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정한 정인지

밤이 늦도록 정인지의 방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끔 소쩍새 울음 소리가 그 소리에 장단을 맞추려는 듯 산중에서 마을로 메아리칠 뿐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자욱한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오늘 밤에는 내 기어이 도련님을 만나 뵙고 애절한 내 마음을 전해야지….'

처녀는 정인지의 집 쪽 담벼락에 붙어 서서 창호지에 뚜렷하게 어린 정인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정인지가 옆집으로 이사 온 후 밤마다 남 몰래 정인지가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 왔다. 그러다 잠을 쫓으려 마당으로 나와 뜰을 거니는 정인지의 모습을 볼 때면 완전히 넋을 잃곤 했다. 그렇게 애를 끓인 지가 벌써 며칠 째인지 몰랐다. 그러다 오늘 밤엔 기어이 자신의 속마음을 전하고, 허락한다면 정인지와 부부의 연을 맺을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담장의 기와를 비추었다. 검은 기와에 낀 푸르스름한 이끼를 타고 흐르는 달빛에 처녀의 마음은 더욱 애절해졌다.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 본 처녀는 조심스럽게 담을 넘었다. 가슴이 천둥 치듯 쿵쾅거렸지만 정념에 불탄 처녀의 마음에 비하면 하찮은 밤새 소리만도 못했다.

정인지의 방에서 아직도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무런 기척을 못 느낀 것 같았다. 처녀는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으며 정인지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발을 뗄 때마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멎는 듯했지만 그 때마다 처녀는 두 손으로 저고리의 앞섶을 지그시 누르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방문 앞에 다다른 처녀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문을 열고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뉘, 뉘시오?"

글을 읽던 정인지는 갑자기 들어서는 처녀를 보고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한순간 정인지의 눈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한밤중에 난데없이 나타난 처녀가 귀신인지 사람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처녀는 방 안으로 들어서기는 했으나 막상 어찌 할 바를 몰라 주춤거리고만 있었다.

"보아하니 집에서 부리는 하인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뉘시오?"

정인지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었다.

"소녀, 옆집에서 왔사옵니다."

처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옆집이라구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야심한 밤에…."

처녀는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저의 행동이 무례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소녀 더는 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어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도련님을 찾아왔습니다."

처녀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정인지는 처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둥근 눈매에 가느다란 눈썹, 연지를 찍은 듯 붉은 입술과 적당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 얼굴의 윤곽은 보기 드문 미색이었다.

'대체 나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 이런 밤중에 찾아온 것일까?'

처녀는 얕은 한숨을 한 번 내뱉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소녀, 도련님이 이 곳으로 이사 오신 날부터 도련님을 가슴에 품고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밤마다 도련님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흠모하는 마음을 조금씩 키워 왔습니다. 더욱이…."

처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글 읽는 틈틈이 마당을 거니시는 도련님의 모습을 뵌 뒤로는… 그러한 마음이 더욱 사무치게 되었사옵니다."

처녀는 차마 정인지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인지는 처녀의 고백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도련님, 소녀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도련님을 향한 제 마음이 너무도 사무치어 그만 이렇게 담을 넘고 말았습니다."

처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정인지를 바라보았다.

'어허, 이제 보니 요망한 처자로구먼…!'

정인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한 쪽으로 돌렸다.

"도련님, 부디 소녀를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 주시옵소서."

처녀는 마치 당장이라도 정인지의 품에 달려들 것처럼 그의 곁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당황한 정인지는 얼른 몸을 뒤로 빼고는 호통을 쳤다.

"자고로 남녀가 유별하거늘 처녀의 몸으로 이 무슨 해괴한 짓이오!"

그러나 처녀는 정인지의 호통은 개의치 않고 그의 품 속으로 덥석 달려들었다.

"그 점 소녀도 모르는 것은 아니옵니다. 하지만 도련님을 너무나도 사모하여 그러는 것이니 부디 소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만 하시오!"

정인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엉겁결에 처녀를 밀쳐 버렸다.

"정녕 도련님께서 저를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소녀 차라리 여기서 목숨을 끊겠사옵니다."

처녀는 저고리 앞섶을 헤치고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당황한 정인지는 우선 처녀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러지 말고 부디 그냥 돌아가시오. 내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

정인지는 부탁하다시피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이 처녀를 빨리 돌려 보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혹여 어머니께서 밤참이라도 들고 오시다 이 광경을 보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정인지는 정신이 아뜩하기만 했다. 그러나 처녀는 마음을 돌리기는커녕 정인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도련님이 정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소녀 겁탈 당했다고 소리치겠습니다."

처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뭐요?"

