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권 -2- 파란의 화요일

파란의 화요일(波亂の火曜日)

 

 

1

 

소문이 퍼지는 건 빠르기 마련이라.
다음날 점심때까지는 고등부 학생 모두가, 유미가 사치코님을 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츠타코양, 말했어?"
"설마. 이런 일은 참가하는 것보다 떨어져서 보고 있는 쪽이 훨씬 재미있는걸"
그러면, 은근히 꼬인 데가 있는 장미님들이 적극적으로 흘린 건가. 혹시나가 아니더라도, 사치코님이 이야기를 퍼뜨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딱히 그곳에서의 일을 비밀로 하자고 미리 말해둔 건 아니었으니 소문을 퍼뜨린 사람을 잡아서 한탄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평범한 일개 학생의 평화로운 학원 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거라면 불평 한두개쯤 나와도 괜찮잖아.
처음으로 느낀 것은 같은 반 학생들의 시선. 하지만 유미와 눈이 맞으면 '설마'하는 식으로 눈을 돌리고는 아무 것도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뭔가 이상한 소문이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너무 신경쓰면 안돼.'
수업중에, 카츠라양한테서 쪽지가 왔다.
평소 가까이 있는 학생들은 진짜 유미를 알고 있는 만큼 소문과 현실의 너무나도 큰 차이에 혼란스러워 하다 결국은 말도 안되는 소문으로 납득해 버리고 마는 패턴인 듯 하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미라는 인간을 오늘까지 알지 못했던(실제로는 그쪽이 대부분이겠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굉장했다.
그 사치코님이, 그 토도 시마코 다음으로 눈독을 들인 정도의 인재가 아직도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니-. 소문은 멋대로 혼자 걸어다녀서, 의문의 미소녀를 한번 보기라도 하려고 쉬는 시간마다 1학년 복숭아반 앞에는 구경꾼이 늘어나 갔다.
"누가 소문의 그 인물인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다행이기도 불행이기도 하네."
4교시가 끝나고 교과서를 정리하고 있으니 등 뒤에서 츠타코양이 작게 말했다.
"확실히 그래. 기분은 복잡하지만."
유미는 힘없이 웃었다. 츠타코양 말 대로, 유미는 평범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학생이니까 그저 있는 것 만으로도 눈에 띄는 시마코양 같은 존재를 기대해서 보러 온 구경꾼들로서는 이 사람이라고 지적하지 않으면 본인이라는 걸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클래스메이트들은 아직까지 신경을 써 줘서 '유미양은 지금 없어' 하고 가드해 주고있다. 그러니까 구경꾼들 앞을 당당히 지나서 화장실에도 갔다 올 수 있었다.
"그럼, 나도 한가지 어드바이스. 점심시간엔 교실에 있지 않는 게 좋아."
츠타코양은 온화한 웃음을 띄우며 겉보기에는 별 것 아닌 잡담을 하는 듯 보이도록 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어째서?"
"신문부가 유미양을 취재하러 온다는 정보를 캐치했으니까. 신문부는 끈질기다구.
스포츠 신문 연예부 기자급의 인재가 잔뜩 굴러다니고 있고 말이지."
"흐에.."
좌악- 하고 핏기가 가셨다. 연예부 기자라고 하면, '결혼하시는 건가요' 라던가 '불륜하신 건가요' 라던가 하며 돌격취재하는 그 굉장한 사람들이잖아? 사치코님의 파워도 굉장하지만 신문부라는 것도 좀 사양하고 싶다.
"알았어? 그럼 자, 도시락 들어"
츠타코양은 책상 옆에 걸려 있던 손가방에서 도시락 꾸러미를 꺼내고는 유미에게 들려주고 등을 밀었다.
"어라, 유미양 어디 가?"
평소에 항상 같이 점심을 먹는 카츠라양이 이상한 듯이 물었다.
"잠깐 유미양 좀 빌릴께."
유미 대신 츠타코양이 대답했다. 게다가 지나가면서 자기 도시락통을 재빨리 집어들고는 '빨리빨리' 하고 재촉한다. 빨리 하지 않으면 신문부가 와 버려, 하는 느낌이었다.
"왓"
마침 복도로 나왔을 때, 척 보기에도 '신문부'인 학생이 세명 서 있었다.
"......늦었나"
츠타코양의 분한 듯한 중얼거림은 유미의 귀에만 들려왔다.
카메라, 녹음기, 메모장...... 아까 말했던 '연예부 기자'라는 건 어디까지나 예를 든 것이었으니 물론 핸드마이크나 어깨에 메는 식의 TV카메라는 가지고 있지 않다.
"어머나, 안녕하셔요(ごきげんよう). 당신도 이 반이었어요?"
맨 앞의 한 명이 츠타코양을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신문부와 사진부, 뭔가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안녕하셔요(ごきげんよう). 신문부 여러분, 오늘은 무슨 일이신가요?"
사실은 전부 알고 있으면서. 츠타코양은 우호적일 웃음인 띄우며 대꾸했다.
"후쿠자와 유미양을 인터뷰하러 왔어요. 마침 잘됐네, 불러 주시겠어요?"
"에-그러니까. 유미양, 유미양......이라"
완전히 시치미를 뗀 츠타코양은 바로 옆에 있는 후쿠자와 유미양에게는 눈길도 주지않고서 문 저편, 지금 막 나온 참인 1학년 복숭아반을 주욱 둘러보았다.
교실 안에는 한창 점심 준비 중이었다. 책상을 붙여서 테이블보를 펼친다거나, 우유랑 빵 당번이 주문품을 나눠 준다거나, 다른반 학생도 들어와 있다거나 하니 꽤나 북적북적대고 있다.
"아, 저기 있는거 유미양인가?"
츠타코양은 안경을 고쳐쓰는 시늉을 하며 맨 안쪽자리 근처를 가리켰다.
"불러 올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체 어쩔 셈인 걸까, 하고 유미가 이상하게 보고 있으니 교실에 돌아가려던 츠타코양은 '맞아맞아' 하면서 돌아보았다.
"나츠메양은 급했었죠? 먼저 가 있어요."
"에? ......아, 예"
일부러 유미의 눈을 보고서, 게다가 작게 윙크까지 해 줬으니 츠타코양이 말한 나츠메양이란 아마도 날 말하는 거 겠지.
"그럼, 먼저"
유미는 츠타코양와 신문부 학생들에게 작게 인사하고서 그곳을 벗어났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나츠메->나츠메 소세키->후쿠자와 유키치->후쿠자와 유미라는 공식을 떠올리고, 과연 하고 손바닥을 쳤다. 공통점은 지폐.(나츠메 소세키는 일본 1,000엔 지폐에, 후쿠자와 유키치는 10,000엔 지폐에 초상화가 있다-역자주)
그건 그렇고, 그 다음에 츠타코양은 어쩔 셈인 걸까. 그녀가 하는 일이니까 '잘못 봤어요'하거나 해서 잘 빠져나올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떨어져서 보고 있는 편이 재밌다거나하면서도 꽤 잘 챙겨 주잖아.
츠타코양도 없어져 버렸고 하니, 자 이제 어디로 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어슬렁어슬렁 내려가고 있으니,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다.
"유미양, 여기"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자 하얀 손이 살랑살랑 손짓을 하고 있다. 좀더 몸을 내밀어 보자, 시마코양의 얼굴이 뿅하고 나타났다.
"같이 점심 먹자."
그 천사같은 미소에 왠지 안도해서, 유미는 리드미컬하게 계단을 내려가게 되었다.

