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 무엇 때문에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Why Did It Happen

 

S. Maximov의 <시베리아와 감옥>에 기술된 사건을 기초로 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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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30년 봄, 야체프스키는 오래 전에 죽은 친구의 외동아들인 조셉 미구르스키의 방문을 받았다. 야체프스키는 65세로 폴란드 2차 분할 시대의 애국지사였다. 그는 넓은 이마와 우람한 어깨, 딱 벌어진 가슴, 검게 그을린 얼굴에 하얀 턱수염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상관 미구르스키와 함께 코시우즈코의 민족 독립 혁명에 참가하며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군 생활을 하던 젊은 시절, 러시아를 '세기말적인 탕녀 캐서린 여제와 그녀의 정부 포냐트코프스키의 나라'라고 욕을 하며 증오했다. 그 시절, 석양의 저무는 태양도 아침이면 다시 떠오르듯이, 위대한 폴란드 '르제츠 포스폴리타'가 재건되리라 믿었다.

1812년에, 그는 나폴레옹 휘하의 연대를 지휘하며 프랑스 황제를 섬겼다. 그는 황제가 죽자 몹시 애통해 했다. 그러나 처참하긴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폴란드 왕국의 재건과 재기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의회를 열었을 때, 그의 희망이 다시 타오르는 듯 했지만 서유럽 반동세력의 통합과 콘스탄틴의 어리석은 정치 때문에 그의 숭고한 희망은 실현되지 못하고 멀어져만 갔다.

1825년 이후로 야체프스키는 자신의 시골 영지인 로쟌카에서 신문과 편지 등을 통해 조국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농장 경영과 사냥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비교적 아름답고 귀티가 나는 아가씨와 재혼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존중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욕을 하고 함부로 대하였다. 마치 실패한 결혼을 재혼한 그녀에게서 보상 받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전처 아래로 두 딸이 있었지만,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아름답고 품위가 있는 큰 딸 반다는 한적한 시골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눈이 푸르고 빛이 났으며 금발의 머리를 길게 기른 작은 딸 알비나는 아버지를 닮아 눈이 좀 큰 편이었지만 몸매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녀는 성격이 명랑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언제나 듬뿍 차지하였다. 조셉 미구르스키는 학생 시절, 그러니까 알비나가 열 다섯 살일 때, 빌노라는 곳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야체프스키 가족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반다와 애들처럼 장난을 치며 놀았지만,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야체프스키 가족의 시골 영지에는 첫 방문인 셈이었다.

 

젊은 미구르스키의 방문은 로쟌카 영지에 사는 모든 식구를 들뜨게 했다. 야체프스키는 미구르스키가 유년 시절의 친구인 그의 아버지의 젊은 모습을 빼 닮아서 왠지 마음이 더 흡족했다. 또한 미구르스키가 얼마 전에 가 본 해외와 폴란드에서의 혁명의 열기를 열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얘기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의 아내 역시, 남편이 손님을 맞이해서 좀 더 조신해지고 평상시처럼 자기에게 큰 소리를 치지 않아서 미구르스키의 방문이 아주 즐거웠다. 반다는 미구르스키가 그녀에게 청혼하기 위하여 왔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청혼은 받아들일 테지만, 자유와 바꾸는 결혼이라면 그의 애간장을 좀 태워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알비나는 모두가 즐거웠기 때문에 덩달아 마냥 좋았다. 미구르스키가 청혼하리라는 것은 반다만이 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도 믿고 있었다. 비록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가족은 물론 집 안의 하녀 루드비카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구르스키는 처음에 반다와의 장래를 생각하고 왔지만, 영지에서 일 주일을 보낼 즈음에는 무언가에 흥분을 하고 실망하는가 싶더니 청혼을 하지 않고는 떠나 버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출발에 가족들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알비나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알비나는 미구르스키가 로쟌카에서 보내는 내내,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특히 즐거워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치며 그녀를 어린 동생처럼 대하였지만, 그녀는 자기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른이 아이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방식임을 여자의 직감으로 느꼈다. 알비나가 그의 방을 드나들며 아는 체를 하거나 헤어질 때, 그가 보내는 열정적인 눈길과 온화한 미소 속에서 한 남자의 열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의 열정에 행복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그가 좋아할 만한 일을 해 주었으며, 그러면 그 또한 마냥 좋아했다.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예전에 해 주었던 모든 일들을 더욱 열성적으로 그에게 베풀어 주곤 했다. 그는 강아지 보르조이와 그녀가 달리는 것을 좋아라 바라보곤 했다. 때때로 강아지가 그녀의 어깨 부근에 뛰어 올라 환한 얼굴을 핥아 주는 장면도 좋아했다. 어디에서든 까르르 울려 나오는 그녀의 웃음 소리도 듣기 좋아했다. 또 예배 중에 신부님의 설교가 지루해서 바라보면, 그녀가 눈웃음을 짓고는 짐짓 진지한 척하기도 하고 늙은 유모나 술주정뱅이 또는 표정이 순간적으로 잘 바뀌는 미구르스키 자신을 우습게 흉내 내는 것도 좋아했다. 가장 좋은 점은, 그녀가 무엇보다도 삶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이제 막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것을 마냥 즐기며 설았다. 그녀의 이러한 삶에 대한 열정은 단지 이것이 그를 기쁘게 해 준다는 이유만으로도 더욱 더 뜨거워져 갔다.

그러니, 언니에게 청혼하러 온 사람이 그냥 가 버린 이유를 아무도 모르고 알비나만 알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 자신도 인정하기 싫은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언니를 사랑하고 싶었으나, 어떤 일을 계기로 자기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마음을 그녀는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총명하고 교양을 갖춘, 그리고 예쁘기까지 한 언니와 비교하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그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는 더욱 행복해 했다. 그녀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처음 깊이 사랑에 빠져 일생 동안 단 한 번 사랑하는 사람처럼.

 

 

2.

