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5권- 끝나지 않는 내일로 :: PHASE.3 폭로

라우의 기체가 빔 라이플로 스트라이크를 노렸다.

"제길…!"

무우는 그것을 피하고 350mm 건 런쳐를 쏘았다. 라우는 급격한 방향 회전으로 포격을 피하고 오히려 이 쪽으로 날아 왔다. 왼손 실드 부에 장착된 빔 사벨을 켜더니 두 개의 칼날을 거대한 손톱처럼 번뜩이며 공격해 왔다. 무우는 기체를 돌렸고, 다음 순간 두 기체는 격돌했다. 스트라이크는 적 기의 빔 라이플과 사벨이 장착된 왼 팔을 붙잡아서 무기를 봉쇄했다.

「훗…. 네 놈에게 당한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여기서!」

돌연 매우 명료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려 왔기에 무우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라우 르 크루제?!'

그것은 알래스카에서도 들었던 목소리였다. 라우가 도발할 생각인지 통신 회선을 열고 말을 걸어 온 것이다. 물론 JOSH-A에서도 손 쉽게 잠입한 그인 만큼 이 쪽이 사용하는 주파수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무우는 그 목소리를 어딘가 다른 곳에서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당황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너는 그럴 만한 그릇이 안 되는 것 같군.」

라우는 무우의 기체를 일단 쑥 끌어 당기더니, 다음 순간 강하게 걷어 차 날려 버렸다.

「결국 자식은 부모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건가?!」

"뭐라고?!"

상대가 한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무우는 런처 팩을 분리했다. 배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어차피 파워를 잡아 먹는 런쳐를 더 이상 쏘지 못한다면 기체를 가볍게 하는 편이 낫다. 그는 양 허리에서 아머 슈나이더를 사출하여 양 손으로 겨누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적은 허리에서 무언가 빛나는 것을 두 개 사출했다.

"……!"

와이어가 달린 앵커였다. 그것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그 한 쪽이 빔을 쏘며 스트라이크의 오른 팔을 손상시켰고, 동시에 다른 한 쪽은 조종석을 덮치고 있었다. 정면으로 맞는 것은 간신히 피했지만 그것은 스트라이크의 복부를 관통하여 조종석까지 들어왔고, 흩날린 파편이 무우의 옆구리를 찢었다.

"큭…!"

기체를 바로잡지 못하고 스트라이크는 땅에 심하게 충돌했다. 비웃는 듯한 라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역시 운명은 내 편이다.」

다가오는 적 기를 노려보면서 무우는 그 손에 쥐어진 빔 라이플이 불을 뿜기를 기다렸다. 그 때, 무언가를 느낀 듯 라우가 몸을 돌렸고, 무우도 흠칫했다.

'엇…?!'

「무우 씨!」

키라의 필사적인 외침이 귓전을 때림과 동시에 적 기의 라이플이 빔에 명중하여 폭발했다.

「프리덤?!」

라우가 소리를 지르며 그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 사이에 흰 기체가 쏜살같이 쇄도하며 들고 있는 라이플을 쏘았다. 적 기의 머리가 잘려 나가고, 그것의 낙하가 시작되기도 전에 어느 샌가 날아 온 프리덤이 빔 사벨을 뽑아 들고 교차하며 두 다리를 베었다. 라우의 기체는 한 순간에 대파되어 콜로니의 검붉은 대지에 쓰러졌다. 무우가 지켜 보고 있을 때 조종석 해치가 열리더니 자프트 제복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그 곳에서 튀어 나왔다.

"쳇!"

'끈질긴 녀석이다!'

무우도 해치를 열고 권총을 손에 들었다. 건조하고 차가운 대기가 온 몸을 감싸 왔다. 좌석에서 일어섰을 때 옆구리에 입은 상처 때문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지만 참고 일어 섰다. 그 때, 이 쪽에서 쏘기도 전에 총성이 울려 퍼지며 해치 옆에 총탄이 튕겼다. 무우도 기체에 몸을 숨기면서 응사했다.

"오늘에야말로 결판을 낼 수 있겠지?"

달리면서 라우가 도발했다.

"큭, 저 너셕 무슨 소리를…."

무우는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 가는 남자의 등에 대고 쏘았다. 라우는 한 번 돌아 보고 응사했다.

"그렇다면 와라! 내가 저 세상으로 보내 줄 테니까!"

라우가 달려 간 곳은 거대한 원통형 건물이었다. 무우는 피가 번지는 상처를 억누르면서 기체에서 내려 그 뒤를 쫓았다.

"무우 씨!"

키라는 무우가 적의 지휘관을 쫓아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춘 것을 보고 프리덤을 착지시켰다.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부상을 입은 듯 했다.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는 지금까지 써 본 적도 없는 권총에 손을 뻗고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히고 그것을 집어 든 후 조종석에서 내렸다. 거대한 금속 파이프에 여러 개의 볼트가 튀어 나와 있는 것 같은 외관을 지닌 이 건물은 아마도 버려진 연구 시설 중 하나인 듯 했다. 입구에 발을 들여 놓은 키라는 엔트런스 홀로 보이는 방 앞에서 발을 멈추고 안을 살폈다. 원형 홀에 사람 그림자는 엎고 주위는 고요했다. 키라는 사방을 살피며 홀로 나아갔다. 그 곳은 위 쪽이 뻥 뚫려 있는 구조였고, 천장에서 들어온 빛 덕분에 조명이 없어도 주위 상황을 잘 살필 수 있었다. 중앙에 굵은 샤프트 같은 둥근 기둥이 우뚝 서 있고, 장식이 기둥 주위를 나선형으로 두르고 있다. 그 때 휑한 공기를 총성이 뒤흔들며 먼 곳에서 외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게 뭔지 알고 있나, 무우?!"

"알 게 뭐야, 바보 자식!"

무우의 목소리였다. 위 층인 듯 했다. 다시 총성이 울려 퍼지자, 키라는 급히 샤프트에 뛰어 들어 안에 있는 계단을 통해 위로 향했다.

"죄악이로군. 네가 모르다니!"

키라는 통로를 더듬어 가다가 중앙 홀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무우 씨!"

무우는 이중 나선을 본뜬 듯한 장식물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키라?!"

돌아 본 그는 키라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적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라 야마토, 아직 살아 있었나?"

돌연 자신을 알 리 없는 자프트 병사가 말을 걸어 왔기에 키라는 놀라 시선을 들었다.

"너까지 와 주다니 기쁘기 그지 없다, 키라 야마토 군!"

"쳇!"

무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네가 프리덤의 파일럿이었군!"

무슨 까닭인지 자프트 병사의 목소리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키라는 주위를 살핀 후 무우가 있는 곳까지 달려 갔다.

"왜 온 거야?!"

무우가 나무랐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냥 밖에서 기다려요? 무슨 일이 생기면 마류 씨에게 어떻게 보고하라고."

키라가 반박하자 무우는 그를 팔꿈치로 찌르며 웃었다.

"요 녀석이 건방지게!"

여느 때처럼 행동하려고 했지만, 무우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호흡도 거칠었다. 키라는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날카롭게 말했다.

"무우 씨, 그 상처는…?"

"별 것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대충 보아도 출혈이 꽤 심했고, 아직 피도 멎지 않은 듯 했다. 키라는 나무라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 전에 힐끔 그의 손을 본 무우가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보다 너, 쏠 생각이 있다면 안전 장치 정도는 풀어 둬."

키라는 당황해서 자신의 권총을 쳐다 보았다. 각오를 굳히고 여기까지 왔는데 안전 장치도 풀지 않은 권총으로 엄호를 할 수는 없다. 그는 쑥스러워 하면서 안전 장치를 풀었다. 그 사이에도 도발하는 듯한 자프트 병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사양 말고 와라! 시작의 장소로!"

그는 숨기 위해 무작정 이 장소를 고른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키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키라 군! 너에게도 이 곳은 태어난 고향이 아니던가?!"

"예…?"

놀라 몸을 내밀려고 하는 키라를 억누르면서 무우가 꾸짖었다.

"도발에 걸려 들면 어떡해! 놈이 하는 말 따위는 신경 쓰지 마!"

"놈이오?"

되묻는 키라에게 무우는 내뱉듯 말했다.

"저게 라우 르 크루제야!"

키라는 숨을 삼켰다. 그럼 전에 자신들을 그렇게 쫓아 다니던 숙적이 지금 이 곳에 있다는 건가?

발 소리가 멀어졌다. 그것을 쫓기 위해 무우가 대피 장소에서 뛰쳐 나왔고, 키라도 뒤를 따랐다.

