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사 -上-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아낙시만드로스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은 무한이다.

무한은 존재하는 것들의 생명이 시작하는 곳이요,

필연적으로 모든 존재의 소멸이 완성되는 곳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순서에 따라 서로 불의에 대한

벌과 보속(補贖)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친척 뻘 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기원전 610년 밀레토스에서 태어나 스승보다 약 20여 년 나이가 어린 그는 문명사에 있어 최초로 지도를 그린 사람이다.

당시만 해도 바닷길에 들어서는 사람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큰 용기를 가져야 했다. 나침반도 없었고, 육분의나 항해도도 없었으니, 디디마의 신탁*에서 반대가 없으면 그것으로 충분했고, 출항하는 날 날씨가 좋으면 감지덕지하는 형편이었다. 상황이 이럴진대 아낙시만드로스가 그린 항해도는 최첨단 기술이 제공하는 플러스 알파였음에 틀림 없다. 이 항해도에는 항해를 하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한 정보와 충고, 참고 사항들이 친절하게 씌어 있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해시계 또는 해시계의 바늘을 발명했다고 전해질 뿐만 아니라(아를레스의 파보리노스는 아낙시만드로스가 스파르타의 아고라에 사분원을 그리고 가운데에 막대기를 꽂아 그 그림자가 바닥에 그려진 시간 표시 위로 옮겨가게 하였다고 전한다), 스파르타 지역의 지진을 예측해서 수많은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다른 이름)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디디마(Didima)는 밀레토스 근처의 지역 이름이다. 이 곳의 '디디메오스'라 불리는 아폴론 신전은 신탁으로 유명했다.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된 이 신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탈환 후 다시 건설되었고, 밀레토스에서 디디마에 이르는 길에 세워진 신상들은 서기 3세기 경까지 밀레토스의 영화를 상징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지도를 그리는 능력을 가졌음을 보면 여행을 많이 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예외 없이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들이었다. 크세노파네스는 67년 동안이나 세상을 돌아다녔다고 하고, 데모크리토스는 당시의 누구보다도 많은 미지의 지역을 돌아다녔노라고 큰 소리를 칠 정도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젊은 시절부터 흑해 지방에 식민지를 세우고 아폴론 신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도시의 이름을 '아폴로니아'라고 지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말하는 '식민지'라는 말의 뜻을 정확히 밝히고 넘어가는 것도 좋으리라. 무엇보다도 먼저 당시의 식민지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식민지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당시의 식민지는 제국주의 세력이 무력으로 다른 나라의 영토를 점령한 땅이 아니었다. 몇몇 사람이 가재 도구를 챙겨 사람이 살지 않는 강어귀에 옮겨 가 새로 일궈 낸 마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연안에만 약 1천 500개의 식민지를 건설했고 멀리 프랑스와 에스파냐 해안에까지 자기들의 습관과 생활 방식을 전해 갔다. 콜라이오스라고 하는 사람은 심한 폭풍우 때문에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 대서양 연안까지 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지브롤터 해협의 양쪽에 있는 두 개의 바위 산. 고대인들은 '아아빌라'와 '칼피'라고 하는 이 두 개의 산을 오랫동안 항해의 한계선으로 믿었다.

 

불행하게도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해서는 탈레스처럼 재미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 합창 단원복을 입은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정도가 고작이 아닐까 싶다. 합창단에 끼어 노래를 하는 그의 노래 솜씨를 본 아이들이 박자 감각이 없다고 놀려 댔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놀리는 말을 들은 우리의 철학자 양반께서는 열심히 노래를 하는 사람들을 향해 점잖게 한 말씀 하셨다.