 

여름이 다 끝나 갈 무렵, 신문에서 파리의 혁명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연이어 바르샤바에서도 반란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야체프스키는 폴란드 혁명의 기폭제가 될 콘스탄틴 파블로비치의 암살에 대한 소식을 두려움과 희망 속에서 기다렸다. 그 해 11월, 왕궁 공격에 의한 콘스탄틴의 탈출과 폴란드 의회의 로마노프 왕조의 퇴진 등의 소식이 들려 왔다. 흘로피츠키가 최고 권력자로 선포되고, 폴란드 국민은 다시 자유를 찾았다. 로쟌카에까지는 혁명의 물결이 미치지는 못했지만, 주민들은 혁명을 고대하며 준비했다. 늙은 야체프스키는 혁명 주모자 중의 한 사람인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몇몇 약정을 맺고 유대인 금융업자를 부르기도 하였다. 영지 관리를 상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봉기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때가 오는 대로 혁명에 가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야체프스키의 부인은 남편의 재산에 대하여 평소보다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럴수록 남편은 더욱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다는 바르샤바에 있는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등의 보석을 보내 돈을 마련하여 혁명 위원회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알비나는 오직 한 가지에만 몰두하였다. 미구르스키가 어떤 식으로 가담할까 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통해서 그가 드베르니츠키의 휘하 부대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아내어 파견대에 대한 정보는 어떤 것이든 입수하려고 애를 썼다.

미구르스키가 편지를 두 번 보내 왔다. 첫 번째 편지는 그가 군대에 입대했다는 내용이었고, 두 번째는 스토체크에서 폴란드가 승리를 거두었는데 러시아의 대포 6문과 포로를 사로잡았다는 것을 장황하고 흥분된 어조로 쓴 것이었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폴란드에게 승리를! 모스크바에게는 패망을. 만세!" 라고 쓰여 있었다. 알비나도 지도를 펴 놓고 모스크바 군대가 언제 어디서 패퇴해야 하는가를 계산하며 부산을 떨었다. 아버지가 소포를 개봉할 때마다 그녀는 하얗게 상기한 얼굴로 온 몸에 전율을 느끼곤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방 안에서 군모와 바지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을 계모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녀는 남장 차림으로 집을 떠나 폴란드 군대에 들어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모가 이를 아버지에게 일러 바치는 바람에, 그녀는 아버지에게 불려 가서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딸아이처럼 혁명에 참여하고자 하는 심정이 있었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들이 할 일이 있는 거다. 여자들은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 고 말하면서 그녀에게 전쟁에 참가하겠다는 생각은 애당초부터 지워 버리라고 했다. 또 그녀는 자신에게 유일한 기쁨이자 위안이라며, 때가 되면 그녀도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타일렀다. 아버지 자신은 혼자이고 불행하다는 암시를 주면서 알비나의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딸의 볼에 입을 맞추며 이야기를 끝냈다. 그녀는 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3.

 

1830년과 1831년 사이에 폴란드 국민들이 느끼는 기쁨은, 증오의 대상인 독일과 그보다 더 증오하는 러시아에게 자신들의 영토를 각각 빼앗기는 폴란드 분할을 경험했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전의 투쟁이 실패한 이후로, 이 때가 비로소 자유에 대한 희망이 실현되었던 해였다. 하지만 희망은 오래 가지 못했다. 비교도 안 되는 러시아의 군사력에 의하여 혁명은 다시 좌절되었던 것이다. 니콜라이 1세의 명령과 디비치 장군 및 파스케비치 장군의 지휘 아래 수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폴란드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 러시아 군사들은 폴란드 형제들과 함께 그들의 피로 대지를 물들였다. 그렇게 러시아는 폴란드를 침략하여 국민들을 허약하고 보잘것 없는 국민으로 되돌려 놓았다. 폴란드인들은 억압도 자유도 원치 않고 오직 하나, 탐욕과 유치한 허영만을 바라는 국민으로 전락해 버렸다.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되고 폴란드의 소규모 혁명군들이 모두 패배하면서,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총살을 당하거나 고문으로 죽고 투옥되거나 추방을 당했다. 추방자들 사이에는 젊은 미구르스키도 끼어 있었다. 그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서부 시베리아 우크라이나의 보병 대대에 편입이 되었다.

 

1832년 겨울, 야체프스키는 지난 해부터 발병한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빌노에서 살고 있었다. 시베리아 요새에 배속된 미구르스키는 야체프스키에게 편지를 보내곤 하였다. 그는 편지에서 지금껏 경험하고 앞으로 겪어야 될 일들은 참기 힘든 것이지만, 조국을 위해 고생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다고 썼다. 그리고 숭고한 목표에 바친 삶의 한 부분 때문에 절망하지 않으며 남은 인생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고, 내일이라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은 똑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리 내어 편지를 읽던 야체프스키는 이 부분에서 더 이상 읽지 못하고 눈물을 훌쩍거렸다. 그러자 반다가 편지를 받아 읽어 주었다. 미구르스키는, 지난 번 방문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지만, 그 때 세운 '온갖 꿈과 계획이 무엇이었든지' 이젠 말할 수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고 했다.

반다와 알비나는 미구르스키의 말을 각자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고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구르스키는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의 안부를 물으며, 알비나에게는 아직도 보르조이보다 빨리 달리는지, 그리고 지난 번에 그녀에게 짓궂게 굴었을 때처럼 다른 사람들의 흉내를 잘 내고 있는지를 넌지시 물어 보았다. 그리고 야체프스키 부부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반다가 훌륭한 남편을 만나서 잘 살기를, 또한 알비나에겐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이어 가기를 바란다며 편지를 마쳤다.

 

 

4.

 

야체프스키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1833년에 그들 가족은 모두 외국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반다는 바덴바덴의 부유한 폴란드 이민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 해 초에 야체프스키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알비나의 품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아내의 병 수발을 거부하고 결혼 생활의 잘못에 대해서도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알비나는 계모와 함께 영지로 돌아왔다. 그 후 오랫동안, 그녀는 미구르스키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저 버리지 않았다. 어느 새 그녀의 눈에 그는 위대한 영웅이요, 순교자로 비쳤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에게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외국에 나가기 직전부터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써 주었지만 나중에는 직접 서신 왕래를 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 이제는 러시아에 편입된 폴란드로 돌아와서도 편지는 계속 되었다.

 

그녀는 열 여덟 살이 되자, 계모에게 우랄스코로 가서 미구르스키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계모는 그가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 많은 처녀와 결혼하려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결국엔 그녀를 불행에 몰아 넣을 것이라며 반대를 했다. 알비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녀가 제공하려는 어떤 도움도 거절하는 그에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가 허락만 한다면 자기는 결혼할 결심이 서 있다고 고함을 쳤다. 얼마 후, 알비나는 삼촌이 두 조카딸에게 유산으로 물려 준 금화 30만 루블을 상속 받았다. 이제는 아무 것도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1833년 11월에 알비나는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가족들은 그녀를 마치 외딴 야만인의 땅, 시베리아로 죽으러 가듯이 떠나 보냈다. 알비나는 늙은 하녀 루드비카와 함께 아버지가 쓰던 것을 수선한 마차를 타고 긴 여정에 올랐다.

