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 ~L; Change the World~(새로운 시작) -제７장- 희망

ℒ 2-3

희망

  

평온한 파도와 비슷한 모양을 한 칸사이 국제 공항 터미널이 밤을 맞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야광충이 반짝이는 바다처럼, 푸른 유도등이 펼쳐진 활주로에서 제트기가 차례로 이륙했다. 정각을 맞아 램프가 꺼진 로스앤젤레스행 UA718편이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비즈니스 석에 설치된 특설 침대에는 미국에서 긴급 수술을 받을 환자로 위장된 마키가 누워 있었다. 침대는 차폐 커튼으로 덮여서 다른 승객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가운 차림으로 옆에 앉은 쿠조가 그런 마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쿠조의 옆 자리에는 마찬가지로 가운을 걸친 마토바가 만족스럽게 시트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한때는 어떻게 될까 싶었지만, 만사가 잘 될 것 같군요. 만의 하나의 경우를 생각해 L에게 대응하기 위해 억지로 이 아이를 태웠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마토바는 마키를 마치 실험 동물이라도 보는 듯이 내려다 보고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지금쯤 바이러스 살포 장치가 작동했겠군요. 2주일 뒤에 증세가 나타날 무렵이면 전국에 퍼져 있겠지요. 니카이도 교수의 이름은 일본을 멸망시킨 악마로 신세계에 영원히 기록될 겁니다."

유쾌하게 말한 마토바는 계획의 성공을 확신하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렇겠죠." 짤막하게 대답한 쿠조 역시 조용한 미소를 띠었다. 마토바는 그 표정에서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러시죠, 쿠조 씨.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쿠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드디어 계획이 실현된다고 생각하니까 감회가 깊어서요. 게다가 여름 감기에라도 걸렸는지 어쩐지 몸에 열이 좀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쿠조는 열 때문에 글썽이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다행히 미국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기내에서 느긋이 쉬도록 하세요."

마토바가 너그럽게 말하자 쿠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커튼 안쪽에 있는 마키의 모습을 확인했다.

"승객 여러분, 기장입니다.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일시 정지하겠습니다. 활주로에 일반 차량이 침입한 듯 합니다."

침입 차량이라는 말을 듣자 쿠조는 침대 너머 창문으로 바깥을 확인하다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토바 대표님, 잠시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창 밖을 바라보는 쿠조의 평소와 다른 태도를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마토바는 "좋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26년 전, 1980년 미국 이스트셀러스 섬에서 벌어진 감염증 연구소의 수수께끼 폭발 사고에 대해서 기억하시나요?"

오래 된 이야기임에도 마토바의 대응은 빨랐다.

"물론 기억하고 있지요. 저의 이 쪽 세계 데뷔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효율적인 일이었지요. 파괴 공작 자체를 그 나라 정부가 떠맡아 준 셈이니까요."

유쾌한 듯이 웃는 마토바와는 달리 쿠조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역시 그 사건에는 3중의 의미로 은폐된 사실이 있었군요. 그 시설이 바이러스 병기 개발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미국 정부 자체가 시설을 연구자와 같이 폭파시켰다는 것. 게다가 폭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바이오 해저드가 대통령 선거에 얽힌 외부의 테러 행위였다는 것…."

"쿠조 씨, 그런 데까지 잘도 알아 냈군요."

마토바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물론 쿠조가 마토바와 함께 일을 하게 되면서 마토바의 경력을 조사하다가 판명된 사실일 것이다.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에 악감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정체도 모르는 상대와 손을 잡고, 어제 적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아군이 되는 세계다. 오히려 그 정도로 주의가 깊지 않으면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마토바 대표님, 앞으로 참고로 삼을 수 있도록 그 당시의 잠입 방법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마토바는 요청에 응해 당시를 떠올리듯이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꼬았다.

"연구자 가운데 아시아 인 부부가 있었지요. 저와는 나이도 비슷해서 친해지기 쉬웠습니다. 가족들이 같이 파티를 하거나 캠프를 가는 등 허물이 없어지자 여러 가지 정보를 가르쳐 주었지요. 연구소의 보안, 경비의 취약성, 화기 장비…."

"그 가족에게 8세쯤 되는 여자애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시나요?"

"으음, 있었지요. 귀여운 여자애였어요. 그 애에게는 미안한 짓을 했지요."

그리운 듯한 말투를 듣자 쿠조의 어깨가 희미하게 반응했다. 그제야 마토바는 쿠조가 조사를 했어도 알 리가 없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6년 전에 8세였던 여자애…. 천진한 웃음을 띤 소녀의 얼굴을 눈 앞의 쿠조에게 겹쳐 보았다.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토바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설마…?"

이코노미 석에 앉아 있던 요시자와와 하츠네가 스튜어디스의 제지를 듣지 않고 달려 왔다.

"마토바 대표님! 활주로에 침입한 차에 L이 타고 있습니다."

"뭐라고! 어떻게 된 일이지? L은 노트로 확실하게 죽였다고 자네들이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분명히…!"

마키가 누워 있는 침대의 커튼을 걷어 창 밖을 내다 보려던 하츠네가 숨을 삼켰다.

"이 애, 발병했어!" 마키는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운 듯 신음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쿠조 씨. 이 아이에게도 항 바이러스 약을 맞힌 게 아니었나요?"

달려드는 마토바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쿠조는 마키를 흘끗 내려다 보고 고개를 숙였다.

"미국 상공까지 어떻게든 버텨 볼 생각이었는데…."

조그맣게 중얼거린 쿠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기내를 둘러 보았다.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어맨, 코니시 씨, 플랜 B로 변경! 시작합니다!"