라우 르 크루제는 더욱 시설 안 쪽으로 향했고, 두 사람도 이끌리듯 그 뒤를 쫓았다. 중앙 홀 너머로 하나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이 보였다. 키라와 무우는 다리를 건너 일단 문 옆에 몸을 숙인 후, 무우가 눈으로 보낸 신호에 맞추어 문을 열었다. 그 때 문 옆에 있는 표찰이 힐끗 보였다.

<BL4+ HUMANGENE MANIPULATION LAB>

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을 틈도 없이 열린 문 안 쪽에서 총성이 터지며 벽에 불꽃이 튀었다. 총격이 멈춘 후 안을 살피자, 이미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내부의 이상한 광경에 키라와 무우는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뭐야, 이 곳은…?"

무우가 멍하니 중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은 무언가 파란색 액체를 가득 채운 냉각조로 되어 있었고, 직경 150cm 정도 되는 아궁이 같은 장치가 열 몇 개 정도 잠겨 있었다. 장치 위에는 모니터가 쭉 늘어서 있었는데, 아무래도 장치의 상태를 수시로 모니터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장치는 시설이 폐쇄된 지금도 살아 있는 듯 모니터에 키라 일행이 이해할 수 없는 문자와 숫자가 흘렀고, 태아와 같은 영상이 비쳤다.

냉각조 중앙에는 십자 모양의 통로가 안 쪽에 있는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무우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면서 그 곳을 나아갔고, 키라도 그 뒤를 따랐다. 선반에는 유리병이 여러 개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표본이 들어 있었다. 키라는 그것이 인간의 태아라는 것을 깨닫고 혐오감에 몸이 굳었다.

"키라!"

무심코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의 머리를 갑자기 나타난 무우의 손이 꾹 눌렀다. 총탄이 통로에 엎드린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무우가 빠르게 응사했다.

"오랜만이라 반갑지 않나, 키라 군?"

안 쪽에 있는 어둠에서 비웃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물었다.

"넌 이 곳을 알고 있을 거야."

'알고 있다고…?'

그럴 리 없다. 지금까지 이런 시설은 커녕 L4에조차 온 적이 없다. 그럼에도 키라는 상대의 말에 왠지 묘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곳은 CNT 페이스트로 막아 둬!"

"예? 한 방 더 맞으면 끝장인데요?!"

"그렇다면 부적이라도 붙여 놓고 맞지 않도록 기도해야지!"

우주 항의 독에서는 방금 전의 전투에서 입은 손상에 대한 복구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거의 홀로 도미니온을 막고 있던 아크 엔젤의 손상이 커서 각 함에서 온 승무원들이 총 출동하여 작업에 착수했다. 내츄럴 정비사들이 숙련된 손놀림으로 도구를 다루는 옆에서 공학에 해박한 코디네이터들이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제안하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붉은 파일럿 슈트 차림의 아스란도 그들에 섞여 손상된 우현의 고트프리트를 수리하고 있었다. 정찰에 나섰던 M1=아스트레이가 항구를 통해 들어왔다.

「마유라, 복귀했습니다.」

파릴럿 3인조 중 한 명, 마유라가 시원시원하게 보고했다.

「나스카 급 세 척이 반대쪽 항구의 데블리 뒤에 있더군요.」

그 보고에 통신 회선이 연결되어 있던 세 척의 함장들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스카 급 세 척이라니 아주 성대하군.」

발트펠드는 태평스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마류도 한숨을 쉬었다. 콜로니 내부로 간 후로 아직 돌아오지 않는 무우와 키라도 걱정이 되었다.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나스카 급은 고속 함이라 따돌리기 아렵다.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이 쪽도 세 척이므로 숫자 상으로는 같지만, 도미니온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미니온은?」

마류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키사카가 오퍼레이터에게 물었다.

「여전히 움직임은 없습니다!」

도미니온은 일단 후퇴하기는 했지만 아직 L4 외곽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추격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마 자프트 함의 동향을 살피고 있거나 원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프라가가 어떤 정보라도 가져오면 좋으련만…. 제기랄! 누구의 부대지?」

발트펠드로서는 지휘관만 판명되면 자프트 측의 의도도 약간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마류는 무심코 대답했다.

"크루제 부대예요."

그 말을 들은 다른 함의 사람들이 일제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무우가 안 거죠."

크루제가 있다. 전투 와중에 무우는 그렇게 말하고 콜로니 내부로 갔다고 한다. 그것은 그 어떤 센서보다 확실한 그만의 감각이 그에게 그렇게 알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라우 르 크루제의 존재를…. 이유는 그 자신도 모른다고 하지만…."

마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이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확실히 무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아크 엔젤의 승무원들은 묘하게 납득했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도 무우의 기묘한 감각을 경험할 기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무우는 그들을 쫓아 오는 적이 라우 르 크루제라는 것을 언명한 바 있다. 하지만 지상에 내려 온 이후로는 추격자가 그가 아니라고 했고, 나중에 아스란에게 확인해 본 결과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류가 무우의 감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JOSH-A에서 그가 사이클롭스의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그 경위를 물은 것이 계기였다.

애당초 무우는 묘하게 감이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는데, 과거 전장에서 어느 적을 앞에 두었을 때 그 때까지 느낀 적 없던 무언가를 느꼈다고 한다. 그 파일럿은 굉장히 버거웠기에 귀환 후 확인해 보니, 그가 바로 크루제였다. 그 후 무우는 전장에서 가끔 그 감각을 느꼈고, 그 때의 상대는 항상 같았다. 그 감각이 무엇인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왜 특정 상대에게만 그것을 느끼는지도….

─뭐 숙명의 라이벌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무우는 그 때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마류는 불길함을 느끼며 그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숙명….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무엇…. 정해져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만나 싸움을 되풀이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해져 있는 것은 어느 한 쪽의 죽음인 것일까?

 

 

이자크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버스터가 땅으로 강하하는 것을 잠시 지켜 보았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죽은 줄 알았던 디아카가 살아 있고,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왜 스트라이크와 프리덤과 함께 있고 그 파일럿과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지, 아스란에 대해서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디아카는 무책임한 녀석이지만, 모국을 배신하는 짓을 할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스란과 라크스가 배신한 것도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자신이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총을 내려 놓고 이야기하자.

방금 전 디아카가 한 말을 떠올리고 이자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배신자의 이야기 따위는 들을 필요 없다. 행동이 전부다. 디아카는 살아 있었음에도 본대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탈영 죄에 해당되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배신자들과 행동을 함께 하고 있다. 쏴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자크는 망설였다.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디아카, 아스란, 라크스, 발트펠드….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떠나갔는지를. 자신들을 배신한 그들에 대한 분노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자크는 그들의 가슴 속에 감추어진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듀얼을 버스터 앞에 착륙시키고 조종석 밖으로 나갔다. 건조한 대지에 선 이자크의 모습을 보고 디아카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자크는 그 얼굴에 대고 권총을 겨누었다.

"총을 내려놓고 이야기하자고? 적의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난 무르지 않아!"

총을 보자 디아카는 발을 멈추었다. 물론 그의 이야기를 들어 줄 생각이기는 하다. 하지만 입에 발린 달콤한 말로 회유할 생각이라면 마음을 고쳐 먹는 것이 좋다. 디아카는 이자크의 얼굴에 떠오른 결연한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안타깝다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난… 너의 '적'이야?"

그 물음에 이자크의 총을 쥔 손이 떨렸다. 아니다. 디아카는 동료였다. 사관 학교 시절부터 쭉 옆에 있으면서 때로는 성질 급한 이자크에게 충고하고, 주위를 무마시켜 주기도 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지금 그에게 총을 겨눠야 하는가?! 안타까운 것은 이자크 쪽이었다.

"적이 된 것은 네 쪽이잖아!"

울고 싶은 심정으로 그는 호통 쳤다.

'나를 두고 가 버린 건 너란 말이다!'

하지만 디아카는 대답했다.

"나는 너의 적이 된 기억이 없어."

"까불지 마! 너도 배신자야!"

상대가 자신을 회유하려는 것으로 생각한 이자크는 소리치며 총을 고쳐 잡았다. 하지만 디아카는 총구를 노려 보면서 움직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플랜트를 배신한 적도 없고."

"뭐라고?!"

"다만… 그저 내츄럴을…."

갑자기 디아카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말했다.

"군의 명령에 따라 그저 내츄럴을 전멸시키기 위해 싸울 생각이 더 이상 없을 뿐이야!"

'내츄럴을 전멸…?!'

이자크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무심코 총구를 조금 내렸다.

