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운국 이야기 (彩雲國物語) 1권 -3장- 암흑 속의 진실

제3장. 암흑 속의 진실

 

 

심연의 어둠 속에서, 벚꽃잎이 끊이지 않고 내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인영. 자신을 인지하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잔물결처럼 마음에 따뜻한 것이 퍼진다. 기쁘게-

달려서 다가가려고 할 때, 그 사람은 발을 돌렸다.

-…어…..?

멀어지는 뒤 모습을 쫓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차이는 멀어지기만 했다.

필사적으로 뻗은 손은, 단풍잎처럼 작아졌다.

-어째서….

울고 싶어졌다. 자신에게는, 그 사람밖에 없는데.

가지 말아. 가지 마.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

벚꽃이, 흩어진다. 그것은 결국 등나무 꽃잎이 되고, 금목서가 되고….눈발이 되었다.

인영이, 눈에 묻혀, 사라진다.

계속 기다렸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계속.

-가지 마.

그 말 밖에, 하지 못했다.

-가지 말아.

절망에 무릎을 꿇으려고 한 그때, 뒤에서, 강한 힘으로 손을 잡아주었다.

놀랐다.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팟 하고 눈을 뜨자, 바로 옆에, 익숙해진 숙사의 얼굴이 있었다.

“….정, 란…?”

“멋대로 들어와 죄송합니다. 가위에 눌리신 듯 하여…”

왕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려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던 듯 했다.

전신이, 기분나쁜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땀을 닦아내려고 할 때, 왕은 겨우, 자신이 정란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쥔 손을 자신의 팔쪽으로 들어올려, 정란은 당황한 듯 변명했다.

“아…그게, 손을 내미셨기 때문에, 그만…., 죄송합니다.”

왕은 쥔 손을, 흔들흔들 흔들었다.

“….주상?”

손을 멈춘 후, 왕은 웃었다.

“오늘은, 함께 잘까? 정란.”

정란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식초를 마신 듯한 얼굴은, 그가 어떻게 하여 이 난제를 빠져나올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싫은가?”

“아니…그게, 사람에게는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에..그리고..”

동요하는 정란에게, 왕은 분명하게 말했다.

“농담이다.”

빙그레 웃는다.

“지금, 결정했다. 정란은 안지 않겠어.”

“에…”

“안기에는, 너무 아까워.”

“….”

정란은 현명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은 갑자기, 물끄러미 정란을 보았다.

“….생각해보니, 정란은, 너무나 좋은 남자잖아? 나와 몇살 차이 나지 않는데도.”

몹시 강조해서 말해, 정란은 다시 대답이 궁해졌다.

“요즘 생각했는데, 수려는 나보다 너를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아.”

“….”

“정란은 좋은 남자니까, 그것도 알아. 계속 함께 살아왔다는 것도 있고. 하지만, 일단, 수려의 남편으로서. 조금만이라도 의지해 주었으면 하는 거다.”

“……”

“그러니까, 이제부터 부부의 틈을 메우려고 생각해.”

왕은 매우 진지했다. 정란은 그 의도를 알기 어려워, 조심조심 물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어, 어떻게…?”

왕은 고개를 돌리고 잠시 숙고했다. 그리고 손뼉을 쳤다.

“그렇다, 나도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할거야.”

그리고 헤어지기 섭섭하다는 듯 정란의 손을 놓고, 가볍게 침대를 뛰어내렸다.

“오늘은 숙위가 좋으니까.”

얇은 옷 하나만 걸친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왕에, 정란은 기겁을 했다. 

“자,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응?”

“감기 걸리십니다! 봄이라고 해도 밤은 아직 추우니까, 위에 뭔가를 더 걸치시는 게.”

왕은 웃었다.

“나는, 수려도 좋으니까, 정란도 좋아해.”

다시 심하게 굳어진 정란을 남겨둔 채, 왕은 역시 잠옷 하나만 걸치고 방을 나갔던 것이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볼을 쓰다듬는 서늘한 바람에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면서, 왕은 이 한달을 회상했다.

마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잔해졌다. 편안하다, 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수려가 화냈던 것 마저, 어쩐지 기쁘다. 표정이 없어, 그래서 한층 더, 수려가 화를 냈던 것이다. 그것을 더욱 음미하고 싶어, 그는 몇 개인가 거짓말을 했던 것이지만, 뭐 괜찮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 수려는, 화내는 얼굴도 귀여우니까.

누군가가 걱정해주고 있다, 라는 것.

그것이, 이렇게도, 기뻤다.

왕은 문득 양 손 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 이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분명, 많은 것.

그 속에는, 수려의 웃는 얼굴도 들어 있다는 것도, 그때 그는 알았다. 쥘 수 있다면 손에 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거리가 벌어진 채라면, 놓쳐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손바닥에 있었던 것은, 정말 얼마 안되는 것이었다.

소하와, 부고라고 하는 장소와, 그 속에서 보낸 시간과 – 그랬다,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은, 아주 작은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을, 그는 훨씬 오래 전에 포기하고 있었다. – 오직 한가지를 바랬다.

그것을 위해서 오르고 싶지 않은 왕위에 올랐다. 그에게 있어서는 별 것 아닌 왕위. 이곳에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언젠가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공석을 지키기 위한, 형식뿐인 왕일 뿐.

그러니까 그는 왕위에 올라서도, 왕으로서의 일을 거부해왔다.

하지만 수려와 만나고 말았다.

불가사의한 따스함을 가진 그녀를, 그 손에 넣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한결같이 바래왔던 소망을 놓아버린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귀비. <왕>이 아니면, 손에 넣을 수 없다.

휘익,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그는 손바닥을 바라보고 – 이윽고, 천천히 그 손을 쥐었다.

 

 

주취는 방에서 달을 올려다 보았다.

“빠르군요. –벌써, 한달인가요?”

수려는 긴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예요. 내가 왔던 보람이 있었던 걸까요?”

“그것은 이미.”

주취는 기쁜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주상은 몰라볼 정도로 의젓해지시지 않으셨습니까? 조의에도 매일 아침 나가시고, 오후에도 강사 여러분과 공부하고 계시니까요. 신하의 주상을 보는 눈도 바뀌어 가고 있다고, 소태사도 말씀하셨습니다.”

“후후, 그래요.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조의에서도 발언하도록 되었다고 하고. 게다가, 함께 공부하고 있는데도, 그 사람 이따금 생각지도 못한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곤 해요. 장수님에게 바로 야단맞지만요.”

하지만, 장수는 평소 그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뿐이라도 정말은 쾌거라고, 주영이 가르쳐주었다.

“….그래도, 매일 밤 시관과 함께라는 것은, 변함없는 것 같지만-…”

그것만은 이제 와서 교정 불가능한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수려가 있는 곳에 다니는 것도 곤란하지만.

그 때,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수려는 즉시 자세를 바로했다. 들어온 것은 향령이었다. 손에는 자기 전에 마실 향기 좋은 차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정말 이상해요.”

주취는 들어온 향령을 보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매일 함께 식사를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언제나 사이좋은 모습인데도, 어째서 밤에는 따로 따로인지. 뭐, 그것도 시간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모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향령.”

질문을 받은 향령은, 예, 하고 활기차기 대답했다.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홍귀비님을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고, 모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분 모두 젊으시니까,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사랑을 키우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빨리 아기님이 보고 싶다고, 나이많은 여관들은 애태우고 있답니다.”

“여염집 규수” 수려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저희들도 일을 준비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홍귀비님.”

천진난만한 향령의 말에, 수려는 차를 떨어뜨려 버렸다. 일이라니, 무슨 일!?

경련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신경을 집중해, 수려는 어떻게든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 마음만 받을께요, 향령. 그, 그런 것은, 역시, 흐름,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조급해 할 작정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마음만이예요.”

향령은 약간 유감이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사랑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정말 매력적인 미소였다. 수려마저, 무심코 꼭 끌어안고 싶어질 정도로 귀엽다.

(…아-아, 나도 이 정도로 귀엽다면-…)

그만 자신과 비교하고 침울해졌다. 원래 주취는 뛰어난 미인이라 비교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주무셔요, 홍귀비님.”

향령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고 생각했는데, 타다닥 달리는 걸음으로 돌아왔다. 뺨을 상기시키고 달려들어온 향령 때문에, 수려도 주취도 놀랐다. 엄하게 지도받고 있는 후궁의 여관이 달리는 장면 같은 것은, 여간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큰일이예요.”

향령은 흥분한 채 알렸다.

“주상께서, 오셨습니다.”

 

 

“….도대체, 이런 밤중에 무슨 일로 오셨나요?”

입을 연 수려의 첫번째 말에, 왕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묶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 등에 늘어뜨린 수려는 평상시보다 훨씬 여자답게 보였다. 왕은 위에서 아래로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윽고 툭하니 중얼거렸다.

“아아…틈을 메우러 왔다.”

“에? 틈?”

이따금 엉뚱한 말을 하는 남자지만, 오늘 하는 말은 특히 더 의미불명이다. 눈이 점이 된 수려는, 그래도 곧, 왕의 오른손에 묶음이 되어 들려있는 장미를 알아챘다.

“….어머. 그것, 혹시 저에게?”

왕은 아이처럼 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틈이라니 뭐예요, 정말. 꽃을 주러 왔다고 말하면….되는 걸, 혹시 맨손으로 꺽은 거예요!? 안돼요, 손바닥 상처투성이잖아요!”