시마코양은, 그녀의 지정석에 유미를 초대했다.
"이런 데서 매일 도시락 먹고 있어?"
거기는 강당 뒤편. 은행나무 사이에 딱 한그루 벚나무가 섞여 있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였다. 그곳에 도시락 꾸러미를 풀고 두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계절 한정이야. 봄과 가을의 날씨 좋은 날"
"여름은"
"이 벚나무에 말이지, 벌레가 들끓으니까 좀 싫어. 하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은행이 잔뜩 떨어지니까 그건 기대돼"
옻칠된 사각형 도시락 상자에서 토란을 집으며 시마코양은 황홀한 듯 은행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서양인형을 떠오르게 하는 용모와는 조금 언밸런스. 은행 이야기도, 수수한 도시락 상자도, 덤으로 말하자면 토란조림도.
"......이상해, 시마코양"
"그래? 하지만 은행이란 거, 밟아서 질척질척하게되지만 않으면 그다지 냄새나지않아. 그러니까 다들 지나다니는 은행 가로수는 비참해."
"시마코양, 혹시 그 으깨지지 않은 은행 주워서 가지고 가?"
"딩동댕"
시마코양은, 행복한 듯 후후후하고 웃었다.
"은행같은거, 좋아해?"
"유미양은 싫어?"
역으로 질문받고는, 흐-음 하고 생각했다. 그런 거 좋아서 먹는 사람이 있었구나.
생선회에 곁들여서 나오는 차조기 잎처럼 茶碗蒸し(일본식 계란찜)의 장식 같은 거라고 지금껏 생각하고 있었지만.
"은행이라던가 백합뿌리라던가 대두(大豆) 같은거, 그런 거 굉장히 좋아해. 십대 여자애같지않다고
부모님이 종종 말씀하시지만, 기호라는 건 환경에도 꽤 영향을 많이받는다고 생각하지않아? 그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니까 기호가 소박한 거야 분명히."
듣자하니, 시마코양의 집은 순수 일본식 건물로 서양식 방이라는 게 없다는 것 같다.
이미지로 말하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새하얀 호화 저택에 하얀 그랜드 피아노지만. 도시락도 클럽 샌드라던가 프라이드 치킨이라던가 하는 쪽이 절대로 어울린다.
"보기랑은 달라?"
시마코양은 유미의 얼굴을 훔쳐보며 물었다.
"응. 조금. 하지만 의외라서 재미있어."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하자, 시마코양은 '유미양도 그래' 하며 웃었다.
"정말로, 친해져서 잘됐어."
두 사람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하늘색에 구름의 흰색, 그 아래에는 노랗게 바랜 은행잎이 햇빛을 받아 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만약 내가 화가였다면, 이 풍경을 커다란 캔버스에 옮겼을 텐데. 시인이라면 시로, 음악가라면 곡으로, 분명히 남겼을 것이다.
"시마코양은, 왜 사치코님의 제의를 거절했어?"
문득 생각나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시마코양은 '그 질문은 내가 너한테 해야 할 거아닐까?'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렇구나. 둘 다 같은 일을 한 거지."
그렇다고 해서 더더욱 친근감이 든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마코양과 유미는, 사치코님을 대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던 것 같으니까.
"내 경우엔 말이야."
조금 생각하는 듯이 시마코양은 비스듬히 위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로선 사치코님은 안된다고 생각했어. 반대로, 나에게도 사치코님으로선 안되는 거야. 틀림없이."
"어떤 식으로?"
"사치코님을 좋아하긴 하지만, 우리는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달라. 그러니까 줄 수있는 것도 다르지."
"......너무 어려워서 모르겠어."
"사치코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말하고 싶은 건 알겠지만, 구체적이 아니라고. 나 스스로도
막연히 그렇게 느꼈을 뿐이니까 어쩔 수 없지."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것과, 상대에게서 바라는 것. 일대 일의 인간관계니까, 그게 일치하는 것은 중요한 걸지도 모르지만-.
"시마코양이 안된다면, 사치코님과 어울리는 상대 같은거 없는 것 아냐?"
"그건 모르지. 물론, 간단히 찾아낼 수가 없으니까 지금까지 쁘띠 스-루를 갖지 않으셨던 거겠지만. 게다가 로사 키넨시스는 사치코님과 제대로 마주 대하고 있잖아? 상성이란게 있는 거야."
"그런가......"
그렇다면 시마코양은 로사 기간티아와 상성이 딱 맞았던 거겠지, 하고 유미는 생각했다.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니라, 자신도 상대도 똑바로 바라본 끝에 선택한 것이다.
"이제 그만 갈까."
시마코양이 일어섰다. 5분만 있으면 5교시가 시작된다.
"신문부 사람들도 수업이 있으니까 괜찮아."
아까의 이야기에 따라, 떨어져 있는 은행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었다.
지금까지 땅 같은거 지긋이 바라보며 걸은 적이 없었지만, 잘 보니 굴러다니는 은행은 익은 매실과도 비슷했다.
"사치코님은 말이지, 나보다 유미에게 거절당했을때 충격이 더 컸을 거라고 생각해."
"어째서"
"내 때는, 왠지 모르게 예감은 했었다고 생각해. 사치코님도 나를 동생이라고 가정해 본 적이 있었을 테니까, 딱 맞지않는다는 정도는 알고있었던 거야."
하지만 유미의 경우에는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쇼크를 받으셨던 것 같진 않았는데?"
"그 분, 지기 싫어하는 데다 심통쟁이니까. 정말로 분할 때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거야."
이미 사람이 없어진 계단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갔다. 종과 함께 교실에 들어가시는 꼼꼼하고 나이드신 선생님을 인사하며 추월한 후 교실 앞에 도착했을 때는 수업 시작하기 1분전이었다. 신문부 학생이나 다른 반 학생들도 시마코양이 말한 대로 이미 복도에서 사라져 있었다. 교실 뒷문을 열면서 시마코양은 말했다.
"어쩌면, 유미양은 사치코님과 맞을지도 모르겠어."
먼저 교실에 들어간 클래스메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미는 '뭔-소리 하는건지'하고 중얼거렸다.
지기 싫어한다거나 심통쟁이라거나, 그렇게까지 사치코님을 이해하고 있는 시마코양이 안되는데 어떻게 유미가 맞는다는 거야.
아무튼, 시마코양은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2

