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후 의외의 결말 -1- 붉은 악몽

아빠의 시급

계속 이어진 잔업으로 남자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언제나 늦은 밤이었다. 남자가 집에 왔을 때 아내는 5살이 된 아들을 재우면서 그대로 함께 잠이 든 적이 많았다. 두 사람이 깨지 않도록 어두운 거실에서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아내가 준비해 둔 저녁을 먹는다. 유일한 즐거움인 맥주를 마시면서 볼륨을 줄인 TV를 보다가 샤워를 한 뒤 잠이 든다. 아침에는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집을 나와 출근한다. 이것이 한 아이의 아버지인 남자의 일상이었다.
가족과 더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또 하고 싶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다고 가족을 깨우는 것도 미안했고, 솔직히 말해 그 시간에 부족한 잠을 자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할 만큼 남자는 지쳐 있었다.
그 날도 남자는 평소처럼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 안은 평소와 달랐다. 문을 열자 잠옷을 입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주말에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아직 안 잔 거니? 엄마는 주무시지? 늦었으니 빨리 침대로 가서 자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아버지는 안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빠, 저기요. 아빠한테 궁금한 게 있어서 기다렸어요."
몹시 피곤하여 빨리 저녁을 먹고 자고 싶었다. 부자 간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그건 꼭 지금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이 쯤에서 대화를 끊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는 대답했다.
"뭐지?"
"아빠는 회사에서 일하잖아요. 1시간 일하면 얼마나 받나요?"
왜 이런 질문을 할까? 아빠는 말했다.
"넌 몰라도 돼. 됐으니까 어서 가서 자."
"알려 주면 잘게요. 네? 말해 주세요. 얼마예요?"
아들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붙잡은 손을 붕붕 흔들면서 애원했다.
"돈을 버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란다. 아빠도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1시간 정도면…. 그래, 30달러 정도겠다. 이제 됐지? 어서 가서 자."
그렇게 말하며 쫓아내듯이 아이에게 자라고 윽박질렀다.

다음 날, 남자가 늦은 밤에 집에 들어오자 이번에도 거실 불이켜져 있었다. 하지만 남자를 기다린 사람은 아들이 아닌 아내였다.
아내의 이야기로는, 아들이 심부름 삯을 받으며 이웃 사람들을 도와 주고 있다고 했다. 물론 아이가 번 돈은 푼돈이지만, 금액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마치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는 인상을 이웃들에게 심어 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일 때문에 피곤해도 오늘만큼은 제대로 말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아들을 좀 깨워 줄래?"
아내에게 그는 말했다.

졸음에 겨워 눈을 비비던 아들은, 모처럼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 게 좋았는지 금세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빠의 엄격한 목소리에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곧 고개를 숙였다.
"이웃 분들에게 돈을 받고 있다며? 왜 그런 일을 한 거지? 네가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도록 아빠는 매일 늦게까지 일하고 있어. 과자나 장난감도 네가 갖고 싶다고 하면 다 사 줬잖아. 집도 있고 옷도 있어. 이걸로 충분하잖니?"
어느 새 직장 부하를 혼내듯이 하고 말았다. 아내의 얼굴을 보니, 아내도 '이제 됐어요.' 라고 말하듯이 눈짓했다.
"아빠가 한 말, 이해하지? 아빠가 말이야, 매일 계속 일만 하잖아.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고 와서 좀 화가 나 있었어. 1시간에 30달러를 버는 게 이렇게 힘들단다. 그나저나 넌 왜 돈이 필요했던 거니? 그렇게 돈을 벌어서 뭘 사려고 했는데?"
그 말에 아들은 갑자기 후다닥 거실을 달려나가, 방에서 작은 저금통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들에게 건네받은 저금통의 뚜껑을 여니 안에서 수많은 동전이 나왔다. 이 동전의 수만큼 아들은 이웃 사람들의 심부름을 했던 것이다.
"아빠, 나 드디어 30달러를 만들었어요! 이걸로 아빠의 1시간을 살게요. 네? 아빠! 함께 놀아요. 이 돈을 아빠에게 드릴 테니 1시간만 함께 놀아 주세요."
남자의 손에서 동전이 우수수 떨어졌다. 웃음 가득한 아이와 대조적으로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것은 남자였다.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고바야시 료스케


동물원

조지는 팬터마임을 하는 예술인이다. 팬터마임은 대사 없이 몸의 움직임만으로 표현하는 연극으로, 그는 벌써 10년에 가까운 경력자지만 세상에 알려진 예술인은 아니었다. 큰 쇼에 초대받은 적도 없고 작은 극장이나 술집 무대, 야외 이벤트 등으로 근근이 먹고 살았다. 하지만 최근 그를 즐겨 불러 주던 극장이 파산한 데다가 큰 행사도 없어서 일이 딱 끊어졌다. 그는 '불러 주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자!' 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지는 가까운 동물원을 찾았다. 예상만큼 혼잡하진 않았지만 수많은 인파가 있었다. 동물의 한가운데 있는 넓은 광장에서 팬터마임을 시작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모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니 동전이 들어왔다.
"이거 짭짤한데?"
신이 난 조지는 동물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코끼리, 곰, 원숭이, 고릴라까지. 우스꽝스러운 동작은 큰 반응을 얻어 구경꾼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 유난히 예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쇼가 일단락되자, 남자는 조지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이 동물원 원장입니다. 함께 사무실까지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조지는 '큰 일 났다, 화 났나 봐.' 라며 자책했다. 사실 허가를 받고 퍼포먼스를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한 원장은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구세주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멍하게 서 있는 조지에게 원장은 슬픈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저희 동물원 고릴라가 죽었습니다. 그 고릴라…, '콘'은 똑똑하고 애교가 많아서 저희 동물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아이였죠. 그 아이가 보이지 않으니 손님들도 점점 줄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불경기로 힘든 판이었는데…. 물론 그 아이를 대신한 고릴라를 찾고는 있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게다가 콘처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고릴라를 찾을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고요."
원장은 진지한 눈빛으로 조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고릴라가 되어 주십시오. 동물 옷을 입고 고릴라 역할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사례는 할 겁니다."
그가 제시한 금액은 지금 형편의 조지에게는 꿈만 같은 액수였다. 나쁜 제안은 아니다. 조지는 결심했다.
"알겠습니다. 거래를 받아들이죠."