'우리들이 하려는 일이 그것이었나?'

그의 귀에 얼마 전 정비병이 순진하게 한 말이 되살아 났다.

─내츄럴 놈들 따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우주에서 사라지겠죠?

그것이 과연 우리들의 바람이었을까? 디아카는 이자크의 망설임을 간파하고 훗 하고 웃었다.

"난 말이야, 아무 생각도 없이 지금까지 싸워 왔어."

그렇다. 이자크도 그랬다.

"하지만 포로가 된 후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 뭐 다른 할 일도 없었고 말이지."

디아카는 겸연쩍은 듯 자신이 투항해서 아크 엔젤에 붙잡혔던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를 빼앗긴 소녀에 의해 살해 당할 뻔했던 일을….

"그 때까지 나는 내츄럴을 우리들과는 다른 존재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 애의 눈물과… 니콜이 죽었을 때 네가 흘린 눈물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했어."

그렇다. 내츄럴들도 자신들과 같은 피를 흘린다. 그것은 이자크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는 쥐어 짜듯 신음했다.

"내츄럴을 죽이는 것을 그만 두고 코디네이터를 죽이기로 한 거야!?"

"아니."

디아카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침착함을 보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들은 그런 것을 전부 그만 두게 하고 싶어서, 그래서 온 거야."

이자크는 상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눈을 크게 떴다.

"라크스 클라인, 발트펠드 대장…. 이터널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내츄럴이 코디네이터를, 코디네이터가 내츄럴을 몰살시키기 전에 어떻게든 해 보려고…. 그것을 위해 다들 여기에 이렇게 모인 거라고."

이자크는 아연실색해서 되물었다.

"어떻게 해 보다니…?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글쎄…? 그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너 바보냐?!"

무심코 이자크는 소리쳤다.

"넌 속고 있는 거야! 겨우 세 척의 전함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디아카는 어깨를 으쓱하고 웃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더욱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더군."

"……!"

"키라가… 그 프리덤의 파일럿이 한 말이야. 녀석이 스트라이크의 예전 파일럿이지."

스트라이크…. 그 단어는 지금도 이자크의 가슴 속을 지글지글 끓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는 멍하니 전에 들은 소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제 그만 둬!

알래스카에서 우연히 이자크의 목숨을 구한…, 아니 우연이 아니었다. 아마 그는 그 때부터 마음을 굳히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적과 아군의 구별 없이 그 목숨을 구하려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럼 그 소년이 그 동안 쭉 싸워 왔던 적이란 말인가? 이자크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니콜을 죽인…?

그 일을 떠올리면 반사적으로 증오심이 치민다. 혼란스러워 하는 이자크에게 디아카가 더욱 충격적인 말을 했다.

"녀석도… 코디네이터야."

이자크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말을 들었다. 디아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스란과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더군."

"뭐라고…?"

'아스란과 친구?'

이자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모르고… 서로 싸웠다는 거야?"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적 기에 타고 있는 게 친구라는 걸."

"말도 안 돼!"

이자크는 모든 것을 잊고 소리쳤다. 스트라이크를 상대할 때마다 아스란의 얼굴에 스쳤던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뇌리에 되살아 났다. 이런,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도 적이라면 쏴야 하잖아! 군인이라면!"

디아카의 목소리는 괴로웠다. 멍하니 있던 이자크와 그의 시선이 엉켰고, 문득 이자크는 깨달았다. 그것이 지금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명제라는 것을.

"나에게는 녀석들 정도의 업보도 각오도 없지만, 보고 말았으니까."

디아카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녀석들을 보고 알래스카와 파나마와 오브를 보았는데, 자프트로 돌아가서 상부의 명령대로 싸우라니 난 못 해!"

"디아카…!"

이자크는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왜지?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플랜트를 배신하고 지구 연합군에 가담하다니…. 그래서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유를 듣고 나니 이자크는 오히려 모르는 편이 나았다고 후회했다. 그들이 더러운 배신을 하고 적 측에 가담했다면, 그랬다면 자신은 이 방아쇠를 주저 없이 당길 수 있었는데…! 하지만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침착성과 열의를 가지고 적도 아군도 아닌 제３의 길을 선택한 디아카 앞에서, 이자크는 오히려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반박할 말을 자신은 과연 가지고 있는 것일까? 스트라이크를 용서할 수 없다. 니콜을 죽인 적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파일럿과 함께 싸울 것을 결의한 예전의 동료들은…? 그들도 '적'인가? 자신은 그들을…. 아스란을, 그리고 지금 눈 앞에 서서 열심히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 디아카를 쏠 수 있을까?

군인으로서의 가치관은 상대를 쏠 것을 이자크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그는 그 가치관이 잘못 되었다고 하고, 또한 그 자신도 마음 한 구석에 있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쏘느냐, 마느냐. 이자크의 마음은 격렬하게 흔들렸다. 총을 쥔 손은 장갑 안에서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안 쪽에 있는 문은 반 쯤 일리는 있었다. 무우는 그 틈으로 몸을 붙이고 안을 살폈다. 그러자 안에 있는 어둠에서 총탄이 쏘아졌고, 무우는 목을 움츠려서 그것을 피한 후 응사했다. 총격이 그치자 그는 문 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우 씨."

키라는 뒤를 쫓아 문으로 달려 갔다. 문 옆에 있는 표찰에는 <Prof.Ulen Hibiki M.D.,Ph.D> 라는 문자가 있었다. 하지만 곧 실내에서 울려 퍼진 총성에 키라는 허겁지겁 안을 살폈다. 무우는 총을 쏘며 방을 가로질러 오른쪽에 놓인 소파 뒤로 뛰어 들었다. 그 곳에서 몸을 내밀고 라우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방 반대 쪽을 쏘려는데, 날아 온 총탄이 오른쪽 어깨를 스쳤다.

"무우 씨!"

키라는 정신 없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신음 소리를 내며 소파 뒤에 웅크리고 있는 무우의 곁으로 달려 갔다.

"괜찮아요?!"

"큭…!"

어깨를 잡고 있는 손가락 틈새로 피가 번져 나오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죽이지는 않아."

쿡쿡 웃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 와서 키라는 무우를 지키듯 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사람을 지켜야 해.'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어색하게 총을 겨눈 키라 옆으로 갑자기 무언가가 바닥을 미끄러져 왔다.

"모든 것을 알려주기 전에 죽일 수는 없지."

단단한 것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묘하게 크게 실내에 울려 퍼졌고, 키라는 깜짝 놀라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라우가 던진 것인지 소파 옆 쪽으로 굴러 온 것은 액자인 듯 했다. 당황해서 적장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다가 키라는 그 안에 들어 있던 사진을 확인하고, 무심코 그것을 응시했다. 두 명의 갓난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성. 그것은 카가리가 우즈미에게서 받았다는 사진, 뒷면에 자신들의 이름이 쓰여 있던 그 사진과 똑같은 것이었다. 무우가 키라의 경악을 눈치 채고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때 두꺼운 파일이 다시 그 옆으로 던져졌고, 그 곳에서 몇 장의 사진이 튀어 나와 바닥에 뿌려졌다. 사진 한 장을 보고 이번에는 무우가 숨을 삼켰다.

"아버지?!"

"예?!"

키라도 그 사진을 보았다. 젊은 시절의 단정함이 얼굴에 남아 있는 한 남자가 그와 비슷한 금발의 유아에게 목마를 태워 주고 있는 사진이었다.

"너도 알고 싶겠지?"

안 쪽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이 쪽으로 총을 겨눈 채 다가왔다. 키라는 부랴부랴 총을 다시 겨누었지만, 라우 르 크루제는 마음에도 두지 않고 끈적끈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끝…. 진보라는 이름 아래 광기의 꿈을 쫓은 어리석은 자들의 이야기를…."

은색 마스크가 문에서 새어 든 빛을 받아 번쩍 빛났다.

"너 역시 그의 아들이니까…."

키라의 몸이 굳어졌다.

'아들? 이 남자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 곳은 금단의 성역…."

라우는 발을 멈추고 마치 그리워하듯 주위를 둘러 보았다.

"신의 흉내를 낸 어리석은 자들의 꿈의 흔적…."

정말로 이 남자가 라우 르 크루제가 맞는 것일까? 냉혹하고 치밀한 작전으로 한 번 노린 사냥감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적군의 지장이 맞는 걸까? 아까부터 그가 하는 말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가 다음으로 한 말에 이번에는 키라가 경악했다.

"넌 알고 있나? 지금의 부모가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

몸이 얼어 붙은 키라 옆에서 무우가 신음했다.