"이봐 친구들, 제발 박자 좀 맞춰 가며 노래하세나. 그렇지 않으면 저 꼬마 녀석들이 계속 놀려 댈 게 아닌가?"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연에 대하여』, 『세계 일주』, 『고정된 별에 관하여』, 『천계에 대하여』 등 많은 작품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은 한두 마디로 된 네 개의 단편적인 구절과 하나의 문장 뿐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그 문장이야말로 정확한 뜻을 해석하려는 역사학자들의 골칫거리가 된 것이다. 원문은 하나의 문장이지만, 여기 몇 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은 무한이다. …무한은 존재하는 것들의 생명이 시작하는 곳이요, 필연적으로 모든 존재의 소멸이 완성되는 곳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순서에 따라 서로 불의에 대한 벌과 보속(補贖)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탈레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물이 아니라, 불명확한 어떤 물질이라는 것이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그것을 '아페이론'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것은 이것으로부터 생겨나고 또 이것으로 돌아가 소멸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자신의 스승과는 달리 물, 불, 공기, 흙의 네 가지 요소 중의 하나가 우주의 근원 요소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중 한 요소가 다른 것들에 비해 우월해서 다른 요소들은 어쩔 수 없이 사라질 테니까. 한 마디로 아낙시만드로스는 물, 불, 공기, 흙은 한계를 지닌 요소이고 따라서 이 요소들을 위에서 지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그가 말한 내용의 뒷부분도 조금씩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다른 요소에 대해 불의를 범했을 때, 다시 말해 다른 요소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 초월적인 요소, 즉 아페이론은 영역을 침범한 요소를 원래의 자연적 경계 안으로 다시 쫓아 버린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러한 요소들은 그리스의 여러 신과 마찬가지로 기회만 있으면 자신과 반대 입장에 있는 요소에 공격을 가하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위는 추위를 억누르려 하고, 건조함은 수분을, 수분은 건조함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하지만 '필연'이 그들을 제압해,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의란 각 요소에 허용된 한계를 서로 존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몇 가지 시적인 표현 때문에 정의란 서로 다른 요소들 사이의 단순한 균형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그것 이상의 무엇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특히 '필연'이라든가 '보속(補贖)'이라는 말을 보면 아낙시만드로스에게는 초월적인 질서를 바라는 신비적인 욕구가 있음을 추측케 해 준다.

 

우주의 탄생에 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생각은 더욱 시사하는 바가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생각을 이렇게 전해 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원으로부터 뜨거움과 차가움이 분리되었는데 공 모양의 불이 나무 껍질처럼 지구를 감싼 공기 바깥에 퍼졌다. 그 뒤 이 공 모양의 불이 떨어져 나와 몇 개의 원으로 분리되어 태양과 달과 별이 되었다."

정리해서 말하면, 태초에는 무한한 물질인 아페이론만이 존재했는데 이어서 뜨거움과 차가움이 분리되어 뜨거움은 우주의 바깥 쪽에, 차가움은 중심에 자리를 잡았고, 뜨거움은 건조함을 차가움은 습함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건조함과 습함은 끊임 없이 전쟁을 했는데 여름에는 건조함이 우세해서 바닷물을 수증기로 바꾸어 바다를 잡아먹고, 겨울에는 습함이 잃었던 힘을 회복해서 구름을 모아 비와 눈의 형태로 수분을 쏟아 내린다. 아페이론은 높은 곳에서 둘 중 어느 하나가 절대적인 우세승을 거두지 않도록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세세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사이다!"

이것은 그의 말 끝에 덧붙이고 싶은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사실 아낙시만드로스의 말대로, 어느 날 뜨거움이, 아니 다른 말로 원자폭탄이 차가움의 영역인 우리 인간과 인간의 재산을 영원히 날려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차가움과 뜨거움이 교대로 자리를 바꾸는 것은 계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도 흥분과 열광 사이를 오가고, 때로는 길고 긴 침잠의 세월을 맛보기도 한다. 미술과 음악과 유행과 그 밖의 창조적인 표현 활동에도 지배자의 영향력이 미치게 마련이고, 따라서 순탄한 시기와 부글부글 끓는 시기가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여인들의 치마 높이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그에 맞춰 인류의 열기도 오르락 내리락 하지 않는가?

예로 우리 세기를 살펴 보자. 파시스트 시대처럼 뜨거운 세대가 있었는가 하면, 다행스럽게도 내가 속한 세대처럼 차갑고 조용하고 근면한 부흥의 시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숨도 채 돌리기 전에 68년의 그 뜨거운 학생 운동의 시기가 뒤따르지 않았는가? 뜨겁다 못해 부글부글 끓었다는 표현도 모자랄 시기가 말이다. 그러기에 다음에 올 시기가 두려운 것이다. 하느님께서 좋은 시대를 보내 주시기를!

