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권 -1- 가슴 설레는 월요일

"평안하십니까(ごきげんよう)"
"평안하십니까(ごきげんよう)"

상쾌한 아침인사가 맑게 갠 하늘에 메아리친다.
마리아님의 정원에 모인 소녀들이 오늘도 천사같이 천진한 웃음을 띠고 높은 문을 지나간다.
더러움을 모르는 몸과 마음을 짙은 색의 교복으로 감싸고.
스커트의 주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얀 세일러 칼라가 펄럭이지 않도록, 차분히 걷는 것이 이곳에서의 몸가짐. 물론 등교시간 아슬아슬하게 뛰어가는 등의 품위없는 학생 따위 존재할 리 없다.

 

ㅡ사립 리리안 여학원.
메이지 34년(1902년)에 건립된 이 학교는 원래 귀족의 영애를 위해 세워졌다는, 전통있는 가톨릭 계열 귀족학교이다. 도쿄도내, 무사시노의 옛 모습이 남아 나무가 많은 이 지역에 하느님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일괄교육을 받을 수 있는 소녀들의 정원.
시대는 변하고 연호가 메이지에서 세 번 바뀌어 헤이세이가 된 오늘날에도 18년간 다지면 온실에서 순수배양된 아가씨들이 박스포장되어 출하된다는 시스템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귀중한 학교인 것이다.

 

그녀ㅡ후쿠자와 유미도 그런 평범한 소녀의 한 명이었다.

 

 

 

가슴설레는 월요일(胸騷ぎの月曜日)

 

 

1

 

"잠깐 기다려요."

어느 월요일.
은행 가로수길 끝에 있는 두갈래길에서 누군가가 유미를 불러세웠다.
마리아상의 앞이었으니까 순간 마리아님께서 부르셨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곱고 맑은 목소리였다.
누군가 말을 걸면 먼저 멈춰선 후 '예'하고 대답하면서 몸 전체를 돌려 돌아선다. 갑작스런 일이라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더군다나 머리만으로 '돌아본다' 같은 행동은 숙녀로서 실격.
어디까지나 우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조금이라도 상급생 언니분들께 가까워질 수 있도록.
그러니까 돌아서서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후, 가장 먼저 무엇보다도 웃는 얼굴로 평안하십니까ㅡ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미의 입에서 'ごきげんよう'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기 때문에.
겨우겨우 튀어오르지 않았던 것은 리리안 여학원의 학생으로서 품위없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평소부터 마음가짐을 단정히 한 성과. …가 결코 아니다. 너무나도 놀라서 행동이 따라가지 못한 채 순간냉동당해버린 것 뿐.
"저기… 저한테 무슨 일이신가요?"
겨우겨우 자력으로 반쯤 해동한 후 유미는 반신반의하며 물어 보았다. 물론 그녀의 시선 끝에 자신이 있는 것과 그 연장선상에 아무도 없는 것은 이미 확인한 일이지만 역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러 세운 것은 저. 그 상대는 당신. 틀림없어요."
틀림없다, 라고 해도. 아뇨 틀렸어요 라고 대답하고는 도망쳐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째서 말을 걸어 온 건지 짚이는 것이 없는 만큼 머릿 속은 패닉 직전이었다.
그런 유미의 사정 같은건 알 리 없는 그 사람은 살짝 미소를 띄우며 똑바로 유미에게 다가왔다.
학년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가까이에서 얼굴을 뵐 일 같은 건 없었다. 제대로 목소리를 들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스트레이트 헤어는 샴푸 메이커를 묻고 싶어질 정도로 매끈매끈. 이 길이를 유지하면서도 어쩌면 곁털 하나 없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유미에게 내민다. 영문도 모르고 받아 들자, 빈 양손을 유미의 목 뒤쪽으로 돌렸다.
'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순간 알지도 못한 채 유미는 눈을 감고 머리를 꼭 움츠렸다.
"타이가 비뚤어져 있어요."
"엣?"
그렇게 말하고, 그 사람은 유미에게서 가방을 돌려받자 "안녕히(ごきげんよう)"를 남기고 먼저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뒤에 남겨진 유미는 상황이 점점 파악됨에 따라 머리에 피가 몰려갔다.
ㅡ틀림없어.

2학년 소나무반, 오가사와라 사치코(小笠原祥子)님. 참고로 출석번호는 7번. 통칭 <로사 키넨시스 앙 부통 Rosa Kinensis En bouton(홍장미 봉오리)>.
아아, 성함을 입에 담는 것만도 과분하다. 저 같은 사람의 입으로 그 이름을 말해 버려도 괜찮은 것일까요. ㅡ그런 기분이 되어 버리는, 전교생의 흠모의 대상.
'그런...'
부끄러움에 증발 직전이다.
'이럴 순 없어'
유미는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동경하는 언니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부끄러운 에피소드라니. 너무해.
마리아님은 심술쟁이.

분함 섞인 눈으로 올려다본 마리아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결한 미소를 띄우고서 작은 정원 가운데에 가만히 서 계시는 것이었다.

 

 

2

 

"난 또 뭐라구. 그런 거야?" 앞자리의 카츠라(桂) 양은 말을 듣자 마자 까르르 웃었다.
"어두운 얼굴로 등교하길래 난 또 지하철에서 치한이라도 만난 줄 알았네."
"치한 쪽이 차라리 나을지도."
"왜?"
"뒤끝이 없으니까."
"그런 걸 보니 유미양, 치한 만난 적 없구만."
"나 버스 통학이니까."
리리안 여학원의 학생들은 보통 JR의 M역 북쪽 출입구에서 출발하는 순환버스를 이용해서 통학하고 있다. 둘다 그건 마찬가지지만 카츠라양의 경우 M역까지 무지무지 붐비는 지하철, 유미는 M역 남쪽 출입구까지 버스라는 식으로 통학에 대한 쾌적도(불쾌도)가 전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리리안 차량이 생겼다고 들었는데?"
"생겼다, 랄까. 산백합회(山百合會) 간부 멤버들의 제안으로 리리안 학생들에게 미리 이야기해서 뒤에서 두 번째 차량에 모여 타도록 한 것 뿐이야. 하지만 당번이라던가 동아리 활동 같은 거 때문에 조금 일찍 나오거나 하면 학생 수가 적으니까 그다지 의미도 없고."
그래도 소문을 듣고 리리안 외에도 그 차량을 골라 타는 여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치한퇴치에 효과가 있다는 것 같다. 물론 남성을 쫓아내는 효력 같은건 전혀 없지만 젊은 여성으로 넘쳐나는 차량 내에 스스로 올라탈 만큼 용기있는 남자분은 별로 없는 듯. 하물며 불온한 행동 같은 건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리리안의 교복은 녹색을 한 방울 섞은 듯한 무광택 검은 바탕의 품위있는 옷. 검은 라인이 한줄 들어가 있는 아이보리색 세일러 칼라는 그대로 묶어서 타이가 된다. 요즘 세상에 원피스에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로우 웨스트의 주름치마. 세 번 접은 흰 양말에 발레슈즈 풍의 가죽구두가 세팅되면 이건 뭐 천연기념물 급으로, 제복 매니아들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뿌리깊은 인기가 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이 교복은 이미 아가씨 브랜드로 확립되어 있다. 그렇잖아도 세일러복은 치한의 표적이 되기 쉽다는데.
"지하철이 붐비니까 난 역에서 꼭 몸가짐을 체크하는걸."
카츠라양은 그렇게 말하며 유미를 역의 거울 삼아 앞머리를 고치고 타이를 고쳐매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하는 느낌.
"그런가. 몰랐어."
유미는 책상에 푹 엎드렸다. 그러자 카츠라양이 그 머리를 '그래그래' 하고 쓰다듬는다.
"그렇지 뭐. 우아하게 앉아서 통학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도 못해. 신경쓰지 마 신경쓰지 마."
"신경 쓰이는걸."
"이쪽이 잊어버리면 문제 없지 않아?"
"어째서?"
"생각해봐. 상대는 리리안 여학원의 스타야. 스타는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 일일이 기억해 두지 않는다구."
스타와 보통 사람.
사실이긴 하지만, 아니 사실이기 때문에 푸욱하고 가슴이 찔렸다. 카츠라양의 위로는 조오금 난폭한 치료법이었다. 참고로, 카츠라라는건 이름이고 성이 아니다. 리리안에는 별명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동급생끼리는 이름에 '양(원래는 さん - 역주)'을 붙여서 부르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상급생을 부를 때는 이름에 '님(さま - 역주)'이다.
"말을 걸어왔을 때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어. <산백합회(山百合會)>의 간부가 말을 걸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1학년이란, 우리 반에선 그녀 정도 뿐인걸."
그러면서 카츠라양은 시선을 살짝 뒤쪽으로 향했다. 유미가 따라서 뒤돌아보자, 마침 토도 시마코양이 교실에 들어오는 참이었다.
"평안하십니까(ごきげんよう), 카츠라양. 평안하십니까, 유미양."
시마코양은 두사람에게 인사한 후 우아하게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펴, 평안하십니까(ごきげんよう)"
유미와 카츠라양은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동급생인데도 이렇게나 다르다니. 사치코님과는 전혀 다르지만 시마코양도 '초'가 붙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예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예쁜 거라고 낙담해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사치코님처럼 갑자기 아름다워질 수도 있다는 희망적 방정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들었어?"
카츠라양이 속삭였기 때문에 유미도 목소리를 낮췄다.
"시마코양이 <로사 기간테아 앙 부통(백장미 봉오리)>이 되었다는 거 말이지? 2학년을 제치고."
그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시마코양이 1학년이면서도 로사 기간테아(백장미님)와 자매의 연을 맺었다는 것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최신 특종이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우고 '언니께 들은 얘긴데' 라고 말했다. 그녀의 <쇠르(언니)>는 테니스부 선배로, 사치코님과 같은 반이었다.
"시마코양,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 뿐만 아니라 사치코님한테서도 제안 받았었대."
"에-!!"
"유미양, 목소리가 커."
책상 하나를 가운데 두고 등을 구부리는 두사람. 숙녀라고는 하기 힘든 광경이지만 본인들은 그런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ㅡ마리아님 용서해 주세요. 어느 시대에나 여성은 다른 사람의 소문 이야기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법이랍니다.
애초에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에 존재하는 쇠르(soeur;자매)라는 시스템은 학생의 자주성을 존중하는 학교 측의 태도에 의해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무교육 동안에는 교사나 수녀님들의 관리하에 있던 학교생활이 학생들 스스로의 손에 넘겨져 자신들의 힘으로 절조있는 생활을 해야만 하게 되었을 때, 언니가 동생을 이끌어 주듯 선배가 후배를 지도한다는 방식이 채용되었다. 이후 그것이 정착됨에 따라 그다지 엄격한 교칙이 없어도 리리안의 정결하고 바른 학교생활은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이다.
쇠르는 프랑스어로 자매라는 뜻. 아마도 시스터라고 하면 혼란스럽기 때문에 영어를 피한거라고 생각된다. 처음엔 넓은 의미에서 선배와 후배를 쇠르(자매)라고 불렀지만 어느 틈엔가 개인적으로 강하게 이어진 두 사람을 칭하게 되었다. 로사리오의 수수(授受)를 하고 쇠르(자매)가 되기로 약속하는 의식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듣자하니, 사치코님 쪽이 먼저였는데 뒤늦게 로사 기간테아(백장미님)가 내민 손을 잡았다는 것 같아."
카츠라양은 코를 움찔거리며 말했다. 왠지 흥분하고 있다.
"빨간색보다 하얀색이 좋았던 걸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아무튼......유미양은 조금 엇나간 데가 있다니까. 시마코양 클래스가 되면 두 송이 장미를 저울질 할 수가 있다는 거야."
"저울질이라니, 그런 듣기 거북한"
"하지만, 실제로 사치코님이 버려졌잖아."
"우-웅"
아깝기도 하지.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우-웅이 아냐.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째서? 두 사람을 언니로 맞을 수 없다면 어느 한 쪽을 택할 수 밖에 없잖아."
"늦게 말한 쪽을 골라도 되는 거야?"
"빠른 쪽이 이기는 게 아니잖아."
"빠른 쪽이 이기는 거야!"
카츠라양은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쉬면서 잘라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테니스부에 들어간 그날로 자매의 의식을 치렀었던가.
"그건 그렇고, 로사 페티다(황장미)는?"
"황장미는 3학년 2학년 1학년, 모두 이미 정해졌잖아."
"그렇지."
유미에게 있어서는 로사 기간테아(백장미님)와 로사 키넨시스 앙 부통(홍장미 봉오리)가 시마코를 서로 데려가려고 했다는 것보다 최근까지 양쪽 다 <쇠르(동생)>가 없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어쨌거나 사치코님께 제안을 받고서 곧장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건 마찬가지야."
그렇게 말하면서 카츠라는 시계를 보았다. 아침 예배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뒤따라 교내방송으로 찬미가가 흘러나온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성당 아침 예배 외에는 교실에서아침 기도를 한다. 먼저 성가를 부르고, 학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바르게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하지만, 손을 마주잡으면서도 평소의 평온한 생활에서 어딘가 어긋나가는 듯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3