 

 

5.

 

미구르스키는 군인들의 막사가 아닌 다가구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러시아 집행관들이 이전에 장교였던 이들의 어려운 입장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명령 불복종에 대한 처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장교들의 편의를 봐 주고 있었지만, 이들은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황제의 명령에 따라 사병으로 강등되어 온갖 굴욕을 참으며 힘들게 살아야 했다. 미구르스키가 속한 대대의 지휘관은 사병 출신으로 읽고 쓸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부유한 지식인 청년, 미구르스키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여겼다. 덕분에 그는 다른 병사들보다 나은 생활을 했다. 얼굴이 크고 통통하며 흰 구레나룻을 기른 이 대령의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사관학교 입학 준비를 하는 대령의 두 아들에게 불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우랄스크에서 보낸 7개월은 미구르스키에게 단조롭기 그지 없었으며 피곤한 삶 자체였다. 그는 부대장과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려 했기 때문에, 소도시의 생선 장사 출신인, 무뚝뚝하고 배운 것이 별로 없는 폴란드 장교 이외에는 친구도 없었다. 거기다가 그는 한 번도 궁핍한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으며 전 재산을 몰수 당해 가진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어렵게 생활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몰래 숨겨 가지고 나온 약간의 금붙이 덕분이었다.

이러한 생활에서 그의 유일한 기쁨은 알비나와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었다. 로쟌카를 방문했던 이후로 줄곧 마음 속에 남아 있던, 그녀의 낭만적이고 사랑스런 이미지는 이 곳으로 추방된 뒤로는 점점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마음에 자리잡은 상태였다. 그녀는 첫 편지에서 그가 이전에 보냈던 편지 중에 써 보낸 '온갖 꿈과 계획이 무엇이었든지' 라는 구절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 꿈이란 그녀를 아내로 맞는 것이라고 써서 답장을 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다시 답신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예전에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며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이 후회된다고 다시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 꿈은 불가능하지도 않고 이제 곧 확실히 실현될 것이라고 답장을 했다. 이에 그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녀의 희생을 받아 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이런 편지가 있은 후에 그는 2천 즐로티 짜리 전신환을 받았다. 필체와 소인을 보고 알비나에게서 온 편지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재미 삼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차와 담배와 책을 살 돈을 번다고 첫 번째 편지에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돈으로 무너뜨리지 말라고, 그리고 모든 것이 풍족하고 그녀와 같이 훌륭한 친구가 있는 것 만으로도 만족한다는 편지에 수표를 동봉하여 그녀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편지 왕래가 멈춰 버렸다.

 

어느 11월 미구르스키가 대령의 집에서 아들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우편 마차가 다가오는 종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얼어 붙은 눈길 위로 미끄러지면서 멈춰 섰다. 아이들이 누가 왔는지 보고 싶은 마음에 냉큼 일어나 뛰쳐 나갔다.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대령의 아내가 들어왔다.

"선생님, 아가씨 두 명이 선생님을 찾는데요. 선생님 나라에서 온 것 같아요. 폴란드 사람처럼 보이던데요."

누군가 미구르스키에게 알비나가 찾아 올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찾아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에도.

갑자기 피가 솟구쳤다. 벅찬 가슴에 현관으로 뛰어 나갔다. 현관에는 얼굴이 검고 얽은, 몸매가 뚱뚱한 중년 여인이 넓은 목도리를 벗고 있었다. 한 여인은 막 대령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를 들은 그녀가 뒤돌아 보았다. 휘둥그레 빛나는 푸른 눈의 알비나가 기쁨에 겨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꺼풀에는 서리가 앉아 있었다. 그는 놀라움에 얼어 붙은 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했다.

"조!"

알비나가 아버지가 부르던 그 이름을 크게 외쳤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불렀다.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차가운 얼굴을 그의 볼에 꼭 부벼 대면서 한동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알비나를 소개하고 그녀가 온 목적을 알려 주자, 대령의 아내는 결혼할 때까지 그녀를 자신의 집에서 머물도록 해 주었다.

 

 

6.

 

인정 많은 대령은 사령관에게 편지를 써서 미구르스키와 알비나의 결혼 허가를 받아 주었다. 곧 오렌부르크 시의 폴란드 신부를 불러 결혼식을 치렀다. 대령의 아내가 알비나의 어머니를 대신하고, 그의 아들이 성상을 모셔 가고 또 같은 추방자인 폴란드 장교 브르조조프스키가 그들의 증인이 되어 주었다.

알비나는 속속들이 안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과 결혼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열정적으로 남편을 사랑했다. 결혼 후에야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상상 속에서 키워 온 시적인 이미지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진짜 살과 피를 가진 남자의 현실적이고 자잘한 일면들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도 살과 피가 있는 현실의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비로소 드러나는, 전에는 생각지 못한 많은 단순함과 장점들도 알게 되었다. 그가 전쟁 중에 정말로 용감했으며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구속되었음에도 의연했다는 것을 친구나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듣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숭고하고 영웅적인 삶을 사는 위인으로 상상해 왔던 터였다. 실제로 그는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용감했지만, 소박하고 말이 없는, 양처럼 조용한, 그리고 건조한 농담을 건네며 갈색의 콧수염과 턱수염 사이 촉촉한 입술로 어린 아이 같은 미소를 짓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웃는 그 미소를 볼 때마다 그녀는 로쟌카의 옛 시절을 떠올렸다. 그러나 언제나 피워 대는 파이프 담배를 임신 중에는 참지 못했다.

미구르스키 역시 결혼 후에야 비로소 알비나를 알았으며, 결혼 전에 사귀던 다른 여자들에게서는 알 수 없었던 여자의 마음을 그녀를 통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알비나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나긋하고 고마운 마음 때문에 여자에 대한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보았을 때에 어느 여자나 다 갖고 있는 여인의 속성을 깨닫고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한 여자로서의 알비나에게 깊은 애정과 다소 탐닉적인 감정을 느꼈지만, 개인적으로는 분에 넘치는 행복을 가져다 준 그녀의 희생에 대하여 부담 없는 기쁨과 포근한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미구르스키 부부는 마치 한겨울에 길을 잃고도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두 마리 짐승처럼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였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또한 알비나를 따라온 유모 루드비카는 이 부부의 행복에 더 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는 너그럽고 괄괄한 성격에, 만나는 남자마다 사랑에 빠지는 재미있는 여자로 여주인에게는 특히나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부부는 결혼을 한 1년 후에 아들을, 그리고 다시 1년 반 뒤에 딸을 얻고 더욱 행복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꼭 닮아 크고 깊은 눈에 성격도 명랑하고 기품이 있었다. 딸은 건강했으며 귀엽고 예뻤다.

