀김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하나, 아스파라거스랑 치즈를 베이컨으로 말아서 구운 것.... 정도인데요."
"주먹밥은 4개. 속은 전부 매실장아찌였습니까?"
"어떻게 그걸?"
헉, 유미는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키요씨는 초능력자인가. 모두 먹어치운 주먹밥의 내용물을 적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갯수까지 맞출 줄이야.
"씨가 4개 남아 있어서 말이죠."
"아, 그래요? 그렇겠네요."
초능력이 아니라 추리력 문제였다. 하지만 매실씨라. 조금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건데. 하루종일 들떠 있었던 유미의 머리는 회전상태가 상당히 나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가씨는 무엇을 얼마나 드셨는지요?"
"음 그러니까.. 전부 하나씩인데요."
"그렇다는 건, 주먹밥, 방울토마토, 흰살생선, 아스파라거스와 치즈 베이컨이란 말씀이군요."
흐음, 하며 키요씨는 한숨은 아니지만,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저기..."
마치 간호사나 영양사처럼 꼼꼼이 질문하니까, 유미는 점점 불안해졌다. 혹시 사치코님이 드셔선 안될거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러자 유미 특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구현됐는지, 키요씨는 당황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점심과 저녁메뉴가 겹치지 않도록 여쭤본 것뿐이니까요."
"아, 그런가요?"
그렇구나.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만 한다. 관리인도 참 큰일이다.
"제가 뭔가 도울 일 있을까요?"
유미가 물어보았다. 엄마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우라고, 그냥 손님으로만 지내지 말라고 그러셨다. 
"말도 안됩니다. 사치코 아가씨의 동생분이시면 유미님도 오가사와라 가문의 아가씨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일을 시켰다간 제가 혼나지요. 게다가 저희들은, 물론 시즌오프중의 관리도 하고 있습니다만, 그 일을 포함해서 모두 오가사와라님 가족분들이 여름 한 때 이곳에서 쾌적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죠. 그러니 저희 일을 뺏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네. 죄송해요."
진지한 간청에 굴복한 유미는 끄덕거렸다. 부자 아가씨란 의외로 자유가 통하지 않나 보다.
"이해해주셔서 기쁩니다. 12시 30분에 점심준비를 해놓을테니 그 즈음해서 1층으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키요씨는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는 방을 나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12시 30분..."
시계를 본다. 11시다. 키요씨의 스콘이 맛있어서 2개나 먹는 바람에, 솔직히 아직 배는 안고프다. 유미는 원피스를 벗고 벽장에 걸린 T셔츠와 데님스커트로 갈아입고는 잠시 복근운동을 해봤다. 하지만 익숙치않은 일은 안하는게 좋아. "일어섰다 누웠다"를 10번이나 반복했더니 곧 녹초가 되어서, 11번째 "일어서기"가 됐던 것은 그로부터 1시간도 뒤의 일이었다.

 

 

3.

 

