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 가브리엘 루아

Gabrielle Roy, <Ces enfants de m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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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

 

그 어린 녀석은 마치 일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무슨 근심걱정이라도 있다는 듯 울어댔고, 그 옆의 다른 아이들은 그게 어떤 종류의 괴로움인지 알지도 못한 채 동정을 금치 못한다는 듯 함께 울어댔다. 오직 우리 꼬마 아르튀르만이 예외였다. 그 아이는 내게 다가와 옷 소매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쟤들 미쳤어요, 그렇죠!"

 

- 가브리엘 루아, <내 생애의 아이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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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나는 아주 빈번히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다 같이 노래를 부르게 하곤 했다. 어느 날, 그저 특징 없는 그들의 목소리들 속에서 떨리는 듯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맑은 목소리 하나를 분간해 낼 수 있었다. 나는 그룹 전체의 노래를 중지시키고 오직 닐 혼자서만 부르게 했다. 기막힌 목소리였다. 음악에 별다른 센스가 없는 나에게는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그 때부터 나는 이렇게 부탁했다.

"닐, 음을 좀 리드해 주겠니?"

그는 별로 힘주어 청하지 않아도 선선히 음을 리드했고 그렇다고 뽐내는 법도 없었다. 타고 난 듯이 늘 뽀로통해지는 아이들이 있듯이, 그는 타고난 듯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였다. 이렇게 되면 게으름을 피우던 다른 아이들도 그를 따라 노래를 불렀고 닐은 그럭저럭 리드해 갔다. 오래지 않아 그는 리드를 잘 하는 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재능 외에도 남들이 지닌 재능을 살려내는 재능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닐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고 그리하여 모두가 다 노래를 잘 할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 반의 노래 시간은 이웃 반 선생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제 당신네 반은 매일같이 음악회네."

그 때까지 나는 노래 선생으로 전혀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이가 많은 장학사는 평가를 위하여 우리 학교를 찾아왔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찌 된 일입니까? 선생님 반 아이들은 작년 아이들에 비해 월등하게 노래를 잘 하는군요!"

그리고 그는 수상하다는 듯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차라리 우리 아이들에게 한 번 더 노래를 들려 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알기로는 생전 처음 머나먼 행복의 몽상 속으로 깊숙이 잠겨 든 나머지 자기가 장학사 자격으로 학교를 찾아왔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은 것만 같았다.

그가 학교를 방문하고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교장 선생님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들리는 말로는 선생님 반 학생들이 올해는 기막히게 노래를 잘 부른다지요. 그 천사 같은 음악가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은데 제게도 한 번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교장 선생님은 체구가 자그마한 분이었지만 도가머리처럼 높이 세운 금발 때문에 실제보다 키가 좀 더 커 보였다. 그 시대 교직 신부님들의 복장인 그의 옷차림 또한 검은 연미복에 가슴 장식이 달린 흰 셔츠여서 강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나는 우리 학생들을 촘촘하게 무리를 지어 앞으로 나오게 했다. 닐은 키가 작은 축에 속했으므로 한가운데 파묻혀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그에게 간단한 신호를 보냈다. 그가 옆 친구들에게 충분히 들릴 만큼 알맞은 목소리로 리드했다. 어디선가 무슨 줄 하나가 조화롭게 진동하며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그러더니 너무나도 활기에 찬 합창 소리가 한 목소리로 울려 나왔으므로 나는 교장 선생님 역시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여간, 빈정거리는 듯한 기색은 그의 얼굴에서 이내 사라졌다. 그 대신 그에게서도 역시 행복한 꿈에 잠긴 듯한 표정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나는 몹시 놀랐다. 그는 마치 학교를 지도 감독하는 데 여념이 없는 교장의 신분을 깜빡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노래의 리듬에 맞추어 조금씩 고개를 흔들곤 했고 노래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한동안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그 여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매혹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는 닐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한참 동안이나 찬찬히 바라보고 있더니 마침내 그의 뺨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를 문간까지 배웅하는 동안 그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것이 선생님께서 올해 서른 여덟 마리의 참새들과 함께, 들에서 노래하는 종달새 한 마리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로군요. 그 새를 아세요? 그 새가 노래하면 누구나 무거운 가슴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게 되죠."

그 때까지만 해도 나 자신은 아직 너무 젊은 나이여서 가벼워진 가슴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도 그것에 대하여 조금 알게 되었다.

 

(중략)

 

나는 구원을 청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를 불렀다.

"닐, 이리 좀 와 봐!"

그가 달려왔다. 그는 아주 재미있는 어린 녀석으로 늘 기이한 옷차림이었다. 오늘은 거의 줄이지도 않은 어른용 멜빵이 달린 바지 차림이었는데 어찌나 통이 큰지 가랑이가 무릎까지 닿았다. 장화 역시 발에 맞지 않게 너무 커서 그가 내게로 달려 올 때는 헐거워진 뒤축이 털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텁수룩하고 퇴색한 금발과 정수리가 거의 평면인 모난 머리통으로 인하여 그는 꼭 배움의 길로 나선 러시아 농부 아이 같았다. 사실 노래를 부르지 않고 있을 때 그는 우리 반에서 종달새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상의 아이였다.

그는 내게로 와서 정답게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세요?"

"그냥 얘길 좀 하려고. 그래, 누가 가르쳐 줘서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지?"

"어머니가요."

나는 성적표를 나눠 주는 날 그녀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부드럽지만 좀 어색한 미소. 닐의 그것처럼 튀어나온 광대뼈, 새하얀 머릿수건 속에 숨어 있는 깊고 아름다운 시선, 말없이 왔다가 말없이 자리를 뜨는 소심한 그림자. 우크라이나 말 이외에 그녀가 할 줄 아는 말이 몇 마디나 될까?

"그럼 어머니가 우크라이나 말로 가르쳐 주시니?"

"그럼요!"

"우크라이나 노래를 많이 아니?"

"한 백 가지 쯤이요."

"그렇게 많이?"

"글쎄요, 하여간 확실하게는 열… 열 둘 …."

"하나 불러 보겠니?"

"어떤 노래요?"

"너 좋아하는 걸로."

그러자 그는 마치 바람에 저항하려는 듯 두 발을 벌리고 버티고 섰다.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벌써부터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그는 바로 내 눈 앞에서 그 때까지와 전혀 딴판인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가 학교에서 자기 어머니의 언어로 부른 최초의 노래, 어린 시골뜨기는 음악에 신들린 아이로 변했다. 몸은 경쾌한 리듬으로 일렁거렸고 두 어깨가 쳐들리는가 하면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고 가끔 살찐 입술이 벌어지면서 미소가 배어났다. 한편 그는 손을 쳐들어 우아한 몸짓으로 우리에게 저 멀리 그 무슨 아름다운 광경을 가리켜 보이는 듯 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손짓을 따라 그를 기쁨에 넘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애를 쓸 따름이었다. 두 눈을 감고 마음을 집중하여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너무나도 생기에 넘치고 신명이 나 있어서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솟아오를 것만 같은 그를 바라보는 것,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나을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매력적인 노래가 끝났을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 빠져 들어가 있었다. 아이들도 차츰차츰 제 자리로 돌아갔다. 반 전체가 보기 드문 평화로움에 젖어 있었다. 나 자신도 이제 더 이상 미래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았다. 닐의 노래가 내 마음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었다. 이제 나는 삶에 대한 믿음을 되찾았다. 내가 닐에게 물었다.

"그 노래의 내용이 뭔지 알고 부르는 거니?"

"그럼요."

"좀 설명해 줄 수 있겠니?"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무가 한 그루 있어요. 꽃이 활짝 핀 벚나무예요. 우리 어머니 고향에는 그 나무가 아주 많아요. 그 벚나무가 들 한가운데 있어요. 그 주변에는 처녀들이 춤을 추지요. 처녀들은 찾아올 연인들을 기다리는 거예요."

"아름다운 내용이구나!"

"그래요, 하지만 나중에는 슬퍼져요. 연인들 중 한 사람이 전쟁에 나가서 죽었거든요."

"안됐구나."

"아녜요. 그 덕분에 몰래 짝사랑하던 착한 사람에게 기회가 생긴걸요."

"아, 그거 잘 됐구나! 아니, 그런데 너희 어머니는 그 노래들을 어디서 배웠지?"

"이민 오기 전 고향에서요, 어렸을 때요. 어머니는 이제 그게 우크라이나 것으론 마지막 남은 거라고 해요."

"그럼 어머니는 그 노래들을 어서 네 작은 머릿속에 옮겨 줘서 네가 그걸 잘 간직하도록 만들어야겠구나."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아 두려는 듯이. 그리고는 내게 다정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중 한 가지도 잊어버리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노래 하나 더 부를까요?"

 

엄마가 허리뼈를 다친 지 벌써 석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깁스를 하고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드디어 의사는 깁스를 떼어 주고 나서 엄마에게 열심히 노력만 하면 걸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매일같이 노력했지만 아픈 다리를 내딛을 수가 없었다. 한두 주일 동안 희망을 잃어버린 것 같아 보였다.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가슴을 찢는 듯한 회한의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내가 엄마에 대하여 겁을 집어먹고 있다고 믿으면 안 되겠기에 나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도 생기 있고 성격이 적극적이며 독립적이던 엄마가 만약 불구가 된다면 그 삶이 뭐가 되겠는가? 나는 어느 날, 일생 동안 교사직에 발이 묶여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던 적이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수인처럼 창가의 자리를 영영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엄마의 마음이 어떠할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엄마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하여 닐을 데리고 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도무지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닐,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 노래를 좀 불러 줄 수 있겠니? 우리 어머니는 노래를 다 잃어버렸거든."

그는 자기 식으로 응해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조그만 손을 내 손 안에 집어넣은 것이다. '선생님과 함께라면 이 세상 끝까지라도 갈 거라는 걸 잘 알잖아요' 라는 그 뜻이 곧장 내 가슴에 와 닿았다. 집으로 오는 동안 나는 그에게 우리 엄마는 그의 어머니보다 훨씬 더 늙었으며 그 나이에는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설명했다. 지금도 나는 불과 여섯 살 반밖에 안 된 아이에게 내가 왜 그런 어려운 설명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내가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내가 해 주는 설명을 더할 수 없이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졸다가 깨어 눈을 뜬 어머니는 웬 멜빵 달린 바지 차림의 어린 아이 하나가 옆에 와 서 있는 것을 보자, 전에 내가 여러 번 그랬듯이 외투를 만들어 입히거나 몸에 맞게 옷을 고쳐 주도록 내가 그녀에게 데리고 온 그런 가난한 어린 학생들 중 하나라고 짐작한 것이 분명했다. 엄마가 다소 씁쓸한, 그리고 특히 슬픈 어조로 그런 도움을 줄 형편이 못 된다고 내게 말했으니 말이다.

"아니, 너도 잘 알면서 그러냐. 이젠 더 이상 바느질을 못 해. 간단히 손으로 수선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런 게 아냐. 깜짝 놀랄 일이야. 들어 봐!"

나는 닐에게 신호를 했다. 그는 바람 속에서 저항하듯 엄마 앞에 딱 버티고 서더니 즐거운 벚나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일렁거리고 두 눈에 불꽃이 튀는가 하면 입술에 미소가 번지면서 그의 작은 손이 쳐들리면서 병자의 방 저 멀리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길을? 들판을? 혹은 찾아가 보고만 싶은 어떤 열려진 고장?

노래를 끝마친 그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아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제안을 했다.

"노래를 하나 더 부를까요?"

엄마는 마치 먼 곳에서처럼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계속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닐은 노래를 하나 더 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엄마가 고개를 들어 미소 짓는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도움으로 엄마 역시 꿈의 날개를 달고 높이 솟아 올라서 삶의 저 위로 날았다.

그 날 저녁, 엄마는 내게 부엌에 있는 등받이가 높고 단단한 의자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 의자를 짚고 일어서도록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의자가 미끄러지면 엄마가 그 바람에 딸려 넘어질지도 모른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엄마는 의자가 안정감을 유지하도록 아주 무거운 큰 사전을 한 권 그 위에 갖다 얹으라고 했다. 엄마는 이렇게 자신이 고안해 낸 이상한 '보행기'를 가지고 이 때부터 걷기 견습을 다시 시작했다. 여러 주일이 지나갔다. 별다른 변화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용기를 잃었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이제 머지않아 성공할 것 같아지자 엄마는 나를 놀라게 하려고 나 몰래 연습을 계속 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날 저녁 나는 더 할 수 없을 만큼 의기소침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엄마 방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 걸어! 걷는다고!"

나는 달려갔다. 엄마는 의자를 밀면서 용수철을 잘 감아 준 인형처럼 뒤뚱뒤뚱 작은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의기양양한 듯 큰 소리를 질러댔다.

"보라고! 걷잖아!"

물론 나는 닐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꺼져 가는 믿음에다가 알맞은 순간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어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간 이 경험에 힘입어 나는 또 다른 경험을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보다 일 년 전 어느 날 저녁, 나는 동료 여교사 한 사람과 더불어 우리 시 양로원의 노인들 앞에서 조그만 연극을 한 편 상연하는 그녀의 학생들을 따라가 본 적이 있었다.

인간이 스스로를 위하여 만들어 놓았거나 혹은 그 속에 들어가 견디어야 하는 모든 종류의 감옥들 중에서 지금까지 그 어느 것도 노년을 가두어 놓는 이 감옥만큼 참혹한 것은 없어 보였다. 나는 그 때 마음을 그토록 우울하게 만들었던 그런 장소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 년 동안에 나는 아마도 연민의 감정에 있어서 어느 정도 발전을 거둔 모양이었다. 마침내 닐을 그 곳으로 데리고 가 보겠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보기에 오직 그 아이만이 그 양로원의 담장 안에 갇혀 살고 있는 노인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나는 교장 선생님에게 그 생각을 말했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해 보더니 아이디어는 좋다고… 아주 좋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우선 아이 어머니의 허락을 받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정성을 다해서 닐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거기서 나는 그녀가 우크라이나에서 품고 와서 그녀의 아들에게 전수한 노래들이 아마도 그녀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겠지만 이 곳 사람들에게도 아주 유익한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할진대 어머니께서는 다소 늦게 끝날지도 모르는 어떤 저녁 모임에 갈 수 있도록 닐을 내게 좀 빌려 주실 수 있는지?

나는 편지를 닐에게 읽어 주고 그 내용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라고 일렀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그 편지를 읽어 드리고 정확하게 번역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 아이는 아주 주의 깊에 귀를 기울이고 있더니 내가 다 읽고 나자 자신이 내용을 머릿속에 잘 새겨 두었는지 내가 확인할 수 있도록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되풀이해 보겠다고 나섰다. 나는 그의 기억력을 믿으니 그럴 필요는 없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 다음 날, 닐은 채소 가게에서 쓰는 봉지를 찢어 낸 종이쪽에다가 쓴 어머니의 답장을 내게 가지고 왔다. 편지는 전보 문체로 작성된 것이었다.

"닐을 노인들에게 빌려 드립니다."

그리고 수를 놓은 것 같은 편지 끝에는 서명이 되어 있었다.

파라스코비아 갈라이다.

"너희 어머니는 이름이 아주 아름답구나!" 하고 나는 닐에게 말하고 나서 그 이름을 제대로 발음해 보려고 애를 썼다. 내가 형편없이 발음하는 소리를 듣더니 그는 내 면전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양로원에는 조그만 전용 공연장이 있었다. 계단 두어 개를 딛고 올라 서도록 만들어 놓은 연단에 한 세트의 조명 기구가 부드러운 빛을 던지며 나름대로 객석과 연단을 갈라 놓고 있었다. 금빛 조명을 받자 밀짚 같은 색깔의 금발과 그의 어머니가 칼라에 수를 놓아 입혀 준 우크라이나식 저고리가 서로 어울려서 닐의 모습은 여간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멜빵 달린 바지 차림의 우리 꼬맹이가 오히려 좀 그리웠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의 얼굴에는 벌써 노래하는 즐거움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혹시 필요할지 몰라 가사를 일러 주려고 내가 자리잡고 서 있는 곳에서는 객석과 무대 양쪽이 다 보였는데, 그 때 나는 결정적인 인생의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는 곳은 바로 여기라는 생각을 했다.

맨 앞 줄에는, 노인 한 사람이 이미 오래 전에 모든 과일들을 다 떨구었는데도 사람들이 흔들고 또 흔들어 대는 한 그루 사과나무처럼 경련을 못 이겨 전신을 흔들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또 어디선가는 속이 빈 고목의 그루터기 속에 갇힌 바람인 양 거친 휘파람으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노인 하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를 따라 뛰고 있었다. 홀 한 가운데 어딘가에는 반신불수의 남자가 생기 없는 얼굴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 가엾은 여자는 부풀어 오른 살의 거대한 무더기에 불과하다는 인상이었다. 아마도 그 곳에는 멀쩡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상할 수 없은 만큼 잔혹한 어떤 방법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구겨지고 주름지고 쪼그라들고 무너졌을 뿐인 것이 여기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노년은 대체 어디에서 바라볼 때 가장 끔찍하게 보이는 것일까? 이 양로원의 사람들처럼 되었을 때? 아니면 이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다감한 젊음으로부터 먼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 때 저물어 가는 저녁 속에서 마치 인생의 찬란한 아침으로부터 오는 듯한 닐의 빛을 발하는 밝은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꽃이 만발한 벚나무, 초원에서 사랑에 빠져 춤추는 처녀들의 윤무, 젊은 가슴들의 기다림을 노래했다. 자연스러워서 더욱 매력적인 몸짓으로 그는 자주 손을 들어 따라가야 할 어떤 길을… 혹은 어떤 지평선을 가리켰다. 그의 반짝이는 눈빛으로 보아 그 길 혹은 지평선은 빛 밝은 곳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어느 한 순간 그의 두 입술이 벌어지면서 번져 나오는 미소는 너무나도 전염성이 강한 것이어서 무대와 객석을 갈라 놓은 난간을 넘어 노인들의 얼굴에 부드럽고 신선한 빛 그대로 와서 찍히는 것이었다. 그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간 페트리우슈카의 모험을 노래했다. 그는 또 내가 그에게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노래도 한 곡 불렀다. 감미롭고도 우수에 찬 노래였는데 드니에프르 강이 흐르고 흘러 웃음과 한숨을, 회한과 희망을 다 같이 바다로 싣고 가서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의 물결로 합쳐진다는 내용이었다.

노인들은 이제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 삶의 어두운 저녁에도 그 아침 빛이 아직 그들에게까지 비쳐 드는 것이었다. 몸부림치던 늙은 남자는 잠시 동안 몸을 떨기를 멈추고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반신불수의 눈은 헤매고 찾고 소리쳐 도움을 청하기를 잠시 쉬고 닐을 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자기 숨소리를 쫓아 달리던 사람은 그 무슨 휴식의 몸짓인 양 가슴 위에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헐떡거리던 숨을 고르는 눈치였다. 이제 그들은 모두가 다 행복한 표정이었고 모두가 닐의 입술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리하여 노인들은 잃어버린 것의 흔적을 자신들의 내면에서 그토록 생생하게 되찾을 수 있게 되었기에, 어떤 이는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이, 또 어떤 이들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이, 어린 애들처럼 동요하는 가운데 객석의 그 비참한 광경은 일종의 패러디로 마감되었다.

나는 그 때, 이건 결국 너무 잔인한 일이다 싶은 느낌이 들어서 다시는 닐을 데리고 와서 이들에게 가당치도 않은 희망을 되살려 주는 노래를 부르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런 광고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여 인생의 병을 고쳐 주는 나의 꼬마 치료사의 명성이 그리도 널리 퍼진 것인지 나로서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머지 않아서 사람들이 도처에서 그를 좀 데려다 달라고 내게 요청을 해 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출입문의 위쪽 유리 너머에서 교장 선생님이 할 말이 있다면서 내게 신호를 보냈다.

"이번에는 어떤 정신 병원에서 우리의 우크라이나 종달새를 요청하네요. 이건 심각한 문제이니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요."

그렇다, 그건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더, 마치 내 의지의 밖에서인 듯, 나의 결심은 이미 정해졌다. 만약 파라스코비아 갈라이다가 허락만 해 준다면 나는 닐과 함께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듯이 '미친 사람들'에게로 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전혀 어렵지 않게 허락해 주었다. 아마도 닐이 그랬듯이, 마찬가지로 나를 믿어 준 그 여자는 과연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딘지 제대로 알고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신 병원에도 역시 연단이 설치된 공연장이 하나 있었다. 다만 이쪽과 저쪽을 어느 정도 분리시키는 조명 시설이나 각등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모든 것이 한결같고 흐릿한 빛에 잠겨 있었다. 양로원들에 있는 노인들의 세계가 비극적으로 마감되는 어떤 연극의 마지막 막을 연상시킨다면 여기서는 일종의 죽음 저 너머 그림자들이 소리 없는 마임으로 연기하는 어떤 에필로그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닐이 무대의 좁은 플랫폼으로 입장했다. 홀 안에는 뜻밖이라는 듯한 흐름이 감지되었다. 몇몇 환자들은 여기서 한 어린 아이가 만들어 내는 황홀한 광경을 보자 벌써부터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은 극도로 흥분한 나머지 자기의 눈으로 보고있긴 하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좀 확인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듯 즐겁고도 당황한 표정이 되어 닐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닐은 두 발을 벌리고 머리칼 한 가닥을 이마에 늘어뜨린 채 버티고 서서 이번에는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이제 막 가르쳐 준 노래 '칼린카'로 시작하여 매혹적인 격정으로 그 광란하는 리듬을 살려 내고 싶었던 것이다. 첫 음정에서부터 어딘가 멀리 떨어진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 소리를 듣기 위하여 분위기를 가다듬는 숲의 그것과도 같은 침묵이 깔렸다. 닐은 몸을 일렁거렸다. 그는 억누를 수 없는 활기에 사로잡혀 때로는 부드러운 몸짓을 해 보였고 때로는 열광적으로 손뼉을 쳤다. 환자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들은 황홀경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경탄을 못 이긴 듯한 침묵.

'칼린카'가 끝나자 닐은 내가 그에게 가르쳐 준 대로 그 다음 노래의 의미를 몇 마디 말로 설명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마치 학교의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처럼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해 내고 있었다. 이윽고 노래하는 것에는 절대로 싫증이 날 수가 없다는 듯 그는 또 다시 음악 속으로 뛰어 들었다. 모두가 그늘 속에 웅크리고 있던 환자들은 이제 곧 자유의 몸이 될 것을 예감한 한 마리의 거대하고 슬픈 짐승처럼 나직하게 헐떡거리는 소리를 냈다.

닐은 이 노래에서 저 노래로, 슬픈 노래에서 쾌활한 노래로 옮겨 갔다. 그는 늙은이, 병자, 육체와 영혼의 슬픔과 고통이야 아무려면 어떻냐는 듯 미친 사람들을 보지 않은 채 노래를 불렀다. 그는 어머니가 잘 지키라고 일러 준 저 잃어버린 고향, 그리운 고향을, 초원, 나무들, 저 멀리 들판을 가로질러 홀로 달려오고 있는 기사를 노래했다. 그는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그 손짓으로 이 세상 끝의 그 무슨 행복한 길 같은 것을 가리키는 한편 발 뒤꿈치로 마룻바닥을 치면서 노래를 끝냈다.

그러자 곧 환자들이 다 같이 그에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그가 작은 단에서 내려오자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앞으로 나와서 그의 몸에 손을 대 보려고 첫 줄에 있던 사람들을 밀쳤다. 어떤 여자 환자는 그의 팔을 붙잡고 잠시 동안 자기 가슴 쪽으로 끌어 당겼다. 또 다른 여자는 그를 그녀에게서 빼 내서 키스를 했다. 그들 모두가 다 이 기막힌 어린 아이를 차지하려고, 사로잡으려고, 떠나지 못하게 한사코 막으려고 했다.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그토록 큰 슬픔을 달래 주었던 그가 자기 스스로 해방시켜 놓은 이 무시무시한 행복의 광경에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에게 구원을 청했다. 흐느끼면서 그를 껴안고 있는 어떤 여자 환자의 품에서 경비원이 그를 부드럽게 빼 냈다.

"얘야, 작은 종달새야, 가지 마. 우리와 같이 있자."

홀의 한가운데서 어떤 또 다른 여자가 울면서 그를 불렀다.

"옛날에 우리 귀여운 어린 애를 사람들이 훔쳐 갔어. 이제 돌려 줘. 내 생명을 돌려 줘."

나는 온통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 아이를 품에 받아 안았다.

"자, 다 끝났다! 네가 저 사람들을 너무 행복하게 만들어 놓은 거야. 그 뿐이야. 너무 행복하게 만들어 놓은 거라고."

 

우리는 택시에서 내려서 닐의 집까지 계속 걸어갔다. 그는 병원에서의 그 힘들었던 장면을 다 잊어버린 듯 이내 나를 인도하는 것에만 골똘하게 신경을 썼다. 우리가 인도에서 벗어나자 곧 나는 어디다가 발을 내려놓아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때는 오월 초였다. 여러 날 동안 세찬 비가 오고 난 뒤라 닐이 나를 인도하며 가로질러 가고 있는 들판은 진창 바로 그것이었고, 군데군데가 가시 많고 나지막한 관목 무더기들이어서 내 옷이 자꾸 걸렸다. 나는 곧 이 이상한 풍경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곳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길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기껏 일종의 어정쩡한 오솔길 정도였는데 진흙 무더기가 쌓인 진창이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좀 더 단단한 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오두막에서 오두막으로 꼬불꼬불 돌아갔다. 흐릿하게 불이 켜진 창문들이 말하자면 안내에 도움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닐은 그런 불빛이 전혀 필요 없다는 듯 그 어둑어둑한 속을 고양이처럼 자신있게 헤치고 나가면서도 발을 적시지 않았다. 대충 마른 흙덩어리에서 다른 흙덩어리로 힘들이지도 않고 팔짝팔짝 건너 뛰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우리는 스펀지처럼 물을 토해내고 있는 넓고 흐물흐물한 진창 가에 이르렀다. 그 곳을 건너갈 수 있도록 여기저기에 던져 놓은 나무 판때기들이 지그재그의, 더러는 끊어진 인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판때기들 사이의 간격이 항상 한 번에 건너 뛸 수 있는 간격보다 넓었다. 닐은 한 번에 그걸 건너 뛰고 난 다음 몸을 돌려 내게 손을 내밀면서 힘을 내어 뛰라고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갈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도 좋은 모양이었다. 유쾌한 아이의 머릿속에는 그런 불우한 사람들의 동네에 사는 그를 내가 동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이 들어앉을 자리는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사실 별들이 총총하고 높은 하늘 아래, 도시와 등을 지고 광대하고 자유로운 초원을 향해 돌아앉은 이 오막살이들의 달동네에는 어떤 기이한 매력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악취가 풍기면서 봄 기운을 망쳐 놓는 것이었다. 나는 그 냄새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 닐에게 물어 보았다. 아마도 그 냄새에 너무나도 습관이 된 탓인지 그는 내가 무슨 냄새를 두고 말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그는 우리들 등 뒤에서 지평선을 가로막고 있는 길고 어두운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축장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다. "도축장에서 나는 냄새일 거예요."

