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권 -3- 수요일의 생각, 금요일의 배틀

수요일의 생각, 금요일의 배틀(水曜日の物思い、金曜日のバトル)

 

 

1

 

"어떻게 된 거야, 유미양."
수요일 아침, 교실에 들어오자 마자 카츠라양이 날아왔다.
"뭐, 뭐가?"
자기 자리에 가려는 유미를, 어깨를 안고 사물함 앞으로 연행해 갔다. 뭔가 나쁜 일이라도 상담하는 것처럼, 카츠라양은 목소리를 낮춰 물어왔다.
"유미양이 산백합회 간부 주최의 연극에 나간다고 온통 소문이 퍼져 있어."
"나간다곤 해도,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서 춤추는 것 뿐인데."
유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상대가 로사 페티다 안 뷔통이라고."
"응......, 뭐어."
"정말이야!?"
카츠라양의 목소리는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티시모로 급격히 바뀌었다. 귀가 아파질 정도의 그 목소리 덕에, 소근소근한 것도 헛수고. 아직 알아채지 못했던 다른 클래스메이트들도 유미의 모습을 알아차려 버렸다.
"유미양, 안녕하셔요(ごきげんよう)"
"안녕하셔요(ごきげんよう), 유미양."
천사같이 웃음띤 얼굴이 집단으로 다가온다. 너무 많으면, 그것도 나름대로 무서운 거라고 생각했다. 병아리떼라던가, 사람 아기들의 집단 같은 게 다가오면, 마찬가지로 싫겠지.
"저희들, 마침 유미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예, 예에."
그야, 그저께 장미의 관에서 있었던 일이 다음 날 고등부 전체에 퍼져 있었던 걸 생각하면 어제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이 간단히 퍼져나가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증인의 수가 약 세배에 달하니까. 우리 반의 무용부원도 거기 확실히 있었고.
"저기, 이참에 확실히 가르쳐줄 수 없을까요?"
"사치코님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거 정말이에요?"
"그런데 왜 같이 다니시는 건가요?"
"유미양은 산백합회 간부 그룹 중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계신 거에요?"
"어느 언니를 제일 좋아해요?"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만큼, 클래스메이트들은 댐이 무너진 듯 질문을 던져 왔다.
"에에 그러니까......"
아가씨 학교의 학생들에다, 평균내면 역시 아가씨도가 높다고 생각되는 소녀들이라고 해도 어차피 여자. 누가 누구랑 사이가 좋다거나 하는 소문을 역시 너무너무 좋아하는 모양이라. 이게 어딘가의 위원회가 집단으로 학교 비품을 사유물화 했다거나, 그런 화제라면 이렇게까지 소란스러워 질 일도 없겠지.
"왜 그러세요. 유미양. 부디 마음껏 말씀해주세요."
그런 식으로 멍석을 깔아도... 애초에 수가 너무 많아서 맨처음 질문이 뭐였는지 벌써 잊어버린 참이었다. 질문에 하나씩 대답하자면 끝이 없다. 게다가 다들 답변을 듣기도 전에 나름대로 결론을 준비해 둔 것 같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하더라'
곧바로 사치코님을 떠올렸다.
'에에, 사치코님은'
허둥지둥 소란피우지 말고, 생긋 우아하게 웃고서--
"여러분, 소란피우게 해서 죄송해요."
우아하게, 라는 건 무리였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유미는 스스로 평가했다. 점수로 따지자면 75점 정도일까나.
"사정이 있어서, 산백합회 간부 주최의 연극을 돕게 되었어요. 간부 여러분들이 말을 걸어 주시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유미가 확실히 말하자, 의외로 다들 순순히 물러났다.
분명히, 자신은 아무것도 꺼림직한 일을 한 적이 없다. 로사 키넨시스나 로사 기간티아가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도, 레이님이 파트너가 되어 주신 것도, 단지 그녀들이 친절하기 때문이고, 상대가 유미라서 특별취급이라는게 아닌 것이다.
"그럼, 사치코님 건은?"
그 중에 한 사람이 물었다.
"사치코님?"
"사치코님이 스-루가 되어 달라고 하셨다는 거, 정말이에요? 유미양은, 그걸 거절했다고들 하던데.."
그걸 듣고싶었다는 듯, 모두들 '응응' 하며 끄덕인다.
"사치코님은"
대답하려고 하고는 말문이 막혔다.
"사치코님은--"
어라, 뭐였지? 사치코님이라면, 어떻게 하더라?
에 그러니까, 사치코님이라면, 아마 생긋 웃고는 이렇게 말할 거야. --상상에 맡기겠어요.
하지만, 유미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었다. 상상에 맡기겠어요, 라는건 어떻게 생각되건 상관없다는 것으로, 자기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 말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치코님이 정말로 나같은걸 스-루로 선택하실 리 없잖아."
아, 안돼. 직접 말로 해 보니까, 눈물도 같이 흘러 버렸다.
"유미양!?"
유미의 갑작스런 눈물에, 클래스메이트들은 우왕좌왕했다.
"어머나, 어떡하지. 죄송해요, 저희는 울리려고 물어본 게 아니에요. 이제 됐어요, 말하고 싶지 않다면 그걸로 괜찮아요."
유미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클래스메이트들의 공격을 피하려고 운 게 아냐.
유미는 사치코님이 좋아서.
지금도 좋아서. 좋아하기 때문에, 최후의 자존심으로 사치코님을 거절했다.
어쩌다 마침 근처에 있던 누군가, 라는 건 너무나도 슬프다. 어째서 사치코님은 그걸 모르시는 걸까.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편이 차라리 더 행복했다. 유미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치코님이라면, 실수로라도 로사리오를 내밀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과는 정반대의 행동같은거 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미안해요. 저기, 그만 울어요."
클래스메이트들은 손수건을 내밀고, 어깨를 감싸안아 주었다. 하지만 유미가 정말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사치코님이었을지도 모른다.