"너, 무슨 소리를…!"

반론은 총성에 의해 지워졌다. 키라는 흠칫 정신을 차리고 총을 들어 적장을 노렸다. 라우는 무방비하게 정면에 서 있는 상태였다. 지금 쏘면 키라의 솜씨로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방아쇠에 걸려 있는 손가락을 막고 있었다.

"그렇겠지. 알고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자랄 리 없을 테니…."

라우의 목소리에 희미한 선망이 섞였다.

"아무런 그늘도 없는 그런 평범한 아이로…."

진짜 부모가 아니라고? 온화한 아버지와 착실한 어머니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이미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만약 카가리와 키라가 형제라면 어느 한 쪽, 혹은 양 쪽이 그들을 낳은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사진의 의미를 알 수 없다.

혹시 이 남자는 진실을 알고 있는 건가? 키라와 카가리의 출생의 비밀을, 그 사진의 여성이 누구인지를…. 그렇다면….

그렇다. 키라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 결과 자신이 무엇을 짊어지게 될지는 생각도 못하고….

"아스란에게서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네가 그 아이일 줄은…."

라우는 감질나게 하려는 듯 말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 쌍둥이…, 특히 넌…."

쌍둥이…. 아스란이 당혹스러워하며 입 밖에 낸 단어가 떠올랐다. 그럼 역시 자신과 카가리는…? 키라의 생각을 라우의 야유하는 듯한 목소리가 중단시켰다.

"널 만들어 낸 히비키 박사와 함께 당시 블루 코스모스의 최대 표적이었으니 말이야."

"무슨… 말을…."

키라의 목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라우는 멈추려 하지 않고 키라가 겁내는 것을 즐기듯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너는 살아 남았고, 성장해서 전쟁에 몸을 던진 후에도 여전히 계속 존재하고 있어. 왜지…?"

그의 목소리에 뜨겁게 노래하는 듯한 색채가 더해졌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도 믿고 싶어지잖아. 그들의 광기 어린 꿈을…!"

"제가… 제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당신은 무슨 말을 하는 거죠?!"

키라가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되물었다.

'만들어 낸 사람? 최대의 표적?'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마치 자신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 같지 않은가! 떨면서 쳐다 보는 키라에게 미소를 보이며 라우는 대답했다.

"넌 인류의 꿈…. 최고의 코디네이터…."

그 말을 장식하는 긍정적인 의미와는 반대로 라우는 비웃는 듯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 바람을 가지고 개발된 히비키 박사의 인공 자궁….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아들과 실패로 끝난 형제들…. 수많은 희생 끝에 만들어진 유일한 성공체…."

라우는 잔인한 미소를 떠올리며 그 사실을 키라에게 밝혔다.

"그것이 너야."

키라는 그저 멍하니 상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인공 자궁…. 그의 머리에 옆 방에 있는 냉각조에 잠긴 장치가 떠올랐다.

그것이…, 그럼 그것이…, 그것이 자신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그리고 선반에 나열된 표본, 죽은 태아들이 형제? 그렇게나 많이, 마치 물건처럼 진열되고 버려진 것이…. 눈 앞에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나였을지고 모른다고?'

그런, 그런 일이!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독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라우의 말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인류의 꿈…. 성공체…. 만들어진 것….'

"키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닥에 떠밀린 상태였고, 총성의 잔향이 고막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키라를 밀쳐 낸 무우가 몸을 일으키고 라우에게 응사했다. 키라도 느릿 느릿 일어 섰다.

'광기 어린 꿈…. 그것이 자신?'

몸을 지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방비하게 우뚝 선 키라를 무우는 물건 뒤로 밀쳐 낸 후, 라우를 노리고 몇 발 쏘았다. 그리고 반응이 없는 키라의 팔을 잡고 안에 있는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정신 차려, 바보! 놈의 허황된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면 어떡해?!"

책상 뒤로 뛰어 든 후 한 손으로 키라의 몸을 흔들고 나서 무우는 권총의 탄창을 교환했다. 무리해서 움직인 탓에 상처가 벌어져 괴롭게 어깨를 들썩였지만, 그런 무우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키라는 멍청히 앉아 있었다.

"난 지금 나의 비밀을 밝히도록 하겠다."

연기하는 듯한 말과 함께 한 계단 씩 계단을 내려 오는 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말…. 퍼스트 코디네이터라 불린 조지 그렌의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제기랄! 저 녀석…. 이 봐, 키라!"

무우는 낮게 욕설을 퍼부은 후 키라의 몸을 다시 흔들었다. 하지만 키라는 멍해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수정란 단계에서 인위적인 유전자 조작을 받고 태어난 자…. 인류 최초의 코디네이터 조지 그렌…."

라우는 쿡쿡 웃으면서 계단을 다 내려 오자 조명 스위치로 손을 뻗었다.

"놈이 초래한 혼란이 그 후 어디까지 그 어둠을 확산시켰다고 생각해?"

그 손이 하나의 스위치를 켜자, 플로어 한 쪽이 밝아졌다.

"그 후 사람들이 대체 무엇을 시작하고 말았는지 알아?"

고양이가 사냥감을 가지고 놀듯 라우는 하나씩 하나씩 불을 켜 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몰아 붙이는 듯한 말은 멈추지 않았다.

"여러 가지 용모, 여러 가지 재능이 돈만 있으면 모두 자신의 것이 되었어. 마치 장식품처럼….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식의 용모와 재능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렇다. 사람들은 보다 많은 것을 바랐다.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 받을 자식에게 자신이 다다르지 못한 정상으로 가는 티켓을 맡겼다.

"하지만 꼭 성공하는 것 만은 아니었어."

모태의 영향에 의한 결함, 모태와의 부적합, 조산, 유산…. 그것들은 아무리 유전자를 조작해도 응당 생길 수 있는 오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돈을 주고 산 꿈인데, 누구든 이루고 싶었겠지. 누구도 부수고 싶지 않았겠지."

그리고 그런 오류를 해소하는 방법을 고안한 남자가 있었다. 살아 있는 모태야말로 최대의 불확정 요소이고, 태아에게 불안정안 환경이다. 그렇다면 항상 안정되어 있는 환경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주면 된다. 라우의 목소리가 극적으로 높아졌다.

"그래서 시도한 건가?! 그것을 꿈이라 생각하고 이루기 위해?"

남자의 이름은 유렌 히비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키라를 낳은 아버지였다. 그는 수 없이 많은 실험을 반복한 후, 마침내 자신과 아내의 수정란으로 마지막 실험에 나섰다.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 받을 후손을 최고의 코디네이터로 만들어 내기 위해…. 두 개의 수정란 중 하나를 아내의 태내에 남긴 것은 실험에 반대하는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무엇을 손에 넣었지?! 그 손에! 그 꿈의 끝에서!"

라우는 거칠게 물었다.

"알고 싶어 하고, 가지고 싶어 하더니 이윽고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잊고, 생명을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가지고 놀다가 이제는 서로를 죽이고 있어!"

─좀 더… 좀 더 멀리… 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좀 더 앞으로….

아버지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최고의 코디네이터?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한 인간? 그럼 완벽이란 무엇인가? 완벽해지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따뜻한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기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신을 행복하다고 느낄까? 시체의 산에서 만들어진 생명이 그것들 모두와 맞바꿀 수 있는 것일까?

"헛소리 마!"

무우는 외치고 나서 총을 쏘며 책상 뒤에서 뛰쳐 나왔다. 달리는 그의 모습을 쫓아 라우가 자포자기 식으로 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선반에 나열된 약병을, 실험 기재를, 벽에 있는 모니터를 잇달아 파괴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손에 넣든 변하지 않아!"

라우는 그 냉정한 표정과는 반대로 손을 헐떡거리고 머리카락 끝에서 땀방울을 뿌리며 웃었다.

"정말 대단해, 인간은…!"

보다 좋은 것을 인간은 바랐다.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을 만들어 냈던가? 새로운 편견, 새로운 차별, 새로운 대립…. 그리고 지금의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 전쟁.

"그래서 시기하고, 증오하고, 서로를 죽였어!"

그것이 인간의 본질일까? 그 어떤 능력을 얻어도 그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일까? 시기, 증오, 살인…. 그것들은 오랜 옛날부터 항상 짊어져야 했던 인류의 숙제가 아니었던가. 라우는 크게 외쳤다.

"그렇다면 실컷 싸우도록 해라! 그것이 소원이라면!"

인간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키라는 절망감에 가슴이 막힌 채 생각했다.

'그럼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일까?'

기둥 뒤에서 무우가 외치며 총을 쏘았다.