 

다시 아낙시만드로스에게 돌아가 보자. 아페이론을 주창한 우리의 철학자께서는 우리가 사는 지구를 어떤 모습으로 상상했을까? 이 어른께서는 지구가 둥근 기둥처럼 생겼으되 높이보다는 지름이 엄청나게 큰, 마치 둥근 케이크 같은 모습으로 우주 중심의 공기에 떠 있다고 생각했다. 지구가 어느 쪽으로도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주의 정중앙에 있기 때문에 어떤 한 방향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양반은 이 케이크의 두께가 지름의 삼분의 일 정도이고 돌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지구의 둘레에는 안쪽에 압축 공기를 댄 거대한 불바퀴들이 돌고 있고, 불바퀴의 안쪽 그러니까 바퀴살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플루트의 구멍처럼 뚫려 있는 이 곳을 통해 압축 공기의 저 편에서 타오르는 둥근 불바퀴가 보인다는 것이다. 하늘의 별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 하나하나의 불 덩어리가 아니라 하늘의 천장 저 편에 있는 불빛이 바퀴의 구멍을 통해 지구 쪽으로 흘러 들어온 것이라는 얘기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태양의 바퀴는 지구 지름의 27배가 되고, 달의 바퀴는 지구 지름의 19배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밝혀 주셨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인간이 비늘에 덮인 채, 진흙처럼 축축한 물질 위에 태어났는데 태초에는 기후 조건이 살아가기에 부적당해서, 불쌍하게도 유년기의 전 기간을 물고기와 비슷한 짐승의 입 속에서 보냈다고 한다. 잠복기가 지난 뒤 물고기 입에서 밖으로 나오는데 그 때에야 비로소 비늘을 벗어 버리고 독립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뿐 아니라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가 직접 남긴 것이 아니라 모두 역사가들의 글을 통해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낙시만드로스의 공(功)은 초월적인 어떤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점이다. 그는 그것을 때로는 아페이론이라 부르고 때로는 필연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모든 것을 감싸 안고 모든 것을 지탱해 준다고 믿었다. 이런 까닭에 아낙시만드로스는 신비주의 철학자인 동시에 우주적인 철학자라고 불린다.

나로서는 별이 바퀴의 안쪽 구멍을 통해 보인다는 그의 말이 가장 재미있게 느껴지는데 이 점이 바로 그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의 주장이 우리 아버지의 친구 한 분을 떠올려 주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알베르토 캄마리노라고 하는 아버지의 친구분은 성인들의 동상이나 천사들의 머리, 성탄 구유 따위를 만드는 분이었다. 알베르토 아저씨는 한 해 내내 물건들을 만들어 성탄이 다가올 때면 산 조르조 가(街)에 내다 팔던 분인데, 언젠가 내게 성탄 구유를 만드는 비결을 가르쳐 준 적이 있다.

"얘야, 하늘을 만들고 싶으면 말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날 밤의, 그 별이 빛나던 하늘을 만들고 싶으면, 우선 두꺼운 마분지를 사야 돼. 빛이 새지 않는 아주 두꺼운 것으로 말이다. 그 다음에는 종이에 색칠을 하는 거야. 마카로니 상자 알지? 그 상자처럼 아주 짙은 푸른색으로 칠해야 돼. 그러고 나서 색칠한 마분지를 벽에다 고정시키고, 그 뒤에 조그만 전구를 서너 개 붙이는 거야. 몇 개를 붙일지는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 전구는 허연 우윳빛이 칠해진 거라야 좋아요. 그래야 빛이 잘 흩어지거든. 그 다음이 중요한 건데, 쉬잇…. 바로 이게 비결이거든…. 마분지에 바늘로 구멍을 내는 거야. 만들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구멍을 내도 좋아. 물론 구멍은 아주 작아야지. 보일 듯 말 듯 하게. 그래야 이 구멍에서 전구의 불빛이 부서져서, 안 쪽에서 보면 수십 개의 빛줄기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래야만 성탄날 밤에 베들레헴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겠지?…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것처럼 으스스 춥게 느껴질 거고, 멀리서 양치기들이 부는 피리 소리가 들려 오는 느낌이 들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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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시메네스

