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3권- 평화의 나라 :: PHASE.5 토르의 죽음

"마르키오 도사님."

응석 부리듯 어린 목소리가 다가오더니 앉아 있던 마르키오의 팔을 부드러운 손이 잡았다. 마르키오는 컴퓨터에 입력시키고 있던 음성 필기를 중단하고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르키오는 목소리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눈이 보이는 자는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왜? 린."

그는 삼십대 후반의 기품 있고 이지적인 얼굴을 한 온화한 남자였다. 부드러운 물음에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조심조심 대답했다.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그래. 내 무릎에 앉을래?"

"응."

꾸물꾸물 무릎 위로 올라온 따뜻하고 작은 몸이 온기를 찾는 듯 바짝 기대어 왔다. 열려 있는 창에서는 끊임 없이 파도 소리가 들려 오고, 지금은 익숙해진 바다 냄새도 풍겨 왔다. 바람은 습기를 조금 머금고 있어서 무거웠다. 폭풍이 다가오려는 듯 했다.

다섯 살 바기 린은 응석받이로, 마르키오를 몹시 잘 따랐다. 내일부터는 그가 얼마 간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불안한 모양이다. 린은 반 년 전에 부모를 잃었다. 한 번 홀로 남겨진 경험이 있는 사람은 두 번째를 겁내기 마련이다. 이 집에 살고 있는 다른 아이들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었다. 가난 때문에 버려진 아이도 있고, 병이나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도 있다. 어린 아이라서 금방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밝게 지내고 있는 듯 보여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상처는 깊다.

"무슨 이야기를 해 줄까?"

"전에 해 주신 거 있잖아요. 플랜트의 공주님 이야기."

"아, 라크스 클라인 말이구나. 린은 라크스를 좋아하니?"

"응. 노래를 무척 잘 부르는 사람이죠?"

"그렇단다. 작은 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지. 분홍색 구름처럼 긴 머리카락을 갖고 있고 정말 온화하게 웃는 멋진 공주님이란다."

마르키오 자신은 용모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본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다.

"라크스 클라인은 우주에 살고 있죠? 우주에선 몸이 둥실둥실 뜬대요. 도사님도 떴어요?"

"응. 셔틀 안에선 그렇더구나."

마르키오는 우주에서의 무중력 상태를 떠올리자 조금 우울해졌다. 내일 가야 할 곳에 대해 생각하면 마음이 어두워진다. 그 용건의 성공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정의 불쾌감에 대한 것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중력이 없고 위 아래도 알 수 없는 상태는 커다란 불안감을 안긴다. 우주로 나가 봐야 상하라는 개념이 중력 하에서밖에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자신들이 태어나서 그 때까지 당연하게 받아 들이던 그 사실이 알고 보면 매우 국지적인 규칙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완고하게 지키고 있는 가치관도 이와 비슷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그것들은 시대와 상황, 입장에 얽매인 한정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대지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없으면 곤란한 사람 또한 존재한다. 기존의 가치관을 잃고 떠도는 것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도….

그래서… 어렵다.

"도사님…."

"아, 미안. 그래, 우주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던가?"

 

 

"음? 지금부터 당직이야?"

식당 테이블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던 무우는, 들어온 나탈을 보자 느릿하게 한 손을 들었다.

"예. 소령님은 지금까지 정비를 하셨나요?"

나탈은 식판을 집어 든 후, 말을 걸어 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무우의 맞은 편에 앉았다.

"음. 뭐 그렇지. 겨우 쉴 수 있을 것 같아. 그 쪽은 지금부터 수고 좀 하라고."

"고맙습니다."

철저하게 딱딱한 나탈의 대답에 무우는 웃음을 터뜨릴 뻔 했지만 참았다.

"내일 쯤엔 제공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군요."

나탈의 말에 무우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무우의 얼핏 건성으로 들리는 대답에 나탈은 가느다란 눈썹을 찌푸렸다.

"하긴… 상대는 크루제 부대니까요."

"아니… 그건 크루제가 아니야."

낮게 되돌아 온 대답을 듣고 나탈이 "예?" 하고 되물었지만 무우는 이미 먼 곳을 쳐다보며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곧 알래스카… 'JOSH-A(조슈아)'로군…."

알래스카의 유콘 델타에 있는 지구 연합군 통합 최고 사령부의 약칭을 그는 중얼거려 보았다. 지금까지는 그 곳에 도달하는 일 밖에 생각하지 않았지만, 도착 가능성이 눈 앞으로 닥치자 이번에는 다른 불안감이 머리를 들었다.

지난 번의 키라와 승무원들의 싸움─싸움까지는 안 갔어도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은 사실이다─을 생각하면 무우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스러웠다. 지금까지는 매우 한정된 아크 엔젤 안만을 '지구 연합군'이라고 생각해 온 키라. 그러나 거기에서조차 융화되지 못하고, 헬리오 폴리스에서 같이 온 친구들과도 최근에는 서먹해진 모양인데, 이런 판국에 무우도 전체를 다 알지 못하는 거대한 조직에 편입되면 그는 대체 어떻게 될까.

물론 알래스카에 도착하면 바로 제대하면 된다. 애당초 키라는 아크 엔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 그것만을 위해 군에 적을 두고 있었다. 아크 엔젤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명실상부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군에서 놔 줄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게 훨씬 더 심각하다. 물론 무우는 상부의 높은 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키라의 능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현장에 있는 무우의 감각일 뿐, 하루 종일 얼음 바다나 쳐다보고 있는 높은 분들은 어쩌면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선선히 놓아 줄지도 모른다. 키라를 위해서는 그 편이 좋다.