12시 30분에 계단을 내려오니, 아직 사치코님의 모습은 안보였다.
"잠깐 자겠다고 말씀하시고는 위에서 쉬고 계십니다. 점심은 필요없으신 듯 하고요."
키요씨가 손수레를 밀면서 객실에 들어왔다.
"유미님, 어디서 드시겠습니까? 객실? 아니면 테라스?"
"아,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럼 테라스에서 드시겠습니까? 날씨도 좋은데요."
권하는대로 유미는 테라스에 나가 의자에 앉았다. 그렇구나, 사치코님은 함께 식사하지 않는다.
"매년 그러셨습니다. 도착한 날에는 대개 저녁 다돼서까지 쉬시니까요."
"그런가요."
멀미약의 졸음기운은 꽤 오래 가니까, 약기운이 떨어질 때까지는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지도 몰라. 유미는 준비된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좀전에는 아가씨 식사에 관해서만 묻는 바람에, 유미님의 기호를 묻는 걸 깜박하고 말았습니다만. 뭔가 드실 수 없는 음식이 있는가요?"
키요씨가 물었다.
"아뇨. 거의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그렇습니까. 그거 다행이네요. 계란과 치킨 샌드위치를 준비했습니다. 음료수는 카페오레로 괜찮을까요?"
"아,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경어쓰실 필요없습니다. 편하게 대하세요."
"그런 말씀하셔도..."
연상의 사람이 뭔가 해주는데 반말이라면 조금, 이 아니라 상당히 저항감있다. 그야 태어나면서부터 아가씨가 아닌걸.
"더 있으니까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키요씨가 테이블 셋팅을 완료하고 내려갈 듯 했기에, 유미는 당황해서 불러세웠다. 
"저기, 키요씨랑 겐스케씨는 함께 안드시나요?"
"저희들은, 별실에서 먹습니다."
싱긋 웃고 가버린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주인과 고용인의 영역이 확실히 나누어져 있는 모양이다.
"잘 먹겠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유미는 혼자 테라스에서 점심을 먹는 처지가 되었다. 사치코님이 안드시는데 유미까지 식욕이 없다고 했다간 만들어 준 키요씨한테 미안해서, 그렇게 배가 고프진 않지만 그냥 먹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커다란 접시에 예쁘게 차려진 샌드위치의 양은 만만치가 않았다. 아마 빵만 해도 한근정도 나갈 듯하다. 이건 여고생 혼자서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유미는 자기 접시에 치킨과 계란, 2종류의 샌드위치를 하나씩 덜어 담았다.
"아."
덥석 입에 물려고 했을 때, 접시 좌우에 나란히 놓여있는 물건을 발견했다. 나이프와 포크.
"아하..."
여기는 틀림없이 사치코님 댁이구나. 언니와 함께 웃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시험해볼 겸, 나이프와 포크로 먹어 봤다. 하지만 계란샌드위치는 내용물이 불쑥하고 양끝으로 튀어나왔고, 치킨쪽은 힘을 너무 넣는 바람에 빵이 찌그러지고 말았다. 유미가 고전한 샌드위치. 사치코님이라면 이런 고생스런 물건으로도 익숙한 솜씨로 잘라서 우아하게 입으로 가져가겠지.
"항복."
결국 포기하고 손으로 들고 먹기로 했다. 맨 먼저 아까 접시 위에 떨어진 상추를 쥐고 입에 쑤셔넣었다.
"치킨과 계란. .... 가족 샌드위치."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웃는다. 샌드위치는 촉촉한 빵에, 내용물도 신선해서 맛있었지만, 아주 조금, 쓸쓸한 점심이었다.

 

 

4.

 

사치코님은 저녁이 다되어가도 아직 방에 틀어박혀 계셨다. 유미는 심심하고 따분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자고 있는 언니를 반드시 깨우지 않으면 안될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별 수 없이 방으로 돌아가, 저쪽에 있던 짐들을 이쪽으로 옮겨보기도 하고, 침대 위에서 무의미하게 뛰고 구르고 그랬다. 
점심식사 뒷정리라도 도와주게 했다면 시간때우기라도 됐을 테지만, 아니나 다를까 키요씨에게 거절당했다. 방안 탐험도 슬슬 싫증나자, 유미는 창 밖을 내다봤다. 집을 감싸는 듯이 서있는 나무들 중에는 창유리를 쪼갤듯한 기세로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크로스워드 퍼즐이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어."
일단 작은 가이드북은 한 권 가지고 왔지만. 여기에 온다는 사실에 너무 기쁜 나머지,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질릴 정도로 읽고 또 읽은 것이다. 게다가 방에서 혼자 이 주변의 볼만한 장소 같은 페이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어쩐지 서글프다. 그렇다고 이 근방 지리를 모르는 유미가 가이드북만 믿고 혼자 밖에 나가는 것도 무모한 일이다. 애초에 이 숲속에서 스타트해서 어디를 어떻게 걸어야 떠들썩한 관광지로 갈 수 있는지조차 전혀 짐작이 안갔다. 결국 미아가 될 게 뻔하지.
자신의 한숨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자, 작은 동물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꼬리가 긴 토끼라고 생각했지만, 토끼치곤 귀가 짧았다.
"다람쥐..?"
다람쥐를 다람쥐답게 그리는 경우에 반드시 붙이는 세로줄 무늬가 전혀 없었지만, 그건 틀림없는 다람쥐였다. 섬다람쥐보다 크고 온통 갈색인 다람쥐. 그게 창 가까이에 있는 가지 위에서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게 아닌가.
"이리 온, 이리 와."
손을 뻗어봤다. 물론 그런 행동으로 가까이 올 것 같으면 야생다람쥐 생활 못해먹는다. 유미를 무시하는 듯 잠잠히 있다가, 굵은 나뭇가지 쪽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버렸다.
"미움받았나봐."
시시해.
빨리 언니가 깨어나시면 좋을텐데.
사치코님은 저녁식사 직전에 내려와, 흐리멍덩한 눈으로 식탁에 앉았다. 저혈압으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다는 사치코님. 역시 본격적으로 자고난 후면 시간대에 관계없이 한동안 멍해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녁은 산행만점 메뉴였다. 메인은 은어 소금구이. 각종 버섯튀김. 그 지방의 야채무침. 그리고 직접 만든 모둠두부. 어느 것 할 것 없이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스콘이랑 샌드위치를 상당히 먹어서 그런지, 다 먹을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이 앞섰다.
"필요하시면 더 드세요."
키요씨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주전자를 테이블에 놓았다. 그래 맞아. 잊어선 안되지. 밥은 후쿠자와 집에서 보내온 우오누마산 코시히카리, 게다가 누룽지 첨부다. 사치코님의 할아버님이 옛날부터 부뚜막에서 지은 밥을 좋아하셔서, 부엌을 개축할 때도 부뚜막만큼은 그대로 놔두셨다고 한다. 6인용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이 식사를 시작하자, 사치코님이 물으셨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유미는 뭘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짐정리하고, 잠깐 잤다가.. 아, 그리고 창에서 다람쥐도 봤어요."
"그래. 여긴 자연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조용해서 좋지?"
"아, 네."
끄덕이면서 유미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언니가 안계셔서 조금 쓸쓸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하렴, 예전에 사치코님이 하신 말씀이다.
"어머"
사치코님은 살짝 웃었다.
"그럼 밤에는 게임이라도 하고 놀까?"
"그래도 돼요?"
기색을 살피듯 묻자,
"물론이지."
시원스런 대답.
"좋아라!"
기쁨이 전신을 헤집고다녀 무심코 의자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유미, 식사중일 때는 일어서는게 아냐."
".....네."
주의받긴 했어도, 기쁨은 줄어들 리 없다. 그 몇십백 몇백배나 기쁘니까. 그렇게까지 게임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언니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언니가 자신을 위해 시간을 사용해준다는 사실이 유미를 행복하게 만든 것이다. 부활한 유미는 반찬을 전부 평정해 버렸다.역시 고원의 맛있는 공기보다도 언니의 한 마디가 식욕증진제인가 보다.
식후에는 약속대로 게임을 했다. 공교롭게도 이 별장에는 트럼프와 체스, 바둑밖에 없었지만, 체스판에서 따먹기장기를 하기도 하고, 바둑판에서 오델로게임을 하기도 하면서 제법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식사 뒷정리를 끝낸 키요씨랑 마지못해 끌려온 겐스케씨도 참가해서는 "도둑잡기"도 하고, "7의 꼬리물기"도 했다. 사와무라 부부가 "대빈민"이랑 "페이지원"의 룰을 몰랐기에, 트럼프게임은 이 두 가지만 계속 반복했지만, 그래도 전혀 싫증이 안났다.