상태를 보러 와 있던 코니시가 요시자와와 하츠네를 밀어 내고 마키의 침대로 달려갔다. 옆에 놓아 두었던 의료 기구에 숨겨서 갖고 들어왔던 권총을 손에 든다. 앞 자리에서 무관심한 듯 잡지를 읽고 있던 외국인 남자가 일어나 코니시에게서 권총을 받아 들었다.

"이 비행기는 우리가 접수한다!"

외국인 남자가 권총으로 객석을 겨누며 영어와 일본어로 선언했다. 승객을 빈 틈 없이 훑어 보면서 어깨 너머로 쿠조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쿠조. 날아 오른 다음이었잖아?"

"페어맨, L이 왔어. 어서 조종석을 제압하고 날아 올라." "알았어!"

페어맨이라고 불린 남자는 가짜 수염과 뺨의 보형물을 걷어내며 마토바를 바라보았다.

"마토바, 오랜만이군. 이렇게 말해도 네 머릿속에서 나는 죽은 걸로 되어 있을 테지만. 뭐, 원한으로 유령이 되어 나타났다고 생각해도 좋아. 이번에는 그런 화상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남긴 페어맨은 조종석으로 향했고, 그 대신 코니시가 승객에게 권총을 들이댔다. 마토바의 손이 무심결에 뺨의 화상 흉터를 더듬었다.

"저, 저 남자는 분명히…. 브루나이에서 죽었을 텐데…."

"그래요, 당신을 대신해서 말이죠. 여러 곳에서 원한을 사서 결국 이렇게 된 것 같네요."

쿠조가 우습다는 듯이 마토바를 바라보았다.

"마토바 씨, 26년 전의 그 여자애가 미국 정부와 테러의 주모자 양 쪽에 복수를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어요?"

넋을 잃은 마토바는 아직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하, 하지만, 쿠조 씨. 당신의 과거는…."

쿠조가 마토바를 조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토바 역시 쿠조를 조사했었다.

"제가 만들어 낸 과거에 속아 줘서 고마워요."

보란 듯이 고개를 숙이는 쿠조를 보고 그제야 마토바도 그녀가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자신과 행동을 함께 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쿠조가 말을 이었다.

"아, 그렇지, 말씀 드리는 걸 잊었어요. 조금 전에 여러분께 주사했던 건 항 바이러스 약이 아니라 단순한 바이러스. 여기에 있는 멤버는 모두 살인 바이러스의 보균자랍니다."

마토바는 쿠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렸다. 세련된 신사처럼 행동하던 평소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그럼 여자애에게서 항 바이러스 약을 빼앗았다는 말은?"

"항 바이러스 약 따위는 애초에 손에 넣지 않았어요."

"그러면 이 애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살인 바이러스 자폭 테러범이라는 소리입니까? 쿠조 씨!"

마토바가 눈을 부릅뜨고 캐어 물었다.

"마토바 씨, 선택된 인간만의 세계라니, 그런 어린 애 같은 속임수를 제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어린 애 같은 속임수라고?"

냉정을 잃은 마토바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태도를 바꾸었다. 쿠조는 비웃음을 띠고 마토바와 대치했다.

"계획이 99퍼센트 성공한 시점에서 당신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것이 우리들의 이번 임무였어요. 바라신 대로 바이러스로 세계를 바꿔 드리지요. 당신 자신을 바이러스 폭탄으로 삼아서."

"네가!!"

쿠조의 멱살을 움켜 쥔 마토바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경악해서 천천히 손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쿠조의 충혈된 눈에서 한 줄기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바이러스 감염의 초기 증상이었다.

"아무래도 제게도 증상이 나타난 모양이군요."

쿠조는 피를 닦으며 처절한 웃음을 띠었다.

"시… 싫어! 다가오지 마! 오, 옮을 거야…. 살려 줘, 싫어. 주… 죽고 싶지 않아!"

헛소리처럼 거듭 중얼거리며 엉금엉금 뒷걸음질 치던 마토바는 하츠네에게 부딪혔다.

"아─, 정말, 이 녀석 최악이잖아."

거의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하고 있었던 만큼, 비참한 모습을 보고 난 하츠네의 변모는 격렬했다. 하츠네는 뒤에서 마토바의 목을 눌러 기절시켰다. 하츠네는 권총을 들고 자신을 내려다 보는 쿠조를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마음대로 해. 별로 저항할 생각도 없어. 당신이 나보다 무서운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하츠네는 흥미를 잃은 듯 등을 돌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요시자와가 코니시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코니시! 다들 죽게 되잖아!"

"어? 요시자와 씨, 살아 남으려고 하셨었나요? 살아 남는 건 신세계에 필요한 우수한 사람 뿐인걸요, 하핫."

코니시가 어이 없다는 듯 비웃었다. 평소 흠칫거리던 코니시를 컴퓨터 마니아라며 바보 취급하고 있었기에 그가 권총을 들고 있음에도 요시자와는 위압적으로 몰아 붙였다.

"뭐야, 그 거만한 태도는? 네놈, 어느 새 쿠조한테 붙은 거야? 이 마니아 녀석이."

코니시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요시자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점차 이상할 만큼 높다랗게 변하더니 뒤집어진 음성이 외침처럼 튀어나왔다.

"당신이야말로 지금껏 나를…, 나를 컴퓨터 오타쿠라며 바보 취급했지. 바, 바보 취급했어!"

흥분한 코니시의 눈빛이 바뀌었다.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요시자와에게 겨누었다.