단지 조국을 멀리 떠나 억눌려 지내는 유별난 환경이 이들 부부의 고통과 시련이었다. 더구나 알비나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남편 조가 어떤 장교 앞에서나 경례를 붙이고 사격 연습과 경계 근무를 하는 등 어떤 명령에라도 복종해야만 하는 부당한 현실이 무엇보다도 참기 힘들었다. 게다가 조국 폴란드에서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렸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든 것을 잃고 추방을 당하거나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미구르스키 가족에게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어떤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미구르스키는 장교로 진급을 해 주든가 사면을 해 달라고 탄원을 했지만, 모두가 허사가 되었다.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파블로비치는 군사 검열과 훈련, 그리고 사열을 실시하며, 무도회를 열어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추구예푸에서 노보로시스크까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러시아를 횡단하는 긴 순시를 한답시고 수많은 말들을 죽이고 사람 사이에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다. 가끔 대담한 사람들이 추방된 12월 당원들이나 그가 칭송하고 감탄해 마지않는 애국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폴란드 장교들에게 동정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면,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얼음 같이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며 말할 뿐이었다.

"그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게 해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가 마치 너무 이르지 않은 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적당한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것처럼 말을 하면, 장군들과 고위 장교들과 그들의 아내들 그리고 그에게서 봉급을 챙기는 사람들 모두는 황제의 현명함과 지혜와 지성에 대하여 감복을 하였다. 모든 것을 따지고 보면, 미구르스키 가족은 불행하기보다는 행복한 편이었다.

 

이들은 그렇게 5년을 살았다. 하지만 그 즈음 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끔찍한 불행으로 고통을 겪었다. 먼저 딸이 병에 걸리더니 이틀 뒤에 아들도 따라서 병이 났다. 아들은 사흘 동안 열병을 앓더니 의사를 찾을 수가 없는 가운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나흘째 되는 날에 죽었다. 그리고 이틀 뒤에 딸 아이마저 죽고 말았다.

알비나는 우랄 강에 투신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주검을 발견하고 전율을 느낄 남편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산다는 것은 고통 자체였다. 전에는 열심히 집안 일을 돌보았지만, 이제는 모든 일을 루드비카에게 맡기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몇 시간이고 멍하니 앉아서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유모나 남편이 찾으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혼자 있고 싶다고 할 뿐이었다.

그 해 여름, 그녀는 아이들의 무덤을 자주 찾아갔다. 그 곳에서 그녀는 혹시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며 괴로워했다. 무엇보다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도시에 살았더라면 살릴 수도 있었을 거라는 자책에 가슴을 쥐어 짰다.

'왜?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우리 부부가 누구한테 뭘 해 달라고 한 적이 있던가? 다만 할아버님과 증조부모님이 살았듯이 그이도 그렇게 살고, 나는 서로 사랑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데 왜 고문을 하고 추방을 하고, 그리고 이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 우리 아이들의 생명을 빼앗아 간단 말인가, 왜?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녀는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대답도 희망도 없었다. 알비나에게 있어 삶의 희망은 이미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가난하고 꽉 짜여진 추방된 자의 삶을, 그녀는 우아하고 고상한 취향으로 가장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런 생활은 그녀 뿐 아니라 미구르스키를 위해서도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그는 그런 아내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그녀를 도울 수 없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했다.

 

 

7.

 

미구르스키 가족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낼 즈음, 폴란드 사람인 로솔로브스키가 우랄스크 시로 들어왔다. 그는 폴란드 장교로 구성된 비밀 단체에 관여하며 혁명과 시베리아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던 사내였다. 그 비밀 단체의 수장은 폴란드계 신부인 시로친스키였으며 그 역시 시베리아에 추방되어 있었다. 미구르스키처럼 로솔로브스키도 폴란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혐의로 시베리아로 추방된 후에 결사 조직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그가 근무하는 대대의 사병으로 배속되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로솔로브스키는 큰 키에 등이 조금 굽고 말랐으며, 볼이 푹 들어가고 이마에 수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미구르스키의 집을 방문한 첫 날 밤, 로솔로브스키는 엄청난 시련으로 끝나 버린 그들의 거사를 조용하고 담담하게 들려 주었다. 시로친스키 신부가 시베리아 전역에 비밀 단체를 조직했으며, 러시아 군과 코싹크 분대 그리고 보병 연대에 적을 둔 폴란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군인들과 죄수들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다음, 옴스크의 포병대를 함락시키고 사람들을 풀어 주기로 했던 계획이었다.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했을까요?"

미구르스키가 물었다.

"그 계획은 아주 구체적이었고, 준비도 철저했습니다."

엄숙한 표정으로 로솔로브스키가 답했다. 다시 시베리아의 폴란드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계획과,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취해야 할 조치 및 실패할 경우에 반란의 참가자들을 구하기 위한 세부적인 대비책 등을 조용하고 차분하게 풀어 놓았다.

"두 놈만 배반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었소."

덧붙여서 시로친스키 신부님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고 순교자로서 정신적인 위인이라고 힘 주어 말했다. 그리고, 억지로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신부와 이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들의 처형 장면을 자세히, 그리고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2개 대대 군인들이 모두 긴 회초리를 손에 들고 2열로 길가에 정렬해 있었소. 회초리 두께는 황제가 정해 주었는데, 회초리 세 개가 소총의 총구에 겨우 들어맞을 정도였소. 샤칼스키 박사가 제일 먼저 갔소. 두 명의 병사들이 양쪽에서 부축을 하고 앞을 지나가면 병사들이 발가벗긴 그 분의 등을 회초리로 때리는 식이었소. 내가 서 있는 곳으로 가까워져서야 나는 겨우 그 분을 볼 수 있었소. 그 전에는 북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점점 회초리 휘두르는 소리가 들립디다. 두 병사가 팔과 어깨를 긴 소총에 묶고는 그 분을 질질 끌고 오더군요.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머리를 왼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으로 돌리며 몸부림을 치셨소. 그 분이 끌려 갈 때, 어느 러시아 의사가 병사들에게 소리치더군요. '왜 그렇게 심하게 구는 거야! 불쌍하지도 않아?' 하지만, 그들은 아주 심하게 때리더군요. 그들이 두 번째로 그 분을 내 곁으로 끌고 왔을 때는 걷지도 못했소. 그래도 질질 끌고 가더군. 그 분의 등허리는 정말 눈 뜨고는 못 볼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그리고는 쓰러지자, 어디로 데리고 가더군요. 또 두 번째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모두들 쓰러지고 그렇게 끌려들 갔소. 어떤 사람들은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겨우 목숨이 붙어 있었소. 그리고 우리는 모두 서서 그 장면을 지켜 보아야만 했소. 처형은 아침 일찍부터 오후 2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이나 계속 되었소."