"너 따위가 뭐가 잘나서 그런 소릴 하는 거냐!"

총탄이 라우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라우는 갑자기 총구를 위로 겨누고 천장에 걸려 있는 거대한 조명을 쏘았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파편이 주위에 흩어졌다. 그 소리에 그제야 키라는 정신을 차렸다.

"나에게는 있어! 이 우주에서 오직 나에게만!"

파괴의 중앙에 선 라우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모든 인류를 심판할 권리가!"

권리? 키라는 그 말에서 석연치 않은 것을 느끼고 그 쪽을 쳐다 보았다.

"까불지 마, 이 자식!"

무우가 욕설을 지껄였다. 하지만 돌아온 말에 그 역시 말려 들었다.

"기억 못 하나 보군, 무우. 나와 너는 오래 전…, 전장에서 만나기 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뭐라고?"

무우는 미심쩍은 눈으로 엄폐물 뒤에서 라우를 쳐다보았다. 키라도 몸을 내밀고 두 사람 쪽을 살폈다. 얼어 붙는 듯한 미소를 떠올리고 라우는 큰 소리로 알려 주었다.

"나는 자신의 죽음조차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자…, 네 놈의 아버지 알 다 프라가의 실패한 복제 인간이니 말이야!"

─나는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뭐…?!"

예상도 못했던 그 말에 무우가 침묵했다. 키라도 깜짝 놀라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복제 인간…. 그것은 다시 말해 라우가 무우의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동일 유전 정보를 가진 분신이라는 뜻이다.

"아… 아버지의 복제 인간이라고…? 그런 허황된 이야기를 누가 믿을 것 같아?!"

무우는 격한 어조로 부정했지만, 그 목소리는 동요로 인해 흔들렸다. 라우가 비꼬듯 대답했다.

"나도 믿고 싶지는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야."

복제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히비키 박사는 연구 자금을 대가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우수한 후손을 바라는 알 다 프라가의 제의를 받아 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라우 르 크루제…. 현재는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는 남자였다.

"곧 마지막 문이 열린다! 내가 연다!"

끝없는 증오심을 담아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남자가 외쳤다.

"그리고 이 세상은 끝난다. 이 끝없는 욕망의 세계는…."

그의 발은 무우가 몸을 숨기고 있는 기둥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키라는 자신이 어느 틈엔가 권총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그 곳에서 발버둥 치는 잘난 놈들의 바람대로 말이야!"

"무우 씨!"

키라는 옆에 떨어져 있던 날카로운 금속을 집어 들고는 무우에게 총을 겨눈 채 다가가는 남자를 향해 달렸다. 라우가 튕기듯 이 쪽으로 총구를 겨누고 연사했지만 키라의 순발력을 따라 잡지는 못했다.

"그렇게…!"

키라는 소리치며 집어 든 슴속편을 집어 던졌다.

"놔 둘 것 같아?!"

"키라!"

무우가 쏘고 라우가 쏘았다. 라우가 쏜 총알은 키라의 파일럿 슈트를 스치고 날아갔고, 무우의 총알은 라우를 스쳤다. 그리고 키라가 집어 던진 금속편은 은색으로 빛나는 마스크에 맞고 그것을 날려 버렸다. 금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한 순간 라우는 비틀거렸다. 그리고 증오로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 보았다. 마스크 뒤에서 드러난 얼굴을 본 순간, 키라와 무우는 숨을 삼키고 얼어 붙었다.

'후손'이라고 했으니 라우의 연령은 무우와 별 차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 앞에 무우와 비슷한 파란색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조소를 짓고 있는 그 얼굴은 깊은 주름이 여러 겹 잡혀 있어서 마치 노인처럼 보였다. 키라는 그제야 그의 증오를 이해했다.

"…흥! 너희들 만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라우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흘리며 발길을 돌렸다.

"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 우주를 뒤덮은 증오의 소용돌이는!"

"거기 서…!"

뒤를 쫓으려는 무우는 기둥 뒤에서 비틀비틀 뛰쳐 나오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의 안색은 창백해졌고, 어깨와 옆구리의 출혈은 심각했다. 키라는 그 쪽으로 가면서도 달려 가는 남자의 웃음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것은 휑한 건물 안에 메아리 쳐서 마치 이 폐허에 사는 악령의 목소리 같았다.

 

 

"거리 120에 나스카 급 세 척입니다."

데블리 뒤에 숨어서 콜로니로 접근하는 도미니온의 함교에서 오퍼레이터가 보고했다. 나탈은 한숨을 쉬고 마치 무중력을 즐기듯 자신의 앞에서 부유하며 창 밖의 풍경을 보고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를 쳐다 보았다.

"이래서는 먼저 움직이는 쪽이 불리합니다. 부디 제 의견을 들어 주십시오."

"음?"

나탈의 짜증 섞인 말을 듣고 아즈라엘은 의아한 듯 돌아 보았다.

"여기서 원군을 요청하고 기다리거나, 일단 후퇴한 후 진용을 정비하고 다시 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찬찬히 설명하는 나탈의 말을 가로막고 아즈라엘은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당신도 참 끈질기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자프트에게 당하고 말잖아요."

빤한 사실을 설명하는 듯한 그의 어조에 나탈은 짜증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제안한 것은 정론이고 아즈라엘의 의견은 상황을 무시한 제멋대로 된 바람에 불과하다. 기다리고 있다가는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므로 기다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어떻게 공격하든 질 게 분명한데, 싸우면 이길 수 있고 이기는 것이 나탈과 다른 승무원들의 의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 곳에 그가 원하는 물건이 있으니까. 완전히 어린 아이의 논리다. 그런데도 상대는 마치 뭘 모르는 것이 이 쪽인 것처럼 이야기하니 화가 치밀었다.

"무리를 무리라고 말하는 건 누구든 할 수 있어요."

아즈라엘은 더욱 나탈의 신경을 거스르는 듯한 득의양양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해 내는 것이 우수한 인물…. 이게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상식인데 말이죠."

마치 그가 속해 있는 세계가 군 조직보다 뛰어나다는 투의 말에 나탈은 반론을 제기했다.

"이 곳은 전장입니다. 실패는 죽음을 의미한다고요!"

"비즈니스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혹시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싸움 밖에 안 하는 타입입니까?"

갑자기 날카롭게 찔러 오자 나탈은 반박할 말을 잃었다. 아즈라엘은 그녀가 침묵하자 관심을 잃은 듯 눈을 앞 쪽으로 돌렸다.

"그것도 좋지만, 중요할 때 힘을 내지 않으면 승자는 될 수 없답니다."

그것은 확실히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 남자는 주위에 연막을 둘러 치고 자신의 의지를 밀어 붙여 왔음에 분명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어느 정도의 명석함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나이에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다.

"계속 이 상태로 있을 수는 없어요. 놈들의 준비도 갖춰질 테니. …분발하시길."

논의는 끝났다는 듯 아즈라엘은 말했다. 나탈은 괴로운 얼굴로 침묵했다. 결국 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호령했다.

"도미니온, 발진한다!"

 

 

"…키라까지 너무 늦어!"

얼마 전부터 조바심을 내던 아스란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함교에 보고했다.

"저스티스, 출격한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아스란은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세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듣고 아스란은 놀라 모니터를 쳐다 보았다. 그 곳에는 라크스가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3기 모두 돌아오지 않는 건…."

불만을 드러내며 반론하는 아스란에게 라크스는 차갑다고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더 이상 섣불리 전력을 분리시킬 수 없어요.」

아스란은 입술을 깨물고 침묵했다. 그런 그에게 라크스는 슬픈 표정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설령 키라 일행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우리들은 싸워야 하니까요.」

"…알았어. 미안해."

라크스도 키라 일행을 걱정하는 마음은 아스란과 같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애써 불안을 억누르고 합리적인 판단을 우선하고 있는 것이다.

아스란은 자신의 짧은 생각을 후회했다. 그리고 얼마 후 라크스가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각 함의 함교에서 멘델로 다가오는 열원이 센서에 관측되었던 것이다.

「도미니온, 옵니다! 거리 50, 그린 브라보!」

각 함 승무원들 사이에 긴장이 일었다. 전투 배치를 알리는 함 내 방송과 경보음이 항구 안에 울려 퍼졌다. 일단 손상된 부분을 응급 처치한 아크 엔젤과 쿠사나기가 발진했고, 최종 조정을 마친 이터널도 이번에는 그 뒤를 따랐다. 모빌 슈트 부대는 그들 함에 앞서 항구를 뛰쳐 나갔다.