"이, 이봐. 기다려. 기다리라니까. 미안, 잘못했어!"

요시자와는 처음으로 자신이 심약한 사람의 역린을 건드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요, 요, 용서 못 해!"

한 발, 두 발, 세 발, 지나치도록 충분한 총탄이 튀어나갔고, 요시자와는 피바다 속에서 천천히 쓰러졌다.

 

페어맨이 스튜어디스에게서 기내 방송 마이크를 빼앗았다.

"승객 여러분, 공중 납치범이다. 한동안 얌전히 내 말을 들어 주면 좋겠어. 말해 두겠는데 우리들의 무기는 권총만이 아니야. 먼저, 이 비행기를 폭파하는 데 충분할 만한 플라스틱 폭탄. 기폭 스위치를 가진 사람은 당신들 승객 가운데 섞여 있어. 반항적인 빛이 보이면 망설임 없이 스위치를 누를 테니 조심하도록. 그리고 또 하나의 무기는 바이러스다. 살인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방송으로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이 비행기에는 발병한 환자가 타고 있어 당신들은 모두 이미 바이러스 보균자다. 즉, 만일 당신들이 우리들 납치범들에게 반항해 기외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일본에는 항 바이러스 약이 없어. 얌전히 미국까지 날아가면 거기에서 항 바이러스 약으로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이상의 사항을 기억해 두고 질서 있는 행동을 해 주기를 부탁하겠어."

플라스틱 폭탄도, 항 바이러스 약이 미국에 있다는 말도 거짓말이었지만 승객을 얌전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페어맨은 스튜어디스에게 명령해서 콕핏으로 전화를 연결했다.

"기장, 납치범이다. 듣고 있었던 대로 미국까지 가지 않으면 어차피 승객들의 목숨은 없다. 얌전히 말을 들어 주실까."

콕핏의 자물쇠가 열리자 페어맨은 기장과 부조종사를 묶어 놓고 기장석에 앉았다.

"오늘을 위해 빈 틈 없이 준비했어. 기다려라, 미국. 계속해서 사람을 이용해 먹었겠다. 더러운 나라에 어울리는 큼직한 선물을 쳐넣어 주지."

비행기는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납치범과 살인 바이러스라는 두 가지 재앙을 태운 비행기 안은 불길할 만큼 침묵으로 감싸여 있었다. 페어맨의 방송 덕분에 대놓고 반항을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마키, 미안해. 이런 일에 끌어 들여서."

특설 침대 옆에 앉은 쿠조는 마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하지만 네가 어른이 될 무렵의 지구는 꿈도, 희망도 없이 절망만이 지배하는 세계가 될 거야. 마키도 차라리 지금 부모님이 있는 천국에 가는 편이 행복할 거야."

마키는 고열로 혼탁한 의식을 긁어 모으다시피 해서 목소리를 쥐어 짜 쿠조에게 말했다.

"나는…,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을 거고…, 지구의 미래도 포기하지 않아…. 아빠와 엄마의 몫까지 나는… 살아가야만 해."

희망의 빛을 잃으려 하지 않는 마키의 목소리. 그것은 지금의 쿠조에게는 고통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류자키가 말해 줬어. 나를 반드시 구해 주겠다고…. 그러니까…, 믿고 있어. 쿠조 씨도…, 포기하지 마.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으니까."

쿠조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려는 듯,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자신을 격려하려 하는 마키를 냉정한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이미 늦었어. 이 비행기는 납치되었어. 우리들은 살인 바이러스 감염자라는 폭탄을 싣고서 미국 본토를 괴멸시키고 마침내 세계를 멸망시킬 거야. 이 세계에는 더 이상 인간은 필요 없어."

 

하츠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따분한 듯이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앞쪽에서 총성이 들려와 요시자와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15세 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하츠네에게 사람의 '죽음'이란 고작해야 그 정도였다. 사람은 언제나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었고 죽음이란 아주 약간 균형이 무너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이든 가까운 누군가든, 혹은 자기 자신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죽음'에 마음이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하츠네는 지금 잡지를 읽는 자신의 눈길이 위로 치켜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 녀석, 바보였지만 마음은 맞았었지….

그렇게 생각한 하츠네는 일어서서 기내 반입 수하물인 우산을 들었다. 눈속임을 위해 우산 끝에 감아 두었던 테이프를 벗겨 내자 칼 끝처럼 날카로운 강화 플라스틱이 나타났다.

"비켜." 스튜어디스를 억지로 밀어 낸 하츠네는 비상용 탈출문을 열었다. 단숨에 기내로 바람이 불어 들었다. 우산 하나를 들고 열린 문으로 날개에 뛰어 내리려는 하츠네에게 코니시가 권총을 들고 달려왔다.

"하츠네 씨, 어, 어디로 갈 생각이에요?"

"따분하니까 내릴래. 그럼 이만."

관심 없다는 듯이 말한 하츠네에게 코니시가 권총을 겨누었다.

"하츠네 씨. 그, 그만 두세요."

"음─, 좀 높네. 힐을 신고는 무리려나."

코니시를 아예 무시한 하츠네는 하이힐의 힐 부분을 꺾어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쏘, 쏠 겁니다." 코니시는 머뭇거리며 총을 겨누었다. 하츠네는 길가에서 앙케이트 용지라도 권유 받은 것처럼 귀찮은 듯 흘끔 총을 보더니 다음 순간 갑자기 총구를 걷어찼다. 천장을 향해 탄환이 발사되고, 동요한 코니시가 권총을 떨어뜨리자 하츠네는 총을 문 밖으로 차 냈다. 빈 손이 된 코니시가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츠네 씨, …미, 미안합… 사, 살려…."