"…아니, 다른 사람의 걱정이나 할 때가 아닌가?"

무우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자 나탈이 "예?" 라고 되물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 온 일은 군대라는 조직에서는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무우는 낫다. 계급이야 어찌 됐든 일개 모빌 아머 파일럿에게 상부는 그리 많은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마류다. 그녀가 책임지게 될 여러 가지 일들을 머릿속에서 세어 보려던 무우는 곧 단념했다. 쓸 데 없이 자신의 마음만 무겁게 해 봤자 뭐 하랴, 하는 심정으로. 정확히는 그것도 '다른 사람의 걱정'이었지만 꼭 그렇게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미묘한 점이다. 그는 문득 쓴웃음을 지으며, 눈 앞에서 담담하게 식사를 계속하는 여자에게 말했다.

"…함장을 너무 괴롭히지 마."

나탈은 당황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소령님. 전 특별히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함장님에게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뭐 그야 그렇겠지만."

"보고해야 할 문제 행동이 있다면 설사 그것이 상관에 대한 것이라도 상부에는 보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함장으로서 저의 임무입니다."

"…그래, 그래. 그 말이 백 번 옳아."

마치 교과서에나 있을 법한 모범적인 의견이었다. 그것이 정론인 이상 반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상상력이 너무도 결여되어 있었다. 자신의 '보고'가 초래할 결과에 직면했을 때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무우의 적당 적당한 대답에 기분이 상했는지 그녀는 약간 시선을 내렸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씀드리자면 전 함장님이 너무 안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래. 하지만 그 안일함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지도 몰라."

"예?"

무우의 지적에 나탈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만약 자네가 헬리오 폴리스에서 스트라이크를 지키고 있었다면 키라에게 기체를 넘겼겠나?"

"아뇨. 하지만!"

"키라가 그것을 조종하지 않았다면 우리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나탈은 입을 다문 채 생각하다가 몹시 기분이 상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뇨."

하지만 곧 무우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군율 위반인 건 변함 없습니다. 군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합니다. 소령님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규칙이라…."

무우는 딴전을 피우며 대답했다.

"하지만 말이야,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은 정작 규칙으로 처벌할 수 없거든?"

"…그게 뭐죠?"

"글쎄. 이를테면…."

무우는 씩 웃으며 나탈의 눈을 보았다.

"전쟁?"

 

 

함교의 문이 열리고 나탈이 들어왔다. 멍하니 눈 앞의 패널을 보던 마류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쳐다보고 여느 때처럼 교대 시간 정확히 5분 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탈은 혹시 자기 방에서 함교까지의 이동 시간을 초 단위로 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농담처럼 생각하다가 그녀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교대하겠습니다."

"고마워."

짧은 대화를 나눈 후 마류는 일어났고, 나탈은 통신석의 카즈이에게 확인했다.

"알래스카와의 접촉은?"

"전파 상황이 좋지 않아서 아직 취하지 못했습니다."

불과 10분 전 마류가 확인했을 때와 같은 대답이었다. 두 사람의 여성 장교는 얼굴을 마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가면 내일 저녁에는 북 회귀선을 넘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연락도 되겠지."

마류가 위로하듯 말하자, 나탈은 계기 점검을 하면서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보즈고로프 급은 고속함입니다. 그 후 우리 위치를 놓쳤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이 희망적인 관측에 불과하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아크 엔젤이 오브에서 나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던 상대가 이런 승부처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물러갈 리가 만무하다. 블리츠가 파괴되었다고는 해도 그 쪽에는 아직 3기의 X넘버가 있다.

"숙명적인 부대라 그런지… 확실히 끈질겨…."

전에 무우가 라우 르 크루제를 평했던 말을 떠올리고 마류는 중얼거리다가 나탈에게서 돌아온 대답에 놀라 돌아보았다.

"프라가 소령님은 그것이 크루제 부대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던데요?"

"뭐? 하지만 그건…."

그 모빌 슈트들을 잘못 볼 리가 없다. 그건 분명히 헬리오 폴리스에서부터 쭉 아크 엔젤을 따라 왔던 그 기체들이 아니던가. 마류가 쳐다보자 나탈은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령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들어서…."

'크루제 부대가 아니라고? 모빌 슈트의 파일럿이 바뀐 건가? 아니면 부대를 지휘하는 자가 바뀌었나? 하지만… 무우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상대에 대한 것은 용병술만 보아도 아는 법인가?'

마류는 왠지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함교를 뒤로 했다.

 

 

"아, 처음엔 나도 정말 겁 먹었어!"

큰 소리로 말하는 토르의 목소리가 통로에까지 들려 왔다. 프레이는 슬쩍 식당 안을 살폈다.

"발진하자마자 첫 번째 빔이 날아 왔을 때는 정말…!"

그 날 스카이 글래스퍼로 첫 전투를 경험한 토르를 에워 싼 채, 사이 등 다른 승무원들이 화기애애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토르는 손을 휘저으며 의기양양하게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런 일도 시뮬레이션에서 당해 본 터라 곧바로 조종간을 당겼지."

"아냐, 아냐. 정말 대단해. 첫 전투에서 그 정도 활약이면."

정비사들이 치켜 세우자 토르는 자랑스러운 듯 얼굴을 빛냈다.

'흥! 뭐야?'

프레이는 입구에서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적기를 격추시킨 것도 아니면서. 코디네이터 한 사람 정도는 죽여 놓고 자랑하라고. 키라는 쭉 혼자서 싸워 왔는데 말이야….'

사이가 의기양양해 하는 토르에게 조금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놀리듯 칭찬했다.

"그래도 정말 굉장했어. 어느 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꽤 열심히 했거든, 시뮬레이션."