이제 우리는 진흙탕의 늪을 다 건너 왔다. 정말이지 오늘 저녁에, 나의 예상치 않은 놀라움은 끝이 없을 모양이었다. 불쾌한 냄새는 사라지고 이번에는 물에 젖은 땅의 아주 단순하고 기분 좋은 냄새가 풍겨 왔다. 그 다음에는 어떤 꽃 향기가 흘러 왔다. 우리는 닐의 집에 거의 다 왔다. 그것은 집 밖의 문 가까운 곳에 놓인 화분의 강한 히아신스 꽃 향기였다. 그 향기는 도축장의 마지막 악취와 거의 동등한 힘으로 겨루고 있었다. 몇 발자국 더 가까이 가자 그 향기가 압도했다. 마찬가지로 가까운 연못에서 신명나게 울어 대는 개구리 소리가 들려 왔다.

 

파라스코비아 갈라이다는 우리가 오고 있는 것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 여자는 아마도 그 역시 낡은 판자 조각과 폐품으로 만들었을 오막살이에서 달려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구름 사이로 흘러 나오는 초승달 빛을 받아 마치 무슨 석회유에 적셨다가 막 꺼내 놓은 듯 기이한 흰 빛이었고 깨끗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는 안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마당은 방책으로 막아 놓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방책이라는 것은 말뚝에 고정된 돌쩌귀를 따라 돌게 만든 철제 침대 틀 같았다. 그 방책이 삐걱대며 도는 소리가 났다.

파라스코비아 갈라이다가 허둥지둥 방책을 열고 나와 우리를 향기 그윽한 마당 안으로 맞아 들였다. 그 날 밤의 기이한 조명을 받아 그 곳에서는 모든 것이, 그 역시 석회유를 하얗게 발라 놓은 평범한 방책까지도, 구석구석 다 깨끗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라스코비아는 내 손을 잡더니 뒷걸음질치며 나를 집 쪽으로 이끌고 갔다. 그 앞에는 투박한 나무 벤치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나를 거기, 닐과 그녀 자신 사이에 앉게 했다. 이내 그 집 고양이가 어둠 속에서 나오더니 벤치의 등받이 위로 뛰어 올라와 우리들 어깨 사이에 머리를 처박은 채 꼭 끼여 앉아서 가르릉거리며 우리 무리에 한 몫 끼었다.

나는 닐의 도움을 받아 가며 파라스코비아 갈라이다에게 그녀의 어린 아들의 노래가 이미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기쁨에 대하여 뭔가를 표현해 보려고 애를 썼고, 그녀는 닐을 통해서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엇인가에 대하여 내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려고 고심했다. 그러나 곧 우리는 말을 통해서 감정을 실토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때 나는 파라스코비아 갈라이다가 닐에게 보낸 신호를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을 꼭 다문 채 그녀는 그 아이 자신이 학교에서 그렇게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에게 음을 리드해 주었다. 목구멍으로 내는 미묘한 음의 진동이 한동안 실처럼 흘러 나왔다. 이윽고 그들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쪽이 처음에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 좀 더 자신 있는 다른 쪽에 이끌려 따라갔다. 그러자 두 목소리가 높아지며 기이하고 아름다운 노래 속에 담겨 날아 오르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그 노래는 실제로 겪는 삶과 꿈 속의 삶의 노래였다.

광막한 하늘 아래서 그 노래는 그 어떤 손길처럼 가슴을 움켜잡아 이리 돌리고 또 저리 돌리다가 마침내 잠시 동안 자유로운 대기 속으로 조심스럽게 놓아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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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 속의 송어

 

 

1

 

내 여교사 생활 전체에 있어서 그 아이에 대해서만큼 겁을 집어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대평원 속에 격리된 그 마을의 교사 자리에 갓 부임하여 속수무책인 상태였는지라 그 아이는 아직 만나 보기도 전이었다.

나는 도착해서 처음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학생들과의 사이가 어느 모로나 다 좋게 시작되는 느낌이어서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런데 큰 상점의 우편 취급 코너에 들러서 우편물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유쾌한 기분으로 그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할 양이면, 그 때마다 어김없이 누군가가 나서서 신참내기 특유의 내 신선한 열정을 꺾어 놓곤 하는 것이었다.

"아, 그렇게도 잘 돼 간다니! 좋군요! 좋고 말고요! 실컷 즐기시죠. 메데릭이 나타나면 사정이 전혀 달라질 테니까요."

그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 아이는 '전임 여교사'가 벌을 주려고 자로 때리려 하자 주머니 칼을 꺼내 위협하며 대든 적이 있다는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들리는 말로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외 없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일대 전쟁이, 끝장을 보지 않으면 안 될 일대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의 관계는 일대 전쟁이 될 판이었다. 그러나 그건 사람들이 예언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전쟁, 말하자면 우리 두 사람 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맨손으로 대결해야 하는 신비스러운 전쟁이었다.

 

9월의 첫 이주일이 지나갔다. 대다수 농가의 힘든 농삿일들이 마무리되어 갔다. 추수한 밀을 실어다가 마을의 거대한 사일로 속에 부려서 쌓았다. 그 옆으로 지날 때면 매캐한 냄새가 풍겨 나왔지만, 그 속에는 달콤하게 익어 가던 여름의 맛도 실려 있었다. 추수를 돕던 덩치 큰 아이들도 하나하나 교실로 돌아왔다. 모두가 돌아왔는데 메데릭만은 예외였다! 나는 그가 등교하기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날이 갈 수록 그가 마음 속에 점점 더 미운 모습으로 상상되어 더 겁이 났다. 그런데 일에 정신이 팔려서 그를 어느 정도 잊고 있던 어느 날 아침, 그가 불쑥 나타났다. 과연 그 아이답게 나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내가 칠판 쪽으로 돌아 서 있을 때였다. 나는 무슨 문제를 써 주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내 등 뒤가 말할 수 없이 고요해졌다! 나는 당황하여 즉시 뒤를 돌아 보았다. 교실의 아이들 모두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작은 아이건 큰 아이건 모두가 평원 저 멀리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어떤 하얀 점 하나에 눈을 박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들처럼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 하얀 점이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말로 변했다. 이내 나는 말 안장 위에 거의 엎드리듯 자세를 낮추고 이미 광란 상태인 말을 더 빨리 달리도록 정신없이 몰아치는 젊은 기사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그의 머리 뒤쪽에 걸린 큼직한 카우보이 모자는 자세히 볼 수록 일부러 거칠게 다루어 찌부러진 몰골이었다. 나는 곧 그게 메데릭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이들 못지 않게 그 요란한 도착 광경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벌써 학교 마당의 입구에 와 있었다. 그는 제대로 된 길로 들어오지 않고 말에 박차를 가하여 철조망을 펄쩍 건너 뛰고 내친 걸음으로 국기가 펄럭이고 있는 높다란 깃대 앞까지 내달았다. 말이 미친 듯이 허리를 내둘러 대는 바람에 깃대가 흔들리면서 국기가 광풍을 만난 듯 떨렸다.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와서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디 기다려 보라는 듯 그 자신은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발을 질질 끌고 몸을 흔들흔들하면서 다가왔다.

이윽고 그 아이는 이제 그 챙 넓은 모자를 이마 쪽으로 당겨 쓰고 교실 문턱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서 두 다리를 벌리고 술이 늘어진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못이 박힌 혁대를 허리에 두르고 멕시코식 문양이 장식된 굽 높은 장화를 신은 차림으로 떡 버티고 섰다. 거기서 그는 우리들을 휩쓸 듯이 쫙 훑어 보았다. 그 시선에는 갇힌 수인들과도 같은 우리에 대한 멸시와 동정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그 같은 허세의 밑바닥에는 너무나 오래 겪어 온 고독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부드러운 보폭으로 마치 한길을 걸어가듯이 휘파람을 불면서 교실 가운데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 교실에는 당시 대부분의 시골 학교가 다 그랬듯이 긴 학생용 책상에 고정시켜 붙인 2인용 장의자들이 늘어놓여 있었다. 책상의 상판 구석에는 잉크병이 달려 있고 연필을 놓을 수 있도록 홈이 파져 있으며 책상 속은 두 개의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메데릭은 교실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가장 덩치가 작은 아이들 중 하나가 한 쪽만 차지하고 있는 책상이 있었다. 메데릭은 그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엉덩이로 툭 쳐서 그 아이를 왼쪽 통로로 날려 보낸 다음 자기 혼자서 두 자리를 다 차지한 채 버티고 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가 내게 던지는 시선 속에는 어떤 방자함보다는 심심한데 어디 뭐 재미있는 일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나는 모든 소지품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널린 가운데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 있는 그 덩치 작은 아이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이리 와. 배운 것 없는 이 키다리 옆에 있느니보다는 차라리 딴 데 가 있는 편이 좋겠다."

내친 김에 이런 어조로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나는 꾹 눌러 참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업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오직 메데릭에게만 가 있었다. 나는 한 쪽 눈 귀퉁이로 그를 주시하면서 조그만 허점이라도 없는지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안달이 난 듯, 어쩌면 내가 화를 내지 않은 것을 경계하는 듯 그의 시선이 몇 번이나 나를 찾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잠시 후 약간 놀라움이 느껴지는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면서 내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싶어지는 순간, 그리하여 그의 관심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더욱 안간힘을 쓰는 순간, 그는 내 면전에 대고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보라는 듯이 하품을 하면서 길고 가는 다리를 통로 쪽으로 쭉 뻗었다. 이렇게 하여 그리로 지나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딴지를 걸어 코방아를 찧게 만들 준비를 갖춘 것이다. 나 자신이 그 통로로 걸어갈 때는 마지못해 약간 뒤로 물러나 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가만 놓아 두었다. 어쩌겠는가! 내 나이 겨우 열여덟 살이었고 그는 이제 곧 열네 살이 될 참이었다.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키가 컸고 인생살이의 여러 면에서는 어쩌면 그 이상 성숙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도, 메데릭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처음부터 내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바로 나의 서투름이었다. 이 나이의 아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도 없었고 감히 어떻게 할 용기도 없는지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러나 태연한 척하기 위하여 거리를 두고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결국은 그 때문에 그가 어지간히도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심심해진 데다가 어떻게 하면 내 약을 올릴 수 있는지 궁리하던 끝에, 그는 공책을 찢어 그 종이를 뭉쳐 가지고 여러 개의 공을 만든 다음, 거기에 풀칠을 하여 자를 발사대로 삼아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퉁겨서 천장에 가서 딱 달라붙게 하는 놀이를 시작했다. 이런 놀이를 벌여도 내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자 오래도록 재미를 못 느끼는 눈치이긴 했지만, 일단 시작한 놀이라 점점 따분해 하면서도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오후 네 시에 교실의 아이들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내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메데릭 에마르!"

그는 어색하게 뒤돌아 보았다. 벌써부터 눈에 불을 켜고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냥 얘기나 좀 할까 했는데. 하지만 겁난다면 할 수 없고!"

그는 눈짓으로 반 아이들 전체를 한통속으로 끌어들여, 자기가 겁을 먹을 수 있다고 여길 정도로 고지식한 나를 한바탕 비웃도록 유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벌써 그는 지배력을 상실한 것일까? 별로 많은 시선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전열이 무너지면서 그는 해변에 쓸려 내려온 나무 토막처럼 교실 한가운데 혼자 남았다. 그는 아직도 허세를 부려 보려고 애쓰면서 제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침묵 속에 시간을 끌자 그는 곧 제 손톱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은 채 나는 태연한 척 했다. 서류를 정돈하고 공책을 펼쳤다. 나는 일에 열중한 체 했다. 실제로는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나 못지 않게 힘들어 하는 눈치였다. 우리가 그 텅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여교사 대 학생으로서 말을 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약간 겁 먹은 채 스커트 자락을 여미면서 그의 긴 의자 한 쪽 끝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다리를 약간 끌어들여 내게 자리를 내 주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서 한동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 중 몇 올이 내 얼굴을 약간 가렸다. 나는 용기를 내어 메데릭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별 수 없는 한 어린 애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았다. 목은 가늘었고 몸은 쭉 뻗었지만 호리호리했다. 특히 내게서 한없이 멀어져 있는 것만 같은 그의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 눈은 내가 전에도 후에도 결코 본 적이 없는, 푸른색과 보라색 사이의 색깔로 가끔 여름날의 황혼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드문 그런 것이었다.

매우 두터운 길고 검은 눈썹 속에서 지금 그 두 눈은 어색하고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하숙집 여주인의 말을 떠올랐다.

'메데릭의 천사 같은 눈에 속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그런 눈빛을 하는 거예요.'

어쨌건 아무 말 없이 옆에 와 앉아 있는 내가 그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그나 나나 다 같이 어떻게 하여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몇 분이 더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따. 손가락을 모아 쥔 채 긴 의자 한 끝에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다는 것이 의식하지 못한 채로나마 그에게는 나의 위력으로 작용했다. 마침내 나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가령 장학관이나, 별로 웃는 편이 아니라는 신부님이나, 아니면 그저 학사 위원회 위원 같은 사람이 찾아와서 '천장에 붙은 저 이상한 장식들은 뭘까?…' 하고 의문을 품기라도 한다면 난들 뭐라고 대답하겠어. '말씀 마십시오. 우리 반에서 제일 키 큰 학생 짓이죠. 제 키보다 반 피트는 더 큰 학생이라 제 말은 듣지도 않는걸요' 라고 할 수밖에."

나는 잠시 쉬었다가 말했다.

"…사실 마음만 내킨다면 저걸 다 떼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키가 크죠…."

자기 앞쪽 먼 곳에 비끄러 매고 있던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였지만 메데릭은 그래도 알아 들은 시늉을 했다. 내 말을 부정할 수는 없는지 어깨가 꿈틀거리고 얼굴 위에 난처한 표정이 번지는 것으로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갑자기 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교실 뒤쪽에 있는 사닥다리를 찾아 오더니 거기 올라가서 빗자루로 자기가 그 날 낮 동안에 해 놓은 작업을 제거하려고 애를 썼다. 밑에서 나는 그를 응원했다.

"여기 이 쪽 구석에도! 이 쪽 구석에도!"

 

애를 쓰느라고 벌게진 얼굴로 내려온 그는 내가 보기에 수모를 당했다기보다 어떻게 해서 내가 그에게 가정부나 할 일을 하게 만들 수 있었는지 싶어 몹시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서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듯 갑자기 인삿말 한 마디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말 위에 올라 타더니 커다란 모자를 목 뒤로 휙 넘기고 큰 소리로 고함치며 전속력으로 말을 내몰았다. 그리하여, 아침에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매 순간 점점 작아지면서 이내 광대한 평원 속에서 검고 흰 점으로 변하여 사라졌다. 나는 우리들 사이의 먼 거리가 푸른 빛으로 변하면서 그를 완전히 삼켜 버릴 때까지 그를 눈으로 따라갔다. 아마도 오직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내게만 주어진 듯한 그 광경이 이번에는 소년 시절이 끝나 가는 마지막 날들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깊을 수 없는, 어떤 고독의 고백 같아만 보였다.

 

 

2

 

그렇다고 해서 메데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그가 다른 아이들 앞에서 내 권위를 위협하는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더. 심지어 그는 교실에 들어서면 카우보이 모자를 선선히 벗었다. 한 쪽 속으로 그 모자를 벗어 쥐고 그는 내게 인사하는 시늉까지 했다. 너무나도 과장된 그 인사를 예절의 표시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서 그의 태도는 반 전체를 조롱거리로 삼을 때 이외엔 항상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유례 없는 노력을 바쳐 온갖 짓을 다 고안해 냈다. 가끔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동안 솔깃해져서 말을 잘 들을 것처럼 나를 쳐다보곤 했지만 금방 딴 데 정신이 팔렸다. 그는 먼 곳에 눈을 준 채 우리들 같은 것은 하나도 안중에 없다는 듯 몽상 속으로 떠나 버리는 것이었다. 저런 말 안 듣는 녀석쯤이야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이었지만 나는 애가 탔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우리 반은 잘만 되어 가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 괴상한 녀석을 물려받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세 번, 나는 그를 못 본 체 하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무지와 무료함 속에 팽개쳐 두리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이내 나 자신도 어쩔 수 없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밀어 주어야겠다는 열망에 다시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처럼 당시 나의 열정은 사랑만큼이나 절박한 것이었다. 사실 내가 일생 동안 느꼈던 그 뜨거운 욕구, 지금도 내가 각자에게서 최고의 것을 얻어 내려고 싸우는 그 욕구는 사랑이었다.

나는 끊임 없이 메데릭 곁으로 돌아와서 그 떠도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늘 딴 데 정신이 팔린 그 얼굴에서 잠시 동안이나마 관심을 나타내는 표정이 살아나는 때가 더러 있기도 했지만, 그는 곧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갔다. 가끔,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금방이라도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결국은 사로잡히고 말 순진한 짐승 같다는 인상을 받곤 했는데 그를 사로잡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 짐승에 대하여 가슴 아픈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메데릭은 그의 자유로운 꿈 속에서 무한히 먼 곳으로 헤매고 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참다 못해서 내가 좀 큰 소리로 그를 부르기라도 하면 그는 한참 만에야 공상에서 되짚어 나오는 것이었고 매번 어딘가 묶인 것을 풀려는 듯이 목을 흔들며 학교의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를 상상의 여행에서 불러 내 오는 것이 어쩐지 망설여지곤 했다. 그 여행이 한결같이 행복한 것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유난히 황혼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그 여행이 때로는 그를 고통스러운 추억들로 인도한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의 몽상은 가장 상처 받기 쉬운 나이의 아이가 스스로 구축하는 저 범접할 수 없는 피난처로 그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머지 않아 그런 여행 중일 때 그를 불러 내는 것이 내게는 가장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나 자신이 그런 시절의 상처를 이제 간신히 치유한 상태였고 겨우 청소년기의 몽상에서 벗어나 아직 성년의 삶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이른 아침 교실에 서서 내 어린 학생들이 세상의 새벽인 양 신선한 들판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학교라는 함정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로 달려가서 영원히 그들의 편이 되어야 옳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자, 메데릭, 정신 차려야지!"

이제 내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청하듯이 주의를 주게 되었으므로 그 역시 내가 말하면 한동안은 시키는 대로 정신을 차렸다. 때로는 나를 알아보고 미소를 짓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이내 또 몽상 속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그에게 같은 책상을 사용하는 짝을 정해 주지 않았다. 그가 누구와도 짝이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를 그의 짝으로 정해 주겠는가? 나이에 비해 진도가 늦었으므로 그보다 어린 아이를 배정해야 할 텐데 그러면 그게 모욕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는 더욱 외톨이가 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긴 의자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 두었다. 그리하여 그 자리는 메데릭에게 어떤 문제를 개인적으로 설명해 줄 필요가 있을 때 내가 자신도 모르게 그 옆에 가 앉는 익숙한 자리가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이 늘씬한 소년 옆에 가 서게 되면 내가 보잘것 없이 작아진 것만 같았고, 그 때문에 그의 눈에 장점과 권위를 잃게 된다고 상상한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반면에 내 책상에 앉아서 그를 내 곁으로 부르게 되면 호리호리하고 서투른 그가 교과 설명을 따라가기 위하여 몸을 구부릴 수밖에 없어 모양이 안 좋아지는 것이었다. 한사코 그의 머릿속에 어떤 교과 내용을 집어 넣어야겠다고 열을 올리면서 내가 그 긴 의자의 한끝에 가 앉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렇게 모양이 안 좋아지는 일을 피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윽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면서 나는 자주 그렇게 했다. 우리들 사이에 가능한 한 많은 공간을 남기도록 조심했지만, 어느 날 부주의로 우리 두 사람의 무릎이 서로 스치자 그가 놀란 짐승처럼 재빨리 다리를 비켰다. 그런 때 외에는 그는 내가 자기 옆에 가 앉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 들였다. 사실 나는 다른 몇몇 아이들 옆에도 가 앉곤 했었다. 그보다 작은 아이들이긴 했지만.

한사코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면 내가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다는 느낌이었고, 언젠가는 그 아이로 하여금 공부에 맛을 들이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경험이 더 많은 나는, 그가 적어도 나와 동등한 입장이 되고 많은 경우 내가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어쩌면 알아차리게 될지도 몰랐다.

어느 날, 문법 책을 앞에 펼쳐 놓고 분사 일치 법칙을 이해시키려고 애를 먹고 있다가 나는 그의 표정에서 또 다시 그가 내 말을 정신차려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시선은 주변의 들판을 헤매고 있었는데 한참 동안,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을 어찌나 역력히 드러내고 있는지, 갇혀 있는 죄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나는 아마 자유로운 지평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바로 저렇겠지 하고 상상했다.

갈기가 검은 흰색 종마인 가스파르는 깃대에 묶인 채 지금 그 늘씬한 머리를 쳐들고 학교 쪽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조만간 학교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장학관으로부터 대영제국 여왕폐하의 깃발을 욕되게 하는 짓을 용납했다고 필시 내게 질책이 떨어질 수 있으니 말을 딴 데 매라고 그에게 몇 번이나 말한 바 있었다. 메데릭은 내게 입을 삐쭉해 보이면서 그토록 고상한 동물에게 여왕 폐하의 상징을 결부시킨다는 것은 그 고귀하신 폐하에게 오히려 영광을 돌리는 표시가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은근히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 요구를 들어 줄 의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학교 주변에 다소 높은 장소라고는 그 작은 언덕 뿐이었으므로 가스파르가 몹시 심심해질 때면 하다 못해 거기서 교실 안을 넘겨다 볼 수라도 있는 것이었다. 그 종마는 이따금씩 수업 도중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울어 대곤 했었는데, 그 우는 소리가 너무나 부드럽고 애원하는 듯해서 수업의 흐름은 완전히 끊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메데릭은 낮 동안 가끔씩 가스파르가 창문 너머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 것마저 못 하게 하면 절대 반대하고 나설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제발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장학관의 방문이 늦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메데릭이 "만약에 내가 그 때까지도 여전히 학교에 오게 된다면 가스파르한테 근처에 있는 어떤 마구간에 아주 따뜻한 자리를 하나 얻어 줘야겠어요" 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 날─지금도 나는 그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분사가 일치하는 경우는 이러이러한 때이고, 반면에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이러이러한 경우다…" 하는 대목까지 설명을 하고 있으려니까 가스파르가 우리들이 공부하고 있는 교실 쪽으로 그 좁고 길쭉한 얼굴을 가진 머리를 돌려 대고 있었다. 잠시 후, 오후의 고요 속에서 원망에 찬 비명이 진동하며 터져 나왔다. 그것은 가스파르의 평상적인 울음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그 짐승이 우리들에게, 자기는 깃대에, 선생과 학생인 우리는 책상에, 비끄러 매여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가를 깨닫게 하려고 내지른 비명 같았다. 그 탄식의 비명은 우리들 전체의 마음에 와 닿았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고개를 들고서 부동 자세로 몽상에 잠겨, 침묵의 무리가 되어 창 밖으로 탈출해 버렸으니 말이다. 날은 숨이 막힐 정도로 청명한데 우리 눈에 보인 것은 아직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눈에 거칠 것 하나 없이 펼쳐진 풍경 속 저 멀리 짓푸른 색의 팽팽한 지평선에 바싹 닿은 채 가을 단풍 빛으로 불덩이가 된 숲이 나지막한 선을 그으며 타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인상이 어찌나 강했는지 거기 그 불덩이 위의 대기가 아지랑이처럼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 불은 꺼질 줄 모르고 무한히 타오르면서 투명한 대기, 미묘한 하늘의 채색, 그리고 특히 그 광채에도 불구하고 깊어만 가는 그 한나절의 정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불타는 숲을 유난히 눈에 띄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침묵, 첩첩이 쌓인 고요,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제 살을 게걸스럽게 파 먹으면서도 고스란히 남아 있기만 하는 듯했던 그 기막힌 순간의 명상으로부터 나는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곧 그 전문 몽상가에게 시비를 걸었다.

"메데릭,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야?"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지는 않은 채 그는 그래도 자신의 은밀한 일에 열중하는 사람 특유의 미소를 보일락 말락 지어 보일 뿐 자기를 귀찮게 하는 내게 거친 반응을 보일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보나마나 저기 불타는 작은 숲으로 가스파르하고 같이 신나게 달리고 있겠지 뭐" 하고 내가 말했다. 이번에는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동공이 몽상의 베일에 덮여 있었다. 거기에는 몽상의 자취가 다 걷히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영상들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가운데 아직 김이 서린 듯한 그 얇은 막은 이 쪽 세상과 저 쪽 세상을 가르는 여린 경계였다.

"아뇨" 하고 자기 의지와 상관 없다는 듯한 어조로 그가 말했는데 아마도 자신이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늘 만약에 학교 수업이 없었다면 저는 밥코크 산에 올라갔을 겁니다."

나 역시 이 마을에 부임하기 위하여 오는 길에 거쳐 온 그 작은 산들의 기억이 눈에 삼삼하여 늘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산을 보러 다시 가 봐야지 하고 거의 매일 같이 벼를 정도였던 것이다.

"기차에서 보는 것은 아무것도 아녜요" 하고 메데릭이 비웃듯이 말했다. "거긴 말을 타고 가야 해요… 아니면 걸어서 가든가…."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혼자서요."

"오, 너한테 그런 야성적인 장소가 좋아 보인다는 거야 상상하기 어렵지 않지만" 하고 나는 꽤 세차게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가스파르야 그런 데 가서 뭐가 좋겠어?"