"아─, 정말, 조용히 좀 해!"

코니시에게는 이미 일말의 흥미도 없었던 하츠네는 손 쉽게 말을 가로막는 수단을 취했다. 목 깊숙이 우산이 꽂히며, 말 그대로 코니시의 목소리가 가로막혔다.

"쏠 거라면 머뭇거리지 말아야지, 마니아 자식."

하츠네가 비상용 탈출구를 열었을 무렵, 스루가는 비행기와 나란히 타코야키 판매 차를 몰고 있었다.

"마츠다 씨, 문을 노리십시오." "오케이!"

지붕 위에서 L이 신호를 보내자 조수석에서 몸을 내민 마츠다가 사출 장치의 표적을 잡아 방아쇠를 당겼다. 로프를 매단 작살이 열린 문에 꽂혔다.

"과연 마츠다 씨. 총 솜씨 하나만은 신뢰할 수 있어요."

"하나만이라니…." "제가 옮겨 타겠습니다."

L이 로프를 타고 날개로 올라 타려고 했다. 차 지붕에서 발을 떼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로프를 타고 기어 올랐다. 하츠네에 의해 입은 상처가 욱신거려 저도 모르게 오른손이 미끄러졌다. 로프가 크게 흔들리며 엔진에서 나온 배기풍에 휘말리는 바람에 L은 공중에서 팽이처럼 돌았다.

"힘 내요, 류자키!" 마츠다의 응원도 바람에 날려갔다.

"큭!" L은 필사적으로 자세를 가다듬고 혼신의 힘을 다해 로프를 올라갔다. 간신히 날개 끝에 손을 걸쳤을 때 누군가가 증오를 담아 L의 손을 힘껏 짓밟았다.

"역시 그 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날개 위에 선 하츠네가 L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밉살스럽다는 표정으로 짓밟는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츠네 씨, 메리 포핀스 흉내를 낼 셈입니까?"

L은 우산을 손에 들고서 버티고 선 하츠네에게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시선은 우산 끝을 향하고 있었다.

"알아 챘어? 이만큼 끝이 뾰족하면 사람을 찌르기엔 충분해."

옅은 웃음을 띠고서 당구 큐대를 쥔 것처럼 L을 노린다.

"그럼 이건 돌려 주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렇게 말한 L은 날개에서 손을 놓았다. 로프가 출렁 늘어지면서 일단 날개 아래로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L은 하츠네에서 빼앗았던 단검을 들고 있었다. 그는 우산 공격을 피하며 하츠네의 발등에 단검을 깊이 박았다. 절규를 내지른 하츠네는 그렇지 않아도 서 있기 힘들었던 날개 위에서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활주로에 떨어졌다.

"한 번은 한 번입니다."

L은 그 모습을 지켜 본 뒤 날개로 기어 올라 기내로 향했다.

 

속도가 더욱 올라가자 기내는 열린 문에서 불어 든 바람 때문에 큰 혼란에 빠졌다. 항 바이러스 약 가방을 든 L이 쿠조에게로 다가갔다.

"쿠조 씨, 마키 씨를 넘겨 주십시오. 항 바이러스 약은 1인분 밖에 없습니다. 마키 씨를 당신 일에 끌어 들이지 말아 주세요."

쿠조는 마키를 방패로 삼듯이 끌어안고 한 걸음 물러섰다.

"어째서 인간을 구하려는 거지?"

쿠조의 얼굴에는 사막에 물을 흩뿌리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연민이 떠올라 있었다.

"세계 제일의 명탐정 L, 당신이 있다고 해서 세계가 얼마나 좋은 방향으로 변했지? 당신이 이상으로 삼는 법 질서를 따르는 세계가 얼마나 사람을 구했냐고?!"

쿠조의 말은 비통한 외침으로 바뀌었다. 구원 받지 못한 생명을 대변하며 책망이라도 하듯이. L은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았다.

"사람은 물론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것이니 법률도 완전하지 않지요. 하지만 법이란 사람들이 살아 온 역사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을 지키려 했던 마음의 결정체입니다. 저는 정의와 그 이름 밑에서 희망을 품어 온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법 아래의 정의를 믿으며 지켜 갈 것입니다. 제가 L인 이상은 계속."

L의 말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숙명이고 사명이자 L이 'L'이라는 존재 의의라도 된다는 듯이. 쿠조에게는 그 모습이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해 돌진하는 미친 기사도 정신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어째서 당신은 인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사람의 어리석은 모습과 추한 모습을 그만큼이나 봐 왔으면서…. 그래도 사람을 믿을 수 있다니, 당신은 공룡만큼이나 둔감해."

쿠조는 코웃음을 쳤다. L을 비웃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지만 L의 진지한 표정 앞에서는 효과가 없었다.

"쿠조 씨, 당신이 그렇게까지 인류에게 절망을 느끼는 이유는 와미즈 하우스에 있었던 게 원인입니까?"

"알고 있었나? L." "얼굴을 바꾸고 정체를 감추어도 와미즈에서 배운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내 행동의 이유도 알겠지?" "아니, 모르겠습니다."

L은 딱 잘라 대답했다.

"당신이 15세 때 수행한 작전을 계기로 와미즈에서 떠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전에서 당신은…."

"말하지 마!" 비명과도 비슷한 소리를 지르며 쿠조가 말을 잘랐다. 자조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을 지으며 L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작전은 성공했어. 하지만 결국 나는 마지막에 실수를 저질렀어. 구출한 인질이 사실은 테러 주모자의 아이였고, 그 아이에 의한 자폭 테러가 테러 조직 측의 진정한 목표였다니…. 많은 희생자를 내고 나는 와타리의 신뢰에 부응할 수 없었어…."