밀리아리아가 말했다.

"사이도 이것 저것 공부하고 있잖아."

토르는 기쁜 듯 대답했다.

"밀리랑 카즈이도 굉장히 능숙해졌고 말이야!"

"뭐, 그렇지. 우리들은 이제 '손님'이 아니니까."

사이가 차분한 어조로 말하자, 밀리아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해질 만도 하지…."

"그건 그래."

카즈이도 싫지만은 않은 얼굴이었다. 그 때, 밀리아리아는 문득 토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토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냐? 얼마나 걱정했다고! 토르가 출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걱정 말라니까. 지원만 하는 거니까. 밀리야말로 걱정이 너무 많아!"

토르는 성가신 척 하면서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연인을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런 꾸밈도 없이 서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프레이는 짜증이 나서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그 곳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아니, 들어가선 안 된다. 프레이는 자신이 이미 다른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깜짝 놀랐다. 지상에 내려온 이후로 그녀는 쭉 키라의 방에 틀어박힌 채 키라만을 상대로 생활해 왔다. 그 사이에 친구들은 승무원들과 친해지고 이미 프레이가 모르는 세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사이조차….

그를 생각하니 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이는 이제 완전히 프레이를 잊은 듯 했다. 약혼자인 척 끈질기게 쫓아 다니던 주제에 이렇게 금방 포기하다니, 결국 그 정도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그를 배신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녀는 자기 본위로 화를 냈다.

'키라를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도 좋을 텐데.'

그렇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 키라를 이용하기 위해 그와 잤던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장교실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새우잠을 자야 하는 선실도, 공동 샤워 룸도 지긋지긋했다. 장교실에는 전용 샤워 룸이 있다. 에이스 파일럿의 '연인'으로 있는 것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고…. 그리고 키라는 여러 모로 자신을 챙겨 주며 잘 대해 주었다. 그렇다. 키라는 다정하다. 얼굴도 귀엽고 머리도 좋다. 코디네이터니까 당연하지만. 최근 때때로 프레이는 그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키라가 코디네이터라는 것, 아버지의 복수에 대한 것. 애초에 자신이 왜 키라에게 접근했는지에 대한 이유도차. 때때로 자신들이 토르와 밀리아리아 커플처럼 평범한 연인 사이라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잘못 됐어. 잘못된 선택을 했어. 나… 아니 우리는….

며칠 전에 들었던 키라의 애절한 목소리가 가슴을 옥죄어 왔다.

'잘못 됐다고…? 잘못 되지 않았어.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키라는 코디네이터고,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 싸울 때마다 어두워지는 얼굴을 보고 악몽에 신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 일은…!'

프레이의 몸이 갑자기 한기를 느낀 듯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그런 괴로움을 준 것은 프레이 자신이었기에. 프레이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오싹해져서 그 생각을 자신의 마음 속에서 떨쳐 냈다.

'아냐…. 내 탓이 아냐! 그랬다면… 내가 군에 지원하는 걸 누가 말렸으면 됐잖아? 키라도 사람들을 내버려 둔 채 그냥 가 버리면 됐고. 애당초 아빠를 지켜 주지 못한 것이 잘못이야. 아빠만 살아 있었다면 난 이런 무서운 짓을 하지도 않았어! 내 탓이 아냐!'

그녀의 발걸음은 무의식적으로 통로를 더듬어 어느 새 격납고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캣 워크에서 아래 쪽을 내려다 보다가 그 곳에 서 있는 키라의 모습을 발견했다.

정비 작업도 끝나서 격납고에는 아무도 없었다. 키라는 스트라이크를 올려다 보았다. 토리가 그의 주위를 날아 다니다 때때로 높은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곤 했다. 키라의 뇌리에는 폭발한 블리츠의 최후가 되풀이되며 떠오르고 있었다. 통신기에서 들려 온 아스란의 외침과 함께.

─니콜!

니콜…. 그는 그 때 오노고로에서 본 나머지 세 사람 속에 있었을까. 다들 아직 젊어서 키라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 중 누군가를… 난 죽여 버린 걸가? 아스란의 동료를?'

토리가 내려와서 키라의 어깨에 앉았다.

「토리.」

묻는 듯 지저귀다가 키라가 손을 내밀자 슬쩍 올라 앉았다. 이 새를 내밀던 아스란의 손이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3년 전에 본 아직 가냘픈 어린 아이의 손과 며칠 전에 본 어른의 손.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헤어진 그 날로부터 자신들은 이렇게 먼 곳까지 온 것이다.

─싸울 수밖에 없잖아?

반복해서 귓속을 맴도는 적장의 말.

─서로가 적인 이상, 어느 한 쪽이 멸망할 때까지.

"적…."

키라는 그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토리가 다시 그의 손에서 날아 올랐다.

'나는 너의 적….'

그 말이 자신의 귀에 기묘하게 울려 퍼졌다. 자신이 누군가의 적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절실하게 느껴졌다.

'니콜….'

그를 죽인 이상 아스란은 키라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키라는 아스란의 '친구'일 수 없아. 그에게 있어서 '적'… 원수인 것이다.

"…그렇지… 아스란?"

체념한 목소리로 키라는 과거의 친구였던 아스란의 환영에게 그것을 확인했다.

 

 

"레이더에 함영(艦影)!"

쿠스토의 지령실에서 오퍼레이터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자, 해도를 보던 아스란 일행은 튕기듯 돌아 보았다. 레이더 패널에 움직이는 광점이 점멸하고 있었다. 오퍼레이터는 신속하게 데이터를 조합한 후, 아스란 일행이 기다리던 대답을 해 주었다.