 

 

2

 

"자"
건네진 것은, 한권의 책자였다. 간단히 묶어 놓긴 했지만, 제대로 컴퓨터로 프린트 되어있다.
"리리안 여학원 산백합판 신데렐라......"
유미는 표지의 장식 문자를 소리내어 읽어 보았다. 신데렐라의 대본인 모양이다.
"그래. 형광펜으로 핑크색과 파란색 표시를 해 뒀으니까"
"니까?"
"외우는게 당연하잖아?"
사치코님은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외우는게, 라뇨--"
팔락팔락 넘겨 보니, 대부분 핑크, 파란색 같은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잘 들어, 나한테 같은 말을 두번 세번 말하게 하지 마. 학원제때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핑크와 파랑을 외우는 거야"
"예, 예에"
라고 하긴 했지만, 다시 잘 보고는 흠칫 했다. 핑크색은 전부 신데렐라 대사잖아요. 파란색 쪽은 언니 B라고 되어 있다. 들어보니 일인 이역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인원부족이라,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유미에게는 언니 B가 맡겨져 버린 모양이다.
뭐어, 신데렐라 할 것을 생각하면 언니 한둘쯤 기꺼이 하겠지만요.
"그건 그렇고, 왜 이런 데서 점심 먹고 있는 거야?"
사치코님은 머리 속에 떠오른 질문을, 1학년 복숭아반의 세명에게 날렸다. 그녀는 점심시간에 유미를 찾아왔지만 없었기 때문에, 츠타코양의 안내로 여기까지 이끌려 온 것이었다. 유미와 시마코양은 신문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어제와 마찬가지로 강당 뒤쪽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말이죠, 사치코님."
츠타코양은 가져온 빵의 비닐 포장을 뜯으며 말했다.
"깊은 듯 하면서도 얕은 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그다지 츠타코양까지 신문부에게서 숨어다닐 필요는 없는 거지만, 어제 유미를 도망치게 한 것이 조금 꺼림직한 모양이다. 츠타코양이 여차저차 이래저래 설명을 끝내자, 사치코님은 '흐응' 하고 흥미없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 학교 신문부는 취재방법이 억지스러우니 도망치고 싶은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비라도 오면 어쩌려는 거야?"
"곤란하죠오."
하지만 사진부 부실로 도망쳐 들어가면 되는 츠타코양은, 그다지 곤란하지 않을 것이다. 시마코양도 유미와 같이 있어 주고 있을 뿐으로, 밖에서 먹어야만 할 이유같은 건 없다.
"내일쯤 쏟아질 거 같아."
"엣!?"
유미는 당황해서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지만 잘 개어 있는 오늘 하늘을 올려다 봐 봤자 내일 날씨까지는 예상할 수 없다.
"로사리오를 받아. 그러면, 내가 대신 인터뷰를 해주겠어."
"농담도."
"그래? 그럴 생각이 되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사치코님은 즐거운듯 웃으며 등을 돌렸다.
"저, 사치코님, 괜찮으시면 함께 점심 드시는 건 어떠신가요?"
츠타코양이 불러세웠지만, '모처럼인데 미안하지만' 하고 거절당해 버렸다. 굳이 도시락을 가지러 교실에 돌아가면서까지 이 멤버와 식사를 하고 싶냐고 생각해 보면, 그건 당연한 결론이겠지.
"사진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놓쳤다."
고개를 움츠리는 츠타코양에게 시마코양이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사치코님은 벚꽃도 은행도 싫어하시니까."
"벚꽃도 은행도?"
유미는 되물었다. 그래서야, 이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고통이잖아.
"그래. 시기적인 거야, 나와 딱 정반대"
벚꽃이 피는 시기, 은행나무 열매가 떨어지는 시기. 사치코님은 조금 우울해진다.
"알레르기라던가?"
"아냐. 그 분은 단순히 좋고 싫고의 문제."
왠지, 어딘가에서 들은 듯한 이야기였다. --두드러기가 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손을 잡는 건 싫다.
"맛이 없으니까 보기도 싫다는 것 같아."
"벚꽃을 먹는 거야?"
"유미양, 전통 결혼식에 가본 적 없지?"
츠타코양이 깔깔 웃었다. 들어보니 경사스러운 자리에는 벚꽃탕(湯)이라는게 나온다는 것 같다. 분명히 딱 한번 가본 적 있는 사촌언니 결혼식은 교회에서 했었으니까 그런 건 없었던 것 같다.
"단팥빵에도 올려져 있을 때가 있지."
단팥빵이라는 것도 시마코양 이미지랑은 좀 먼 걸,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시마코양은 벚꽃을 좋아하고, 은행을 좋아하고, 삶은 콩을 좋아하고, 백합뿌리를 좋아하고. 사치코님은 벚꽃을 싫어하고, 은행을 싫어하고, 동정받는 걸 싫어하고, 남자를 싫어한다.
"그러니까 말이지"
시마코양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유미양을 찾으러 온 거, 놀라운 일이야."
방과 후라도 괜찮을 텐데, 조금이라도 빨리 전해주고 싶었던 거구나-. 하며 가리킨 대본의 뒷표지를 보자, 예쁜 글씨로 오가사와라 사치코라고 적혀 있었다. 사치코님은 자신이 쓰던 대본을 가져와 주신 것이다.
거기다, 굳이 언니 B의 대사에 형광펜으로 표시하는 작업까지 하고서.
"전혀, 어울리지 않아."
유미는 마리아님의 마음같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 같은건 거의 없는데, 어떻게 내일 비가 온다는 예보를 할 수 있는 걸까.
시마코양은 벚꽃을 좋아하고, 은행을 좋아하고, 삶은 콩을 좋아하고, 백합뿌리를 좋아하고. 사치코님은 벚꽃을 싫어하고, 은행을 싫어하고, 동정받는 걸 싫어하고, 남자를 싫어한다. 츠타코양은 사진을 좋아하고, 여자아이 피사체를 좋아하고, 신문부는 조금 어려운 상대.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벚꽃은 좋아하지만 은행은 싫어한다.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는 일을 해 버리는 사치코님은, 역시 멋지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3

