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과 문지기

멀리 인왕산에서 불어 오는 바람은 올해도 구중 궁궐 깊은 심처에 어김없이 찾아와 대궐 마당 곳곳에 노란 민들레를 점점이 수놓듯 뿌려 놓았다.

한가로이 유영하는 연못의 잉어들은 은빛 햇살에 반짝이는 몸빛이 예년보다 곱절은 아름답고 화사하게 빛나 보였다.

비원 근처에서 날아온 것일까? 날개에 꽃가루를 잔뜩 묻힌 노랑 나비 하나가 성종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 새 이렇게 천지간에 봄이 찾아왔던고!'

성종은 정자에 앉아 읽던 책을 덮고는 하명을 내렸다.

"과인이 비원으로 가려 하니 채비를 하라."

성종은 어가를 마다하고 천천히 대궐 마당을 거닐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흥이었다.

"참으로 보기 좋구나. 지금쯤이면 비원에도 꽃들이 만발했을 것이로다."

성종은 비원에 다다라 한가로이 꽃구경을 하다가 작은 정자에 올라 잠시 쉬었다.

"여봐라! 지필묵을 대령하라."

봄 기운을 타고 파릇파릇 잎새를 틔우는 나무를 바라보는 성종의 마음에 한 줄기 시상(詩想)이 실바람처럼 흘렀다. 내관들이 준비한 지필묵을 옆에 두고 성종은 조심스레 글을 써 나갔다.

 

푸른 옷감으로 봄 버들을 만드니 [錄羅剪作三春柳]

붉은 옷감은 이월의 꽃을 만드네 [紅錦裁成二月花]

 

거기까지 붓을 놀린 성종은 시상이 막히는지 잠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우러렀다.

'음…. 다음은 어찌 이어가야 한다?'

성종은 벼루 위에 조용히 붓을 내려놓았다.

"오늘의 봄 흥취는 예서 끝나는가 보구나. 과인이 다음에 와서 계속 이을 것이니 이 종이를 정자 기둥에 붙여 놓도록 하라."

성종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난 봄빛이 완연한 비원을 떠났다.

 

농익은 꽃들의 향기가 대궐을 온통 노곤하게 만드는 어느 오후, 성종은 며칠 전 정자에서 못다 쓴 글을 생각해 내고는 비원을 다시 찾았다.

시든 꽃을 대신하여 물오른 나무들이 한껏 푸른 나뭇잎으로 그늘을 드리우는 모습을 보며 성종은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 사람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언가 뭉클한 감성이 이번에는 시를 끝낼 수 있으리라는 느낌을 주었다. 성종은 정자에 올라 나무 기둥에 붙여 놓았던 종이를 찾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이 짓다 만 글이 완성되어 있었다.

 

대신들을 시켜 봄빛을 다투게 한다면 [若使公候爭此色]

평민의 집에는 채 봄이 가지도 못하리 [韻光不到野人家]

 

시구를 읽는 성종의 표정이 점차 놀라움으로 변해 갔다.

"일찍이 보지 못한 명필에 명문이로구나!"

성종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여봐라! 이 곳을 지키는 문지기를 들라 하라!"

성종은 그 글이 누구의 솜씨인지 알고 싶었다. 잠시 후 내관을 따라 문지기가 들어왔다.

"근자에 이 곳을 다녀간 사람이 있었더냐?"

성종이 물었다.

"아무도 없었사옵니다."

문지기가 공손하게 아뢰었다.

"그렇다면 저 글은 누구의 솜씨란 말이냐?"

성종이 답답하다는 듯이 문지기를 채근했다.

"황공하옵니다만 그 글은 소인이 쓴 것이옵니다. 순찰을 돌다 채 완성되지 않은 글이 있기에 전하의 글인지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써 놓았습니다. 전하,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뭐라, 네가 쓴 것이라고?"

문지기의 대답에 성종은 깜짝 놀랐다.

"그래, 정녕 저 글을 네가 지었단 말이냐?"

성종은 믿을 수 없어 다시 물었다. 한낱 문지기의 재주로 보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솜씨였다.

"전하, 소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문지기는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과인이 이렇게 묻는 것은 너를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니라. 명필에 명문장이라 이를 칭찬하고자 함이니라. 이름이 무엇이냐?"

성종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문지기를 안심시켰다.

"예, 소인 귀원이라 하옵니다."

"귀원이라? 어디에서 왔느냐?"

"영월에서 왔사옵니다."

"이 만한 실력이면 이런 곳에서 문지기나 하며 지낼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연유라도 있는 게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문지기는 차분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소인은 고향인 영월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왔으나 그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대로는 도저히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어 내년을 기약하며 이 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밥벌이를 해야겠기에 이 일을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문지기의 이야기를 들은 성종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허! 그냥 문지기로 두기에는 아까운 실력이로다. 과인이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줄 터이니 이 일은 그만 두고 학문에만 정진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성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문지기 귀원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오로지 성은에 감읍하여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후 성종은 마음 속에 감흥이 일어 시상이 떠오를 때면 귀원을 불러다 놓고 글 짓는 것을 즐겼다. 문지기 귀원은 타고난 재주를 바탕으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였기에, 비록 우연한 기회였을망정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