 

공기로 이루어진 영혼이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처럼

입김과 공기가 온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낙시메네스 역시 밀레토스 사람으로, 앞에서 소개한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보다는 덜 중요한 사람이다. 아낙시메네스로서는 밀레토스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던 때라 마음껏 뜻을 펼 수 없었다고 변명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라는 말의 축소형처럼 들리는 이름만 봐도, 웬만한 이탈리아 사람은 그가 조금은 덜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금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피타고라스에게 보낸 편지를 그대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탈리아로 건너 간 자네 처지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네. 그 곳 크로톤 사람들은 자네를 아끼고, 시칠리아에서도 자네의 말을 들으러 간다고 하니 말일세. 이 곳은 메디아의 왕 때문에 매우 위태로운 형편이라네. 죽음이 기다릴지 노예 생활이 기다릴지를 몰라 전전긍긍하는 편이니 이 아낙시메네스인들 어떻게 조용히 하늘을 관찰할 수 있겠나?"

 

아낙시메네스는 『자연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의 내용으로는 여기 소개하는 단편 하나만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공기로 이루어진 영혼이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처럼 입김*과 공기가 온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

 

*그리스어로 프네우마(pnéuma)라고 하는 이 개념은 후일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이 더욱 발전시켰지만, 저자 데 크레센초는 이 말을 'soffio'라고 번역했다. 'soffio'라는 말은 '입김' 또는 '숨'이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대자연의 입김' 또는 '절대자의 입김'이라는 의미에서 '바람'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어떤 경우든 그러한 행위 또는 현상의 주체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아낙시메네스는 탈레스나 아낙시만드로스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이론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얼핏 보기에는 독창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따지고 들어가 보면 선배 철학자들의 이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아낙시메네스는 가장 근원적인 물질은 공기인데 이것은 탈레스의 물처럼 자연 속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낙시메네스가 주장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주는 공기로 이루어져 있고, 농축과 희박이라는 두 개의 현상에 의해 지배된다.

－불은 가장 엷어진 상태의 공기이며 구름과 진흙과 땅, 심지어 돌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랫동안 공기의 농도가 짙어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여러 가지 자연 요소들은 모두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질이 아니라 양에 의해 서로 차이가 난다.

－희박화 현상은 '뜨거움(불)'을 낳고, 농축화 현상은 '차가움(물)'을 낳는다. 그러므로 뜨거움과 차가움은 공기를 변화시키는 원인이 아니라 공기가 변화해서 생긴 결과이다(현대의 물리학은 아낙시메네스의 주장과는 반대의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즉 기체로 된 물질의 경우, 희박화는 온도의 하락을 초래하고 압축을 가하면 온도가 올라가게 된다).

 

이 철학자가 물보다 공기를 더 좋아했는가 아닌가 하는 따위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가 공기에게 '생명'이니 '신성(神聖)'이니 하는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는 점이다. 그는 "공기는 신이다" 라고 했고, 위에서 인용한 단편에서도 '입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온 자연계에 이러한 숨결이 스며 있다고 했던 것이다.

 

선배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낙시메네스의 첫 째 가는 취미는 자연 현상과 천체를 관찰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먼 세월을 뛰어 넘어 그의 유명한 강의를 듣는 학생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때는 기원전 526년 7월 7일 밤 자정. 밀레토스의 시민들은 이미 잠자리에 든 지 서너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낙시메네스 선생께서는 우리 학생들과 천상의 것들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케발라크 산 정상을 향해 비탈진 길을 오르고 있다. 물론 좀 더 선명하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일부러 달이 없는 밤을 골랐다.