다음 날부터 그의 생활은 180˚ 달라졌다. 아침 7시에 일어나 8시 반까지 '출근'한 뒤, 해가 저물 때까지 주어진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마치 샐러리맨 같은 일상이지만, 작업 내용은 매우 특수했다. 동물원에 도착하면 조지는 고릴라 옷을 입고 손님이 오기 전에 우리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폐장 시간까지 고릴라를 연기했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해 보니 최고의 직장이었다. 종일 뒹굴어도 되고 마음 내킬 때 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잠만 자면 손님들이 지루해 하니, 가끔 우리에 설치된 타이어에 매달리거나 손님을 올리기도 했다. 먹이로 받은 바나나 껍질을 던지면 손님들은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동물 옷은 정교해서 조지만 제대로 연기하면 결코 들킬 일이 없었다. 보람도 있다. 무엇보다 본업인 팬터마임으로는 단 한 번도 모으지 못했던 수많은 손님을 모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렇게 그는 동물원의 인기인이 되었다. '이게 내 천직인지도 몰라.'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게만 흘러간 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자 손님이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대신 옆에 있는 사자 우리가 시끌벅적해졌다. 고릴라에 대한 흥미는 떨어졌지만, 손님들의 관심은 맹수인 사자에게로 옮겨 갔다. 모처럼 얻은 인기를 잃고 싶지 않았던 조지는 분한 듯이 옆 우리의 사자를 보았다. 두 우리 사이에는 높고 단단한 울타리가 있다. 물론 지나갈 수는 없지만 운동 신경이 좋은 그라면 올라갈 수는 있었다. 순간적으로 좋은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조지는 펜스를 올라가 펜스 위를 포복하여 움직였다. 그리고 사자가 있는 곳까지 가, 손발을 쭉 뻗고 놀려 댔다. 사자는 그 모습을 보고 울부짖었지만, 위에까지 올라올 수는 없었다. 그러자 조지는 엉덩이를 두드리거나 놀리는 듯한 행동을 계속했다. 사자는 매우 화가 났지만, 손님들은 크게 술렁였다.
"저 고릴라 좀 봐. 너무 웃겨!"
"최고야!"
조지는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는 만족했다.
이 상황을 가장 반긴 사람은 동물원 원장이었다. 그는 이 볼거리에 매우 만족해 하며 조지의 급여를 더 올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상태로 며칠이 지났다. 조지는 계속 사자를 놀려댔고, 손님들은 늘어났으며, 그의 급여도 덩달아 올라갔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최악의 사고가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화가 난 사자 위에서 놀려 대던 조지는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사자 우리 안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떨어진 충격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사자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천천히 고릴라에게 다가왔다. 조지는 공포에 휩싸였다. 상대는 맹수인 사자인 데다가 자신이 그 동안 계속 놀려 왔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사자가 놓칠 리 없었다. 관객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상황을 지켜 보았다. 모두 공포에 떨면서도 누구 하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조지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힘이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포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자는 점점 가까이 왔다.
"사, 사람 살려~."
목 깊숙한 곳에서 드디어 모기만 한 소리를 쥐어 짠 순간, 사자가 날아들어 그를 덮쳤다. 버둥버둥 저항하지도 못하고 사자에게 깔리고 말았다. 비명을 지를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아, 이제 끝장이다.
체념한 조지의 귓가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내지 마! 이 바보야."
조지가 깜짝 놀라 사자의 눈을 보니, 커다란 이빨이 늘어선 입 안 쪽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둘 다 직장을 잃고 싶진 않잖아?"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구와바타케 키누코


노부인의 초상

어느 나라에 한 화가가 있었다. 특별히 유명한 화가가 아닌지라 대표작도 없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화가였다.
어느 날, 그의 화실로 한 노부인이 찾아왔다. 옷차림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어딘가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노부인이 말했다.
"제 초상화를 그려 주세요.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자, 그럼 그 쪽 의자에 앉으시겠어요?"
노부인을 의자에 앉힌 뒤, 화가는 연필을 놀렸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지 한 시간 정도 지나, 초상화를 완성했다. 화가는 말했다.
"이런 초상화는 어떠십니까?"
화가는 자신이 그린 것을 노부인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자 노부인은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초상화군요. 하지만 전 이런 그림을 원한 게 아닙니다."
"네?"
"이 그림 속의 저는 아무리 봐도 지금의 저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여요. 이건 제가 아니에요."
여성 고객들은 대부분 실제 나이보다 젊게 보이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한 고객은 처음이었다. 화가가 당황하자, 노부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 주세요. 주름이 깊게 팬, 나이가 든 지금의 저를요.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부인을 그대로 그렸군' 하고 생각할 만한 그림을 원합니다."
화가는 노부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사이 그는 깨달았다. 이 노부인은 늙어가는 자신을 피하지 않고, 지금의 모습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부인, 당신은 매우 훌륭한 생각을 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가진 기술을 총동원해서 있는 그대로의 부인을 그리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오늘부터 매일 이 화실로 와 주십시오. 저는 부인을 더 깊이 알고 난 뒤 당신이라는 사람을 그림 속에 집어넣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노부인은 약속한 대로 그 뒤로 매일같이 화실을 찾았다. 화가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주름 하나하나, 기미 하나하나까지 정성을 다해 그렸다.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노부인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3년 전에 사랑하는 남편이 병으로 사망했으며, 그 뒤로 한참을 눈물로 지냈다고 했다. 아무것도 포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노부인은 솔직히 말했다. 어떤 때는 화가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
"부끄럽지만, 지금 전 세상에 숨긴 채 젊은 남자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를 기쁘게 해 주려고 죽은 남편의 유품인 보석을 전부 내다 팔아 돈으로 바꿔 버렸죠."
뜻밖의 고백이었다. 눈 앞에 있는 노부인은 아무리 봐도 그런 짓을 할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부인의 표정을 관찰하는 동안, 화가는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분명 노부인은 그 젊은 남자를 한 사람의 신사로 보이게 하고 싶었던 거다. 세간의 나쁜 소문도 각오하고 젊은 남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거다. 이 노부인은 얼마나 자상한가. 그 날 화가는 초상화 속 부인의 눈가에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한 개의 주름을 그려 넣었다. 노부인의 자상함이 두드러지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며칠 뒤, 화가는 노부인에게 다른 고백을 들었다.
"사실 저와 사는 남자는 제 재산을 노리고 있어요."
화가는 노부인을 동정했다. 이 얼마나 슬픈 사랑이란 말인가. 그것을 알면서도 견디는 노부인의 표정이 화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슬프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 날 화가는 초상화 속 노부인의 눈동자를 짙은 회색으로 바꾸었다. 노부인의 슬픔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난 뒤, 이번에는 이런 고백을 들었다.
"사실 그 남자에게는 저 외에 다른 젊은 여인이 있어요."
그 날 화가는 초상화 속 노부인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 넣었다. 남자의 바람마저 용서하는 노부인의 넓은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 이런 고백도 들었다. 오늘의 고백은 화가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내용이었다.
"사실 지금 전 사귀는 남자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해 있어요. 저를 죽이고 재산을 빼앗으려는 거죠. 아마 그 젊은 여인의 꼬임에 빠진 모양이에요."
그 때만큼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화가는 말했다.
"송구합니다만, 제가 부인을 위해 뭔가를 해 드릴 일이 있을까요?"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지금의 제 모습만 그려 주세요."
노부인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노부인은 남자에게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자신이 남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르쳐 주려는 게 분명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타인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일까. 화가는 깊이 감동하며 초상화 속 부인의 배경에 금빛 빛줄기를 그려 넣었다. 그 성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 뒤로 한 달 정도 지나, 드디어 초상화를 완성했다. 훌륭한 작품이었다. 화가는 지금까지 이토록 훌륭한 작품을 그린 적이 없었다. 노부인은 감격해서 말했다.
"너무 멋있어요. 백발 한 가닥, 한 가닥까지 정성을 다해 그리셨군요. 화가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건 초상화 대금이에요. 받아 주세요."
노부인이 내민 봉투에는 일반적인 초상화 대금의 세 배나 되는 금액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화가는 봉투를 받지 않았다.
"돈은 괜찮습니다. 이 그림을 그리게 해 준 당신께 제가 오히려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죽기 전에 이런 그림을 완성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자 노부인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완성? 아니, 아니에요. 그러면 곤란해요. 이제부터 그림에 다시 손을 대야 합니다."
"손을 댄다고요? 전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요. 도대체 어디를…."
"초상화 속 저를 보석으로 장식해 주세요. 다이아몬드 반지와 백금 티아라, 그리고 목에는 순금 목걸이를 그려 주세요."
화가는 이상했다. 하지만 바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이 의뢰인이 원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를 할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화가는 물었다.
"알겠습니다. 보석을 그리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보석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노부인은 예의 우아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말했다.
"초상화에 수많은 보석을 그려 넣은 뒤, 제가 그 남자에게 살해 당했다 칩시다. 그 뒤 남자를 꾄 여자가 이 그림을 보겠지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는데요?"
"이 초상화를 보고 그 여자는 여기에 그려진 보석을 필사적으로 찾을 겁니다. 있지도 않은 보석을 눈이 시뻘게져서 찾을 거라고요. 그 잔뜩 초조해하는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는 너무 웃겨서, 웃겨 죽을 것만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노부인은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요시다 준