"'다리 달린 녀석'입니다!"

"틀린 없나?"

함장 먼로가 묻자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 없습니다!"

아스란 일행 뿐 아니라 젊은 파일럿을 잃은 승무원들은 굉장한 투지에 불타 있었다. 패널에서 보내 온 데이터를 보면서 먼로가 분석했다.

"군도가 많은 해역이군. 일출도 가까우니 공격하기에는 유리하겠어."

"오늘로 끝이다! 스트라이크 놈!"

이자크가 소리쳤고, 디아카도 자신 만만하게 웃었다.

"니콜의 복수도, 네 상처에 대한 답례도 내가 한꺼번에 해 줄게!"

그들의 말을 듣고 아스란이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차가운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출격하자."

그의 마음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태연했다.

'그래, 끝까지 침착해야 한다. 확실히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스트라이크를 이 손으로 처단하기 위해서는 평소 이상으로 냉정해져야 한다. 기다려, 니콜…!'

이지스의 조종석으로 향하면서 아스란은 마음 속으로 살짝 말을 걸었다.

'이제 망설이지 않는다. 녀석이 친구라고 해서 봐 주지 않는다.'

녀석은 적이다. 니콜을 죽인 지구 연합군의 파일럿이다. 이제 더 이상 동료를 죽게 하지 않겠다. 한 번은 친구였던 이상 내 손으로 반드시 해치우겠다.

그는 조종석 안에서 함이 부상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아침 햇살을 받아 연분홍색으로 물든 바다를 가르며 쿠스토가 부상했다. 머리 위의 해치가 열리고 수직 사출기가 상승했다. 아스란은 다시 한 번 속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다른 상대에게, 영원히 결별할 사람에게.

'기다려라, 키라…!'

 

 

"음파 탐지기에 반응! 보즈고로프 급 잠수 항모입니다!"

동틀녘의 엷은 빛이 새어 드는 아크 엔젤의 함교에 갑자기 토노무라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전원 제１전투 위치! 전원 제１전투 위치!」

경보가 승무원들의 잠을 깨웠다. 프레이는 눈 앞에서 키라가 파일럿 탈의실로 달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돌려 통로 쪽으로 달려가서 탈의실로 가는 키라를 따라 잡았다.

"키라!"

키라가 놀라 돌아보았다. 프레이의 마음 속에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책감이 부풀어 올랐다.

"키라…. 키라, 나…."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사과해야 한다. 오노고로에서 다툰 이후, 두 사람은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래, 사과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며칠 전 키라의 배려를 짓밟은 것을? 아니면… 모든 것을? 거짓말을 한 것, 사랑하는 것처럼 속여서 키라를 조종하고 이용한 것, 그리고 그의 괴로움이 모두 내 탓이라는 것을…?'

말이 나오지 않아서 속이 타는 듯 제복의 가슴 언저리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프레이를 쳐다보던 키라는 난처한 듯 눈길을 돌렸다.

"미안…. 나중에 이야기하자."

경보가 두 사람을 다그쳤다. 여전히 매달리려는 프레이에게 키라는 문득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돌아와서."

키라의 웃음에 가슴이 뜨끔해진 프레이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런 때에도 키라는 자상했다. 달려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프레이는 눈물을 삼켰다.

'돌아오면… 키라가 돌아오면 모든 것을 이야기하자. 괜찮아. 키라는 용서해 줄 거야. 분명 용서해 줄 거야. 키라는 저렇게 자상하니까. 싸움에 지쳐 돌아온 키라에게 이번엔 내 쪽에서 잘해 주자. 지금까지 속여 왔던 몫도 포함해서….'

자신들은 잘못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못 되었다면 지금부터 고치면 된다.

'그래. 키라가 돌아오면….'

 

 

"적기 셋! 5시 방향! 거리 3000!"

비번이었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자리에 앉은 직후, 토노무라가 외쳤다. 밝아 오는 남양의 하늘에 마치 얼룩처럼 불길한 그림자가 드러났다. 구울에 타고 있는 X넘버다.

"같은 방향에서 열원 접근!"

사이가 보고하자 마류가 명령했다.

"회피! 함수를 왼쪽으로!"

버스터가 쏜 빔이 먼 거리에서 아크 엔젤을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안티 빔 폭뢰 준비! 원 배트 장전! 이겔슈테른 기동!"

나탈의 호령과 함께 아크 엔젤의 병기 시스템이 기동하더니 이윽고 격렬하게 불을 뿜었다. 하얗게 빛나는 함체를 스치며 빔이 해수면을 휩쓸자, 순식간에 대량의 물이 증발하며 모락모락 수증기가 피어 올랐다.

"프라가 소령님과 야마토 소위는?"

나탈이 밀리아리아를 돌아 보며 물었다.

"1호기, 프라가 소령님 출격합니다! 스트라이크는 후부 갑판으로!"

밀리아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키라는 스트라이크를 기동시키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무우가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이대로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프라가 소령님도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키라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키라는 알고 있었다. 아스란이 그들을 그냥 보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조금만 더 가면 지구 연합군의 제공권. 조금만 더 가면 따돌릴 수 있었는데, 키라가 '니콜'을 죽인 탓에….

갑자기 무전기에서 키라를 부르는 무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예?"

당황한 키라가 대답하자, 무우가 살피듯 물었다.

「괜찮겠지…?」

어제의 키라의 태도가 떠올라서 한 말일 것이다.

─해치우지 않으면 당해! 나도, 너도, 모두!

키라는 그의 말을 떠올리면서 낮게 대답했다.

"…예."