바다가 칠흑같이 어둡고 적막한 모습으로 저 아래에 펼쳐져 있다. 깊게 호흡을 들이마시면 바닷바람에 실려 온 사모스 공원의 향기가 느껴진다. 송진으로 만든 횃불을 든 젊은이 둘이 스승의 양 쪽에 서서 어둠 속의 행렬을 비추는데, 불그스레한 횃불 빛이 노스승의 성스러운 용안을 강조하는 듯 하다. 한 순간 노철학자는 무리의 한가운데로 나서며 횃불을 끄라고 명한다. 갑자기 어둠이 내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씩 어둠이 엷어지고 학생들의 하얀 가운이 희미한 별빛에 어렴풋이 드러난다. 유령의 밤잔치 같은 신비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낙시메네스 스승은 밤하늘을 쳐다보고는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입을 열기 시작한다. 신전에서나 들을 수 있는 낮고 조용한 음성으로….

 

"나의 젊은 친구들,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육체의 눈보다는 지성의 눈으로 천계를 관찰할 수밖에는 없으이. 허나 그대들은 젊음과 아름다움의 신, 델포이의 아폴론이 함께 하고 있으니 그 예리한 시선을 마음껏 활용하여 그대들의 영혼을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게나. 나도 여러 해 전, 젊었을 적에 위대한 스승이신 탈레스 님의 말씀을 들으러 이 곳에 온 적이 있었네. 그 때 스승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 '별 무리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길을 찾을 수 있다네'."

"아니,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다마게토스의 아들 킬론이 아니었습니까?"

스승의 말을 끊고 끼여 든 사람은 가장 나이가 어린 곱슬머리 청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노인들에 대한 존경심, 즉 '아이도스'가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스승께서 열심히 강의하는 도중에 감히 말을 하다니(손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손아랫사람에 대한 훈계는 법률과 관습에 의해 제도화될 정도였다)!

 

아낙시메네스 스승은 젊은이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려 들릴락 말락 나지막하지만 매우 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헤사미아스의 아들인 탈레스 스승일세. 그에게 황금의 트리포도스*를 주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네. 스파르타의 킬론은 명성에 탐이 나 그 금언을 훔친 사람에 불과하지. 때에 따라서는 현자라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디오니소스의 샘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지. 자, 그만 우리가 오늘 이 곳에 모인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로 하세."

노철학자는 주목해 달라는 무언의 요구인 듯, 다시 한 번 침묵한 다음 먼저처럼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한다.

 

*tripodos 또는 tripous. 세 개의 다리를 가진 받침대로 주로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고대 오리엔트 지방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스인들은 트리포도스의 다리를 사람 모습이나 동물의 다리로 조각하기도 하였다. 항아리를 받치거나 불에 음식을 데울 때처럼 실질적인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상으로 주기도 했고, 로마인들은 종교 의식에 사용하였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의 술과 도취의 신이다. 로마 신화의 바쿠스 신에 해당하는 신으로 디오니소스 심취자들은 숲 속에서 격렬한 춤과 축제를 벌이며 자신을 망각하기도 했다. 디오니소스의 샘물을 마셨다는 것은 술을 마시고 취했다는 뜻이다.

 

"우리 위에는 하늘의 천장이 열려 있네. 하늘은 밤바다에 나가는 선원들이 쓰는 양털 모자 필레오스처럼 땅을 덮고 있네. 필레오스가 선원들의 머리를 감싸고 빙빙 돌 수 있듯이 하늘의 천장도 우리 머리 위에서 돌고 있다네. 땅은 평평하고 둥근 식탁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 공기가 떠받치는 얇은 방패 같은 모양으로 우주의 반 되는 곳에 걸려 있네. 공기를 반으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 뚜껑처럼 막고 있는 꼴이지…."

"죄송합니다만 아낙시메네스 스승이시여."

곱슬머리 젊은이가 다시 끼여든다.

"땅은 공기를 막고 있는 뚜껑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는 땅 위에도 공기가 있지 않습니까? 스승님의 망토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숫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구요."

"젊은이, 그대는 누구인가?"

참다 못한 아낙시메네스 스승이 젊은이를 향해 묻는다.

"멜란토스의 아들, 헤카타이오스입니다."