도미니온에서 이미 발진해 있던 전의 그 3기가 쇄도하고 있었다. 아스란은 M1 부대를 돌아 보며 명령했다.

"너희들은 함을 지켜!"

「라져!」

아사기 일행이 대답하자, 아스란은 저스티스로 적 모빌 슈트의 습격에 대비했다. M1=아스트레이는 이 기체들에게 대응할 수 없다.

'키라…!'

아스란은 괜찮다고 말하고 가 버린 친구의 안부를 걱정하다가 곧 그럴 상황이 아닌 것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다. 저스티스는 단독으로 어떻게든 3기의 적 모빌 슈트를 억눌러야 한다. 키라 일행이 돌아 올 때까지는. 출항한 아크 엔젤이 사정 거리까지 접근한 도미니온을 향해 주포와 미사일을 쏘았다. 도미니온도 마찬가지로 응사했고, 아크 엔젤의 뒤를 따라 이터널과 쿠사나기도 포격을 개시했다. 아스란 역시 캐러미티가 쏜 빔을 피하고 3기와의 전투에 돌입했다. 키라 일행은 분명 돌아 온다. 그렇게 믿고 지금은 이 국면을 타파하는 수 밖에 없다. 자신들은 아직 여기서 당할 수 없기에….

갑자기 먼 곳에서 희미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더니 이자크와 디아카가 서 있는 지표면이 진동했다. 두 사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중단되었던 전투가 재개된 것이다. 주어진 만남의 시간이 끝난 것을 두 사람 모두 알았다. 이자크의 통신기에서 잡음에 섞여 상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자크, 들리나?! …후퇴한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틈에 디아카는 발길을 돌려 자신의 기체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자크는 당황해서 총을 겨누었다. 디아카는 어깨 너머로 돌아 보다가 자신에게 겨누어진 총구를 발견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자프트 외에는 모두 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이자크가 쏠 것으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확실히 이자크는 쏘지 못했다. 디아카가 뭐라고 하건 그는 탈영병에 배신자다. 그런 상대를 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상대를 이자크는 쏠 수 없었다. 그는 괴롭게 소리쳤다.

"속고 있는 거야, 넌!"

디아카의 말은 뜬구름 잡는 헛소리다. 겨우 세 척의 함으로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채 전쟁을 끝내다니…. 이자크 역시 내츄럴 모두를 죽이고 승리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지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어리석은 행위로 치달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디아카의 대답은 야유였다.

"글쎄, 어느 쪽일까, 그건…?"

'내가 속고 있다는 말인가?!'

이자크는 그를 노려 보았다. 그것 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만 가 봐야겠어."

디아카는 끝으로 씁쓸하게 말했다.

"가능하면… 너와는 싸우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그리고 사다리를 타고 조종석으로 올라갔다. 적이 된 것은 그 쪽이면서 자기 멋대로만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과연 '적'인 것일까?

이자크는 디아카의 모습이 해치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동요하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지켜 보았다.

"데블리 뒤에 숨어서 뒤 쪽으로 돌아 가!"

아크 엔젤의 함교에서 마류가 지시했다. 콜로니 멘델 주변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스카 급은?!"

사이가 계기판을 보고 아까와 같은 대답을 했다.

"여전히 움직임은 없습니다!"

자프트 함의 존재는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눈 앞의 도미니온보다 오히려 그 쪽이 더 위험하다. 그런 만큼 도미니온과의 전투를 빨리 끝내고 싶지만 키라 일행의 부재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때, 애타게 기다리던 보고를 밀리아리아가 들뜬 목소리로 해 왔다.

"함장님! 프리덤입니다!"

모니터에 멘델을 나온 모빌 슈트의 모습이 비쳤다. 프리덤과 스트라이크, 그리고 버스터까지 확인되자 마류는 한 순간 어깨에서 힘을 뺐다. 하지만 곧바로 들어온 키라의 통신에 그녀는 다시 심장이 멎는 긋 했다.

「무우 씨가 부상을 입었어요!」

"뭐?!"

그 순간, 마류는 그만 지휘관이라는 위치도 잊고 연인에 대한 걱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키라, 내가 갈게.」

프리덤이 끌고 온 손상된 기체를 버스터가 다가가서 부축하자, 키라는 스트라이크를 맡기고 날아갔다. 그 쪽에는 3기를 상대로 아까부터 고전하고 있던 저스티스가 있었다.

「이 봐. 괜찮아, 아저씨?」

「혼자서 내릴 수 있어, 바보! 늙은이 취급 하지 마!」

디아카가 걱정스럽게 말을 걸자, 무우가 곧바로 반발했다. 반발할 기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류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다시 전투에 주의를 기울였다.

같은 시각, 콜로니 반대편에서는….

베사리우스 함교에서 아데스가 시계를 곁눈질하며 지휘관의 복귀를 안절부절 못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머리와 두 다리를 잃은 게이츠와 그것을 껴안고 있는 형상의 듀얼이 돌아왔다. 착함하여 기체의 전원을 끄는 시간도 아깝게 느끼면서 이자크는 급히 조종석을 뛰쳐 나와 게이츠로 향했다. 기체를 회수했을 때 라우는 이미 조종석에 있었고, 서둘러 귀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목소리가 어딘지 괴롭게 들렸기에 이자크는 상관이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닐까 해서 안절부절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달려가 보니 조종석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자크는 당혹스럽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라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휘를 하기 위해 급히 함교로 달려 간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조종석에서 통신으로 지시를 내리는 편이 빠를 텐데. 언제나 그의 침착한 태도 밖에 본 적이 없는 이자크로서는 왠지 위화감을 느꼈지만, 어쨌거나 그렇다면 부상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우선 안도했다. 안심한 순간, 아까의 해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나서 이자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적…. 디아카가 적….'

도저히 머리가 그 개념을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스란과 라크스조차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좀 더 친했던…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던 친구가…. 동시에 그는 디아카의 표정과 분위기에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무게감을 느꼈다. 헤어져 있는 동안 디아카는 변한 것이다. 이자크는 홀로 남겨진 듯한 공허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녀석들이 가 버렸는데 나까지 싸움을 포기한다면 누가 플랜트를 지킬 것인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지구 연합군은 빅토리아에서 우주로 속속 병력과 물자를 보내고 있다. 싸우지 않으면 놈들에게서 플랜트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플랜트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자프트에 들어 온 것이기에….

돌연 방으로 뛰어 들어 온 남자를 프레이는 놀라 쳐다 보았다. 라우는 똑바로 책상으로 달려 가더니 낮게 신음하며 서랍 속을 뒤졌다. 이윽고 여느 때의 그 약병을 찾아 내자 게걸스럽게 약 캡슐을 삼켰다. 그 동작과 계속 이어지고 있는 흐느낌 같은 웃음 소리가 너무나 짐승처럼 느껴져서 프레이는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언제나 단정하고 차가우며 기계적일 정도였던 이 남자가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다. 고개를 숙인 얼굴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서 그 표정을 살필 수도 없다. 불현듯 프레이는 그가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에는 다가가서 들여다 보려고 했다. 라우는 잘 때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쭉 있었는데도 그녀는 그의 맨 얼굴을 본 적이 없었기에 공포를 호기심이 이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라우는 다른 서랍에서 잽싸게 예비용 마스크를 집어 들고 거친 동작으로 그것을 썼다. 그리고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마치 덮치듯 책상 위의 통신기를 켰다.

"아데스!"

「대장님! 어떻게 되신….」

조급하게 묻는 아데스의 말을 끊고, 라우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바른 어조로 명했다.

"베사리우스를 발진시킨다! 모빌 슈트 부대 출격 준비! 호이징거와 헬더린에도 그렇게 타전해라!"

「하지만 대장님….」

전에 없이 서두르는 상관의 어조를 미심쩍게 생각한 아데스가 되물으려 했지만, 그런 그를 라우는 호통 쳤다.

"이대로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그 기체를 지구 연합군의 손에 넘길 수는 없어!"

「그건….」

아데스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라우가 이렇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나도 나간다. 시그를 준비 시켜라! 바로 함교로 올라 가겠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명령만 내린 후, 라우는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책상에 손을 얹어 몸을 지탱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건가? 불안하게 쳐다보는 프레이에게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몹시 기쁘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상식을 초월한 것처럼 보여서 프레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 이제… 너도 좀 도와 줘야겠어."

'돕는다고…? 뭘?'

말 없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 프레이를 쳐다 보며 라우는 속삭였다.

"마지막 도박이야. 문이 열리느냐 마느냐 하는…."