 

"유미양, 유미양"
방과후, 청소당번이었던 음악실에서 막 나온 참인 유미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아, 츠타코(武嶋 薦子)양. 교실 청소는 벌써 끝났어?"
"응. 그래서 엇갈리지 않도록 서둘러 온 거야. 유미양 가방 가지고 청소하러 간 것 같아서"
1학년 교실에서 제법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음악실 청소때는 가방을 가지고 청소하러 간다. 그쪽이 승강구에도 클럽 하우스에도 가깝기 때문에 집으로 가기에도 클럽활동을 하러가기에도 편리하기 때문이다.
"뭔가 나한테 볼 일이라도?"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서."
"이야기?"
하고 되묻자 츠타코양은 테없는 안경의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올리며 "응" 하고 끄덕였다.
"그럼, 유미양. 저희는 클럽활동도 있어서 먼저 실례할께요. 청소일지는 교무실에 제출해둘테니까."
함께 청소당번을 하고 있던 세사람이 티없는 눈동자로 미소지었다.
"어머나... 고마워요."
"아니 신경쓰지 마세요. 그럼 안녕히(ごきげんよう)."
"안녕히(ごきげんよう)."
짙은 흑녹색의 교복이 부드럽게 복도를 흘러간다. 그 모습을 츠타코양과 나란히 서서 배웅했다.
"내가 사진부 소속이라는 건 알고 있지?"
츠타코양은 유미를 향해 돌아선 후 갑작스레 물었다.
"으...으응."
유명인이니까.
수업중 이외에는 거의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셔터 찬스를 놓쳤을 때의 분함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고등부에 와서야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지만 언제 찍혔는지도 알 수 없는 사진을 두세번 받은 적이 있다. 사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평범한 유미의 얼굴이 세배쯤 더 귀엽게 찍혀 있었다.
"조만간 학교 축제잖아? 그러니까 요즘엔 아침 일찍 나와서 클럽들이 아침 연습하는걸 찍거나 하고 있어."
그녀의 피사체는 거의 전부가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면 '여고생'이 테마. 거기까지는 괜찮지만 너무 의식하면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촬 비스무리한 짓까지 하는 게 문제다.
"츠타코양. 도촬 비슷하게 숨어서 찍는 거, 그만두는게 좋지 않아?"
"현역 리리안 여학원 학생이라는 특권을 썩힐 수야 없지. 나는 아름다운 걸 아름다운 그대로
프레임 속에 담아두고 싶을 뿐이야. 우리도 언젠가는 늙어버리겠지만 '지금'을 빛나고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 그건 카메라에게 선택받은 나에게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의무인 거라구."
주먹을 힘차게 쥐어 올렸다.
"그래도 말이지"
"괜찮아. 피사체에게는 미리 귀띔해 두니까. 문제있는 사진은 필름째 태워버리고. 발표할 경우에는 사전에 본인의 동의를 얻고 있어."
"귀띔?"
"이런 식으로 말이야."
츠타코양은 두 장의 사진을 유미에게 내밀었다.
"뭐야?"

  3,
  2,
  1.

그게 어떤 사진인지 알아채는데 정확히 3초는 필요했다.
"에-!"
유미는 리리안의 학생으로서 있을 수 없는 큰 소리를 지르고는 츠타코양에게 입을 막혔다.
"이,이거"
아아, 그것은.
기억 속에서 싹 지워버리고 싶은 아침의 광경. 오가사와라 사치코님과 유미의 투샷이었다.
그건 그렇고, 과연 사진부의 에이스. 셔터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사치코님의 양손은 확실히 유미의 타이를 잡고 있었고, 다 매었을 때의 꽉 하는 소리까지 들려올 것 같았다.
가방을 떨어뜨릴 지경이 되어 가면서 유미는 뚫어져라 사진을 바라보았다.
역시 사치코님은 아름답다. 옆에 있는 유미까지 따라서 천사처럼 찍혀 있었다.
"한장은 망원으로 찍은 거라 클로즈업이야. 하지만 이쪽의 몸 전체가 찍혀 있는 쪽이 '위험한' 분위기가 나서 좋지 않아?"
참고로 타이틀은 '가르침(しつけ. 원래는 '예의범절 등을 가르침' 이라는 뜻이지만 '애완동물 등을 길들임'이라는 뜻도 있음. -역주)' 이라고 이야기하는 츠타코양에게 유미는 달라붙었다.
"이거, 나 줘!"
유미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츠타코양이 사진을 빼앗아들며 웃었다. 마치 물고기가 낚싯줄에 걸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괜찮지만, 조건이 딱 두 개 있어."
"조건?"
"첫번째, 학원제의 사진부 전시 코너에 패널로 걸어 놓을 수 있게 허락해 줄 것."
"엣......"
전시? 패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람.
공부도 키도 체중도 용모도 모든 것에 있어서 평균인 나와 모든 조건을 만족하고 있는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을 나란히 전교생 앞에 내놓는다니, 그런 무모한 짓을.
"츠타코양, 농담이지?"
"농담일 리가. 이 사진은 올해 최고의 수확이라고 찍었을 때부터 확신하고 있었어. 그래서 점심시간도 포기하고 현상한 거라구."
그 말과 동시에 츠타코상의 배에서 숙녀답지 못하게 꾸~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도시락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가방 속에서 잠자고 있는 모양이다. 취미란 성장기의 식욕마저도 넘어선다는 건가.
"하지만 패널이라니..."
유미는 움츠러들었다.
"이 사진 필요없어?"
츠타코양은 두 장의 사진을 쥐고서 유미의 얼굴 앞에다 살랑살랑 흔들었다.
"난 알고있지. 네가 남몰래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을 동경하고 있다는 걸. 그런데도 투샷은 고사하고 바스트샷 한 장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수학여행 사진이 교무실 앞에 걸렸을 때, 좋은 사진이 잔뜩 있었는데도 학년이 다르니까 주문하지도 못하고 안타까워 했었지? 클럽활동도 하지 않으니까 2학년 선배에게 사 달라고 부탁하지도 못했고. 겨우 가지고 있는 것은 운동회때 찍은 사진. 너의 등 뒤로 우연히 찍힌 릴레이 대기주자 사치코님은 쌀알만큼은 아니라도 콩알만한 크기였지."
"실례야, 연필만한 크기는 됐었다구. 그런 거라도 소중히 하고 있는 걸."
츠타코양은 당장 사립탐정을 차려도 될 것같다.
"오늘 이후로도 과연 그 연필에 만족할 수 있을까나?"
안경 렌즈가 플래쉬처럼 번쩍 하고 빛났다.
"......벌받을거야."
이렇게 좋은 사진을 보여줘버리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걸로 만족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사치코님이 안된다고 하실 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츠타코양은 검지손가락을 세우고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두번째 조건은,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홍장미 봉오리)에게 허가를 받아 오는 것."
"에에?! 그런건 무리야! 절대 무리"
또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버린다.
"왜?"
츠타코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나 친해 보이는데. 마치 스-루(자매)처럼."
"그럴 리가!"
유미는 설명했다. 오늘 아침, 등교중에 우연히 부르시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몸가짐을 주의받은 것 뿐이다. 라고.
"어머나, 그런데도 타이까지 고쳐 주시다니. 동급생들이 알면 어지간히 부러워 하겠네."
"부러워해?"
생각만 해도 다시 빨갛게 달아오를 것 같다.
"틀림없이 칠칠맞은 학생이라고 생각하실 거야. 사치코님은."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찾아올 동경하는 언니와의 만남은 좀더 아름다운 시츄에이션이어야 했다.
예를 들면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졸업한 후에도 떠올리는 것 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질 듯한. 단 한순간이라도 괜찮다. 바람에 날린 사치코님의 손수건을 주워 드린다거나 하는 자그마한 일이라도.
그것이 비뚤어진 타이라니. 덤으로 당황해서 허둥지둥 인사도 감사의 말도 하지 못한 예의없는 하급생이 되고 말았다.
"칠칠맞은 학생. 괜찮잖아? 너 그 덕분에 동경하는 언니께 접근할 수 있었잖아?"
"웃......"
그런 말을 들으면 괴롭다. 타이가 비뚤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평생 이야기 한번 해 보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으니까.
"츠타코양 스스로 이야기 해보면? 평소엔 항상 그러잖아?"
"아무리 무서울 게 없는 츠타코양이라곤 해도 역시 산백합회 간부는 무서워."
산백합회란,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의 학생회. 그 간부, 홍백황의 장미님이라고 하면 학생이면서도 일반 학생과는 격이 다른 위치에 있는 고귀한 분인 것이다. 사치코님은 그 로사 키넨시스(홍장미)의 여동생(쁘띠 스-루)이었다.
"게다가 유미양, 이 경우엔 널 써먹는게 교섭에 유리하다고 봐."
"어, 어째서"
"사치코님의 눈에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타이가-"
"단지 타이가 비뚤어져 있는 정도로 사치코님이 고쳐 매주신다면 리리안의 학생 전원이 타이 풀어 헤치고 다닐 거야."
츠타코양은 주저없이 말했다.
"설마."
"실제로, 난 그렇게 생각한 1학년생을 본 적이 있는 것이지."
눈에 들고 싶다는 일념으로 일부러 타이를 느슨하게 하고서 사치코님 앞을 지나간다는 대담한 행동을 실행에 옮긴 1학년생이 어떤 말로를 맞았는지, 츠타코상은 마치 무대 가운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 여배우처럼 낭랑히 이야기했다.
"특히나 사치코님은, 교내 최고의 결벽성. 칠칠맞은 몸가짐을 싫어하시기로 유명하니까,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나와버리는 거 겠지만."
올바른 정신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몸가짐부터 바르게 해야 해요-. 유치원때부터 다녔다면 십수년간 무슨 일 있을 때 마다 들어왔던 그 가르침을 거스르면서까지 동경하는 선배가 말을 걸어 주길 원했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치코님의 차가운 일별. 그리고 무시. 거기다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 학생의 언니를 불러내서 주의를 주었다는 후일담이 있다고 한다.
"사치코님… 무서워."
"이제 알았어?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은 무섭다구. 물론, 도를 벗어난 일에 한해서지만."
"그 무서운 사치코님께, 날 맞서게 하려고…?"
무서운 건 츠타코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이미 유미는 도망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실내화의 발끝은 확실히 승강구쪽을 향해 있다.
"모르는군, 유미양. 사치코님이라고 해서 귀신이 아냐. 오히려 천사지. 대천사 미카엘님."
"대, 대천사 미카엘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는 알고있는 걸까. 츠타코양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분은 말이지, 원래 고귀하고 관용적인 분이야. 단, 자신의 미의식에 반하는 행위에 대해서만은 절대 용서 않지. 태어나면서부터 공주님이었으니까. 그 분에게는 그 분 나름대로의 법이 있는 거야."
츠타코양은 혼자서 내달리고 있다. 유미는 참지 못하고 '잠깐' 하고 손을 들고서 말했다.
"츠타코양, 나 국어성적은 중간의 중간이거든."
"응?"
"조금만 더 레벨을 낮춰서 설명해주면 안될까."
"레벨을 낮추라니?"
"그러니까, 좀더 알기 쉬운 말로 부탁해."
으-음. 하고 츠타코양은 팔짱을 꼈다. 자기 안에서 만들어진 이론을 타인에게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치코님은 불합리하게 화내시진 않으니까 괜찮아. 그분이 화내실 때는 항상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안심하고 설득해 줘."
"어째서 내가."
"죽이 맞을 것 같잖아? 너와 사치코님."
츠타코양의 사고회로는 더 이상 전혀 알 수가 없다.
"뭘 근거로."
"근거? 근거같은거 없어. 이런건 감이야. 직감."
하급생의 타이 정도에 관여하는 분이 아닌 사치코님이 오늘 아침만은 말을 걸고 주의를 준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타이를 고쳐매주시기까지 한 것은 쾌거라고 할만하다. 라고 츠타코양은 역설했다.
"본인이 자각하지 않는다 해도, 상성이 맞는 사람들이란 자신도 모르는 새 다가서는 것 아닐까."
"또 알 수 없는 말을."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기가 하기는 위험하니까 싫은 일을 유미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 뿐 아닌가.
"칠칠맞은 여자애라고 생각되었다, 라고 의기소침할 바에야 다른 이미지로 바꿔버리면 되잖아. '오늘 아침에는 지적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라고 정중하게 감사하면 예의바른 여자애가 될 수 있어."
"우- 츠타코양, 말 너무 잘해"
"고마워. 변론부에 스카우트 당한 적도 있는걸."
흐흥, 하고 웃어 보이는 표정은 연극부에서도 스카우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십분 후, 유미는 산백합회 본부인 '장미의 관'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결국은 '사진, 필요없어?' 라는 츠타코양의 결정타에 눌려 사치코님과 교섭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고 만 것이다.