신이 내린 기적

잭은 매우 신성이 깊은 남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잠들기 전에 빼놓지 않고 기도했다. 식사 전에도 반드시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을 때도, 길거리에서 핫도그를 먹을 때도 기도했다. 시시한 책 대신에 성경을 애독했다. 그 중에서도 신이 일으킨 기적과 관련된 이야기가 어린 잭의 마음을 빼앗았다. 신에게 사랑받는 인간이 위기에 빠졌을 때 하늘에서 구원의 손길이 내려온다. 진심으로 기원하면 돌이 빵이 되기도 하고, 바다가 두 갈래 길로 갈라져 길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어른이 되어 학교를 졸업한 잭은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매우 성실히 살았다. 고지식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최선을 다해 일했고 거짓말도 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은 그를 신뢰했다. 잭은 평소에 소박한 삶을 영위했으며, 허튼 데 돈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거대한 크루즈에 탈 일이 생겼다. 학생 시절 친구가 배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잭도 초대한 것이다.
바다로 나간 배에서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쾅! 하는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배가 뒤뚱거리며 흔들렸다. 암초에 부딪혀 선체에 큰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승객들은 당황하며 너도나도 살겠다고 도망쳤다. 잭도 구명 보트에 타려고 했으나, 이미 만선이라 그가 탈 만한 공간이 없었다. 잭은 배에 남았다. 하지만 포기한 건 아니었다. 갑판에 서서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지금이야말로 기적이 일어날 때다!"
임박한 죽음이 두려워 떨면서도 기적을 만날 예감에 잭은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배는 가라앉기만 했다. 잭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때 배 앞에서 작은 배 하나가 다가왔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배는 잭을 발견하고는 도와 주려고 했다. 선장이 소리쳤다.
"빨리요! 이 쪽으로 넘어오세요!"
그러나 잭은 기도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어선은 그대로 지나쳤다. 남은 잭은 계속 기도했다.
"분명 신이 나타나실 거야. 신이 나를 구해주실 거라고."
그러자 하늘에서 굉음이 들렸다. 위를 올려다 보니 헬리콥터 한 대가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것도 우연히 그 위를 지나던 길이었다. 잭의 머리 위에서 호버링을 하며 밧줄을 내렸다. 조종사는 "빨리 잡으세요!"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잭은 손을 뻗으려 하지 않았다. 그 때 "살려 주세요!" 하는 비명이 들렸다. 파도에 떠내려 가던 다른 승객이었다. 헬리콥터는 비명이 들린 쪽으로 날아갔다.
배는 여전히 가라앉고 있었다. 이제는 잭의 발도 물에 잠기기 시작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기도했다.
"이제 곧 신이 나타날 거야!"
그 때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잭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것은 고속선이었다. 고속선은 침몰하는 배에 접근했다. 선장이 소리쳤다.
"빨리 이 쪽으로 건너와요!"
잭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아니요, 전 신을 믿습니다. 신이 절 구하러 오실 거예요."
이제 배는 대부분 물에 잠겼다. 그러면서 소용돌이가 생기는 바람에 고속선은 배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배는 완전히 침몰했고 잭의 모습도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니 잭은 천국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구름 위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문 앞에는 새하얀 옷을 차려입은 성인이 잭을 마중하려 나왔다. 그 모든 것이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았다. 하지만 잭은 잔뜩 골이 난 목소리로 성인에게 말했다.
"신을 만나게 해 주세요!"
잭은 신과 만났다. 신은 상상했던 대로 긴 수염을 기른 위엄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잭은 주저없이 이렇게 말했다.
"신이시여,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 당신만 믿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저를 그대로 방관하셨어요. 왜 그러셨습니까!"
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정녕 몰랐단 말인가? 나는 그대를 구하려고 배를 두 번, 그리고 헬리콥터를 한 번 보냈다!"
잭은 신심이 매우 깊은 남자였다. 그리고 아주 성실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매우 눈치 없는 남자였다.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구와바타케 키누코


교육의 필요성

이것은 아직 그 나라에 두 개의 세계가 있었을 때 이야기다. 세계를 나눈 벽은 단 한 개, 그것은 사람이 그은 선도, 언어도 아닌 피부 색이었다. 하얀 피부와 검은 피부, 어느 쪽을 타고 태어날지는 미리 선택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때는 태어난 뒤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었다. 그 나라에서는 같은 마을에 태어났어도 피부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는 세계와 다니는 학교까지 완전히 달랐다. 이 마을에서는 흰 피부로 태어난 아이는 언덕 위에 있는 새하얀 학교를 다녔고, 창에서 불어 오는 기분 좋은 바람을 온 몸으로 받으며 수업을 받았다. 한편, 검은 피부로 태어난 아이는 언덕 아래에 있는 회색 학교에 다니며 묵직한 늪의 공기를 마시면서 수업을 받았다. 피부 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두 세계는 전혀 고류하지 않았다. 두 학교는 서로의 존재를 알기는 해도 연락조차 하지 않았고, 영원히 이 상태가 계속되리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 정부에서 이 마을에 학교 시설 개선을 위해 12만 란드의 예산을 책정했다. 이 예산을 백인 학교와 흑인 학교가 나누어서 쓰라는 지시도 함께 내려왔다. 두 학교의 교장은 크게 기뻐하며 자신들의 학교 개선에 필요한 예산을 계산했다. 먼저 계산을 끝낸 쪽은 백인 학교 교장이었다. 그는 11만 란드의 예산을 제시했다. 총 예산이 12만 란드였기에 이 상태라면 흑인 학교에는 고작 1만 란드 밖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흑인 학교 교장은 물론 불만이었다. 그래서 예산 집행을 확정하기 전에 그는 백인 학교 교장과 이야기하기 위해 백인 학교로 갔다.
처음으로 만난 백인 학교 교장은 뱀처럼 차가운 얼굴을 한 남자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햇볕에 그을린 적이 없는 듯한 새하얀 피부를 지녔는데, 그의 파란 눈은 언짢은 듯이 가늘어져 있었다. 그와 그가 데려온 백인 무리들 앞에서 흑인 학교 교장은 기가 죽었다. 하지만 흑인이라서 망설일 필요는 전혀 없다. 오늘은 흑인 학교를 위해 필요한 예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백인 교장은 흑인 교장이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을 무시하고는 걸어갔다. 백인들이 이런 식으로 무시하는 건 늘 있는 일이라 블랙 교장은 개의치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쫓았다.