그 손이 책상 서랍에서 한 장의 디스크를 꺼냈다. 그 디스크는 프레이의 눈에 익었다. 열쇠…라고 라우가 말했던 물건이다.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열쇠…. 무심코 뚫어지게 디스크를 쳐다보는 프레이에게 라우는 이번에는 약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제 지쳤어. 그러니까 전해 줘, 마지막 문의 열쇠를…."

놀랍게도 라우는 프레이의 손을 잡고 디스크를 쥐어 주었다.

"예…?"

'내가…?'

"그게 지구군의 손에 넘어가면 전쟁은 끝날 거야."

자신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던 프레이는 그 말에 흠칫했다. 그 말대로 라우는 매우 지쳐 보였다. 프레이의 가슴 속에 동정심이 샘솟았다.

'이 사람도 이제 전쟁 따위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녀가 디스크를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이자, 라우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키라는 3기의 'G'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저스티스에게 서둘러 달려갔다.

"아스란!"

「키라!」

아스란이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프리덤이 날개에 있는 빔 포를 쏘자, 저스티스를 노리고 있던 캐러미티가 직전에 눈치 채고 뒤로 물러 섰다.

키라는 빔 사벨을 뽑아 들고 잇달아 발사되는 빔을 피하면서 캐러미티에게 접근했다. 레이더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서 머리에 있는 빔 포 '존'으로 저스티스를 노렸고, 포비든이 쏜 빔은 호를 그렸다. 2기에게 협격 당한 저스티스를 엄호하기 위해 버스터가 초고 임펄스 장거리 저격 라이플을 쏘았다.

─인간은 무엇을 손에 넣었지? 그 손에! 그 꿈의 끝에서!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태어난 남자의 고발이 키라의 귓전에 되살아 났다.

─알고 싶어 하고, 가지고 싶어 하더니 이윽고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잊고, 생명을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가지고 놀다가 이제는 서로를 죽이고 있어!

여기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의 업보이고 죄인 것이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이건 하는 일은 변함이 없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손에 넣든 변하지 않아!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일까? 시기, 증오, 살인…. 그것이 인간이 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들이 지향하는 미래는? 싸움이 없는 세계 따위는 본래 있을 수 없고, 바랄 수 없는 것일까? 싸우면서도 키라의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존재는 그 남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범주를 뛰어 넘은 걸까?'

왜, 왜! 왜… 아버지는 이런 자신을 이 세상에 낳은 것일까? 바라지 않았다. 이런 것 따위는 하나도 바라지 않았다. 보다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도, 그저 증오하고 서로를 죽이기만 하는 미친 세계도…! 밀려 오는 절망감에 압도되면서도 그는 적의 공격을 피해 날아 다니며 들고 있는 무기로 계속 싸웠다.

"나스카 급입니다! 거리 80, 블루 델타!"

우려하고 있던 사항을 사이가 보고했다. 세 척의 자프트 함이 마침내 진격을 시작한 것이다. 아크 엔젤, 이터널, 쿠사나기의 승무원들이 새로운 적에 긴장했다. 그 때, 갑자기 접근하는 자프트 함에서 모든 주파수로 통신이 보내졌다.

「지구 연합군 아크 엔젤 급에 고한다.」

마류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유들유들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터널에 항복 권고라도 하는 거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도미니온에게 무엇을 고할 것이 있단 말인가?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 본 함에서 구류 중인 포로를 송환하고 싶다.」

지금 이런 곳에서? 마류는 그들이 그것을 이유로 휴전이라도 요구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자프트 함은 진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게다가 모빌 슈트 부대까지 사출했다. 이렇게 전투가 한창인데 포로의 송환이 가능할까?

"모빌 슈트가 옵니다! 열 패턴 조합. 진 12, 듀얼, 시그! 마크 18 델타!"

"큭…!"

기묘한 포로 송환 따위는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아크 엔젤, 이터널, 쿠사나기는 도미니온과 자프트 함 사이에 끼어 있는 상태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발트펠드 함장님!"

통신으로 부르자, 발트펠드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이터널과 쿠사나기로 요격하겠다! 아크 엔젤은 도미니온을.」

"알겠습니다!"

두 척은 선회하여 자프트 함과 그 곳에서 발진한 모빌 슈트 부대 쪽으로 향했다.

"내가 나가면 포드를 사출해라."

그 말을 남기고 라우는 시그를 발진시켰다. 그의 명령에 따라 베사리우스의 후부 해치에서 하나의 탈출용 포드가 사출되었다. 비좁은 1인용 포드 안에는 프레이 알스터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떨면서 모니터에 비친 전투의 양상을 지켜 보았다. 가까운 곳에서 전함들과 모빌 슈트들이 서로를 쏘고 있고 미사일이 작렬했다. 라우에게서 '도와 달라' 는 말을 들었을 때는 설마 이런 일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는 그녀의 탈출 포드는 너무도 작고 힘 없는 존재였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아서 이 곳에 유기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유탄을 맞고 죽지는 않을까. 그녀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불현듯 빗발치는 총탄들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함을 발견한 프레이는 눈을 크게 떴다.

'아크 엔젤…!'

그렇게나 돌아가고 싶다고 바랐던 함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그럼에도 프레이는 그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공포와 절망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으면서도 필사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신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아크 엔젤…!"

'무서워! 무서워! 여기서 내보내 줘! 돌아가고 싶어! 난 저 함으로 돌아가고 싶어!'

어떻게 조작해야 되는지 알 수 없는 통신기의 버튼을 마구잡이로 누르며 프레이는 계속 외쳤다.

"부탁이야, 아크 엔젤!"

"발트펠드 함장님."

잠시 묵묵히 전투의 양상을 지켜 보던 라크스가 입을 열자, 발트펠드는 돌아 보았다. 연합과 자프트, 그리고 그들의 모빌 슈트가 교차하며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아크 엔젤은 도미니온, 이터널과 쿠사나기는 베사리우를 비롯한 두 척의 자프트 함과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어서 주위는 혼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쿠사나기와 함께 모든 공격을 베사리우스에 집중시키세요."

발트펠드는 무심코 이 연약한 소녀의 입에서 나온 냉정한 명령에 눈을 크게 떴다.

"저 함을 돌파해서 현 구역을 이탈합시다."

그 말에 오퍼레이터 석에 있던 타코스터가 놀라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됩니다! 그 쪽으로 갔다가는 세 척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된다고요!"

타코스터는 그녀를 전투에 관해서는 초보자라 생각해서 반론한 것이었지만, 발트펠드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돌파만 한다면 가장 추격 당할 가능성이 낮을 겁니다."

라크스의 대답에 발트펠드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 분홍색 공주님은 정말 대단한 혜안을 가지고 있다. 방향적으로는 도미니온을 돌파하는 편이 쉽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등 뒤에서 자프트 함의 공격을 받을 테고, 설사 이 구역을 이탈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추격을 따돌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자프트의 기함을 치고 그 곳을 돌파하면 일시적으로 자프트의 지휘 계통은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 후에도 구조 활동 등으로 발을 묶어 놓을 수 있다. 그리고 도미니온은 나머지 두 척의 자프트 함을 지나쳐서 이 쪽을 쫓을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목표는 같다고 해도 결국 양자는 적인 것이다.

"…흐음."

발트펠드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라크스에게 힐끔 미소를 보였다.

"그 작전으로 가 봅시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도미니온의 함교에서는 자프트 함에서 사출된 포드를 확인한 상태였다. 아즈라엘은 턱에 손가락을 댄 채 고개를 갸웃했다.

"쏘게 하고 싶은 건지, 회수하게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요. 함정 치고는 묘하고…. 어떻게 할 겁니까, 함장 씨?"

솔직히 나탈 입장에서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아크 엔젤에서 날아 온 격렬한 포격을 회피, 혹은 요격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그나저나 일방적인 통보만을 하고 이런 위험한 구역에 지켜 주는 것도 없이 그저 탈출 포드만을 투하하다니, 자프트는 무슨 의도와 생각인 것일까?

"정말 타고 있는 게 포로일까요?"

우군의 포로라면 어떻게든 회수하겠지만, 확실히 아즈라엘의 말대로 함정이 아닐 거라는 보장도 없다.

섣불리 손을 대는 것은 피하고 싶고, 또한 손을 댈 여유도 없다. 하지만 그 때 스피커에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크 엔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소녀의 목소리가 여러 곳에서 포착되었다.

「아크 엔젤! 나, 나 여기 있어요!」

"뭡니까, 이게?"

아즈라엘이 눈썹을 추켜 세우며 중얼거렸지만, 나탈은 그 목소리를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녀가 목소리의 주인을 맞히기도 전에 소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신을 알렸다.