 

학교에 청소당번이라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 외에 별로 없다는 것 같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학교란 공부를 하러 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으니까. -언제였는지는 잊어버렸지만, 텔레비전에서 외국인 논평가가 그렇게 말했었다.
'확실히 그래'
자기 방은 어머니께 청소를 맡겨 두고는 교실 바닥을 닦는다는 건 조금 이상한 것같기도 하다. 가사 교육의 일환이라고 하면 그 뿐이지만, 일반가정과 학교 시설은 청소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 역시 도덕 문제라는 걸까. 사용한 물건은 깨끗이 해서 돌려줍시다.
그건 그렇고, 유미는 매우 일반적인 학생이라 청소 시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음악실 청소는 다른 때 보다 싫지 않았다.
방음 때문인지 바닥은 펠트와 비슷한 바닥재가 깔려 있어서 물청소나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왁스칠도 없다. 벽도 특수한 방음벽이라서 가끔 먼지를 터는 정도로 끝이고, 책상과 의자는 고정식이라서 옮길 수조차 없다.
전용 청소기를 위잉위잉 돌리고, 책상 위를 물걸레로 닦고, 칠판과 창살 같은 창문 주위를 깨끗이 하면 그걸로 끝이다. 음악실이라면 약속처럼 걸려 있는 베토벤이나 모짜르트 그림은 말하자면 현장감독이라고나 할까.
"유미양, 이제 끝내도록 하죠."
같은 청소 그룹인 클래스메이트가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예......"
평소라면 청소가 끝나자 마자 곧바로 집에 간다. 하지만 오늘은 미적미적하고 있었다.
"청소일지를 아직 다 못적었으니까 여러분 먼저 가세요."
지금 건물을 나가면 클럽활동이 없는 학생들의 하교시간에 걸린다. 버스가 조금 붐비는 정도는 괜찮지만,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오늘, 고등부 학생들이 뭉쳐 있는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 용기는 역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때울 장소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면 끝날 때까지 같이 있을께요. 유미양 혼자 남기고 갈 수야 없는걸요."
친절한 클래스메이트들은 저마다 말했다.
"하지만 클럽활동도 있잖아요? 저는 이게 끝나면 집에 가는 것뿐이고, 어제도 일지를 가져가 주셨으니 오늘은 제가 가지고 갈께요."
유미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세 사람은 '그럼 그렇게 할까?' 하고 이야기하고는, 음악실을 뒤로 했다.
"안녕히(ごきげんよう)"
"내일 또 봐요."
타박타박하고 종종걸음으로 세 개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주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세일러 칼라가 날리지 않도록. 그런 몸가짐을 잊어버릴 정도로 사실은 다들 바쁜 것이다.
"아-아, 따분해라."
클럽에도 위원회에도 들어 있지 않으면 요즘 같은 때 조금 쓸쓸해진다.
원제때 우리 반이 하는 건 '십자가의 도행(道行)'에 대한 전시발표로, 그리스도의 사형선고 장면부터 골고다의 연덕에 올라 십자가에 못박힐 때까지의 그림 14장을 복사해서 그 그림 밑에 해설문을 붙이는 거지만, 성실한 리리안 학생답게 이미 여름방학 끝날 때 쯤에는 거의 준비가 끝나 버렸다. 학원제가 다가오면 클럽활동이나 위원회 등으로 바빠져서 학급 일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어진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을 때우면 되는 걸까나."
너무 늦어버려서 클럽활동이 끝난 학생들과 만나버리거나 하면 무지무지 한심해진다.
"맞아, 일지 제출하러 가야지."
하지만 아직 움직이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반쯤 열린 문 저편에서는 교실이나 클럽 하우스, 체육관 등으로 이동하는 학생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미는 별 생각없이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음악실에 혼자 있어도 그다지 무섭거나하지는 않다.
-이 학교는 마리아님께서 지켜 주시고 계시니까.
그러니까 한밤중에 그랜드피아노가 멋대로 울린다거나, 베토벤의 눈이 빛난다거나 하는 학교 특유의 괴담은 리리안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미-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높은 미 음을 울려 보았다. 응, 분명히 이 음에서 시작했었을거야. 유미는 의자를 꺼내서 똑바로 건반과 마주앉았다.
피아노를 만지는 것은 오랜만이다. 초등학교 육년간 일주일에 한번 피아노 교실에 다녔었지만, 그다지 몸에 붙질 않아서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그만둔 것이다.
미--
다시 한 번 같은 소리를 내 본다. 그렇게 이번에는 기억과 음감에 기대어 반년쯤 전에 들었던 그 곡을 재현해 본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하나라면 멜로디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다.
파-
솔-레미-
이것은 구노의 아베 마리아.
반년전, 산백합회 주최의 신입생 환영회에서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이라고 소개받은 2학년의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이 이 곡을 신입생들을 위해 연주해 주셨다. 생각해 보면 사치코님을 의식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르간으로 연주한 거 였지만 성당 안이라는 것도 있어서 그것은 장엄하게 울려퍼져 마음 속에 스며들어왔다. 연주하고 계시는 사치코님이 아베 마리아의 곡 그 자체인 것처럼 고귀하게 느껴졌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유미는 계속 사치코님의 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 뿐만 아니라 몸동작 하나하나에 품격이 있고, 그리고 조금 엄격한 말투가 상급생다워서 멋있었다.