 

창문에 앉아서 밖을 보고 있던 로사 기간티아는 유미를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기특해라.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었어?"
이래서야, 무슨 보호자없이 집에 잘 돌아간 유치원생도 아니고.
"언니 B의 역을 받은 이상 오지 않으면 죄송하잖아요."
"호오, 비꼴 여유도 생겼나. 좋아좋아."
로사 기간티아는 살짝 웃으며 바닥에 내려선 후 유미의 머리를 착하지 착하지 했다.
"너무 빨리 와 버린 것 같네요."
장미의 관 2층에 있는 방에는 둘 뿐이었다.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마실 건 아무거나 좋아하는 거 셀프 서비스."
퇴창에는 로사 기간티아가 막 마시려던 것 같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건 뭐에요?"
"순수한 인스턴트 커피에 뜨거운 물 부은 것. 이걸로 하려면 설탕 같은 건 알아서 찾으렴."
"하아."
그럼 사양않고, 라는 듯이 뒤집어 둔 찻잔에 인스턴트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포트의 물은 제대로 데워져 있었고, 간단히 찾아낸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덕에 인스턴트인데도 꽤 맛있게 되었다.
"유미쨩, 청소는?"
"아, 합창부에게 음악실을 점령당해버렸어요. 끝나면 가기 전에 청소까지 해준다고 해서."
휘저은 스푼을 싱크대에 놓으면서 유미는 대답했다.
"학원제가 다가오니까 말이지. 어디든지 난리구나."
로사 기간티아의 혼잣말은 꼭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신데렐라 공연도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일 텐데.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도 괜찮은 걸까, 하고 절로 걱정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열흘이 채 안남았는데, 아직도 배역교대 같은 걸 하고 있고 말이지.
"그런 로사 기간티아야말로, 청소는요?"
지금 고등부는 한창 청소할 시간. 그러니까 유미는 같은 반인 시마코양을 두고 혼자 온 것이다.
"3학년쯤 되면 요령도 생기는 법이야."
"땡땡이인가요."
"바-보. 산백합회 간부가 땡땡이쳐서 어쩌려고. 본보기가 안되잖아. 그게 아니라, 청소 그룹을 다시 둘로 나눠서 하루씩 교대하며 두배로 청소하고 있는 거야. 뭐, 3학년은 저학년들보다 청소 구역이 적으니까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지만."
그러다 보니 한 그룹의 사람 수가 많아진다. 많은 사람이 빈둥빈둥하기보다 적은 사람이 집중적으로 한다는 시스템인 것 같다.
"에- 좋겠다-."
무심코 말투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왠지 로사 기간티아와 있으면 페이스가 무너진달까, 두 살이나 연상인데도 긴장이 풀려 버리는 것 같아서.
"좋겠지-. 하지만, 우리도 1학년땐 제대로 청소했다구."
"로사 기간티아가, 1학년......"
"뭐야, 그 눈."
유미가 쉰 감탄의 한숨을 꼬집는 듯, 로사 기간티아는 일부러 노려보는 표정을 지었다.
"못 믿겠다 싶어서요."
처음부터 3학년이었던 것처럼 관록이 있으니까.
"칭찬하는 거지?"
"예, 물론."
유미가 힘차게 대답하자, 로사 기간티아는 하하하하하하고 웃고는 다시 퇴창에 걸터앉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보면.
자신에 가득 차 보이는 3학년 언니들에게도 리리안에서의 1년전, 2년전 생활이 틀림없이 있는 것이다. 로사 기간티아도 저학년이었을 때 이전의 로사 기간티아에게 로사리오를 받은 경험이 있었을 것이고, 의식이란 건 그 나름대로 드라마가 붙기 마련이니까 그때는 역시 고민하거나 망설이거나 했던 걸까, 하고 생각하면 조금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저기"
"응?"
"질문해도 될까요?"
"어려운 질문은 싫어."
앞 시간이 수학이었던 덕에, 로사 기간티아의 두뇌는 상당히 피곤해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학년 전체 10등 안을 유지하고 있는 분이라곤 해도, 수식과 잠을 함께 상대하는건 힘든 일이라고.
"로사 기간티아는 왜 시마코양을 스-루로 선택하신 건가요?"
"어렵진 않지만, 보기드문 질문이네. 시마코를 고른 이유 같은 거, 보통 아무도 안 물어봐."
"그건 틀림없이 그렇게 되는게 당연한 사람이니까."
"그래."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우수한 인재니까, 아마 다들 묻지 않아도 납득해버리는 것이다. 아아, 역시, 하고.
"나랑은 정반대."
말하면서 조금 침울해졌다.
"꽤나 자신없는걸?"
"하지만, 새끼줄인걸요."
"새끼줄? 그게 뭐야?"