백인 교장이 처음 안내한 곳은 넓디 넓은 교정이었다. 언덕 아래에 있는 흑인 학교 교정과는 달리 햇볕도 따스하고 통풍도 좋았다. 이 교정에서 마음껏 달릴 수만 있다면 무척 기분이 좋으리라. 도대체 이 교정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흑인 교장에게 백인 교장이 가슴을 펴며 말했다.
"우리는 이번 예산으로 이 곳에 체육관을 세울 예정입니다."
"왜요? 이렇게 훌륭한 교정이 있는데 일부러 실내에서 운동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당신과는 달리 우리는 섬세합니다. 비 오는 날은 물론 더운 날에도 학생들이 제대로 운동하려면 지붕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상상도 못할 내용이겠지만요."
"……."
흑인 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픈 듯이 고개를 숙이는 그를 백인들 누구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 다음에 백인 교장이 안내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오래 된 책 냄새가 흑인 교장을 덮쳤다. 자신들도 이들처럼 오래 된 책을 두었지만, 마치 헛간 같은 흑인 학교의 도서관과는 전혀 달랐다. 여기에는 튼튼한 서가 끝에서 끝까지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여기에는 책이 몇 권이나 있습니까? 훌륭한 도서관이군요."
흑인 교장이 진심으로 부러운 듯이 말했다. 백인 교장은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로 부럽다고 말씀하시다니 배포가 작은 분이군요.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예산을 사용해 도서관 책을 두 배 늘릴 예정입니다."
"여기 있는 책을 두 배로…."
흑인 교장이 아연한 표정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 백인 교장은 그의 얼굴이 분하다는 듯이 일그러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가슴을 펴며 말을 이었다.
"당신 학교는 예산 배분에 불만이 있는 것 같던데, 이젠 아시겠지요? 우리가 요구한 금액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전부 교육을 위해 필요한 요구였습니다. 서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당신들에겐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교육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백인 교장이 짐짓 위엄 있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무슨 말을 하려던 흑인 교장은 그냥 말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왜 그러시죠? 아직도 불만이 있는 겁니까?"
"불만이라니요. 저는 당신의 생각을 이해했을 뿐입니다."
더 항의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순순히 받아들이다니 어째 한 방 먹은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이 학교를 보고 자기 주제를 알았겠지?' 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득의양양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흑인 교장은 똑똑히 말했다.
"이번에 안내해 주신 덕에 잘 알았습니다. 당신은 이번 예산 전부를 백인 아이들의 교육에 사용할 계획이시군요?"
"당연하죠."
"그렇다면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교육비 배분은 백인 교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인간'이 되기 위한 진짜 교육이 필요한 건 저희 흑인이 아닌 당신을 백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들이 바른 교육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번 예산 전부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ㅏㄷ."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마키 카즈키


멋있는 선물

엘레나와 알렉세이는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부부였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큰 싸움 없이 원만한 결혼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성실하며 자상했다. 거기에 머리도 좋았다. 대학에서 과학을 연구 중이다. 독서가 취미라 박학다식했고, 엘레나가 모르는 내용을 물으면 바로 알려 주었다. 거기에 알렉세이는 쓸 데 없이 돈을 쓰지 않았다. 음주나 흡연, 도박도 하지 않았다. 교통비와 점심값 외에 돈을 쓰는 건 책을 살 때 뿐이었다.
느긋한 성격의 엘레나는 남편을 많이 의지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하지만 남편에게 딱 한 가지 불만인 점이 있었다. 조금만 더 로맨틱하거나 세심한 성격이면 좋았을 것이다. 평소는 점잖아도 좋다. 하지만 때로는 정열적이길 바랐다. 결혼 전 데이트할 때도 공원에서 산책하는 게 다였을 뿐, 화려한 고급 레스토랑 같은 데 데려가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그래도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는 선물을 준다. 알렉세이가 엘레나에게 늘 선물하는 것은 책이었다. 처음에는 명작이라고 할 만한 장편 소설 같은 두툼한 책을 선물해 주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제대로 읽는 것 같지 않자, 그림책이나 화집으로 선물을 바꾸었고 최근에는 요리나 건강 관리법 같은 실용서를 선물했다.
그의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가끔은 액세서리 같은 화려한 선물을 준다면 더 기쁠 것 같다. 그가 선물로 준 액세서리는 결혼 반지 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일요일, 두 사람은 백화점으로 쇼핑하러 갔다. 목적지인 매장에 가던 도중에, 엘레나는 보석점 앞에 멈추어 섰다. 유리 장식장 안에 진열된 목걸이. 백금으로 만든 목걸이 줄에 다이아몬드로 만든 펜던트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는 가격을 흘끔 보았다. 쉽게 살 만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데다가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알렉세이가 손도 못 댈 가격은 아니었다. 말이라도 건네 볼까 싶어 고개를 돌리니, 알렉세이는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다음 날, 엘레나는 친구인 리사와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리사는 커다란 에메랄드가 달린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반지를 받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얼마 전에 나하고 남편이 대통령이 주최한 파티에 초대받는 꿈을 꿨어. 난 드레스를 입고 에메랄드 반지를 끼고 있었지. 그리고 다음 날, 남편하고 거리를 걷는데 보석점 쇼윈도에 꿈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반지가 있었던 거야. 남편에게 바로 꿈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 '운명을 느꼈어요. 제가 꾼 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반지를 끼면 당신이 대통령을 만날 만큼 출세한다는 뜻일까요?' 라고. 그랬더니 남편이 이걸 사 주지 뭐야! '이 반지가 행운을 불러 올지도 모르겠군.' 이라면서."
"와아, 정말 좋겠다! 너한텐 길몽이었네."
엘레나가 감탄하면서 말하자, 리사는 혀를 슬쩍 내밀더니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사실 꿈은 꾸며 낸 거야. 전부터 이 반지에 눈독 들이고 있었거든. 하지만 그냥 사 달라고 하면 당연히 사 줄 리가 없으니 거짓말 좀 했지. 악의가 없는 거짓말이랄까."
엘레나는 리사에게 새삼 감탄하면서도, 속았어도 쉽게 반지를 사서 건네 준 남편을 둔 리사가 부러웠다.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 아침 식사를 하면서 엘레나는 이런 말을 꺼냈다.
"여보, 어젯밤에 제가 꿈을 꿨는데요. 당신이 노벨 상을 탄 덕에 축하 파티에 저도 함께 참석한 거예요. 저는 드레스를 입고 목에는 아름다운 목걸이를 했어요. 아, 백화점에서 봤던 그 목걸이였어요. 현실 같은 꿈이었어요. 왜 그런 꿈을 꾼 걸까요?"
알렉세이는 이야기를 경청하더니 물끄러미 엘레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꿈의 의미가 궁금한 거야?"
"네? 아, 네."
남편은 미소 지으며 "오늘 밤 알 수 있겠군." 이라고 말했다.