저런 사람이 되고 싶어.
저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어.
그렇게 빌었던 반년전의 그 때, 설마 이런 사태가 전개되리라고는 예측할 수 없었다.
아니, 어제의 지금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인생이 바뀌어 버렸네. -그렇게 생각하며 피아노에 탈팍하고 엎어졌을 때, 시야의 구석에 뭔가가 나타났다.
"@%^&$#-------!?"
그게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소리가 유미의 성대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왜냐니, 자기 등 뒤에서 사람의 손이 슥 하고 뻗어나와 건반에 닿으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심장이 튀어나올 뻔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봐.
"무슨 그런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거야. 꼭 내가 덮치는 것 같잖아."
그 손 주인의 얼굴을 보고 다시 튀어올랐다.
"소, 소리도 없이 등 뒤에서 나타나면, 누구라도 비명 지르게 되요. 사치코님."
게다가 바로 그때까지 머릿 속에서 그리고 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피아노 연주를 방해하면 안되겠지, 라는 배려야."
사치코님은 그대로 뻗은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사 장조 도 음을 짚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누르는 건반이다.
"쳐 봐."
"엣!?"
"다시 한 번, 아까 그대로 쳐 봐."
"에엣?"
당황해서 의자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사치코님은 비어있는 오른손으로 유미의 어깨를 짚었다.
"리듬은......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저, 저기....."
사치코님은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으로 유미의 오른쪽 어깨에 리듬을 새기며 셋 카운트 후에 '자'하고 시작하는 신호를 했다.
인간이란, '자'하는 말을 들으면 뭔가를 시작해 버리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유미도 무심결에 미 음을 내고 있었다. 그러자 그에 맞추는 듯이 다른 소리가 겹쳐 울렸다.
도미솔도도미솔도
놀랍게도, 사치코님이 왼손 파트를 치고 계셨던 것이다. 거기다 페달까지 밟고 있으니까 소리에 에코가 걸려 있었다.
'연탄(連彈)이다아-.'
자신의 손가락이 짚은 음이, 다른 음과 아름답게 겹쳐져서 귀에 기분좋게 돌아온다. 하지만, 가슴이 설렌 것도 잠시 뿐이었다. 곧바로 사치코님의 존재를 의식해 버려서, 설레임이 두근거림으로 바뀌고 말았다.
애초에 연탄용으로 작곡된 곡이 아닌데다, 유미의 오른손과 사치코님의 왼손으로 연주하고 있는 거다 보니 한명분의 공간에 두명이 몸을 붙이고 있는 모양이 된다. 사치코님의 가슴이 유미의 왼팔에 닿아 버린다거나, 매끈매끈한 스트레이트 헤어가 유미의 어깨에 파라락 떨어진다거나, 뭔가 좋은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일이 당연한 듯이 일어난다. 그래도 연주는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유미가 오른손 멜로디 라인을 치고 있는 동안에는 사치코님도 그만두지 않으시겠지.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 싶다고 바라는 반면, 빨리 끝내 버리라고 생각하는 자신. 유미의 안에서 반대되는 두개의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치코님의 호흡이 유미의 앞머리를 살며시 흔들고 있다. 그러나 그 숨결은 괜히 화가 날 정도로 조용했다. 유미와 달리 사치코님은 이정도 일로 동요하거나 하지않는 것이다.
아름다운 화음이 깨어졌다. 유미가 일부러 음을 틀렸기 때문에.
"역시 안되겠어요. 사치코님은 따라갈 수가 없네요."
작게 웃고는 의자를 내려온 후 피아노에서 떨어져 등을 돌렸다.
"그래? 굉장히 기분좋게 치고 있던데"
사치코님은 피아노 뚜껑을 살짝 내렸다. 달칵 하는 한숨 정도의 작은 소리가 둘밖에 없는 음악실에서 묘하게도 똑똑히 귓가에 남았다.
천천히, 사치코님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실내화 소리가 부드러운 바닥에 흡수되어, 이래서야 아까 기척을 못 느낄 수 밖에 없지. 하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가도록 할까?"
"하?!"
"하, 가 아냐. 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사치코님은 왜 여기에"
"물론, 널 데리러 온 거야."
사치코님은 당연하잖아, 하는 듯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비스듬히 자세를 잡았다. 어디로요, 라고는 묻지 않아도 되었다. 그 전에 사치코님이 설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잘 들어, 지금부터 학원제까지 계속, 방과후에는 우리 연극 연습에 참가해줘야겠어. 그건 네 의무니까 말이야."
사치코님이 말씀하시는 바로는, 이렇다.
그렇잖아도 바쁜 몸인 사치코님이 타임 리미트까지의 짧은 시간에 학년이 다른 유미를 설득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조건을 공평하게하기 위해서도 클럽활동이 없는 유미가 방과 후의 몇시간을 산백합회를 위해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결론에 달했다, 라고.
"그런 말도 안되는"
"말도 안되긴. 장미 언니분들도 이미 허락해 주신 일이야. 게다가"
사치코님은 유미의 턱에 검지손가락을 대고 얼굴을 정면으로 돌렸다.
"생각해 봐. 너는 신데렐라의 대역이니까 말이지. 연습에 나오는 게 당연한 거 잖아?"