16세에 와미즈에서 도망치듯이 떠난 이후의 나날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났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 지나치게 컸던 이상, 거듭되는 좌절…,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세계의 현실 속에서 쿠조의 마음은 점차 어둠에 휩싸였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L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쿠조가 떠난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와미즈에 들어와, 쿠조를 대신해 전 세계의 경찰을 움직이는 자리에 앉은 고생도 모르는 과보호 명탐정님이. 사람을 깔보다니…하고 쿠조는 노려보았지만 뜻밖에 L은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고 쿠조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래, 그리운 누군가….

"쿠조 씨, 당신에게 와미즈의 알파벳이 붙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생각지 못한 말이라 쿠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가…, 와미즈를 버린 내게 알파벳이 붙어 있을 리가 없어."

와미즈 출신자에게 있어 '알파벳을 가진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한 시대에 26인 밖에 존재하지 않는 '와미즈의 알파벳'으로서 세계를 바꾼다는 뜻이었고, 여러 가지 형태로 지구 규모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소집되었던 역대 알파벳 소지자로 이름을 남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와타리에게 인정 받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와미즈의 'K'입니다. 와미즈에서 나가는 당신에게 와타리가 보낸 말이 당신의 알파벳이 되었습니다."

쿠조는 희미한 목소리로 L의 말을 되새겼다. 잠겨 있던 문을 열듯이. "와타리가 보낸 말…."

L은 웃었다. 장난스럽게, 그리고 앞서 알파벳을 가진 선배에 대한 경의를 담아.

"KEEP YOUR WAY─믿고 있는 길을 나아가도록 해라─."

쿠조에게 간결하면서도 애정이 가득한 말이 다가왔다. 눈 앞의 L에게 와타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쿠조의 마음 속에 줄곧 그 존재를 지워 버리려 해 왔던 와타리의 웃음이 되살아났다. 부모를 잃고, 모든 희망을 잃고, 마음을 닫고 있던 어린 자신을 맞아 주었던 따뜻한 미소가. L은 똑같은 웃음을 띠고 쿠조를 지켜 보고 있었다.

"당신이 와미즈를 떠난 뒤에도 와타리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K'라는 알파벳을 주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위해 간직해 둔 'K'를 'KILL'이라는 이니셜로 폄하할 생각입니까?"

쿠조의 손이 방패로 삼았던 마키에게서 떨어졌다. 마치 지금껏 걸쳐 왔던 눈에 보이지 않는 갑옷을 벗어 던진 것처럼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 L을 덮쳐 왔다. 갑작스런 일에 미처 피하지 못한 L은 통로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걸 이리 내 놔!"

정신을 잃고 있던 마토바였다. 단 한 사람 몫의 항 바이러스 약을 빼앗으려고 눈을 뜬 뒤에도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을 멸망시키려 한 주제에 자신의 목숨은 아까운 모양이군요." "시끄러워!"

좁은 통로에서 좌석에 부딪히면서 몇 번이나 상하가 뒤바뀌었다. 위에 올라 타 L을 때려 눕힌 마토바가 이겼다는 듯이 주사기를 손에 들었다.

"아직입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L의 시선은 마토바가 아니라 그 머리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체가 흔들리는 통에 열리고 만 짐 칸에서 커다란 서류 가방이 떨어져 마토바를 직격했다.

"큭!" 주사기가 마토바의 손에서 떨어져 마키의 발치에서 뒹굴었다.

"마키 씨, 얼른 그 항 바이러스 약을 맞으세요!"

그 때 코스에서 벗어난 비행기가 흔들리며 그 와중에 날려간 쿠조가 마키의 옆에 쓰러졌다. 마키는 한순간 망설인 뒤 주사기를 손에 들고 쿠조의 팔에 항 바이러스 약을 놓았다.

"마키, 어째서?" 쿠조는 아연해서 마키를 바라보았다.

"쿠조 씨는… 아빠랑 똑같아." "똑같아?"

"아빠는 자신의 연구로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늘 말했어. 하지만 좀처럼 잘 되지 않아서 언제나 괴로워 했지. 쿠조 씨도 그랬던 거야. 역시 쿠조 씨는 사실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

그렇게 말한 마키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복수심과 증오심으로 덧칠되어 있었던 쿠조의 마음을 그 어떤 말보다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마키, 아버지를 죽인 내가 밉지 않아?"

마키는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걸 확신한 듯이 힘차게 말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 눈 앞에서 괴로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구해야 하는 법이야. 게다가 나보다 쿠조 씨가 살아 남는 편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으니까."

"아버지를 죽이고 세상 사람들을 죽이려 한 나를…, 그래도 믿고 있다는 거야?"

웃음을 지은 마키의 눈가에서 피가 섞인 눈물이 한 줄기 흘러 내렸다.

"태어날 때부터 나쁜 사람은 없고 사람은…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아빠가… 말했…어…."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 말을 남긴 마키는 혼수 상태에 빠져 들었다. 쿠조는 어쩔 도리도 없이 마키를 끌어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단 한 사람 몫밖에 없었던 항 바이러스 약을 빼앗기자 잠시 넋을 잃었던 마토바는 옆에 있던 여자가 끌어안고 있던 아기를 빼앗아 열린 문으로 달려갔다.

"L, 몇 번이나 나를 방해할 셈이냐! 이 아이의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항 바이러스 약을 가져와. 더 있을 테니까!"