수려는 직접 장미 줄기를 쥐고 있는 손을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게다가 도대체, 그 얇은 옷은 뭐예요! 감기 걸리잖아요. 아무리 봄이라고 해도, 아직 밤은 추우니까. 그런 얇은 옷차림으로 어슬렁거리지 말아요!”

수려는 문답무용으로 왕을 방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정란과 같은 말을 하는 수려에게, 왕은 웃어보였다. …역시 얇은 옷차림인 채 와서 다행이었다.

처음으로 들어온 수려의 방을, 진귀한 것을 보는 듯 왕은 둘러 보았다. 그 시선이 이미 꽃꽂이된 꽃이 있는 곳에서 멈췄다. 커다란 화병 속에 있는 것은….

“….분홍의 장미…”

왕이 꺽어온 것은, 하얀 색에 가까운 황색의 장미였다. 한숨을 눈치챈, 수려는 대답했다.

“아아, 낮에 정란이 꺽어다 준 거예요. 처음으로 핀 거라고.”

왕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렇다, 정란이 너무 좋은 남자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언제나 선수를 빼앗기고 있는 것 기분이 드는 것이다.

수려는 갑자기 축 처진 왕의 표정을 오해했다.

“앗, 아직 인사를 하지 않았네요. 미안해요. 기뻐요. 고맙습니다.”

그 웃는 얼굴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수려는 재빨리 장미를 꽂은 후, 침대의 끝에 왕을 앉혔다.

“자, 오른손, 보여줘요.”

순순히 손을 펼치자, 가시와 피로 상당히 심해져 있다. 수려는 눈썹을 모았다.

“정말, 맨손으로 꺽다니.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하고 왕은 생각했다. 그런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요.”

수려는 약상자를 가져와서, 가시를 빼기 시작했다.

“하나씩 빼야 하니까, 조금 시간이 걸릴 거예요.”

손을 잡고, 조금 눈이 커졌다.

“…..저기.”

“응?”

“….당신, 검을, 배운다던가 하는 거예요?”

몇 개인가 단단한 굳은 살이 있고, 손의 피부도 두껍다. –정란의 손과 닮았다.

왕은 약간 표정이 변했다. 주저하는 듯 사이를 두었다.

“….왕족의 소양으로써, 조금.”

“후응?”

무술에는 둔한 수려는, 그 대답에 완전히 납득했다.

안도한 왕은, 퍼뜩 당초의 목적을 생각해냈다. –그렇다, 틈을 메우지 않으면.

“…수려.”

“응?”

“지금부터 이름을 불러줘.”

“이름?”

“내 이름말이다.”

“아아.”

세밀한 작업에 집중하고 있던 수려는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의미를 이해하자 손을 멈췄다.

“….그건?”

“지금부터, 이름을 불러달라고 말했다.”

“….뭐예요. 갑자기.”

“나만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기분이 들었어.”

“불공평하다고 말씀하셔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왕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고 늘어졌다.

“내 이름이 쓸모가 없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쩐지 뚱딴지 같은 대화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결정했어. 지금부터 이름을 부르는 거야.”

“…류휘, 라고요?”

어쩔 수 없이 중얼거린 수려였지만, 천천히 눈을 깜빡거린 뒤, 왕은 굉장히 기쁜 듯한 얼굴을 했다. 말을 한 수려 쪽이 멈칫할 정도로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기뻐하는 그 모습에, 수려는 졌다.

“….알았어요. 하지만, 둘만 있을 때예요.”

왕 – 류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에 대만족한 순간, 이번에는 손바닥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욱씬욱씬 거리는, 묘하게 거슬리는 통증이었다.

“어째서,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거지.”

무턱대고 화풀이를 할 기색으로 투덜거리는 류휘에게, 수려는 가시 빼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적당하게 대답했다.

“장미히메가 인간 남자를 사랑하니까 그렇지요.”

류휘는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그게.”

그 반응에 수려 쪽이 놀랐다. 얼굴을 들어, 물끄러미 류휘를 올려보았다.

“…몰라요? 이 이야기?”

멍해 있는 류휘를 보고, 수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아이라면 반드시 들으면서 자라는, 그런 몇 개나 되는 옛날 이야기의 하나.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수려는 다정한 마음이 되어, 가시를 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장미히메 라고 하는, 무척 예쁜 장미의 아가씨가 있었어요. 그녀는 어떤 병도 상처도 낫게 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에게서 결혼신청을 받았어요….”

수려의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 같았다.

틈을 메워서 안심했고, 조금 전의 악몽 탓으로 - 정란 덕에 오늘은 조금만 꾸었지만 – 피곤해져 있던 그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기분 좋은…잠.

수려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는, 완전히 치료도 끝나 있었다.

“자, 끝이예요.”

얼굴을 든 수려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류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네.”

커다란 몸을 뒹굴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수려는 잠시 고민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어디서 자지?

침대는 성인 세명이 충분히 잘 수 있을 정도로 컸으니까, 넓이에 지장은 없다. 이렇게 곤히 잠들었으니까, 뭐 실수로라도 일어날 리가 없다. 라고 바로 결론을 내렸다. 내일은 여관이 깨우기 전에 일어나면 된다.

만약을 위해, 긴 베개를 경계선 쯤에 두었다.

그리고 그 긴 베개를 사이에 두고, 침대의 끝과 끝에서 왕과 귀비는 푹 잠들었던 것이다.

 

 

심야 – 부고에서 책을 읽고 있던 소하는, 한밤중의 방문자에 조금 눈썹을 올렸다.

“-장수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오늘 부고에 머물러도 될까요?”

피로한 기색인 그 얼굴을 보고, 소하는 바로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예의 바르게 소하는, <또 미아가 되셨군요> 등을 묻지는 않았다.

“물론, 좁지만 들어오셔요..”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잠시 방문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설마 자신이 재적하는 사부에서 미아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장수는, 무척 침울하고, 또 화가 나있었다. 언제나처럼 누군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들러붙어 가지 않았던 것만이 패인이라고 생각치 않았다. 문득 그 도깨비 상사가 방향감각을 미치게 하는 약을 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표지도 이동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니, 그렇지 않으면…. 

“….장수님.”

소하의 목소리에, 장수는 피해망상에서 자신으로 돌아왔다.

“아, 예, 예에!?”

“사부상서에게, 불려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장수의 일순간의 긴장에, 소하가 눈치챘던 것일까? 장수는 바로 미소를 띠었다.

“-예, 일 때문에, 조금. …맞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무엇입니까?”

“제가 왕의 강사역을 담당한지, 한달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소하는 조금, 표정이 변했다. 장수는 진지한 얼굴로 계속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왕은 혹시-“

 

 

***

 

 

다음 날, 수려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어쩐지, 묘하게 따뜻하다. 그리고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몸에 올라타고 있었다. 이상하게 기분좋은 무게.

“응…”

아직 반쯤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홍귀비님, 아침입…..”

주취의 목소리가 아니네….멍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부자연스럽게 말이 중단된 채, 어쩐지 당황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

수려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놀랍게도 움직이지 않는다.

올라타고 있는 것….아니, 달라붙어 있는 것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수려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조금 시선을 올리자, 가까이에 단정한 얼굴이 있었다. 올라간 속눈썹이 길고 나란해서 얄미울 정도네, 하고 수려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얼굴만은 멋지네-….)

묘하게 어린아이 같은 인상의 언동으로는 전혀 생각치 못했지만…. ….

거기에서 수려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잠깐 잠깐 잠깐 기다려--!!)

수려는 류휘에게 안긴 듯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빠져나가 일어나려고 해도, 팔이 단단히 휘감겨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자, 순식간에 수려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자…잠깐만! 주상! 일어나요. 놔달라니까! 왕!!”

“응…”

류휘는 멍하니 눈을 떴다. 팔 안의 수려를 발견하고, 사랑스러운 듯 손등에 뺨을 부비고 무언가 행복한 듯이 웃었다. 그리고 더욱 힘을 주어 꼭 끌어안았다.

“이름을 부르라고 했잖아….”

그리고, 잠들었다.

수려는 절규했다.

“자지마앗! 일어나! 일어나요ㅅ. 일어나라니까요---ㅅ”

 

  

깨우러 왔던 여관이 그날 아침에 한해서 주취가 아니었다는 것은 운이 없었던 것이었다.

소문은 아침식사를 하기까지의 짧은 기간, 눈 깜빡할 사이에 퍼졌다.

“전하께서 드디어 여인과 잠자리를 함께!!” 라는 잘못된 소문은, 그러나 귀비라는 수려의 입장상, 부정할 수 없었다.

여관들은 아무 것도 입밖에 내지 않았지만, <잘 되었습니다!>라는 눈으로 마음껏 물어왔다. 향령 등은 눈가를 적시며, 여느 때보다 세배는 일찍 아침식사의 준비를 마친 후, 마치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둘만을 두고 날듯이 돌아갔다. 급사인 여관마저 남지 않았다. 주취만이 황송한 듯이 방 구석에 있었다.

수려는 머리를 감싸고,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류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된 것인지 기분이 좋았다.

“…아-정말. 어째서 당신이 베개를 넘어온 건지-…”

“얼굴이 빨개.”

“---읏.”

수려는 반사적으로 찻잔을 집어 던졌다. 그러나 류휘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이미 익숙해졌던 것이다.

“위험하잖아?”

“나, 나는 당신과 달라서 그런 것에는 면역이 없어욧! 바보 짓도 최저얏!!”