바로 하루 전의 대화를 로사 기간티아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 해서, 다시 설명하자 '아아, 그랬었지.'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뭐, 이런 건 본인이 제일 잘(끈질기게) 기억하는 법이니까 말이지.
"새끼줄, 좋잖아."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로사 기간티아는 말했다.
"어디가 좋아요?"
"사치코가 계속 쥔 채로 있다는 거?"
로사 기간티아는 인스턴트 블랙 커피를 다 마신 후, 빈 컵을 창가에 놓았다.
"하아"
정말로, 머리가 좋은 사람의 이야기라는 건 가끔 전혀 엉뚱하게 전개되곤 한다. 감성으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니면 기승전결의 '승'과 '전' 부분을 생략해 버리고 있는 걸까. 어쨌거나 알 수 없지만.
"시마코같은 인재는, 산백합회를 위해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아까 질문의 대답이 아니죠?"
"로사 기간티아로서 대답하라면, 맞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이유가 있지. 그건 비밀."
로사 기간티아는 가슴 한가운데를 양손으로 가렸다. 아마도 마음 속에 넣어두겠어라고 말하고 있는 거겠지.
"시마코양은,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응, 맞아. 그것도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우리는 서로가 어딘가 비슷해서, 상대와 거리를 두는 법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같이 있으면 편해."
고등학교 생활도 이제 반년밖에 남지않은 지금까지, 로사 기간티아는 동생을 두지 않았다. 지금 2학년 중에서도 멋진 사람은 많이 있을 텐데. 하지만 그 사람들로는 안 되고, 시마코양이라면 괜찮다고.
"내 생각이지만, 시마코 쪽이 유미쨩을 부럽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나?"
"또 왜 이야기가 그렇게 튀는 거에요?"
너무 갑작스런 이야기다 보니, 약간 식은 커피가 기도로 들어갈 뻔 했다.
"그건 말이지-"
그렇게 말했나 싶더니, 로사 기간티아는 갑자기 유미를 꼬옥 끌어안았다.
"잠......, 로사 기간티아!!"
커피가 쏟아지려고 하는데요.
아니, 그보다. 로사 기간티아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고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이야기가 점점 복잡하게 돌아가서 더 커져버리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때야말로 꼭 뭔가 있기 마련이라.
찻잔의 수평을 유지하면서 벗어나려고 바둥바둥 거리고 있자, 갑자기 몸이 자유로와졌다.
"맏아들이 왔으니 끝."
"맏아들?"
돌아보자 비스킷 같은 문 앞에 사치코님이 서 있었다.
"꽤나 즐거우신 것 같네요. 계단을 삐걱거리면서 올라왔는데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하실 정도로 즐거운 놀이라니."
사치코님은 방에 들어온 후 가방을 의자에 놓았다. 왠지 껄끄럽다, 라고 생각하며 유미는 로사 기간티아의 옆에서 허둥지둥 떨어졌다.
"너무하네에. 사치코가 들어오는게 보여서 서비스한 건데."
로사 기간티아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서비스라고 하셨나요?"
사치코님의 관자놀이가 꿈틀꿈틀 움직였다.
"진심으로 덮친다면, 역시 아무도 안 올만한 곳을 고르겠지."
아. 큰일났다.
결벽증의 사치코님을 일부러 자극하려는 듯한 발언. 어쩌지, 이대로라면 터진다. 터진다, 터진다구--
"아-앗!"
유미는 외쳤다.
"무슨 일이야?!"
로사 기간티아와 사치코님이 거의 동시에 돌아보았다.
"에 그......"
소리쳐 보긴 했지만, 뭘 준비해 두거나 한 게 아니니까 그 다음에 할 게 없다. 어쩔 수 없이, 문득 눈이 간 손목시계를 호들갑스럽게 보고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네. 이제 곧 다른 분들도 오시겠죠? 로사 기간티아, 컵 이제 안 쓰실 건가요? 제가 씻어버릴 께요."
아아, 어째서 이렇게 밖에 못하는 걸까. 다른 누구라도 나보다는 스마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텐데,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뭐 확실히 사치코님의 히스테리는 회피할 수 있었던 것 같지만.
"유미쨩, 착하구나."
로사 기간티아가 어깨를 떨면서 컵을 내밀었다. 눈을 맞추지 않으려는 걸 보면, 틀림없이 웃고 있다. 그녀는 유미에게 작게 속삭였다.
"사치코를 질투하게 해줬어."
"에?"
돌아보자, 로사 기간티아는 으-응 하고 기지개를 켠 후, '자, 그럼 난 아래층 상황이라도 좀 보고 올까.' 하고, 일부러 그러는 티를 내며 설명을 하고 나서 방을 나갔다.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계신 것 같다. 포옹 신을 보여줬다고 해서 사치님코님이 질투해 주실 리 없잖아.