 

 

4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 학생회, 그 이름은 마리아님의 마음에서 유래하여 '산백합회'라고 한다.
마리아님의 마음은 푸른 하늘이며, 떡갈나무이며, 휘파람새이며, 산백합이며, 그리고 사파이어이다. 그것은 유치원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배운 노래 가사였다.
'하지만, 어째서 사파이어지…?'
어린 마음에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푸른 하늘, 떡갈나무, 휘파람새, 산백합까지 와서는 왜 사파이어인 걸까, 하고.
마리아님의 마음을 아름다운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보석이라는 속물적인 것을 하늘이나 동식물과 나란히 놓는 것에 아무래도 위화감이 들었다. 게다가 사파이어는 비싼 것이니까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누구나 평등하게 가질 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사치코님 정도 되는 좋은 집 아가씨라면 사파이어에 위화감 같은 건 느끼지 않겠지.'
장미의 관 앞에 선 유미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귀족학교라고 불리우는 리리안의 학생은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딸이 많다. 유치원부터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유미도 부친이 설계사무소를 하고 계시니까 일단은 사장영애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클래스메이트끼리 아버지의 직업을 일부러 가르쳐주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의하면 의사라던가 변호사라던가 중소기업 사장이라던가 대기업 부장이라던가 대학교수라던가, 확실히 높아보이는 직함도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부터 찾아가려는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은 그런 정도의 아가씨들과는 격이 다르다. 백화점이나 레저시설 등 폭넓은 사업을 펼치고 있는 오가사와라 그룹 회장의 손녀딸로, 어머니의 친정은 원 귀족이라는, 가문도 바른 공주님인 것이다.