클래식 레코드에서 가끔씩 섞여 들려오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어딘지 향수를 일으키는 밤. 이대로 쭈욱 밤샘하고 싶다. 유미는 그런 생각을 했다.

 

 

5.

 

화요일.
오늘은 어떤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유미는 기대에 부푼 가슴을 안고 (실제 사이즈는 변함없지만) 침대에서 내려와, 2층 층계참에 있는 세면대에서 얼굴을 씼고 계단을 내려왔다. 어젯밤은 결국 12시 30분까지 게임에 빠져서 순서대로 목욕하고 잠자리에 든 것은 새벽 2시경이었다. 해산 전에 아침식사는 8시라고 정했으니까 7시 40분에 자명종을 맞춰놓았지만, 삐삐삐하는 전자음이 흐르기 전에 눈이 떠졌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골프가 있는 날이거나 하면 일찍 일어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테이블에 접시를 늘어놓는 키요씨에게 우선 인사.
"안녕하세요 유미님. 잘 주무셨습니까?"
솔솔. 버터랑 계란굽는 냄새가 난다.
"네. 푹 잤어요."
자기 힘든 도쿄의 밤에 비하면 시원해서 정말 잘잤다. 그 때문일까. 8시가 돼도 사치코님이 아직 객실에 나타나지 않는 건. 
"아, 유미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막 구운 빵의 향기로운 냄새와 함께 겐스케씨가 객실에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냄새."
"막 구운 걸 사왔거든요. 따끈따끈한 걸 드실 수 있을 겁니다."
겐스케씨는 헬멧을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바이크로 빵을 사러 나갔다 온 모양이다. 따끈따끈이란 말그대로, 봉투에서 김이 나고 있었다.
"그럼 유미님에게 한가지 일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앞치마에 걸려 있는 타올로 손을 닦으면서, 키요씨가 한쪽 눈을 감았다.
"넷!"
어떤 일이든지간에 부탁받았다는게 기쁘다. 여기서는 손님취급이니까 몸도 마음도 무뎌져가는 것만 같았으니까.
"빵과 오믈렛이 식기 전에 사치코 아가씨를 깨워주세요. 이건 막중한 임무입니다."
"맡겨 주세요."
유미는 가슴을 쳐보이고선, 기운차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언니랑 만날 수 있다. 설레이는 마음을 억누르며 문 앞에 서서 심호흡한뒤 노크를 했다.
똑똑.
몇시간전까지 함께 있었으면서 벌써 만나고 싶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함께 있다고 해서 싫증날 리도 없는데다, 가능하다면 언제나 곁에 있고 싶으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똑똑.
대답이 없어서 다시 노크를 했다. 그래도 안에서는 묵묵부답.
"언니...?"
열쇠로 잠겨있지는 않아서, 살짝 문을 열고 말을 걸었다.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다. 경솔하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건 확실히 막중한 임무일지도 몰라. 유미는 마음먹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실례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아마 사치코님 귀에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침대에는 면이불를 두른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숙면에 빠져 있었다. 흐트러진 흑발이 얼굴이랑 드러난 팔을 덮듯이 가려, 하얀 피부가 한층 더 하얗게 보였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유미는 흔들어 깨우려고 뻗은 손을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이건 마치 한 폭의 그림 그 자체였다.