유미는 찻잔 두개를 싱크대로 가져간 후 스폰지에 식기용 세제를 묻혀서 거품냈다. 사치코님은 조금 전 가방을 놓은 자리 옆 의자를 당겨 앉은 후 문고본을 꺼냈다.
'거 봐'
사치코님은 유미 같은 애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있잖아.
"아, 뜨거운 물이 안나오는구나."
가스는 들어와 있지 않는 듯, 온수기가 붙어있지 않다. 별 수 없이 찬물로 헹구면서 지금이 가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엔 수도가 얼기도 해."
"헤에......!"
놀랐다.
수도가 어는 것보다, 유미의 혼잣말을 제대로 듣고 있었던 것에. 독서는 주위를 셧아웃 시키기 위한 사인인가 하고 생각했으니까. 시선 쪽은 여전히 펼친 문고본을 향한 채였지만. 건조대에 컵과 스푼을 놓고 덮개를 덮은 후, 유미는 뒤로 돌아 해서 말했다.
"사치코님, 낮에는 대본 감사했습니다."
팔락, 하고 한 페이지가 넘겨진다. 그 문고에는 어려운 한자들만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좀 훑어 봤어?"
"아, 예에......일단은."
"왜 목소리가 작아지지?"
사치코님은 그제서야 문고본에서 고개를 들었다.
"역시 신데렐라의 대사 전부를 외우는건 좀......"
움츠러들어 우물쭈물 하고 있자, '바보같이' 하고 고마우신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런 것까지 바라진 않아."
그럼 '어떤 것' 까지 바라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사치코님은 문고본을 테이블에 놓고 스윽 일어서서 말했다.
"'나는 붉은 빌로드 드레스를 입고 영국제 장신구를 하고 갈 거야.'"
사치코님, 대체 어떻게 되신 거에요. --하고 순간 흠칫 했지만, 금방 그 말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읽은 거 겠지만, 리리안판 신데렐라의 대본에 그런 글이 적혀 있었던 것 같기도. 파란색 형광펜으로 표시된 언니 B 대사의 하나 앞, 언니 A의 대사다.
왜 갑자기 그런걸 말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사치코님은 유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역시 여기서는 대답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난 평소 입던 스커트로 됐어.'"
각오를 하고, 유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대신, 황금 꽃문양이 붙은 망토를 입고,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할 거야. 그건 꽤 진귀한 물건이니까.'"
겨우겨우 유미가 대사를 끝내자, 사치코님은 다가와서 등 뒤에 섰다.
"'언니, 비녀는 이렇게 하면 되겠어요?'"
장면이 바뀌어, 이번엔 사치코님은 신데렐라다. 산넘어 산. 유미는 열심히 대본의 글자들을 떠올렸다. 에 그러니까-
"'신데렐라. 너도 무도회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아?'"
"됐어."
그렇게 말하고, 사치코님은 유미의 어깨를 살짝 만졌다.
"잘 기억하고 있잖아."
'어라......?'
어째서일까. 갑자기 두근두근해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어깨에 두번 찾아온 여리고 약한 감촉은, '착하지 착하지' 와도, '잘했어 잘했어'와도 달라서 신선했다. 그래서 이렇게 의식해 버리는 걸까. 로사 기간티아가 머리를 쓰다듬어도, 끌어안아도 전혀 심박수는 올라가지 않았는데.
"다들 늦는구나."
사치코님은 갑자기 빙글하고 등을 돌린 후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래서 유미는 조금이나마 숨을 골랐다. 이런 일로 두근두근 하고 있는 자신이 묘하게 부끄러웠다.
"1층에 가셨던 로사 기간티아도 안 돌아오시네요."
"집합장소가 바뀌기라도 한 걸까? 잠깐 보고 올께."
"그럼 저도."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식히면서 유미는 뒤따랐다. 계단을 내려가다 사치코님은 멈춰서서 돌아보았다.
"......를 조심하도록 해."
처음에는 가파른 계단을 조심하라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던 처음 부분의 귀에 약간 남은 발음이 '로사 기간티아'와 비슷한 것 같았다.
"뭘 말씀이세요?"
뒤묻자, 사치코님은 '계단' 이라고 짧은 대답을 한 후 나머지 계단을 삐걱삐걱하며 내려갔다.
'뭐-야'
조금은 신경 써 주신 줄 알았는데.
세상이란, 그렇게 쉽게쉽게 돌아가는 게 아닌 거다.
유미는 사치코님의 가르침을 따라, 한칸 한칸 제대로 밟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4