"특별한 풀이 있으니까요" 하고 이번에는 그가 내 무식함을 눈감아 준다는 듯이 대답했다. "공기도 더 싱싱하구요. 하지만 무엇보다 주변을 멀리까지 볼 수 있잖아요."

"내가 알기로는 말은 시야가 짧다는데."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메데릭이 인정했다. "하지만 전망이 확 터진 높은 데가 있는 목장에다가 말을 한 번 풀어 놓아 보세요. 몇 시간만 있으면 그 녀석은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행복한 표정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네 말이 맞아" 하고 그의 정확한 지적에 놀란 내가 말했다. 그건 일종의 칭찬에 가까운 것이어서 그도 흐뭇해 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왜 그 뒤에 한 마디 더 붙여서 잘 되어 가는 일을 다 망쳐 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

"자연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만큼 교실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일등을 했을 텐데."

그는 그런 것 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지만 내게 언짢은 기분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갑자기 내게 거의 호의에 가까운 감정을 보였다.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 마음이 누그러진 틈을 이용해서 한 가지 허락 받을 것이 있었던 것이다.

"쌤, 나가서 가스파르한테 물을 좀 먹이고 와도 될까요, 잠깐이면 되는데요."

조금 전에 끝난 휴식 시간에 그는 이미 학교 소유의 부지 끝에 있는 물 먹이는 곳으로 말을 데리고 갔다 왔다. 그러니까 그가 가스파르에게 먹이려는 것은 물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봐도 애정을 보이는 대상에게만 복종하는 것을 보면 그 또한 그의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주인을 만난다면 그 역시 군말 없이 복종할 것이다.

"좋아" 하고 나는 마지못한 척 하며 대답했다. "가스파르한테 달려가서 조금만 참으라고 해. 오늘 하루 수업도 끝나 가니까. 하지만 빨리 해. 네 변덕과 온갖 기발한 행동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날 흉 보겠어."

"아이구, 마을 사람들 쯤이야!" 하고 그는 유쾌하고 한심하다는 듯이 내뱉고는 휙 밖으로 나가서 가스파르에게 뭐라고 격려하는 말을 수군대는 눈치였다. 그가 매여 있던 말을 풀어서 끄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곁에 가서 귀에다 대고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러자 말은 이마를 숙이고 알아 들었다는 듯 목걸이 줄을 몇 번 빠르게 흔들었다.

"좋아, 참고 기다리도록 해 보지. 하지만 너도 빨리 수업 끝내도록 해."

그가 가스파르와 의기투합하게 되어서, 그리고 아마도 그의 옷에서 톡 쏘는 듯이 풍기는 그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표정으로 교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좀 짜증이 나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노력을 했는데도 그는 항상 학교보다 밖에 나가 있을 때가 더 즐거운 눈치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때 아니게 그를 나무라는 소리를 내뱉었다.

"정말이지, 메데릭 에마르, 그렇게까지 학교가 싫은데 뭐 하러 오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의 눈의 보라색이 까맣게 변했다. 내가 그렇게 오래 공들여 얻어 낸 그 얼마 안 되는 신뢰마저 잃어버리는구나 싶었다. 흥분한 나머지 닥치는 대로 다 때려 부술 듯한, 내가 마을에 처음 왔을 때 누구나 입에 담던 모습의, 그런 광포한 소년의 모습이 나타나려는 것을 보았다. 사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니 나 정도는 크게 화를 낼 상대가 못 된다고 판단했다는 듯 그는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않았으면 정말이지 이 망할 놈의 학교에 다시는 오지 않았을 거예요. 법은 아버지 편이죠. 벌써 두 번이나 경찰이 꽁무니에 붙었었는걸요. 지난 봄에, 제가 어떤 농가에서 일자리를 찾았을 때 그랬고 또 한 번은 배낭을 둘러메고 밥코크 산 쪽으로 돌아다녔을 때 그랬어요."

"아, 메데릭, 난 몰랐어" 하고 내가 아주 난감한 어조로 말했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 기껏해야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있는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개 놓은 것이 고작이었다. 내 손은 그의 손을 겨우 반쯤 덮을까 말까 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우리 두 사람의 손을 내려다 보다가 그걸 알아 차리고, 마음 속이 편치 않은 가운데서도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은근스럽고 무뚝뚝한 어조로, "아이고, 쌤 손이 내 손보다 더 작네" 하고는 곧 제 손을 책상 밑으로 숨겼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어떤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같아 나는 그걸 지워 보려는 생각에서 말했다.

"올해에도 또 산으로 달아나려고 해 본 적이 있었니?"

"겨우 이틀 동안이었죠. 아버지가 망을 보고 있거든요. 나는 거의 대번에 발각돼 끌려 왔어요. 도둑놈처럼…."

그는 오랫동안 억눌렸던 원망 때문에 말없이 전율했다. 그리고는 도전적으로 머리를 쳐들고는 내뱉었다.

"이제 곧 열네 살이 돼요. 그렇게 되면 아버지도 나를 강제로 학교에 보낼 수는 없게 되죠. 나는 자유예요."

나팔 소리처럼 터져 나온 그 말을 들으니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간절하게 자유를 원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자유가 되면 뭘… 뭘 할 건데?"

"나는… 나는…."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가스파르조차도 자유롭지 않아. 봐라, 가스파르는 줄에 매여 살지 않니."

"그거야 나를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죠. 하지만 내가 자유롭게 되면 가스파르에게도 자유를 주겠어요."

"저 불쌍한 짐승이 자유를 뭣에 쓰겠니. 기껏해야 다시 너한테로 달려 오겠지. 너를 못 찾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마 슬퍼서 죽을걸."

메데릭은 눈을 내리깔았다. 놀라움과 슬픔이 깃든 눈이었다.

"하긴 쌤 말이 맞아요. 그렇다면 자유는…."

그리고 그는 어쩌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결국 열세 살 먹은 아이가 바라는 바를 만족시켜 주지는 못하리라는 예감에 떨었다.

"그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게 뭔데요?"

"아, 난들 알겠니! 어떤 사람들에겐 일이나 의무 같은 게 그렇겠지. 또 어떤 사람들에겐 사랑이 그렇겠고. 어쨌든 사람의 마음을 매는 것이 있는 거야."

"아, 고맙지만, 나는 아녜요. 나한테는 언제나 자유가 제일 중요해요."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하지만 바로 그 날부터 그는 마음이 흔들렸는지 내 말을 귀담아 듣기 시작하여 심지어 수업 시간에 실제로 열심히 들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공상에 빠지는 자신의 성벽을 이기려고 싸우는 바로 그 때, 이번에는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만 무너지기 시작했다. 저 하늘가에서 계속 낮게 타오르고 있는 거대하고 거센 불이 이제는 나를 어떤 불복종의 상태로 몰아 가고 있었다. 너무나 젊었던 나는 자신이 여교사라는 직분 속에 영원히 갇혀 버렸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그 일의 재미있는 면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오직 벗어날 길 없는 인습만 보였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어떤 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수업 진행에 골몰하더라도 그 다음 날은 우울증에 빠져 버렸다. 끝나 가는 가을의 찬란한 마지막 날들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즐기지도 못한 채 그냥 흘려 보낸다고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가스파르가 자유를 호소하는 소리를 내지르면 이번에는 내가 탁 트인 높은 하늘로 눈길을 던졌다. 나는 자문해 보았따. 자신의 재능과 삶을 어디에다 바치는 것이 값진 것일까?

 

어느 날 메데릭 옆으로 지나가다가 그의 작문 노트를 들여다 보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작문에 대한 말 대신 불쑥 이렇게 물었다.

"네가 말하는 산이란 게 사실은 그냥 작은 언덕에 불과한 거지?"

그는 연필을 집어 들더니 놀라울 정도의 솜씨로 아주 뚜렷한 획을 그어 촘촘한 산맥을 그린 다음 여기저기에 나무와 무너진 바위 무더기를 그려 넣고 비탈에는 낮은 나무 덤불을 보탰다.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말할 수 없이 한적한 어떤 장소의 분위기를 살려 낸 것이다. 그런 곳에 가서 긴장을 풀면 좋을 것 같았다.

긴 의자의 한끝에 앉은 채 나는 그 야성적인 장소가 생명을 얻어 생생하게 살아나는 모습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물의 흐름을 그리면서 메데릭이 설명했다.

"여기 가운데는 시내가 있어요. 어느 날 물이 흘러 나오는 샘에까지 따라 올라가 봤어요. 걸어서 네 시간 걸려요! 넘어진 나무 등걸 밑에 숨어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아요. 물이 아주 차죠. 그 꼭대기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 어떤 영국 사람이 몇 년 전에 시내에다가 새끼 송어들을 방류해 놓은 것 같아요. 아직도 더러 남아 있어요. 그리고 말이죠, 더 재미있는 건, 쌤…."

산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구속에서 풀려난 아이의 모습이 되살아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마음이 느긋해졌는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속마음을 계속 털어 놓으려다가 그는 잠시 주저하면서 내가 정말로 관심 있어 하는지 살피더니, 궁금해 죽겠다는 내 표정을 보고는 제가 마음 속으로 그토록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나와 나누어 가지게 된다는 도취감을 억제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게 뭔데, 메데릭?"

"…에, 그건 말이죠, 송어 떼가 가끔 샘으로 거슬러 올라오는데, 거기 찬물 속에서 말이죠. 쌤은 아마 못 믿으실 거예요, 이 놈들이 그냥 손에 잡히는 거예요. 정말예요. 손으로 잡고 쓰다듬어도 가만 있어요… 정말 신기하잖아요?"

"어쩌면 물이 하도 차서 물고기가 얼얼해진 통에 감각이 없어진 모양이지" 하고 나는 생각나는 대로 그냥 말했다.

"손으로 잡아서 쓰다듬다니" 하고 그는 꿈 같다는 듯 되풀이하여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나른한 보랏빛이 감도는 그의 두 눈과 투명한 얼굴에 가장 미묘한 사랑의 표정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청소년 시절에 있어서 사랑의 첫 충동은 물과 땅에 사는 작고 자유로운 생명체들 쪽으로 기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시 한 번 더 깊은 놀라움을 맛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경계심 많은 물고기가 기꺼이 손 안으로 들어와 주었을 때 그걸 손에 느끼며 맛보는 기쁨의 전율이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 자신이 보다 민감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상처 받기 쉬워만 보이는 그 아이가 이제 머지 않아 어떤 손아귀에 붙잡히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한 번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분이 되었는지 그는 내게 가장 깊은 산 속에서 바싹 마른 무슨 뼈 무더기를 발견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닳고 닳아 버린 뼈들이어서 그게 무슨 짐승의 잔해인지 알 수조차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짐승들이 스스로 찾아가서 죽은 무덤이었을까? 아니면 짐승을 잡으려고 옛날 사람들이 쳐 놓았던 무슨 덫의 자리일까?

"오히려 후자일 것 같은데."

그는 내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얼른 보기에 나의 지식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문제에 있어서조차 내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가장 놀라운 발견을 내게 알려 줄 정도에 이르렀다. 즉, 저기 산 꼭대기에는 뭔가가 새겨진 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하면 되는 거죠, 쌤? 물고기 모양이 새겨져 있는 거예요!"

"화석이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여러 세기 전에 아가씨즈 바다가 우리 대륙의 내륙 거의 전체를 뒤덮고 있었거든. 물이 빠지면서 심지어 산 꼭대기에까지 바다와 조개 껍질의 자취가 남았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내가 실력 발휘를 하자 황홀해진 그는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다 믿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당장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에게 말해 주었다.

"메데릭, 온 사방으로 돌아다니기만 하면서 배우려 하지 말고 책을 좀 읽으면 책에도 기가 막히게 멋진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나는 그에게 백과사전 중 어느 한 권을 가서 가져오라고 시켰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우리 학사 위원회에 요청하여 내가 우리 학교에 간신히 구입해 놓은 책이었는데, 나는 그에게 아가씨즈 바다 항목을 찾아 보라고 시켰다. 우리는 그것과 관계된 긴 설명을 함께 읽었다. 나중에, 나는 찬물 속에서 손 안에 들어오는 송어 이야기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꿈에 젖은 눈빛을 메데릭에게서 보았다.

"내가 본 그대로네요!" 하고 그는 두껍고 거창한 책에서 자기가 본 것을 확인해 주는 내용을 발견하자 기쁨과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쳤다.

그것이야말로 메데릭의 내면에서 책에 대한 사랑이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점이 나는 더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삶의 흐름과 놀라움과 신비스러움을 구체적인 기록 속에서 확인하는 만족감을 맛보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번에는 내가 그 책들 너머 그 책들의 모체가 되었지만 책이 다 말해 주지 못하는 세계로 되돌아 가 보고 싶은 꿈에 온통 사로잡혀 버린 것이었다.

"네가 말하는 그 산에는 사람이 살고 있니?" 하고 나는 나중에 그에게 물어 보았다.

"아무도 없어요. 거기선 언제나 혼자예요. 가스파르하고 나하고요." 하고 그는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한 가지 감정에서 다른 감정으로 옮아 가면서, 나는 그 나이에 벌써부터 고독에 맛들이고 있는 그를 나무라고 싶었지만 나 역시 이를테면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살아 온 시절을 막 벗어난 참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런 시절로부터 사랑에 이르기 직전, 청소년 시절에는 흔히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고뇌가 그 쪽에서 오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가능한 한 그 무슨 가냘픈 은신처에 몸을 웅크리거나 아니면 메데릭처럼 온통 순수하기만 한 땅으로 피해 들어가 숨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제 그는 그의 약간 거친 여러 가지 즐거움에 대하여 가슴을 열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도 빠짐 없이 무슨 희귀한 화본과 식물이나 그 지역에서는 지극히 찾아 보기 어려운 새 둥지를 나한테 보여 주고는 곧 날려 보낼 생각으로, 살아 있는 새를 저고리 속에 따뜻하게 품고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우리가 책의 원색 도판 속에서 그림으로 보았던 것의 견본들이었다. "쌤, 이걸 진짜로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메데릭과 동등하게 내 세상 같았던 그 왕국의 한계를 벗어나는 즉시, 나는 그를 안내자 삼아 그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꿈 꾸었고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잃어버린 경계선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다른 아이들을 다 보내고 난 뒤 어떤 문제를 다시 한 번 더 풀어 보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멀리 있는 숲의 불그레한 빛을 받아 아직 훤한 교실 안에 단 둘이서 나란히 앉아 있다가, 내가 또 무슨 엉뚱한 비탈로 미끄러질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불쑥 그에게 물었다.

"메데릭, 네가 말하는 그 산은 아주 멀어?"

"아녜요. 내가 아는 지름길로 가면 구 마일 밖에 안 돼요."

잠시 후, 그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 나의 관심이 어떤 것인지를 차츰 깨닫게 된 모양이었다.

"거기 가 보고 싶어요?"

내가 아니라고 해 보아야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내 속을 훤히 들여다 본 것이었다. 완연히 달라진 표정으로 보아 그는 마침내 나보다 유리한 입장이 되었음을 은근히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좋은 말만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니죠 뭐. 마을에서 출발해서 세 시간이면 가는걸요, 쌤."

그 어조는 은근하고 애원하는 듯했다. 부드러운 보라색으로 변해 가는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하루만에 갔다 올 수 있단 말이지?"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니까요, 쌤."

그 순간, 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얼른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말이 없는걸."

"우리 집에 아주 순한 암말이 한 마리 있어요. 전혀 사납지 않아요, 쌤. 요 다음 토요일 날 일찍 데리러 올까요?"

"아니, 그렇게 빨리 말고, 그렇게 빨리 말고!"

"가을이 다 가는데요."

"11월도 좋을 텐데."

"하지만…."

나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무슨 분별 없는 짓에 동조하려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가 아니라 판단력이 흐려진 가운데서도 이상하게, 나를 산으로 데려가고 싶어 달아오른 메데릭의 욕심을 어쩌면 좋게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점에 대한 생각이었다. 나는 그의 눈빛을 살폈다. 거기에는 오직 자신이 살고 있는 어떤 세계, 그 속에서 혼자만 살다 보니 마침내는 그 한없는 찬란함에 대한 확신마저 흔들리게 된 그 세계에 대한 사랑을,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과 나누어 가지고 싶은 일념 뿐인 소년기의 열광만이 가득했다. 갑자기 메데릭은 내가 자신에게 그 야성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를 바라는 뜨거운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럼, 그 전에 나한테 한 가지 약속을 할 수 있겠니?"

그러자 순간 그의 눈에는 성인들에 대한 그 거만한 멸시의 기색이 약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아이가 성년의 세계로 진입하기 직전에 가장 강하게 느끼는 그런 멸시와 반항의 감정이었다.

"흥정을 하겠다는 얘긴가요?"

"이를테면 그렇지, 그러나 이건 공평한 거야. 네가 이걸 모두 다─나는 문법 교과서의 꽤 많은 분량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복습해서 가령 2주일 동안에 이 동사 변화를 다 외울 수 있게 된다면 난 그 즉시 너하고 같이 밥코크 산으로 가겠어."

 

그가 어떻게 했을까? 나는 지금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월말 시험 때 옆 사람의 답안을 그대로 베꼈을까? 그럴 수는 없다. 내가 바싹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책상 속을 뒤져서 미리 작성해 놓은 문제지를 찾아 내 미리 공부해 두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언제나 반에서 꼴찌를 하던 그의 성적이 이번에는 중간 이상으로 뛰어 올랐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에게 성적표를 내밀자 그걸 본 그에게서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비꼬는 축하의 말을 던지기라도 하듯 야유 섞인 찬미의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 순간 그의 시선에서 어떤 승리자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약간 건방지게 느껴져서 나는 좀 당황했다. 그러나 곧 그가 단순히 내기에 이긴 것을 기뻐할 뿐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 토요일, 전날 밤 약간의 결빙으로 공기가 맑고 칼칼해진 아침 일찍, 그는 가스파르의 등에 올라 탄 채 작고 순한 암말 플로라를 끌고 우리 집 문 앞에 와 있었다. 붉은 색 바탕의 털에 이마에서부터 콧잔등까지 흰 줄무늬가 악센트처럼 찍혀 있어서, 갸름한 얼굴이 생각에 잠긴 듯이 보이게 하는 그 암말이 즉시 내 마음에 들었다.

 

 

3

 

벌써 두 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메데릭이 앞장섰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더할 수 없이 기이한 균형을 이루면서 쌓여 있는 돌 더미 사이로 그 때까지보다 더 높고 더 야성적인 곳으로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틈새가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토록 평탄하고 한결같은 우리 고장에 그렇게까지 우락부락한 성격의 풍경이 감추어져 있으리라고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다.

가끔 메데릭은 발걸음을 멈추고 시각 못지 않은 길잡이가 되어 주는 듯한 공기의 냄새를 맡곤 했고, 내 눈에는 그저 뒤엉킨 풀숲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놀라운 정도의 후각으로 통로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아주 늦은 가을이었는데도 날은 찬란한 하루를 예고하고 있었다. 평소에 눈과 폭풍이 일찍부터 몰아치는 우리 고장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내가 그 느낌을 말하자 메데릭은 당연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별로 놀라지도 않으면서 싱긋이 웃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힘든 산길에 신경을 쓰느라고 더 이상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따금씩 메데릭은 나를 돌아보곤 했는데 챙이 넓은 모자 밑으로 그의 얼굴이 내 쪽으로 잠깐 잠깐 밝아지면서 나를 격려하고 머지않아 우리가 노력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듯 했다.

우리는 또 하나의 가파른 비탈을 향하여 내달았다. 우리가 타고 가는 말들의 발 밑에서 무너지는 돌들의 폭포는 산비탈을 따라 끝없이 굴러 떨어져 내려갔다. 때로는 돌멩이 한 개가 다른 것들보다 한참이나 뒤에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그 깊은 고요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울리기도 했다. 또 다른 둥근 골짜기가 나타났고 우리는 다시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 갇혔다. 흐릿한 바위 그늘 속에서 다시는 해를 볼 수 없었고, 찬란한 가을날의 것이라곤 이따금 길 잃은 빛의 화살들을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줄곧 폐쇄되어 도무지 속을 보이지 않은 채 점점 더 빡빡하게 조여지며 나선 상으로 올라가기만 하는 그 고장에서 나는 기가 죽어 버렸다. 저 아래에 있는 학교, 마을, 나의 생활, 정답게만 느껴지는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오래 전부터 등 뒤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메데릭의 실루엣까지도 이제는 낯익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따지고 보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내 아이와 함께 사람 하나 살지 않는 이 험한 고장에 와서 모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벼운 두려움이 가슴을 스쳤다. 그 때 메데릭이 큼직한 모자 밑으로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돌아 보더니, 의기양양한 몸짓으로 우리들 저 앞에 이젠 아주 가까워진 한 곳을 가리켜 보였다. 여러 시간 동안 우리가 더듬어 올라온 목표점이 거기 있었다.

험한 모습의 돌덩어리들이 차츰 드문드문해졌다. 풍경이 훤하게 트였다. 바위 더미들 사이로 뚫린 하늘이 넓게 드러났다. 세찬 빛줄기가 우리를 맞았다. 그리고 갑자기, 눈에 익숙하고 평화스러우면서도 여러 시간 동안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새로워지고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오는 평원이, 요지부동의 모습으로 그러나 어떤 역동성과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그 때의 정경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여전히 그 정경의 추억을 맞아 들이려는 듯 내 영혼이 고즈넉하고 행복한 느낌과 함께 넓게 펼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높은 곳에서 목도하게 되는 그런 풍경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기에 우리에게 그토록 커다란 만족감을 주는 것일까? 그 풍경을 획득하기 위하여 치른 고생이 그만한 보상을 주는 것일까? 지금도 나는 그 까닭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날 아침 메데릭과 나란히, 서로 머리를 마주대고 있는 말 위에 올라 앉아 있을 때만큼 확실하게 그 평원의 광대함, 그 쓸쓸한 고귀함, 그 변모한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가장 먼 곳까지 우리 눈 앞에 확 펼쳐진 그 평원은 마음을 사로잡는 디테일들을 무수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가령 푸른 하늘 가ㅏ까이에는 이제 막 갈아엎은 땅이 그 위를 날고 있는 어두운 불새만큼이나 윤나는 검은 색을 띠고 있고, 더 높은 쪽에는 밤안개가 아직도 땅바닥에 엎드린 채 흰 바탕에 검은색의 지극히 미묘한 목탄화를 만들고 있는 들판, 그리고 아주 먼 곳에는 작은 울 안에 갇힌 봄인 양─아마도 이런 겨울밀 싹인 듯─부드러운 녹색의 자그마한 사각형. 그러나 평원이 마음에 사무치는 것은 가장 희귀한 그 겉모습들 중의 어떤 한 가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 겉모습들이 결국은 모두 다 평원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 정경의 이러저러한 모습, 특히 울 안에 갇힌 봄 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머지 않아서 우리는 오직 요지부동인 것만을 의식하게 되니까 말이다. 물결들은 바다로, 나무들은 숲으로 돌아가고,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인간적 삶의 지표와 모든 디테일들은 결국 평원의 무한한 넓이 속으로 돌아간다. 이렇다 할 그 무엇 하나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평원은 이렇게 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평원은 그토록 자주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나는 메데릭 쪽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이마 위로 푹 눌러 쓴 모자 차양 밑에서 그는 나를 열심히 훔쳐보고 있었다. 그는 이 높고 기이한 장소에서 내가 맛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행복감이 서서히 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유심히 살피면서, 평원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쉴 새 없이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내 얼굴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자 그의 얼굴 역시 밝게 빛났다. 그것은 그가 순수하게 타고난 자질이었을까? 아니면 삶에, 특히 젊은이들의 삶에 있어서 흔히 그러하듯이,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함께 즐기는 것을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두 사람의 눈 속에 어떤 기쁨이 가득했던 것 같다. 이윽고 우리는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가벼운 웃음, 약간 나른한 듯한 웃음이었다. 우리는 왜 웃었을까? 아마도 두 존재 사이에서 문득 생겨난 저 드물고도 신기한 공감 속에서 너무나 굳게 결속된 나머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더 이상 말이나 몸짓이 필요 없게 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웃는다. 아마도 해방에서 오는 웃음을.

 

이상하게도 바로 그 다음, 우리는 아무 말이 없게 되었다. 심각하기까지 했다. 각자 우리를 결속시켜 주는 풍경에만 신경을 썼다. 거대하고 자유로운 공간이 다 그렇듯, 그 공간이 우리들의 마음 속에 불러 일으키는 것은 삶, 우리들의 미래,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갖게 될 얼굴에 대한 꿈 속 같은, 그러나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었다. 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 오면서 맛본 순수한 믿음의 순간들은 모두 메데릭과 내가 산 꼭대기에 전망대처럼 만들어진 좁은 고원의 정상에서 행복하게 경험한 그 때의 그 어렴풋한 행복과 관련된 것임을 지금도 알 수 있다. 지금 상상해 보면, 그 때 우리가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으므로 만약 저 아래 평지에 있는 어느 농가에서 사람들이 가파른 산 꼭대기에 뚜렷하게 드러난 두 사람의 실루엣을 바라볼 생각을 했더라면 우리들 자신도 먼 거리에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을, 어쩌면 미래까지도 바라보려는 듯이 여전히 말 위에 올라 앉은 채 거의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는 얼마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던 것일까? 마침내 메데릭이 우리 두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몽상에서 깨어난 듯 평원의 가장자리에서 쾌활한 어조로 내게 제안했다.

"쌤, 송어 떼가 그대로 있는지 보러 갈래요?"

나는 기꺼이 그러기로 하고 플로라의 머리를 돌려 그를 따랐다. 어느 새 앞장 서서 내달으며 그는 내게 "아래를 보지 마세요, 쌤…" 하고 소리쳤다. 내가 약간 어지럽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돌고, 되돌아오고,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가며 그가 나를 인도해 간 좁은 골짜기에서, 나는 마치 땅에 엎드려 수면에 직접 입을 대고 물을 마시는 사람처럼 가로누워 있는 한 그루의 커다란 죽은 나무 아래로 맑고 빠른 물살이 세차게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메데릭은 끈적거리는 나무 등걸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는 물 속 여기 저기를 짐작으로 더듬었다. 햇살이 우리들에게까지 파고들면서 우리들의 손과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그 순간 메데릭의 얼굴에서 기쁜 흥분에서 오는 내면의 빛이 뿜어 나왔다. 저 위에 있는 평원의 전망대에서 나는 일면 그의 나이에 비해서 조숙하다 싶은 심각하고 평화로운 행복에 빠진 그를 보았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보는 그는 어린 아이 특유의 기쁨, 흔히 흥분과 열광을 감추지 못하는 기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었다.