수려는 털썩 책상에 엎드렸다.

“아-…아버님과 정란, 어떤 얼굴을 하고 이 바보 같은 소문을 들었을까?…믿어버렸으면 어떻해-“

팟하고 류휘는 눈썹을 모았다. 소하는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정란이 나오는 거야.”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소녀의 마음이라구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수려는 엉망진창으로 설명을 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치에 맞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구나.”

“뭐가요?”

“…………………………정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네?”

사실 수려는, 그. 행.위.를 어렴풋하게 밖에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물론 남색가인 왕과 무슨 일이 있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일단, 일단이다. 

그러나 류휘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을 보았다. 수려는 창백해졌다.

“하하하하하지만 당신 어제 잠들었잖아요!! 단지 잠이 덜 깨서 그런 거지요!?”

류휘는 아무 말없이 아삭아삭 채소절임을 씹었다. 수려의 안색을 파래졌다 새하얘졌다.

“하, 하지만 당신, 그, 남자하고 만이잖아요!? 그, 그-렇죠?!”

류휘는 힐끗 수려를 보았다. 턱을 괴고, 어쩐지 기분 나쁘게 웃었다. 최근에는 상당히 표정이 풍부해진 그였지만, 이런 얼굴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

“저런 저런,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은 그쪽이잖아?”

“---- 그, 그야, 그렇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나쁜 일은 아니잖아? 수려는 나의 아내니까.”

지금까지 순진했던 아이가 갑자기 장난이 심한 꼬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수려는 뻐끔뻐끔 입을 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류휘는 수려의 귓가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한올 넘겨주고, 의미심장하게 입을 다물었다. 구석에 있던 주취가 흠칫 하는 것처럼 눈을 둥글게 떴다.

“수려의 머리카락, 부드럽고 살랑살랑해서 기분이 좋아.”

“-------“

말이 막힌 수려였지만, 바로 응전준비로 들어가, 손가락을 들이댔다.

“제대로 대답해줘요. 알겠어요? 정직하게! 어,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거죠?!”

류휘는 모르는 척하는 얼굴로 식사를 계속했다. 그것을 보고, 수려는 싱긋 웃었다. 매일매일 얼굴을 대해 왔던 것이다. 학원의 아이들을 상대해 온 수려는, 표정을 읽어 온지도 오래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네요. 아아, 깜짝 놀랐다.” 

휘청휘청 의자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진심으로 마음을 놓은 듯한 모습에, 류휘는 조금 재미없어져, 눈썹을 모으고 수려를 보았다.

“뭐야, 수려는 내 아내잖아. 어째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젓가락을 입에 물고 딴짓하지 말아요.”

즉시 지도가 들어왔다. 수려는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류휘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그런 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거라구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류휘의 눈썹이 더욱 찡그려졌다. 고분고분하게 젓가락을 놓고, 이쪽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수려는, 내가 싫은거야?”

“에에? 그야.”

진지한 얼굴로 응시당해, 수려는 아무렇지도 않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무튼 얼굴만은 상당히 멋진 남자였다. 생각과는 달리 고동이 빨라져, 내심 당황했다. 그러나 수려는 헛기침을 하고 노력해서 평정을 가장한 얼굴을 꾸며냈다.

“그, 그야, 좋아해요.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걸로는 안돼요.”

“……뭐야? 그게?”

“그, 그러니까, 에에…..당신을, 좋아하지만, 그, 그런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하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도, 있는 거잖아요?”

번뜩 류휘의 뇌리에 소하와 정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 있지.”

“그렇죠? 그렇죠?”

수려는 갑자기 기운이 났다.

“그런 거예요! 좋아하지만 친구로서 소중하다고나 할까, 아이같아서 귀엽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당신은 그런 느낌이예요! 좀더 이렇게, 두근두근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면 안돼요!”

수려 자신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은 여세에 맡기고 적당하게 말했다.

류휘는 복잡한 얼굴로 팔을 꼬았다.

“즉, 수려는 그렇게 별난 기분이 드는 상대가 아니면,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건가?”

“…..엣, 그, 그래요. 저는요. 트, 특별히 당신의 주의에 참견하는 것은 아니예요.”

매일 밤 다른 시관을 잠자리로 부른다는 그를 일단 배려해 그렇게 말했다.

“당신은 몇 명이나 상대가 있으니, 나 같은 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정말 여자에게 이런 말까지 하게 하다니…”

투덜거리며 남자처럼 급하게 식사를 하는 수려를, 류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고 있었다.

 

 

“여어, 정란, 어젯밤 일 들었어?”

주영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정란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예상대로의 물음이었다.

“…..아가씨와 주상의 일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렇다고, 들었지만…. 십중팔구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아아, 그러고 보니 너, 어젯밤 숙위였지?”

“예. 부부의 틈을 메운다고 하시더니 나가셨습니다.”

“….정란, 부부의 틈을 메운다고 했다면 하나밖에 없는 것 아냐?”

“이름을 불러달라는 것이 남장군의 여자와의 틈을 메우는 방법이라는 것은, 의외인데요.”

침묵하는 주영에게, 정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주상은 그 전에 방에서 잠을 주무시지 못하셨기 때문에, 아마, 이야기 도중이라든가 어딘가에서 잠들어 버리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유네. 놀리는 보람이 없어서 재미없는데. ….하아~”

주영이 머리에 팔을 감자, 정란은 흠칫하며 몸을 끌어당겼다.

“무,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근거가 있는 거겠지? 너와 수려님 사이에.”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없습니다. 그런 건.”

달아나려는 정란을, 그러나 주영은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상황이잖아. 소하님과 너와 수려님 셋의 생활. 보물을 지키는 사람이 소하님이라면 허점투성이였을 것이고, 너도 스물을 넘은 어엿한 남자. 그럼, 뻔하잖아.”

“아,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정원에서 남자 둘이 옥신각신 격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날카롭게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검술 솜씨를 지닌 두 사람은, 그 소리에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소리.”

“아아, 상당히 좋은 솜씨인데. ….하지만 연습장에서가 아니라 이런 곳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두 사람은 정원 안으로 떨어져 들어가 보았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엿보았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송태전!?”

그만 두 사람은 함께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송태전이 휘두르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남가의 애송이와……너는.”

송태전은 정란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 송태전은 스르릉 검을 들이댔다.

“—잠깐 어떤가. 상대를 하지.”

검끝이 향해진 정란은 깜짝 놀랐다.

“에-----저, 저-말입니까!?”

“그렇다.”

주영은 흥미진진한 듯 뺨을 실룩실룩하고, 말없이 한발 물러섰다.

송태전은 일찍이 선왕의 측근으로, 필두무관으로써 몇번이나 무공을 세웠던 역전의 맹장이다. 노령이지만, 그 몸은 아직 쇠퇴하지 않았다.

곤혹스러워 하는 정란에 상관없이, 송태전은 갑자기 간격을 좁혀왔다. 용서없이 발을 들여놓자 정란도 순식간에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잘 받아냈다.”

“송장군…..!”

정란은 물러서려고 했지만, 송태전은 노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속도로 빈틈없이 뒤를 따라 왔다. 차례차례 공격해오는 검은 무겁고 빨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격 일격이 멋지게 헛수고가 되었다.

날카롭게 급소를 노린 그 공격에, 보고 있던 주영도 혀를 내둘렀다.

체력은 정란이 강했지만, 경험의 차에서 오는 감각과 노익장에서는 송태전 쪽이 확실히 위였다.

“정란, 이라고 했나?”

“예, 예에.”

계속 찔러 들어오는 검을 옆으로 쳐내며, 손목을 휙 돌려 반격했지만, 깨끗하게 송태전에게 받아넘겨졌다.

“자네, 나이가 몇이지?”

“스, 스물하나입니다.”

“정말인가?”

그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주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13년 전, 소하가 주워왔다고 했지. 그 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저, 저기…”

질문에 정신을 빼앗긴 순간, 검을 쳐서 떨어뜨리고 목 언저리에 검을 들이댔다.

“-꽤나 괜찮은 솜씨다. 언틋 보기에는 아류처럼 보이는 검이군.”

송태전은 아래로 내린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검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사리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자네의 근본이 되는 검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비슷하네.”

정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송태전은 슬쩍 정란을 보았다.

“….거기 남가의 애송이도, 눈치챘겠지. 남가출신으로, 일단 부장직에 있는 남자니까 말이다.”

주영은 다만 눈썹을 움츠렸다. 정란은 말없이 검을 넣었다.

송태전은 담담하게 계속했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검을 배운 자는, 한 사람을 빼고 모두 죽어버렸으니까. 류휘는 내가 직접 가르쳤지만, 그 검을 알지 못한다.”

-마지막 한 사람은, 먼 옛날 유배되었다.

“….그 공자도, 조금 전의 자네처럼, 나를 송.장.군.이라고 불렀다.”

그립군 – 그렇게 중얼거리고, 송태전은 떠났다.

정란은 마지막까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

 

 

“-괜찮잖아?”

소하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즉 곁에서 함께 잤다는 거지?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면, 눈꼬리를 올리지 않아도.”

수려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님, 저는 이제 16살이예요. 그리고 상대방은 19살의 남자라구요!”

“너는 정란과도 잘 해왔잖니?”

소하는 어안이 벙벙해 하며 딸을 보았다.