그 날 그의 귀가는 평소보다 늦었지만 엘레나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어디 그 뿐인가. 기대감에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남편이 선물을 사서 돌아올 게 분명해서였다. 남편의 미소를 떠올리면 엘레나의 입가에도 웃음이 감돌았다.
그 때 현관 벨이 울렸다.
"왔어요?"
엘레나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남편을 맞이하자, 그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늦어서 미안. 어디 들를 데가 있었거든."
남편은 가방에서 리본이 달린, 포장된 물건을 꺼내더니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엘레나에게 건넸다.
"메리 크리스마스!"
"어머나!"
엘레나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애써 진정하며 천천히 리본을 풀었다. 포장지까지 벗기자 그 안에 있던 건 한 권의 책이었다. 책 표지에는 커다란 글씨로 <꿈 해몽>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이게 가장 잘 맞는다더군. 당신이 어젯밤에 꾼 꿈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 거야."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구와바타케 키누코

 

 

복수

브라이언은 오랫동안, 큰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운 나쁘게 뒤에서 차가 들이받았고,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채 병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머리를 세게 부딪힌 탓인지, 좀처럼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한때는 이대로 사망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지만 의료진의 정성스러운 간호 덕에 브라이언은 어느 날 의식을 회복했다. 의식을 찾은 브라이언이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늘 싱글싱글 웃으며 입원 생활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었는지도 몰랐다. 걱정이 된 의사는 어느 날 브라이언에게 물었다.
"브라이언 씨, 오늘은 당신에게 가족에 대해 물을까 해요."
"아, 그럼요."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가족과 여행하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때 함께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 나십니까?"
"물론이죠. 쌍둥이 형입니다."
브라이언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완전히 똑같이 생긴 쌍둥이였죠. 그 탓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형이 여자아이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었죠. 몇 번이나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라고 말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제가 한 짓이라고 말하며 형 대신에 저를 혼냈죠."
"너무하네요…."
"뭐, 그건 새 발의 피죠. 형의 악행을 일일이 말하자면 얇은 책 한 권은 거뜬히 나올 겁니다. 제가 막 운전 면허를 따고서 얼마 안 됐을 때 일이죠. 형과 함께 차를 탔는데 운전하던 형이 교통 위반을 해서 경찰에게 잡혔습니다. 형은 저 모르게 제 지갑에서 면허증을 꺼내 경찰에게 건네주었죠. 그 탓에 저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딱지를 끊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형은 제가 좋아했던 여자까지…."
브라이언은 잠시 시선을 던지고는 미소지었다.
"쌍둥이는 얼굴만 닮은 게 아닙니다. 형과 저는 옛날부터 이상형이 비슷했어요. 대학에 들어간 저는 한 여인에게 반하고 말았습니다. 기쁘게도 그녀 역시 저를 마음에 들어해서 사귀게 되었죠. 하지만 형이 그녀를 제게서 빼앗고 말았습니다. 그녀도 참 그래요. 저와 형을 구별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어느 쪽이라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 건지…. 뭐, 지금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지만요."
"정말 형님은 당신에게 나쁜 짓을 많이 했군요."
"뭐, 별로인 형이긴 했지만. 마지막엔 좋은 일을 해 줘서 과거는 그냥 잊기로 했습니다."
"그건…. 설마…."
브라이언이 당한 사고를 떠올리며 의사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차에는 브라이언 뿐만 아니라 그의 형도 함께 타고 있었다. 형은 마지막 순간, 동생을 구하려고 무엇을 했을까?

"사실 그저께 말이죠."
어두운 표정의 의사와는 달리 브라이언은 행복한 듯이 입을 열었다.
"저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의식은 있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죠. 그 때 '브라이언은 어느 쪽이지?' 하고 누군가 묻더군요. 소리가 들린 곳에는 온 몸에 검은 옷을 두른 남자가 저와 옆에서 자는 형을 나란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손가락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었던 덕에 저는 손으로 형을 가리켰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형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고…. 전 그 때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뜨니 형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 남자는 아마 사신이었겠죠. 하지만 사신마저도 저와 형을 구별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마키 카즈키


마음의 준비

어느 마을에 한 형제가 있었다. 두 사람은 얼굴이 매우 닮았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형인 리처드는 외향적인 성격에 수다쟁이였지만, 동생인 존은 거의 말이 없는 데다가 무표정했다. 어머니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리처드가 뱃속에 있을 때 다음에 태어날 존의 애교까지 가져간 모양이라고 말했다.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형제는 신기하게도 죽이 잘 맞았다. 성인이 된 형제는 함께 잡화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가게에서 형은 접객을 담당했고, 동생은 장부를 정리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작전이 성공하여 가게는 점점 호황을 누렸다. 두 사람은 잡화점 2층에 살림집을 차리고 노모와 나이 든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았다. 형인 리처드는 어머니와 함께 고양이 크리스티누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매일 같이 자신이 직접 먹이를 주면서 친자식처럼 귀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리처드는 상품 매입을 위해 아시아 여러 나라로 일주일 간 출장을 가게 되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 리처드는 동생 존에게 당부했다.
"존, 내가 없는 동안 크리스티누와 어머니를 잘 부탁해!"
리처드는 사실 집에 남아 고양이와 어머니를 돌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무뚝뚝한 동생이 상품을 거래하는 건 무리이니 자신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상품 매입은 놀라울 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물건을 찾아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도는 동안, 원하는 물건은 대부분 그가 말한 금액에 입수할 수 있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자, 사고 싶은 물건도 늘어났고 해외에서 머무는 날도 예정보다 길어졌다. 외국에 온 첫날 밤, 리처드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존, 크리스티누는 어때?"
"잘 있어."
동생의 대답은 짧았지만, 원래 그런 성격이라 리처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리처드는 자기 전,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존, 크리스티누는 어때?"
"잘 있어."
외국에 있는 동안, 리처드는 매일 이렇게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열흘 이상이 지났고, 오늘도 그는 평소처럼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존, 크리스티누는 어때?"
"죽었어."
"뭐? 죽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까진 잘 있었다고 했잖아!"
"응, 어제까진 살아 있었어. 형이 출장을 간 뒤로 점점 상태가 나빠지더니 시름시름 앓다가 오늘 아침 죽었어. 형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 동안 말 못 했어."
덤덤한 동생의 말을 듣던 리처드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존, 너 도대체 왜 그러냐? 크리스티누가 죽을 만큼 상태가 나빠졌으면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미리 말했어야지."
전화기 너머에서 서먹서먹한 침묵이 이어졌다. 평소에도 말수 적은 동생에게 이 이상 설명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존은 자신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리처드는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존, 넌 좋은 녀석이지만, 조금은 남의 기분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해. 지금까지 잘 있다고 해서 안심했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응? 이런 안 좋은 소식은 조금씩 미리 말해야 한다고."
"어떻게…?"
"그게 말이지. 예를 들어 첫 날엔 '담장 위를 건강하게 걷고 있어', 세 번째 날엔 '담장에서 떨어졌어', 다섯 번째 날엔 '걱정스러워서 수의사에게 데리고 갔어', 일곱 번째 날엔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졌어', 그리고 열 번째 날엔 '숨을 거두었어' 라고 말해 줬어야 내가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겠지! 그런데 넌…."
"…미안해…."
전화기 너머로 동생이 풀 죽어 고개를 숙인 모습이 그려졌다. 리처드는 진정하며 말했다.
"크리스티누의 장례는 내가 귀국한 다음에 할게…. 근데 어머니는 잘 계셔?"
동생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말했다.
"잘 계셔. 오늘 담장 위를 건강히 걸으셨어."
"……."
리처드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고는 가방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남은 매입 건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호텔에서 뛰어나갔다.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마키 카즈키