아기의 어머니가 울면서 마토바에게 매달렸다. 그녀를 걷어찬 마토바는 뺨의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사신 같은 웃음을 띠고서 아기를 붙잡은 팔을 비행기 바깥으로 내밀었다.

"이 아이가 자랐을 때의 지구는 지옥이다. 지금 죽는 편이 행복할 테지."

"쿠조 씨, 동료 분을 말려 주세요."

"마토바 씨, 이제 그만 두세요. 인류의 미래를 뒤흔들려는 짓은. 미래를 선택할 권리는 그 아이나 마키 같은 미래의 어른에게도 있어요."

"입 닥쳐! 쿠조." 격렬한 바람 속에서 마토바와 L, 쿠조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며 대치하고 있었다.

그 무렵 조종석에서는 페어맨이 과격하게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빌어먹을! 문이 열린 상태로는 떠오를 수가 없어."

초조한 나머지 조종간을 두드린다. "이렇게 되면… 플랜 G로 갈 수밖에 없겠어."

페어맨은 뭔가를 찾아 헤매듯이 공항 안을 둘러 보며 다시 조종간을 움켜 쥐었다. 커다랗게 코스를 벗어나자 기내는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균형을 잃은 마토바는 아기를 끌어안고 있는 탓에 한 손으로 문 틀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활주로 옆의 조명에 뒷바퀴가 올라타자 다시 비행기가 크게 요동쳤다. 마토바는 아기를 안은 채 비행기 밖으로 떨어졌다. 어머니의 절규가 울리는 가운데 L보다도 먼저 쿠조가 문으로 달려가 떨어지는 마토바의 손에서 빼앗듯이 아기를 안아 들었다. 쿠조는 자신이 한 행동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아기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직 내게는 순수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나?

팔 안의 조그만 생명은 위험에 빠졌던 일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꺅꺅 웃으면서 쿠조에게 작은 손을 뻗었다.

추락한 마토바는 타코야키 판매 차의 지붕에 직격해 나뒹굴며 활주로에 내팽개쳐졌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고개를 들어 비행기가 향하는 곳을 보고는 처절한 웃음을 띠었다.

"L, 체크 메이트…다." L의 뒤를 이어 날개에 기어 오른 스루가가 기내에 뛰어 들었다.

"류자키, 위험해. 연료 보급용 트레일러에 부딪쳐 자폭할 생각이다!"

"스루가 씨, 콕핏으로!" "알았어."

스루가가 잠긴 콕핏 문을 권총으로 파괴하고 걷어찼다.

"페어맨! 숙명의 대결이라고 해야 하나?"

스루가는 페어맨의 허벅지를 권총으로 쏘아 버리고 신음할 새도 없이 무릎으로 턱을 가격해 뇌진탕을 일으켰다. 거칠기는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고 끝나도록 한, 스루가 나름대로의 '상냥한' 처치였다. 기장석에 앉은 L은 콘솔의 갖가지 스위치를 재빨리 조작해 엔진을 정지시키려 했다. 밖에서는 타코야키 판매 차를 운전하는 마츠다가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 비행기를 앞질러 트레일러를 이동시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전수는 없었고 열쇠도 꽂혀 있지 않았다.

"이렇게 된 바엔…." 다시 차에 올라 탄 마츠다는 닥쳐 오는 UA718편을 향해 달려들었다. 앞바퀴의 바로 정면에서 급 브레이크를 걸어 차를 세우고 간발의 차로 뒹굴 듯이 뛰어 내렸다.

"늦지 않길!" L과 스루가와 마츠다가 동시에 외쳤다.

비행기의 거대한 앞바퀴가 차에 부딪혔다. 압도적인 중량 차 때문에 차는 버티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윽고 와지직거리는 파괴 음과 함께 비행기의 앞바퀴가 차에 올라타 짓눌러 버렸다. 약간이긴 하지만 비행기의 속도가 떨어졌다. UA718편은 노즈를 트레일러의 연료 탱크에 텅 부딪히면서 정지했다.

폐쇄된 활주로에 국적 불명의 수직 이착륙 전투기가 강제 착륙했다. "늦지 않은 모양이군요."

캐노피가 열리며 뒷자리에서 타카하시가 기어 나오듯이 내려왔다.

"류자키! 너, 이런 걸 집 앞에 착륙시키다니, 인근의 지붕 기와가 다 날아가 버렸잖아! …자, 의뢰했던 물건이다."

"때 맞춰 오셨군요. 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에게 명령해서 L은 착란 상태였던 기내 승객에게 차례로 항 바이러스 약을 접종했다. 쿠조는 넋이 나간 듯 통로에 주저앉아 있었다.

"쿠조 씨, 마키 씨에게도 항 바이러스 약을 놓아 주세요." L이 쿠조에게 주사기를 건넸다.

"쿠조 씨, 아니…, 와미즈의 K, 인간은 분명히 어리석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변할 수 있는 생물이기도 합니다. 마키처럼 정의감을 가진 아이들이 그 순수한 마음 그대로 어른이 되어 준다면 세계는 변하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마키를 지켜보던 L의 시선이 그대로 쿠조를 향했다.

─이 얼마나 강하고, 또한 다정한지….

확고한 희망이 담긴 눈길에 압도된 쿠조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좌절과 고독, 그리고 절망…. 그런 것들을 넘어서 희망을 향해 '믿고 있는 길'을 나아갔던 사람이야말로 가질 수 있는, 강철 같은 강함과 햇빛 같은 다정함이 거기에 있었다.