"있어요, 쌤. 금방 내 손에 미끈 하고 만져졌어요. 자, 이것 보세요! 그냥 잡아도 가만 있어요. 손 안에 있어요, 쌤!"

그는 물고기를 놀라게 하지는 않아야겠는데 기쁨과 흥분은 걷잡을 수 없어 속삭임을 고함쳤다. 아니 즐거운 고함 소리를 속삭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일까. 나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다.

"쌤도 한 번 해 보세요" 하고 그는 내게 열심히 권했다. 마지 못해 나는 찬물 속에 손을 넣었다. 아주 싸늘한 느낌이 손에 전해져 왔다. 손가락 끝에 뭔가 스치는 느낌이어서 나는 아마 물 속 깊은 곳에 자라는 수초가 손가락을 건드리는 모양이라고, 메데릭이 말한 그 느낌은 바로 거기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심이 많은 나는 여전히 한동안 그렇게만 생각하며 물 속을 더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쯤 벌린 내 손 안에서 뭔가 조그맣고 미끄러운 것이 어렴풋하게 꿈틀했다. 분명히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게다가 내가 가볍게 손을 오므려도 그것은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손 안에 잡힌 그것은 손가락들 사이에서 재미있다는 듯이 이리 저리 몸을 뒤집고 있었다. 나는 메데릭과 똑같은 황홀감 속에 빠져 들었다.

"내가 직접 느끼지 못했더라면 네 말을 곧이 듣지 않았을 거야" 하고 내가 말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거든요" 하고 그가 인정했다.

이제 그는 샘가의 풀 위에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물 속에 담그고 있었다. 연방 반짝거리는 그의 두 눈은 의심을 모르는 야성의 생명을 손가락 끝에 감지하는 쾌감을 또 다시 순간 순간 맛보고 있음을 말해 주곤 했다. 나 역시 그와 똑같이 했다. 샘의 여기저기에서 눈과 눈을 맞추며 우리는 같은 행복감의 같은 미소를 입가에 번지게 만드는 너무나도 유사한 현상들을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한 마리 왔어요, 쌤?"

"응… 그런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죠?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죠?"

"그래, 정말 그래!"

"가도록 가만 놔 둬 보세요…. 다시 돌아오는가 보게요…. 돌아와요?"

"돌아왔어…. 하지만 같은 놈일까?"

그는 잠시 동안 거칠고 구겨진 풀 위에 두 무릎을 괴고 꿇어 않더니 모자를 팔로 툭 쳐서 뒤로 넘기고서, 아마도 생전 처음일 듯, 학생의 선생에 대한─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 않지만─존경심이 얼마간 담긴 어조로 내게 물었다.

"쌤, 쌤은 책도 많이 읽었고 아는 것도 많으실 텐데, 지금처럼 송어들이 사람을 안 무서워하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거야 자연의 온갖 비밀에 대해서 그리도 아는 게 많은 네가 오히려 그걸 나한테 설명해 줘야지."

그는 당혹스러운 듯 미소를 짓더니 약간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이구 참, 쌤, 말도 안 돼요, 그건!"

우리는 다시 손을 물 속에 담갔다. 송어들이 다시 찾아와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 턱 놓고 손 안에 들어왔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네" 하고 메데릭이 깊은 숭배의 감정 속으로 빠져드는 시선과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한다는 듯한 눈빛. 아직은 희미한 채로나마 차오르는 어떤 먼 슬픔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그토록 많은 기쁨들을 한꺼번에 맛보게 된 특권이 약간 위협받는 느낌인 눈빛이었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세상이 온통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에요, 안 그래요?"

나는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나는 송어들이 산란기여서 그렇게 맥을 놓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물이 워낙 차서 그랬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훗날, 나는 샘물 속에서의 그 현상에 대하여 온갖 종류의 합리적인 설명들을 찾아 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메데릭과 내가 쉽사리 잡히지 않는 그 작은 생명들을 우리와 함께 즐거워할 정도로 길들였다는,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기쁨을 맛보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고기 잡기가 이렇게 쉬우니 저녁 반찬거리는 충분하겠네" 하고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쌤, 죄받아요!"

"왜?"

"아니, 그건… 지금… 이 녀석들이 우리를 꽉 미…믿고 있는데…."

나는 그가 자신에게 어떤 새로운 정서적 의미나 특히 심각한 의미를 지닌 표현을 쓸 때면 말을 약간 더듬는다는 것을, 아니 자신이 아직 그 사용 방법을 알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무기를 만나면 문득 주저하게 되고 거의 괴로울 정도로 겁을 낸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렇지만 저 산 밑에 가서는 물고기를 잡아다가 프라이 팬에 튀겨 먹자고 했잖아? 그것하고 뭐가 달라?"

그는 아주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저 아래 물고기들은 우리를 꽉 미…믿고 있지 않잖아요. 그 물고기들은 도…도망갈 수라도 있으니까요. 그건 다르죠."

"그건 그래. 그건 아주 다르지. 하지만!"

 

처음에는 하얀 뼈들이 잔뜩 쌓여 있는 이상한 무더기 옆에서, 또 다른 곳에서는 암벽에 보이는 화석들을 살펴 보느라고 시간을 많이 지체했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에 하루가 다 지나가 버렸다.

이미 날이 많이 저물어 인적이 끊어진 대로에 발굽 소리를 크게 울리며, 어쩌면 창문마다 사람들이 몰래 내다보고 있는 가운데 마을로 돌아올 때에야 비로소 나는 메데릭과 내가 이 외출로 인하여 사람들의 악의에 찬 시선에 노출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검푸른 어둠 속에서 우리가 누군지 좀 더 잘 알아 보기 위하여 불 켜기를 늦추고 있는 집집마다 곱지 않은 시선들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지나가자마자 우리들 등 뒤의 창문들에서 하나씩 불이 켜졌으니 말이다. 하루를 가득히 채워 주었던 그 순수한 즐거움에서, 맑고 깨끗한 물 속에 쓸개를 풀어 놓은 듯, 고약한 의심의 뒷맛이 흘러 나왔다.

'멋대로들 생각하라지!' 하고 나는 마음 속으로 고함쳤다.

나는 땅 위에 내려 서서 고맙다는 뜻으로 플로라를 한 번 쓱 쓰다듬어 주고는 지칠 대로 지쳐 현관 쪽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곧 메데릭이 극도로 피로해진 어린 말 플로라를 뚜벅뚜벅 조심스럽게 이끌며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그들이 캄캄한 어둠보다도 더 마음을 흔드는 그 흐릿한 빛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쩌면 저들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걷는 저 두 마리 짐승과 힘을 내라고 정다운 몇 마디 말을 던져 주며 그들을 이끌고 박명 속으로 서서히 묻혀 가는 저 소년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4

 

백과사전 이외의 다른 책은 메데릭의 관심을 오래 붙잡아 두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무거워 다루기 힘들고 온갖 도판들과 그가 뜨거운 관심을 가진 주제들의 정보가 가득한 그 책들을, 그는 그 밖의 거의 모든 학습 자료들과는 딴판으로 아주 좋아했다. 가끔 그는 자신의 생각이 과학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만족한 나머지 두 손 안에 그 두꺼운 책을 펴 든 채 문제의 대목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내게 찾아와 보여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보세요, 쌤. 전에 말했던 그 큰 새가 분명 수리부엉이잖아요."

때로 나 역시 그의 관심에 휩쓸려 들어서 전에 내가 의아해 했던 점이나 그 날 낮에 내가 받은 질문과 사전에 기록된 지식을 관련시켜 보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번에는 그렇게 해도 주먹으로 위협받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그에 대하여 정도 이상으로 허물없이 대했던 태도를 추슬러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를 들어 그가 들이나 숲에서 내게 어떤 새로운 선물을 가져다 줄 때 그 순진함이 가득한 눈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그의 고지식한 면에 홀린 나머지 나는 그만 무장해제 당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하숙집 여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메데릭이란 녀석은 덩치만 어른처럼 컸지 가만 보면 아주 어린 애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하고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이상하게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난 뒤 어느 날 아침 메데릭이 내게 가져온 소식은, 학교는 물론 온 마을을 떠들썩하게 했다.

"아버지가 읍내에 나가서 백과사전 한 질을 다 사 오셨어요. 열두 권이나요! 이젠 집에서 아주 재미난 저녁을 보내게 되었어요."

나는 감동했다. 메데릭의 아버지가 그 비싼 백과사전을 살 만큼 돈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과연 아주 부자로 알려져 있었다. 뜻밖인 점은 사람들이 그를 요양 없고 무식하며 태도가 거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날부터 메데릭은 연초와는 달리 자기 아버지에 대하여 말할 때 더 이상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정중한 어조로 말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읽는 것은 특히 장래를 예고하는 것이나 예언, 별자리, 하늘에 나타나는 징조, 예를 들어서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거예요…. 또 교회 분리… 서로 갈라진 교황들, 보르지아 같은 것도요…."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그가 입에 올린 항목들은 그가 몸담고 있는 환경을,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메데릭 자신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왠지 불안했다. 이제는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너무 쉽게 믿는 그의 태도나 메데릭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선심이 내게는 전혀 좋은 징조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하숙집 여주인에게 로드리그 에마르가 어떤 종류의 인물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녀가 내게 해 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 사람은 젊었을 때 미남에 사람을 홀리는 데가 있었고 이미 부자였는데, 반은 인디언 피가 섞인 처녀한테 반해서 따라 다니다가 마침내 여자의 부모에게서 그녀를 납치해 와서 결혼했다. 그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메데릭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젊은 여자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로드리그가 그녀를 내쫓았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녀가 한밤중에 말을 타고 도망쳐서 자신의 부족에게로 돌아갔으며, 그녀를 되찾아 오려고 애쓰는 남편에 대하여 그 부족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녀는 아이를 다시 찾아 오려고 애를 썼지만 법정에서 아버지에게 양육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갔다. 어찌 되었건 그 때부터 로드리그 에마르는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폭음하기 시작했고 정서적인 불균형을 드러내였는데 때때로 스스로를 다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다시 무절제하고 과도한 생활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런 소문들이 얼마만큼 진실일까? 하숙집 여주인도 과장이 많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메데릭이 '성'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저택에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그녀는 내게 알려 주었다. 하긴 이웃에 사는 어떤 여자가 간신히 집안 청소 정도를 해 주고 집 주인의 식사나 그 밖의 필요한 일을 돌보아 주긴 하지만.

  

메데릭의 삶은 내게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국면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 다음 일요일 날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말을 정중하게 알려 왔다.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뭔가 께름칙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막연한 예감에 몸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너는 내가 꼭 그래 줬으면 싶니, 메데릭?"

그 때 그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내게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점점 커 가는 영향력이 내게는 점점 더 놀라워 보였고 솔직히 말해서 두렵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그는 자기 집이 부자라는 것을 유난히 과시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사실이 새삼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진정한 천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우리는 쌤이 방문해 주시지 않은 유일한 집이에요." 하고 그는 나를 원망하듯 말했다.

"마치 에마르 집안에만 유독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아 하신다고 생각될 정도예요. 아버지는 선생님이 그러시는 건 일종의 모욕이라고 하셨어요."

"너도 잘 알잖아"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남자만 사는 집에는 어디도 찾아간 일이 없었어."

나는 그런 식으로 적당히 빠져나갈 생각이었지만 일은 호락호락 끝내 주지 않았다. 메데릭에게 이미 준비된 대답이 있었던 것이다.

"여자도 한 사람 있어요. 아버지가 고용한 이웃 여자예요. 그 여자가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도록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어요."

나는 다른 방법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보았다. 에마르 농장은 마을에서 3마일도 더 떨어져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 메데릭이 가장 멀리 사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겨울철이면 그 길은 바람이 너무나 거세게 불어서 툭하면 눈이 마차 높이만큼 쌓여 있곤 했다.

"겨울철에는 너희 집까지 갈 수 있을지 거의 예측할 수 없을 정도잖아."

"제가 모시러 올 텐데요, 쌤."

나는 메데릭의 초대를 받고 나서 하숙집 여주인에게 의견을 물었다.

"가지 마세요!" 하고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로드리그 에마르는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간 뒤부터 미치광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어요. 제발 그 집에는 가지 마세요."

한편 메데릭은 내게 압력을 가해 왔다.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날씨가 안 좋아지더라도 전혀 걱정하시지 말래요. 그럴 경우 제가 쌤을 모시러 오도록 베를린 마차를 내 주시겠대요."

그가 그 경우를 생각하며 너무나 흐뭇해 하는 것 같아서 내가 물어보았다.

"베를린 마차를 모는 게 그렇게도 좋아?"

"쌤, 그 마차를 몰아 보게 해 달라고 아버지를 조른 게 벌써 2년이에요. 그런데 처음으로 그걸 허락해 주시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하여 나는 별로 내키지 않으면서도 초대에 응했다. 이 이야기는 이제 누구나 다 알게 되었고 모두들 내가 에마르 집에 가지 않을 거라고 예언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메데릭의 편에 서 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또 한편으로 나는 그 어떤 알 수 없는 천박한 힘에 위협받고 있는 느낌인 메데릭에 대하여 내 영향력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했지 않았나 싶다.

 

그 다음 일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악천후의 조짐이 완연했다.

"에마르처럼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이런 날 길을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고 하숙집 여주인이 투덜댔다. "아! 이번엔 제발 오다가 길을 잃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 집안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욕해서야 되겠느냐고 막 나무랄 참이었는데 벌써 눈보라가 치는 우리 집 문 앞에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마차가 와서 멈추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하숙집 여주인이 소리쳤다. "로드리그 에마르가 위니펙의 유명한 장인에게 맞춰 제작한 신혼용 베를린 마차네! 마리아가 집 나간 뒤부터 다시는 못 봤었는데. 저 엉큼한 로드리그가 그걸 다시 내놓은 걸 보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거야. 나라면 단단히 조심하겠어요."

"미신이라도 믿는 거예요?" 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하고 서둘러 외투의 단추를 채웠다.

바람을 받아 거세게 후려치는 눈보라 속에서 문제의 베를린 마차를, 사실은 양날의 스케이트 위에 단 하나의 좌석을 앉히고 넓고 검은 가죽 덮개로 얼굴 높이까지 숙여서 완전히 덮은 높다란 썰매를 보는 즉시, 나는 저 달리는 동굴 깊숙이 자리잡고 앉아서 눈보라를 헤치며 간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쁨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메데릭이 거기서 내렸다. 그는 평소보다 더 날씬해 보였다. 그가 문 쪽으로 몇 발자국 다가섰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새 옷을 갖추어 입은 것이었다. 밝은 색 천의 긴 망토에는 검은색 장식 단추가 달려 있고 이마 위에 높다랗게 얹어 쓴 부드러운 보닛과 세트로 모피 칼라가 붙어 있었다. 평소에 한결같이 너덜너덜한 술이 달린 저고리와 카우보이 바지 차림이었던 그 떠돌이가 심지어 손에 장갑까지 끼고 있었따.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오려는데 하숙집 여주인의 한 마디가 가로막았다. "한 술 더 떠서 저 애를 청년 같이 차려 입혀가지고 데리러 보냈네요."

솔직히 말해서 그 당장에 나는 그런 것은 별로 눈여겨 보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드라이브한다는 생각에 한창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데릭이 내게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베를린의 내부는 더 매혹적이었다. 푹신하게 속을 넣은 좌석에는 곰 가죽이 씌워져 있고 등받이는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메데릭은 보다 더 부드러운 또 하나의 모피로 내 몸을 덮은 다음 습기가 차지 않도록 그 위에 똑딱 단추로 좌석 양쪽에 고정시킨 일종의 앞치마 같은 것을 펼쳐 놓았다. 모자의 차양처럼 생긴 마차 덮개 가장자리 아래로 잘 보호 받기는 하면서도 아주 편리하게 바깥 경치를 내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메데릭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나서 노래하듯 휘파람을 불자 가스파르가 출발했다.

길을 떠나자마자 우리의 덜컹거리는 마차 위로 덮쳐 드는 가루 같은 눈, 거센 바람, 그리고 전후 좌우로의 요동으로 인하여 우리는 높은 파도에 실린 보트! 급류에 나부끼는 조각배! …가 되어 광란하는 꿈 속으로 빠져 들었다. 메데릭과 나는 하늘과 땅의 저 노호하는 수난에 함께 내맡겨진 자신에 대한 극도의 행복한 흥분으로 두 눈을 번쩍이며 어두침침한 베를린 마차 안에 들어앉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5

 

그러나 그 신명나게 노호하는 대자연의 소리로부터 벗어나는 즉시 정장의 비대한 남자, 그것도 금방 친근한 체하면서 이십 보 밖에서부터 술 냄새를 풍겨 대는 남자의 영접을 받으며 거만한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다니 이보다 더 분위기 잡치는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보아 알다시피 자유에 목말라 있는 메데릭이 이런 집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편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퇴색한 비로드 천의 무거운 가구들이 갖추어진 어둑한 식당에서 헌 신발을 신은 어떤 여자가 차려 주는 식사는 오래 걸렸다. 집 주인은 그 여자를 손가락을 딱딱 마주쳐서 부르고 마찬가지로 퉁명스럽게 내보내곤 했는데, 그 여자는 한참 동안이나 가지 않고 문 틈에 얼굴을 댄 체 우리가 주고받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묵직한 구식 회중시계 줄을 배 위에 늘어뜨린 채 주인은 육중한 테이블 한 쪽 끝에 버티고 앉아서 앞에 놓인 포도주 병의 술을 간단 없이 부어 마셨고 메데릭과 나에게도 수십 번씩이나 잔을 권하려고 들었다. 너무나도 의외인 여러 가지 일들을 목도해야 했던 나는 바로 그 순간에야 메데릭 역시 마찬가지로 새 것인 실내용 의상을 차려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블루마린 바탕에 밝은 색의 굵직한 줄이 쳐지고 어깨에 속을 넣어 부풀린 양복 차림이 너무나도 읍내 상점의 카탈로그에서 금방 골라 입고 빠져나온 젊은이 같아서 그 모습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어색했다. 천성이 온통 자연스러움 자체인 그가 그런 어울리지 않는 옷으로 가장하고 있는 것을 보자니 여간 가슴이 아픈 게 아니었다. 그 자신도 옷을 제대로 차려 입었는지 확인을 얻고자 쳐다본 내 눈에서 그걸 알아 차렸는지 갑자기 내 앞에서 아주 거북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비록 몰취미한 것이긴 하지만 새 옷을 입게 되어 흐뭇했던 그의 기분을 깨뜨렸구나 하는 생각에 나 또한 거북해졌다. 실제로 마음 편한 사람은 특히 몇 잔의 술을 더 마시고 나서 끝없는 독백을 시작하여 말을 그칠 줄 모르는 로드리그 뿐이었다.

 

대체 그는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이었을까? 사실 나는 모든 것이 다 가짜 같아 보이는 그 무대 장치 가운데서 단 한 가지 진정한 현실로 느껴지는 저 머나먼 산 꼭대기의 길을 찾아 그 슬픈 방에서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가 하는 말은 한 쪽 귀로만 듣고 있었다. 그의 말은, 그 자신이 별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니 무엇보다도 자식만은 '신사…'로, '멋진 사내…'로, '교양 있는 남자…'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메데릭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고 그의 진정한 천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어서 나 역시 마음 속으로 따분해진 나머지 그저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향한 질문이 날아왔다.

"말을 듣자니 훌륭한 여선생님이라고들 하던데, 아이들을 겪어 볼 만큼 겪어 보았을 테니 솔직히 말씀해 주시죠. 우리 아이가 훌륭한 공부를 하길 바라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인지, 어떻습니까? 얘가 적어도 공부할 머리는 있습니까?"

내 눈이 메데릭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 짙은 보라색 동공 속에는 오래 된 적대감의 징조가 쌓이면서 금방이라도 다시 불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그가 들으라는 듯이 대답했다.

"어떤 의미에서 메데릭은 저의 가장 우수하고 가장 성실한 학생입니다. 가령 자연 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고요…."

로드리그 에마르는 쾅, 하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쳤다.

"자연, 자연이라고! 그런 건 알 바 없어요! 내가 바라는 건 교육입니다. 메데릭이 그렇게 재능이 있다면 왜 반에서 1등을 해서 나를 기쁘게 해 주지 못하는 거죠?"

"그건 아마도 그럴 마음이 없어서겠죠."

그러자 로드리그 에마르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못한 채 더할 수 없이 경멸적이고 험악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남자에 대하여 더 이상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따금 그의 울먹거리는 어조는 분명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동정심을 얻고자 하는 주정뱅이의 그것이었다. 이윽고 나는 어떤 무겁고도 예리한 시선이 나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주 관심 깊게 나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의 어조의 변화 때문에 또 한 번 놀란 내 귀에 그가 이번에는 상당히 부드럽게 내 말을 긍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렇죠, 말씀하신 대로 공부도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거죠. 세상엔 이런 마음도 있고 저런 마음도 있어요. 마음에 대해 얘기하자면 사람은 정말이지 오해를 할 수도 있거든요. 가령, 난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 생각했답니다. 메데릭만한 나이였을 때" 하고 그는 반쯤 꿈에 젖은 듯이 말했다. "난 공부를 좋아했어요, 머리도 좋았던 것 같고요. 만약 그 때 내 장래를 깊이 생각해 주는 어떤 분의 지도를 받기만 했다면 내 운명이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죠."

나는 또 다시 아연실색했다. 이제는 고민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무거워진 두 눈 속에서 실패한 인생의 끝에 이르러 젊은 날에 품었던 꿈의 추억을 되살리게 된 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읽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나는 괴로워하는 그 허풍쟁이에 대하여 자신도 모르게 연민의 정에 사로잡혀 좀 더 솔깃하게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 때문에 말입니다" 하고 그는 마치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이 내 옷 소매를 끌어당기며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 때문에, 나는 내가 이루지 못해서 그토록 마음 아팠던 것을 메데릭이 이루어 주기를 애타게 바라는 겁니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렇지 못했다가는 이 놈을 그냥 요절을 내 버릴 거예요, 요절을 내 버린다구요…."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또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것이 일종의 애정 어린 관심을 내비치는 눈빛이어서 나는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저 애한테 그토록 영향력이 크신 선생님이고, 선생님 말씀이라면 애가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터이니, 진지하게 공부를 하도록 어떻게 좀 설득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저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에마르 씨."

"최선을 다하신다고요?"

그 어조, 어쩌면 그 얼굴 표정이 뭔가 유쾌하지 못한 저의를 내비치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 전의 선생님들이 보여 주신 최선이란 것은, 솔직히 말해서 별 것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젊고 섬세하고, 또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쏙 반하게 예쁘시니, 선생님의 최선이란 감당 못 할 만큼 매혹적이지 않겠어요?"

그의 아버지 말투가 그렇게 수상한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메데릭과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기를 피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눈은 우리의 정직한 우정이 그런 더러움에 노출되는 것을 보는 두려움 속에서 서로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로드리그 에마르는 또 다시 화제를 바꾸어 자신이 실현하지 못했던 것을 메데릭이 성취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집념으로 되돌아왔다.

"그 욕망은 강해요, 선생님" 하고 그가 내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더 진심이라고 믿고서 또 그를 동정했다. 그렇지만 메데릭이 그 나름대로의 길을 가도록, 자기 식으로 배움을 얻도록, 자기 식으로 행복해지도록 맡겨 둔다면 더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그러자 포도주로 머릿속이 잔뜩 무거워진 로드리그는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 밑으로 어찌나 매서운 시선을 흘려 보내는지 갑자기 술이 깬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자기 식으로 행복해진다! 저 녀석하고 단 둘이서 하루 종일 산에서 지낼 때 가르쳐 주려는 것이 바로 그거요?"

나는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최대한 자제하면서 올이 굵은 레이스의 커튼 저 너머 점점 위협적이 되는 바깥으로 눈길을 던지려고 애를 썼다. 마음의 평온을 되찾게 되자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불순한 날씨가 시시각각 더 심해지는군요. 이제 그만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또 다시 집 주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만에, 아니죠! 아직 한두 시간은 더 있어야 큰 눈보라가 칠걸요. 거실로 가서 커피를 마실 시간은 있어요."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비틀거리는 듯 하더니 내 어깨를 짚으려고 했다.

"겉보기완 달리 이제 난 건강이 전 같지 않아요, 선생님. 불쑥 세상 뜰 수도 있는 거지요…. 물론 메데릭이 모든 걸 다 유산으로 받게 될 테고, 내 뜻에 맞는 사람이 들어온다면 나중에는 내 며느리가…. 보시다시피 난 내 식으로 우리 애를 사랑해요. 그런 문제도 다 생각해 두었으니 말입니다."

거실로 들어서다가 나는 문득 매우 아름다운 젊은 여자의 소박하지만 매력적인 초상화 앞에서 마음이 끌려 걸음을 멈추었다. 두 눈은 메데릭의 그것처럼 길고 검은 속눈썹 아래로 슬픈 꿈이 가득한 그늘진 보라색이었다.

"죽은 내 아내예요" 하고 로드리그가 설명했다. 또다시 그는 갑자기 터뜨린 웃음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것이 다스리지 못할 고통 탓인지 아니면 끈질긴 원한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편의 상 그렇게 말은 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그 여자는 죽은 게 아닙니다. 하지만 나와 귀한 우리 아들을 두고 떠난 뒤엔 죽은 거나 마찬가지죠. 사실은 인디언 거주 구역에 있는 부족에서 데리고 온 여자였어요. 그러나 이미 혼혈이었을 겁니다. 그 어떤 지체 높은 약탈자의 것이 아니라면 그런 눈빛을 누구한테 물려 받았겠어요? 나 역시 그 눈빛 때문에 첫눈에 홀렸죠. 하기야 이 초상화를 보며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홀려요. 메데릭은 사내 아이면서 눈빛이 그러니 아주 우스꽝스럽죠! 그렇지만 그 여자의 눈을 보고 있으면 혼이 쏙 빠져 버려요. 그래서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그녀의 발 밑에다가 아낌없이 다 갖다 바쳤는데, 집도 그렇죠, 돈 많이 들었어요, 정말입니다. 값비싼 가구들이며, 위니펙에서 주문해 온 옷들이며 이름 있는 사람이 제작한 베를린 마차며, 선생님도 보셨죠? 전부 다, 심지어 인디언 여자를 모시는 하인들까지, 그런데 글쎄 그 모든 것과 자기 부족 둘 중에서 그 여자는 텐트를, 부족을 택한 거예요."