“천둥이 치면, 지금도 정란에게 매달려 캬-캬- 소리지르면서 밤을 보내는 것이 누구지?”

화악 수려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 그것과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그래?”

“정말, 걱정하고 있을까 봐 달려왔더니.”

“걱정? 주상은 남색가잖아? 게다가 그렇다고 해도 무리하게 강요할 분이 아니야.”

“….”

수려는 탁자를 짚고 엎드렸다. 어쩐지 걱정을 하는 쪽이 더 낫다는 기분이 든다.

“맞다, 너에게 줄 것이 있어.”

소하는 손을 친 후, 가볍게 작은 오동나무 상자를 가지고 왔다. 오동나무 뚜껑을 열자 나타난 것에는, 수려도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건?”

“아는 분에게서 받았단다.”

그것은 은색으로 빛나는 멋진 다기였다. 섬세한 모양과 세공이 마음을 사로잡아 황홀할 정도였다. 순은제의 걸작품이라는 것을, 한눈에 수려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받으셨다니…그럴만한 가격이 아니잖아요!?”

으-음, 하고 소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굉장한 부자인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럴만한 가격> 정도는 아니겠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버님은, 부고에 묻혀 계셨으면서 어떻게 이런 대단한 사람들과 사귀신 건지.”

모자라기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아버지였지만, 의외로 발이 넓다. 그것이 수려에게는 놀라웠다. 

“아깝다고 말하지 말고, 잘 사용해주렴.”

“….알았어요. 다른 사람에게 받은 것을 팔아버릴 수는 없죠.”

수려는 자주빛 천으로 싸서 살짝 들어 올렸다.

“좋은 가격을 쳐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험, 헛기침을 하는 아버지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농담이예요. 감사히 잘 쓸께요. 뭐, 오늘부터 왕도 또 시관과 함께 주무실 것 같고. 당장 자기 전에 차 마실 때 사용할께요.” 

들떠서 부고를 나가고 딸에게, 소하는 으-음, 하고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또 시관과 함께? 

(…….정말로 그럴까?)

 

 

-역시, 소하의 예감은 맞았다.

그날 밤도 주취에게 이끌려, 류휘는 수려의 방으로 왔던 것이다.

수려는 입을 떡 벌렸다.

“어째서 당신이, 또 어슬렁 거리는 거예요----ㅅ!!”

“나와 수려는 부부다. 별로 이상하지 않아.”

“아니, 그….그게 아니잖아요! 이상해요! 항상 시관과 주무셨잖아요!”

“시관보다, 수려가 좋다는 것을 알았어. 대발견이다.”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고, 침대에 기어오른다.

“어제의 뒷 이야기를 들려줘. 도중에 잠들어 버려서 전부 듣지 못했다.”

수려는 이마를 눌렀다. 설마 이 나이에 연상의 남자를 애보듯 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여기서 주무실 생각으로 오신 건가요?”

끄덕하고 고개를 끄덕인 류휘에게, 수려는 호통칠 기력마저 빠져버렸다. 물론, 지금에 와서 퍼져버린 소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 어쩐지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면 하룻밤이나 이틀밤이나 똑같다.

“-알았어요.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군요.”

수려의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어서 자자고, 위엄있게 말하자, 류휘는 고분고분하게 이불로 기어들어갔다. 그때, 침대 옆의 소탁에 은다기가 놓여 있는 것을 알아채고, 류휘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이것은, 어떻게 된거야?”

할거라면 철저하게 하고 니코를 집어 들고 나온 수려는, 다기를 보고 아아, 하며 웃었다.

“아버님이 오늘 주셨어요. 아마, 다른 사람에게 받으셨다는 것 같아요. 예쁘지요?”

류휘는 은다기를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빛에 비춰보고,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다. 수려는 얼굴을 찡그렸다.

“잠깐, 상처 같은 걸 내면 안돼요. 막 받은 거니까요.”

“---차를 마시자.”

“….에? 갑자기 뭐예요?”

의아한 얼굴을 하고도, 들려오는 발소리에 수려는 당황해서 몸가짐을 바로했다.

들어온 것은 향령이었다. 손에는 다기 쟁반을 들고 있다.

“홍귀비님, 오늘밤은 녹차를 가져….”

류휘의 모습을 알아챈 향령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팟하고 붉은 빛이 퍼진 것처럼 향령의 하얀 뺨이 붉어졌다.

오해받은 것을 수려는 눈치챘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다. 조금 물러서면서 인사를 하려할 때, 류휘가 빠른 걸음으로 향령에게 가까이 다가가 쟁반을 들었다.

“수고했다.”

낮은 미성으로 말하자, 향령의 뺨이 더욱더 붉게 물들었다. 앳되고 청순한 연인끼리인 것 같네, 하고 수려는 두 사람을 보고 생각했다. 미남 미소녀로 그림같은 한쌍이다. 

그러나 무뚝뚝한 류휘가 발뒤꿈치를 돌리자, 향령은 당황해서 불러 세웠다.

“저, 저기….저, 언제나의 야식은 어떻게 할까요?”

고개를 숙인 그 작은 귀까지 새빨개졌다. 류휘는 어째서인지 수려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됐다. –물러가라.”

인사를 하고, 향령은 조용조용 물러갔다.

“언제나의 야식이라니, 저녁식사 후에도 무언가를 먹는다는 거예요? 살찌겠어요.”

“야식이라는 것은.”

류휘는 달그락 달그락 쟁반을 놓았다.

“정력제야.”

선뜻 말했기 때문에, 수려는 잠시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알아차리자 마자, 수려의 얼굴도 향령에 못지않게 새빨개졌다. 과연, 향령이 귀까지 빨개질 만도 하다.

“나는 먹지 않지만, 상대가 원해.”

“---아무도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욧.”

수려는 그만 니코로 때려주고 싶었다.

“게다가 맘대로 남의 다기에 차를 따르고.”

류휘는 은다기에 멋대로 녹차를 따르고 있었다. 예쁜 녹색이 은기에 잘 어울려 정말 아름답다. 류휘는 술처럼 휙 다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꿀꺽하고 마셨다.

“아-앗! 나, 나도 처음으로 써보는 건데!!” 

“….써.”

류휘는 혀를 내밀었다.

“어째서 술이 아닌 거야? 차라면 잠을 못자게 되는 것이 아니야?”

“오늘은 밤 늦게까지 잠을 안자고 책을 읽으려고…..가 아니고, 그럼 뭐하러 마신 거예욧.” 

“오늘은 책을 무리야.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니까.”

류휘는 이번에야말로 이불로 기어들어갔고, 수려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당신 전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네요.”

니코를 준비한 수려를 보고, 류휘는 조금 눈이 둥그래졌다.

“….수려, 니코를 연주할건가?”

“……, 웃지 말아요. 왕궁의 악사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니코의 부드럽고 청아한 음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류휘는 손을 뻗었다. 수려의 긴 머리카락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에서 주저하듯 멈춘 후, 결국 손을 거두어 들였다.

악사에 지지않을 멋진 음색에 곧 깜박깜박 하면서, 류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은잔이었다.

 

 

밤늦게 - 장수는 오늘밤도 부고에 있었다. 건너편에는 주영이 서 있다. 소하는 별실에 틀어박혀 있어서, 개가서고에는 둘밖에 없었다.

주영은 서가에 기대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짖궂은 빛을 품었다.

“공부는 소하님, 무술은 송태전…인가? 10년 이상이나 그들에게 배웠다는 거지. 주상은 문무 양쪽에서 나라 제일의 스승을 가지고 있었군.”

“…거의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부고에 있었던 왕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고, 소하님이 말씀하셨어. 얼마나 사치스러운지. 그 소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송태전과도 부고에서 알게 되었다는 것 같군. 항상 퍼렇게 멍이 들어서 부고에 와 있던 왕을, 마침 부고에 온 송태전이 발견하고, <괴롭힘 당한 채 울면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 능사인가>라고 화내면서, 그때부터 틈이 나면 왕을 호되게 훈련시킨 듯 해. 잘도 그럭저럭 견뎌냈더군.”

송태전은 명장 중의 명장이지만, 그의 훈련은 지나치게 심해 아무도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에, 현역에서 물러난 뒤에는 우림군의 사범 역에도 배속되지 못했다. 선왕이 탄식하며 <자네가 사범을 맡는다면 군은 하루에 전멸이네.> 라고 말했다던가.

“퍼렇게 멍이라고….?”

장수의 한숨에, 주영은 어깨를 움츠렸다.

“뭐, 짐작은 가. 후원자가 없는 막내 공자에게, 다섯 명이 – 아니, 네 명의 형인가? 하루종일 부고에 있던 이유도 그.거.였군. 그러다가 소하님에게 마음을 허락했다는 거군.”

(….이런 사기꾼 놈.)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장수는 험악하게 주영을 노려보았다.

“너, 그 바보 놈의 연기,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지?”

주영은 가볍게 웃었다.

“한눈에 알았지. 반사신경의 예민함도, 발의 움직임도, 시선의 배치도, 전부 무관 특유의 것이었거든. 일체의 사태에 항상 대비하고, 아무 생각없는 동작도 전부 헛된 것이 없었어. 그것은 예의범절로는 절대 몸에 익힐 수 없으니까. 아마, 본인도 무의식일 거다. – 검을 들게 하면 어울리겠지. 한번 겨뤄보고 싶을 정도야. ….역시 누가 가르쳤는가 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째서 말해주지 않았어!”