"아, 내려왔다."
장미의 관 1층에 있는 방에 주요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평소에는 어떤 식으로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연극에서 쓸 대도구, 소도구 창고라고 부르는 게 딱이었다. 방의 거의 반이 물건들에게 점령당해 있고, 나머지 반에 사람 여섯 명이 대본을 들고 서있다.
"오늘은 2층에서 연습할 예정 아니었나요? 아니면 저와 유미에게만 변경 연락이 오질 않았다거나?"
얼핏 온화해 보이는 사치코님의 말투에는 명백하게 항의가 담겨 있었다.
"너희들이 뭔가 바쁘다길래 급히 장소가 바뀌었잖아."
그런 말을 듣다니 의외인걸, 하고 로사 키넨시스가 대답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장미의 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이 방으로 이끌려 왔다는 것이다.
"바쁘다구요?"
사치코님과 유미는 동시에 짐작가는 사람을 보았다. 그러자 로사 기간티아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옆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전혀 발전할 기색이 없는걸, 너희들."
그녀의 변명은 꽤나 제멋대로였지만, 왠지 '너희들' 이라고 불린 두 사람을 제외한 멤버들에게는 지지를 받았다.
"맞아. 학원제 때까지 모처럼 재미있는 꺼리가 생겼는데 왠지 밋밋하지."
"대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사치코도 하루에 한번 로사리오를 내미는 정도로 적극적이 되어 봐."
진지한 말투로 차례차례 날아드는 발언, 정말로 이 사람들이 학생회의 톱인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그녀들이야말로 소문을 흘린 장본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저와 유미에 대해서는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되요. 자, 연습하도록 하죠."
사치코님은 질려버린 듯이 제안했다. 그러자 연습이라는 말에서 기억났는지 로사 키넨시스가 탁하고 손을 쳤다.
"맞아. 유미쨩에게 대본 줘야지. 갑작스런 얘기라 미안한데, 언니 B 부탁해."
"아, 대본이라면 가지고 있어요. 여기."
유미는 사치코님의 대본을 가방에서 꺼내 보였다.
"헤에, 사치코도 꽤 하잖아?
뒷표지에 쓰여진 '오사가와라 사치코'라는 이름을 찾아내고서 로사 키넨시스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다지. 벌써 다 외워버렸으니, 저한텐 필요없는 거니까요."
"또 그런다. 유미쨩, 대본에 로사리오가 끼워져 있진 않았어?"
"엣!"
허둥지둥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기자, 사치코님은 '바보같이. 놀림받고 있는거야' 라고 차갑게 말하고는 레이님과 시마코양이 준비하고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로사 키넨시스는 고개를 숙이고서 어깨를 떨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뭔가가 끼워져 있었다면 당연히 알 수 있었을 거고. 게다가 사치코님이 그런 치사한 짓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할까. 유미쨩 마주보고 왼쪽에 서."
"예."
보아하니 로사 키넨시스가 무대감독인 듯 하다. 그대로 지시된 위치에 서자, 대본을 들고해도 괜찮다고 했다. 확실히 레이님의 손에는 대본이 들려 있다.
"걱정하실 필요없어요."
유미가 뭐라고 하기 전에 사치코님이 대답했다.
"유미는 제대로 대사를 외우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라고 가슴을 펴고 단언하는 사치코님은 굉장히 자랑스러워 보여서, 그런 표정을 만든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어쩌면 이런 나라도 열심히만 하면 기대에 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사치코님을 부끄럽게만 하지 않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사치코님의 아주 작은 행동마저도, 유미를 힘내게 해버리는 것이다.
"실례합니다-."
연습을 막 시작하려는 차, 장미의 관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아, 제가"
어쨌거나 제일 신입이라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유미가 방을 나가 출입구로 갔다. 문을 열자, 여섯 명의 학생이 서 있다가 갑자기 "안녕하셔요" 하고 머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셔요."
유미도 황급히 대답을 했다. 여섯 명은 하나의 그룹이 아니라, 두 명씩 세 조라는 식으로 서 있는 모양도 분위기도 각각 나뉘어있었다.
"수예부입니다. 로사 페티다께 말씀드려 주세요."
"미술부입니다. 로사 기간티아께 말씀드려 주세요."
"발명부입니다. 로사 키넨시스께 말씀드려 주세요."