행복론

밥은 오랜만에 맞은 휴가를 남쪽 섬에서 만끽하고 있었다. 새하얀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리조트 호텔 스위트룸, 커다란 침대에 창 밖에는 넓디넓은 풀장도 있었다.
"역시 성공한 사람은 이렇게 휴가를 보내야지."
그의 말대로 밥은 전국에 수많은 체인점을 가진 회사의 사장으로, 젊은 나이에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는 부단히 노력했다.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사원 교육부터 새로운 점포 개발, 매스컴 대응 등 문자 그대로 잠 잘 시간도 아끼면서 일해 왔다.
밥은 이 섬에서 취미 중 하나인 스쿠버 다이빙을 즐겼다. 아침에 항구에서 크루저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바다 산책을 즐긴 뒤 저녁 무렵에 돌아왔다.

오늘은 어느 포인트를 가 볼까 궁리하던 어느 날 아침, 다소 늦게 일어난 밥은 항구에서 한 젊은 어부를 보았다. 작은 배에서 내린 어부는 아주 적은 양의 물고기와 조개를 손에 들고 집으로 가려던 중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크고 신선한 어패류였다. 바다가 선사한 맛있는 해산물은 이 지역 특산물이기도 했다. 밥은 어부에게 말을 걸었다.
"이야, 생선이 정말 싱싱하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섬에서는 이 정도는 평균적으로 잡을 수 있어요."
그을린 얼굴로 자랑스럽게 말하는 어부는 고향 바다를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슬슬 바다로 나가려던 밥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친 의문을 어부에게 꺼내 물었다.
"아침에 일찍 나가죠? 얼마나 배를 탑니까?"
"얼마 안 돼요. 몇 시간만 잡고 오거든요."
"설마 오늘 작업은 이걸로 끝인가요?"
어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직 점심 시간 전이다. 상황이 어떻든지 이 시간에 일을 마치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 기회를 그냥 날리는 셈이다. 평소 비즈니스 세계에서 1분 1초도 아끼며 일하던 밥은 다시 어부에게 물었다.
"지금부터 잘 때까지 무엇을 하면서 보내죠?"
"음, 아이들과 놀아 주다가 아내와 여유롭게 낮잠을 자죠. 일어나면 저녁인데, 보통은 단골 가게로 가서 친구들과 한 잔 마신 뒤 기분 좋게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죠. 그러다가 졸리면 집으로 돌아와서 잡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밥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위로 올리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왜 이렇게 느긋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는 걸까? 그는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이 촌뜨기 남자에게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난 미국에서 폭넓게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MBA라는 경영학 석사 학위도 땄죠. 이런 내가 돈을 더 모아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 드리죠. 저를 만나 유익한 조언을 얻은 당신은 그야말로 행운을 거머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밥의 말에 어부는 아주 약간 흥미를 보였다.
"알겠어요? 먼저 당신은 이 늘어지는 생활을 당장 그만두고 더 긴 시간 어업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지금보다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겠죠. 그렇게 잡은 물고기를 팔아서 저축하세요."
"그 다음에는요?"
"돈을 모은 다음엔, 더 큰 어선을 사서 최첨단 기기를 설치하면 어획량도 늘어 더 많이 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모은 돈으로 배를 늘리고 동시에 사람도 고용해서 거대한 어선단을 만드세요."
"그 다음에는요?"
"어선단의 매출이 늘어나면 이번에는 수산물 가공 공장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 잡은 물고기를 다양한 식료품으로 가공해서 전 세계로 수출하는 거죠. 그 때 쯤이면 당신은 회사를 설립하고 미국으로도 진출할 수 있을…. 그래요. 뉴욕 맨해튼 근처 사무실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좋겠군요."
어부는 밥에게 물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글쎄요, 한 25년 정도…. 아니, 더 노력하면 20년 안에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뒤로는 어떻게 하나요?"
밥은 어부가 행복해질 마지막 방법을 알려 주었다.
"회사가 그 정도 규모가 되면 당신은 주식을 상장해서 억만장자가 된 다음에 은퇴하는 겁니다. 하하하, 걱정은 하지 마세요. 당신이 억만장자가 되어도 조언에 대한 비용은 청구하지 않을 테니까."
억만장자라는 말이 어부의 흥미를 끌지 못했는지, 그는 다시 밥에게 물었다.
"억만장자가 되면 무엇을 할 수 있는데요?"
밥은 이쯤 되니 슬쩍 질렸다. 여태 알려 준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은퇴한 뒤의 일까지 조언을 구하다니…. 하지만 그런 조언을 아낄 자신이 아니었다. 밥은 타이르듯이 말했다.
"시간이 충분하니,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보내면 되죠. 맞아요. 손주들과 놀아 주다가, 피곤하면 부인과 함께 낮잠을 자면 되겠군요. 일어난 뒤에는 바에 가서 친구들과 한 잔 마시고 기분 좋게 기타를 치면서 노래도 부르고요. 그러다가 졸리면 집에 가서 자는 거죠. 매일매일 이렇게 보낼 수 있어요. 어때요? 정말 멋있는 인생 아닙니까?"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고바야시 료스케