“너라면 머지않아 알아챌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알아차렸잖아?”

부아가 치민 장수는 코를 울렸다.

“아아, 그렇게 빨리 지식을 흡수하는 녀석이 있을 리가 없잖아. 진보가 빨라 수려는 단순히 기뻐하고 있지만, 이 내가 수년 걸린 것을 단지 수개월로 따라잡을 수는 없어. 단순히 조금씩 내놓고 있었을 뿐이지.”

“그런 것 같군.”

“….그렇게 기뻐할 정도인가?”

“아무리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능하다는 것과 같아. <그는 이렇게 대단해요. 단지 보이지 않았던 것 뿐>….이런 것에 무슨 의미가 있어?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은 우리들 아래 사람들에게는 관계가 없다. 결과가 전부야. 그렇지 않아? 왕이 되었다면 그 실무를 완수해야만 해. 자기의 능력 전부를 걸고. 그것이 왕이다. 능력이 있어도 사용하지 못한다면 역시 단지 바보왕이지.”

주영은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고는 그의 문제고, 내가 말할 만한 문제가 아니지. 그렇게까지 말해줄 정도로 신경쓰고 싶지도 않고, 내가 그렇게 다정한 성격도 아니고.”

가차없는 옆얼굴에는, 언제나의 경박함은 조금도 없었다.

장수는 알고 있었다. 주영이 함부로 진심이 되지 않는 것은, 그가 결코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은 높고, 결코 그것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많은 것을 상대에게 바란다. 그리고 사실은 그 이상으로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리고 있다. 가벼운 행동과 인간관계의 떠들썩함으로 얼버무리고 있었지만, 그 정도의 이상주의이며 자신에게 엄격한 남자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군인다운 남자였다.

게다가 한번 진심으로 섬기기로 결심한다면, 그는 누구보다 성실한, 사심없는 신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벽을 넘은 것은 그의 상관, 흑요새 정도였다.

그는 이제 바야흐로 왕으로 섬기는데 알맞은 군주인가, 한참 결단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말할 작정이 아니었던 것을 나에게 말한 것은, 약간은 희망이 있다는 건가?”

“그래. 수려님 덕분에, 뭐, 조금 재미있어졌으니까.”

“수려는 잘 하고 있어. 그러나.”

장수는 찌푸린 얼굴이 되었다.

“….혹시 왕이 바보인 척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정사도 공부도 전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고 완전히 믿고 있으니까. 네가 하나부터 정사를 가르쳤던 탓도 있지만 말이야. 들킨다면 무척 화를 내겠지. 왕도 딱하구만.”

“자업자득이야. 지금까지 사람을 속여왔으니까. 그 정도의 날벼락은 달게 받아야지.”

“----그보다, 너, 상사에게 불려갔다면서?”

장수의 표정이 변했다. 조정제일의 재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엄격하고 예리한 표정으로.

“어떻게 알고 있지?”

“네가 사부에서 반나절을, 여기저기 헤매는 것처럼 어슬렁거렸다고 들었으니까.”

험악한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시시시시끄러웟. 그건 표지가 없어서.”

“그래그래, 그래서?”

얼굴은 웃고 있지만, 그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무슨 용건이었지?”

장수는 입을 다물었다. 혜안으로 이름 높은 그 눈동자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이윽고 그는 중얼거렸다.

“..수려에게, 순은의 다기를 맡기러 갔다.”

주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향령.”

“아, 주취님.”

향령의 방으로 한발 걸어 들어간 주취는 놀랐다. 마루 한면에 글이 흩어져 있어, 발을 디딜 곳이 없다.

주취는 그만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인 듯 싶구나.”

“에?”

“향령은, 취침 전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글을 전부 다시 읽는다는, 한결 같은 소문이다.”

새빨개진 향령에게 웃어보이면서, 주취는 품에서 글을 꺼냈다.

“이 속에 섞여버리고 말겠지만—자, 새로운 글이 도착했습니다.”

순간, 향령의 얼굴이 반짝 빛났다. 빼앗듯이 글을 받아들고, 보물처럼 가슴에 안았다.

그 표정에, 주취는 놀랐다. 향기가 풍기는 듯 한 요염하게 보이는 얼굴. 산더미 같은 글은 꼭 가족으로부터 받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글인 것은.”

향령은 웃었다. 예,하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그 얼굴도, 여느 때와 같지만, 전혀 달랐다.

“향령… 어떻게 해서 후궁에 들어온 거지? 이 정도로 빈번하게 글을 보내는 분이라면, 어차피 상당한 관위의 분일텐데. 혼인까지는 하지 않으셨더라도, 혼약 정도는 하셨을 터.”

아니요, 라고 향령은 말했다. 눈을 아래로 향하고, 살짝 머리를 숙인다.

“….그 분은,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저를 생각하지 않으시니까요.”

“이 정도로 빈번하게, 글을 보내시는데도, 말이냐?”

“다정한 분이십니다. 무척 다정하신 분…. 후궁에 들어온 저를, 언제나 걱정하셔서, 이렇게 글을 보내주신 답니다. 하찮은 이 몸에게는, 넘치는 행복입니다.”

주취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향령의 생각이, 일시적인 열병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았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을, 주취 자신도 괴로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보답없는 사랑. 그것을 알고 있어도 계속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한결같음. 그 생각을 가슴에 숨기고, 결코 밖으로 드러낼 수 없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강인함. 

향령의 모습은, 먼 옛날 자신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괴롭지는, 않으냐….?”

예, 라고도, 아니요, 라고도 향령은 말하지 않았다. 어느 쪽도 거짓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이런 나이에 알게 되어버린 것은, 행복한 것일까? ---불행한 것일까?

(….아니, 불행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취는 결코 불행하지 않았으니까. 오래고 오랜 동안, 보답없는 사랑을 품고 있었어도, 만나는 것마저 할 수 없었어도, 그래도 주취는 불행하지는 않았다.

포기하지 않는 미소를 띄우며, 역시 향령은 말했다.

“—마음을 보답 받을 수 있어서,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분을 만나서, 조금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말로 소중하게 대해 주셨어요. 많은 행복을 주셨습니다. 이 이상을 바랄 수는 없어요.”

다만---하고, 향령은 중얼거렸다.

“받기만 한 많은 행복을, 보답하지도 못하고 후궁으로 와버린 것만이, 마음에 걸립니다. 저도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어요. 그분을 위해서—살고 싶어요….”

그것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한 그녀의, 단 하나의 소원이었다.

“홍귀비님이 부러워요.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생각하고…이 이상 없을 정도로 행복하시니.”

그 때의 향령의 미소는, 투명하게 비춰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향령의 방에서 나온 후, 주취는 혼자에게 익숙해진 곳을 찾아 회랑을 한가롭게 거닐었다.

달을 올려 보았다. 난간에 손을 대고, 주취는 눈을 감았다.

---소중한, 사람….

살랑하고, 바람이 불었다. 농밀한 봄의 향기가 감돌았다.

마음을 보답 받을 수 있어서,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향령의 말이 귀에 메아리쳤다.

그래—그 말대로다. 마음을 보답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도, 그런 마음은 존재한다. 그 사람과 만난 행운. 많은 행복한 시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설령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은, 괴롭고, 안타깝지만---결코, 불행하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그렇게 생각한 것은, 포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사람과 만난 것이, 무엇보다도 놀라운 기적이니까.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으니까. 

향령의 모습은, 주취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마음 속에 가두어 두었던 생각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았다는 것에, 다시 주취는 놀랐다. 

그 사실에 안도하는 반면, 자조도 했다. 도대체 자신은 언제까지 이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인가. 10년 이상이나 매달려 있었는데도 남아있는, 이 단 하나의 생각은.

-----그렇더라도, 버리고 싶지 않아.

향령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사람의 눈에, 나의 모습은 향령처럼 비추어지고 있었을까? 향령과 같은 얼굴을, 자신도 짓고 있었을까?

바라건대, 향령처럼, 이 마음을 조금도 바라는 것 없이, 곱게 감출 수 있는 강인함이 자신에게도 있었으면.

마음을 보답 받을 수 없는 우리들의, 그것은 단 하나의 긍지니까.

 

 

***

 

 

다음날 아침.

눈 앞에 있는 류휘의 얼굴을 보고 수려는 깜짝 놀랐다.

--어어어어어째서? 다시 어제 같은 일이 없도록 겉옷을 들고, 방 구석으로 옮겼는데, 어째서 푹신푹신한 침대에, 그것도 어제와 똑같이----안, 안겨서--.

“아아, 내가 밤중에 옮겼다.”

아침식사 자리에서 기죽지도 않고 류휘는 말했다. 수려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탁자를 쳤다.

“어어어어어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예요-------ㅅ.”

“하지만, 그건 수려의 침대잖아.”

“저는 바닥에서 잤었어요!”

“딱딱한 곳에서 자면, 다음 날 관절이 아파.”

묘하게 현실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수려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 그런 자세로 잘 수는 없다구요!?”

류휘는 우물우물 식사를 하면서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수려의 몸은 부드럽고 안고 자면 기분이 좋아. 잠이 잘 온다고.”

수려의 얼굴이 점점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화가 아닌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화가 나서 소리치려고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직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누가 이 바보왕이든지 나 중 하나를 지금 당장 이곳에 묻어 버려 줘!)

마음 속으로 절규한 수려는, 오후의 강의에 류휘 혼자 보냈던 것이다.

