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는 유니버스 :: 마담 보바리, 위대한 개츠비

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 귀스타브 플로베르, 1857년

 

 

1910년 철학자 쥘 드 고티에는 '보바리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경향" 을 뜻한다. "인간이 자신의 환영을 좇아 자기를 속이고 자기를 실제와는 다른, 분수 이상의 존재로 생각하는 정신 작용" 이다.*

 

*<보바리>, 쥘 드 고티에 지음, 알랭 뷔진느 편집, 김계영·고광식 옮김, 이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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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스콧 피츠제럴드, 1925년

 

 

줄거리만 요약해서 보자면, 세상 고전들의 절반 이상이 불륜하다가 신세 망친 남녀의 통속 드라마이듯 <위대한 개츠비>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는 무정하고 차가운 미녀에게 순정을 다 바치다 못해 끝내 목숨까지 바치는 호구의 이야기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 하나. 여자 보는 눈도 없는 호구가 왜 위대한가. 개츠비에 대한 첫 번째 의문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개츠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데이지는 천하의 악녀인가. 뒤따라 나오는 두 번째 의문이다.

데이지에 대한 남학생과 여학생의 반응은 좀 갈린다. 영문과에 남자가 드물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 희귀한 남학생들의 주위에는 데이지 같은 여자에게 헌신했다가 헌신짝이 된 불쌍한 호구 친구가 한 명은 꼭 있다. 그들은 자기 일처럼 분개하며 데이지를 성토한다. 그런 이기적인 여자한테 마음을 주지 말았어야 해요. 개츠비가 불쌍해요. 반면 여학생들의 반응은 다소 시큰둥하다. 데이지가 원하지 않은 애정을 그렇게까지 일방적으로 쏟아 부은 것도 폭력이 아닌가요. 개츠비가 좀 과해요. 일리가 있다. 이미 오래 전 남의 여자가 된 옛 연인을 못 잊어 근처로 이사 온 것도 모자라, 우연히라도 들러 주지 않을까 싶어 어중이 떠중이 다 끌어모아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여는 남자라니. 이 정도면 집착도 병이다. 그렇다면 역시, <위대한 개츠비>는 사랑에 속은 바보의 이야기고, 데이지는 무죄인가.

 

(중략)

 

데이지가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여자라는 사실은 어떤 식으로도 옹호하기 힘들다. 하지만 개츠비의 사랑도 데이지라는 한 인간 자체에 대한 온전한 마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데이지가 상징하는 것조차 넘어서는 그 무언가를 향한 열망, 어딘지 모르지만 물질적 욕망이 약속하는 것 이상의 세계로 가고 싶은 열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을 꿰뚫어 본 닉은 5년 만에 개츠비가 데이지와 재회한 감격스러운 순간에도 "데이지가 그의 꿈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순간이 틀림 없이 있었을 것"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데이지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개츠비가 오래도록 품어 온,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환상은 "그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

개츠비는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데이지에게 부여했다. 데이지는 개츠비가 아무리 간절하게 손을 뻗어도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녹색 불빛이었다. 그 불빛은 이미 그를 지나쳐 버렸으나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녹색 불빛이 상징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이상, 푸르른 신대륙의 꿈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푸른 신대륙의 녹색 가슴은 이제 재의 계곡으로 변했다. 개츠비가 쫓은 대상이 데이지가 아니라 그 누구였더라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그의 꿈을 채워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 데이지는 개츠비에게 못할 짓을 하긴 했지만, 그의 장엄한 실패에 대해서만큼은 죄가 없다.

 

(중략)

 

아마 TV에서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한때 빅뱅 멤버 승리가 '승츠비'로 주가를 날린 시절이 있었다. 승리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넓은 홀을 빌리고 댄서들을 불러 성대하게 열었던 생일 파티를 자랑하면서 영화 속 디카프리오처럼 샴페인 잔을 드는 제스처를 멋지게 취해 보였다. 함부로 개츠비의 이름을 갖다 쓴 것이 탈이었는지 승리도 암흑 세계와의 추악한 커넥션이 까발려지면서 개츠비와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총은 안 맞았지만. 승츠비라고 떠벌린 승리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개츠비라는 이름은 화려한 삶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가 단지 재즈 시대의 화려한 파티, 화려한 플래퍼들, 화려한 슈퍼카를 모는 부자들의 이야기일 뿐이었다면 그 시대가 끝나면서 작가 피츠제럴드와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을 것이다. 기묘하게도 이 화려한 개츠비의 세계에는 재즈 시대의 신나는 흥취 사이사이로 패배와 몰락, 상실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이 변한다. 꽃도 열정도 시들고, 젊은 날의 높고 푸르던 꿈도 빛을 잃는다. 닉은 겸허하게 한계를 수용하고 안전한 벽 안에 머무르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무용한 시도를 끝내 감행하며 자신을 파멸까지 몰아 간 개츠비의 '위대함'을 인정한다. 그 시도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건, 그 자체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고 본다. 닉은 개츠비의 죽음을 홀로 쓸쓸히 아파하면서 사라진 초록색 꿈을 함께 애도한다. 지나가 버린 모든 것,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은 아름답다. 잃어버린 첫사랑과 지나간 꿈을 애도할 줄 몰랐던 것이 개츠비의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