"대역......이라곤 해도. 하지만 그건 제가 로사리오를 받아들였을 때의 얘기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확고한 자신이 있으니까, 유미는 연습에 나오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나도 나가지 않을 이유가 생기는 셈이네"
"그런"
조용하고 담담한 말투로, 사치코님은 유미를 꾸짖었다.
"하지만, 난 연습에 나갈 거야. '절대' 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언니들과의 내기도, 자신이나 확률은 둘째치고라도 앞으로 다가올 결과는 둘중 하나인걸. 신데렐라를 맡을 사람이 나나 너 둘중 하나 밖에 없다면, 난 연습 할 거야. 설령 스스로의 자신과 모순되는 행동이라고 해도, 실제 공연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사치코님은 유미의 귀밑머리를 살짝 귀에 걸어준 후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었다.
 "사치코님......"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었다.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거절하려고 해도, 사치코님은 제대로 도리를 알고 계신 것이다. 그녀 안에서는 올바른 것과 틀린 것이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것처럼 명쾌하게 나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실망시켜 버린 걸까,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꼬옥 죄어왔다. 피아노 연탄을 하고있을 때 느꼈던 설레임과도 두근거림과도 다른, 가만히 놔두면 영문도 모르게 눈물이 넘쳐나 버릴 것 같은 이상한 심정이 되었다. 어렸을때, 사람 많은 곳에서 어머니와 떨어져 버릴 뻔한, 그때의 기분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사치코님이 고개를 드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유미는 틀림없이 '죄송해요' 라며 매달렸을 것이다.
"그래."
다시 생각한 듯이, 사치코님은 작게 말했다.
"너에게는 너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는 거니까. 강제로는 하지않겠어. 하지만, 내가 연습하는 걸 보러 와 주지않을래?"
"......예."
"그럼, 가방 들어."
재촉받는 대로 유미는 책상 위에 그냥 놓아뒀던 자신의 가방과 청소일지를 손에 들었다.
왠지 보기좋게 사치코님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버린 건 아닐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벌 받을 짓을, 하며 곧바로 반성했다.
어쩌다 보니 어제는 히스테릭해져 있긴 했지만, 사치코님은 원래 마리아님처럼 깨끗하고 바르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린 듯 한 이상적인 언니인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래? 유미, 이리 와."
문 앞에서 사치코님이 불렀다.
"아, 예."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자 사치코님은 '조용히' 하며 유미의 타이 모양을 고쳤다. 어제 아침과 같은 느낌. 순간, 은행 가로수 풍경이 교차했다.
"아."
사치코님은 중얼거리고, 유미를 보았다.
"그 사진, 어제 아침에 찍힌 거야?"
"에에?"
믿을수 없게도, 사치코님은 지금 막 유미와의 만남 장면을 떠올린 것 같다.
"사진을 보셨을 때 모르셨어요?"
"그게 나라는 것과 같이 있는 아이가 유미라는 건 알았지만, 그게 언제였는지까지는 기억 못했어. 하지만 다케시마 츠타코양이 찍은 사진엔 날짜가 들어가 있지 않았는 걸."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금방 잊어버릴 정도로 인상이 흐릿했다는 것을 굳이 떠올리게 할 필요도 없고.
"그럼 유미랑은 정말로 어제 처음 만난 거구나."
"맞아요."
유미는 음악실 문을 닫으며 끄덕였다. 처음으로 말을 걸어 주신 것은 사치코님이 자매선언을 하기 겨우 몇시간 전의 일. 그러니까 '새끼줄 쥔 맏아들' 이라고 불려도 반론할 수 있을 리 없다.
"기억해내니까 후련해졌어."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소문이 굉장한 기세로 퍼진 오늘, 함께 걷는 것도 좀 그렇다 싶지만 사치코님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기에 괜찮겠지 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복도에 있었던 학생들도 줄어들었고, 사치코님이라면 아마 살금거리는 걸 싫어하실 테니까.
"사치코님은 평소에도 그렇게 자주 후배들의 타이를 고쳐 주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유미를 기억하지 못했다 해도 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치코님의 단정한 입술에서 나온 대답이라니.
"반대야."
"에?"
"그다지. ......아니, 거의 그런 일은 하지 않아.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든 걸까."
계단을 내려가며 사치코님은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때부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지만, 한 층 내려간 즈음에는 그녀 나름대로의 해답을 이끌어내었다.
"아침엔 약해서 머리가 멍해져 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불러세운걸지도 모르겠어. 곧바로 기억나지 않은 것도 분명히 그래서야."
"아침에 약하실 것 같진 않은데요."
"자주 그런 얘길 들어. ......하지만 사실은 저혈압이야."
"하아. 저혈압."
왠지 알면 알수록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이라는 사람이 알 수 없게 되어 간다. 확실히 여기 있는 건 동경하는 그 사람이지만, 3일 전과 지금과는 인상이 전혀 달라져 버렸다.
보통은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가는 법일 텐데.