100만 번째 손님

백화점에 발을 내딛는 순간, 노부인은 강렬한 빛에 휩싸이는 바람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찰칵, 찰칵 하는 셔터 소리와 스트로보 소리가 들렸다. 노부인을 향해 수십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동시에 터졌다.
"축하드립니다!"
펑! 펑! 하는 파열음과 함께 딱총이 터지더니 종이 꽃가루가 흩날렸다. 이 백화점의 지배인은 물론 수많은 점원, 사원이 일제히 노부인을 에워쌌다. 그들 뒤로 TV와 신문 기자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부인은 저희 백화점의 100만 번째 손님이십니다."
지배인이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띤 채 노부인 앞에 섰다.
원래 이 곳에는 몇 십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던 오래 된 백화점이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과 경기 영향으로 폐점했다. 그러다 경영자 및 스태프를 싹 물갈이한 뒤 리모델링해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 뒤로 몇 년이 지나 드디어 100만 번째 손님을 맞이한 것이다. 지배인은 평소보다 공들여 옷을 차려입었다. 오늘은 백화점의 입장에서 기념할 만한 날인 데다가 매스컴에서도 취재하러 왔다.
"손님, 저희 백화점에는 처음 오신 겁니까?"
"아뇨, 전부터 계속…."
"저희 백화점을 애용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배인이 감사의 표시로 노부인의 손을 강하게 움켜쥔 채 몇 번이고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의 엄청난 기세에 노부인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이어서, 아름다운 여직원이 미소 띤 얼굴로 꽃다발을 건넸다. 다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이런 세레모니가 한창일 때, 수수한 옷을 입은 한 남성 고객이 점원 한 사람에게 "저기…." 하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점원은 세레모니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던 남자는 100만 1번째 손님이었다. 약혼녀에게 선물할 반지를 사려고 보석점이 어디 있는지 물으려고 했다. 그는 노부인과 거의 동시에 백화점에 들어섰지만, '100만 번째 손님'으로 선택받은 건 노부인이었다. 남성이 최고급품을 살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서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매스컴은 노부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100만 번째 손님이 된 소감은?', '이 백화점의 좋은 점은?' 등등의 질문을 퍼부었다. 노부인은 어리둥절해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배인이 "이 분은 예능인이 아니니까요." 하고 노부인을 감싸는 멘트를 날렸다. 그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한바탕 세레모니와 취재가 끝난 뒤, 만족한 지배인이 노부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어느 매장에서 쇼핑을 하실 예정이신지요?"
노부인이 대답했다.
"고객 서비스 센터로 안내해 주세요. 오늘은 이 백화점에 클레임 걸 게 있어서 왔습니다."
지배인을 비롯한 스태프와 매스컴 모두 당황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제 정신을 찾은 일부 스태프가 놀라운 스피드로 종이 꽃가루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남긴 채, 드디어 목적 장소에 도착한 노부인은 고객 서비스 센터에 이렇게 말했다.
"예전 백화점이 훨씬 좋았어요. 이전 지배인은 저렇게 수준 낮지 않았고, 다른 직원들도 손님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고요. 뭡니까, 아까 그 바보 같은 행사는!"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구와바타케 키누코


힘

사는 게 몹시 피곤해진 남자는 계곡에 걸린 높은 철교에 앉아, 눈 아래 흐르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자살하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이따금 아득히 먼 강을 응시하기만 할 뿐, 정말 그럴 마음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아, 나는 아무 힘도 없어…."
남자의 입에서 나온 건 한숨 뿐이었다.
최근에 남자의 인생에 무언가 나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해, 나쁜 일조차 일어나질 않았다. 다음 날까지 기억할 만한 사건 하나 없이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힘이 세서 누군가와 싸운 적도 없고, 남아도는 경제력이 있어서 호화롭게 살았던 것도 아니야. 나는 도대체 왜 사는 걸까."
지금까지 남자의 인생은 한 마디로 시원치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인생이 시시한 원인이 '남보다 뛰어난 무언가'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부하 직원 한 사람 없는 나는 권력 같은 것을 손에 쥔 적이 없어. 인간적인 매력이 없으니 여자 친구도 생길 리 없고. 빌어먹을!"
억울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과는 달리 남자에게서는 활력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어 보지만, 그 모습조차 어딘가 약해 보이는 데다가 완력조차 없어 보였다.
"힘이 필요해…."
자력으로 무언가를 할 만한 기력도 실력도 없기에 회사에서도 주력 사원은커녕 전력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존재였다.
"하아, 힘이 필요해…."
실력이 없으면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남자는 노력을 해 본 적도 없고 전력을 다해 무언가에 몰두한 적도 없었다.
"이럴 때 누군가 내 소원을 들어 주면 좋을 텐데…. 갑자기 신이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다."
남의 힘으로 소원을 이루겠다는 상상력도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아아, 뭐라도 좋아. 어떤 '힘'이 필요해!"

그 때, 눈 앞이 눈부시게 빛나더니 빛 속에서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백발에 새하얀 수염이 난 노인은 자신의 키를 훌쩍 뛰어넘은 긴 나무 막대기를 쥐고 있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신의 모습 그대로였다.
깜짝 놀란 남자에게 그 '신'이 말했다.
"그래, 내가 바로 신이니라. 그대는 선행을 베풀지 않았으나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난 꽤 즉흥적인 신이라 너를 선택하기로 했지. 오늘까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 온 데 대한 상으로 기회를 주겠노라. 그대에게 한 가지 '힘'을 주려고 하느니라."
"네? 정말이요?"
무기력했던 남자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감정이 어렸다.
"물론. 자, 어떤 힘이 필요한가? 원하는 힘을 말해 보거라."
남자는 고민에 빠졌다. 당황하면 안 된다. 지금이 바로 인생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으음, 역시 남자라면 완력을 동경할 수밖에 없어. 아니, 아니야. 완력만 있어서는 생활하는 게 힘들지도 몰라. 역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경제력이야."
남자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면서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평생 단 한 번 밖에 없는 기회를 그냥 날릴 수는 없다.
"아니, 아니. 인생에 돈만 있는 건 아니야. 돈이 있어도 주위에 사람이 없으면 인생은 빈 껍데기에 불과할 거야. 지도력이나 권력 같은 건 어떨까. 하지만 그런 힘을 발휘하면 할수록 목숨을 위협당할 위험이 많지 않겠어? 그럼 생명력?"
신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래! 지력이 어떨까. 잠깐, 잠깐. 이 나이에 지력을 살릴 만한 장소가 있을까. 인간력이나 포용력은 어떨까. 어쩌면 여자들에게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여서 인기를 끌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실감하는 게 가능할까?"
남자는 중얼중얼 말하면서 생각을 거듭했다.
"여기 마지막으로 할 만한 건 체력이지. 경이로운 체력만 있으면 메이저리그 투수로 활약하면서 돈, 인망, 사랑도 모두 얻을 수 있을 거야. 아니, 잠깐만. 메이저리거가 되려면 제구력이 필요하잖아."
히죽히죽 웃으며 망상에 잠긴 남자 앞에서 신은 눈썹을 찡그린 채 점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잠깐! 대충 다리를 걸쳐 놔도 좋겠다. '실력'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표현하면 무엇을 하든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야.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응용할 수 있는 건 다양하지. 정신력, 발언력…."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남자는 드디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맞아! 그 힘 밖에 없어!"

그는 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이시여, 제가 부탁드릴 '힘'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행력입니다."
머리로 생각만 할 뿐 아무것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게 자신의 인생이 지금까지 제대로 풀리지 않은 원인임을 남자는 깨달았다. 실행력이 있으면 어떻게든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신'은 남자의 소원을 듣자마자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크게 휘둘렀다.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대는 앞으로 망설임 없이 그대가 하고자 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럼, 잘 있도록."
그 목소리가 계곡 사이로 묻힐 무렵, 신의 모습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바로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기지개를 켠 다음, 주저 없이 철교 위에서 몸을 날렸다.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고바야시 료스케


가장 소중한 것

연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날, 철교 위해서 한 청년이 단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팔로 들기 힘들 만큼 큰 단지로, 겉에는 푸른 꽃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단지를 빙글빙글 돌리려나 싶더니, 청년은 갑자기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따위!"
힘이 빠졌는지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윽! 내 인생은 이번에야말로 더는 추락할 데가 없을 만큼 바닥이야!"
청년은 훌쩍훌쩍 콧소리를 내면서 눈가를 훔쳤다. 그 때였다. 몽글몽글 하얀 연기가 갑자기 피어올랐다.
"부, 불 났나?"
뚝뚝 흘리던 눈물이 쏙 들어갈 만큼 당황한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기는 산산조각이 난 단지 파편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앞에 뿅 하고 화려한 무언가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전 마신입니다! 이렇게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깜짝 놀란 청년 앞에 얇은 천으로 온 몸을 감싼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타났다. 그 모습에 청년은 아라비아의 무희를 떠올렸으나, 일반적인 무희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다. 소녀에게는 발이 없었다.
"어머? 설마 마신을 처음 보시나요? 이 세상에서 저희 마신의 인지도가 꽤 높은 줄 알았는데요."
자칭 마신이라는 소녀가 청년 앞에서 붕붕 손을 흔들었다. 청년은 정신을 차렸다.