장미의 관. '관'이라곤 해도 고등부 건물의 정원 옆에 세워진, 교실 반 정도 넓이의 작은 건물이었다. 하지만 학생회만의 확실히 독립된 건물이며, 목조 2층이라는 외관을 보면 '관'으로서의 멋도 분명히 있다.
"사치코님, 정말 여기 계실까나"
유미는 노크하려고 앞으로 내민 손을 일단 내리고, 츠타코양에게 말을 걸었다.
"교실에는 없었잖아. 산백합회의 간부 분들은 학원제 준비로 매일 방과 후에 장미의 관으로 모인다는 말을 들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츠타코양은 유미를 다시 문쪽으로 돌려세웠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따라왔다'는 입장으로 거기 서 있는 모양이다. 메인은 유미. 대체 누구 볼일도 여기까지 와 있는 건가하고 불평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사진을 얻을 때까지는 얌전히 참는 거다. 게다가 츠타코양 말대로 잘 하면 아침의 오명을 만회할 수도 있고, 운좋으면 친하게 이야기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가, 매일 계시는 건가..."
라는 것은, 이제 물러설 수 없다는 거다.
유미는 다시 한번 손을 올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대로 나무문을 두드리는 것까지는 가지 못한다.
'아아, 왜 이렇게 마음 약한 걸까'
하지만 극히 보통의 1학년이라면 유미 뿐만 아니더라도 이 문을 두드리는 데는 상당한 배짱이 필요한 것 아닐까. 그걸 알고 있으니까 츠타코양도 재촉하지 않는 것이다. '노크 정도도 못 하는 거야?' 라고 하면 '그럼 네가 해' 하고 받아쳐 주지. 하고 유미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꼭 쥔 손바닥에 땀이 나는 걸 느꼈다. 이상하네, 땀이 날 정도로 덥지도 않은데. 두근두근 심장이 점점 강하게 뛰고, 급기야 다리도 떨려왔다.
문이 열리면 그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역시 무리. 하고 손을 내렸을 때,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산백합회에 무슨 일이세요?"
"핫?!"
유미와 츠타코양은 용수철 장난감처럼 뒤돌아섰다.
"어머나, 죄송해요. 놀라셨나요?"
거기 서 있는 것은 토도 시마코양이었다.
유미는 휴-하고 숨을 내쉬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때에 사치코님이 나타나버리면 기절할 일이다. 기절까지는 오버라고 해도 당황해서 오늘 아침보다 더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 것이 확실했다.
"시마코양이야 말로 어째서..."
유미가 말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츠타코양이 "바보" 하고 가볍게 옆구리를 찔렀다.
"시마코양은 로사 기간티아 안 뷔통(백장미 봉오리)이니까 여기 있는 게 당연하잖아."
"아, 그런가."
그녀는 '보통 1학년'이 아닌 것이었다.
"유미양과 나,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홍장미 봉오리)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는데. 시마코양이 좀 안내해 줄 수 있을까?"
츠타코양은 마침 잘됐다는 듯이 클래스메이트인 시마코양에게 말을 붙여 보려고 했다. 같은 뷔통(봉오리)이라도 하얀색과 빨간색은 친근감이 전혀 달랐다.
"어머, 그런 일이라면 들어오지 그래? 사치코님은 아마 2층에 계실 테니까."
시마코상은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살랑이며 문을 열고 겁먹은 두사람에게 손짓했다.
아름다운 것 뿐만 아니라 상냥하고 귀여운 사람이었구나. 토도 시마코(藤堂 志摩子)양은. 유미는 멍하니 넋놓고 바라보고 말았다. 이래서야 사치코님과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가 서로 데려가려고 할 만도 하지. 나란히 함께 걷고 싶은 타입인걸. 새하얀 피부에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곱슬머리.
그에 비해서, 같은 천연 곱슬머리라곤 해도 유미 쪽은 그저 펴지지 않는 것 뿐. 마구 뻗친 강모를 둘로 나눠서 겨우겨우 리본으로 묶어놓고 있는 것이다. -한쪽은 실과자(부드럽고 미세한 실처럼 만든 과자. 솜사탕 비슷한 것 - 역주), 한쪽은 사반나의 야생동물.
"들어와요?"
시마코양은 문을 누른 채 다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가자, 유미양."
꿀꺽 하고 침을 삼키고는, 츠타코양은 유미의 팔을 잡았다. 끝까지 길동무로 삼을 셈인 모양이다.
안으로 한발 들어서자, 거기는 신비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우와..."
들어가서 바로 앞은 작지만 탁 트인 플로어로 되어있었다. 맞은 편의 오른쪽에는 약간 경사가 급한 계단. 2층으로 올라가서 계단 끝에는 문 정도 크기의 채광용 유리창이 있는 듯, 계단을 곧바로 내려오는 듯한 저녁햇살이 아래층까지 늘어져 있었다.
플로어에 인기척은 없었다. 오른쪽에 하나 그리고 그 바로 위에 하나씩 방이 있는 것 같았지만, 시마코양 말대로 1층에 사람이 모여 있는 기색은 없다. 이래서야 입구에서 유미가 노크를 해도 알아채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니 큰 일을 앞에 두고 덜컥 피로가 몰려와 버릴 것 같았다.
"이쪽이야"
시마코양은 치맛단이 계단에 닿지 않도록 누르면서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유미와 츠타코양은 얼굴을 마주보고 "응" 하고 끄덕이고는 그 뒤를 따랐다.
고등부에 입학한 뒤로 약 반년. 유미에게 있어서 장미의 관은 수녀님들이 사시는 곳과 동급일 정도로 금기의 공간이었다.
"저기...... 시마코양?"
유미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응?"
"이렇게 쉽게 외부인을 들여놔도 괜찮아?"
계단 맨 위 한칸에 발을 올려놓은 채로 돌아본 시마코양은 잠깐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어머나' 하고 말했다.
"어째서 외부인이라고 생각해? 이 건물은 산백합회 본부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임원들이 관리하고 있지만, 학생회원이 바로 산백합회의 회원인걸? 찾아와 주는건 물론 대환영이야. 물론 한번에 백명씩이나 학생들이 몰려오면 바닥이 꺼져 버릴지도 모르지."
시마코양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웃었다.
확실히 이 낡은 목조 건물으로서는 겨우겨우 50명 정도가 한계일지도.
대체 어느 시대에 지어진 걸까. 리리안의 고등부 건물도 절대 새 건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계단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거나 하진 않는다.
계단을 다 올라가자 오른쪽으로 옅은 갈색 문이 나타났다. 선두의 시마코양을 뒤따라 문 옆까지 다가가자, 안쪽에서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어째서 제가 그걸 해야만 하는 건가요?!"
문 너머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어지간히 큰 목소리다. 장미의 관에 큰 목소리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다시 같은 목소리가 소리를 질렀다.
"횡포예요! 언니분들 심술쟁이!"
문에 걸려있는 '회의중이오니 조용히' 라는 팻말과 '심술쟁이' 라는 단어가 묘하게 언밸런스했다.
굉장해. 상급생한테 '심술쟁이' 라고 말해버리는 학생이라니. 여기는 장미의 관. 안에는 틀림없이 장미님들을 시작으로 쟁쟁한 멤버들이 앉아있을 게 분명한데. 회의에 나와서는 '언니분들 심술쟁이' 같은 거 보통 학생들은 못한다구.
"다행이다. 사치코님, 와 계시나 보네."
시마코양은 문 손잡이를 잡았다.
"에?!"
"그럼, 방금 그 목소리는 사치코님의......"
유미는 진짜로 뒷걸음질쳤다. 사치코님이, 저렇게나 큰 소리를 내시다니. 심술쟁이라는 말을 삐진 투로 말해 버리시다니. 그것은 츠타코양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에 반해 시마코양은 '늘 있는 일이야' 하고 미소지으며 노크도 없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
"알었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여기 데려오면 되는 거죠! 예, 지금 바로 데려오겠어요!"
라는, 내뱉다시피 한 말과 함께 한 명의 학생이 기세 좋게 방에서 튀어나왔다. 안쪽에서 문 손잡이를 잡은 상태로 바깥쪽에서 문을 열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불행한 사고였다.
"앗!"
"우왓!"
사람이 튀어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유미는 몸 앞쪽에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연이어 눈앞이 흔들리고 천장이 회전한 후 곧바로 엉덩이에 심한 통증이 왔다.
그 인물은 문이 방패가 되어 준 시마코양도, 맨 끝에 서 있던 츠타코양도 아닌 두 번째의 유미를 노린 듯이 직격한 것이다.
그러니까 첫 번째의 "앗!"이 튀어나온 사람의 것, 그 다음의 "우왓!" 하는게 유미의 목소리였다.
"괜찮아?!"
시마코양과 츠타코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응."
뭐가 뭔지 잘 알 수도 없는, 굉장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부딛친 건 엉덩이 뿐인 것 같았지만 가슴부터 배 부근까지 '뭉클'하는 묘한 압박감이 남아 있다. 게다가 얼굴에는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 온통 덮여 있어서 위를 보고 넘어졌는데도 근처가 잘 보이지 않아서 방향은 고사하고 위아래도 구분할 수 없었다.
"쯔읏......"
하고 중얼거리며 위에 있던 인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계가 넓어진 후 먼저 보인 것은 틀림없이 동경하는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홍장미 봉오리),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이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금방은 판단하지 못하는 모양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머리를 작게 흔들고 있었다.
곧바르고 긴 흑발이 광고 모델처럼 살랑살랑 구부러지고 흔들린 후 이윽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텔레비전과 다른 점은 플로럴 향이 은은하게 풍긴다는 것이었다.
"아-아, 어지간히 성대하게 넘어졌구나"
"에, 사치코의 50킬로에 깔려버린 거야? 비참해라!"
"어-이. 피해자, 살아있냐?"
방 안쪽에서 소동을 알아챈 학생들이 차례로 나왔다. 산백합총회에서 밖에는 뵐 수 없을 듯한 굉장한 멤버가 총출동. 로사 키넨시스(홍장미), 로사 페티다(황장미), 로사 기간티아(백장미). 황장미로 말하자면 뷔통(봉오리)에 쁘띠 스-루(그 동생)까지도 있었다.
"엣, 내가 깔아뭉갠 거야?! 잠깐, 너 괜찮아?!"
겨우 상황이 파악된 사치코님이 허둥지둥 유미를 안아 일으키려고 했다.
"사치코,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머리 부딪혔을 지도 모르니까."
인파를 가르며 나선 것은 로사 페티다 안 뷔통(황장미 봉오리). 2학년 국화반 30번, 하세쿠라 레이(支倉 令)님. 과연 무도가의 딸. 낙법을 실패해서 뇌진탕을 일으키거나 하는 케이스를 자주 보는 거겠지.
하지만 세일러 칼라에 로 웨스트 주름치마라는 교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남장한 미인으로 보인다는 존재도 리리안으로서는 희소가치가 있지 않을까. 가는 몸에 짧은머리. 안티크 인형이 입고 있는 드레스와도 비슷한 이 교복을 마치 하카마처럼 멋지게 입어내고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엉덩방아를 찧은 것 뿐이니까요."
유미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아직 엉덩이는 지끈지끈 아팠지만 이대로는 일이 더 커질 것 같다.
"정말 괜찮아?"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사치코님은 유미를 들여다 보았다. 아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시면 견딜 수가 없다. 아름다운 눈이 더렵혀집니다.
"예에, 보시다시피."
그곳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유미는 불사조처럼 일어서서 그 자리에서 뿅뿅 뛰었다. 슬슬 자신의 광대노릇이 싫어졌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구급차까지 나타날 듯한 분위기였다.
"다행이다"
안도하신 건지 사치코님은 유미를 꼭 끌어안았다. 가슴에 아까와 같은 압박감. 아아, 그런가.
그건 사치코님의 가슴 부분이었던 모양이다. 교복 구조상 개개인의 체형 차이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가슴은 꽤 풍만한 편인 것 같다. ......따위 생각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다. 황송스럽게도, 지금 사치코님께 포옹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끌어안은 채, 사치코님은 유미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너, 1학년이지? 언니는 있어?"
"에?"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은, 타이를 일부러 풀고서 자폭했던 1학년생의 이야기. 사치코님은 그 아이 대신 그 언니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부딛친 것 정도로 언니까지 끌어들이실 건가. 이 경우는 사고라고 해도 될 정도인 데다, 무엇보다 서 있던 유미를 사치코님이 끌어들인 상황인 것이다.
"있어 없어?"
"없는...데요?"
비밀 이야기를 하는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유미도 소리죽여 대답했다. 그러자,
"됐어."
사치코님은 밀착하고 있던 몸을 떼고는, 유미의 손을 잡고 장미님들 앞으로 내세웠다.
"저, 저기"
"괜찮아. 하라는 대로 해."
상당히 억지. 뭐가 뭔지 알 지도 못한 채, 그래도 호화 멤버의 앞에 끌리다시피 내세워졌다.
"언니분들께 보고하겠어요."
문 너머로 들렸던 히스테리 기미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선명한 평소의 목소리였다.
"어머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로사 키넨시스(황장미님)가 지적인 미소를 띄우고 물어봤다. 과연 사치코님의 그란 스-루(언니). 저 사치코님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정도의 여유와 관록이 있다.
"이 아이-"
거기까지 말하고 사치코님은 우물거리다 유미에게 "자기소개 하도록" 하고 말했다. 유미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을 이제와서 깨달은 것이다.
"아, 1학년 복숭아반 35번, 후쿠자와 유미입니다."
사치코님을 향해서 자기소개하려고 하자, 그대로 몸을 반회전 당해 버렸다. 아무래도 장미님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군. 후쿠자와 유미양. 한자로는 어떻게 적지?"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이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후쿠자와 유키치(19세기 일본의 지식인 - 역자주)의 福澤(후쿠자와), 示변에 오른 우 자로 祐(유), 그리고 신사년의 巳(미)입니다."
"복도 많을 것 같고 좋은 이름이네."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가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로사 페티다(황장미님)가 감정하는 듯이 위에서 아래로 유미를 훑어보았다.
"그 후쿠자와 유미양이, 무슨 일로?"
어느틈엔가 유미는 삼색의 장미님들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뱀 앞의 개구리(우리나라 식으로는 고양이 앞의 쥐 - 역자주)라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하는 말일까. 이름에 뱀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어서 조금은 친근감이 있다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은 사양하고 싶다. 뱀이 아니라면 가시나무 숲인가. 예쁜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고 하듯, 역시 장미님들은 그저 아름다운 언니일 뿐만이 아닌 것 같다.
엉덩방아를 찧었을 뿐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압박감에 머리가 띵해질 것만 같았다. 대체 사치코님은 가녀린 1학년을 붙잡아서 뭘 시킬 작정이신 걸까.
"언니분들. 그런 식으로 바라보시는 건 실례 아닌가요? 보세요, 유미가 완전히 겁에 질려서는."
'유... 유미?!'
어이어이.
좀전까지 이름도 몰랐는데 갑자기 막 부르는 거야? 하고 끼어들고 싶기는 하지만 상대가 사치코님이다 보니 왠지 멍- 해져 버렸다.
유미.
이름에 '양'을 붙이는게 보통인 리리안에서 이름만 부른다는 것은 극히 친근한 관계의 사람들끼리로 한정되어 있다. 친구같은 부모자식 관계가 모토인 관계로 부모님은 '유미쨩'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미라고 부르는 것은 최근 건방져진 동생 정도.
왠지 좋은 느낌. 사치코님께 '유미'라고 불리우는 것. 상황은 그다지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여기는 기분 좋으니까 좀더 사치코님께 붙어 있기로 했다.  이런 나라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 -뭐 그런 이유로.
"그렇구나. 불쾌하게 느꼈다면 미안해요. ...에 그러니까, 후쿠자와 유미양."
백장미님이 고개를 갸웃 하는 듯이 살짝 굽혔다. 이 사람이 시마코양의 그란 스-루(언니).
시마코양과는 전혀 타입이 다른 이국적인 얼굴이지만 클로즈업에도 당당할 수 있을 만큼 미인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단을 넣은 세미롱 헤어가 귀 뒤쪽에 바람처럼 흘러내려 아름다웠다.
"하지만 말이야, 우린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홍장미 봉오리)인 사치코의 행동에 아무래도 신경을 쓰게 되거든. 이해해 주겠지?
"......예, 예에."
장미님들께서 사치코님을 신경쓰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그게 어째서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과 연결되는 건지 유미로선 알 수가 없었다.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 함부로 유미에게 말 걸지 말아 주세요."
사치코님이 감싸듯 유미의 앞으로 나왔다.
"어머, 언제부터 유미양이 네 소유물이 된 거지?"
로사 기간티아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쿡 하고 웃었다. 곧바로 반격당해 버린 사치코님이 아름다운 얼굴의 관자놀이 부근을 긴장시킨 것이 비스듬히 뒤쪽에 있던 유미에게도 보였다.
"자아 로사 기간티아, 일단은 사치코의 이야기도 들어봐 주죠."
그래요, 보고할 것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로사 키넨시스와 로사 페티다께서 거든 덕에 냉정을 되찾으셨는지 사치코님은 날카롭던 표정을 풀고 끄덕였다.
"조금 전의 약속을 지켜 보이겠어요."
"약속?"
로사 키넨시스가 되물었다.
"지금 곧바로 정하면 불만은 없으신 거죠? 그러니까 저, 이 유미로 하겠어요."
사치코님은 유미의 어깨를 안고 어떠냐 하는 듯이 앞쪽으로 내세웠다. 마치 이제 막 선물받은 새 장난감을 자랑하는 것처럼.
"저기..."
바로 그 '조금 전 이야기'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유미로선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알지도 못하는 새 굉장한 일에 말려들어 버린 건 아닐까.
츠타코양이나 시마코양에게 눈으로 도움을 청했지만 머리를 옆으로 흔들어 버렸다. 그녀들도 유미와 함께 온 것이니 이 사태를 파악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거, 라니. 설마 방을 나가기 직전에 내뱉았던 대사?"
세명의 장미님들은 탐색하듯이 사치코님을 보았다.
"물론"
이겼다는 듯한 웃음을 띄우고, 사치코님은 그대로 천천히,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말을 했다.
저는, 지금 여기서 후쿠자와 유미를 쁘띠 스-루(동생)로 맞을 것을 선언합니다. 라고.

