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신하들과 용(龍)에 대해 논하다

상참을 받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가서 강(講)하다가, 송(宋) 휘종(徽宗)이 이르기를, "누런 용과 푸른 용은 길한 징조요, 흰 용과 검은 용은 재변이다. 내가 즉위(卽位)한 뒤에 검은 용을 한 번 보았으니 이것은 변(變)이다." 라고 한 데 이르러서, "사람이 용을 볼 수 있느냐." 고 물으니, 검토관(檢討官) 김빈(金鑌)이 대답하기를, "지난 번에 양산군(梁山郡)의 용당(龍塘)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 허리만을 보고 머리와 꼬리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름과 비 사이에서 굼틀굼틀하며 움직이며 어떤 형태를 이룬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것을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용이 아니요, 곧 구름·안개·비·우레의 기운이 우연히 뭉쳐서 형태가 이루어져서 그런 것인 듯 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후사(留後司)의 박연(朴淵) 가에 개가 쭈그리고 앉아 있기에 가서 보았더니, 개가 아니고 용이었다.' 하는데, 이것도 꼭 신빙할 수 없다." 하니, 지신사(知申事)인 황보인(皇甫仁)이 대답하기를, "박연(朴淵)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모두 가라앉지 않고 흐르기 때문에, 티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이것이 신기한 징조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빈(鑌)이 아뢰기를, "인동현(仁同縣)에서는 낙동강(洛東江) 물이 한창 추울 때에 얼었던 얼음이 갑자기 갈라지며 얼음장이 밀려 쌓였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용이 갈아 제친 것이라.' 하며, 이것으로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동강(大同江)에 용이 죽어서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나, 무서워서 감히 꺼내지 못했다.' 고 하는데, 그러면 용도 죽는 수가 있는가." 하니, 빈이 대답하기를, "모든 물건이란 한 번 났다가는 한 번은 죽게 마련이오니, 용도 물건인데 어찌 죽지 않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그렇게 여기었다.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1430년) 윤 12월 19일 을묘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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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경연 중 용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신하들과 열띤 토론을 했다. 신하들은 송나라 휘종이 용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인용해 이 세상에 용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세종은 용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조목조목 과학적 근거를 대며 부정했다. 그러나 결국 세종도 용의 존재 여부에 대해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는 것으로 매듭짓는다.

 

용에 관한 토론은 세종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세종은 뛰어난 업적으로 조선을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문물을 가진 나라로 만들었다. 세종 때 만들어진 과학 기구는 하늘을 관측하는 간의대,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세종은 이를 바탕으로 서울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서인 <칠정산>을 제작했다. <칠정산>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비교해 보면 된다. 약 600년 전에 만들어진 <칠정산>에서 계산한 1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1년(365일 5시 48분 45초)보다 불과 1초만 짧을 정도로 정확하다.

이런 업적을 진두지휘했던 세종에게 용은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자연 현상을 오해해 만들어 낸 상상의 동물일 뿐이었다. 그런데 성리학을 배워 모든 사물을 합리적으로 의심하여 바라볼 관료들조차 자연 현상을 용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세종은 경연에서 용의 존재를 거론하며 관료들이 깨우치기를 바랐다.

 

경연 과정에서 양산군 용당에 나타난 용을 사람들이 보았다는 김빈의 주장에 대해서 세종은 구름·안개·비·우레가 어우러져 일어나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며 반박했다. 세종이 말한 자연 현상은 오늘날 용오름을 말한다. 용오름이란 지표면과 상공에 부는 사람의 방향이 다를 때 발생하는 소용돌이를 말하는데, 보는 이에 따라서는 충분히 용이 승천하는 모습으로 착각할 수 있다.

또한 세종은 박연 폭포에서 실제로 용을 본 사람이 있다는 관료들의 말에 근거가 부족하다며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를 세종이 지적한 것이었다. 심리학 용어 중에 '확증편향'이라는 말이 있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이 생각하고 희망하는 것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현상을 말한다. 세종은 확증편향이란 용어만 몰랐을 뿐, 확증편향의 속성과 문제점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박연 폭포는 용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왕과 백성들이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올리던 신성한 장소였다. 박연 폭포에서 용을 보았다는 말은 용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의 간절함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 세종은 판단했다.