"K…, 어떤 천재라도 혼자서는 세계를 바꿀 수 없습니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우리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도와 주는 일 뿐입니다. 죄를 보상하고 나면 마키 같은 어린이들을 위해 당신의 능력을 사용해 주세요."

쿠조는 L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쿠조는 L의 수명이 앞으로 이틀 남았다는 사실은 모른다. 그러나 L이 지금 뭔가 소중한 것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었다. 마키의 팔에 주사를 놓은 쿠조는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마키 씨에게서 배웠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무릎을 꿇은 L은 쿠조와 마키를 두 팔에 단단히 끌어 안고서 위로하듯이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조직 멤버는 차례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임무는 끝났어, 와타리. 뭔가 달콤한 것을…."

L은 있을 리 없는 와타리에게 말했다. 평소에는 임무가 끝나고 나면 L이 아직 먹어 보지 못한 과자를 와타리가 은 쟁반에 가득 담아 준비해 주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은 필요 없을 것 같군." L은 연행되는 쿠조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중얼거렸다. 수갑을 찬 쿠조는 자신이 '믿고 있는 길'을 결정한 것처럼 똑바로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L에게 있어 어떤 과자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달콤함─미래의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와타리, 이 세계에서 조금 더 살아 보고 싶어졌어."

전투기 파일럿이 손에 든 컴퓨터를 L에게 펼쳤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L."

기계 변환된 음성이 L에게 말한다.

"퍼즐의 대답은 이틀 뒤에 전 세계에 공표하겠습니다."

"합중국도 어려운 입장에 몰리겠군요. 하지만 이걸로 K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겠지요."

L은 컴퓨터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알파벳 한 글자, 'N'이 표시되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니아…."

 

 

---

 

     

ℒ 0-1

재회

   

마키가 눈을 뜨자 그 곳은 병원이었다. 마키는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유리로 가로막힌 격리실 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 살아 있어?"

바이러스에 의한 고열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은 단편적으로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상처 투성이가 되어서도 약속대로 자신을 구하러 와 준 류자키의 모습이었다.

"마키, 이제 괜찮아." 오염 방호복으로 몸을 감싼 세 사람이 마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글 너머였지만 스루가와 타카하시 부부가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루가 씨, 류자키는?"

"벌써 가 버렸어. 마지막 임무의 마무리를 해야만 한다나 봐."

"그렇구나…."

스루가는 창가에 서서 도쿄 방향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류자키는 바보 같은 녀석이야. 있지도 않은 데스 노트와 있지도 않은 다른 L을 꾸며 내서 자신이 죽은 뒤의 세계까지 걱정하다니."

─게다가 내 걱정까지….

FBI의 직장을 잃은 스루가에게 L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 왔다. L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스루가 씨, 직장을 잃은 당신에게 와미즈에서 평생 곤란하지 않을 만한 경제적 원조를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기를 바라지는 않죠? 그러니까 저는 스루가 씨의 재취업을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와미즈 하우스의 'N'과 함께 행동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스루가 씨의 행동력은 틀림 없이 N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N이라면?"

"니아라고도, 넥스트라고도 불립니다. 'L에 필적하는 사람'으로서의 'NEAR'이며, 'L을 계승할 사람'으로서의 'NEXT'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보다 더 다루기 힘들지도 모릅니다만…."

그렇게 말한 L은 주머니에서 추파춥스를 꺼내어 스루가에게 초청장과 함께 건넸던 것이다.

"저기, 스루가 씨, 류자키의 마지막 임무라니?"

스루가는 고글 너머로 마키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마키 같은 아이들이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만들기 위한 임무야."

아, 맞다 하고 말한 스루가가 유리 너머에서 뭔가를 내밀었다.

"류자키가 마키에게 주는 선물이라던데."

그것은 사인 볼이었다. 타이거즈야? 하고 마키는 흥분한 눈치였지만 적혀 있는 것은 류자키의 이름이었다.

"마키 씨, 몸은 괜찮은가요? 다시 만나요."

그 메시지를 본 순간, 마키는 이제 두 번 다시 류자키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과자를 흘리며 먹는 류자키. 손톱을 깨물며 구부정하게 걸어 다니는 류자키. 오빠처럼, 때로는 동생처럼,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처럼 대해 준 류자키. 그리고…, 그리고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 준 소중한 류자키. 마키의 가슴 속에 류자키의 여러 모습이 떠올랐다.

"류자키, 농담 잘 하게 됐네."

마키는 유리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미소 지었다. 아버지의 몫까지, 그리고 류자키의 몫까지 살아 가겠다고, 계속해서 살아 가겠다고 굳게 굳게 다짐하면서.

 

     

ℒ 0-2

친구

   

키라 사건이 종결되고 20일이 지나, 야가미 소이치로도 평소의 경찰 업무로 막 복귀한 참이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한 소이치로는 가방과 웃옷을 아내인 사치코에게 건넨 다음 제일 먼저 라이토의 사진 앞에 앉아 합장했다. 라이토가 죽은 뒤 고교와 대학 친구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제단에 놓인 꽃으로 둘러싸인 라이토는 사진 속에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라이토는 키라에게 죽었다…'. 그것은 진상을 알릴 수 없는 사치코와 딸 사유를 납득시키기 위한 슬픈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이치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라이토는 정말로 키라에게 죽었다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으며 그들의 행복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 라이토. 그렇기 때문에 데스 노트를 얻고서 악인을 죽여서라도 세계를 올바르게 이끌겠다는, 누구나 지닌 '마음 속의 키라'의 유혹에 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바란 다정한 사회'라고 라이토는 말했다. 키라에 의한 재판이 중단되고 3주일이 지나자 '키라 부활'을 외치는 목소리에 발 맞추어, 세상의 범죄 발생 건수는 키라 출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법의 정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력하고 허울 좋은 말인지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소이치로는 키라를, 라이토를, 자신의 아들을, 온 힘을 다해 부정해야만 했다. 형사로서, 라이토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오늘도 라이토의 친구가 와 줬나 보군?"