알고 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괜찮지 않은 상태 따윈 용납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계속, 자신이 싸워서 사람들을 지키는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싸워야 한다. 설사 아스란을 죽이게 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당한다. 키라는 후부 갑판에 내려 서서 라이플을 겨누었다. 스트라이크는 에일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3기의 X넘버가 쫓아 오는 것을 그는 아픔을 참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늘이야말로 해치워 주마!」

무우가 위세 좋은 말을 뱉으며 날아 올랐다.

버스터가 양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있는 런쳐 라이플을 쏘면서 날아 왔고, 듀얼도 시바와 미사일을 쏘았다. 그것에 대항해 아크 엔젤은 발리언트로 요격했고, 스트라이크도 갑판 위에서 라이플로 저격했다. 난무하는 화선이 남양의 아름다운 아침을 찢었다. 이지스가 접근해 스트라이크에게 라이플을 쏘자, 스트라이크는 빔을 실드로 막고 갑판을 박찼다. 그 때, 옆에서 듀얼이 끼어 들었다. 키라는 공중에서 슬러스터를 분출시켜 날아 오는 빔을 피하고 두 기체에 응사했다. 이지스는 훌쩍 반전했다가 다시 쏘면서 접근해 왔다. 거기서 심상치 않은 기백을 느끼고 키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편, 아크 엔젤은 견제하듯 원 배트를 발사했다. 그러나 미사일은 버스터의 포격에 의해 거의 격추되었다. 초기에 비해 그들도 기체의 성능을 잘 살린 전투법을 익혔는지, 강력한 화력을 가진 지원용 버스터는 그 특징을 살려 아크 엔젤의 공격을 맡았고 듀얼은 주로 모빌 슈트 간의 전투에 전념했다. 무우의 스카이 글래스퍼가 상공에서 버스터를 공격했다. 버스터는 그 포격을 피하면서 어깨에 장착된 포드로 미사일을 쏘았다. 하마터면 맞을 뻔 했지만, 무우는 급하게 기체를 강하시켜 해수면에 닿을락 말락 한 곳에서 기수를 올렸다. 미사일들은 그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고 해수면에 충돌해서 폭발했고, 스카이 글래스퍼는 간신히 위기에서 탈출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버스터의 포는 확실히 아크 엔젤을 궁지에 몰아 넣고 있었다. 포대가 빔에 관통 당했고, 함교 후부의 미사일 발사관 헬 다트가 박살 나며 격렬한 유폭(誘爆)이 일어났다.

"이겔슈테른 4번, 5번 피격!"

"헬 다트 발사판, 격벽 폐쇄!"

함교에서 피해 상황을 알리는 승무원들의 목소리가 절박해졌다. 당황한 마류는 통신석을 돌아 보았다.

"알래스카는?"

카즈이가 지금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틀렸습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그 사이에도 나탈의 호령이 울려 퍼졌다.

"고트프리트 조준! 명중시켜라! 발사!"

갑자기 토노무라가 놀라 소리쳤다.

"바로 위에 이지스!"

스트라이크가 듀얼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어느 틈엔가 이지스가 상승하여 아크 엔젤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붉은 기체가 구울을 박차더니 공중에서 모빌 아머 형태로 변환했다. 상공에서 조중하면 함교는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류가 비명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함수를 오른쪽으로!"

아크 엔젤의 바로 위에서 이지스가 스퀼라를 쏘았다. 노이만이 필사적인 얼굴로 조타했고, 강렬한 빔이 함교 옆을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빛줄기는 오른쪽으로 함체를 튼 아크 엔젤의 좌현에 명중하여 발리언트를 뚫고 그 주변을 도려냈다. 격렬한 폭발이 일어나며 콘솔이 단락되었고, 폭발음과 승무원들의 비명이 겹쳐졌다. 이지스는 상공에서 다시 모빌 슈트 형태로 돌아가 구울에 탑승했다. 아크 엔젤의 피해는 심각했다. 좌현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크게 기운 채 급속도로 고도가 떨어졌다. 함교에는 경고음이 계속 울려 댔다.

"플라즈마 텀블러 손상! 레비테이터 다운!"

찬드라의 보고에 노이만도 신음하듯 외쳤다.

"양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자세 제어를 우선해!"

"긴급 파워를 보조 레비테이터에 접속하고!"

마류와 나탈의 목소리도 상기되어 있었다. 그 때, 피해 보고를 들으면서 초조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토르가 부조종석에서 일어섰다.

"스카이 글래스퍼로 출격하겠습니다!"

밀리아리아가 "토르!" 라고 소리쳤고 마류가 놀라 돌아보았을 때, 그는 통신기를 떼어 내면서 외쳤다.

"위험하다고요! 이대로는!"

"기다려, 케니히 이등병…!"

함교를 뛰쳐 나가는 토르에게 마류가 당황해서 소리쳤디만, 그 때 다시 피격의 충격이 엄습해 말이 끊기고 말았다. 밀리아리아의 비명을 들으면서 토르는 새삼 결의를 가슴에 안고 달려 나갔다.

'이대로는 당하고 만다! 조금만 더 가면 아군의 세력권인데, 이런 곳에서…!'

통로를 달리는 사이에도 끊임 없이 피격의 충격이 엄습해 와서 토르는 비틀거리며 달려야 했다. 적에 대한 분노가 끓어 올랐다.

'이제 그만 놓아 줘도 좋을 텐데 끝까지, 끝까지 끈질기게 쫓아 오다니! 애당초 그건 지구 연합군의 병기였는데!'

애당초 헬리오 폴리스를 파괴한 것은 녀석들이었다. 자신과 친구들이 살던 곳을 빼앗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계속 공격해 온다. 밀리아리아를, 키라를, 다른 사람들을…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

'이대로 멋대로 설치게 놔 둘 것 같아?'