"그 후에 시로친스키 신부님이 마지막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 분을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했소. 그래서 이 날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소. 그 기간 동안에 그 분이 폭삭 늙어 버린 것이오. 주름 진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고, 벌거벗긴 몸은 갈비뼈만 앙상하게 헐렁한 배 위로 불거져 있었소. 회초리를 휘두를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몸서리를 치면서 머리를 흔들어 대었소. 하지만 신음 소리는 내지 않았소. 대신에 시편을 암송하더이다. '주여! 자비의 이름으로 저들을 용서하소서.' 내게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로솔로브스키는 천천히 중얼거리며 입을 다물고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루드비카는 그의 말을 들으며 창가에 앉아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오, 그만 하세요. 너무나 끔찍하군요! 짐승보다 못한 놈들이군요. 야수보다 못한 놈들!"

미구르스키가 파이프를 빼어 들고 일어나서는 잰 걸음으로 어두운 침실로 성큼 들어갔다. 알비나는 어둠을 빤히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8.

 

다음 날 미구르스키가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전에 없던 명랑한 표정으로 그를 맞으며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 내 말을 들어 봐요."

"듣고 있소. 무슨 일이오?"

"밤새 로솔로브스키 씨가 말하던 것을 생각해 봤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인데,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어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아요."

"어쩔 수 없잖소?"

"우리 탈출해요!"

"뭐, 탈출? 어떻게?"

"제가 다 생각해 뒀어요. 들어 보세요."

그녀는 지난 밤 생각해 둔 계획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당신이 늦은 밤마다 집을 나갔다 들어오곤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당신이 강에 투신 자살했다고 믿을 수 있게, 유서가 든 군복을 우랄 강변에 벗어 두고 돌아오면, 그들은 시체를 찾으면서 여기저기에 편지를 띄울 거예요. 그러는 동안 당신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한 달 정도를 숨어서 편하게 지내다가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그 때 탈출을 하는 거예요. 어때요? 그럴 듯 하지요."

처음 들어 보는 계획은 불가능하게 보였으나 아내가 단호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계속해서 설득을 하자, 미구르스키는 자정 무렵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찬성한 이유는 설사 탈출이 실패하더라도 로솔로브스키의 설명처럼 자기 혼자서 벌을 받으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설령 죽는다 해도, 아이들이 죽은 이후로 힘들게 버티고 있는 그녀에게는 그것이 자유로워지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로솔로브스키와 루드비카에게 탈출 계획을 말하고, 장시간 의논하여 세부적인 몇 가지 사항만 바꾼 끝에 최종 계획을 확정지었다.

첫 단계로 미구르스키의 자살을 위장하고, 공식적으로 그가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처리가 되면, 그가 미리 약속한 장소로 가고 그 곳에서 알비나가 그를 마차로 옮긴다는 것이 그들의 첫 번째 계획이었다. 그러나 로솔로브스키는 지난 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가 실패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아내와 함께 탈출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알비나는 다른 계획을 제안했다. 마차에 조를 숨기고 자기는 루드비카와 함께 볼가 강의 도시인 사라토프까지 간다. 거기에서 그들이 배를 빌려 볼가 강을 따라 약속한 곳까지 가면, 조가 변장을 하고 강둑을 걸어서 약속 장소에서 합류한다. 그리고 강을 타고 아스트라한으로 가서 카스피 해를 지나 페르시아로 가는 것이었다.

모두가 이 계획에 찬성했다. 특히, 대부분의 계획을 짰던 로솔로브스키가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다. 하지만 경찰의 주의를 끌지 않고 한 사람이 숨을 만한 넓은 공간을 마차 안에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의 무덤을 찾아보고 올아온 알비나가 아이들을 머나먼 나라에 남기고 떠난다는 것이 너무 마음 아픈 일이라고 말하자, 로솔로브스키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이들의 관을 가지고 가겠다고 신청을 해요.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오."

"아뇨,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럴 순 없어요."

알비나가 말했다.

"내 말대로 신청을 하세요. 다른 해결책이 없어요. 실제로 관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큰 나무 상자를 만들어서 그 안에 조를 숨기는 것이오."

처음에 알비나는 아이들에 대한 추억을 속임수와 연관시킨다는 것이 가슴 아파서 이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미구르스키가 그 제안을 흔쾌하고도 낙관적으로 지지를 하자, 그녀도 결국 동의했다.

 

그들의 최종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상관들이 투신 자살을 믿도록 꾸며서 그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에, 남편이 죽었으므로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알비나가 편지를 쓴다. 허가가 나오면, 두 군데 무덤을 파서 관들을 옮기는 척만 하고, 관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 놓는다. 그리고 미구르스키가 아이들의 관으로 위장한 나무 상자에 숨는다. 상자를 마차에 싣고 사라토프로 떠난다. 사라토프에서는 배를 한 척 빌리고, 일단 배를 타면 조는 상자에서 자유롭게 나올 수 있고 강을 따라 카스피 해로 간다. 그리고 나선 페르시아나 터키로 가서 자유를 찾는다.

 

 

9.

 

먼저, 이들 가족은 루드비카를 폴란드 집으로 보낸다는 구실로 마차를 샀다. 그리고는 비록 구부린 자세지만 한 사람이 누워서 숨을 쉬고 숨을 수 있는 마차용 특수 상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로솔로브스키가 숨은 실력을 발휘해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상자를 마차의 후면에 꼭 맞추고, 마차의 의자 밑과 바닥 사이에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또한 환기 구멍도 여러 개 뚫었다. 상자의 바깥 부분은 두꺼운 광목으로 덮고 밧줄로 감았다. 상자에는 마차의 의자 아래로만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마차와 상자가 준비되었다. 하지만 남편이 자취를 숨기기 전의 단계로, 알비나가 대령을 방문하였다. 남편이 의기소침하고 침울한 채 삶에 회의를 느끼는가 싶더니 자살을 시도했었다고 대령에게 하소연을 했다. 또한 남편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 그에게 특별 휴가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녀가 남편에 대한 흥분과 걱정을 어찌나 자연스럽게 연기했던지, 대령은 가슴이 뭉클해져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런 후에 미구르스키는 우랄 강변에 벗어 놓은 군복의 소매부리에 끼워 넣을 유서를 썼다.