그는 멸시하듯 메데릭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저 놈도 언젠가 똑같은 짓을 할 테니 두고 보세요.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선생님이 저 애한테 영향력을 끼쳐 주시는 거예요. 선생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더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지요. 분명히 알아 두세요, 선생님. 아버지 에마르는 은혜를 모르는 놈이 아닙니다."

가구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메데릭은 마치 그 자리에 있지 않기라도 하듯 그의 아버지가 자기에 대하여 하는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 눈을 피하고 있었는데 보기에 딱할 정도로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나는 산꼭대기의 고원에서 눈 아래 펼쳐진 평화롭고 무한한 정경을 바라보며 그 때의 신뢰와 공감을 함께 나누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 '쌤, 여기선 세상이 온통 우리 것만 같아요!' 라고 말했을 때 느꼈던 그의 이미지를 지금 이 순간과 비교해 보았다. 그렇지만 이 순간 가장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메데릭의 옆모습에서 그의 아버지와 닮은 일면이 엿보인다는 사실이었다.

"하기야 저 애가 젊은 야만인 계집애들과 좀 사귀어 보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만요. 고것들 꽤 삼삼하고 조숙하니까요. 그럼 저 어리석은 녀석도 이제 곧 여자 맘에 들 나이란 걸 알게 될 테지요. 하지만 내가 시키는 말을 귀담아 듣겠다면 말해 주고 싶어요. 좀 쓸 만한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입니다. 여자라곤 하나같이 무식하고 멍청한 것들 뿐인 가난한 시골 구석이고 보니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듯 나타나는 학교 여선생 말고 쓸 만한 여자가 어디 또 있겠어요. 나 역시 저 멍청한 녀석 만한 나이였을 때, 아니 그보다 좀 더 되었을까, 우리 학교 여선생을 꽤나 기다렸죠. 데이트도 하고 밤 모임에도 데리고 가고 싶어서…. 그렇지만 우리 때에는 여선생이 나타나서 나를 무식에서 구제해 주고 내 인생을 이끌어 주는 일은 없더군요."

그는 자기 연민으로 두 눈이 젖어 있었다.

"우리 애는 당신이 왔으니 행운이죠"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너희 여선생 놓치지 마라' 하고 말예요. 네 살 길이야, 이 녀석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메데릭에게 말했다.

"가자. 나 좀 데려다 주겠니?"

그는 달려 나가더니 망토를 다시 입고 거실로 돌아왔다. 내 외투도 가지고 와서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온통 비틀거리면서 문턱까지 우리를 배웅하면서 로드리그 에마르는 우리가 제대로 안면을 트기도 전에 너무 일찍 떠난다고 나를 나무랐다. 그의 마지막 말은 발작적으로 거세게 불어 대는 바람 소리에 묻혀 버렸다.

 

 

6

 

미친 듯이 몰아치는 폭풍이 저 먼 곳에서 열어 놓은 댐의 수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센 물소리를 내며 위협하고 있었지만 농장 출입로를 따라 촘촘하게 늘어선 가로수가 폭풍을 막아 주는 동시에 그 정신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길 안내까지 해 주고 있어서 우선은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우리는 각자 말 없이 좌석의 양 끝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나는 가끔 메데릭에게 눈길을 던지곤 했다. 부풀어 오르는 폭설 속에서 때로 불쑥 나타나는 이상한 불빛을 받아 그의 상처 받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그가 겨우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쌤. 아버지가 쌤을 우리 집 지붕 밑까지 데리고 와서 모욕을 줄 줄 뻔히 알고 있었어요. 왜 아버지가 온갖 선물로 내 비위를 맞추려고 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아, 수를 쓴 거예요! 정말이지, 쌤, 우리 아버진 악마예요!"

나는 힘을 내라는 뜻에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아 주려다가 이제 다시는 그럴 용기를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그만 두었다. 그 결핍의 감정으로부터 어떤 막연한 고통이 찾아와서 어떤 불분명한 미래 위로 확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이 상황에서 대체 누구를 동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를, 아니면 나를, 아니면 성년의 나이에 이르면 자연스러움이 한 부분 파괴되고 그와 더불어 영혼의 생생한 몫을 잃어버리고 마는 모든 존재를?

 

어쨌건 우리는 가로수가 늘어선 농장 출입로의 끝에 이르렀고 이제부터는 일체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저 요란한 소용돌이 속에서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며 싸워야 할 참이었다. 과연, 출입로를 따라 돌아서 활짝 터진 들판으로 접어들자마자, 마치 그런 대로 배가 다닐 수 있는 지류로부터 이제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백 배나 더 거센 분류 속으로 내달은 형국이 되었다. 우리는 어떤 야성의 힘으로부터 오는 저항과 압력을 느꼈다. 그것은 광란하는 소리와 미친 듯이 밀어닥치는 백색 꿈의 형상으로 도처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가스파르는 우리가 탄 연약한 배의 뱃머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폭풍을 가르고 나아가면, 계속되는 휘파람 소리와 뒤엉킨 외침으로 가득한 광란의 빠른 연주 속에서 폭풍은 둘로 갈라져서 눈썰매의 양쪽으로 흘러 내렸다. 때로는 마치 반대편으로부터 격류에 휩쓸리는 뗏목에 실려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 옆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절망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메데릭은 몸을 온통 뻣뻣하게 긴장한 채, 바람과 눈이 지어내는 그 광란의 실루엣들 가운데서 이제부터는 우리들에게 유일한 안내의 표적이 되어 줄 보잘것 없는 전신주들의 열을 분간해 내려고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그가 금방이라도 길 옆 구덩이에 처박일 듯이 전신주의 열에 바싹 붙어서 마차를 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부릅뜨고서 다음 표적이 나타나는지 지켜보면서 그를 도우려고 애를 썼다. 한참이 지나도록 다음 표적이 나타나지 않을 때면 우리는 벌판 가운데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빗나가 영원히 길을 잃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옥죄어 드는 그 어렴풋함 속에서 둘 중 한 사람이 전선줄을 언뜻 보기라도 하면 크게 소리쳐 알렸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토막 난 채로나마 서로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오히려 마음 속은 백 번 죽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이내 메데릭은 전신주가 눈에 보이는 순간들이면 벌써부터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가스파르를 쉬게 했다. 그럴 때엔 그 가엾은 짐승은 바람을 받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기진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다음 표적이 나타나면 말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발을 멈추고 곧 예의 극도로 피로한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데릭도 가슴 아파하는 눈치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스파르가 숨을 돌리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는 더 편하게 말을 주고받을 법도 하건만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그는 가장 뻣뻣하게 굳어져서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새 옷을 갖춰 입고서 내 눈에 더 나이 들어 보이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깊은 괴로움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가 불쑥 내뱉었다.

"이젠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고 났으니…."

또다시 내 손이 앞으로 나아가 그의 손을 잡으려다가 도중에 멈추었다. 나는 그냥 항의하듯 말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반대지, 메데릭.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학교에 다녀야지. 유일하게 도망갈 구멍인데!"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그는 다시 가스파르를 출발시켰다. 약간 진정이 되었을까 말까 한 그 장한 짐승은 온 힘을 다하여 몸을 활 모양으로 굽히며 버텼고 용감하게 머리를 쳐들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눈과 바람과 비명과 고함의 물결을 거슬러 가려고 싸웠다. 심지어 우리에게 더 없는 안락을 주었던 베를린 마차도 이제는 폐선처럼 온통 눈 투성이가 되어 덮개를 덜렁거리며 무겁게 끌면서 난파를 예고하고 있었다. 메데릭이 내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데도 그 목소리는 바람 아니면 감정의 혼란 때문에 변성이 되어 내게는 아주 이상하게 들렸다. 나는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이 그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비록 불안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지만 그래도 그 전날과 다름 없는 소년이었다. 그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에 나 자신이 성년의 문턱에서, 자연스럽게 몸 담았던 곳과 절연된 상태가 되었을 때 내가 느꼈던 바로 그 모습을 상기시켰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자, 메데릭,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되는 거야. 길에 들게 돼… 두고 봐…." 그러나 나는 바로 그것에 자신이 없었다. 바로 그 존재의 단절, 어린 시절과의 그 절연으로부터 어쩌면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상처가 남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존재의 신비에 그토록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 아마도 우리는 귀중한 푯말의 구실을 해 주는 전신주의 열을 정신 바짝 차리고 감시하는 일을 깜빡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이리하여 갑자기 전선도, 심지어 물렁물렁한 눈 언덕 밑에 깔린 단단한 땅바닥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가스파르가 마차의 문 높이에까지 눈 속으로 빠졌다가 간신히 다시 일어서고 또다시 빠져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길이 아닌 데를 가고 있어요" 라고 메데릭이 말했다.

썰매에서 내려 서자 그 역시 눈 속으로 깊숙이 빠져 들었다. 그러나 그는 몰아치는 바람을 피해 몸을 둘로 접듯이 푹 수그렸다가 간신히 가스파르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몸에 기댔다. 한 쪽 팔로 말의 목을 감싸고서 말머리에 자기 머리를 갖다 댔다. 어쩌면 우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마치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을 때처럼 두 어깨가 올라갔다가 다시 주저앉곤 하는 것이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푹 파묻힌 메데릭의 얼굴 밑에서 가늘게 머리를 움직이고 있는 말은 마치 그를 위로라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역시 탄식하고 있는 듯한 바람 속에서 지켜 본 그 장면이 왜 영원히 내 마음 속에 들어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눈보라의 높은 물결이 가로막아서 불과 몇 발자국 앞에 있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허연 어둠 속에서 오직 굽이치는 말의 검은 갈기만 흐릿하게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메데릭이 썰매의 내 쪽 편으로 다가오더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를 휩싸고 있는 질풍을 통해서 그의 두 눈이 빛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말을 할 때 그의 목소리는 마치 수 년의 세월을 거쳐서 내게 닿아 오는 것만 같았다.

"길을 잃은 것 같아요, 쌤."

내 느낌으로 그는 분명 이렇게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의 어조는 오히려 '이제 살았어요, 쌤' 으로만 들렸다. 나는 마치 희소식을 접한 것처럼 몸을 떨었다.

이윽고 메데릭이 가스파르 곁으로 되돌아갔다. 따뜻한 담요 속에 파묻혀서 나는 이승의 삶으로부터 떠나는 꿈에 몸을 맡겼다. 우리는 악에서, 몹쓸 유전에서 벗어나, 그리고 특히 젊은 시절 특유의 자부심 속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싫은 더럽힘에서 벗어나 드디어 구원된 것이었다.

폭풍이 몰아칠 때면 나의 내면에서 그같은 욕망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는 일이 흔히 있게 되지만, 울부짖는 바람 속에서 반역의 천사들이 나를 불러대던 그 날 밤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는 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 사람들이 발견하게 될 메데릭과 나를, 순수한 두 조각상처럼 하얀 눈가루가 머리와 눈썹을 덮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은 우리 두 사람을 상상했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머리를 아주 약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내게로 되돌아온 메데릭은 마치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듯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쌤?"

나에 대하여 고분고분한 그의 태도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을 흔들었다.

"네 생각으론 어쨌으면 좋겠니?"

그는 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스파르를 덮어 줘야죠."

"그렇다면 그래야지!"

그는 우리가 덮던 담요들 중 한 장을 걷어 가지고 가서 말의 등에 씌워 주었다. 그는 우선 맨 손을 호호 불어가지고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좀 따뜻하게 해 주려고 애를 썼고 두 눈 위에 덮인 눈가루를 털어 주기도 했다. 그런 몸짓에서 나는 그가 자신보다도 가스파르를 더 가엾어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말부터 우선 구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치 그 하얀 종마가 제일 먼저 판단력을 되찾았다는 듯이 지금까지 푹 파묻혀 있던 눈 속에서 베를린 마차를 요란하게 확 당기면서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휙 지나는 결에 메데릭이 제 자리로 펄쩍 뛰어 올랐다. 그는 고삐를 늦추어 놓고 확인하듯 말했다.

"다시 길로 들어섰어요."

"그걸 어떻게 알지?"

"가스파르를 보세요. 한결 자신 있어 보이잖아요. 멋진 놈이에요. 그 누구보다도 똑똑해요."

그 때 우리 눈 앞으로 전봇대의 가느다란 실루엣이 흐릿하게 지나갔다. 우리는 그 나이 특유의 저 말할 수 없는 천진난만함으로 되돌아가 정신없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쌤 겁 먹었었죠" 하고 메데릭이 나를 놀렸다.

"전혀" 라고 내가 그에게 말했다. "끝장이라는 생각은 안 했거든."

"아, 그랬군요."

우리는 우정 어린 친숙한 어조로 서서히 옮아 가고 있었다. 나도 그것을 느꼈다. 나는 침묵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잠시 후 하늘과 땅 사이에 가느다랗고 검은 선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보샹 숲이에요" 하고 메데릭이 지적해 주었다. "1마일 정도 더 가면 바로 길 가까이로 숲이 보일 거예요. 그 다음엔 드러난 길이 나타나요. 하지만 오르막길이죠. 그 쪽으로는 눈이 쌓이지 않아요."

그런 것 쯤은 우습다는 듯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그러니 이젠 안심해도 될 것 같네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는 마음 속 깊이 그토록 슬펐던 것일까? 문득 메데릭과 나는 늙을 때까지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상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뿌리쳤다. 메데릭은 이제 혼자서도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경계를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으니 피곤하면 자도 좋다고 했으므로 나는 바람을 피하여 자리 속에 몸을 푹 파묻고 마음을 놓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이 와서가 아니라 보다 마음 편하게 몽상에 잠기기 위해서였다. 이제 죽는다거나 심지어 늙는다는 생각까지도 지워 버렸으므로 나는 나이를 먹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을 신나게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좀 덜 거칠게, 좀 더 규칙적으로 흔들거리며 가고 있는 베를린 마차의 리듬이 그런 특이한 몽상을 부추겼는지, 나는 속으로 여행을 해야지, 많은 여행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온갖 나라, 온갖 고장들, 비길 데 없이 경치 좋은 곳들을 찾아 다니며 구경해야지. 어떤 높은 미래에 도달한 나 자신, 그 높은 곳에서 과거에 보잘것 없고 서투른 시골 여교사였던 나 자신을 측은한 눈길로 되돌아 보는 나 자신이 보였다.

나는 눈을 떴다. 사면에 유리를 끼우고 예쁘게 납으로 테를 둘러 썰매의 양쪽에 쌍으로 달아 놓은 두 개의 랜턴 중 한 개가 보였다. 어두워진 창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소용돌이치는 눈 속을 뚫어져라고 쳐다보고 있는 아득한 두 눈, 거품처럼 부글부글 일어난 머리털과 더불어 그 얼굴은 흐릿하고 우아했다. 나는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때 바로 내 얼굴 곁에 메데릭의 얼굴이 와서 박혔다. 그는 창 유리에 자기의 얼굴도 비친다는 것을 보르고 바싹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가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아마도 내가 잠이 들었는지 보려는 것 같았다. 내가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내가 자고 있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나는 눈을 반쯤 감고서 랜턴의 반사면에 비친 그를 감시했다. 거기에는 흐르는 눈가루에 쓸리면서 우리 두 사람의 흐릿한 얼굴이 마치 낡은 결혼 기념 사진 속에서처럼 비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것이 한 순간 밝아졌다. 그 때 나는 메데릭의 얼굴이 나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바람에 부푼 내 보닛에서 날아오른 머리카락 하나가 일어나 그의 뺨을 스쳤다. 미동도 하지 않고 랜턴의 유리 위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나는 그가 장갑을 벗고서 그 춤추는 머리카락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마구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막 붙잡으려는 찰나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공중에 쳐든 채로 딱 멈추었다. 나는 그의 시선 속에서, 만족을 얻은 사랑이나 스스로 사랑임을 깨달은 사랑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무한한 놀라움과 감미로운 애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메데릭 역시 눈의 섬들 위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은 오직 랜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메데릭과 나 자신은 실제로 가담하고 있지 않은 그 유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랜턴일 뿐이라는 이상한 느낌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때 그 랜턴은 온통 일그러진, 그리고는 자신에 다가드는 마음의 첫 혼란 속에서 그만 눈을 감아 버리는 메데릭의 얼굴을 내게 비춰 주고 있었다.

나는 날아오르는 머리카락을 얼른 양모 보닛 속으로 집어 넣었다. 나는 좌석의 가장 먼 끝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그러자 마음을 혼란하게 하던 랜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최악의 지점은 지나 온 것 같은데, 안 그래? 결국 마을과 학교, 불쌍한 메데릭, 네가 제일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다시 만나게 되었네…."

그는 자신을 덮쳤던, 그리고 아직도 얼마 간 그의 시선을 붙잡고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그 혼란에서 서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학교야, 또 다시 다니게 될지 어떨지 알 수 없네요"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마을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어디 가서 살 작정인데?"

나는 짓궂게 그를 놀리면서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려 놓기로 마음 먹었다. 폭풍은 이미 거센 상태가 아니었다. 시야가 아직은 매우 흐렸지만 길을 확실히 아는 듯 자신 있게 걷는 가스파르를 믿는지라 우리는 더 이상 매 순간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아도 되었다. 바로 가까운 곳에서 여전히 광란하는 바람이 때때로 덮개를 뒤흔들며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뿐, 정말로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의 행로는 그저 취한 상태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인생의 흐름과도 매우 유사한 그것에서 극단적인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이제 나에게는 인생이 그런 모습으로 보였다. 끝없이 새로워지는 도취감 속에서의 길고 당당한 질주로 말이다. 나는 내가 이제 막 벗어난 불행한 저녁 나절을 다 잊어버렸다. 나는 드라이브의 즐거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메데릭에게 말했다.

"이 베를린을 타고 너하고 가스파르하고 난 세상 끝까지라도 가겠어."

그는 내 어조 속에 되살아 난 유쾌한 기분에 마음이 놓인 듯 내 농담을 받았다.

"그럼 갈까요? 마니투까지, 큰 강까지!"

그것은 사오십 마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들이었다. 나는 한 술 더 떴다.

"스완 레이크로! 미네아 폴리스로!"

그가 받았다. "뉴욕으로! 필라델피아로!"

의기투합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부풀어 올랐는지 갑자기 휘날리는 눈보라 저 너머로 흐릿한 불빛이 깜빡이는 것이 보이자 나는 슬픈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이고 맙소사! 마을에 다 온 것 아냐. 정말 유감이군! 세상이 끝날 것처럼 바람이 불어대는 가운데 네 베를린 마차 속에 따뜻하게 몸을 파묻고 있는 행복감을 위해서라면 이 길을 다시 한 번 더 왕복하고 싶은 심정인데."

내가 미처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메데릭이 벌떡 일어서더니 가스파르를 오던 길로 돌려 세웠다. 이번에는 내 손이 쑥 뻗어 나가 그의 두 팔 위에 놓이면서 즉시 그를 제지했다.

"이것 봐! 정말 내가 가스파르한테 이 길을 또 한 번 더 되짚어 가고 오도록 만들 것 같아?"

"아, 이 놈이야 다시 한 번 갔다 오자면 그렇게 할 거예요, 쌤." 그의 슬픔이 송두리째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단번에 우리는 그 미칠 듯한 도취경으로부터 땅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내 눈에는 그 허식적인 식당, 무거운 가구, 뻣뻣한 휘장, 로드리그 에마르, 작고 교활한 눈으로 자신의 아들과 나를 흘겨 보는 정신병자가 되살아났다.

 

잠시 후 우리는 내가 묵고 있는 하숙집 앞에 와 있었다. 가스파르가 스스로 멈췄다. 그러나 메데릭은 마치 그 어떤 견디기 어려운 생각에 파묻힌 듯 두 눈을 내리깔고 꼼짝도 않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다 왔어, 메데릭."

그는 놀란 시선을 들더니 서둘러 마차의 문을 열고 나와 우리는 함께 문턱까지 왔다. 나는 그에게 안으로 들어가 몸을 좀 녹이라고 권했다. 그러나 하숙집 여주인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는 아주 난처한 얼굴로 뒷걸음질 쳐 물러가며 자기는 그 여자를 안 좋아한다고, 하기야 마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가스파르가 다시 추위를 먹기 전에 떠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하숙집 여주인이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문턱에 혼자 서 있었다. 그녀는 나직이 웃었다.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7

 

메데릭과 나 사이에는 이제 아무 것도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이미 한참 전에 열네 살이 된 그는 계속하여 학교에 다녔다. 그렇지만 사실은 점점 더 결석이 잦아지는데 무엇 하러 그 수고를 한단 말인가? 그는 마을 입구에 있는 어떤 따뜻한 외양간 안에 가스파르가 머물러 있을 칸 하나를 얻었다. 그는 정오가 되면 그리로 가서 말을 돌보고 그 미지근한 어둠 속에서 간식으로 가져온 사과와 빵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는 대다수의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위여서 실질적으로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했는데 이제는 더욱 모든 아이들과 멀어졌으므로 정말 함께 어울릴 상대라곤 그의 말 뿐이었다. 그가 말을 돌보아 주고 돌아올 때면 마굿간 냄새를 잔뜩 묻혀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어서 나는 어느 날 그 점을 지적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게 원망하는 눈길을 던지긴 했지만 그래도 감히 변명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굵은 줄무늬가 있는 그 새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로드리그의 집에 초대 받아 식사를 했던 그 일요일 날 처음 입은 것을 보았던, 내겐 너무나도 불쾌하게만 느껴졌던 그 양복을 말이다. 그 정장을 차려 입은 그는 마치 착오로 학교에 입학해서 까닭 없이 나가지 않고 내 어린 학생들 사이에 끼어 있는 다 큰 청년 같은 인상을 주었다. 가벼운 표정으로 수업을 진행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어느 날 그에게 너무 나이 들어 보이고 눈에 띄는 그 정장보다 평소에 입던 옷을 입는 것이 더 좋은 인상을 준다고 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계속 그 옷을 입었다. 그게 나에 대한 도전인지 아니면 이젠 아무 것도 개의치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몇 주 동안 거의 매일 같이 그를 나무랄 일이 생겼다. 내가 신경이 예민해져서거나 아니면 그가 점점 더 짜증나게 굴기 때문이었다. 과연, 내가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는 그의 옷차림을 조금만 나무라면, 그는 곧 그 해 초에 그랬듯이 교실의 통행로 쪽으로 다리를 내뻗어 지나가는 여자 아이들을 넘어뜨리는 장난을 했고 나는 화를 벌컥 내면서 그 나이의 다 큰 녀석이 그런 유치한 장난에 재미를 붙이는 것은 너무 우스꽝스럽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그도 내가 그처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보기에 딱하다는 듯이 약간 빈정대는 듯한 동시에 안 됐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는 우울한 몽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 있었다. 그의 숙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몇 시간이고 일종의 힘겨운 무감각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곤 했다. 마치 아무런 표적도 알아 볼 수 없는 벌판 한가운데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걸음을 내딛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끝없이 서성대는 여행자 같았다. 그러자 내 마음은 가장 순조로웠던 시절처럼 그를 향했다. 나는 그가 좋아했던 이런 저런 것들을 상기시키면서 나 자신마저 그런 것들을 좋아하게 될 정도로 그가 자연에 대하여 품고 있었던 애정 쪽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그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고 애썼다. 그는 그런 종류의 행복은 이제 다 끝났다는 뜻인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변했다. 어느 날 그가 책을 큰 소리로 읽었는데 그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져서 반 아이들 전체가 어떤 낯 모르는 사람이 어디 와 있나 해서 주위를 휘휘 둘러 보았다. 계집 아이들이 제일 먼저 그것이 메데릭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중 몇은 얼굴을 양 손 안에 파묻는 체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아이들의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난처해진 메데릭은 거의 공격적인 표정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큰 소리로 책을 읽으려 들지 않았다. 그는 어찌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읽었는지 내 자리에서는 들릴까 말까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의 긴 의자 끝에 가서 앉지도 않았고 그를 내 책상 곁으로 부르는 일도 없었다. 그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내 눈 앞에서 쑥쑥 컸다. 나는 그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는 그 때에 그를 멀찍이 밀어내 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계속 컸다. 그의 얼굴은 극도로 수척해져서 눈이 저 위에 가 붙고 온통 이마치레 뿐인 토끼 같은 인상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수업이 끝난 뒤, 그가 자진해서 교실 청소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평소에 나이 든 학생들에게 돌아가면서 청소를 시키는 관례를 유지해 왔었다. 다만 메데릭은 제외시켰다. 그는 정말이지 너무 멀리 살고 있어서 조금만 늦게 학교를 파했다가는 거의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낮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원하면 남아서 해. 하긴 네 차례가 되었으니까."

그러자 집안일이라면 물을 길어 오는 것 같은 사소한 일도 하기 싫어했던 그가 거의 신이 나서 마룻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내가 책상에 앉아서 작문 숙제를 고치고 있는 동안 그가 왔다갔다 하면서 의자들을 옮겨 놓고 그 밑을 쓸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먼지를 깨끗이 털어 내려고 애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게 잘 보이는 욕망이 너무나도 뻔히 보여서 갑자기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그가 단 둘일 때 내게 뭔가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청소를 자청했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막상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의 일을 쉽게 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손에 연필을 든 채 반쯤만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가능한 한 가벼운 기분이 느껴지는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너희 아버지와는 이제 좀 나아졌니?"

그 순간 아주 어려워하던 태도가 사라졌다.

"아, 네, 쌤. 전에 집에 오셨을 때 있었던 일을 미안해 하세요. 사실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일은 잘 없는데요. 집 안에 젊은 분이 오신 걸 다시 보니 감동이 되어서 그랬다면서 쌤이 다시 오신다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셨을 그런 불미스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 며칠 안에 한 번만 더 식사하러 와 주신다면 나쁜 기억을 말끔히 씻어 드리겠대요."

"아니, 그 문제는 접은 걸로 아는데, 메데릭."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쌤이 우리 집에 다시 와 주시지 않아도 아버지는 쌤이 좋아하시는 어디든 모시고 가도록 베를린 마차를 빌려 주실 거예요. 쌤은 그걸 아주 좋아하잖아요."