 

 

＊　　　＊　　　＊

 

 

일지를 제출하러 교무실에 들르자, 유미네 반 담임인 야마무라 선생님이 '어머나아' 하며 웃었다.
"뭔가 착각한게 아닐까 했었는데, 그 소문 진짜였어?"
보아하니 선생님들 사이에도 퍼져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상하네. 오가사와라양은 후쿠자와양에게 거절당했잖아? 그런데 왜 같이 있는 거야? 아니면 사실은 OK한 거야?"
과연 전前 리리안 학생. 20년이나 연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소녀처럼 물어 온다.
"에 그러니까 말이죠, 그게-"
유미가 우물우물하자 옆에서 사치코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저희들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생긋 웃으며 '그럼 실례'. 사치코님은 유미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교무실을 뒤로 했다.
"사, 사치코님"
성큼성큼 걸어서 교무실 문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겨우 사치코님은 유미의 손을 놓았다.
"굳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소문이란 건 이쪽이 반응하면 하는 만큼 점점 부풀어 가는 거야. 해명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자잘하게 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이 들을 자세가 되었을때 딱 한 번만 확실히 말하도록 해. 소란스러울 때는 불에 기름 붓는 격이야."
하지만 사치코님 처럼 미소로 상대를 입 다물게 만들어 버리는 기술, 보통 고등학생은 아무래도 흉내낼 수 없다. 사치코님의 이론은 머리로는 알 수 있지만 실천하려고 하면 꽤나 어려운 일이다.

 

3

 

 