 

세종이 조목조목 용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니까 신하들도 오기가 생겼다. 황보인이 박연 폭포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이 연못에 가라앉지 않고 떠내려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황보인은 세종의 의견에 직접 반박하기보다는 폭포 아래 용이 살고 있기에 다른 폭포처럼 나뭇잎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이에 김빈도 황보인의 말에 힘을 실어 주고자 얼어붙은 낙동강 물이 용으로 인해 갑자기 갈라지면서 깨지는 현상이 자주 생긴다고 말했다. 이것은 강 아래 있던 용이 움직이는 바람에 얼음이 깨진 것으로, 인동현에 가면 용 때문에 깨진 얼음장이 쌓여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며 증거를 제시했다.

신하들이 용이 존재한다는 여러 사례를 제시하며 반박하자, 세종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세종 스스로도 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연의 목적이 관료들의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공유하여 역량을 발전시키는 데 있음을 잊지 않았다. 세종은 관료들의 사고 폭을 넓히고자 '용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였던 주제를 '용이 생사를 초월한 존재인가?' 로 바꾸었다. 경연에 참석한 관료들이 용도 죽음을 맞이한다고 답하자 세종도 동의하는 것으로 경연은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경연의 주제로 다루어진 용은 어떤 존재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와 전설에 용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양과 서양에서 생각하는 용의 모습과 역할은 다르지만, 초월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서양에서 용은 주로 악한 역할을 맡는다. 서양의 용은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입으로는 불을 내뿜는다. 성품이 무자비해서 인간을 괴롭히고 해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황금을 좋아하는 탐욕스러움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 용은 퇴치되어야 할 사악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정의롭고 용감한 왕과 기사가 용을 물리친다는 신화와 전설이 많이 전해 내려온다.

반면 동양에서 용은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되었다. 국가 별로 용의 생김새에 차이는 있지만, 숭배의 대상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동양에서 생각하는 용의 모습은 중국 문헌 <광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동양의 용은 매우 큰 눈과 긴 수염을 가지고 있으며, 낙타와 비슷하게 생긴 머리 위에는 사슴처럼 뿔이 나 있다. 용은 날카로운 이빨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입으로 불을 뿜을 수도 있다. 용의 몸은 도마뱀과 같이 긴 몸통에 짧은 다리를 가졌으며, 온 몸은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지만, 서양의 용과는 다르게 날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천지를 뒤엎을 정도의 막강한 힘으로 누구든지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는 점은 같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용이라 할지라도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용의 목 아래에 역린(逆鱗)이라 불리는 거꾸로 박힌 비늘이 있는데, 아주 약한 힘이라도 역린을 건드리게 되면 용은 힘 한 번 써 보지 못한 채 죽는다고 <한비자>란 책은 밝히고 있다.

또한 용은 기린, 봉황, 거북과 함께 동양에서 신성한 동물을 상징하는 사령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용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실제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십이지신의 하나로 포함시켰다. 특히 옛 사람들은 용이 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용을 '수신' 또는 '해신'이라 부르며 가뭄이 들면 비를 내려 달라는 기우제를 올렸다. 불교에서도 용을 호법(護法)을 수호하는 존재로 인식하여 사찰과 법구에 장식했다. 왕실에서도 왕을 용으로 생각하거나 나라를 지키는 존재로 인식하여, 용을 향해 제사를 올리거나 건축물이나 옷에 새겨 넣었다.

 

우리나라 역대 왕들은 자신들이 용의 후손임을 강조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면, 먼저 백제 무왕의 탄생 설화가 있다. 무왕은 왕이 되기 전 서동이란 이름으로 마를 캐어 생활하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어느 날 신라의 선화 공주가 아름답다는 소식을 들은 서동은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신라로 건너간다. 그러나 서동이 신라의 적국인 백제 사람인 데다 신분도 낮아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는 일은 불가능했다. 서동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주에 사는 아이들에게 엿을 나눠 주며 선화 공주가 한밤중에 남자를 몰래 만난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가르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선화 공주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신라에 퍼지자, 신라 진평왕은 궁에서 딸을 쫓아냈다. 궁에서 쫓겨나 오도 가도 못하고 불안에 떠는 선화 공주를 위로하여 아내로 삼은 서동은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다.