 

"좋네. 헤카타이오스, 자네의 질문에 대답하지. 공기는 우리 위에도 있고, 아래에도 있고, 또한 우리 안에도 있네. 자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까닭은 공기가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뜨거움과 차가움, 건조함과 습함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뱃사공의 노에 부서지는 바다가 하얀 빛을 드러내듯이 공기도 때로는 번갯불로 빛을 내지 않는가? 이런 현상은 바람이 구름을 가를 때 일어나는 것이네. 때로는 무지개 빛을 띠기도 하는데 이것은 폭풍우가 지나고 난 다음 태양의 빛줄기가 더 두터워질 때 일어나는 현상일세. 자네의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것이 다 공기이네. 헤카타이오스, 자네도 역시 공기란 말일세."

"알겠습니다. 헤카타이오스도 공기고 아낙시메네스 스승님도 공기십니다. 그러면 이제 태양과 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태양은 하늘에서 불꽃을 내는 둥근 탁자 같은 것이네. 매우 빠른 속도로 돌기 때문에 그 표면이 빛을 내는 거지. 단 주의해야 할 것은 태양이 땅 주위를 돌고 있을 뿐 절대로 땅 아래로 내려가는 법은 없다는 것일세."

"그렇다면 밤에는 왜 사라지는 것입니까?"

스승께 질문을 던지는 데에 더 이상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 헤카타이오스가 다시 질문을 한다.

 

"밤에는 오드리사이*들이 사는 트라키아 땅 저편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네. 그 곳에는 까마득히 높은 얼음산들이 있어서 태양이 그 쪽으로 넘어가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일세. 다음 날 아침 니느웨와 바빌로니아의 푸른 평원을 가로지르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위로 더욱 밝은 햇살이 내리쬘 때까지 말이네. 밤에는 태양의 위치가 너무 낮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일세. 그러나 태양 빛을 받아 그림 원판처럼 하늘을 떠도는 달에게 빛을 줄 정도는 되니까 적당한 높이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아야겠지. 만약 나의 스승이요 친구였던 아낙시만드로스의 말대로 태양이 땅 아래로 돈다면 달은 매일 밤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야 할 걸세. 마치 불안정한 여자 아이가 한 잎 두 잎 꽃잎을 뜯어 내는 꽃처럼 말일세."

 

*그리스 동부의 트라키아 지방에 살던 고대 민족으로 트라키아 지역은 오늘 날 터키의 에게 해 연안이었다. 밀레토스에서 보면 해가 지는 서쪽의 땅인 셈이다.

 

"그러면 별은 어떻습니까?"

"별 중에는 바람에 날리는 불똥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있는데 이런 별들은 원래 땅에서 생긴 것으로 습기 때문에 생긴 것일세. 여러 차례에 걸쳐 공기의 농도가 엷어지는 희박화 과정을 거쳐 빛을 내게 된 것이라네. 이런 별들을 우리는 '행성'이라고 부르는 것일세. 반면에 움직이지 않는 별들도 있지. 칼데아인들이 최초로 주장한 것처럼 반구 형태로 된 하늘의 천장은 얼음으로 뒤덮인 수정체 같은 것인데 움직이지 않는 별들은 이 천장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네. 자, 사랑하는 나의 젊은 친구들이여, 이제 나의 강의는 끝났네. 어서 밀레토스로 돌아가게. 그대들의 지식욕에 대한 보상으로 달콤한 잠자리가 기다리고 있으니."

다시 송진에 불이 당겨지고 우리는 도시를 향해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돌아가는 길로 들어선 학생들이 스승이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느라 왁자지껄하다.

 

글쎄 아낙시메네스 스승이 생각하는 우주는 마치 기념품 상점에서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거꾸로 세우면 안에서 눈가루가 날리는 유리 공 장난감 같은 것이 아닐까? 땅은 두 개의 반구 사이에 끼워 넣은 납작한 원판 같은 것으로 유리공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는 위치에 있는 그런 것이리라. 원판의 아래 쪽은 공기로 가득하고 위 쪽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있겠지. 나 역시 학생들의 토론에 끼여들어 열을 올리다 보니 어느 새 길이 몹시 가팔라지고 위험하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기엔 두 개의 횃불은 충분치 않으니까. 달은 도대체 어느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거람?

아낙시메네스 스승께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노철학자는 입을 굳게 다무신 채, 발 디딜 곳을 찾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가끔씩 바짝 붙어서 내려가는 헤카타이오스의 팔을 낚아 채 몸의 균형을 잡으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