미리 읽어오지 않은 국어 교과서를 지명당해서 읽는 것처럼, 그녀들은 딱딱하게 긴장해있었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미가 말하고 돌아서자,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봐, 후쿠자와 유미양이야' 하는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그다지 자랑거리도 없는 신참자가 내 것인양 장미의 관에서 손님을 맞는다거나 하는 건 그다지 기분좋은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하고 반성했다. 게다가 현재 유미의 입장이라고 하면 사치코님의 스-루도 뭐도 아닌, '제안을 거절한 분수도 모르는 애'인 거니까 반감을 사도 별 수 없는 것이다.
1층의 방에 가서 세 사람에게 손님이 온 것을 알리자, '들어오시라고 해' 였으므로 조금 껄끄럽지만 여섯 명을 부르러 돌아갔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여섯 명은 인사하고 예의바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다행이야."
수예부의 한명이 현관에서 말했다.
"갑자기 로사 키넨시스가 나오면 어쩌지 했었거든. 하지만 유미양이었잖아?"
"에?"
문을 닫으며, 유미는 귀를 의심했다.
"장미님들은, 동경하긴 하지만 역시 다가가기 어려워서. 유미양은,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친해지기 쉬울 것 같으니까."
"맞아. 나도 어깨 힘이 조금 풀렸어."
미술부 학생이 끄덕였다.
들어보니, 그녀들은 한꺼번에 온 것이 아니라 장미의 관에 들어오질 못해서 모여 있게 되어 버린 거란다. 각오를 하고 안에다 말을 걸어서 나온 것이 유미였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유미가 츠타코양과 장미의 관 앞에서 헤매고 있다 시마코양과 만난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이다.
"유미양 같은 사람이 장미의 관에 출입하고 있으면 왠지 장미님들이 좀더 친근하게 느껴지니까 신기하지."
어라.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꽤 다른 반응이다.
"이것저것 사정이 있겠지만, 나 유미양이 사치코님의 동생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아아, 그런가.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제멋대로 상상해서 주눅들곤 하고 있었지만, 학생들 모두가 유미에게 비판적인 감정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걸 알고 나자, 유미야말로 조금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부 부원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배경 제작에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그걸 의논하러, 수예부원은 내일 맞춰볼 의상에 대한 확인차, 발명부원은 마법이 걸리는 신에서 쓸 장치를 가지고 장미의 관에 찾아왔다. 연습은 다시 중단되어 버렸지만, 장미님들의 진지한 표정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이 건물에서는 항상 장난스러운 인상 밖에 없지만 애초에 유미에게도 산백합회 간부란 성실하고 가까이하기 힘든 이미지였으니까.
"결국 다른 부의 도움도 받는 거군요."
이미 만들어진 배경의 일부가 방 구석에 놓여있다. 과연 미술부의 손이 들어가자 실물처럼 리얼하면서도 환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배경이라던가 그런건 그다지 생각하질 않아서, 무리하게 상상해도 초밥들 사이에 들어가있는 비닐로 된 풀잎 같은 것 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정식으로 의뢰한 건 무용부 정도지만 말이지, 산백합회 간부 주최의 무대극이라는게 입소문으로 퍼져서 도움을 자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 처음엔 의상도 그냥 사복에 다 배경은 학교 창고에 있던 걸 다시 쓸까 했었는데."
이번 연습에선 왕자님과 마법사로 일인 이역을 맡게 된 레이님이 설명 해 주었다.
"다들 자기 부의 학원제 준비로도 바쁠 텐데, 열심히 도와 주고 있어. 기분전환이라던가 영감이 떠오른다거나 하면서 말이지. ......확실히, 개인적인 작품이라도 좋은 걸 만들어. 그녀들은."
마음에 여유가 있다거나, 뭔가를 재미있어하거나 하는 건 창작의 영양분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각각의 용건이 무사히 끝나고, 자 이제 연습을 재개할까 하는 분위기가 되었을 때, 돌아가려던 여섯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조금 보고 가도 될까요?"
그러자 로사 키넨시스가 '기꺼이' 하고 기분좋게 대답해, 그걸 들은 미술부, 수예부, 발명부 학생들은 뒤섞여 경단이 되어서 '꺄아' 하고 환호했다.
'으아......'
유미로서는 연습 참가 첫날, 첫번째에 갑자기 관객이 생겨버린 것이다.
"괜찮아."
사치코님이 부드럽게 말하고, 아름답게 웃었다.
"아까처럼 하면 돼."
그것으로, 기분이 갑자기 편해졌다. 그런가, 2층에서 했던 그대로 하면 되는 거구나, 하고.
신기해.
마법사는 레이님일 텐데. 마법이 걸리는 것은 신데렐라일 텐데.
사치코님은 대본이 필요없다고 단언한 만큼, 완벽하게 대사를 익히고 있었다. 게다가 화려함도 갖춰져 있으니까 같은 곳에서 함께 연기하면서도 무심코 시선이 못박혀 버린다. 방을 둘러보자, 관객 여섯명도 마찬가지로 신데렐라를 주목하고 있다. 유미는 자랑스러웠다.
사치코님 멋지지? 마음 속에서 크게 외쳤다.
 