"우리가 어딜 갔으면 좋겠어, 메데릭?"

"어쩌면" 하고 난처해진 메데릭은 나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말했다.

"영화관도 있고 온갖 재미있는 게 다 있는 이웃 마을에 갈 수도 있죠. 아버지 생각으로 쌤은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함께 외출할 사람도 없이 마을에 혼자 처녀로 살고 있어서 심심하실 거래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거만하고 그렇게 건방진 태도였던 메데릭이 거의 사정하는 듯한 어조로 내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 술 더 떠서 손에 빗자루까지 들고. 나는 그만하면 나를 충분히 도와 주었으니 이젠 나 혼자서 정돈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천성적인 오만과 내게 뭔가 잘 해 주고 싶은 욕구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어서, 나는 마음이 아팠고 동시에 그에 대한 심술이 치솟았다. 나는 금방 최대한으로 학교 선생다운 어조로 말했다.

"난 내가 하는 직분을 전혀 따분하게 생각지 않아, 메데릭. 그게 내 삶인걸. 내 열정의 대상이고. 난 그걸 흡족해 하고 있어."

"하지만" 하고 그가 용기를 내어 내게 상기시켰다.

"눈보라 속에서 자유롭게 드라이브할 때는 그렇게 좋아하셨으면서요! 폭풍 속에서 그걸 또 해 보는 재미로 길을 더 되짚어 갔다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그의 말을 맞받았다.

"딴 데 가서 그런 소릴 하고 다니진 않았겠지, 설마?"

그는 머리를 푹 숙였다. 그런 태도가 꼭 고백 같았다.

이제 나는 그를 위로하려고 애써야 할 판이었다. 그는 그만큼 내 마음을 거슬러 놓았다는 것 때문에 기가 꺾여 있었다.

"오, 아무렴 어때. 중요할 것 없어. 다만, 메데릭,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지만 너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크셔. 그러니 무슨 일에서건 아버지 얘기는 들을 필요가 없어."

그럼 누구 말을 들어요?" 하고 그가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 자신의 말을 들어야지. 마음 속 가장 좋은 것의…."

황혼녘의 보라색이 감도는 그의 이상한 눈이 비장한 선의를 담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말없이 나의 도움을 요청하는 눈이었다.

"이제 저를 사랑하지 않는군요, 쌤."

나는 그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메데릭은 자기 자신의 감정은 의식하지 못한 채 내가 교실에서 그에게 전과 같은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우정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 봐, 메데릭. 전과 똑같이 사랑하고 있어. 분명히 말하지만, 그 어떤 학생에게도 너만큼 마음을 쓰고 있지 않아. 네가 성공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생님이 될 거야. 네가 게으름을 피우고 빈둥거리면 나는 속이 상해."

"그렇지만" 하고 그는 괴로운 비난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쌤은 이제 나하고 산에도 안 가고 베를린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지도 않을 거잖아요."

"안 하지, 메데릭. 그런 것은 이제 내겐 다 끝난 일이야. 더군다나 이젠 시간도 없어. 이제부턴 모든 것을 우리 학급을 위해 바칠 생각이야. 날 기쁘게 해 주고 싶거든 너도 그렇게 해."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하는 척했다. 그는 내 앞에 버티고 서서 꽤 오래 망설이더니, 이윽고 오래 전에 몸에 배었던 허세의 잔재를 드러내며 빗자루를 내 책상에 펼쳐 놓은 서류들 위로 삐딱하게 가로질러 내려놓고는, 나는 내 멋대로 하겠다는 듯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고 휘파람을 불면서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낙담한 실루엣의 가느다란 뒷모습이 너무나도 가슴 아픈 허약함을 드러내고 있어서 내 마음이 온통 슬퍼졌다. 그는 나이에 비하여 조숙하고 나는 젊은 나이이므로, 나는 이를테면 그에 대하여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게 행동한 나 자신을 벌하기 위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방법으로 그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자리로 돌아간 그는 성난 태도로 공책, 책, 그리고 학교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개인 소유로 가지고 있는 사전까지 그의 소지품을 서둘러 챙겼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나를 시험하려는 거야.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그를 진지하게 대하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되지. 그래서 나는 속으로는 괴로워 가슴이 조여드는데도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갑자기 그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니 내가 상상했던 것을 초월하여 그가 내게 너무나도 귀중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소지품 보따리를 다 싸서 가죽 끈으로 묶은 다음 그는 통로로 한 발 나서면서 피로와 오만한 고독으로 가득 찬 시선을 내게로 던졌다.

"쌤, 이젠 뭣 하러 학교에 오는지 알 수가 없군요. 더 이상 학교에 올 필요를 못 느끼겠어요."

내 마음 속에서는 항의의 목소리들이 솟구쳐 올랐고 그를 붙잡는 숱한 말들이 떠올랐다. 너무 젊고 너무 서투르고 어쩌면 너무 섭섭해진 나는 그저 상당히 건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무 것도 배우고 싶지 않고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하기야 나도 왜…."

미처 더 이상 말을 계속 할 사이가 없었다. 지난 날의 그 과격한 성미가 되살아났는지 그는 발길을 휙 돌려 영원히 내던져 버리려는 짐처럼 학교 소지품을 가죽 끈 끝에 매달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8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군들 가장 다루기 어려운 학생이 없어지면 우리 교실은 따분하기 그지 없는 곳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나를 설득하려 들었겠는가! 그런데 나는 하루에 열 번도 더 비어 있는 그의 자리로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런데 나는 하루에 열 번도 더 비어 있는 그의 자리로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던지곤 했다. 눈 내린 벌판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 벌판의 한결 같은 흰색 속에서는 아직 유일하게 눈에 들어오는 그 검은 갈기가 물결처럼 휘날리며 그 학생이 전속력으로 가까워 오고 있음을 내게 신호해 주었고, 그의 모습이 보이면 나는 필경 길들인 야생의 짐승이 부르면 알아듣고 달려올 때 맛보는 그것과 비슷한 그런 기쁨으로 떨렸던 것이다.

'3월의 이 마지막 거센 폭풍…. 흔히 1년 중 최악이니까… 이 폭풍이 지나면 다시 오겠지…' 하고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 끝없는 비, 이 진흙탕이 지나가면…' 했다. 마치 바람, 비, 진흙, 그리고 폭풍 때문에 메데릭이 그리도 좋아하는 곳으로 쫓아다니지 못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나는 그 쓸쓸하고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빙빙 돌아다니고 있는 그를, 혹은 어쩌면 두툼한 백과사전을 펴 놓고 정신없이 들여다 보고 있는, 아니면 이제 메데릭을 내게서 떼어 놓으려고(지금까지는 그 반대로 잔뜩 애를 쓰고 난 다음에) 열심일 수도 있을 로드리그, 오직 그만의 손아귀에 꼭 붙잡힌 채 심심하고 자포자기한 모습이 된 그를 상상해 보았다. 결국 그의 영향력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그의 어머니와 그녀가 그의 아들에게 어느 한 부분 남겨 준 저 원초적인 순수함의 영향력이 이길 것인가? 처음부터 그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세상의 간교함 앞에서 너무나도 속수무책인 채로 내버려 둠으로써 그에게 가장 큰 불행이 된 것도 바로 그 영향력이었지만. 아니면 결국에 가서는 내가 이길 것인가? 때때로 나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말 안장 위에 올라 앉은 그 젊은 기사가 나타나기를 너무나도 열망한 나머지 그가 정말로 다가오고 있다고 상상할 정도가 되어 벌판의 먼 곳을 끊임 없이 감시하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봄이 왔다. 이를테면 어느 날 아침, 날이 밝으면서 봄이 태어났다. 여러 주일 전부터 쏟아지는 비, 무거운 구름, 흐린 하늘 밑에서 숨을 죽이고 준비를 해 오다가 해가 반짝 나는 첫 날 바로 우리 눈 앞에서 활짝 꽃이 핀 것 같았다. 나는 한 번도 대평원에서 봄이 태어나는 것을 목격해 보지 못했다. 이보다 더 미묘한 탄생은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는 내가 태어난 도시에서 경험한 바와 같은 결빙과 해빙이라든가 해방된 얼음 덩어리들이 요란하게 짜개지는 소리 같은 것리 있어 봄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묵은 풀잎 사이나 별로 깊지 않은 구덩이에서 물기 젖은 작은 목소리들이 나직하게 들리는 것이 고작이다. 여기서는 비탈진 곳이 거의 없으므로 물은 부드럽게 흐른다. 그렇지만 이 물기 젖은 나직한 노래들은 불어난 물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냇물보다 그것들을 맞아들여 그윽하게 즐기는 광막하고 고요한 벌판 속에서 더 큰 효과를 낸다.

지평선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마침내 꺼멓게 드러난 흙 위에 미래의 수확의 시침질 자국을 보일락 말락 그어 놓은 어린 초록색 싹들의 아주 가느다란 선이 나타났다. 새 한 마리가 다른 모든 소리를 정지시킨 광막한 공간 속 어디선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랫소리는 이 열린 고장의 모든 지점들로부터 동시에 들려 오고 있는 것 같아서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그 노래가 오는 곳을 가려 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 노래의 주인공이 바로 땅바닥 저 위의 전깃줄에 앉아서, 온 하늘 전체를 두리번거리면서 그를 찾고 있었던 우리를 조롱하는 듯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때도 있었다. 이 미묘한 봄, 이 우아한 봄은 나의 회한을 더욱 부채질했다. 나는 메데릭에게서 맛본 실패의 쓴맛을 달랠 길이 없었다. 우리 반 학생들 전체가 고분고분하고 정답게 굴어도, 거의 모든 학부형들이 이제는 나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어도 내겐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우리 반의 그 조그만 아이들 모두가 사랑으로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고 쳐다보고 있었지만 맙소사, 패배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나는 그 비길 데 없는 선물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그 시절 나를 붙잡고 있는 집착의 열정이 그러한 것이었으니 우리를, 우리의 심신을 온통 다 사로잡고서 우리를 으깨 놓거나 도야하는 집착들 가운데서 그 집착이 다른 것들 못지 않게 까다롭고 강압적인 것임을 이제 나는 안다.

 

그렇지만 내가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 어느 날, 잠시 창가에 팔을 고이고 있으려니까 멀리서 백마의 검은 갈기가 너울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번엔 그는 전속력으로 달려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릿느릿, 흡사 마지못해서, 간신이 참고 되돌아온다는 듯이 오고 있었다. 메데릭은 가스파르의 등에서 펄쩍 뛰어 내려서 깃대에 말을 비끄러 맸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왔다. 그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나는 이겼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책상으로 돌아가 앉아서 내 역할의 권위가 곁들인 기쁨의 표시로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래도 내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이리하여 내 전략이 성공하여 메데릭이 돌아온 것이었다. 거기서 그의 인생을 위하여 어떤 좋은 것이 생겨 난다면 내가 어느 면에선 그 원천일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잃었다가 되찾은 양의 우화야말로 우리 반의 경우에 얼마나 적절한 것인가를 깨달았고, 고분고분한 양 떼에 대해서보다 그에게서 더 큰 기쁨을 맛본다는 감정에 대하여 더 이상 저항하지 않을 수 있었다.

메데릭보다 그의 그림자가 먼저 교실의 문턱에 이르렀고, 그 다음에 메데릭 자신이 여러 날, 또 여러 날 동안 자신의 갈 길을 찾아 헤맨 저 골똘한 눈빛을 가진 길쭉하고 젊은 애어른의 모습으로 문틀 속에 들어섰다. 내 눈에 그는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하는 수 없이 이 곳으로 들어왔다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입의 윤곽, 두터워진 입술─아랫입술 위의 그 그림자는 어디로 갔는가?─은 그의 용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었다. 얼굴 아래 쪽은 이제 어딘가 로드리그와 닮은 점이 뚜렷했다. 그러나 부드럽고 쓸쓸하고 아득한 몽상 속에 잠긴 듯한 두 눈은 어쩌면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았을 순진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아직까지 어른과 아이가 서로를 제압하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맞물려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아무래도 함께 보조를 맞추고 갈 것 같지 않은 그 둘에 대해서 똑같이 마음 아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메데릭은 나에게도 그의 학우들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미끄러지듯 제 책상으로 가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서랍 밑으로 다리를 뻗을 자리가 충분치 않았다. 나는 정다운 말로 그를 맞아 주고 싶었지만 그토록 변한 그의 모습에 질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기 위하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업을 계속 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한 순간 가운데 통로로 지나가다가 나는 그의 책상 옆에 발걸음을 멈추고 수업을 따라가도록 노력하라고 일렀다. 그는 지적한 페이지를 순순히 열었지만 그 뿐, 정신을 집중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상상을 따라 지난 날의 여행 속으로 떠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정된 말뚝에 비끄러 매이듯 그 자신에게 매인 것 같았다.

그 날 하루의 시간은 한심하게도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렇지만 창 밖은 모든 것이 부드럽게 애무하는 듯 했다. 나는 그 날 아침에 등교하면서 이미 공기가 전혀 새로운 숨결처럼 해맑다는 것을 느꼈었다. 도처에서 소생하는 생명의 기운이 폭발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 하나가 솜털에 포근하게 덮인 버들강아지 한 다발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것이 나를 여간 감동시킨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 어린 식물의 생명이 이제 막 시작하는 작은 동물적 생명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면 마치 제 보드라운 솜털에 폭 싸인 채 깊이 잠든 작은 동물을 귀엽다고 쓰다듬는 것 같은 기분이 아닌가. 또 다른 한 아이는 등교하는 길에 녹기 시작한 눈 더미 가장자리에서 꺾은 그 해의 첫 사프란 꽃을 선물로 주었다. 입에 성인의 쓴 맛을 드러내고 있는 그 젊은 이방인만 우리들 가운데 섞여 있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다 같이 행복했을 것이다. 성인 속에 아이가 되살아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데 비하여, 어찌하여 어린 아이의 얼굴 속에 성인의 모습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이 그리도 가슴을 아프게 한단 말인가?

 

뜻밖에도 수업이 파하고 아이들이 모두 떠난 뒤에 메데릭은 가지 않고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필시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자신의 생각을 내 앞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잔뜩 거북해진 것 같았다. 오직 그의 두 눈만이 마치 그의 영혼의 어떤 탄식, 아니면 어떤 분명치 않은 비난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듯이 어둡고 쓸쓸하게 껌뻑이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견딜 수 없어져서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메데릭?"

이내 그의 입술이 부풀어 올랐다. 그 간단한 질문에 눈물이라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눈에 물기가 담기는 것조차 보인 적이 없는 그가 말이다.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린 탓으로, 그 청년 같은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 티가 너무나도 뚜렷하게 그의 얼굴에 되살아나는 느낌이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곁으로 다가가 긴 의자의 한 쪽 끝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를 떠올리며 자신의 기쁜 마음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앞을 보고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앉아만 있었다.

그 때 나는 우리가 언제 떠날지 알 수도 없는 기차를 타고 같은 좌석에 자리잡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여행자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눈 앞의 칠판에 나 스스로 써 놓은 교과 내용과 내가 그린 그림을 온통 부자연스러우면서도 방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서 마음이 흔들린 나머지 가볍게 떨기까지 하는 눈치인, 이 덩치가 너무 큰 소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게 바싹 매달려 있는 그 두 눈 속에서, 어린 생명들 가운데서도 가장 연약하고 가장 위태로운 생명으로 인간의 가슴 속에 이제 막 피어나, 아직 제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기쁨과 욕망으로 떨고 있는 첫사랑의 놀라움, 황홀, 고통이 번지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 자신 역시 이제 막 그 고비를 거쳐 온 것이 아니었더라면 메데릭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알 수나 있었을 것이며, 그가 자신의 혼미한 고뇌의 속내를 또렷이 들여다 보는 고역을 면하게 해 주기 위하여 그의 마음을 딴 데로 돌리게 하려고 그토록 애를 태웠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서 안정되고 확실하며 평상적인 그 무엇을 탐색해 내려고 애 쓰지만 모든 것이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기만 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는 그를 나는 도와 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자신이 알지도 못할 곳에 오게 된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메데릭은 낭패감에 못 이겨 그의 머리를 내 어깨 위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가 더 큰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멀리 해야만 했던 나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을 만큼 무한한 그의 고독을 확인하면서 나는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내게 기대면서 빠져 들어간 그 달콤한 무기력 상태에서 그를 깨워 일으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짙고 풍성한 머리숱에도 불구하고 가벼웠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나른하게 얹혀 있었다. 문득, 그는 마치 자신의 몸에 가해진 폭력과 경악의 자리가 바로 거기라는 듯이 제 가슴 쪽으로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아, 쌤! 대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마치 제가 쌤을…."

그는 혼란스러움 때문에 숨이 막히는 모양이었다.

"제 탓이 아녜요. 일부러 그런 건 아녜요."

나는 용기를 내어 그의 머리 한 쪽, 어두운 머리털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무도, 메데릭, 아무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아무도!"

어찌 된 영문인지 그가 분명히 깨닫기 전에 나는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서 의자의 등받이에 부드럽게 기대 놓았다. 나는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내 책상으로 와 앉았다. 봄의 따뜻한 열기 때문에 겨울의 무기력에서 깨어난 파리 한 마리가 무겁게 날면서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온 사방에 가서 툭툭 부딪쳤다. 두 눈을 꼭 감고 힘들게 숨을 쉬고 있는 메데릭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신음 소리라도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제 곧 태어나려고 하는 성인의 무자비한 압력에 밀려 죽어가는 한 어린 아이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기어코 달려가서 메데릭의 삶의 그 위협받는 몫을 구원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아주 조금 눈을 떴다. 내 자리로 돌아와 그와 나 사이에 내 직책과 책들과 공책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들어앉아 있는 나를 그는 보았다. 그의 짙은 속눈썹 가에 오랫동안 메달려 있던 두 방울의 눈물이 반짝거렸다.

이윽고 메데릭은 서투른 동작으로, 이번에는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서두르지도 않은 채 그냥 마지못해 학용품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그는 두세 번 동작을 멈추고 벽들과 칠판과 선반에 나란히 진열해 놓은 백과사전과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대륙이 펼쳐진 큰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떻게 작별을 해야 할지 몰라 통로에 가만히 일어서 있었다.

"제게는 좋은 한때였습니다" 하고 그는 공손하게, 딱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으나 갑자기 그의 목소리에 금이 갔다.

"왜 그런 말을 하지, 메데릭? 다시 학교에 오면 되잖아? 네 자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어."

그는 그의 말처럼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의 잘못으로 그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뜻인지 슬프게 머리를 흔들었다.

"왜 그래,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메데릭?"

그는 흥미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나 다른 곳이나 다를 게 없죠 뭐!"

"이러지 마, 제발!"

그는 갑자기 어두워진 눈으로 나를 향해 돌아섰다.

"아니 쌤과 무슨 상관이에요?"

한참 지난 다음 돌아서 가는 그의 등에다 대고 내가 중얼거렸다.

"그거야, 네가 뭐가 되느냐에 따라 무한한 고통일 수도 있고 큰 기쁨일 수도 있지. 그래서 나는 너를 모른 척할 수가 없어."

천천히 그는 한 번 더 나를 향해 돌아섰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으로 계속 걸어나갔다. 나는 한 번 더 그를 아프게 건드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말로 그를 따라갔다.

"넌 나에 대해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거지. 하지만 그 감정은 내가 너한테 걸고 있는 희망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마저 북돋아 주지 못해."

이번에는 그가 휙 돌아섰다. 앞으로 쑥 내민 그의 턱에는 로드리그 에마르의 모습이 역력했다.

"대체 당신에겐 아직도 뭐가 더 필요한 거예요?"

나는 그가 흥분을 진정시킬 시간을 주기 위하여 잠시 기다렸다가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그거야, 우리가 서로 헤어지기 전에─우리가 서로 헤어져야 한다면─저 산꼭대기에서의 동지를 다시 찾겠다는 거지. 난 그 동지를 다시는 못 만나게 될까, 메데릭?"

그는 머리를 쳐들고, 아무리 해도 감출 수 없는 원한과 불쌍하고 딱한 애정이 한데 섞인, 고통 가득한 눈길을 내게로 던졌다.

이윽고 그는 쫓겨나는 아이처럼 달음박질쳐서 학교에서 달려 나갔다.

 

 

9

 

머지 않아 어느 새 학년말이 되었다. 메데릭은 그토록 갑작스럽게 그를 자연의 부름에 눈뜨게 만들었던 그 열에 뜬 봄날 이후 여전히 학교에 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마음 속 깊이 그를 안쓰러워하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가 멀리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내가 떠나기 전에 그를 다시 만나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읍내에 자리가 생겨서 6월 말이면 아주 떠나게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한 학년도를 마감하는 것과 동시에 나의 전근을 계기로 우리 학교에서는 작은 축제를 가질 예정이었다. 나는 속으로 메데릭도 그 소식을 듣고 적어도 내게 작별 인사는 하러 오겠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얻게 된 그 중요한 자리에 만족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내 생애의 단 한 번 뿐이었던 경험을 떠나려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광막한 공간의 문턱에 자리잡은 이 마을과 나를 완전히 하나로 이어 주었던 그 직분에 대한 극도의 열광을 이제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발견할 것도, 얻을 것도 아직 엄청나게 많겠지만 이미 나의 등 뒤에는 돌이킬 수 없게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을, 인생은 한 손으로 주면서 다른 한 손으로 다시 빼앗아 간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나의 의기양양한 기분이 그 때문에 다소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나는 미래가 끊임 없는 획득의 연속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아직, 성취나 단순한 성공의 길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서는 매번 그보다 더 귀중한 것일지도 모르는 행복을 떨쳐내게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축제는 소박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학교를 나뭇잎과 꽃들로 장식할 생각을 했다. 학부모들은 맛있는 과자와 케이크를 보내 왔다. 어떤 어머니는 정해진 시각에 잔과 잔받침들이 가득 담긴 큰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고, 다른 어머니는 커피 병을 식지 말라고 두툼한 수건으로 싸 가지고 왔다. 학부형회에서도 대표를 보냈다. 회의 대표인 마을 대장장이는 모루를 두드리느라 거칠어진 손을 이리 비비고 저리 비비면서 간단한 연설을 했다. 필경 미리 준비한 것이겠지만 즉흥적으로 떠오른 말인 체 했다. 그는 젊음으로 인격화된 교육은 너무 외지고 가난한 그들의 마을까지 찾아오는 일이 드물어서 나이가 많은 여교사들이 부임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했다. 그 분들은 물론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때로는 너무 엄격하거나 너무 일에 지쳐 있다. 그런데 처음으로 '젊디 젊은' 여선생님이 오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음이란 말은 언제나 그 뒤에 '번득이는 빛'을 남기는 법이니 말이다. 이런 요지의 말이었다. 나는 비참하고 움츠러든 기분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내가 각자에게 전해 주었다는 그 번득이는 빛보다는 오히려 나의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미숙함을 생각했다.

한편 아이들은 스스럼 없이 속마음을 곧장 털어 놓았다. 한 여자 아이는 꾸밈 없는 충동을 그대로 드러내며 내 목에 와서 매달리면서 울었다.

"선생님이 이렇게 떠나시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니, 걱정 말아" 하고 나는 그 어린 여자 아이를 껴안으면서 말했다.

"이제 다른 여선생님이 오실 거야. 너희들은 그 분을 더 좋아하게 될 텐데 뭐."

"아" 하고 그 아이는 내가 마치 모든 사랑에 한결같이 담겨 있는 배타적 감정을 모독하기라도 했다는 듯 아주 나무라는 어조로 말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물론 나는 내 뒤에 아쉬움과 슬픔을 남기고 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내 생애에 있어서 그 뒤 어디에서도 그만한 아쉬움과 슬픔을 남긴 적이 없었다. 마치 세상의 그 장소는 내게 있어서 가장 비통한 연대 의식의 고장이었던 것만 같다. 울고 있는 그 작은 여자 아이를 껴안아 주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면서, 나는 어떤 다른 아이의 슬픔을 달래 주지 못한 내 마음을 그 아이에게서 위로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가장 많은 사람들에 에워싸여 있는 때에도,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런 때에, 나는 지금 초록이 짙어지고 있는 평원 저 멀리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한 젊은 기사의 출현을 살피며 기다렸다. 나는 메데릭을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 필시 그의 아버지가 그를 못 가게 붙잡고 이제는 나를 멀리 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와 이 아이들이 영원히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친자식들처럼 내 마음 가까이 보듬고 있던 이 아이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나의 아이들이었고 내가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잊어버렸을 때라도 나의 아이들일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때로는 혈연 관계를 초월하는 가장 신비스러운 소유의 힘에 의하여 내가 그들의 한 부분이듯이 그들 또한 나의 한 부분인 것이다. 나의 삶은 그 가슴 아픈 이별의 연속 끝에 결국은 그 무슨 지속적 애착으로 인도하려는 것인가?

나는 크고 작은 아이들에게 키스를 해 주었다. 심지어 그 시간의 감동으로 인하여 격앙된 학부모들까지도. 한 어머니는 자기 아이들의 학업이 크게 향상된 것에 대하여 나에게 감사하고 나서, 메데릭 에마르가 '광주리 전체를 다 썩게 만드는 몹쓸 사과'가 되기 전에 그를 '솜씨 좋게 제거해 준' 것에 대하여 나를 치하하여 마지않는다고 했다. 내가 어찌나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노려보았는지 그 여자 역시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이제 막 건넨 치하의 말을 또 한 번 반복이라도 할 용의가 있다는 듯 수상쩍은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그 날 메데릭에 대하여 나온 이야기는 그게 전부였다. 마치 그는 산 채로 가장 깊은 망각 속에 매장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혼자 남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책상에 앉았다. 나는 사방의 벽들과 칠판과 메데릭의 자리, 그리고 창문 저 쪽 너머의 끝없이 먼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곳을 떠났다. 나는 나의 작은 마을 학교를 열쇠로 닫아 걸었다. 나는 지나는 길에 학사 위원회 사무장에게 열쇠를 건네 주었다. 그는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리라. '개명된 도시의 좋은 자리로 옮겨 가는 행운을 잡았는데 여기 같이 궁벽한 촌구석을 아쉬워하다니 미쳤어요? 게다가 우리들과 같이 한두 해 더 썩었다가는 우리와 비슷해지기 시작할 겁니다. 열성이나 마음 속의 불 같은 것은 오래 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런 것은 삶이 초원의 모닥불처럼 순식간에 눌러 꺼 버린답니다.'