 

예정된 날짜에, 그는 우랄 강으로 가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둑 위에 편지를 넣은 코트를 벗어 놓고 몰래 집으로 돌아왔다. 지붕 아래에 숨자, 밖에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다. 밤에 알비나는 루드비카를 대령에게 보내어 남편이 24시간 전에 집을 나섰는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다고 전했다.

아침이 되자, 사람들이 남편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알비나는 아주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편지를 대령에게 보여 주었다. 1주일 후, 알비나는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공식적인 편지를 보냈다. 그녀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미구르스키 부인의 슬픔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또 그녀가 겪는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불행에 다 같이 슬퍼했다. 떠나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다시 아이들의 유해를 파서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바란다는 편지를 썼다. 공무원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청원에 놀랐지만, 승낙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틀 뒤에 로솔로브스키는 알비나와 루드비카와 함께 아이들의 관을 수습할 상자를 마차에 싣고 묘지에 갔다. 알비나는 아이들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일어서서 얼굴을 찌푸리며 로솔로브스키에게 말했다.

"시작하세요. 저는 도저히 이 곳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모퉁이로 걸어갔다.

로솔로브스키와 루드비카는 비석을 옮기고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무덤이 파헤쳐진 것처럼 보이게 하고는 일을 마쳤다. 상자에 흙을 채운 다음, 그들은 알비나를 불러서 집으로 돌아갔다.

 

출발하기로 선택한 날이 다가왔다. 로솔로브스키는 이 모험이 모두 성공이라도 한 듯이 기뻐했다. 루드비카는 여행에 필요한 빵과 간식을 마련했다. 그녀는 요리할 때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인, '엄마의 맛있는 요리'라고 중얼거리면서 기쁨과 두려움으로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미구르스키 역시 자유를 되찾는다는 생각에, 그리고 또 한 달 이상을 지냈던 다락방을 떠난다는 생각에 몹시 기뻐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낙천적인 확신과 활력을 되찾은 알비나를 보고 기운이 절로 솟구쳤다. 알비나는 그 전의 슬픔과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소녀 시절에 가득했던 빛나는 기쁨을 발산하며 남편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오전 세 시에 코샤크인이 말 세 마리를 몰고 왔다. 알비나와 루드비카가 객차에 작은 강아지와 함께 탔다. 코샤크인과 마부는 앞자리에 앉았다. 농부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미구르스키가 미리 객차 밑의 상자에 누워 있었다.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는 시를 떠나 돌처럼 단단한 길을 달려 나갔다. 일행은 깃털 같은 은색의 풀잎이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스쳐 지나갔다.

 

 

10.

 

알비나는 희망과 흥분으로 가슴 속의 심장이 멈춰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가끔씩 루드비카에게 미소를 지어 보내거나, 마부석에 앉아 있는 코샤크인의 큼직한 등이나 객차의 바닥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도 루드비카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꼼짝도 않은 채,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앞만 바라보았다.

매우 청명한 날이었다. 은빛 풀잎들이 비스듬히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 속에서 사방으로 펼쳐지고, 날쌘 비쉬키르의 말들이 질주하며 내는 발굽 소리가 끝없이 트인 초원 위로 울려 퍼졌다. 두더지들이 파 놓은 흙무덤들 사이, 초원 저 멀리로 그 작은 짐승들이 뒷다리로 서서 휘휘 소리를 높이며 자기들끼리 위험을 알리고 구멍에 숨고는 하였다. 이따금 밀을 실은 마차 행렬을 이끄는 코샤크인 일행이나 바쉬키르 출신의 마부들을 만나면, 코샤크인이 타타르어로 인사를 나누며 초원을 가로질렀다. 말들은 마주치는 우마역마다 멈춰서 여물을 든든히 먹고, 보드카 값으로 50코페이카를 받아 든 마부들은 특별 우편 마차처럼 전속력으로 말들을 내몰았다.

첫 번째 역에서 고참 마부가 지친 말을 끌어 내면 신참은 생생한 새로운 말을 마차에 채비시켰다. 그러는 사이 코샤크가 뒷마당으로 가고 없을 때, 알비나는 의자 아래로 허리를 숙여 남편의 기분이 어떤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었다.

"기분도 좋고 필요한 것도 없어. 이틀 밤낮이라도 누워 있을 만해."

 

밤이 되자, 일행은 데르가치라는 큰 마을에 이르렀다. 알비나는 남편이 밖으로 나와 몸을 추스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우마역이 아닌 작은 마을 여인숙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알비나는 코샤크인에게 돈을 주며 계란과 우유를 사 오라고 내보내고, 깜깜한 뒷마당의 처마 아래에 마차를 대었다. 그녀는 루드비가에게 망을 세우고, 남편을 마차 밖으로 끌어 내 먹을 것을 주었다. 코샤크인이 돌아오기 전에, 조는 다시 아무도 모르는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새 말로 교체하고 길을 떠났다.

알비나는 자꾸 기분이 좋아졌다. 그 기쁨과 즐거움을 마음 속에만 담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코샤크인에게도 자기 기분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강아지 트레소르카를 어르며 놀 수밖에 없었다.

루드비카는 못생겼음에도 만나는 남자들이 언제나 먼저 자기에게 추근댄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같이 가고 있는, 우랄 출신의 이 몸집이 크고 친절한 러시아 코샤크인도 똑같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고 있었다. 코샤크인은 하늘색 눈을 반짝이며 두 여인을 아주 친절히 대했다. 여인들은 소박하고 온화한 그의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알비나가 옆에 앉은 트레소르카가 의자 밑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지 못하게 손사래를 치며, 루드비카가 코샤크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을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코샤크인은 이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는 조금도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알비나는 위험, 목전에 다가온 성공, 청명한 날씨, 신선한 공기에 흥분이 되어 그 동안 오래도록 맛보지 못했던 소녀 같은 즐거움과 행복감을 만끽했다.

미구르스키는 덥고 목이 말랐다. 그러나 알비나가 즐거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불편을 의식치 않았다. 아내의 쾌활한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더 새로워졌다.