 

 

5

 

"드세요."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액체가 하얀 컵에 70퍼센트쯤 채워져 눈 앞에 놓였다.
이건, 홍차라고 하는 음료다.
"밀크와 설탕은?"
키가 작은, 땋은 머리의 소녀가 바구니에 든 스틱 모양의 물건을 내밀었다. 이 애는 분명히 같은 1학년의, 반과 성은 잘 기억 나지 않지만 로사 페티다 안 뷔통(홍장미 봉오리)인 하세쿠라 레이님의 쁘띠 스-루인 요시노양.
"아뇨, 괜찮습니다."
거절한 후 멍하니 생각했다. 에 그러니까, 밀크가 뭐더라? 아아, 꽤나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사치코님의 선언을 듣고 가장 놀랐던 것은 다름아닌 유미였다. 투쾅- 하는 주위의 소동에도 뒤처져서는, 그냥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대체 하루에 몇번, 유미를 돌로 만들어야 사치코님은 속이 풀리는 걸까.
어쨌든 좀 침착하게 이야기를 해 보자, 하는 상황이 되어서 일동은 '회의중' 팻말이 걸린 문 안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멋대로 선언해 버린 사치코님은 가짜라도 '동생'이라고 소개한 유미를 내버려 두고, 어깨를 돌린 채 맨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전투태세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듯한 느낌이었다.
'......사치코님과 전쟁'
원래라면 이미지적으로 가장 떨어진 위치에 있어야 할 조합이 아닐까.
"어머나, 동생을 버려두고 가다니. 나쁜 언니네"
로사 키넨시스가 유미의 어깨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자 사치코님은 그제서야 자신의 불찰을 깨달은 듯 자기 바로 옆의 의자를 당겨서 '여기 앉아' 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일동이 착석한 후 홍차가 놓여졌다. 라는 것이다.
그 방은 교내에 있으면서도 학교의 어떤 시설에도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계단이나 복도와 마찬가지로 바닥이나 벽은 낡아서 조금씩 틈이 벌어져 있는 판자제. 복도 쪽을 제외한 세군데의 벽에는 각각 하나씩 나무창틀의 퇴창(건물 바깥으로 튀어나온 창-역자주)이 있어서 깨끗한 면 커튼이 가느다란 리본으로 묶인 채 걸려 있다. 넓이는 교실 반 정도일까. 가운데에 놓인 8인용 정도의 타원형 테이블에는 생화가 놓여 있어서 학생회 본부라기 보다는 오래된 양옥의 다이닝 룸 풍의 분위기였다.
테이블에는 홍, 백, 황의 장미님들은 물론이고 사치코님, 유미, 시마코양, 함께 온 츠타코양도 게스트로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레이님과 요시노양은 벽쪽에 있는 작은 싱크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이제 막 물을 넣은 전기포트가 보글보글 하고 소리를 내고 있다. 방과 후 학생들이 학교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 같은 건 지금까지 상상했던 적도 없었다. 어느 틈엔가 펼쳐진 티슈 뒤에 쿠키까지 놓여 있다.
산백합회의 간부쯤 되면 이렇게 우대받는 걸까.
"미리 말해 두지만, 우리는 개인적인 노력으로 쾌적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거니까 그런 쪽의 오해는 하지 않도록."
옆에 계신 사치코님이 유미의 마음을 읽으신 것처럼 작게 말했다. 산백합회의 예산에 차값을 포함시키거나 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인 것 같다. 차 종류는 멤버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온 것이고, 쿠키는 마침 조리실습이 있었던 반에서 나누어 준 것이라고.
"원한다면 커피나 코코아도 있어. 단 인스턴트니까 맛은 그저 그렇지만."
로사 키넨시스께서 생긋 웃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놀러 와요. 너는 사치코의 동생이니까, 우리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동료야."
안심시켜 놓고는 슬그머니 본론을 꺼낸다. 역시 장미님이라고 불리우는 인물이란, 다들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마, 맞아.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었지'
사치코님의 폭탄발언을 받은 덕에 전원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거니까.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잊어버리고 싶다는 기분도 솔직히 있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게다가 충돌사고의 피해자인 자신이 어째서 이런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는건지. 이래서야 무슨 재판이나 국회의 증인심문 같다.
"어머나, 로사 키넨시스. 사치코의 주장을 인정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로사 페티다. 사치코가 결정한 거라면 이미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로사 기간티아의 의견은 어떠신지?"
"인정한다 안한다의 결론은 좀더 두고봐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주역중 한명이 버젓이 눈뜨고 있는 한은 말이야."
그와 동시에 전원의 시선이 유미에게로 쏠렸다. '그럼, 주역중 한명이라면, 나 말인건가-?!'
"불쌍해라.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이 아이."
장미님들이 쿡쿡 웃는다. 어쩌면 마음껏 놀림받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유미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틀림없이 그럴 거야.'
이 호화 멤버가 좀전의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버리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애초에 사치코님께 어떤 사정이 있던, 유미를 동생으로 삼는다는 설정 자체에 무리가 너무 많은 것이다.
'아니, 잠깐.'
어쩌면 사치코님까지 가담한 게임이 아닐까. 맞아, 그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선선히 납득이 된다.
'미안해, 좀 농담이 심했던 모양이네'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면 살짝 웃으신다면 '이상하다곤 생각했었어요' 하고 웃으면서 아슬아슬하게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뭐라건 간에, 유미는 제 동생이에요."
사치코님은 완강히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대체 어쩔 셈이신 걸까.
"사치코 뿐만 아니라, 유미양에게도 묻고 싶은걸"
"저, 저 말씀이신가요......?!"
갑자기 지적당해서 유미는 움츠러들었다. 역력히 파악당하고 있는 대로, 상황이 파악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정직하게 '모르겠어요' 라고 하면 간단하지만, 그랬다간 사치코님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낳을 것 같다고 그 장소의 분위기에서 알 수 있었다.
"에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동경하는 사치코님 편에 붙고 싶다. 하지만 적에 대해서도 아군에 대해서도 모르는 인간은 대체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걸까. 병법으로 잘 알려진 손자 선생님께 꼭 가르침을 받고 싶을 지경이다.
"제가 그렇게 말하는 거니까, 틀림없잖아요? 유미에게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경하다. 사치코님은 어디까지나 강경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저, 저기......"
"넌 가만히 있어."
찌릿. 아군인 유미에게 조차도 용서 없다.
그야, 실제로 스-루 관계에 있다면야 언니의 명령은 절대적인 거니까 얌전히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은 거니까 좀더 상냥하게 말해 주셔도 괜찮지 않을까.
"유미양을 빼놓고 이야기를 밀고 나갈 셈이겠지만, 그렇겐 안되지."
로사 기간티아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사치코. 너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냥 지나가던 유미양을 끌어들이고 있을 뿐이잖아?"
'주어진 일......?'
유미가 머리를 갸우뚱했을 때, 떨어져 있던 자리의 인물이 '저기' 하고 손을 들었다. 그것은 이미 유미에게서 완전히 잊혀져 있던 츠타코양이었다.
"왜 그러지? 다케시마 츠타코양."
"알고 계셨다니 영광입니다. 로사 기간티아."
"유미양은 그렇다 쳐도, 널 모르는 학생은 없지. 유명인인걸."
눈에 띄지 않는 존재라 죄송합니다. -유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황송합니다."
츠타코양은 안경 위치를 바로잡은 후 계속했다.
"관계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뿐이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동석을 허가받은 사람으로서 한마디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저로서는, 전혀 이야기가 파악되질 않습니다."
어째서 갑자기 사치코님이 유미를 동생으로 소개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주어진 일'이라는 것이 어디서 이어져 있는지. 츠타코양은 그 설명을 구했다.
"그 말대로야.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실례겠지."
로사 페티다가 끄덕이자, 사치코님이 당황해서 일어섰다.
"설명 같은 것 필요 없어요. 제가 동생을 정했다, 그 뿐이니까요. 오늘은 그만 해산."
"뭘 멋대로 말하고 있어. 해산하고 싶으면 혼자 돌아가도록 해. 물론 유미양은 여기 남겨두고 말이야."
로사 키넨시스의 말에, 사치코님은 별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사치코가 한번은 받아들였던 학원제 관계의 일을 이제와서 거부했다는 거지."
"하지만, 이야기가 다른걸요."
사치코님은 뿌- 하고 부은 얼굴을 했지만, 로사 키넨시스는 상관없이 계속했다.
"다르지 않아. 거기다, 설령 설명이 부족했다고 해도 네 일 자체는 변함 없잖아."
"저기, ......사치코님의 일이라면?"
이번에는 유미가 물어보았다.
"아아, 또 설명부족. 실은, 이번 학원제에 우리는 연극을 하기로 했거든."
"산백합회의 간부가 모여서, 연극을"
뭔가 굉장히 사치스럽다는 느낌. 그건 꼭 보러 가고 싶다.
"우리 세 장미는 학원제 실행위원도 겸하고 있어서 매일 바쁘니까 당연히 뷔통(봉오리)들이 중심이 되어서 연극을 하기로 한 거지."
엑스트라로 댄스부에서 사람을 빌리기로 했지만. 하고 로사 페티다가 덧붙였다.
"댄스부라니, 대체 뭘 공연하시는 건가요?"
츠타코양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물었다. 카메라맨의 피가 끓는다는 듯한 표정이다.
"신데렐라. 무도회 신이지."
우왓.
"그, 그래서, 주역은"
자신이 놓인 입장마저 잊고서 유미는 흥분했다. 이쪽은 숨겨진 사치코님의 피가 끓는다는 표정.
"그건, 물론 사치코지"
꺄-
사치코님의, 신데렐라.
그렇다면, 레이님이 왕자님!? 두가지 색 봉오리의 화려한 경연.
상상한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너무나도 아름답다. 이미 완전히 다카라즈카(여성들만으로 구성된 극단, 혹은 그 공연. 아름다운 여성들의 남장이나 화려한 무대로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매우 높다-역자주)의 세계다.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확보해야지. 사전에 번호표를 배포한다거나 하는 걸까. 기왕 이렇게 됐으니까 돌아갈때 자세한걸 물어봐야지.
아니, 잠깐 있어봐.
좀전에 사치코님은 일을 거부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주역을 포기했다는 뜻으로-
"올해는 하나데라에서 게스트를 초청하게 되었는데, 사치코는 그게 불만인 것 같아."
"게스트"
"상례야. 같은 언덕에 선 이웃, 리리안과 하나데라 학원은 문화제때 서로의 학생회에서 도와줄 사람을 보내거든. 지난달 있었던 하나데라 학원의 문화제에 우리도 도우러 갔었어."
왠지 시골의 두레 같다. 장례나 결혼식이나 화재나 이사 같이, 무슨 일이 있으면 일을 쉬면서까지 도우러 갑니다. 하는 그 풍습.
야마나시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댁 옆집에 사시던 작은 아버지께서 기말의 바쁜 와중에도 은행을 쉬면서 조문객을 맞아들이고 계셨던 걸 보았을 때도 컬쳐 쇼크를 받았었지만.
그게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니, 그것도 고등학생끼리가 말이지.
"게스트를 초청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하나데라의 학생회장을 굳이 왕자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
사치코님은 작게 말했다.
"그럼, 뭘 맡길까? 신데렐라? 그럼 사치코가 왕자를 맡아 주겠어?"