사진 앞에 새로 놓인 공양물을 보고 소이치로는 사치코에게 물었다. 사치코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예, 라이토의 대학 친구라는 사람이 왔었어요. 이름이…, 누구였더라, 사유?"

사치코는 이름을 생각해 내려고 허공을 노려보며 딸인 사유에게 도움을 청했다.

"뭐였더라? 어쩐지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의외로 그런 타입이 오빠랑 마음이 맞을지도 몰라."

두 사람 다 소이치로의 앞에서는 슬퍼하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 밝게 행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소이치로는 한층 더 가슴이 아팠다.

"아니…, 안 들어도 알겠어."

사진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만쥬 다섯 개를 꼬치에 꿴 거대한 꼬치 경단이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사치코, 사유. 다시 나갔다 올게."

소이치로는 방금 막 벗었던 웃옷을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류자키…, 돌아왔었나."

 

     

ℒ 0-3

약속

   

"대통령, L입니다." "음…."

애타게 기다렸던 핫라인이었지만 대통령은 신중했다. 그가 어느 L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에 골몰했던 탓인지, 기계 변환되기는 했지만 L의 목소리는 대통령을 안심시키려 하는 것처럼 들렸다.

"L`을 포획하고 데스 노트는 회수했습니다. L`은 저희들 L이 데스 노트로 죽이겠습니다. 시체는 한 시간 뒤에 일본의 키라 대책실로 확인하러 와 주십시오."

"그러면 데스 노트는?"

"데스 노트는 저희들 L이 영원히 봉인하겠습니다. 두 번 다시 사용되지 않을 겁니다. 이 사실은 대통령 당신과 당신의 뒤를 이을 역대 대통령의 가슴 속에만 간직해 주십시오."

"알았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에게 있어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L이 죽고 데스 노트를 손에 넣는 것이었지만, 우선은 협박한 L의 사망이 확인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했다. 

L의 말투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바뀌었다.

"그런데 대통령, 마지막으로 저희들 L도 당신을 협박해도 괜찮을까요?"

"무슨 뜻인가! L?" 대통령은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손에 든 채 벌떡 일어났다. 생각하고 있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아이들이 웃음을 잃지 않을 미래를 만들겠다, 그렇게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혹시 약속이 깨어지면 그 때 저희들 L은 주저 없이 봉인을 풀고 데스 노트를 사용하겠습니다."

L의 목소리는 어느 새 기계 변환되어 차가운 목소리가 아니라 원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 듣는 L의 목소리, 그것은 대통령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날카로우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은 어린 아이 같은 목소리. 정의를 지켜 나가기 위한 무거운 중압감을 한 몸에 짊어지고, 아무도 없는 황야를 헤매는 것처럼 고독과 싸우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고고한 목소리. 정의란 '강함'이며 '다정함'이라는 사실을 믿어 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조용하고도 은밀한 힘이 느껴지는 희망의 목소리. 대통령은 법의 정의(로우라이트)를 지켜 온 남자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말했다.

"알았네. 약속하지, L."

 

     

ℒ 0-4

여행

   

야가미 소이치로가 키라 대책실을 나서자 마츠다가 달려왔다.

"류자키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혼자 있게 놔 두세. 시간이 됐어."

마츠다는 절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포기하고 슬픈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류자키…." 마츠다는 키라 대책실을 향해 경례를 했다. 그것은 함께 싸워 온 동료에 대한 최대한의 전별(餞別)이었다.

 

소파 위에서 평소처럼 두 다리를 끌어안고 앉은 L은 '미국 대통령'이라고 휘갈겨 적은 휴대 전화를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그와는 반대로 소중한 듯이 판 초콜릿을 꺼냈다. 마키에게서 받은 초콜릿이었다.

"마키 씨, 지금쯤은 눈을 떴을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라이토의 유품인 손목시계를 풀어 와타리의 사진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라이토 군, 이제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무'의 세계란 어떤 것인지 함께 탐색해 봅시다."

L은 홀로 남은 작전실에서 판 초콜릿을 갉아 먹으며 혼자서 체스를 두었다. 그러나 L에게는 그 상대가 보였는지도 모른다.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듯이 장기 말을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와타리, 당신과 체스를 두는 건 오랜만이군."

"이제야 느긋하게 둘 수 있겠군요."

"나는 어릴 적부터 도저히 체스로는 당신을 이길 수 없었지."

"그랬지요. 오늘도 봐 주지 않을 겁니다."

한동안 장기 말을 움직이는 소리만이 작전실에 조그맣게 울렸다. 그것은 마음이 통한 사람만이 자아낼 수 있는 이중주처럼 친밀하고도 따뜻한 소리였다. 문득 L은 고개를 들어 어린 아이처럼 불안한 표정으로 와타리를 바라보았다.

"와타리, 나는 당신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나?"

와타리는 평소와 다름 없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간결하고, 정확하고, 그리고 애정으로 가득한 그 말을.

"충분히."

L은 안심한 듯이 천진한 웃음을 띠었다.

와타리의 나이트가 L의 킹 앞에 천천히 놓였다.

"L, 체크 메이트입니다."

와타리의 목소리가 위로하듯이 다정하게 그 '때'를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