 

이틀 째의 저녁 무렵, 옅은 안개 속으로 무언가 어렴풋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볼가 강과 사라토프 시였다. 초원에 길들여진 매서운 시력을 가진 코샤크인이 볼가 강가에 솟은 돛대들을 바로 알아보고 루드비카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도 보인다고 말했다. 알비나는 보이지 않았지만, 남편이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여기가 볼가 강과 사라토프라는구나."

그녀는 짐짓 트레소르카에게 말을 거는 체 하며, 보이는 대로 남편에게 모든 상황을 넌지시 일러 주고 있었다.

 

 

11.

 

알비나 일행은 사라토프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볼가 강의 왼쪽 둑 위에 자리잡은 포크로프스키의 변두리에서 밤을 보냈다. 알비나는 그 곳에서 남편을 상자 밖으로 끄집어 내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잠시라도 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코샤크인은 짧은 봄 밤 내내 마차를 떠나지 않고, 여관 마당에 세워진 마을의 빈 수레에서 일행의 마차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루드비카도 알비나가 시키는 대로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코샤크인이 자기 때문에 멀리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마마로 얽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보였다 눈짓을 하며 깔깔거렸다. 그러나 알비나는 그런 모습이 전혀 재밌어 보이지 않았다. 코샤크가 왜 밤새 마차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무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불안할 뿐이었다.

해가 지고 오월의 짧은 밤도 지나고 순식간에 새벽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알비나는 뒷마당으로 이어진 퀴퀴한 복도를 지나 현관으로 나가 보았다. 그러나 코샤크인은 자고 있지 않았다. 마차 곁의 수레에 앉아 두 발을 허공 중에 흔들어 대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잠이 깬 수탉들이 뒷마당 여기저기에서 울어 대기 시작할 즈음인 이른 새벽에, 알비나는 남편에게 가까이 갈 기회를 겨우 찾아 냈다. 코샤크인이 수레에 편안히 누워서 코를 골았던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차로 다가가 상자 가까이 몸을 기대었다.

"조!"

대답이 없었다.

"조! 조!"

그녀는 보다 더 큰 목소리를 떨며 남편을 불렀다.

"왜, 무슨 일이오?"

미구르스키가 상자 안에서 졸린 듯이 말했다.

"왜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자고 있었소."

남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나가도 돼?"

"아뇨, 안 돼요. 코샤크인이 있어요."

그녀가 말을 하면서 수레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코샤크인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코샤크인이 코를 골면서 그 눈, 옅은 파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감는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보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자는 척 하고 있었나?'

알비나는 의심이 들었다. 아마 잘못 본 거겠지, 생각하고는 다시 남편에게 물었다.

"조금만 더 참아요. 먹을 것 좀 드려요?"

"아니오. 담배가 땡기는데."

알비나는 다시 코샤크를 보았다. 여전히 자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거야.'

"관청에 갈 시간이라 가 봐야겠어요."

"그래, 조심하고…."

 

알비나가 여행 가방을 꺼내 들고 방에 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 그녀는 정장을 걸치고 배에 올랐다. 볼가 강을 건넌 다음, 마차를 타고 주청사로 갔다. 주지사가 그녀를 맞았다. 젊어 보이려고 애 쓰는 노인은 불어를 잘 하는, 거기다가 예쁘게 잘 차려 입은 이 폴란드 미망인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들을 허락하며, 트사리트샨의 경찰서장에게 편지를 써 놓을 것이니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알비나는 자신의 방문이 성공적인 데다, 주지사의 범절에서 자신이 주지사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고는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탄 마차가 뱃전을 향해 비포장도로를 따라 요동치며 언덕을 내려갔다. 돌아가는 내내 그녀의 가슴은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태양이 숲 위로 떠올랐다. 비스듬한 햇살이 출렁이는 물결 위에 쏟아지며 강물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야산에 오르자, 꽃들이 만발한 사과나무 밭이 좌우로 활짝 펼쳐졌다. 하얀 구름과도 같은 사과 꽃이 그윽한 향기를 내뿜었다. 강둑에 가득한 돛대들은 숲처럼 출렁이고, 바람을 한껏 머금은 돛들은 일렁이는 광활한 강물 위에서 사랑스럽게 펄럭였다. 뱃전에 도착하자, 그녀는 아스트라한으로 가는 배를 구할 수 있는지, 마부에게 물었다. 그러자 시끄럽고 나서기 좋아하는 십여 명의 선주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자기 배를 써 달라고 떠들었다. 그녀는 비교적 마음씨 좋아 보이는 선주를 택해서 배를 살피러 갔다. 바람을 받는 돛과 작은 돛대 그리고 바람이 없을 때 쓰는 두 개의 노가 달린 배는 부두에 가득 메인 다른 배에 비해서 작게 보였다. 체격이 크고 서글서글한 선원 두 사람이 갑판 위에서 햇빛을 쬐고 있었다. 선장은 마차를 버리지 말고, 바퀴를 떼어 낸 다음 배에 싣고 가면 배가 묵직하게 움직일 수도 있고 또 편안하게 앉아 갈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하느님이 좋은 날씨를 허락하시면, 닷새면 아스트라한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선장이 덧붙여 말했다. 알비나는 선주와 임대료에 합의하고, 마차도 살펴보고 예약금도 받을 겸 포크로프스키의 로지노프 여관으로 와 달라고 했다.

모든 일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해결되고 있었다. 알비나는 기분 좋게 볼가 강을 건넜다. 그녀는 뱃삯을 치르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12.

 

서른 네 살의 코샤크인 다닐로 리파노프는 빅 수르트 마을의 스트렐레츠크 마을 출신으로 코샤크 군에서 마지막 달을 복무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푸가체프 반란을 기억하는 아흔 살의 조부, 두 동생과 큰 동생의 아내인 제수로 이루어졌다. 구교도인 큰 동생은 시베리아에 유배 중이었다. 다닐로 리파노프 역시 아내와 두 딸,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나폴레옹과의 전쟁 중에 죽자, 그가 집안의 가장이 되어 말 16마리, 황소 4마리, 밀밭 15헥타르 등을 보살폈다. 다닐로는 오렌부르그 지역에서 복무를 하다가 카잔 시로 왔으며, 이제 그의 군 복무 기간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는 구교도로 믿음이 독실해서 담배도 술도 가까이 하지 않고, 신앙이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다. 입대할 때의 맹세 또한 철저히 지켰다. 매사에 철저하고 똑똑하게 처신을 하고, 상사의 명령을 받으면 머리와 몸이 따라 주는 한 최선을 다해서 단 1분도 헛되이 쓰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그의 임무는 두 명의 폴란드 여인과 함께 작은 관 두 개를 사라토프까지 운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도둑을 막고, 이들이 적절히 처신하도록 도와 주고 이상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사라토프에서 이들을 이 지역 담당에게 넘겨 주기로 되어 있었다. 두 여자들은 폴란드 여성이긴 했지만 조용하고 온순했다. 이들은 어떤 의심 받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포크로프스키 변두리에서 밤이 이슥해질 무렵, 마차 곁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강아지가 마차 안으로 뛰어들어 꼬리를 흔들며 낮은 소리로 컹컹 짖어대는 것이었다. 마차 의자 아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자 나이 많은 폴란드 여자가 무언가 두려운 듯이 강아지를 붙잡아 데려갔다.