그쪽이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한 것은 유미만이 아닐 것이다.
"어째서 그런게 되는 건가요. 저는, 예를 들면 대도구라던가 그런 무대 뒤쪽의 힘쓰는 일을-"
"게스트에게 무대 뒤쪽 일을 시킬 수야 없잖아? 우리는 저쪽에서 메인 이벤트의 심사위원을 하고 왔어. 실수로라도 그들은 차심부름 같은거 시키지 않았다구. 그날 도우러 오지 않았던 사치코는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납득할 수 없는 건, 이제 와서 배역을 바꾼다는 거에요. 학원제까지 앞으로 2주밖에 남지않았는데."
로사 키넨시스와 사치코님의 논쟁. 일대일의 자매대결이다.
"그러니까, 왕자는 처음부터 하나데라의 학생회장으로 정해져 있었어."
"거짓말이에요. 어제 대본 연습까지만 해도, 레이가 왕자 대사를 하고 있었잖아요."
그러자 거기서,
"아, 난 처음부터 대역이라고 들었었는데."
전기포트의 증기 너머로 레이님이 손을 들었다.
"거 봐. 사치코를 빼고는 다들 알고 있었어. 아직 의심된다면 의상을 주문한 수예부에게 물어보렴. 왕자 의상은 하나데라 학원 학생회장의 사이즈로 만들고 있을 테니까."
"제가 없을 때 정해버리신 거군요."
형세가 불리해진 사치코님은 이를 갈았다.
"무슨 잠꼬대하고 있어, 비밀회의 같은걸 할 리 없잖아. ......아, 그러고 보니. 사치코가 몇번인가 회의에 빠진 적이 있었지. 어쩌면 그때 정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그렇다면 자업자득아냐? 하나데라와의 의논이 있는 날이면 항상 도망다녔으니까. 남자 혐오증도 적당히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법이야."
'남자 혐오증?'
알았다. 유미는 마음 속에서 손뼉을 쳤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일단 사치코님은 3학년의 장미님들께 명령받아서 무대극의 주역을 맡기로 했다. 고의인지 불행한 전달 미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나데라 학원의 학생회장이 왕자역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 사치코님에게만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오늘에야 알게 된 사치코님은 불같이 화냈고, 그리고 주역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유는 - 그렇다. 남자 혐오증이니까.
'그건 그렇고, 남자 혐오증인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적도 없지만, 그러고 보면 사치코님에게 남자 혐오증이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딱 맞아 떨어졌다. 유미네 반에도 남성공포증이나 혐오증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학생이 있었고, 그녀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 같은 경우에도 대하기 꺼려지는 걸까나...'
그런걸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을 때, 뭔가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자 로사 기간티아가 턱을 내민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계셨다.
"재미있네."
"예?"
"백면상(얼굴 표정이 시시각각 바뀜-역자주) 하고 있었어."
"엣?!"
유미는 당황해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 해버린 것을 주워담을 수도 없는 일이고, 추격타처럼 새빨간 파도가 온 얼굴을 덮쳤다.
"의외성이 있어서 좋군."
그건.
절대 칭찬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국어성적은 평균점이니까 그 정도는 이해할수 있어요, 로사 기간티아.
"에에-. 하지만 어째서 사치코님께서 주역에 난색을 표명하신 것과 유미양을 동생으로 삼는 것이 이어지는 걸까요. 팻말에는 '회의중'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만, 그건 주역 교체의 의논이 아니었던 겁니까?"
츠타코양은 마이 페이스로 질문을 계속했다. 그러자 로사 페티다가 쓴 웃음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처음엔 분명히 회의였는데 말이지."
학원제 준비로 방과 후에는 날마다 장미의 관에 모이고 있다는 간부 멤버. 오늘은 몇가지 세세한 문제점을 한꺼번에 의논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당번이라 늦어진다는 시마코양을 기다리지 않고 회의는 시작되었다. 그녀는 뷔통(봉오리)이라서 의무적으로 출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간략하게 해설하자면, 보통 학교에서는 학생회라고 불리우는 산백합회. 원래 간부라고 불리는 정식 임원은 로사 키넨시스(홍장미), 로사 기간티아(백장미), 로사 페티다(황장미)의 세 명뿐이다. 이 세 명이 학생회장, 부회장, 서기, 회계 같은 역할을 같은 비중으로 맡아서 대대로 운영되어왔다.
그건 어쩌면 옛날 어느 시대엔가 학생회의 임원을 장미에 비유한 것이 시작일지도 모른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어쨌거나 산백합회의 간부라고 하면 홍백황 세명의 장미님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학생회를 시작으로 학원제 실행 위원회, 신입생 환영회나 졸업생 송별회 등 계절행사의 주최, 거창하진 않지만 예산 위원회나 학생총회등 자잘한 것까지 합치면 상당한 양이 되는 그녀들의 일은 당연히 세 명만으로 다 해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견습이랄까, 장미님들은 자신들의 스-루(동생)을 어시스턴트로서 일을 돕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어지간한 일이 없으면 보통은 그대로 다음 대의 산백합회 간부를 이어받기 때문에 장미님들의 동생에 한해서 뷔통(봉오리) 라는 칭호가 주어지고 있다. 다음에 피는 장미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의제의 대부분은 간단하게 결정되는 거였으니까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지만"
"마지막으로 미뤘던 우리 연극의 의논 중에 사치코가 삐져버려서 말이지."
"입 좀 다물게 하려고 아픈 데를 살짝 찔러봤더니 폭발해버렸어. 사치코는 외면이 괜찮으니까 인기가 있지만 성질이 격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
장미님들은 담담히 말했다.
"살짝이라구요?! 그건, 살짝 찌른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어요! 푸욱하고, 제 심장에 꽂혔었는걸요."
사치코님은 다시 떠올리고는 흥분했다.
"쁘띠 스-루(동생)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인간에게 발언권은 없어. 하고 말씀하셨잖아요."
"확실히 그렇게 말하긴 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동생으로 삼아라' 라는 의미는 아니었어. 방을 나가서 제일 먼저 만난 1학년을 잡아서는 동생으로 하겠다니, 어쩜 그렇게 생각이 없니? 새끼줄 쥔 맏아들(일본 설화. 맏아들이 어머니가 잘 생각하고 쓰라며 유품으로 남겨준 새끼줄을 여행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의 부탁으로 누룩과 바꾼다-역자주)도 아니고."
'......새끼줄 쥔 맏아들'
유미의 관자놀이에 주륵하고 땀이 흘렀다.
'그럼, 난 새끼줄이 되는 건가'
덕분에 이야기가 꽤 파악이 되기 시작했지만, 동시에 바보같이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끼줄 쥔 맏아들, 좋잖아요. 그 이야기, 결말은 해피엔딩이었죠?"
사치코님, 말하는게 엉망진창이야.
"그럼, 너는 유미양을 다른 누군가로 바꿀 때까지의 임시방편으로 쓸 생각이었어? 그런 관계, 인정할 수 없어. 너의 그란 스-루(언니)인 내 품위마저 의심받을 거야."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은 질렸다는 것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사치코님은 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반론했다.
"끝까지 유미의 뒷바라지 하겠어요. 제가 교육시켜서, 훌륭한 홍장미로 만들어 보이겠어요. 그러면 문제없는 거죠?"
아무리 될대로 되라는 상황이라지만 그렇게 거창하게 일을 벌여도 되는 걸까. 이래서야 조만간 취소할 때 엄청 창피당하게 되어버릴텐데.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건 그만둬, 사치코."
"어째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건가요?"
"너, 유미양과는 방금 처음 만난 거 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는 거지?"
타닥타닥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튄다. 그러나 3대 1. 게다가 그 3 쪽은,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 최강의 3학년인 것이다.
"사실은 조금 전까지 유미양의 이름도 몰랐던 거 아냐?"
"그건......"
사치코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곳을 찌르듯이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가 부드럽게 추격타.
"이제 됐잖아? 혼자 억지부리는 거, 그만 둬."
그 말씀대로야,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여기서는 미련없이 패배를 인정하는게 좋지않을까나. 신데렐라가 싫다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면 되잖아. 동생같은건 충동구매할 만한게 아니에요. 잘 생각해서, 좀더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발견하면 되는 걸.
그야 뭐.
사치코님이 다른 1학년생을 동생으로 삼는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쇼크겠지만. 사치코님이 자신을 동생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은 설령 이판사판인 상황이었다곤 해도 기뻤지만.
"잠깐만요."
그때, 시마코양이 일어섰다.
"사치코님과 유미양은 지금 막 처음 만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때까지는 마치 없는 사람처럼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로사 페티다 안 뷔통(황장미 봉오리)이나 그 쁘띠 스-루(동생)도 마찬가지로, 봉오리란 원래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그다지 나서면 안되는 걸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사치코님만이 예외인 듯 하다.
"왜 그렇게 생각해?"
로사 기간티아가 자신의 스-루에게 물었다.
"왜냐하면 유미양은 사치코님을 만나러 여기 온 거니까요."
"에? 시마코가 데려왔잖아?"
로사 키넨시스는 유미와 츠타코양, 시마코양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맞아. 유미양 일행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건지, 묻는다는 걸 잊고 있었네."
시마코양이 개인적인 친구를 데려 왔다거나, 학원제의 잡무를 도와줄 뜻있는 학생이라거나, 어딘가의 클럽활동이 체육관 사용을 두고 문제가 생겼다는 걸 말하려고 온 것이라거나. 다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사치코님의 히스테리라던가 충돌사고라던가 스-루(자매)선언 같은게 차례차례 겹쳐서 여기 자체가 혼란스러웠으니 별 수 없긴 하지만.
"그게 정말이야?"
로사 키넨시스는 사치코님이 아니라 유미에게 직접 물었다.
"......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서 유미는 대답했다. 나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역시 이런 시츄에이션은 좀 꺼려진다. 어렸을때 남매끼리 싸운 뒤 어머니가 이유를 물어보았을때, 그때의 슬픈 기분과도 조금 비슷하다.
"증거도 있습니다."
츠타코양이 이때다 하는 듯이 끼어들어서 로사 키넨시스께 뭔가를 보였다.
'아, 오늘 아침의 사진......!'
힐끗 보인 정도지만 그건 틀림없이 두 사람의 투샷이었다.
그건 그렇고, 슬슬 마무리가 되려는 상황이었는데 클래스메이트들은 무슨 생각인지 또다시 문제를 꼬이게 만들어 주었다.
"과연. 두 사람은 전부터 알고 있던 거로군. 실례했어."
스냅은 주욱 회람되어 유미 옆자리에 있던 사치코님의 손에까지 돌아갔다. 그렇게 해서, 결국 그 사진의 존재를 사치코님이 알게 된 것이다.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하고 유미는 옆눈으로 사치코님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사치코님은 사진을 손에 들자, 일단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후, 그대로 천천히 유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다. 하지만 '불쾌'라는 것과도 조금 다른 표정.
'이건- 이 뭐라고 딱히 말하기 힘든 표정은-'
사치코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만났었지?"
역시.