함을…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키라도 무우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자신도 분발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

피격된 곳을 조치하러 달려가는 정비사들의 흐름을 거슬러서 토르는 사출 장치로 뛰어 갔다. 허겁지겁 스카이 글래스퍼의 조종석으로 뛰어 들자, 머독이 걱정이 되는지 전송해 주었다.

"무리하면 안 돼!"

"걱정 마세요!"

토르는 대답하고 캐노피를 내렸다. 열리는 해치를 노려보면서 그는 자신감이 몸 속에서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의 긴장감이 거짓말 같다. 이제 빔 하나 둘 정도에 비명을 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어제의 성공으로 자만하고 있었다. 시뮬레이션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실제 비행 시간은 한 시간도 되지 않는데, 그는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으로 이미 자신이 키라나 무우처럼 싸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괜찮아.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어제도 그렇게 잘 해 냈잖아?'

사출 장치가 토르의 2호기를 기세 좋게 허공으로 밀어 냈다.

"젠장!"

기울어진 채 격렬하게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키라는 초조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 버니어를 분사시켜 아크 엔젤에서 날아 올랐다. 다가오는 듀얼의 안면을 노리고 이겔슈테른을 쏘면서 사벨을 내리치자, 듀얼은 곧바로 구울에서 뛰어 올라 스트라이크를 걷어 찼다.

"……!"

버티지 못하고 스트라이크는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키라는 신속히 버니어를 분사시켜 자세를 바로 잡고 낙하하면서 라이플을 뽑았다. 발사된 일격은 구울에 내려 서려던 듀얼의 오른발을 관통했다. 듀얼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바다로 추락해 갔다. 하지만 떨어지는 동안에도 화가 난 듯 스트라이크를 향해 라이플을 연사했다. 그 중 한 방이 들고 있는 라이플에 명중하자 키라는 숨을 삼켰다. 간발의 차이로 라이플을 버리고 실드를 들어, 그 폭발에서 몸을 지켰다. 이지스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했다. 그것을 알아 챈 키라가 슬러스터를 분사해서 피하려고 했지만, 실드를 앞에 내민 채 부딪쳐 온 이지스와 충돌하고 신음했다.

"…우욱…!"

튕겨 나간 충격으로 스트라이크는 아크 엔젤에 착함하는 코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추락하는 와중에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없어서 키라는 부근의 섬 하나에 곤두박질 쳤다. 기체가 열대의 나무들을 쓰러뜨리자, 그 나무들을 거처로 삼고 있던 선명한 색깔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 올랐다. 낙하의 충격으로 자세를 바로 잡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스트라이크에게 구울에서 뛰어 내린 이지스가 다가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내리쳐진 사벨을 키라는 간신히 실드로 막았다. 저지 당한 빔이 불타듯 빛을 내뿜었다. 그 빛 아래서 키라는 이지스를 쳐다보았다. 붉게 빛나는 기체의 구석 구석까지 아스란의 기백이 넘치고 있었다.

'질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연기를 꼬리처럼 끌면서 크게 기울던 아크 엔젤은 필사적으로 고도를 유지하려고 했다. 스트라이크가 추락한 곳으로 보이는 작은 섬을 통과할 때, 밀리아리아는 불안한 눈으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무들에 가려져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았고, 엄호를 해 줄 수 있는 여유도 없어서 우선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며 먹구름이 머리 위를 무겁게 짓눌렀다. 함교에는 경고음이 울려 퍼졌고, 이곳 저곳의 통제실에서는 고장을 알리는 램프가 점멸했다. 지금까지 엔진을 구슬리듯 상처 입은 함을 조종해 온 노이만이 마침내 절망적으로 외쳤다.

"자세 제어 불능!"

마류는 이를 악물었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착륙한다! 전원 충격에 대비하라!"

덜컹덜컹 진동하는 함교에서 사이가 소리쳤다.

"2시 방향에 버스터!"

고도가 떨어지고 있는 아크 엔젤 앞을 가로막듯 버스터가 돌아왔다. 나탈이 진동음과 경보음에 지지 않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고트프리트! 발리언트! 조준!"

그러는 사이에도 눈 앞에는 하나의 섬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성한 녹음에 덮인 채 선명한 꽃을 피우고 있는 한가로운 섬의 백사장에 거대한 전함은 기운 채로 돌진했다. 모래사장이 파헤쳐지며 긴 홈이 패였고, 그 곳으로 바닷물이 굽이치며 흘러 들어왔다. 엄청난 충격이 승무원들을 덮쳤다. 조금 높은 좌석에 있던 카즈이와 파르는 떨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의자에 매달렸다. 모래사장을 도려내고 나무들을 쓰러뜨리며 아크 엔젤은 섬에 얹히는 형태로 겨우 정지했다.

아직 흔들림이 가시지 않은 함교에서 마류는 앞쪽을 보다가 숨을 삼켰다. 눈 앞에 버스터가 나타나서 양 옆구리의 포로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사냥감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제 와서 이 쪽에서 조준을 한다 해도 늦었다. 그 총구는 똑바로 함교를 노리고 있었다.

'당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숨을 멈춘 순간이었다.

「어림 없다─!」

고함 소리와 함께 무우의 스카이 글래스퍼가 돌진했다. 빔이 버스터의 구울을 명중시키자 폭발했다. 버스터는 곧바로 뛰어 올라 그 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두 기체는 서로 응사하며 공중에서 엇갈렸다. 버스터가 두 자루의 포를 연결해 대장갑 산탄포를 쏘자, 동시에 스카이 글래스퍼도 아그니를 발사했다. 그대로 2기는 교차했고, 다음 순간 버스터는 빔에 오른팔이 날아갔다. 스카이 글래스퍼도 왼쪽 날개에 산탄을 맞고 불을 내뿜었다.