5

 

 

금요일 방과 후,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의 피복실에서는 가봉된 의상의 시착이 있었다.
"어머나- 신데렐라 아름답기도 해라."
금실 은실로 장식된 광택있는 아이보리 드레스는 정순하고 고져스하고 한숨이 나올 정도로 사치코님에게 어울렸다.
"가슴 부분 너무 열려있는 거 아닌가요?"
사치코님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계모역의 드레스를 걷어올리고 로사 페티다가 날아왔다.
"멋대로 깃 좁히지 마. 조금쯤 서비스해줘도 괜찮잖아."
"대체 무슨 서비스죠?"
"사치코 팬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선물. 그렇지?"
로사 페티다는 사치코님을 빙글 돌리더니 언니 B용 드레스를 뒤집어쓰려던 유미의 정면에서 멈췄다.
"유미쨩, 어-때? 지금 그대로가 좋지?"
"아, 예, 예에. 물론."
왠지 억지로 말하게 된 것 같지만, 물론 새하얀 가슴 언저리가 살짝 보이는 편이 섹시하고 좋다. 여자끼리지만, 역시 예쁜 건 예쁜대로 감상하고 싶은 법.
"정말?"
사치코님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어봐서, 힘있게 붕붕 끄덕였다. 조금은 익숙해지긴 했지만 역시 미인의 클로즈업은 굉장한 박력. 게다가 이번엔 의상의 힘도 있고.
"유미가 그렇다면, 된 걸로 할께."
사치코님은 의외로 간단히 물러났다. '머리는 어떻게 하죠?' 하면서 로사 키넨시스 쪽으로 걸어간다.
"--래. 의미심장하네."
가볍게 한마디 하며 로사 페티다는 유미의 등 단추를 잠궜다. 확실히 '유미가 그렇다면' 이라는 사치코님의 말은 유미 자신도 그냥 들어넘길 수 없었지만.
"어머, 유미쨩 의외로 가슴 없구나. 조금 작게 할까."
확정되어 있지 않았던 배역의 의상은 고등학생의 표준 사이즈보다 약간 크게 가봉해두었다. 약간 큰 편이라는 데도 허리는 딱 맞고 가슴은 헐렁헐렁인 점이 조금 슬프다. 수예부원이 남는 천에 핀을 꽂아서 줄이자, 이번에는 사치코님이 '안돼' 라면서 다가왔다.
"그거, 지금부터 내가 입을 거니까."
"에?"
"자, 교환."
사치코님은 재빨리 아이보리 드레스를 벗고 유미에게 내밀었다.
"잊지 마. 아직 누가 신데렐라인지 결정된 게 아니니까. ......뭐하고 있어, 빨리 벗어."
"사, 사치코님. 그런."
사치코님은 슬립 차림으로 다가와서 유미를 벽면으로 몰아붙였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재미있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손을 놓고 구경만 하고 있다.
"살려줘요."
뒤로 돌려져, 단추가 풀렸다.
"꺄-!"
말로 해요, 말로 하면 되요.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그 '말'이라는 게 나오질 않는다. 도망치니까 쫓기는 거고, 알아서 벗으면 벗겨질 일도 없겠지만. 앗 하는 사이에 유미는 언니 B의 드레스가 벗겨지고 신데렐라의 의상이 입혀져 버렸다.
"-"
"아아, 유미쨩 귀여워 귀여워."
장미님들은 그렇게 격려해 주지만, 아무리 눈씻고 보아도 좀 떨어지는 언니B 의상을 입은 사치코님 쪽이 아름다웠다.
"다들 손수건 꺼내봐. 아, 수건 있으니까 됐어."
로사 페티다는 한장의 타올을 양쪽부터 빙글빙글 말아서 그걸 유미의 가슴에 집어넣었다.
"으-음. 수건 한장, 아니면 고기만두 두개분의 덧댈 것이 필요하겠네."
덕분에 동경하던 가슴 계곡이 생겼지만, 그게 아무래도 야하다.
"역시 가슴 부분이 너무 많이 열렸다고 생각하는......데요."
유미는 덧대어서 딱 좋은 상태로 드레스에 맞아들어간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유미. 너 아까는 이대로 괜찮다고 했잖아."
사치코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야, 말했죠. 그때는 설마 자신이 입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어라? 그럼 사치코님은 그때, 제가 입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제 의견을 물어 보신 건가요?"
"그래."
뭘 이제와서, 하는 투로 대답이 돌아왔다.
뭐야. 그럼 아까 들었던 '유미가 괜찮다면'의 의미는 그런 거 였나. 들떠있던 자신이 바보같다. 아니, 그보다. 사치코님은 아직도 주역 교대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 같다.
"로사 페티다. 이런 건 어떨까요?"
수예부원중 한명이 하얗고 만두같이 생긴 물체를 두개 내밀었다. 얼핏 보기엔 핀쿠션 같았지만 그것치고는 모양이 불안정해서 장식성이 모자란다. 두개가 한 세트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아, 어깨 패드."
그 자리에 있던 몇명이 동시에 외쳤다.
"이거라면 크기도 재질도 딱이겠네."
"볼륨업 브라에도 이런 게 들어있는걸요."
"어머나, 어떻게 그런 걸 알죠?"
"실례의 말씀, 전 쓰지 않아요."
수예부 멤버들은 볼륨업 브라의 화제에 흥분해서, 유미가 의견을 말할 틈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경사스럽게도 어깨 패드는 소도구로 채용되게 되었다. 사치코님과의 현저한 체형차로 인해 당일 유미가 연기하는 것이 신데렐라가 되건 언니 B가 되건 덧댈 것만은 확정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