 

 

오늘의 강사는 차태보였다. 온후한 인품이면서 선왕의 치세에서는 소태사의 다음 문관으로서 수완을 발휘했던, 대단한 실력의 정치가였다. 결코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는 온후한 그 인품이, 엄격한 송태전과는 달라 아래 사람에게도 우러름을 받고 있다.

“홍귀비는 어찌 되신 겁니까?”

“….어쩐지, 피곤한 것 같아. 오늘은 나 혼자다.”

차태보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도 나이는 들었지만 남자였다.

“안되십니다, 주상. 홍귀비가 아무리 귀엽다고는 해도, 아직 나이어린 여자니까요. 친절히 대해 주셔야지요.”

“……그럴 생각인데.”

그렇게 하면, 화를 낸다. 어찌된 일인지. 류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언틋 보기에는 잘 되고 있는 듯 했지만 엇갈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사이좋은 모습에, 저도 안심했습니다. 후사도 이젠 문제가 없겠군요.”

류휘도 어쨌든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은 상당히 달랐지만.

차태보는 수염을 만지며, 농담으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제 손녀도 홍귀비께 지지 않을 정도로 미인이고 마음씨도 고운 아입니다. 후궁에 새로운 꽃을 더하실 생각이시라면, 반드시 한번 생각해주시지요.”

류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지금은 그냥, 수려가 곁에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가장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장소를, 그는 발견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내 비는, 수려만으로 족하다. 다른 사람은 필요없다.”

지나칠 만큼 곧바로 대답하자, 차태보는 당황했고, 다음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 쪽이 부끄러워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홍귀비께 푹 빠지셨군요.”

차태보는 머리를 흔들고, <그런 것을 요즘 말로 활활 타오른다고 말하지요?> 하고 진지하게 말했지만, 류휘는 요즘 사정에 어두웠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장수님, 남주영님.”

인기척 없는 회랑에서 불리운 두 사람은, 발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정색을 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은 본 적이 없는 청년 시관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고, 공손하게 어떤 것을 내밀었다.

“---주상께서, 두분께 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주영이 확인하듯이 물었다.

“주상께서—이것을 우리들에게?”

“예.”

주영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이런….이건 졌는데.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시관의 손에 있는 것은, 두 송이의 꽃창포였다.

“하지만 보통, 생화로 주나? 상당히 대강대강이군.”

“….저도 그렇게 아뢰었지만, 주상께서 급하시니, 그런 건 적당히 하라고, 하셔서.”

주영은 갑자기, 꽃창포 한송이를 뽑아 들었다. 망설이지 않는 그 행동에 장수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왕으로부터 “꽃”을 받았다 ---그 의미는.

주영은 괴롭히듯이 장수에게 웃어 보였다.

“---너는 어떻게 할거지?”

장수는 잠시 침묵한 후,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송이를 들었다.

“---주상께, 삼가 받들었습니다, 라고 전해줘.”

시관은 의례적인 것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미소를 짓고, 인사를 한 후 물러갔다.

“….설마 네가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주영.”

받아들인다면, 마음으로부터의 충성을 왕에게 맹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사의 꽃>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뭐 좋잖아. 설마 꽃창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담겨진 의미는, “너를 신뢰한다”--.

아직 그럴 마음이 없는 주영에게마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절묘한 꽃 선택.

“—게다가 꽃의 색은 자주.”

주영은 꽃잎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꽃>에 이중의 의미를 담다니, 꽤 하잖아? 이런 세련된 방식은, 내 취향이야.”

“….세련되고 어쩌구는 젖혀두고, 확실히, 이 속도는 합격이다.”

“그럼, 빠른 속도로, 해야 할 것은 한다라는 건가?”

주영은 웃었다. 어쩐지 기쁜 듯이—그리고 다소 위험한 눈으로.

 

 

“오늘은, 오후의 외출은 쉬시는 건가요?”

향령의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수려는 가능한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가 되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응. 오늘은….기분이 좋지않아서. 자수라도 놓아볼 생각이야.”

정말은 기분이 엉망진창일 때는 마음껏 빨래를 하는 것이 수려 나름의 발산 방법이었지만, 슬프게도, 후궁에서 귀비가 빨래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얌전하게 자수라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 정말 마음껏 도마라도 두드리고 싶엇!!)

빈둥빈둥 자수 같은 걸 하고 있는 것은 더한층 안절부절할 것 같다. 그러나 향령은 눈치채지 못했다.

“약탕이라도 들여올까요?”

그리고 팟 얼굴을 붉혔다.

“기분이 좋지않으신 것도, 주상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수려는 그만 자신의 손가락을 바늘로 찔렀다. 어떻게 비명을 참았지만, 아프다. 언제나의 버릇대로 상처를 핥으려 할 때, 곁에 있던 주취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수려님, 약을 바르십시오.”

웃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주취의 얼굴을, 수려는 찌릿 노려보았다. 향령이 당황하여 약상자를 준비해 약을 바르고, 융단에 떨어뜨려버린 자수천을 들어 올렸다. 자수를 보고,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피가 묻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도 굉장히 아름다운 자수입니다. 정말, 홍귀비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네요. 저는, 바늘을 드는 것은 고역이랍니다.”

“그, 그…래요? 매일 바늘을 들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일지도 몰라요.”

실제는 자수를 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옷의 심한 부분을 수선하기 위해서 바느질을 했던 것 뿐이지만.

덧붙여 말하자면 자수 같은 우아한 흉내는 (삯일 이외에) 이 수년동안 해본 적이 없다.

“향령도, 해보면 어때? 괜찮다면 내가 가르쳐줄게요.”

향령은 기쁜 듯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리고 조금 망설인 후, 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을 받고, 비단 수건에 진지하게 바늘을 찌르고 있는 향령에게, 수려는 별 생각없이 물었다.

“….어떤 분께 드릴 생각일까?”

그 순간, 향령은 사과처럼 볼이 빨개졌다. 수려는 내심 아하 하고 소리를 높였지만, 표정은 어디까지나 차분한 미소를 유지했다. –깊은 부분까지 캐물을 수 없다는 것이 여염집 규수의 괴로움이다.

“소중한 분인 것 같네. 부러워요.”

“홍귀비님에게도, 주상이 계시지 않으십니까?”

향령은 후후, 하고 웃었다. 진정한 본심에서 우러나는, 천진난만한 웃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함께이시니, 부럽습니다. 무척 사이가 좋으시고요. 분명 오늘 밤도 오시겠지요.”

“………. …….앗, 주취도 함께 자수를 놓으면 어때?”

수려는 상당히 억지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나 주취는 곤란한 듯이 바늘과 실을 보았다.

아니요, 하고 주취는 드물게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재봉은, 조금……”

수려는 깜짝 놀랐다. 무엇이든 솜씨좋게 처리해버리는 주취가.

“당신에게도 못하는 것이 있었네요. 하지만 재봉은 양가집의 아가씨의 필수조건이잖아요? 상당히 억지로 집어넣어…아니, 가르침 받았을 텐데.”

후궁의 여관이 되는 것은 엄격한 선발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제1의 조건은 가문이었다. 후궁에 있는 이상, 틀림없이 주취도 상당한 집안 출신일 것이다. 그러나 주취는 선뜻 놀랄만한 말을 했다.

“아니요. 저는 양녀 같은 것이니까요.”

“양녀?”

“예, 어렸을 적에 주워 주셨습니다. …조금 별난 분이셨기 때문에, 시침질, 이라고나 할까, 예의범절은 배웠습니다만, 취미 같은 범위의 것은 그다지 배우지 못해서.”

수려는 놀랐다. 하지만 동시에 납득도 했다. 주취는 다른 여관들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 심지는, 고생을 모르는 아가씨와는 조금 다르다. 향령도 놀란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하지만, 후궁에까지 들여올 수 있었다는 것은, 무척 소중히 여기셨군요.”

수려가 진심으로 말하자, 주취는 잠시 침묵하고, 그리고 예, 하며 웃었다.

“저에게 있어서도….무척 소중한 분이셔요.”

“누구신가요?”

향령이 호기심에 가득 차, 열심히 묻자, 수려는 나무랐다.

“안돼요, 향령. 후궁에서는 상대의 성을 묻는 것은 금지되어 있잖아요?”

쓸데없는 권력 다툼을 막기 위해, 후궁에서는 정식 귀비 이외에는, 성을 밝히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물론 귀비인 수려는 알 수도 있었지만, 가짜 아내이기 때문에 그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려도 아직껏 주취와 향령의 성을 알지 못했다.

향령은 유감스러운 듯이, 예,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자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활짝 피기 직전의 꽃이네. 예뻐.”

약간 모양이 다른 자수에 절로 미소짓게 되었다. 수려는 잠깐 주취를 보았다.

“주취도, 바늘을 들어요.”

“에….”

“못한다면, 극복해내야지요.”

조금 전 일을 떠올리며, 수려는 몸을 뒤로 젖혔다.

“당신도 그 소중한 사람에게 드리면 어떨까요? 조금은 할 마음이 들지요?”

주취는 조금 한심한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마지못해 자수상자로 손을 뻗었던 것이다.

 

 

“…..그것을, 나에게?”

그날 밤 또 류휘가 어슬렁거리며 왔어도, 수려는 다시 놀라지 않았다. 반쯤 포기하고 방으로 들인 후, 생각이 나서, 낮 동안 조금씩 수놓은 수건을 가벼운 기분으로 살짝 손에 건넸다.