마류는 조마조마하게 무우의 기체를 지켜 보다가 그것이 연기를 뿜으며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가에 착륙한 것을 확인하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추락한 버스터는 아크 엔젤 전방에 있는 땅에 쓰러진 후 어색하게 일어서려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력계가 고장난 모양이었다. 곧바로 나탈의 호령이 울려 퍼졌다.

"고트프리트 조준!"

이 쪽도 만신창이라서 주포의 에너지가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그 때였다.

"잠깐!"

마류가 주포 발사를 막았다. 버스터의 조종석이 열리더니 안에서 붉은 파일럿 슈트 차림의 인물이 나왔던 것이다. 그 인물은 마지 못한 태도로 양 손을 들었다.

"투항할 생각인가?"

나탈이 놀라 소리쳤다. 마류가 돌아 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 보았다.

 

 

"도사님…."

아이들이 불안한 듯 마르키오 주위로 몰려 들었다. 천둥 소리가 울리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세찬 비가 지붕을 때렸다. 마르키오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베란다로 나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그는 뺨으로 느꼈다. 아이들은 그를 에워싼 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것은 보호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도, 반대로 그를 지키려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들의 귀에 천둥 소리 사이 사이로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키오는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 매우 묵직한 것이 대지를 치는 소리─마치 거인의 발 소리 같다─와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 그리고 그것들에 섞여 총성이 들려 왔다.

"도사님, 뭐예요? 이 소리는?"

한 아이가 그것을 들었는지 소리쳤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오로였다. 마르키오는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짓고 작은 몸을 끌어 당겼다.

"그냥 여느 때의 폭풍이란다. 집 안에만 있으면 괜찮아. 자, 안에서 무엇을 할까?"

아이들은 그 순간 기운을 되찾고 서로를 쿡쿡 찌르는 등 장난을 치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손을 이끌린 채 마르키오도 뒤를 따랐다.

문을 닫기 전에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마르키오의 예민한 귀는 스콜을 뚫고 그것이 대구경 기총이 발사되는 소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간파했다.

 

 

스트라이크와 이지스는 아직도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빔 사벨을 서로 휘두르며 부딪치고 떨어졌다가 다시 베어 갔다.

"키라─!"

아스란은 소리치며 스트라이크를 베었다. 상대는 그것을 실드로 막고 물러섰다. 아스란은 필사적이었다. 출격 때의 냉정함은 이미 날아가 버렸고 시야에는 적기의 모습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상대에게 거의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벨을 휘두른 오른손이 맨손에 튕겨 나가자 아스란은 울컥 했다. 자신과 키라 사이에 이렇게나 큰 기량 차이가 있었단 말인가.

"이야아─압!"

공격해 오는 스트라이크를 피하고 이겔슈테른으로 견제하면서 다시 돌진했다.

해치우기로 결심했는데. 해치워야만 하는데.

'어째서냐, 키라! 어째서 네가 그걸 타고 있어? 어째서 내츄럴을 위해 싸우는 거냐? 왜 나한테 오지 않은 거야? 왜…?'

"키라─!"

이지스는 공중에서 변형하여 갈고리 사이로 스퀼라를 쏘았다. 스트라이크는 허를 찔려서 고출력 빔을 간신히 피하기는 했지만 자세가 크게 무너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스란이 덮쳤다.

"어째서 네가 니콜을… 니콜을 죽인 거냐─!"

이지스가 돌진해 오는 것을 키라는 매혹된 듯 지켜보았다. 몸은 무의식적으로 기체를 바로 잡고 방어 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은 반 쯤 받아 들이고 있었다. 아스란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아스란을 죽일 수도 없다. 키라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은 아스란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 싸움의 결말은 이미 난 것이 아닐까. 자신을 내리치는 사벨의 빛나는 궤적을 키라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때….

「키라─!」

갑자기 무전기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와 그는 정신을 차렸다. 스카이 글래스퍼 2호기가 상공에서 돌진해 오고 있었다.

"토르?"

미사일이 발사되어 이지스의 발 밑을 파헤치자 붉은 색 기체는 도약해서 그 폭발을 피했다. 그리고 그의 개입에 분노한 듯 스카이 글래스퍼 쪽으로 휙 하고 몸을 돌렸다. 키라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안 돼, 오지 마─!"

이지스는 왼손 실드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마치 성가신 파리를 내쫓으려는 듯이. 실드는 회전하면서 그대로 날아갔고…, 그리고 스카이 글래스퍼의 조종석에 그대로 박혔다.

「아, 아, 아앗!」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치는 토르의 비명이 들려 오더니… 곧 끊겼다. 키라의 뛰어난 시력은 모든 것을 선명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부서진 조종석에서 파편과 함께 토르의 헬멧이 튕겨 나가는 모습도, 그것이 선혈의 꼬리를 끌고 있는 모습도, 그 붉은 색도 모두….

다음 순간, 폭발의 섬광이 모든 것을 불태우며 키라의 망막에 아로새겨졌다.

"토르─!!"

갑자기 밀리아리아 앞에 있는 2호기의 모니터에 잡음이 나며 깜박이더니 사라졌다.

"어…?"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서 통제실에 나타난 'SIGNAL LOST' 라는 문자를 쳐다보았다.

'이건… 무슨 에러지?'