 

이튿날, 몇몇 아이들이 역으로 나와 내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 때문에 힘이 나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한 편으로는 더욱 괴로웠다. 한 눈에 보아도 그 가운데 메데릭은 없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나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차 밖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 쪽 하늘을 배경으로 그리도 보잘것 없는 그 작고 연약한 실루엣들이 마치 기슭에서 멀어지는 누군가를 향하여 그렇듯이 나를 향하여 커다랗게, 자기 자신들보다도 더 커다랗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시야 속에서 무한대의 플랫폼에 서 있는 그들, 저 연약한 아이들은 점점 더 작아져 갔다. 마치 내가 그들을 버리고 떠나는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벌써부터 그들 위로 저 짓누르는 듯한 음울함과 침묵의 광대한 공간이 닫혀 가면서 외톨이가 된 내 어린 아이들을 모든 것으로부터 절연시켜 놓는 것이었다. 아마도 평원의 그런 외딴 마을에서 이름 없는 여교사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없이는 어린이들에 대하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느낌,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추억을 그들의 삶 속에 남긴다는 황홀한 확신, 그리고 또한 그 아이들과 헤어지는 격렬한 아픔, 어찌나 단단히 맺어져 있는지 마침내 다시 숨을 쉬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푸는 것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슬픔의 매듭, 내가 경험한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벌써 거의 분간하기 어려워진 그 조그만 실루엣들에 정신이 쏠려 있으면서도 나는 갑자기 또 다른 한 아이, 우울한 표정의 한 아이를 생각했다. 그는 어쩌면 저 드넓은 평원 어디에 발걸음을 멈추고 작은 언덕 꼭대기로부터 나를 실은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으리라. 그러자 내 반 아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기쁨이 내 눈에는 거의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였다. 나는 그가 나의 영향력으로부터 그리 쉽게 자유로워지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메데릭의 말 한 마디, 어떤 행동을 기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차는 어느 정도 힘차게 달린 다음 이내 마을의 끝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오로지 그 쪽의 이웃 마을 하나만을 위하여 건설한 것으로 철도와 접하는 짧은 측선이 거기서 주선과 합쳐지는 것이었다. 기차의 차창이 내리더니 공구 보관실에서 끝이 굽은 강철 막대기 하나를 집어서 그것을 이용하여 지선과 접속시키고 나서 공구를 제 자리에 집어넣고 차에 오르자 드디어 우리는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우리는 후진하여 옆 마을로 가는 것이었다. 그 마을은 객차가 꽁지 쪽으로 접근해 오도록 장치해 놓은 철도청을 결코 용서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것이 너무나도 심각한 모욕이라고 판단하고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자기네 마을에도 기차가 머리 쪽으로 접근해 오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진정에 진정을 거듭했다. 나는 길을 떠나서, 그토록 화가 치밀어 있는 그 마을 쪽을 향해 올 때마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여 소리 내어 킬킬대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소마저 지을 기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그저 삼사 분 간 머물러 있었다. 승객 한 사람과 짐 몇 개를 싣는 시간 정도를 지체한 다음 이번에는 앞쪽부터 되짚어 왔다. 나는 훤히 트인 들을 그저 따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 들에는 온갖 색깔의 작은 꽃들이 무수하게 피어나 6월 말 경이면 이 고장을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게 채색된 곳의 하나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내 생각은 딴 데 가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 우리 옆으로 철길과 나란히 달리고 있는 흙길은 바로 메데릭과 내가 베를린 마차를 타고 광풍을 헤치며 더듬어 왔던 길이라는 생각에 그 때의 추억이 엄습해 왔다. 오늘 그 길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그 사나운 밤의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열광적인 억양이 깊이 배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날 밤 랜턴의 유리에 비쳐 보이던 모습 그대로 긴장되고 놀란, 그러면서도 감격을 이기지 못하던 얼굴의 메데릭을 다시 그려 보았다. 지금 그 이미지가 어린 밀이나 귀리밭 여기저기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들을 배경으로 새겨진 채 요동치는 기차에 흔들리며 앞서 달리고 있었다. 아마 메데릭의 싹트는 연정을 부추길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하면 크게 슬퍼질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내가 바랐던 것, 그것은 바로 전 생애에 걸쳐서 옛날의 나 자신이었던 어린 아이를 이끌어 주는 착한 별처럼, 멀리서 찬양 받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침내 우리는 주선과 합치는 지점에 되돌아 와 있었다. 기차의 차장이 내리더니 공구 보관실에서 접속 기구를 꺼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장소를 향하여 마지막으로 눈을 들다가 나는 벌판의 저 먼 곳, 기차의 끝, 뒤로 젖힌 큰 모자가 목덜미에서 춤을 추는 가운데 말 잔등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하고 달려오는 메데릭을 알아 보았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던 날과 똑같은 옷차림을 한 아이, 물결치는 검은 갈기의 백마, 그 주위의 광대하고 텅 빈 고장, 바로 이렇게, 내가 메데릭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갖게 될 이미지는 그가 처음 학교에 나타나던 때의 이미지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구성되어 내 머릿속에 찍혀지게 될 것이었다.

벌써 차장은 선로의 접속을 마쳤다. 그는 공구를 제 자리에 넣고 공구실의 문을 닫았다. 기관실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바람을 쏘이고 있던 기관사에게 그는 출발 신호를 했다. 그리고 기차의 꼬리에 펄쩍 뛰어 올라 탔다. 소규모의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데릭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온 마음을 다하여 그가 어서 빨리 우리를 따라잡도록 도왔다. 그 때 나는 열차가 그리며 달리게 될 곡선을 끊고 질러 오기 위하여 그가 대각선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보았다. 말 안장의 앞 쪽에 그가 손으로 보호하고 있는 어떤 물건이 보이는 것 같았는데, 내게는 왠지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메데릭은 우리를 앞지르는 데 성공했다. 기차가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다 돌았을 때 나는 그가 어떤 나지막한 언덕 꼭대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등 뒤에는 내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광대한 창공이 펼쳐져 있었다. 메데릭은 눈으로 정신없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 시절, 기차를 탄 사람들은 때가 여름이었는지라 차창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여행하곤 했다. 메데릭은 반쯤 창 밖으로 내민 내 얼굴을 재빨리 알아 보았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공중으로 높이 쳐들더니 탄력을 받도록 두세 번 휘휘 돌리다가 이윽고 확실한 동작으로 나를 향하여 창문을 통해서 곧장 내 무릎 위로 집어 던졌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들꽃 다발이었다. 그러나 나비처럼 가볍고 간신히 한데 묶여 금방 사방으로 흩어져 버릴 것 같으면서도 풀어지지 않은 그 꽃다발은, 다만 약간만 열린 모습으로 아직 이슬에 젖은 신선한 꽃잎을 드러내 보이면서 내 위로 날아와서 떨어졌다. 나는 그렇게 많은 종류의 들꽃들이 한데 모인 꽃다발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 주변에 들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여름 동안 줄곧 그늘에 가린 시냇가의 저 하베네르 꽃들처럼 생각지도 못한 구석 깊숙한 곳에 숨어만 있는 다른 꽃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자신의 봉헌물에 그 아름다운 계절의 어느 작은 꽃 한 가지도 빠지지 않도록 이른 아침부터 숲 속으로, 마른 땅 젖은 땅으로, 심지어 산으로 올라가는 첫 번째 비탈에까지 찾아 헤매는 메데릭을 상상해 보았다.

우리들의 두 눈이 서로 마주쳤다. 찌부러진 모자 아래의 얼굴은 내가 보기에 정중하고 심각하며, 찬물 속의 송어들이 손 안에 들어와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을 때… "정말 신비스럽죠, 쌤?" 하고 내게 물었던 그 날처럼 상냥한─그러나 훌쩍 커 버린─ 모습이었다. 그를 향하여 내 입에서는 내 영혼 속으로 찾아오는 오직 한 마디 말이 소리 없이 만들어졌다. "아! 메데릭! 메데릭!"

그는 투명한 하늘 높이 팔 끝의 손을 쳐들었다. 지금을 위한, 그리고 영원한 날들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손짓이었다. 가스파르도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두어 번 크게 흔들어 나름대로 인사를 했다. 기차의 그 다음 곡선이 그들을 영원히 내 시야에서 앗아갔다.

나는 무릎 위에 얹어 놓은 꽃다발에 눈길을 던졌다. 보드라운 풀줄기가 리본처럼 주위를 둘러 묶고 있어서 아직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섬세한 향기가 배어 들었다.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벌써 죽어 가기 시작하는 젊고 연약한 여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작품 해설

고요하고 광막한 모험, 가브리엘 루아

 

 

2001년 여름, 처음으로 나는 퀘벡의 몬트리올을 찾아갔다. 오래 전부터 별러 온 일이었다. 역사와 환경이 어느 면 우리 한국 현대 문학사와 비슷하면서 우리에게는 미지의 대륙이나 마찬가지인 퀘벡의 불어권 문학의 대체적인 윤곽이나마 살펴보고 싶어서였다. 마침내 몬트리올 대학교 퀘벡 문학 연수고의 너그럽고 자상한 도움에 힘입어 많은 작품과 자료들을 접하고 여러 문인과 교수들의 안내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작품들은 나를 매혹했다. 나는 그 다음 해 <현대 문학> 2월호에 퀘벡 문학의 프로필과 거기서 만난 문인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한 바 있다. 여기에 번역하는 가브리엘 루아의 소설은 그 기회에 건져 올린 첫 번째 수확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독자들이 최초로 접하는 불어권 퀘벡 문학의 한 대표적 모습인 것이다. 앞으로 기회가 있고 힘이 닿는다면 그 광대한 땅이 생산한 보다 더 많은 작가와 작품들을 우리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가브리엘 루아를 '캐나다 문학의 큰 부인'이라 부른다. 그녀는 무엇보다 <싸구려 행복(Bonheur d'occasion)>의 저자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이 섬세하고 비밀스러운 작가의 길고 고독한 탐구와 창조의 한 출발점에 불과하다.

가브리엘은 1909년 3월 22일 캐나다 중부 마니토바 주의 생-보니파스(Saint-Boniface)에서 출생했다. 퀘벡 출신으로 이 곳으로 이주한 식민청 관리 레옹 루아와 멜리나 랑드리의 여덟 째, 즉 막내 딸이었다. 이 곳은 산이 거의 보이지 않고 가없는 평원만이 이어지는 광대하고 막막한 지역이었다. 이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 속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녀의 영혼 속에 깊은 자취를 남겼다. 더군다나 불어권 가정으로부터 뿌리가 뽑힌 채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지역의 문화와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성장 과정은 그녀의 문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15년에서 1928년까지 고향에서 초등, 중등 과정을 마쳤다. 학교에서는 영어와 불어로 가르쳤지만 주 정부는 불어로 하는 수업을 하루 한 시간으로 제한했다. 그 후 주 수도에 있는 위니펙 사범 학교에서 1년 간 교육학을 전공하고, 1929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자 마니토바 주 남쪽 마르샹, 카르디날, 그리고 나중에는 고향 가까운 프로방셰 같은 소읍에서 홀로 교사 생활을 하며 어렵고 고독하게 지냈다. 그가 가르치는 대다수 학생들은 학교에 입학할 때 프랑스 말도 영어도 못하는 외국 이민의 자녀들이었다.

교사 생활을 하는 한편 그녀는 '몰리에르 서클' 극단의 배우로 연극 활동에 열정을 바쳤다. 그녀의 서클은 오타와 연극 페스티벌에서 두 번이나 수상했다. 가브리엘은 1934년 처음으로 <위니펙 프리 프레스>에 단편을 발표했다. 이 때부터 그녀는 연극 배우와 작가 두 가지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다. 결국 1937년 프티트-풀-도에서 여름 동안의 마지막 교사 생활을 청산하고, 가을 마니토바의 다민족 문화의 다양성과 유별난 풍경의 기억을 가슴에 담은 채 유럽으로 떠난다.

18개월 간 젊은 그녀는 얼마 안 되는 저금으로 런던, 파리 등에 머물면서 연극 배우 수업과 여행에 몰두한다. 마침내 배우가 될 희망을 접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는 신문에 처음으로 기사 몇 편을 발표한 다음 마지막으로 프로방스 지방을 여행한다.

1939년 캐나다로 돌아온 서른 살의 처녀는 불어권인 몬트리올에 정착, 몇몇 잡지에 기사와 단편 소설들을 기고하며 어려운 생활을 한다. 드디어 1941년부터 5년 동안 월간 <농업 소식> 지에 기자로 취직하여 많은 르포 기사를 쓰고 몇 편의 단편을 발표하는 한편 퀘벡, 캐나다 서부 등지로 잦은 여행을 하고 특히 몬트리올의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을 면밀히 관찰, 장차 첫 소설의 밑그림이 될 삶의 디테일들을 꼼꼼히 기록한다. 그리하여 기자 생활 튼튼이 써서 상하권 500여 페이지로 발표하게 된 처녀작 소설이 <싸구려 행복>이었다. 그녀가 36세 되던 1945년이었다.

 

이 첫 소설은 출간 즉시 큰 성공을 거둔다. 몬트리올의 남서쪽 가난한 변두리, 기찻길과 운하가 심장부를 통과하는 생-앙리 구역을 무대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닫혀진 세계, 가난, 기찻길 건너 화려한 진열장 같은 부자 동네의 매혹 등 사회학적 현실을 정치하게 그렸다.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발표된 책들 중에서 가장 진정하고 가장 대담하고 가장 완성도가 높은 책', '최초의 위대한 도시 소설', '퀘벡의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최초의 책'이라는 평과 함께 2000부가 발매 즉히 매진되었다. 한편 그 해 12월, 뉴욕 굴지의 출판사와 계약에 성공하는 한편 미국에서(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독서 클럽의 사장이 번역 원고를 읽고 '이 달의 책'으로 선정하기에 이른다. 1946년 12월에 이 책의 영어 번역판 <The Tin Flute>이 출판되자 무려 70만 부가 팔려 나가고, 11만 불의 수입이 들어온다. 캐나다에서 발표된 소설 중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어 헐리우드의 유니버셜 영화사가 영화 제작권을 구입하는가 하면, 1946년 아카디아 프랑스 아카데미는 작가에게 메달을 수여한다. 이어 캐나다 총독상까지 수상함으로써 작가 가브리엘 루아의 영광은 이어진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플라미라옹 출판사가 이 소설의 판권을 구입하고 페미나 상 심사위원인 장 드 팡주 공작 부인이 몬트리올을 방문한 기회에 작가를 만난다. 드디어 가브리엘은 캐나다 작가로는 최초로 파리의 유수한 문학상인 페미나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프랑스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는 않았다. 성공에 뒤따르는 심리적 부담도 컸다. 뉴스의 표적이 되자 이 수줍은 작가는 캘리포니아로, 로우든으로, 생-보니파스로, 특히 페미나 상이 수여될 때는 스위스로 자리를 피했다. 너무나 급작스럽고 강력한 조명은 그녀에게 사생활의 방해 뿐만 아니라 일종의 위협 혹은 저주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제 진짜 작가가 되어야 하는구나! 하는 부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도처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우선 그 출신(중부 영어권인 마니토바)으로 인하여 퀘벡 문단의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삶과 인물의 비밀스러운 부분으로 인하여, 일반 대중의 호기심으로부터 한사코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로 인하여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방인이었다. 대중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녀는 독자가 오로지 작품 및 글쓰기 자체와 대면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대중 앞에 나타나기를 피했다. 작가가 대중에게 보이지 않을수록 오히려 작품이 대중에게 더 강하게 다가든다는 것이다." 그의 전기 작가 프랑수아 리카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싸구려 행복>은 30년 전 또 한 사람의 이방인, 즉 프랑스 출신의 루이 에몽(Louis Hémon)의 <마리아 샵들렌>에 이어 퀘벡 소설사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다. 루이 에몽이 먼 프랑스에서 왔듯이 영어권의 마니토바에서 온 가브리엘 루아는, 퀘벡 문학의 상투성과 문화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 발목을 잡고 있던 어둡고 무거운 전통의 전철을 밟지 않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바다 건너 알제리에서 온 카뮈가, 과들루프에서 온 생-존 페르스가, 루마니아에서 온 이오네스코가 프랑스 문학에서 그랬듯이.

그녀는 태연하게 도시의 벌거벗은 현실, 단순한 현실, 동시대의 현실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이른 바 민족적 현실'이라는 편견에 한눈을 팔지 않고 구체적인 있음 그 자체를 보고 단숨에 찾아 내는 정직하고 직접적인 시선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과거 개척자들의 '농토'가 현재 도시 생활의 '공장'으로 대체되었다. 현대의 도시가 마침내 그 나름의 시를 획득한 것이다. 그녀는 일체의 선입견, 일체의 대의나 주장으로부터 해방된 시선, 오직 냉엄한 소설가의 시선으로만 현실을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향토주의냐 이국취향이냐의 선택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퀘벡 문학의 진정한 '현대'를 개막할 수 있었다. 그 새로운 어조, 자신의 작품을 구상하고 사회적으로 위치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서 1960년대까지 오랜 세월 동안 이 선구적 작가의 영향력은 지속될 것이다.

 

1947년 고향의 교회에서 뒤늦게 결혼한 그녀는 남편인 의사 마르셀 카르보트와 함께 퀘벡을 떠나 파리에서 1년, 파리 근교의 생-제르맹-앙-레에서 2년을 체류한다. 그 곳에서 집필하여 1950년에 발표한 소설이 <물닭이 둥지를 트는 곳(La Petite poule d'eau)>이다. 캐나다 중서부, 자신이 마지막으로 교사 생활을 했던 마니토바의 북쪽 섬에 외따로 사는 가족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싸구려 행복>이 그려 보이는 동부의 도시 하층민들의 폐쇄적 지옥과는 반대로, 고독하지만 활짝 열린 자연 속의 낙원과 그 속에서의 자유와 일체감을 그리고 있다.

 

캐나다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몬트리올에 정착했다가 퀘벡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죽는 날까지 살게 된다. 이 때부터 그의 삶은 오로지 소설의 집필에만 바쳐졌다. 그의 생애는 오직 수많은 작품의 집필과 발표, 그에 따른 영광스런 수상의 기록으로 점철된다. 1954년 긴 침묵과 고통스런 집필 과정 끝에, 단순하고 착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견디지 못하는 한 몬트리올의 은행 수납계 직원의 고뇌를 그린 <알렉상드르 셴베르(Alexandre Chenevert)>를 발표한다(<The Casher>라는 제목으로 영역).

그리고 이듬해에는 뒤이어 <데샹보 거리(Rue Deschambault)>를 내놓는다. 생-보니파스를 무대로 동일한 화자가 들려 주는 짤막한 18편의 삶의 이야기(어린 시절부터 18세까지)로 구성된 자전적 단편집이다. 이제 그의 작품 세계는 점차 내면화 과정을 밟는다. 마치 초기 소설의 치열한 행동성에 뒤이은 고요한 명상과 자기 인식의 과정 같은 시기라 하겠다.

그녀의 작품은 이처럼 도시와 시골, 동과 서, 남과 북, 추방과 귀환, 반항과 화해, 그리고 장편과 단편, 픽션과 자전적 이야기 사이를 왕래한다. 1956년에는 그의 전 작품에 대하여 뒤베르네 상이 주어진다. 그 이듬해에는 <데샹보 거리>의 영역판 <Street of Riches>로 캐나다 총독 상을 수상하고, 샤를르 부아의 프티트 리비에르 생-프랑수아 마을 강변에 새 주택을 구입하여 이제부터는 항상 그 곳에서 여름을 보낸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이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여름 집은 중요하다.

 

1961년 <비밀의 산(La Montagne secérte)> 발표. 일생 동안 같은 산을 그리는 독학의 화가 이야기로 예술 창조의 알레고리다.

1964년 언니 안나의 죽음을 계기로 애리조나 여행.

1966년 <알타몽의 길(La Route d'Altamont)> 발표. 이 작품은 앞서의 <데샹보 거리>와 쌍을 이룬다. 같은 화자 크리스틴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번에는 여섯 살에서 청소년기까지의 이야기를 네 가지 시기로 나누어 단편집으로 묶었다. 그 중에서는 특히 단편 <노인과 아이>가 감동적이다.

1968년 퀘벡의 라발 대학이 그녀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캐나다 예술 위원회가 그녀의 전 작품에 대하여 메달을 수여한다.

1970년 에스키모에 관한 소설 <휴식 없는 강(La Riviére sans repos)>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뉴욕의 출판사로부터 거절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같은 해 언니 베르나데트의 임종을 보기 위하여 고향 생-보니파스로 여행한다.

1971년에는 그녀의 전 작품에 대하여 가장 영예로운 퀘벡 다비드 상이 수여된다.

1972년에 발표한 <유쾌했던 그 여름(Cet été qui chantait)>은 작가가 여름을 보내는 강가의 집과 그 자연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샤를르 부아의 생-로랑 강가를 무대로 자연과 동물을 찬양하는 19편의 짧고 시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퀘벡에서는 좋은 평을 얻지 못했고 이로 인하여 작가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의 만년은 어둡고 쓸쓸했다. 건강이 나빠졌고 남편과의 사이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그의 언니 아델은 증오와 질투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 비탄과 고통은 1975년의 <세상 끝의 정원(Un jardin au bout du monde)>에 투영된다. 이민자들을 주제로 한 네 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표제와 같은 제목의 단편이 가장 감동적이다. 그녀는 만년의 무너지는 건강과 개인적 고통과 싸우면서 뛰어난 작품들을 선보였다.

1977년에는 여기 번역 소개하는 중편이 포함된 작품집 <내 생애의 아이들(Ces Enfants De Ma Vie)>을 내놓는다. 발표 즉시 다시 한 번 더 캐나다 총독 상을 수상하고 비평계의 호평을 받았으며 독자들 사이에 큰 성공을 거둔다.

1978년 <지상의 여린 빛(Fragiles lumiéres de la terre)> 발표. 캐나다 문학에 대한 공로로 몰슨 상을 수상한다.

1979년 어린이들을 위한 앨범 <짧은 꼬리(Courte-Queue)>를, 1982년 <무엇 때문에 고민하나, 에블린?(De quoi t'ennuies-tu, Evlyne?)>을 발표한다. 소설을 구성하는 두 편의 이야기 중 죽음을 앞둔 오빠의 병석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타고 마니토바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주인공 에블린의 여행 이야기인 첫 번째 소설이 감동적이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발견한다. 그의 오빠는 주위에 일종의 낙원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가브리엘 루아의 생애 마지막 수 년은 <비탄과 환희(La Detresse et l'Enchantement)>란 제목의 방대한 자서전 집필에 바쳐진다. 원래 4부로 계획된 이 작품은 처음 2부만이 완성되었다. 부모의 삶을 그리는 도입부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 학업, 여교사의 직업, 유럽 체류, 그리고 1940년 경 몬트리올로 돌아와 <싸구려 행복>의 집필을 준비하는 데서 끝난다. 바탕에 깔린 비탄과 절망, 그러나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 영혼 깊숙한 곳이 들여다 보이는 듯한 인물들의 초상이다.

 

가브리엘 루아는 1983년 7월 13일 퀘벡 시립 병원에서 74세로 눈을 감는다. 미완의 자서전 <비탄과 환희>가 사후에 발간되었다. 1984년 <문학 연구(Etudes Littéraires)> 지는 겨울 호를 이 작가 특집에 할애하고 프티트 리비에르 생-프랑수아 근처의 산 이름이 '가브리엘 루아'로 명명된다. 1987년 프랑스 보르도 대학 캐나다 연구소가 '하나의 나라, 하나의 목소리, 가브리엘 루아'라는 제목으로 연구 발표회를 개최하고, 1989년 몬트리올의 <목소리와 이미지(Voix et Images)> 지가 봄 호를 이 작가 특집으로 바친다. 10월 생-보니파스에서 위니펙 북서쪽으로 3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워터헨 리버 섬이 '가브리엘 루아' 섬으로 명명되었다. 1996년 멕길 대학의 프랑수아 리카르 교수가 방대한 전기 <가브리엘 루아, 그의 삶의 이야기(Gabrielle Roy, Une histoire de sa vie)>를 출판했다.

 

 

<내 생애의 아이들>은 일견 사범 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 여교사와 초등학교의 어린이들 사이의 소박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듯 하지만, 실은 67세의 원숙한 대가가 쓴 감동적인 성장 소설인 동시에 인생에 대한 찬미의 대서사시다. 이 작가의 작품 세계를 특징짓는 환기력과 문체의 질감, 그리고 거기서 솟구쳐 오르는 고즈넉한 감동이 어떤 것인가를 어느 작품보다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젊은 시절 마니토바에서 여교사로 지내던 시절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이야기들을 여섯 편의 중·단편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중·단편들을 단순히 한데 묶어 내놓은 흔한 단편집이 아니라 자연스러우면서도 정교한 어조와 통일성을 갖춘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18세의 젊은 여교사가 화자로 등장하여 언뜻 보기에는 산만하게 분리된 듯한 여러 중·단편 전체를 관통하며 일관된 목소리로 조율한다. 여섯 편의 이야기들은 각각 빈센토, 클레르, 닐, 드미트리오프, 앙드레, 메데릭 등 한 명의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이 각각의 인물들은 어린 시절의 초상인 동시에 인간과 인생 전체의 초상이다. 이 소설은 그래서 어린 빈센토와의 첫 만남의 드라마에서 시작하여 성큼 커 버린 메데릭과의 가슴 저린 헤어짐으로 끝나고 있다. 화자인 젊은 여교사는 빈센토와 '성탄절의 아이' 클레르를 통하여 첫 만남의 낯섦과 두려움,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그만큼의 돌연한 기쁨과 막무가내의 애착과 호감을 경험한다. '종달새' 닐과 드미트리오프를 통해서는 말이나 행동을 넘어서는 침묵의 공감, 인식과 예술의 힘을, '집 보는 아이' 앙드레를 통해서는 성장의 고통과 동시에 고독 속에서의 용기와 자기 헌신을, '찬물 속의 송어'의 메데릭을 통해서는 사춘기 특유의 감각적 떨림,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힘과 고통을 경험한다.