"-----"

이 상황은 혹시, 좀 뉘앙스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언니의 잠자리를 습격하는 동생의 그림'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츠타코양이 옆에 없어서 다행이라며 유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있었다면 틀림없이 꼭 셔터누를게 뻔했으니까. 그리고 이 수법 저 수법, 갖은 아양 다 떨어서 학원제에 특대판넬로 전시할 것이다. 그 사람이라면.
"으....응"
사치코님이 몸부림을 쳤다. 위험해. 아름답다고 해서 계속 보고 있다간 변태패거리로 몰리고 만다.
"언니, 언니."
어디를 만져야 좋을지 난감하다, 아무튼 어깨를 흔들며 말을 걸었다.
"응..."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잠꼬대하는건가, 사치코님은 면이불을 질질 끌어당겨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겐스케씨가 사온 빵이 식어버려요. 그리고 키요씨가 만든 오믈렛도요."
"밥 안먹을거야. 그만큼 자게 해줘."
"안돼요. 전 언니와 같이 아침을 먹고 싶단 말예요."
좀 난폭하지만, 유미는 면이불을 벗겼다. 사치코님은 탱크톱의 옷자락이 장단지까지 뻗은 잠옷을 입고 '쿠(く)'자가 되어 있었다. 덧붙여서 잠옷색은 베이비 핑크.
"일어나세요."
"...."
"언니"
"알았어. 일어나면 될거 아냐."
언니는 항복하고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약간 찡그린 얼굴이지만, 제대로 실내 슬리퍼를 신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미."
"네."
"5분후에 갈게."
"하아."
사치코님이 잠옷의 어깨 부근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고 겨우 옷갈아입을 거니까 나가 있으라는 의미란 걸 깨달았다. 
"그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서둘러서 방을 나왔다. 
바보바보바보바보, 멍청이 바보
멍하니 서서 보고 있음 어쩌자는거야. 유미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태클을 넣으며 빨갛게 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6.

 