류휘는 무언가 진귀한 것을 보듯이 유심히 수건을 보았다.

“수려가 수놓은 건가?”

“벚꽃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서, 제가 수놓았어요.”

“….내가 받아도 되는 거야?” 

“괜찮아요. 당신 덕에 수를 놓게 된 거니까요.”

하루종일 <드디어 진짜 부부가 되셨군요!> 라는 시선을 받아, 쌓인 울분을 풀기 위해서.

수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비꼰 것이었지만, 이 묘하게 천연덕스러운 남자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듯. 벚꽃 자수를 손가락으로 만진 후, 바닥에 꼼찍않고 앉아서, 소중한 것처럼 잘 접기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물건을 받는 것이 처음이다.”

조용히 중얼거리자, 수려는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 자수 같은 건 함부로 하지 않으니까, 귀중품이죠? 소중히 간직해요.”

“….정란에게도?”

“에?”

“정란도, 갖고 있지 않아?”

“아….그래요. 수선한 것은 잔뜩 있지만, 자수는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 순간, 어쩐지 류휘는 기분이 좋아졌다. 애써 접은 수건을 펼치고 자수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이런 건, 어떻게 해서 만드는 거지?”

“아아, 남자는 바느질 같은 건 하지 않지요. 잠깐만요.”

수려가 자수상자를 꺼내려 할 때, 잠깐 주취가 술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오늘은, 주상의 말씀대로 술을 가지고 왔습니다.”

“술!?”

“약한 술이니까, 수려도 마셔.”

척하니 술잔을 받고, 류휘는 주취를 물러가게 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예의 은잔에 멋대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찻잔임에도 불구하고.

“…..”

수려는 다시 말할 기력도 없어, 자수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눈썹을 모았다.

“어머, 이미 녹슬어버린 곳이 있어요. 드나드는 상인에게 보이지 않으면 안되겠네.”

류휘는 슬쩍 이 자수상자를 엿보았다. 남자에게는 무엇을 하는데 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물건이 여러 개 있다. 신기한 얼굴로 손을 뻗다가, 그 손이 수려의 팔과 부딪혔다.

“아아-------------ㅅ!!”

류휘의 손에 닿은 술잔이 떨어져, 멋지게 자수상자로 술이 쏟아졌다. 수려는 창백해졌다.

“무,무무무무무무무슨 짓을 한 거예요, 당신은------!!”

“이….런, 미안해.”

솔직하게 사과한 류휘였지만, 수려의 화난 얼굴은 대단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욧! 이 안에 들어있던 비단 쪼가리라도 팔면 좋았을 텐데.”

……화내는 방향이 전혀 다르네, 라고 류휘는 생각했지만, 생각만으로 그쳤다.

“저, 나중에, 다른 것을….보내줄 테니까.”

“바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빨면 되잖아요, 빨면! 자, 내가 융단의 얼룩을 뺄 테니까, 당신은 이 자수상자에서 술을 버려줘요.”

“….아, 알았어.”

이럴 때는, 세상의 남편들과 똑같이 류휘는 수려에게 거스르지 못한다. 내용물을 엎지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수상자를 들어 올린 후, 자수상자의 술을 버리러 회랑으로 나갔다. 

말한대로 툇마루에 앉아 꼼짝없이 일일이 물을 버리고, 축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돌아온 류휘였지만, 이번에는 <바늘이 몇 개 부족해욧> 하고 또 다시 수려는 화를 냈던 것이다.

 

 

“…..정말….”

수려는 니코를 연주하던 손을 멈추었다. 수려의 침대에서는 어제와 똑같이 류휘가 푹 잠들어 있다. 마치 손이 가는 어린애를 가진 기분이다.

이불을 다시 덮어 주면서, 물끄러미 잠든 얼굴을 보았다. 세게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잘 다듬어진 얼굴이었다. 그가 만일 나이에 맞는 정신연령으로, 수려가 생각했던 대로의 영군이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형편이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려는 평범한 용모와 태도를 잘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결코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반짝반짝한 왕궁에서, 자신보다도 몇 단계 미인인 여관과 시녀들만으로 둘러싸여 있어, 무척 풀이 죽어 있다. 보다 더 예뻤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수려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았다. 매일매일 일하느라, 햇볕에 타고 거칠어진 피부는, 시녀들이 매일 열심히 손질을 해준 덕에, 상당히 좋아지게 되었다. 언제나 꿈꾸었던 하얗고 매끈매끈한 피부에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러나 마디가 두드러진 손가락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이것으로 좋다.

예쁜 옷을 입어도, 조용조용히 걸어보아도, 수려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정말 여염집 규수는 될 수 없다. 그리고 진짜 귀비도. 마디가 두드러진 손가락처럼, 어물어물 넘길 수는 없다.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간다. 아버님과 정란과의 세 사람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 그리고…아마, 그 날은 멀지 않을 것이다.

수려는 류휘의 잠든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하루하루 왕다워지고 있다. 자신의 역할 같은 건, 이제 거의 없다.

가까운 시일 내에, 수려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곧 아름답고 총명한 귀족의 딸들이, 다투어 후궁으로 들어오게 되겠지. 재색을 겸비한 미녀들을 보면, 분명 그라도 생각을 고치게 될 것이다. 그다지 장수님처럼 극도로 여성을 싫어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아름다운 왕이라면, 곁에 미인인 여염집 규수인 게 당연하다.

(만일, 주취와, 향령처럼)

스스로 생각하자 조금 침울해졌다. …하지만 괜찮다, 이런 내가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부비부비 류휘의 단정한 앞머리를 뒤섞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가락을 보고, 수려는 손을 떼고, 슥 소매 속으로 감추었다.

결코 창피하지는 않다. 하지만 역시, 이 아름다운 궁에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왕에게도.

그것이, 조금 슬펐다.

한숨을 쉬고, 수려는 곁옷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 밤이야말로 잠을 깨서 일어나는 악몽에서 달아나기 위해, 옆 방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수려가 옆방으로 옮긴 후 수각 후였다.

무시무시한 절규가 어둠을 꿰뚫고, 수려는 말 그대로 날듯이 일어났다.

잠이 덜 깬 채 소리가 들리는 쪽—류휘를 혼자 남겨둔 방으로 순식간에 뛰어들어갔다.

“뭐, 뭐예요? 무슨 일이예요!?”

등을 꺼둔 방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하지만 수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려고 했다. 도둑이 들어온 것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류휘는 무엇인가 소리치면서 침대 구석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수려는 당황해서 침대로 뛰어 올라, 류휘를 흔들었다.

“자, 잠깐 무슨 일이예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어디가 아파요!?”

류휘는 흔드는 손을 깨닫자, 그 손을 내민 수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부들부들 떨면서, 그는 수려를 끌어당겼다. 마치 완전히 달라붙는 것처럼 꼭 안겨, 수려는 깜짝 놀랐다.

“자, 잠깐…정말 무슨 일이예요? ….아, 아파, 아프다니까요.”

껴안는다기 보다 껴안아 부서뜨리는 것 같았다. 그 몸의 어디에서도 나올 것 같지 않은 힘으로 안겨, 수려는 정말로 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잠시 후, 비명을 들은 주취가 뛰어들었다. 안색을 바꾸고 물었다.

“수려님---도둑이!?”

“으, 으응.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왠지 주상의 상태가 조금 이상…아아아아아야. 그, 그러니까 에--, 화병을 넘어뜨리는 바람에 부딪혀서 비명을 질렀던 것…..아아파, 그러니까, 모두 돌아가줘요. 지, 진정된 것 같으니까.”

수려를 안고나서 류휘는 비명을 멈추었지만, 그래도 계속 떨고 있다.

정말로 아픈 것 같은 수려에게, 주취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죽을만큼 아파. 하, 하지만 견딜만하니까 괜찮아요. 주취도, 자도록….아아아얏.”

“왕의 팔에 안겨 부서지다니, 꿈에서나 보일듯한 광경이군요.”

“….주취….”

“농담입니다. 옆 방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압사하실 것 같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안심한 듯이, 주취는 살짝 웃고 방의 밖에 모인 여관과 시관을 돌아가게 하기 위해 나갔다.

수려는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 후, 얼굴을 찌푸리며 류휘의 머리를 내려다 보았다. 빨리 진정시키지 않으면 정말로 압사할지도 모른다. 그는 어쩐지 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진정하라고 말해도 들릴 것 같지 않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할 것인가?

한대 때려줄까 하고 생각한 그 때, 수려는 침대 옆에서 니코를 발견했다. 바로 손을 뻗었지만, 닿을 듯 하면서 좀처럼 닿지 않는다. 게다가 수려가 빠져나가려고 한다고 생각했는지, 류휘는 점점 더 강하게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자….잠깐, 잠깐만요!”

겨우 니코를 붙잡았을 때에는, 수려도 상당히 피로해져 있었다. 상당히 무리한 자세였지만, 어떻게 자기 전에 연주했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효과는 천천히 나타났다. 떨림이 잦아들고, 점점 팔의 힘도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니코를 연주하기 시작한 후 반시각—류휘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수려…..?”

수려는 니코를 연주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제 괜찮아요?”

“….아무데도…..너는 아무데도 없었어.”

어째서 화내는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수려는 거스르지 않았다. 류휘는 지금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니코를 옆에 두고, 그 앞머리를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미안해요.”

“….어둠….은….싫어…..”