 

이 소설을 특징 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황량하고 광대한 평원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주 무대인 학교와 그 무대를 에워싸는 사회 문화적 환경과 자연적 환경이다. 학교는 화자인 여교사와 어린 학생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다. 어린 아이들은 매일 학교 밖으로부터 왔다가 학교 밖으로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여교사는 교실의 자기 자리에 앉아서 아침이면 창문 밖으로 아이들이 '하늘 저 밑으로 가벼운 꽃장식 띠 같은 모양을 그리며 하나씩 하나씩, 혹은 무리를 지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또 저녁이면 창문 밖으로 '굽이돌다가 곧 끝간 데 없는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학교는 사랑과 인식의 출발점이다. 거기서 교사와 아이들은 서로 문자를 배우고 노래를 배우고 타자의 존재를 배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따뜻한 사랑으로 보호된 이 학교가 때로는 자유를 구속하는 '감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가정의 오래 된 습관의 끈에서 떨어져 나온 빈센토에게 학교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긴 방학이 지난 뒤 며칠 동안은 다른 아이들도 자유에 맛을 들였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되면 '꼭 감옥으로 들어온 기분'이 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학교를 감금의 장소로 느끼는 인물은 '갈기가 검은 흰색 종마인 가스파르'의 등에 실려 광대한 대지를 마음껏 달리고자 하는 '전문 몽상가' 메데릭이다. '투운 데서 안으로 들어오는 작은 털짐승 특유의 그 기분 좋은 냄새를 실어 오는' 다른 아이들 이상으로 메데릭은 지성의 감옥으로 끌려 들어온 야성의 상징 바로 그것인 것이다. 혼혈 인디언 여자와 백인의 피를 받은 그 소년은 교실에 앉아서도 '금방이라도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 듯 자유로운 꿈 속에서 무한히 먼 곳으로' 몽상 속을 헤매고 있다. 여교사는 그를 바라보면서 "결국은 사로잡히고 말 순진한 짐승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로잡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 짐승에 대하여 가슴 아픈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소년의 가슴 속에 일고 있는 야성의 바람을 다스려 수련과 인식의 장으로 불러들여야 할 교사가 소년을 '상상의 여행'에서 불러 내 오는 것을 망설이기에 이른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청소년기의 몽상에서 겨우 벗어나 아직 성년의 삶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여교사 자신이 때로는 학교를 일종의 '함정'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교실에 서서 내 어린 학생들이 세상의 새벽인 양 신선한 들팜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학교라는 함정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로 달려가서 영원히 그들의 편이 되어야 옳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이처럼 어린이들의 학교는 만남의 자리인 동시에 헤어짐의 자리요, 사랑과 인식의 장소인 동시에 때로는 감옥과 함정이라는 특유의 양면적 성격을 지님으로써 더욱 실감나는 인생 보편의 은유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이 학교에 오는 학생들이 이민자들의 다문화 집단이라는 사실은 이 소설을 특징짓는 주요한 사회 문화적 환경을 말해 준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낯선 세상에 내딛는 첫 발이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다 많든 적든 처음 학교에 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맡은 이민자 출신 꼬맹이들 중 몇몇의 경우, 그에 더하여 학교에 오자마자 귀에 설기만 한 언어로 말하는 소리를 듣는 혼란스러움까지 맛보아야 했다."

그들은 모두가 광대한 캐나다 중부 마니토바 평원으로 새로운 삶과 꿈을 찾아 모여 든 가난한 이민들의 자녀들이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학교는 그러므로 새로운 타자만이 아니라 귀에 선 언어, 이질적인 문화와의 두려운 접촉과 이해의 출발점이다. 플랑드르 억양을 버리지 못한 로제 베르헤겐, 소용돌이처럼 이탈리아 말로 어린 애정을 쏟아 놓으며 '마늘과 라비올리와 감초 냄새'를 물씬 풍기는 빈센토, '약간 흐릿하고 쓸쓸한 상아색의 여린 빛으로 절어 있는' 오래 된 아일랜드 산 손수건을 뒤늦은 선물로 들고 온 클레르, 폴란드계 유태인 출신인 프티-루이, 이름부터 이국적인 니콜라이, '자기 어머니의 언어'로 노래 부르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닐,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어떤 힘, 옛날에는 집단적이고 신비스러우며 무한한 것이었던 어떤 열정'에 의하여 글씨를 쓰는 어린 드미트리오프, 프랑스 오베르뉴 출신의 꼬마들, '프랑스에서 가져온 리넨 시트'를 꺼내어 선생님의 침상을 마련하는 앙드레, 인디언 혼혈인 메데릭…. 이들 각자는 서로에게 우선 이방인들이다. 교사 역시 그들에게는 이방인이다. 어느 날 여교사가 저녁 산책 길에 드미트리오프 집안이 사는 동네로 들어선다. 벌써 "창문 뒤에서 손들이 움직였고 커튼 뒤에서 지켜 보던 얼굴들이 놀란 눈길, 때로는 적대적인 눈길로, 오래도록 나를 따라 다녔다. 여기 폴란드, 러시아 울타리 안으로 저 젊은 캐나다 외국 여자가 무엇 하러 왔다지?"

그들에게 학교는 단순한 배움의 자리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도전과 힘겨운 이해의 과정이다. 여기에는 불어가 모국어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영어 사용 지역인 마니토바에서 '이방인'으로서 교육 받았고, 또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자란 어린이들을 교사로서 가르쳐야 했던 작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다분히 배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는 매우 다양한 삶의 경로를 체험하게 하는 성장 소설의 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들 이민들은 한결같이 가난하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빈센토의 아버지를 보자. 불과 얼마 전에 이탈리아의 아부리제에서 온 이민으로 "쿠션을 만드는 장인인 그는 아직 정식으로 개업하지 못한 처지라 임시로 여기저기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주고 있었다". <성탄절의 아이>에 등장하는 프티-루이의 집안은 초콜릿을 팔며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말이 상점이지, 정돈할 공간이 부족해서, 아니면 주인이 소홀해서 상품들이 땅바닥에, 구석에 아무렇게나 끝도 없이 널려 있거나, 혹은 때가 잔뜩 낀 진열장 속에, 초콜릿이 비누와 콘 플레이크 옆에,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있었다". 조니의 아버지는 '여름 한 철 하수도 청소부로 일하고 겨울이면 실직자'여서 어머니가 덧신을 짜며 살고 있고, 니콜라이의 가족은 "시의 쓰레기 버리는 곳 옆에 살고 있었다. 그 곳에서 녹슨 함석, 침대 틀, 아직 쓸 만한 판때기 등을 쉽게 주워 모아 꽤 괜찮은 오두막집을 지을 수 있었고 특히 여름철에는 꽃도 가꾸고 닭도 키웠다". 그의 어머니는 여름이면 진짜 꽃을 가꾸지만 겨울이 되면 얇은 천이나 종이로 조화를 만들어 백화점에 싼 값으로 내다 팔았고 백화점은 그걸 비싸게 되팔았다.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는 클레르는 이들만도 못하여 성탄절 날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 채 '빈 손으로 온 어린 소년'이다. <종달새>의 닐은 진흙탕의 늪을 건너 악취를 풍기는 도축장 근처 '낡은 판자 조각과 폐품으로 만들었을 오막살이 집'에 살고 있다. 폴란드나 우크라이나 출신의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동네의 드미트리오프 집은 어떠한가? 속이 뒤집힐 것 같이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그 '소굴 같은 집'은 "반은 강둑에, 반은 집안을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채우며 흐르고 있을 강물 속에 말뚝을 박아 그 위에 판다로 얼키설키 이어 놓은 흔들거리는 바라크였다". 임신한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있고 아버지는 먼 곳으로 일 나가고 없는 집안에서 어린 나이에 어른이 해야 할 일을 도맡아 하느라고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는 <집 보는 아이>에 대해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학교에 오는 어린이들이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집단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그들의 가난과 고단한 삶은 분명 넘어서기 어려운 시련이며 도전이다. 그러나 이 시련과 도전은 오히려 그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사랑과 인식과 아름다움의 불가사의한 위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서 야기되는 적대감을 돌연한 사랑의 표시로 반전시키는 어린 빈센트의 행동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하겠다. 목까지 기어올라 숨이 막히도록 껴안은 그가 "나를 놓아 주도록 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내 쪽에서 그를 꼭 껴안고 등을 정답게 토닥거려 주면서, 내가 그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듯이 그 역시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지만 애정이 서린 어조로 그에게 말을 하면서 차츰차츰 그를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제는 나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가슴 찢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그를 안심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나는 그를 땅 위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진 이 걱정스럽고 엄청난 행복에 몸을 떨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포옹과 애무와 같은 몸짓, 혹은 애정이 서린 '어조'만으로도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가로놓인 단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린 빈센토는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여교사에게는 <성탄절의 아이> 클레르의 '행복한 미소'만으로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성탄절 선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눈보라 속을 뚫고 찾아가 선생님에게 해 묵은 손수건 한 장이라도 선물로 줄 수 있을 때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활기찬 보병 나팔 소리를 연상시키는' 행복감과 거기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언어, 경제적 수준, 젊음과 늙음, 건강 등 모든 장벽을 허물어 주는 통합의 힘은 무엇보다도 예술의 위대한 힘일 터이다. 종달새 같은 노래의 소질을 타고난 닐은 바로 그 같은 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노래와 미소는 "너무나도 전염성이 강한 것이어서 무대와 객석을 갈라 놓은 난간을 넘어 노인들의 얼굴에 부드럽고 신선한 빛 그대로 와서 찍히는 것이었다". 그 '전염성'은 흥분하여 떠들던 교실의 아이들을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다리를 다친 여교사의 어머니를 걷게 하고, 양로원의 노인들과 심지어 정신병원의 병자들까지도 잠시 자신들의 현실을 잊고 심취 열광하게 한다. 언어를 초월한 그의 노래, 감미롭고도 우수에 찬 그의 노래는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고향의 "드니에프르 강이 흐르고 흘러 웃음과 한숨을, 회한과 희망을 다 같이 바다로 싣고 가서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의 물결로 합쳐진다는 내용이었다". 언어가 갈라 놓는 사람들을 노래는 하나의 바다에서 만나게 해 준다.

여교사는 닐의 도움을 받아 가며 그의 어머니에게 어린 아들의 노래가 이미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기쁨에 대하여 뭔가를 표현하려고 애를 썼고, 그녀는 닐을 통해서 그로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엇인가에 대하여 여교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려고 고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말을 통해서 감정을 실토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어가 갈라 놓는 사람들을 공감이 서린 침묵은 하나로 합쳐 준다. 마침내 닐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노래 부른다. "그러자 두 목소리가 높아지며 기이하고 아름다운 노래 속에 담겨 날아 오르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그 노래는 실제로 겪는 삶과 꿈 속의 삶의 노래였다. 광막한 하늘 아래서 그 노래는 그 어떤 손길처럼 가슴을 움켜 잡아 이리 돌리고 또 저리 돌리다가 마침내 잠시 동안 자유로운 대기 속으로 조심스럽게 놓아 주는 것이었다". 학교나 사회, 언어나 계층이 가두어 놓는 사람들의 가슴을, 노래는 이처럼 자유로운 대기 속으로 '해방'시킨다.

 

누구보다도 지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드미트리오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문제점을 드러낸다. 지적으로 가장 뒤지는 집안 형제들 중 막내인 드미트리오프에게는 '예외적인 글씨 쓰기 재주'가 있다. 그러나 글씨를 그렇게도 잘 쓰면서도 그 글자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놀랍다. "그가 아주 좋아하는 것은 글자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글자들을 글씨로 쓰는 것인 듯 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사는 나름대로의 암시적 해석을 내린다. "검은 불 덩어리를 안고 내면으로 향하고 있는 그의 기이한 두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멀리서 창조주를 찬미하면서도 자신들에게 눈길을 던져 달라고 주님께 애원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교회 성상 벽의 저 보잘것 없고 가난한 성자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의미를 초월하는 소통의 비결은 그들 조국의 혼 속에 깃들어 있었던 것일까?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성자들'을 연상시키는 그들 부자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언어의 의미 이상으로 말없는 긍지와 공감과, 거기서 깨닫는 서툰 사랑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부자는 어린 아이가 써 놓은 글자들 앞에서 최초의 미소를 주고 받는다. "마침내 그는 겁에 질린 작은 얼굴을 아버지의 옷 소매에 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두 눈을 아버지에게로 쳐들었다. 그러자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미소가 오갔다. 너무나 짧고 너무나 서투르고 너무나 망설이는 미소여서 아무래도 그 두 얼굴 사이에서 오가는 것으로는 정말 처음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자연 환경이다. 이 소설을 이루는 여섯 편 중 단편의 공통된 배경은 바로 캐나다, 특히 마니토바 주 특유의 끝간 데 없이 광대한 공간과 무서운 눈보라이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 두 이야기인 <집 보는 아이>와 <찬물 속의 송어>에서는 이 같은 자연 환경이 인간적 관계와 극적 전개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주인공들 못지 않은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집 보는 아이>의 배경이 되는 공간을 주목해 보자. 가난한 집 몇 채와 학교, 교회, 따분한 역사, 사일로, 물 저장 탱크 등이 선부인 쓸쓸한 '마을'은 '용기도 믿음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얻어 낼 것이 없는' 곳이다. 반면에 '그 반대편으로 눈길을 돌리면 모든 것이 딴판'이다. "희망이 넘칠 듯이 흘러드는 것이었다. 나는 미래를 마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는 내 생애에 있어서 한 번도 허용받지 못했던 가장 매혹적인 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실은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는 그 황량한 공간이 매혹의 땅으로 보이는 것은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그 쪽에서 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황무지는 새싹들이 돋아나는 약속의 땅인 것이다. 이는 물론 농토로 개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독한 여교사에게는 무엇보다도 미래의 희망인 어린 아이들이 새싹처럼 돋아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나는 책상에 가 앉아서 우리 학생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느라 마음이 급했다. 나는 한 줄기 작은 오르막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기에, 아이들이 하늘 저 밑으로 가벼운 꽃 장식 띠 같은 모양을 그리며 하나씩 하나씩, 혹은 무리를 지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매 번 나는 그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광대하고 텅 빈 들판에 그 조그만 실루엣들이 점처럼 찍혀지는 것을 볼 때면, 이 세상에서 어린 시절이 얼마나 상처받기 쉽고 약한 것인가를,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우리의 어긋나 버린 희망과 영원한 새 시작의 짐을 지워 놓는 곳은 바로 저 연약한 어깨 위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절감하는 것이었다."

 

이 광대한 미개지는 이 곳으로 찾아 든 이민들과 여교사가 각기 자기 나름대로 개척해 나가야 할 과제로서 주어진 공간이다. 소설 속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집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 먼 길을 찾아가는 여교사의 '행로'는 바로 그 고달픈 개척의 과제와 동시에 그 광대한 공간 속에 던져진 연약한 인간의 고독과 절망, 그리고 그에 맞서는 힘겨운 도전과 성장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여교사는 말한다.

"나는 또한 그 때 세상 구석구석으로부터 그들이 나를 향하여,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한낱 이방인에 불과한 나를 향하여, 길을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알지도 못하는 그 누군가에게, 나의 경우처럼 사범 학교를 갓 졸업한 경험 없는 풋내기 여교사에게,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섬세하고 가장 쉽게 부서지는 것을 위탁한다는 것을 느낄 때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여교사가 단신 스키를 타고 앙드레의 집으로 찾아가 함께 밤을 보내면서 그 집 한가운데에다가 잠정적으로 일종의 이동식 교실을 설치하는 장면은 이 교사의 개척자적 이미지를 감동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더군다나 앙드레는 그 같은 공부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 동생 에밀의 차례가 되면 '자신이 도와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미래의 교사직을 자청하고 있지 않은가? 이리하여 개척의 손길은 종교처럼 번져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보내는 밤이 '무슨 알 수 없는 축제의 신비스러운 준비 과정'같이 보이는 것은 단순히 그 곳에서 배움이 이루어지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때 역시 가장 위대한 힘은 예술의 아름다움에 있다. 그 '축제'는 축음기에서 울려 나오는 '옛 노래'와 선생님이 들려 주는 '옛날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광대한 평원에 우연의 '주사위처럼' 외따로 던져진 그 가난한 집을 '단 하나 흐릿한 불이 켜진 램프가 자아내는 그 기적 같은 분위기'로 탈바꿈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길고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인 <찬물 속의 송어>에서는 그 광막한 공간의 힘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광대한 공간은 우선 메데릭이 출현하고 사라지는 배경으로서 나타난다. 그 소년은 '평원 저 멀리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어떤 하얀 점 하나'로 등장하여 줌 렌즈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그 하얀 점이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말로 변했다". 이리하여 공간은 말이 달리는 속도를 실감 있게 전달하는 여백의 넓이로 작용한다. "그는 벌써 학교 마당의 입구에 와 있었다". 그러나 이 끝간 데 없는 공간은 나타남보다 사라짐의 배경일 때 더욱 감동적이다.

"그리하여, 아침에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매 순간 점점 더 작아지면서 이내 광대한 평원 속에서 검고 흰 점으로 변하여 사라졌다. 나는 우리들 사이의 먼 거리가 푸른 빛으로 변하면서 그를 완전히 삼켜 버릴 때까지 그를 눈으로 따라갔다. 아마도 오직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내게만 주어진 듯한 그 광경이 이번에는 소년 시절이 끝나 가는 마지막 날들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깊을 수 없는 어떤 고독의 고백 같아만 보였다."

이처럼 광대한 공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 던져진 인간의 부서지기 쉬운 행복과 고독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은 특히 이 광대한 공간과 더불어 이 소설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눈과 중복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감지된다. 눈에는 '만물을 서늘하게 덮어 주고 어린 아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움의 순기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캐나다의 공간과 계절 속에서 눈은 대부분 대기를 '신음 소리'로 가득 채우고 '겨울의 깊은 바닥에서 들려 오는 해묵은 비탄의 소리'로 인간에게 쓰디쓴 비웃음을 던지는 공격적 요소로 등장한다.

<찬물 속의 송어>에서 열네 살의 메데릭은 새로 부임한 열여덟 살의 앳된 여선생에 대하여 연정을 느낀다. 소설은 어린 시절에서 성년으로 옮아 가는 시기의 고뇌와 수줍은 마음의 떨림을 이를 데 없이 섬세하고 여운이 긴 필치로 그려 보인다. 이 때 여교사가 메데릭과 함께 마차를 타고 마을로 돌아오는 밤의 무서운 눈보라는 사랑의 모험, 청춘의 모험, 인생의 모험 그 자체의 은유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맞는 눈보라와 광대한 벌판이 합치면 난바다의 폭풍이 된다는 것은 알지만 정작 그것이 동시에 그들 자신의 가슴 속에 소용돌이치게 될 폭풍의 예고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는 어떤 야성의 힘으로부터 오는 저항과 압력을 느꼈다. 그것은 광란하는 소리와 미친 듯이 밀어닥치는 백색 꿈의 형상으로 도처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가스파르는 우리가 탄 연약한 배의 뱃머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폭풍을 가르고 나아가면, 계속되는 휘파람 소리와 뒤엉킨 외침으로 가득한 광란의 빠른 연주 속에서 폭풍은 둘로 갈라져서 눈썰매의 양쪽으로 흘러 내렸다. 때로는 마치 반대편으로부터 격류에 휩쓸리는 뗏목에 실려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 옆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절망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모험은 청춘의 사랑이 그러하듯 방향 감각의 상실로 이어진다. 길을 인도하는 전신주는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가없이 표적도 없이 펼쳐진 흰 눈의 공간 속을 전진하며 두 사람의 가슴 속에서는 은유적으로나마 탈선의 욕구와 궤도를 찾고 싶은 욕구가 갈등한다. 내면의 갈등은 '거울'이 된 마차 창 유리에 잠시 동안 열망과 몽상의 그림으로 변하여 와서 박힌다.

"그 때 바로 내 얼굴 곁에 메데릭의 얼굴이 와서 박혔다. 그는 창 유리에 자기의 얼굴도 비친다는 것을 보르고 바싹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가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아마도 내가 잠이 들었는지 보려는 것 같았다. 내가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내가 자고 있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나는 눈을 반쯤 감고서 랜턴의 반사면에 비친 그를 감시했다. 거기에는 흐르는 눈가루에 쓸리면서 우리 두 사람의 흐릿한 얼굴이 마치 낡은 결혼 기념 사진 속에서처럼 비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평면 상의 광대함은 결국 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시선에 의하여 하나의 전체로 통합된다. 눈 앞에서 넓게 펼쳐진 공간은 모든 것을 그 품에 안아 주면서 우리를 잠시나마 요지부동의 영원에, 무한의 장에 닿게 한다. 현실의 작은 세목들은 인생이라는 전체 속에 통합된다. 나무들은 숲으로, 물결은 바다로, 삶은 영원으로 흘러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차원'이 생겨난다. 그 총체로서의 아름다움이 한갓 꿈이었던들 어떠랴. 그것이 한 인간을 보이지 않게 문득 성장하게 하는 꿈인 바에야. 지나치게 길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다음의 인용문을 천천히 읽으면서 소설 전체의 가슴 저린 순간들을 그 위에 겹쳐 보자. 우리의 소용돌이치는 마음이 마침내 한 장의 백지로 해방될 때까지….

 

"그 때의 정경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여전히 그 정경의 추억을 맞아 들이려는 듯 내 영혼이 고즈넉하고 행복한 느낌과 함께 넓게 펼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높은 곳에서 목도하게 되는 그런 풍경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기에 우리에게 그토록 커다란 만족감을 주는 것일까? 그 풍경을 획득하기 위하여 치른 고생이 그만한 보상을 주는 것일까? 지금도 나는 그 까닭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날 아침 메데릭과 나란히, 서로 머리를 마주대고 있는 말 위에 올라 앉아 있을 때만큼 확실하게 그 평원의 광대함, 그 쓸쓸한 고귀함, 그 변모한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가장 먼 곳까지 우리 눈 앞에 확 펼쳐진 그 평원은 마음을 사로잡는 디테일들을 무수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가령 푸른 하늘 가ㅏ까이에는 이제 막 갈아엎은 땅이 그 위를 날고 있는 어두운 불새만큼이나 윤나는 검은 색을 띠고 있고, 더 높은 쪽에는 밤안개가 아직도 땅바닥에 엎드린 채 흰 바탕에 검은색의 지극히 미묘한 목탄화를 만들고 있는 들판, 그리고 아주 먼 곳에는 작은 울 안에 갇힌 봄인 양─아마도 이런 겨울밀 싹인 듯─부드러운 녹색의 자그마한 사각형. 그러나 평원이 마음에 사무치는 것은 가장 희귀한 그 겉모습들 중의 어떤 한 가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 겉모습들이 결국은 모두 다 평원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 정경의 이러저러한 모습, 특히 울 안에 갇힌 봄 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머지 않아서 우리는 오직 요지부동인 것만을 의식하게 되니까 말이다. 물결들은 바다로, 나무들은 숲으로 돌아가고,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인간적 삶의 지표와 모든 디테일들은 결국 평원의 무한한 넓이 속으로 돌아간다. 이렇다 할 그 무엇 하나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평원은 이렇게 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평원은 그토록 자주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나는 메데릭 쪽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이마 위로 푹 눌러 쓴 모자 차양 밑에서 그는 나를 열심히 훔쳐보고 있었다. 그는 이 높고 기이한 장소에서 내가 맛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행복감이 서서히 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유심히 살피면서, 평원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쉴 새 없이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내 얼굴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자 그의 얼굴 역시 밝게 빛났다. 그것은 그가 순수하게 타고난 자질이었을까? 아니면 삶에, 특히 젊은이들의 삶에 있어서 흔히 그러하듯이,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함께 즐기는 것을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두 사람의 눈 속에 어떤 기쁨이 가득했던 것 같다. 이윽고 우리는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가벼운 웃음, 약간 나른한 듯한 웃음이었다. 우리는 왜 웃었을까? 아마도 두 존재 사이에서 문득 생겨난 저 드물고도 신기한 공감 속에서 너무나 굳게 결속된 나머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더 이상 말이나 몸짓이 필요 없게 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웃는다. 아마도 해방에서 오는 웃음을."

 

"이상하게도 바로 그 다음, 우리는 아무 말이 없게 되었다. 심각하기까지 했다. 각자 우리를 결속시켜 주는 풍경에만 신경을 썼다. 거대하고 자유로운 공간이 다 그렇듯, 그 공간이 우리들의 마음 속에 불러 일으키는 것은 삶, 우리들의 미래,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갖게 될 얼굴에 대한 꿈 속 같은, 그러나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었다. 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 오면서 맛본 순수한 믿음의 순간들은 모두 메데릭과 내가 산 꼭대기에 전망대처럼 만들어진 좁은 고원의 정상에서 행복하게 경험한 그 때의 그 어렴풋한 행복과 관련된 것임을 지금도 알 수 있다. 지금 상상해 보면, 그 때 우리가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으므로 만약 저 아래 평지에 있는 어느 농가에서 사람들이 가파른 산 꼭대기에 뚜렷하게 드러난 두 사람의 실루엣을 바라볼 생각을 했더라면 우리들 자신도 먼 거리에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을, 어쩌면 미래까지도 바라보려는 듯이 여전히 말 위에 올라 앉은 채 거의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는 얼마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던 것일까? 마침내 메데릭이 우리 두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몽상에서 깨어난 듯 평원의 가장자리에서 쾌활한 어조로 내게 제안했다."

"쌤, 송어 떼가 그대로 있는지 보러 갈래요?""

 

그러나 손 안에 '미끈하고 만져지는 송어'를 쥐어 보는 것은 황홀하고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의심을 모르는 야성의 생명을 손가락 끝에 감지하는 쾌감을 또다시 순간 순간 맛본다"는 것은, "샘의 여기저기에서 눈과 눈을 맞추며 같은 행복감의 같은 미소를 입가에 번지게 만드는 너무나도 유사한 인상들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것은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일이다. 그 에로티즘과 공모의 눈짓이 비록 지평선 저 끝에 타오르는 단풍의 유혹적인 '불'과 반대로 학교라는 '찬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다음에는 오직 높은 곳에서 낮은 현실로 내려오는 일만이 남는다. 그 다음에는 고달픈 어른이 되는 일과 마침내 서로 헤어지는 일이 남을 뿐이다.

 

2003년 2월 28일

김화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