'무언가 이상한 구석이 있어.'

코샤크인은 생각했다. 그 후로 그는 좀 더 주의 깊게 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밤 중에 젊은 폴란드 여인이 마차로 다가오자, 그는 짐짓 잠을 자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상자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 왔다. 그래서 그는 그 날 아침 바로 경찰서에 가서 신고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폴란드 여인들은 둘이만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체 대신에 상자 안에 산 사람을 숨겨 가는 것 같다고 일러 바쳤다.

 

알비나가 여인숙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녀는 부푼 가슴으로 뛸 듯이 기뻤으며, 며칠이면 고통도 끝나고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두 명의 코샤크 군인이 세 필의 화려한 말을 잡고 호화로운 마차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문 앞에서 북적거리며 마당 안을 들여다 보려고 했다. 그녀는 들뜬 마음에, 처음에는 말들과 북적이는 사람들이 자신과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당 안으로 들어가 마차를 보고서야 사람들이 모여 든 이유를 알아채었다. 트레소르카가 절망적으로 짖어대고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마차 앞에 검은 구레나룻을 기른 남자가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장교복에서 놋쇠 단추가 햇빛에 반짝이고, 견장은 티끌 한 점 없고 목이 긴 군화가 번쩍거렸다.

미구르스키가 헝클어진 머리에 지푸라기를 붙이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 장교 앞 두 명의 군인 사이에 서 있었다. 이 불행을 자초한 것이 자기인 줄을 모르는 트레소르카는 쓸 데 없이 경찰을 향해 온갖 적개심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알비나를 본 미구르스키가 몸을 떨며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두 명의 군인이 그를 제지시켰다.

"아무 일도 아니오."

미구르스키가 온화하고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알비나에게 말했다.

"알비나, 걱정하지 마시오."

"대단한 숙녀가 오시는군."

경찰관이 말을 이었다.

"이리 오시죠, 부인. 그래 이것이 아이들의 관이오? 그러면 이 사람은 누구요?"

장교가 눈짓으로 미구르스키를 가리키며 물었다. 알비나는 두 손을 가슴에 보듬고 공포에 질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남편을 바라보았다.

 

마치 죽음 직전과 같은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온갖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녀는 눈 앞에 닥친 불행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남편을 묶고 있는 무례하고 막 돼 먹은 이 사람들에 의해서 학대를 당하고 억압을 받은 남편, 그녀의 영웅에게서 오랫동안 느껴 왔던 무한한 자긍심이 처음 그녀를 감싸고 돌았다.

'사람들 중에 최고인, 이 사람은 감히 하늘 아래 그 누가 구속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그녀에게 떨어진 불행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두 번째로 그녀를 휩쓸었다. 아이들이 죽을 때에 절감했던 그 엄청난 비극 앞에 다시 무릎을 꿇리는 것과 다름 없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왜?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내 아이들을 빼앗아 가는가?'

의문은 또 다른 회의를 몰고 왔다.

'왜,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왜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그녀는 갑자기 남편에게 닥쳐 올 수치스러운 처벌이 떠올랐다. '죄가 있다면 자기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가 누구요? 당신의 남편이오?"

경찰관이 재차 다그쳤다.

"왜?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마차 뒤에 끌어내어서 땅바닥에 내려놓은 상자 위에 쓰러졌다. 루드비카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흐느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님, 마님! 하느님을 믿어요. 하느님이 못된 일을 막아 주실 거예요."

루드비카가 알비나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달랬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찰들이 미구르스키의 손을 묶고 마당에서 끌어냈다. 이 모습을 본 알비나가 남편에게 달려들며 울부짖었다.

"용서해 주세요. 이 이를 용서해 주세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벌 받을 사람은 저예요!"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는 경찰이 알아서 할 일이오. 당신을 포함해서 다 조사해 보면 알게 될 것이오."

경찰관이 알비나의 등을 감싸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알비나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배로 이송되는 남편을 따라갔다. 루드비카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코샤크 사람, 다닐로 리파노프는 마차 바퀴 곁에 서서 경찰관과 알비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강아지 트레소르카는, 미구르스키가 끌려가자 그에게 다가가서 여행 내내 그랬던 것처럼 꼬리를 흔들어 대었다. 갑자기 코샤크인이 마차를 떠났다. 모자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강아지를 걷어 찬 다음, 선술집을 향해 떠났다.

밤새 그는 술집에서 보드카를 시켜 마셨다. 돈을 모두 써 버린 후에는 옷까지 저당 잡히고 술을 마구 퍼마셨다. 다음 날 밤, 도랑에 누워 자다가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미 그의 머리 속에는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그 폴란드 여자의 남편이 상자에 숨어 있다고 경찰에 고발한 것이 정말로 옳은 짓이었을까' 하는 자책은 잊혀지고 남아 있지 않았다.

 

 

＊　＊　＊

 

 

미구르스키가 법정에 끌려 나왔다. 탈출 시도에 대하여 그는 회초리 일천 대와 더불어 시베리아에로의 종신 유배형을 선고 받았다. 알비나 또한 그 곳으로 따라갔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약간의 연분이 있었던 그의 가족과 반다 또한 그보다는 약하지만 심한 처벌을 받았다.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황제는 폴란드에서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혁명의 히드라를 진압하고는 흡족해 했다. 또한, 자신이 러시아 차르 체제의 전통을 계승하고, 러시아 백성의 수많은 이익을 위하여 폴란드를 러시아의 말굽 아래에 두고 있는 점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온갖 훈장을 달고 군복을 금으로 치장한 군속들은 이런 황제를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황제 스스로도 자기는 위인이라며 자신의 삶은 인류와 특히 러시아 백성들에게는 위대한 축복이라며 도취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온갖 힘은 러시아 민중을 도탄과 무지로 내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