"마신이라면, 소원을 들어 주는…."
"맞습니다~ 그것 말고는 마신이 할 일이 없어요."
"그렇구나! 드디어, 드디어 내게도…."
지금 인생은 바닥이지만, 앞으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 두 팔을 벌리고 비를 맞는 청년을 보며 소녀가 주저하며 말을 걸었다.
"저기, 바쁘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딱 한 가지 소원을 들어 드린다면 당신은 무엇을 비실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아아, 미안. 한 가지란 말이죠. 그렇군요. 한 가지 소원이라면…."

혼자서 중얼거리던 청년이 얼마 안 가 결심한 듯이 외쳤다.
"그래, 좋아요. 딱 한 가지 소원만 이룰 수 있다면, 제게 우정을 주세요!"
"왜 우정이 필요하시죠?"
"내가 지금은 이런 거지 꼴이지만, 이래봬도 옛날에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어요.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뒤로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죠. 제 손에는 커다란 재산과 인생을 두 번 정도 다시 살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남았고요."
"어머나, 꽤 극적인 인생을 사셨군요."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지더군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방황하던 저를 안심시키고 격려해 주었던 이가 바로 제 절친이었어요. 그는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외출 좀 하자며 저를 데리고 나가는 등 마치 가족처럼 저를 돌봐 줬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친구들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게 된 전 그 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어요. 한 눈에 반했거든요. 친구와 아는 사이라던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고 머리도 좋았어요. 그녀를 만나고 전 바로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죠."
"와, 정말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덕분에 그녀와 결혼도 했고, 한동안은 행복했어요. 돈이 있으니 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는데, 그녀는 자기 꿈이라며 회사를 세웠고 저도 다른 일을 하면서 충실히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그런데!"
청년이 갑자기 주먹을 움켜쥐고 분해 죽겠다는 듯이 외쳤다.
"결혼하고 1년 쯤 지났을 때였나, 아내가 회사 경영에 실패하는 바람에 꽤 많은 빚을 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담했는데, 아픔도 함께 하는 게 부부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전 모든 재산을 아내에게 넘겼죠. 그랬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아내가 친구와 함께 사라졌더라고요."
"부인이 처음부터 친구와 짜고 그런 건가요? 이야, 이건 정말 전형적인 수법에 걸리신 거네요."
"그러니까요.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전 제대로 된 우정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그렇군요. 이해했어요. 그래서 두 번 다시 배신 당하고 싶지 않다는 거네요."
"네, 맞아요. 아, 잠깐만요."
말을 잠시 끊은 청년은 고민스러운 듯이 팔짱을 꼈다.
"절대로 절 배신하지 않는 우정이라는 건 도대체 뭘까요?"
"글쎄요, 당신이 말한 건 전부 다 들어 주는 사람이겠죠?"
"그건 로봇이잖아요! 그런 건 싫어요. 그런 거라면 그냥 돈을 주세요! 돈이라면 나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테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무엇을 사고 싶으신데요?"
"원하는 걸 말하자면 끝이 없어요. 우선 팔아 버린 집을 다시 사 들일 것이고, 전처럼 맛있는 요리를 매일 먹고 싶어요. 새 집이나 차도 갖고 싶어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콜록!"
말하던 중에 갑자기 청년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괜찮아요?"
소녀가 당황하며 청년의 등을 두드렸다. 청년은 한참 동안 기침을 하더니 잠시 후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눈물 젖은 눈으로 소녀를 올려다 보았다.
"죄송해요. 역시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었네요."
"그게 뭔가요?"
"건강입니다."
"그렇네요. 자신의 몸만은 죽을 때까지 바꿀 수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그렇게 안 좋으신 건가요?"

청년의 몸은 쇄골이 푹 파여 보일 만큼 비쩍 마른 데다가 턱 밑까지 다크 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그 날, 아내와 친구, 그리고 재산까지 전부 잃은 제 손에는 아주 적은 돈 밖에 남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가 없었죠. 저는 땀 투성이가 될 정도로 열심히 움직였어요. 그래서 낮에는 괜찮았지만, 밤만 되면 도무지…."
청년은 고개를 숙이며 코를 훌쩍였다.
"밤에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으면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좋은 생각만 나서 괴로웠어요. 전부 잊고 싶었던 전 매일 밤 술을 마시기 시작했죠."
"그래서 건강을 말씀하셨군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갔더니 이미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내 인생은 제대로 굴러간 적도 있지만 결국은 뒤집히고 말았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직 죽고 싶진 않아요. 그 때 친절한 지인이 간절히 기도하면 어떤 병이라도 고쳐 준다는 단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게 제가 들어 있던 단지였군요."
깨진 단지 파편을 바라보면서 소녀는 역시 그랬구나 하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다시 건강해지면 일할 수 있으니 가진 돈을 전부 투자해서 이 단지를 샀는데 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아무도 절 도와주지 않았죠. 하지만!"
얼굴을 든 청년이 소녀의 손을 꼭 잡았다.
"결국엔 마신인 당신이 나타났군요!"
"그럼 최종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건강인 거죠?"
"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감사하죠. 이걸로 완료했거든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청년을 바라보며 소녀가 휙, 가슴 근처로 손을 모았다. 분명 지금 저 동작이 소원을 들어 주는 동작일 것이다. 청년은 눈을 빛내며 양손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됐다! 이젠 더 이상 죽음의 그림자에 떨 필요가 없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비를 맞으면서도 기분은 상쾌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팔짝팔짝 뛰고 싶었다. 하지만 청년의 발은 가볍게 움직이기는커녕 그대로 구부러진 채 넘어갔다. 그대로 바닥에 가슴을 부딪히자, 격한 기침이 쏟아졌다.
"저기…. 효과가 있을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겁니까?"
아무리 마신이라도 병에 좀먹은 몸을 완치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그러자 소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효과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 그러니까 제 소원을 들어 주…."
당황한 청년에게 소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세계마신협회가 실시하는 소원 랭킹 작성을 위한 설문 조사에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이건 사례로 드리는 티슈예요."
"네에?"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청년은 허둥대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 눈 깜짝할 새에 소녀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그 모든 게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려는 듯, 청년의 손에는 작은 휴대용 티슈가 쥐여 있었다.

원작 : 유럽과 미국의 짧은 이야기
번안 : 마키 카즈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