사치코님이 데려간 곳은 제 2 체육관이었다.
여기는 학교 뒷편의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중등부와 고등부 학생을 전원 수용할 수 있는 제 1 체육관만큼 크지 않다. 넓이는 농구코트 하나가 들어갈 정도이긴 하지만 무대가 없고, 대신 그 공간에 탈의실, 화장실, 세면대, 휴게실이 충실하게 갖춰져 있어서 학생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었다. 다른 학교를 초대해서 친선시합 같은 것을 하기에 딱 좋게 만들어져 있어서 체육이나 클럽활동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거기 있는 슬리퍼를 신고 올라와."
사치코님은 손님용으로 선반에 준비되어 있는 베이지색 비닐 슬리퍼를 가리켰다. 모든 체육관은 전용 운동화 이외의 신발 엄금이었다. 유미가 지시대로 실내화를 벗고 슬리퍼를 갈아 신는 동안, 사치코님은 구두를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아, 사치코가 왔어."
"늦어."
장미님들의 목소리가 체육관에 울리는 동안 유미는 뒤를 쫓아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한발 들여놓자, 아플 정도로 시선이 느껴졌다.
거기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츠타코양을 뺀 어제의 멤버들, 그 외에 스무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 중 한명, 유미의 클래스메이트가 섞여 있었다. 그녀의 소속 클럽으로 미루어 그 집단이 무용부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사치코님은 유미에게 옆에서 구경하도록 이야기한 후 무용부 학생들 속으로 들어갔다.
"연습을 중단시켜서 미안해요. 자, 계속하세요."
그러자, 어디선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와서 사치코님은 한가운데의 하세쿠라 레이님과 손을 마주잡았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페어가 되어 곡에 맞춰 춤추기 시작했다. 삼박자니까 이건 왈츠. 아무래도 오늘은 댄스 연습인 것 같다.
"어서 와. 후쿠자와 유미쨩."
누군가 불러서 돌아보자, 로사 키넨시스가 손짓을 하고 있다.
"이쪽이 더 잘 보여."
가만 보니 로사 기간티스도 로사 페티다도 함께 있었다. 세 명이 모여서 벽에 기대어 댄스 연습을 바라보고 있다. 유미는 권유받은 대로 로사 키넨시스의 옆에 섰다. 우아한 음악을 타고 소녀들이 춤춘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데도 사치코님에게만 눈길이 갔다. 어려운 스텝도 그저 평범하게 걷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마치 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 빙글빙글 화려하게 돌았다. 결코 다른 학생들이 서투른게 아니다. 그녀들도 리리안 여학원 무용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춤추고 있었다. 그러나 화려라는 면에서는 누구도 사치코님을 이기지 못하리라. 의상같은 걸 입고 있지 않아도, 사치코님이 주연이라는 걸 한눈에 알게 되어 버린다.
"그럭저럭이지?"
로사 키넨시스는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 채, 옆의 유미에게 물었다.
"그럭저럭, 이라뇨...... 이렇게나 멋진데."
얼마나 전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는지 물어보자, 놀랍게도 오늘이 처음이란다.
"사치코가 올 때까지 30분 정도였을까? 시마코와 레이가 무용부 학생들에게 스텝을 배워서 지금 처음 맞춰본 거야."
"처음!?"
"초보적인 건 수업에서 하고 있는 데다, 시마코는 일본무용을 하고 있으니까 동작을 익히는 데는 자신이 있나 봐. 레이는 무도로 단련한 집중력으로 외우긴 한 것 같지만 아직 좀 서투르네......아, 역시 밟았다."
마침 레이님이 사치코님의 발을 밟은 때였다. 그래도 두 사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춤추고 있다. 구두를 신고 있지 않은 것 처음이라는 것도 있고 하니 파트너의 발을 밟았을 때를 대비한 거겠지.
"사치코는 말이지, 정진정명의 아가씨니까 사교댄스 정도는 할 줄 아는게 당연한 거야."
로사 키넨시스는 조금 자랑스러운 듯이 사치코님을 말했다. 다섯살 때부터 발레를 배우고 있었지만, 중 1때부터 3년간은 사교댄스를 배웠다고. 영어회화나 피아노, 다도, 꽃꽂이 등 중학교 때까지는 매일 뭔가의 가정교사가 와 있었다고 한다.
"왠지 다른 세계 이야기 같아."
한숨이 새어나왔다. 15년간 살아왔지만, 아직도 세상이란 모르는 것 투성이.
"그렇지?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전부 그만두게 했어. 그만둘 수 밖에 없게 했다는게 맞을까? 동생으로 삼아서, 산백합회의 잡무에 끌고 다녔으니까."
"......굉장해."
그런 공부들을 전부 해내고 있던 중학생 사치코님도 굉장하지만, 그걸 전부 그만두게 해버린 로사 키넨시스도 굉장하다.
"사치코는 말이지, 근본이 성실하니까 기대를 받으면 그대로 해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가끔 숨을 고를 필요가 있어. 알겠니?"
".....왠지 알 것 같아요."
"왠지. ......그걸로 됐어."
곡은 이미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있었다. 사치코님은 이마에 희미하게 땀이 맺혀 있었고, 한가닥 검은 머리가 목덜미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춤을 배웠는데 출 기회가 없는 걸까요?"
머리 속에 떠오른 의문을 그대로 말하자, 로사 키넨시스는 '왜 그렇게 생각해?' 하고 반문했다.
"춤출 기회가 자주 있다면, 이제 와서 남자가 상대라고 싫어하거나 하진 않지 않을까...싶어서요."
"맞아. 실은, 우리도 그게 이상했어. 사치코에게 있어서는 '그래봤자 댄스'인 거지. 그런데도 왜 저렇게까지 거절하려는 걸까 말이지. 너무 싫어하니까, 우리도 이유를 알고 싶어서 곧바로 그만두게 해주진 않았지만-."
더 재미있어졌지, 하고서 로사 키넨시스는 유쾌한 듯 웃었다.
"후쿠자와 유미, 라는 양념이 들어가서 요리가 어떤 식으로 완성될지 기대되는 걸."
'흐에......'
휘이이잉하고 메마른 바람이 몸 속을 불어나가는 것 같았다.
사극 같은 데서 자주 나오는 신으로, 부랑자들이 돌아다니는 마을의 황량한 여관길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먼지섞인 메마른 바람이 피부를 따끔거린다. 이 앞에 뭐가 있을지 알 수도 없고, 좌우를 둘러봐도 적뿐. 배경으로 흐르는 건 우아한 왈츠인데. 아아, 전혀 안 어울려.
"로사 기간티아 말대로."
"에?"
"생각에 잠기면, 유미쨩 백면상되어버리는구나."
로사 키넨시스는 지적인 얼굴을 풀고 쿠쿠쿡하고 웃었다.