수려는 안긴 자세 그대로, 말없이 류휘의 등을 토닥였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 류휘는 겨우 팔을 늦추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려의 무릎을 베고, 위를 쳐다보았다.

“잠---“

항의의 목소리도, 아직 파랗게 질린 그 얼굴을 보자, 그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수려는 한숨을 쉬고, 류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류휘는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 불규칙한 호흡을 조절했다. 

“…..어둠 같은 건….혼자는…..싫어….”

“어째서요…..?”

“…..예전에….자주….갇혔어….어둠 속에.”

수려는 눈을 크게 떴다.

“누구…에게?”

“…..어마마마와….다른 형들에게.”

“------어째서?”

수려는 류휘의 어깨를 붙잡았다. 화난 것 같은 수려의 얼굴에, 류휘는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화를 내?”

“화나지 않았어요. 괜찮으니까 확실히 이야기해봐요.”

류휘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필요없는 아이였다는 것 같다. 어쨌든, 태어난 순번이 우선이었던 것 같으니까. 어마마마는 항상 화를 냈어. 내가 막내라서, 아바마마의 애정이 없는 거라고. 항상 화를 냈고---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지하창고에 몇일이나 갇혀 있었던 적도 있어. 항상 울며 외쳤던 장면밖에,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째서.”

“세살인가 네살 때부터였어. 그 사이, 형들도 괴롭히게 되었다. 나는 원래 막내공자라서 잊혀진 존재였으니, 때린다든지 발로 찬다든지 하면서 기분전환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았다는 것 같아.”

수려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고 그녀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청온 형님이 있어준다면 그것으로 좋았어.”

“청온….?”

“나의—두번째 형이다. 읽고 쓰기도, 산술도, 형님이 가르쳐 주었어. 바빴을 텐데, 언제나 시간을 내 상대를 해주었다. 다른 형들이 괴롭혀도, 감싸고 약을 발라 주었다.”

“두번째…라니, 설마.”

“그래. 내가 6살이었을 때 유배되었다. 형님은 나쁘지 않았는데, 외척의 모반을 받아, 처벌되고 말았어. …나는 그것을 모르고, 1년 정도 울면서 지냈다. 어째서 와주지 않는 것일까…..역시, 내가 나쁜 아이이기 때문인 걸까…그렇게 생각했어.”

겨우 혼자가 되었는데, 왕궁의 어디에도 머물 곳이 없었다. 헤매는 것처럼 걸어 다녔다.

--그림자처럼 살았다. 아무도 그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 가장자리에서, 자신이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존재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넓디 넓은 왕성. 하지만 그에게는 그 어디에도, 머물 곳이 없었다. 혼자서 일어나, 혼자서 잠들기까지-아지랑이처럼 헤매다녔다-.

“….하지만, 그 즈음, 소하와 만났어.”

갑자기 나온 아버지의 이름에, 수려는 시선을 떨어뜨렸고, 류휘는 기쁜 듯이 웃었다.

“부고에 가면….이제, 혼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손에 넣은 편안함도, 햇빛이 빛나지 않을 때에는 손을 빠져나갔다.

“….밤은, 싫어. 혼자서 잠드는 것도. 어둠 속에서 혼자 있으면, 여러 가지가 생각나. 싫은 기억이, 억지로 떠오른다. 잊고 있었던 것도, 전부….”

매일 밤 시관과 보냈던 것은, 옆에 사람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바닥에서 잠든 수려를 다시 데려온 것도, 온기가 그리워서 껴안았던 것도.

그것을 알지 못해도, 수려는 방에 들여보내 주었다….정말로 기뻤다.

뺨에 떨어진 물방울에, 류휘는 시선을 들었다.

“….왜, 울지?”

“시끄러워요. 자신의 어리석음에 질려서 그러는 거니까.”

위를 향해 류휘는 손가락을 뻗어, 수려의 뺨에 흘러내린 물방울을 닦아주었다.

“울지마.”

“우는 거 아니예요.”

그 손을 밀어내고, 수려는 쓱쓱 눈물을 닦았다. 류휘는 옆에 둔 니코를 보았다.

“….수려, 니코를 연주해줘.”

말없이 니코를 들고, 수려는 조용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온화한 선율에, 류휘의 눈꺼풀이 감겼다.

“….수려의 니코는, 진주같아….”

흘러내리는 음은, 끊어진 진주 목걸이처럼 방에 흩어져, 조용히 속삭이는-아련한 소리.

수려는 몇곡이나 니코를 연주했다. 이윽고 무릎 위에서 규칙적으로 잠든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살짝 이불을 덮어주고, 류휘의 머리를 베개로 옮겼다.

류휘의 손가락은 수려의 소매를 꼭 잡고 있었지만, 수려는 그대로 옆에서 잠들었다.

 

 

***

 

 

다음 날, 수려는 아침 일찍 아버지가 있는 부고로 향했다.

“수려. 이렇게 일찍, 왠일이지?”

평소처럼 빙그레 웃으며 딸을 환영하는 소하에, 수려도 조금 웃었다.

“안녕하셨어요, 아버님.” 

수려는 소하의 앞에 앉았다. 그대로 수려가 아무 말이 없자, 소하는 펼쳤던 책을 덮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딸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수려는 고개를 들고, 똑바로 소하를 보았다.

“—아버님은, 주상에 대해 알고 계셨지요?”

무엇을, 하고 소하는 묻지 않았다. 수려가 어젯밤의 일을 말하자-- 소하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내가 류휘님과 만난 것은, 부고로 부임하고 조금 지나서부터 였단다.”

이야기가 끝난 후, 소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상처투성이로 부고에 왔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우선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매일 부고에 오게 되었단다. 막 주웠을 때의 정란처럼, 말이 없고 표정이 없는 소년이었어.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은 상당히 뒤의 일이었지만….오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는 조금씩 이야기를 하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일, 형인 공자들의 일, 그리고 왕궁에서 단 한사람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제2공자의 일을.”

“…..”

“그는 어머니와 형님의 행위에는 한번도 울지 않았어. 그것이 울어도 되는 것이라는 걸, 몰랐던 거야. 그는 너무 심하게 상처 입어서, 자신이 상처 입은 것마저 알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은,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단 한사람의 형인 공자뿐이었다. 항상 류휘님을 감싸고, 사랑해주었던—단 하나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던 그 분도, 그러나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소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왕궁을 헤매다니고 있던 어린 소년.

청온 공자를 찾아도, 없어 작은 마음을 다치고, 그래도 그는 계속 찾아 다녔다. 소하가 진실을 알려줄 때까지. 어린 그에게 있어서는 영원과도 다름없었을, 1년이라는 세월--.

“이 부고에 올 때는 항상, 그는 상처투성이였어. 베인 상처와 쓸린 상처가 없었을 때가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형인 공자들은 체벌을 그만두지 않았다. …재미를 들인 거겠지. 중앙궁까지 가지 못하는 나는, 그래서 항상 약을 발라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작은 그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는 것 밖에.”

소하는 한숨을 쉬었다. 깊고, 슬프게.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수려, 그는, 아무도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지고의 신분과, 커다란 궁과, 예쁜 옷과, 굶주릴 염려도 없고…, 누구라도 부러워할만한 것을. 하지만 그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을, 어느 하나 그 손에 쥐지 못했었단다. 어머니의 애정과, 다정한 말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그런, 절대로 필요한 것을.” 

소하는 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살짝 닦아주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매일밤을 누군가와 보내는 것은, 외톨이로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무서워서, 잠들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어머니에 의해 지하의 곡식창고에 몇일이나 갇히고, 형님들에 의해 한밤중의 정원에 방치되고…그런 것도 분명,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역시, 계속 외톨이였던 그는, 어둠 속에서 외톨이로 보내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것 같구나.”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끄러워서, 한심해서, 수려는 울었다.

“….하지만, 지금은 네가 있어. 나보다 훨씬 가까이에. 왕을….류휘님을 부탁한다. 수려.”

수려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어슬렁거리지 말고, 들어오면 어때요?”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려의 침실 근처 정원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류휘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와 같은 수려의 모습에, 류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떠올렸다.

조금 망설인 후 회랑에 오른 류휘는, 천천히 수려의 머리로 손을 뻗어, 살짝 무언가를 꽂았다.

“뭐, 뭐예요?”

“어제의, 답례다. 주영이, 선물을 주면 좋을 거라고 했어.”

“답례….?”

아아 수건의, 하고 떠올리면서, 수려는 머리를 더듬었다. 무언가 짤랑짤랑하는 것이 닿았다. 쓱 뽑아내자, 그것은 상당히 멋진 금은 세공의 머리 장식이었다. 수려는 기쁘기보다 파랗게 질렸다.

“잠깐만요, 이건 아무리 낮게 봐도 국보급의.”

말을 하려 했지만, 류휘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맑게 울리는 머리 장식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예뻐요. 당신이 고른 거예요?”

끄덕하고 류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려는 그만 웃고 말았다.

“고마워요.”

선물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분명,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는 것도, 그것을 고른 것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수려는 재빨리 옆머리의 일부를 다듬고, 머리 장식을 다시 꽂았다.

“어울려요?”

류휘는 기쁜 듯이 미소지었다.

“…예뻐.”

수려는 새빨개졌다. 

예쁜 것은 머리 장식! 이라고 달아오른 뺨을 때리면서, 수려는 류휘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이제 포기했어요. 니코를 연주해 줄 테니까, 들어와요.”

류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그는 외톨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