아침 8시가 지나 시작된 식사도, 9시에는 확실히 정리가 끝나 있었다.
자아, 오늘은 뭘 할까나. 유미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사치코님이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디 가자던가, 뭔가 하자던가 하는 말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식후 소화를 위해서인지 사치코님은 계속 테라스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벌써 1시간째다.
"그 책은?"
"여름방학 숙제야. 독서감상문."
사치코님의 손에는 다자이 오사무 전집이.
"기행문은 그다지 좋아하질 않아."
과제는 <츠가루>같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유미는 "주인공이 츠가루를 여행하는 이야기"일까 하고 추리했다. 사치코님 말로는 "뭐 그런 셈이야" 라고 하시는데.
"마지막 대목은 약간 흥미롭지만 말야."
"어떻게 아세요?"
슬쩍 엿보니까, 사치코님이 보고 있는 페이지 위쪽에 '츠가루'라는 글자가. 그렇다면, 아직 <츠가루>를 현재진행형으로 읽고 있다는 말이니까 라스트에는 이르지 못했을 터였다.
"읽은 적이 있거든."
"....."
중학교 1학년때, 역시 이 별장에서 이 책을. 그것도 집에서 지참해온 책을 전부 다 읽고 읽을 책이 없어서 아버지 서고를 뒤져 읽었다니까 놀랍다. 유미는 숙제가 아닌 바에야 문학이라 불리는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유미도 시간있을 때 빨리 숙제를 끝내도록 해."
사치코님은 다시 페이지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는 예정이 꽉 잡혀 있으니까."
"에?"
오후부터 뭔가 즐거운 스케쥴이 있나 싶어, 뛸 듯한 기분이었다.
"전에 말했지? 여름방학 후반기는 학교에 나와서 학원제 준비를 한다고."
"아... 네. 기억하고 있어요."
시간있을 때 빨리,란 여름방학 중 시간있을 때 빨리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런데도 유미는 들떠서 '아침에 시간있을 때 빨리'라고 지레짐작하고 만 것이다. 위험하다 위험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플라잉할 뻔했어.
"유미, 너 숙제는?"
"죄송합니다. 안가지고 왔어요."
"어째서?"
어째서라뇨. 보통 바캉스에 숙제같은 건 안들고 오잖아요. 아니 잠깐만. 유미는 생각해냈다. 전에 TV에서 여행지에서는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멋이다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해외에 가서 관광과 선물 생각만 가득찬 일본인은 촌뜨기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깎아내리고 있었다. 아마 사치코님은 평소대로 지내는 부류인 것이다. 그리고 유미는 후자. 이렇게 인식이 어긋나 있는 두 사람이 일주일간 보조를 맞추며 지낼 수 있을까. 조금 불안해졌다.
아니아니, 괜찮아. 유미는 마음 속에서 머리를 붕붕 가로저었다. 다시 말해 사치코님께 맞추면 되잖아. 예정없는 일요일처럼, 느긋하게 지내기만 하면 언니와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독서감상문 쓸 책도 안가지고 왔어?"
사치코님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일단 문고는 사놨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집 책상 위에, 서점봉투에 들어있는 채로 방치되어있다. 
"저기, 언니의 아버님이 가지고 계신 책중에서 그게 있으면, 빌려도 괜찮을까요?"
"그래. 뭔데?"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こころ, 心)>요."
"소세키라면 전집이 있어. 확실히 여기에..."
사치코님은 일어나서 객실 수납장의 홀쭉한 문을 열었다. 밖에서 보면 모르겠지만, 거긴 위에서 아래까지 전부 책으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굉장하네요."
무심코 감탄. 들어보니 복도의 막다른 곳이나 게단의 층계참 같은 곳의 수납장도 마찬가지로 서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바쁘신 분들이라 느긋하게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어. 그래서 여름휴가때면 이 곳에서 독서삼매경이지. 집에서는 비지니스책만 보시지만. ..... 아, 있다."
사치코님은 꽤 볼륨있는 책을 꺼내어 유미에게 건네줬다.
"잘 빌리겠습니다."
"우정이 테마구나."
사치코님은 역시 이 책도 완독하신거다.
우정.
그 후로는 테라스에서 사치코님과 함께 책을 읽었다. 유미는 조용히 첫 페이지를 열었다.
"난 그 사람을 항상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책 중량에 맞먹을만큼, 묵직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7.

 

밤에는 사치코님이 객실의 테이블에서 영문 일어번역 숙제를 시작하셔서, 유미는 그 옆에서 엽서를 쓰기로 했다. 요시노와 시마코한테다. 
"무더운 날씨에 잘 지내고 있어? 난 지금 사치코님 별장에 머무는 중이야. 여기는 시원하고 정말 조용해. 이곳의 맛있는 공기를 함께 전할 수 없다는게 아쉬워.  - 유미"
엽서 여백에 점심 때 테라스 옆에서 따온 이름모를 잡초의 책갈피잎을 붙였다. 오늘밤중으로 다쓰면 내일 아침 겐스케씨가 빵사러갈 때 겸사겸사해서 우체통에 넣어주신다고 했다.
"반나절 눌러놓은 정도로는, 제대로 된 책갈피잎이 안될텐데?"
풀을 건네주면서 사치코님이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저 시든 나뭇잎에 불과하다며.
"하지만 두 사람한테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요."
유미는 우표를 붙였다. 숙제는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엽서와 우표는 제대로 챙겨온 것이다. 여행지에서 엽서를 보낸다. 그거야말로 여행의 정석이다.
"그래?"
사치코님은 엽서를 들고서는 발신인란에 이곳 주소를 적어주셨다. 흔히 있는 "XX에서"같은 형식으로 괜찮다고 유미는 생각했지만, 주소가 들어있는 편이 두 사람한테 이곳의 이미지가 보다 더 잘 전달될 수 있을 거라는 사치코님의 말씀. 단순한 유미는 그 때만 해도  이건 어디어디산 잡초입니다라고 일부러 알릴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사치코님 나름대로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유미의 엽서에 기재된 이곳의 하우스 넘버는, 받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냥 지나칠지 모를, 정말로 작디작은 사인이었다. -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