음악이 끝나자, 로사 키넨시스는 무대에 섰을 때를 가정해서 처음 설 위치나 몸 방향 같은 걸 지시하기 시작했다. 유미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제대로 볼 곳은 보고 있었구나.
"유미쨩, 댄스는?"
로사 기간티아가 다가와서, 둘로 나눠 묶은 유미의 삐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 아뇨. 전혀."
"어라-? 저기, 무용 수업은 2학년때부터 있었던가?"
몸을 뒤로 젖혀서 로사 페티다에게 묻는다.
"그랬었던 거 같은데."
카세트 테입을 다시 감으면서 로사 페티다는 흥미없는 투로 대답했다.
"그럼, 가르쳐 주지. 손 내봐."
"헤!?"
"자자."
로사 기간티아는 억지로 유미의 손을 잡고서, 몸을 밀착시켰다.
"앗."
"유미쨩, '헤'라던가 '에'라던가 '아' 같은 게 많아."
그런 말씀을 하셔 봤자, 나와버린 목소리를 집어넣을 수도 없는 일이고. 놀래키는 사람한테도 책임의 일부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왈츠니까 삼박자야.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어쩔 수 없이 유미는 슬리퍼를 벗었다.
하나에서 왼발을 뒤로 빼고, 둘에서 3/8 회전하면서 오른발은 옆으로 돌린 후, 셋에서 왼발을 오른발에 모은다. 다음 하나에서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어서 오른쪽으로 반회전, 둘에서 왼발을 비스듬히 뒤쪽으로 빼고 다시 오른쪽으로 3/8회전 후 양발을 모으고, 셋에서 오른발을 살짝 앞으로 낸다.
들은 대로 하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잘 되지 않는다.
"허리가 빠졌어. 자자, 아래 보지 말고. 발 밟아도 괜찮으니까."
하나, 둘, 셋.
겨우겨우 아래를 보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어서야, 자신들을 둘러싼 공기를 깨달았다. 안무 맞춰보기가 끝난 댄스부 일행이 신기한 거라도 보는 듯이 유미와 로사 기간티아의 댄스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큰일났네. 이번엔 유미쨩의 양다리설이 퍼져 버리는 걸까나."
로사 기간티아는 웃으면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는 크게 한손을 올려서 모두에게 말했다.
"자, 여러부-운. 그럼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겠습니다. 후쿠자와 유미쨩입니다. 오늘부터 군무에 참가할 테니까, 사이좋게 지내 주세요-."
"읏---"
'엣!'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까 지적받은 걸 떠올리고 유미는 자신의 입을 눌렀다.
"그냥 견학만 해서야, 재미없잖아? 게다가 '여차'할 때를 대비하려면 춤에 익숙해지는 편이 좋아."
귓가에 무시무시한 말을 속삭이며, 로사 기간티아는 유미의 등을 밀었다. 하지만, '여차'라면 사치코님 대신 무대에 선다는 건데.
'최소한 내가 넘어가지 않는 쪽에 걸고 있는 로사 기간티아가, 말에게 마이너스 이미지를 줘버려도 괜찮은 거야?!'
하지만 장미님들에게 있어서는, 이기건 지건 자기들은 전혀 상처입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일이 되어가는 걸 재미있어하며 보고 있을 뿐. 그런 식으로 보였다.
"누가 페어 짜 줘."
주위가 조금 웅성거리는 가운데, 로사 페티다는 얼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제가."
간단히 손을 올린 사람을 보자, 놀랍게도 로사 페티다 안 뷔통인 하세쿠라 레이님이었다.
"하, 하지만, 레이님은, 사치코님과."
"난 대역인걸. 진짜 왕자님이 참가하면 역할 끝인 거고. 유미쨩이랑 페어 짜도 문제 없음."
어쩌지. 그냥 바람 정도로는 끝나지 않게 되는 거 아닐까.
아무리 둔해도 피부에 아플 정도로 꽂혀오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아니, 호기심이 아니라 질투일지도 모른다.
맨 먼저 로사 키넨시스 안 뷔통인 사치코님을 찼다는 소문이 돌고. 그런데도 사이좋게 체육관에 등장했나 싶더니 이번에는 로사 키넨시스와 사이놓게 담소하고. 그게 끝나자 로사 기간티아에게 댄스를 배운데다 결국에는 로사 페티다 안 뷔통인 레이님의 댄스 파트너가 된다니. 무슨 속셈이야, 저 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런 식으로 주목을 받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는데. 어째서 이렇게, 희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는 걸까.
그때부터 재개된 연습이라 하면, 당연히 바늘방석이었다.
함께 춤추고 있는 뷔통들은 그렇지 않지만, 수적으로 훨씬 많은 무용부의 시선이 묘하게 따가왔다. 정면에서도 등 뒤에서도 따끔따끔하고 느껴지는데다, 오른쪽으로 돌아도 왼쪽으로 돌아도 무용부 학생들과 눈이 마주쳐 버린다. 거기다 로사 기간티아와의 연습은 꽤 느렸었기 때문에 음악의 속도에 발이 따라가지 못해서 레이님의 발을 밟고, 레이님께 밟히고, 엉망진창이었다.
그런 와중에, 역시 사치코님은 우아했다. 파트너가 될까, 하는 로사 기간티아의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스텝을 밟고 있었다. 가슴을 펴고, 팔을 부드럽게 굽힌 것만으로도 마치 그곳에 왕자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치코님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떤 왕자님일까. 어떤 왕자님이라면 사치코님은 스스로 손을 잡을 생각이 들게 될까.
"다른 데 보지 않기."
주의받고 정신을 차리자, 레이님이 일부러 화난 얼굴을 해 보였다.
"사치코가 신경쓰이나 보네."
"아뇨, 그런."
대답하면서도, 역시 신경 쓰이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왜냐면, 또 금방 사치코님의 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왕자님과 춤추고 있는 사치코님은 날개가 달린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사치코님이 마음속에 그리는 왕자님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쳐도--, 유미는 생각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데라 학원의 학생회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직 본 적도 없는 하나데라의 그 사람이 더할나위없이 불쌍한 남자처럼 느껴졌다.
가엾은 왕자님. 리리안 여학원의 신데렐라는, 이야기와는 달리 자신만만하고 이상이 높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