그녀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이라는 꽤 가까운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유미의 인상이 너무나도 옅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사치코님에게 있어서 기억에 남겨둘 정도의 가치도 없는 일이었던 걸까.
어느 쪽이건 간에 힘이 쭉 빠지는 이야기다. 얼굴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오명을 벗을 생각같은 걸 할 필요도 전혀 없었던 거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사치코님의 행동은 대담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적어도 그녀로서는, 처음 만난 1학년생을 붙잡아서 자매선언을 한 거니까. 새끼줄 쥔 맏아들이라고 불리웠다고 화낼 일도 아니지.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와 유미는 이 사진처럼 아주 친밀한 사이에요."
어이구.
소도구를 자기편으로 한 사치코님. 히스테리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공략하는 작전으로 나갈 셈이다.
부활이 빠르시기도 하지. '어디서 만났었지'의 침이 마르는 속도라니, 가스 건조기 급이다. 사치코님은 이어서 말했다.
"거기다, 다른사람이 정한 스-루(동생)에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건 좀 경우가 아니시지 않나요?"
끝까지 유미가 동생이라는 거짓말을 밀고 나갈 작정이신 것 같다. 아니, 그게 아니다. 사치코님은 틀림없이, 입에서 이판사판으로 내뱉은 말을 진실로 만들어 버릴 생각인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신데렐라를 포기할 수단으로서.
"그래 맞아. 설령 임시변통으로 생각한 거라고 해도 네가 적극적으로 고른 쁘띠 스-루에 대해 이견을 내놓는다거나 더욱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권리는 우리에게 없어. 최소한 너도 한명의 학생으로써 이 학원에 있는 거니까."
그렇긴 해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려는 거라면 어느 정도 참견해야 하는 거 아닐까. -유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사치코님은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이니 반년 후에는 로사 키넨시스가 되실 분.
그런 분이 세일즈 포인트라곤 아무것도 없는, 지극히 보통의 평범한 학생을 일시적으로나마 스-루로 삼아 버리신다면 어떤 소동이 벌어질 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츠타코양 쪽이 의외성이 있어서 좋지 않을까. 어째서 그때 사치코님에게 부딪힌 것이 나였어야만 했을까.
"좋아. 인정할께."
이윽고 로사 키넨시스가 그렇게 말하자, 사치코님은 화악하고 표정이 밝아졌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주위의 공기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맞아, 바로 신데렐라가 마법에 걸리는 신처럼.
"단-"
로사 키넨시스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신데렐라 역을 그만두는 것 까지 인정한 건 아냐. 그 점, 잊지 말도록 해."
"약속은요?!"
사치코님은 컵이 휙 뒤집힐 정도의 박력으로 테이블을 쳤다.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
"약속?"
흐흥, 하고 로사 키넨시스는 코웃음쳤다.
"그건 네가 멋대로 우기고 있던 것일 뿐이잖아? 동생이 없는 인간에게 발언권은 없어, 라고 확실히 말하긴 했지. 그러니까 지금은 부디 마음껏 발언해 줘."
"그럼, 역을 그만두게 해 주세요."
"안돼."
"어째서죠."
"남자 혐오증은, '역을 그만둘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중대한 이유' 가 될 수 없어. 너의 경우, 남성을 본 것 만으로도 두드러기가 난다거나, 토하기까지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잖아? 단지 '싫다'라는 걸 일일이 인정해주고 있으면, 세상이 돌아갈 수가 없는 거야. 그런 걸 제멋대로라고 하지. 차기 로사 키넨시스인 너라면 그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고 로사 키넨시스는 자신의 손을 볼에 대고 일부러 깊은 한숨을 쉬셨다.
"내 지도부족이 되겠지.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를 줄이야 생각도 못했으니"
안쓰럽게도. 사치코님은 어떻게 대꾸할 말이 없는 듯 했다. 이렇게 대대로 장미님들은 강해져 온 것일지도 모른다. 웬지 굉장한 무대 뒤 광경을 봐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가겠어요."
사치코님은 슥 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기다려."
로사 키넨시스는 앉은 채, 자신이 때려눕힌 스-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가지 확인할께. 유미양은 사치코의 뭐지?"
"에?"
"지금도 넌, 유미양을 스-루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신데렐라 역을 그만두기 위한 재료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스-루라고 우길 셈인가. 로사 키넨시스는 그렇게 묻고 계신 거 겠지.
"물론-"
아까 한 말은 취소하겠어요. 어떻게 생각해봐도 사치코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었다.
왜냐니, 유미를 동생으로 삼는다는 것은, 사치코님이 신데렐라를 그만두고 싶었기 때문에 저지른 대 연극이었던 셈이니까. 그 계획이 틀어진 이상,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던 유미를 동생으로 해 둘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물론, 유미는 제 동생이에요."
사치코님은 예상외의 발언을 했다. 유미는 화들짝 놀라서 황송하지만 사치코님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았다.
조금 전까지 흥분하고 있었던 데다 혼란스럽기도 했었으니 일본어 사용법을 잠시 틀리신게 아닐까. 사실은 '동생이 아니에요' 라고 말하려던 게 아닐까.
"언니께서는 절 모독하실 셈이신가요? 그래서는 마치, 이용하기 위해서만 유미를 스-루로 삼은 것 같잖아요?"
어이어이, 아니었나? 하지만 역시 상대는 사치코님. 끼어들고 싶은 충동을 유미는 꾸욱 억눌렀다. 누군가 대신해서 뭔가 말해주지 않으려나.
"좋아."
로사 키넨시스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여기서 유미양을 버렸다면, 나도 너와 자매의 연을 끊을 수 밖에 없는 참이었어."
어째서 일이 이렇게나 커져야 하는 걸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는 아무런 예감도 없었다. 집 현관을 나왔을 때도, 교문을 지났을때도,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단지, 세일러 타이가 비뚤어져 있었다. 그런 별 것 아닌 일이 계기가 되어, 이런 일에 휘말려서, 지금은 파도 한가운데에 휩쓸려 있다. 파도에 휩쓸린 사람 치고는 왠지 외야에 있는 것 같지만.
"로사리오는 줬어?"
"아직 주지 않았어요. 원하신다면 여러분들 앞에서 의식을 해도 괜찮은데요?"
"그것도 괜찮겠네"
잠깐 잠깐.
다들, 사치코님을 말리지 않아도 되는 거야? 이대로라면 나처럼 지극히 보통의 여자애가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홍장미 봉오리)의 스-루(동생)가 되어 버리는 거야. 식은 차를 미소지으며 우아하게 마시고는 '그것도 괜찮겠지' 가 아니잖아?
"왜 그래? 얘 뭔가 말하고 싶은 거 같은데"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가 유미를 보았다.
"지금 여기서 의식을 치루는 것에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걸까?"
"설마. 로사리오를 받고 정식으로 자매가 될 수 있는데, 불만이 있을 학생이 있겠어?"
방정식 이야기라도 하는 것 처럼 로사 페티다(황장미님)가 중얼거린다.
"하지만, 그왜 단둘이 있는 쪽이 좋다거나."
"의외로 로맨티스트구나."
그런게 아냐. 그런게 아니지만- . 그러나 장미님들의 이야기에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유미는 그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유미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사치코님이 뭘 했냐면, 재빨리도 가슴 부근의 주머니에서 로자리오를 꺼내고 있었다.
'제정신?!'
그걸 하급생의 목에 걸고 나면 더이상 '지금 것 취소' 라고 할 수 없어지잖아. 좀 오버일지도 모르지만 로사리오의 수수(授受)는 결혼서약이나 마찬가지.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건 유미쪽인 걸까. 이건 꿈이고, 로사리오가 걸려진 순간 자명종이 울린다, 라는 흔하디 흔한 패턴의.
'하지만, 꿈에서도 아프다거나 한 거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분명히 아팠다. 시험삼아 지금 손등을 꼬집어 봤지만 역시 나름대로 아프다.
"움직이지 마, 유미"
사치코님이 명하신다. 손에 든 로사리오는 이미 걸기 쉽도록 커다란 고리가 되어 유미의 머리 위에 준비되어 있었다. 이게 목에 걸리면, 동경하던 사치코님의 쁘띠 스-루(동생)가 된다.
시렁에서 경단. 조롱박에서 팽이.(농담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는 뜻의 일본 속담-역자주)
아니, 그렇게 치자면 망아지(일본어로 팽이와 망아지는 둘다 'こま(코마)'로 발음이 같다-역자주)다. 팽이가 나온 정도로는 놀라지 않지. 망아지가 나왔으니 '설마' 하는 거니까.
아아, 지금은 그런 생각 하고 있을 때가 아냐. 생각해야할 것은 단 하나.
이래도 괜찮은 거야?
이대로 스-루(동생)가 되어 버려도, 정말 괜찮은 거야?
"저, 저깃......."
"기다려 주세요."
유미와 동시에 시마코양이 외쳤다.
"사치코님도 다른 언니분들도, 여러분 중요한 걸 잊어버리시진 않으셨나요?"
"중요한 거, 라니?"
"유미양의 마음입니다."
"유미양의 마음, 이라?"
장미님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 아이가, 로사리오를 받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말씀은 드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일단, 생각을 묻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요?"
시마코양은, 의연한 태도로 잘라 말했다. 얌전할 것 같은 외모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과연 로사 기간티아 안 뷔통(백장미 봉오리). 정말 같은 1학년일까, 하고
묻고 싶어질 정도의 어른스러움.
어쨌거나 의식은 중단되었으니, 시마코양에게는 감사할 뿐.
"과연. 설령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홍장미 봉오리)의 제안이라 해도 시마코처럼 '죄송합니다' 해 버리는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로사 키넨시스는 가볍게 견제구를 던졌다. 역시 그 소문은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유미양은 사치코님 신봉자야. 거절할 리 없는데?"
츠타코양이 옆자리의 시마코양에게 잡담처럼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애......유미양을 좀 관찰해 보니 사치코의 팬이란걸 금방 알 수 있었는걸."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이 끄덕였다. 그런가, 백면상을 들킨 건 관찰당하고 있었기 때문인 건가. 그렇다면, 어쩌면 사치코님도 금방 알아채셨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미를 여기까지 끌어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거나.
바로 옆의 사치코님은, 일이 어떻게 되건 간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투로 로사리오를 손바닥 위에서 굴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절대로 유미가 거절할 리 없다는 흔들림없는 자신이 있는 거겠지.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까 일단 물어볼까?"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는 유미에게 돌아서서 물었다.
"사치코가 널 쁘띠 스-루(동생)으로 하고 싶다는데. 넌 로사리오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니?"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시면. 다음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사치코님의 동생이 된다는 것은, 헐리우드 영화 스타와 결혼한다는 정도의 허황되고 꿈같은 이야기니까.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니까 멋대로 상상을 펼쳐서 즐기거나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그 꿈으로의 직행 티켓이 눈앞에 아른아른 보이고 있다. 예스라고 하지 않는 게 거짓말이다.