정인지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소녀,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도록 그렇게 소리칠 것이옵니다."

정인지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처녀가 그렇게 외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처녀의 유혹에 자신이 봉변을 당한 것이라고 믿어 주지 않을 것이었다. 으레 참한 규수를 겁탈했다고 여길 터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앞날은 더 이상 기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과거도 벼슬도 아무 소용 없게 되고 양반 자식이 규중 처녀를 농락했다는 오명만 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인지는 모든 꿈이 다 허물어지는 듯하여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해야 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어찌 처자의 마음을 모르겠소."

정인지는 다소 정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처녀의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그 사무친 정이 얼마나 크겠소."

독기로 가득 찼던 처녀의 눈빛이 조금은 풀렸다.

"목석이 아닌 바에야 내 어찌 처자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있겠소. 다만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이렇게 맞는다는 것은 안 될 말이오. 부모님께 고하지 않고 정을 통한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좋지 않을 것이오. 마침 나도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으니 내일 어머니께 말씀드려 처자의 집으로 매파를 보내겠소이다. 그리하면 나는 정식으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고 처자 또한 스스로 배우자를 구했다는 허물을 쓰지 않을 수 있지 않겠소."

처녀는 갑작스럽게 태도가 변한 정인지의 말이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말씀… 정말이시옵니까?"

정인지는 처녀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남아 일언 중천금이라 했소.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오. 그러면 내일 당장 사람을 보내겠소."

처녀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잡았던 손을 놓고 바로 앉았다.

"소녀의 불경스러운 짓을 용서하십시오. 도련님을 그리는 마음이 너무도 애절하여 이런 무례를 범하였사옵니다. 소녀 돌아가 도련님께서 부르시기만을 학수 고대하겠습니다."

처녀는 어느 새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내 비록 가진 건 없으나 필히 육례(六禮)를 갖추어 처자를 맞이하도록 하겠소."

"소녀 도련님만 믿겠사옵니다."

처녀는 이제야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고개를 떨구고 낮게 흐느꼈다.

"자, 어서 돌아가시오. 혹 누구에게라도 들키면 일을 그르치게 되고 마오."

"예. 그럼 소녀는 이만…."

처녀는 정인지에게 인사한 뒤 뒷걸음질을 쳐 방문을 열고 나갔다. 정인지는 몇 번이고 뒤돌아보는 처녀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처녀가 담을 넘는 것을 보고서야 정인지는 겨우 마음이 놓였다. 정인지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한껏 긴장했던 팔다리가 노곤해졌다.

그 날 밤 정인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뒤 날이 밝자마자 어머니를 찾아 뵙고 간밤에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했다.

"어머니, 처녀의 몸으로 어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사옵니까? 이는 삼강 오륜도 모르는 부덕하고 난잡한 행실이옵니다. 소자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당할까 염려되오니 부디 이사를 서둘러 주십시오."

아들의 이야기에 놀란 어머니는 그 날 당장 이사할 집을 알아 보았다. 정인지는 처자의 집에 매파를 보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사랑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후 그는 옆집 처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몰래 그 집을 떠났다.

이사를 한 후 정인지는 처녀의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혹 지나칠 일이 있어도 멀리 돌아 다녔다. 여러 날이 지난 뒤 정인지는 지필묵을 사기 위해 장터에 나갔다가 우연히 장사치들이 나누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아, 소문 들었나?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 말이야!"

"들었네. 가엾기도 하지. 다른 병도 아니고 상사병으로 죽다니…. 어떤 놈이 그런 몹쓸 짓을…, 쯧쯧."

"누가 아니래나. 그렇게 죽을 바에야 그 놈이 누군지 이름이나 얘기하고 죽을 것이지. 정말 안 됐네 그려…."

옆에서 듣고 있던 정인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장사치들이 말하는 처녀는 그 날 밤 자신의 방을 찾아온 처녀가 분명했던 것이다.

'그 처녀가 죽다니. 그것도 나 때문에…. 요망한 처자인 줄 알았는데 어찌 상사병으로 죽었단 말인가….'

정인지는 마음이 떨려 왔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아냐, 그 날 밤 내가 본 처녀는 분명 요망한 계집이었어….'

정인지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으나 그 처녀에게 미안한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게 매정하게 물리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제서야 정인지는 담을 넘어와 수치심을 무릅쓰고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처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른 뒤 정인지는 양가의 규수와 혼인을 하고 그 옛날 꿈 꾸었던 일들이 하나 둘씩 실현되어 점차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죽은 처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는 문득 그 처녀가 떠오를 때면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가엾은 여인…. 내가 어리석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