설화에서는 무왕이 신라의 공주를 아내로 삼고, 비천한 신분으로 백제의 왕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용을 이용한다. 과부였던 서동의 어머니가 연못에 살던 용과 정을 나누고 아이를 잉태했는데 그 아이가 서동, 즉 무왕이라는 것이다. 무왕이 용의 자식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기에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종내에는 백제의 왕이 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고려 왕건도 지방 호족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고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용을 자신의 조상으로 삼았다. 왕건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 보면, 통일 신라 시대에 살던 선조 강충의 둘째 아들 보육이 천지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오줌을 싸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보육의 형 제건이 이 이야기를 듣고 왕을 낳을 꿈을 꾸었다며 보육에게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형의 딸과 혼인한 보육은 딸 2명을 낳았는데, 첫째 딸도 보육처럼 오줌으로 천지를 가득 채우는 꿈을 꾸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둘째 딸은 언니의 꿈을 샀고, 훗날 당나라 숙종이 될 중국 태자를 만나 작제건을 낳는다. 당나라 숙종은 작제건이 자신의 자식이라는 증표로 삼으라며 활과 화살을 주고 통일 신라를 떠났다. 성인이 된 작제건은 아버지인 당나라 숙종을 만나기 위해 활과 화살을 가지고 중국으로 넘어가던 중, 서해 용왕을 만나게 되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늙은 여우 귀신을 죽여 달라는 용왕의 부탁을 들어 준 작제건은 용왕의 딸과 칠보, 돼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후 작제건은 용왕의 딸과 결혼해 용건을 비롯한 4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 중 첫째 아들 용건에게서 왕건이 태어나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작제건 설화에는 고구려 고주몽, 신라 김유신과 관련된 설화들이 반영되어 있어 다소 번잡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려 왕실은 기존의 설화에서 기이하고 좋은 내용을 모두 가져와 새로운 설화를 만듦으로써 백성들이 고려 왕을 우러러 보고 따르기를 바랐다.

 

조선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백제와 고려처럼 용을 이용해 자신들의 선조를 부각했다. 조선 왕조의 창업을 기록한 <용비어천가>에 이성계의 할아버지 도조 이춘의 영웅담이 나온다. 도조가 잠이 들 때마다 백룡이 꿈에 여러 차례 나타나 흑룡이 자신의 거처를 빼앗으려 하니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도조가 꿈에 나타난 백룡이 산다는 연못에 가 보니 실제로 백룡이 흑룡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백룡이 흑룡에게 밀리는 것을 본 도조는 꿈에서 약속한 대로 활을 쏘아 흑룡을 죽였다. 도조의 도움으로 자신의 거처와 목숨을 구한 백룡은 그 날 밤 도조의 꿈에 나타나 "장차 자손 중에 큰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라는 예언을 남기며 축복을 내렸다.

북한 지역에 내려오는 '적지'와 '퉁두란' 설화에서도 이성계가 용을 물리친 이야기가 나온다. '적지'에는 이성계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청룡을 도와 적룡을 물리쳐야 왕이 될 수 있다고 말하자, 이성계가 적룡을 죽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퉁두란'에서는 이성계와 퉁두란이 용상에 몸을 붙이는 내기를 했는데, 희한하게도 용상이 이성계 몸에만 붙어 퉁두란과의 내기에 이겼다고 전한다. 즉,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집안은 대대로 나쁜 용을 물리칠 정도로 힘이 강했고, 용들도 이성계 집안의 도움을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조선 건국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용이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존재라고 본다면, 경연 마지막에 세종이 "용이 죽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러하다" 라는 신료의 답변에 수긍하는 장면에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종이 용의 존재 여부에 관료들과 이견을 보이다가 용의 죽음에 뜻을 같이 했던 것은 용의 죽음이 고려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령스러운 용도 나이를 먹고 죽으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젊은 용이 그 자리를 넘겨 받는 것처럼, 이성계가 고려의 공양왕에게서 선위 받아 조선을 건국한 것도 같은 이치라며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다시 말하면 고려 왕이 비를 내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막강한 용의 자손일지라도, 결국 용이 죽는 것처럼 고려도 마지막이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또한 이성계와 도조가 죽인 용은 고려의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고, 조선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젊은 용으로 고려를 무너뜨릴 힘과 권한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재미로 가볍게 다루고 넘어갈 법한 용이라는 주제로 관료들의 사고 폭을 넓히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한 세종의 현명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세종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른 특출난 인물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든다. 용의 죽음을 인정한 세종은 조선의 멸망도 언젠가 오리라 여겼을까? 우리도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먼 미래보다 지금 당장 경연이 가져올 효과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데, 세종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