하지만, 역시 '이런 걸로 된 거야?' 하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 말하고 있다. 입을 다문 유미에게 전원이 주목하고 있었다. 유미는 마음을 굳히고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역시 사치코님의 스-루는 될 수 없어요."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재밌어졌다."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가 무책임하게 웃고,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는 눈을 반짝이며, 로사 페티다(황장미님)는 입을 O자로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어째서, 라고 물을 권리 정도는 나한테 있겠지"
사치코님은 관자놀이를 꿈틀꿈틀 떨며 말했다.
"확실히 저, 사치코님의 팬이었지만요"
"왜 그래, 본성을 보고 싫어졌어?"
로사 키넨시스가 끼어들어 유미에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던 사치코님과는 조금 달랐지만, 삐지거나 화내거나 하는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러니까 이유는 사치코님의 성격이 싫다거나 하는 식으로 잘라 말할 수 없는 부분에 있다.
"잘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팬이라고 해서 모두 동생이 되고 싶냐면 그런 것도 아니라고..."
"흐응"
"팬이기 때문에야 말로 팬 나름의 프라이드가 있는 법이라서"
"당연히 꼬리를 흔들며 따라오겠지, 하고 생각하는 건 불쾌하다. 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요..."
마음을 말로 변환하는 작업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사치코는 또다시 채였다는 거지"
"불쌍한 사치코, 정신없는 2연패"
"올해 1학년들 꽤 하는데"
장미님들은 사치코님을 둘러싸고 말했다. 위로하고 있다기 보다는 재미있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불쌍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신데렐라 건은 어떻게 안 될 까요?"
사치코님은 무리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며 말했다.
"어이구, 동정받는 걸 싫어하는 사치코가 우는 소릴 하고 있어."
"신기해라."
"어떻게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알고 있으면서.
한발 물러나서 전체를 둘러보면,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사치코님은 장미님들의 장난감이 되어 있다.
"저나 하나데라 학원의 학생회장이나, 둘중 한명을 그만두게 해 주세요."
"무슨 말 하는 거니. 유미양에게 채였다고 해서, 왜 널 동정해 줘야 하는 건데"
확실히, 그런 억지는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억지로 남자와 춤을 추게 하는 것도 안쓰럽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남자와 함께 공연하기 싫어서 유미를 동생으로 삼으려고까지 했는데.
"저, 저기"
무심코, 유미는 목소리를 높였다.
"너, 아직 있었어?"
채인데 대한 거북함 때문일까. 사치코님은 새침하게 얄미운 소리를 했다. 바로 옆에 있으니까 돌아갔는지 어떤지는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귀엽지 않다니까.
"저기, 하나데라 학원 쪽에 부탁해서, 이번에는 사양해 주시도록 하면 안될까요?"
"흐응, 너 이제와서 사치코 편을 들어 주는 거야?"
로사 키넨시스는 턱선에서 가지런히 자른 머리카락을 유쾌한 듯 흔들었다.
"편을 든다거나 하는거랑은 다릅니다."
말하면서 유미 스스로가 놀랐다. 로사 키넨시스에게 대들고 있어. 뭘까. 평소의 내가 아닌 것 같아.
"하나데라의 학생회장에게는 정식으로 의뢰를 해 버렸으니 무리야."
"그럼, 적어도 사치코님의 역을 바꿔 드리는건 어떨까요?"
"역을 바꿔?"
"예를 들면 시마코양과 역을 바꾼다거나. 시마코양이라면 사치코님께 지지 않을 정도로 예쁘고, 거기다 로사 기간티아 안 뷔통(백장미 봉오리)이니까요."
갑자기 지명당한 시마코양이 '무슨 말 하는 거야' 라는 듯이 유미를 보았다. 마음 속에서 '미안' 하고 손을 맞댄다. 예를 들면, 이었지만 역시 곤란했을까나.
"1학년인 시마코에게 주역을?"
"학년은 여기서 관계없는 것 아닐까요."
"그것도 그렇긴 해."
앞으로 조금이다, 하고 생각했다. 로사 키넨시스는 조금 생각하는 듯이 천장을 바라봤다.
"애초에 연락이 제대로 안 된 것도 사치코님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여러분께도-"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만 해!"
바로 옆의 사치코님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 이상 말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어."
"사치코님..."
평소의 히스테리가 아니라 좀더 무게있는 말이었다.
"나를 위해서 말해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하지만, 나를 위해서라면 더 이상 언니분들을 비난하지 말아 줘."
사치코님은 살짝 유미의 어깨를 건드리고는 우향 우해서 장미님들께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잘 타이르겠습니다.."
살짝 닿은 어깨가 슬펐다. 사치코님을 도우려고 했는데, 어쩌면 쓸데없는 짓을 해버린 걸까.
"확실히 말이지."
로사 기간티아가 작게 말했다.
"유미양이 말하려고 한 것도 틀린 건 아냐. 오늘에야 사치코가 알게 된 거라면, 역시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어. 역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다른 장미님들은 곧바로 이견을 들었다. 이유가 어떻건 간에, 의상이나 포스터의 발주도 끝났고, 이제 곧 무대 연습이 시작되려는 지금에 와서 배역교대는 힘들다는 것이 주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리하게 남학생과 춤추게 하는 것도 어떨까 싶은데. 사치코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과연. 후배에게 남득할 수 없는 걸 강요하는 사람이 학생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겠나 하는 거로군. 게다가 이 '신데렐라'는 산백합회 간부라는 간판을 내걸고 공연하는 거고."
"하지만, 이제와서 바꾸는 것도 좀 어려운데."
로사 키넨시스(홍장미님)와 로사 페티다(황장미님)의 중얼거림에 로사 기간티아(백장미님)는 '그렇지도 않아' 하고 대답했다.
"요는, 사치코가 납득해서 신데렐라 역을 맡게 되면 되는 거야."
"왕자역은 바꿀 수 없는데?"
"맞아. 캐스팅은 바꾸지 않은 채로."
로사 기간티아는 제안을 내놓았다.
"내기를 하자."
"내기?"
"억지로 신데렐라를 해라, 라고 하는 것도 공평하지 못해. 그러니까 사치코에게도 찬스를 줘서, 납득한 상태에서 벌게임을 하도록 하자는 거지."
과연.
하지만 신경쓰이는 것은, 처음부터 사치코님이 진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듯한 말투라는 것. 로사 기간티아는 로사 키넨시스와 로사 페티다에게 귀속말을 해서 이미 동의를 얻은 것 같다. 그것도 사치코님의 열세를 뒷받침하는 듯이 느껴졌다.
"제가 이기면요?"
그러나 사치코님은 상관하지 않고 물었다.
"이번에야말로 약속하겠어. 신데렐라를 그만둬도 돼."
"알겠습니다. 그 내기, 하도록 하죠."
"잠깐만요 사치코님! 내용도 듣지 않고 대답해버려도 괜찮은 건가요?"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유미는 무심코 말해 버리고 말았다.
"상관없어. 지더라도 현상유지니까."
사치코님, 보기랑은 다르게 승부사. 결벽성이 있다고 해서 내기에 혐오감을 가진다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럼, 유미양의 요구를 받아들여 내기의 내용을 발표하지."
소리 없는 웃음을 띄우며 로사 기간티아는 간결하게 말했다.
"사치코가 유미양을 동생으로 삼을 수 있는가 없는가. 물론 사치코는 '할 수 있다.' 쪽에 걸어줘야겠어."
"엣?!"
가장 놀란 건 물론 유미였다.
'이미 내 이야기는 끝난 거 아니었어-!?'
"한번은 거절당한 너. 학원제 전날까지 로사리오를 받도록 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야. 그걸 할 수 있다면, 그 시점에서 신데렐라를 포기해도 되는 것으로 하지. 대신, 그때까지는 주역으로서 제대로 연습에 참가하는 거야."
"과연. 하나데라의 학생회장과 손을 잡고 싶지 않다면 하루라도 빨리 유미를 함락시켜라, 그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우리는 전혀 관여하지 않겠어. 승부는 네 노력에 달려 있지. 조건적으로도 나쁘지않다고 보는데?"
"하는 보람이 있겠군요."
사치코님은 승리를 자신하는 듯이 미소지었다.
"맞아맞아, 한가지 말해두겠는데."
로사 기간티아는 빙글하고 유미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사치코의 편을 들어 주려고 마음에도 없는데 로사리오를 받아들이거나 하지 마. 네가 OK해서 신데렐라 역에 구멍이 생기면, 거기는 네가 들어가게 될 테니까."
"엣, 왜 제가"
"무슨 소리야, 로사리오를 받은 시점에서 너는 사치코의 스-루. 언니가 빠진 구멍을 메우는 건 당연하잖아?"
그런, 말도 안되는.
"저, 저 같은 애한테, 사치코님의 대역은 무리에요! 그것만은 정말 절대로!"
"괜찮아. 결코 로사리오를 받지 않을 것. 그것만 지키면 사치코의 패배가 결정되는 거니까."
게다가 유미로 결정된다면 그것도 재미있으니까 괜찮아,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로사 키넨시스등은 멋대로 해주신다.
"그, 그럼, 장미님들과 사치코님의 내기라기 보다는 사치코님과 저의 승부가 되는 게─"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 …뭐, 원망하려면 사치코를 구하고 싶다는 따위의 불심을 한 순간이라도 떠올린 자신을 원망하도록 해."
로사 페티다가 말씀하신 '불심(佛心)'은, 리리안 여학원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걸어가면서 츠타코양이 중얼거렸다.
"왜 바로 OK하지 않았어. 유미양이 동생이 되면, 사치코님과 교섭도 수월해졌을 텐데."
가을날은 갑자기 해가 떨어지는 법이라, 유미가 장미의 관에서 해방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황혼이라고 할 만한 시간대가 되어 있었다.
"그럼 츠타코양은 거기서 내가 아니라 사진을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잖아.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진부의 에이스, 다케시마 츠타코양이셨던가요.
"하지만, 재미있어졌네."
츠타코양은 로사 기간티아와 비슷한 말을 하며 웃었다.
"자기 일 아니라고."
"내 일이 아니니까 속편한 거야. 그런가, 유미양도 드디어 때가 된 걸까나. 귀중한 언니없는 동료가 한명 주는건 아쉽지만, 뭐 상대가 사치코님이라서야 함락되는 것도 시간 문제 아닐까? 기왕이면 '몇일째'까지 자세히 정하는게 재미있었을텐데."
"츠타코양, 사치코님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유미양 쪽이 에너지 없어보이잖아."
"……"
사실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거나 하는 것이다. 정작 정면에서 공격당하면, 그 파워에 밀려서 무심코 고개를 세로로 끄덕여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신데렐라가 걸려있는 거니까 질 수야 없지."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는 유미에게 츠타코양은 '꼭 하고싶다는 것처럼 들려.'하고 작게 정정해주었다.
마리아상이 있는 곳까지 오자, 두 사람은 멈춰서 손을 모았다. 이건 습관. 등교할 때와 하교할 때, 매일 한번씩. 그 외에도 이 상 앞을 지나가게 되면 꼭 인사를 한다.
'마리아님,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어요. 될 수 있으면 저에게 하루빨리 평온한 나날을 돌려주세요.'
눈을 뜨고 돌아서자, 바로 그때.
"잠깐 기다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렀다. 마지 데자 부. 아침과 마찬가지로, 마리아님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낭랑한 목소리.
"사치코님..."
달려온 건지 조금 어깨를 들썩이며, 사치코님은 유미의 등 뒤 약 10미터 정도 위치에서 있었다.
"각오해 둬. 반드시 너의 언니가 되어 보일 테니까."
고약한 냄새를 발하는 은행 열매가 떨어지기 시작한 때임에도, 등을 꼿꼿이 펴고 선언하는 사치코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멋있었다.
"그럼 안녕히(ごきげんよう).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해."
하고 싶은 말만 하고는 생글 웃고서, 사치코님은 건물 쪽으로 떠나갔다.
"뭔가, 멋지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츠타코양이 중얼거렸다.
유미도 그때, 자신의 마음이 기우뚱하고 흔들리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