아까부터 함교의 제어기는 어느 곳이던 경고 램프만 잔뜩 켜져 있고 전기 계통도 고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분명 전기 계통의 에러일 것이다. 그게 분명하다.

"토르…."

그녀는 좋아하는 소년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어서 돌아와. 그 밝은 얼굴로 내가 너무 걱정이 많다고 웃으며 말해 줘….'

 

 

"아… 아아… 아아아─!"

키라는 의미 없는 외침을 지르며 눈 앞의 기체를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약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슴에는 모든 것을 불태울 것 같은 분노가 끓어 올랐다.

"아스란─!"

키라는 소리치면서 이지스를 향해 돌진했다. 그 기체에 타고 있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라는 것도 잊고, 그는 증오 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사벨을 내리쳤다.

'토르… 토르를!'

이지스도 기세 좋게 받아 쳤다. 칼날을 부딪히며 둘은 서로를 격렬하게 베었다. 키라는 상대의 기체를 밀쳐 내고 사벨을 크게 휘둘렀다.

'이 녀석이 토르를…!'

이지스의 왼팔이 허공으로 잘려 나갔다.

"우오─오오!"

키라는 자신이 짐승처럼 신음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눈 앞의 적만을 쫓았다. 자신의 눈에서 흘러 넘치는 눈물도 깨닫지 못한 채.

토르….

코디네이터인 자신을 허물 없이 대해 준 토르….

자신을 지켜 주기 위해 총구 앞으로 뛰쳐 나간 토르….

라크스를 풀어 줄 때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협력해 주었다. 키라를 전송할 때 불안한 표정으로 "돌아올 거지?" 라고 물었다.

토르…. 토르…. 토르….

─나도 분발해야지.

꾸밈 없이 웃는 그 얼굴이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내 손으로 지원했으니 말이야.

토르….

그 토르를 이 녀석이… 마치 벌레 죽이듯 죽였다.

사벨을 휘두른 그 동작 그대로 스트라이크가 뛰어 올라 이지스의 안면을 걷어 찼다.

"크윽…!"

기체가 튕겨 나가자 아스란은 충격에 신음했다. 아까부터 스트라이크는 무언가를 떨쳐낸 듯 움직임이 달라졌다. 마치 귀신과도 같은 이 움직임을 아스란은 전혀 따라 잡지 못해 수세에 몰리기만 했다. 그는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키라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실에 분노가 샘솟았다.

"키라─!"

질 수 없다.

─아스란, 도망쳐….

마지막으로 들은 니콜의 떨리는 목소리가 귀에 되살아 나서 그를 책망했다. 끝까지 니콜은 아스란을 걱정해 주었다. 착한 아이였다. 전쟁터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착한 아이였다. 그 녀석을 위해서라도 질 수 없다.

"내가! 내가 너를 해치우고 말겠어!"

아스란의 몸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분노로 흐려져 있던 시야가 급격히 맑아지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물러서면서 기체를 전개하고, 나머지 세 개의 갈고리 끝에 빔 사벨을 출력하면서 하얀 기체를 덮쳤다.

"우오─오오!"

빔의 칼날이 스트라이크의 왼팔을 베어 버리자 실드가 허공에 날렸다.

"아아─아!"

둘은 소리치면서 굶주인 두 마리 짐승처럼 격돌을 되풀이했다. 이지스의 목이 날아가고 스트라이크의 조종석 해치가 도려져 나갔다. 그래도 두 사람은 분노에 사로잡힌 채 처참한 공격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잿빛의 하늘이 그 분노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대량의 비를 쏟으며 번갯불을 번뜩였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싸움에 드디어 끝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모빌 아머 형태의 이지스가 스트라이크에게 파고들더니 그 기체를 덥썩 갈고리로 붙잡았던 것이다.

'잡았다!'

아스란은 전율과도 같은 승리감에 도취된 채 스퀼라의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그 순간 페이즈 시프트가 꺼졌다. 아스란은 한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방아쇠를 잡아 당기다가 그제야 얼마 전부터 울리던 경고음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모니터에는 갈고리에 움직임이 봉쇄된 스트라이크가 비춰지고 있다. 지금이라면 해치울 수 있다.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데 그 무기가 없다니…. 그는 원망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크으…!"

'아니… 있다.'

아스란의 눈에 냉철한 빛이 되돌아왔다. 그는 하나의 버튼을 누르고 숫자 패드에 재빨리 암호를 입력했다. 모니터에 팟 하고 '10:00' 이라는 숫자가 표시되며 카운트를 시작했다. 그가 작동시킨 것은 이지스의 자폭 장치였다.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마지막 무기. 아스란은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해치를 열고 탈출했다. 10초는 오싹할 만큼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체에서 충분히 멀어지기 전에 섬광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격렬한 폭발이 그의 몸을 허공에 날려 버렸다.

 

 

엄청난 굉음은 아크 엔젤에도 전해졌다. 손상된 기체와 함께 귀환한 무우와 보수 작업 중인 머독, 그리고 함교에 있던 승무원들 모두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멍하니 앉아 있는 밀리아리아 앞에서 또 하나의 모니터가 꺼졌다.

"어…?"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것은 스트라이크의 통신 회선이었다. 방금 전의 스카이 글래스퍼와 마찬가지로 'SIGNAL LOST' 로 바뀐 모니터에 밀리아리아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키라…? 토르…?"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마치 두 사람의 숨결을 느끼려는 듯 무의식 중에 손 끝으로 모니터를 쓰다듬었다. 느릿하고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그녀 뒤에서는 마류와 나탈이 갑자기 치솟은 거대한 폭염을 보고 숨을 삼키고 있었다.

불꽃은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에 반사되어 마치 피처럼 대기를 붉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