「프… 프레이예요! 프레이 알스터! 나야…! 사이…, 마류 씨!」

소녀의 목소리에 겹쳐 오퍼레이터가 보고했다.

"자프트의 탈출 포드로부터 국제 구난 채널을 이용한 통신입니다."

'프레이 알스터?'

나탈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눈을 크게 떴다. 아크 엔젤도 마찬가지인지 두 진영 모두 일시적으로 포격이 약해졌다. 알래스카에서 함께 전속되었던 그 소녀에 대해서는 나탈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속지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결국 알래스카에서 죽었거나 아크 엔젤과 행동을 함께 하고 있을 거라고 지금까지 나탈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왜 자프트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일까?

"이 아이가 포로란 말입니까?"

아즈라엘이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린 애죠? …알스터?"

그도 그 이름을 들은 적은 있을 것이다. 나탈은 명령했다.

"캐러미티! 올가 사브나크 소위! 포드를 회수하라!"

"뭐라고요?"

옆에 있는 아즈라엘이 못마땅한 듯 소리쳤다. 나탈은 성가시게 생각하면서 설명했다.

"그녀는 타계한 조지 알스터 사무차관의 딸입니다. 서둘러라, 사브나크 소위!"

알스터 가문의 딸을 보호하는 것은 분명 공적으로 중요한 일이기에 나탈은 그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적인 이유로 그녀는 프레이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이런 때까지 참견하고 나섰다.

"아니, 그렇긴 해도! 그렇다고 함정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단호하게 반론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프레이가 기묘한 말을 입 밖에 냈다.

「여…열쇠를…! 열쇠를 가지고 있어요, 전!」

나탈은 처음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열쇠? 열쇠라는 게 뭐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열쇠….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탁해요!」

기묘하게도 갑자기 아즈라엘의 눈빛이 변했다.

"헤~에.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요."

놀라 돌아 본 나탈은 그가 입맛을 다시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열쇠라니…."

"그런 걸 그 쪽은 신용하는 겁니까?"

나탈이 어이가 없어서 묻자, 아즈라엘은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궁금하잖아요. 보통 그런 말은 안 해요.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열쇠'라는 말…."

그 말에는 나탈도 당황하고 있었다. 프레이는 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알래스카에서 헤어진 후 그녀는 어떤 운명을 거쳐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까?

"프…레이…?"

그 통신은 키라에게도 들렸다. 그는 조종석 안에서 멍하니 가슴을 찢는 듯한 프레이의 외침을 들었다.

'프레이…. 지구에 있는 줄 알았던 그녀가 어째서 이런 곳에…?!'

키라의 뇌리에 어제 갓 헤어진 것처럼 선명한 기억이 되살아 났다. 자신을 불러 세우기는 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안타깝게 제복 가슴 자락을 가녀린 손가락으로 잡고 있던 소녀의 모습이…. 나중에 듣겠다고 키라는 약속했다. 돌아 온 후에….

너무도 충격적인 상황에 그는 현실을 잊었고, 프리덤은 몇 초 간 무방비해졌다. 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 등 뒤로 접근해 있던 레이더가 존을 쏘았던 것이다. 빔은 정통으로 프리덤의 등에 명중해서 왼쪽 날개가 날아갔다.

「키라!」

친구의 위기를 눈치 챈 아스란이 소리쳤다. 피격의 충격을 정통으로 맞은 키라였지만, 모니터 안에서 캐러미티가 탈출 포드를 향해 가는 것을 확인하고 정신을 차렸다.

"프레이!"

키라는 남아 있는 버니어 스러스트를 모두 분사시켜 열심히 적기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미 캐러미티는 한 손으로 포드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대로 도미니온으로 귀환하려고 했다. 키라는 손상된 기체를 몰고 계속해서 그것을 쫓았다.

저 안에 프레이가 있다! 돌아 온 후에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꼭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키라! 그만 둬!」

아스란의 제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등 뒤에서 접근하는 두 기체의 모습도 캐러미티를 쫓는 것 밖에 머릿속에 없는 키라는 눈치 챌 리 만무했다. 포비든이 쏜 빔이 프리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장갑을 녹였고 PS 시스템도 태워 버렸다. 거의 동시에 레이더가 던진 파쇄구가 약해진 그 머리를 날려 버렸다. 조종석이 격렬한 충격에 흔들리며 모든 주위 모니터들이 일시 다운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키라는 추적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보조 카메라로 전환한 모니터 화면에 멀어져 가는 캐러미티의 모습이 보였다.

"프레이…. 프레이!"

「…레이. 프레이.」

본 적도 없는 모빌 슈트에 안긴 채, 멀어져 가는 아크 엔젤을 겁 먹은 표정으로 보고 있던 프레이는 잡음에 섞여 들려 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키라?"

그럴 리 없다. 키라는 죽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숨을 죽이고 최대한 귀를 기울였다. 모니터 화면에는 쫓아 오는 하얀 모빌 슈트가 비치고 있었다.

「프레이!」

"키라…! 이럴 수가…."

프레이는 무심코 양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번에는 분명히 들렸다. 틀림 없다. 키라다. 키라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키라가 살아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키라!"

프레이는 모니터 화면에 매달렸다. 이제야 만났는데!

그러나 전함의 해치가 열리더니 모빌 슈트와 함께 그녀의 포드를 삼켜 버렸다.

"키라, 키라!"

해치가 닫히며 완전히 시야가 차단될 때까지 프레이는 그 이름을 불러 댔다.

아크 엔젤에서 신호탄을 쏘았다. 철수 명령이다. 하지만 키라는 그것을 보고 있지 않는 듯 했다.

아스란은 계속해서 포드를 쫓으려는 프리덤에게 레이더가 접근하는 것을 깨달았다. 위기 일발의 순간, 그 사이에 끼어 들어 실드로 빔을 막았다.

"물러 나, 키라!"

시간을 벌기 위해 빔 부메랑을 던지며 그는 꾸짖듯 소리쳤다. 레이더는 그 공격을 피한 듯 보였지만, 길게 원을 그리며 돌아온 부메랑에 오른발이 파괴되었다.

"그 상대로 혼자 적 함으로 돌진할 생각이야?!"

위 쪽에서 포비든이 덮쳐 왔다. 아스란은 손상이 눈에 띄는 프리덤의 팔을 잡아 끌면서 우선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곧바로 버스터가 견제용 대장갑 산탄 포를 쏘았고, 그 틈에 두 기체는 이탈했다. 버스터도 곧바로 뒤를 따랐다. 프리덤은 더 이상 저스티스를 뿌리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이끌려 갔다. 통신기에서 키라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상처 입혔어! 내가… 지켜 줘야 하는 사람이야!」

키라의 목소리에 아스란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포드에 타고 있던 사람은 그만큼 키라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곳에서 도망치는 것이 선결 과제다.

「돌파한다! 라미아스 함장!」

발트펠드로부터 아크 엔젤 함교에 통신이 들어오자, 마찬가지로 프레이의 목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던 마류는 현실로 돌아 왔다. 헬리오 폴리스에 살았을 때부터 친구였던 사이와 밀리아리아도 이 갑작스러운 해후에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옆에는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무우의 모습도 있었다.

"그 애는 도미니온이 보호했어, 마류…."

무우가 재촉하자 마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니온에는 나탈이 있다. 그녀에게 맡겨 두면 괜찮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류의 마음 속에는 과거의 부관에 대한 강한 신뢰가 남아 있었다. 아크 엔젤은 앞서 가는 이터널과 쿠사나기를 따라 자프트 함의 대열로 돌진해 갔다. 이터널과 쿠사나기는 퍼부어지는 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포문을 열어 그것들을 중앙에 있는 베사리우스에 집중시켰다. 이터널의 주포와 쿠사나기의 고트프리트가 베사리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구역을 휩쓸었다. 적 함의 선체를 몇 줄기 빛줄기가 꿰뚫자, 이윽고 베사리우스는 대열에서 이탈해 갔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터널, 쿠사나기가 뻥 뚫린 공간을 최대 속력으로 통과했고, 아크 엔젤도 그 뒤를 따랐다. 아크 엔젤의 상부 갑판에 착함해 있던 저스티스의 조종석에서 아스란은 복잡한 심정으로 과거 자신의 모함이었던 함을 바라 보았다. 베사리우스는 몇몇 곳이 피격되어 기관부에 큰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격침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엇갈려 지나갈 때 함교에 서 있는 그림자가 보였기에 아스란은 깜짝 놀라 눈에 힘을 주었다. 함장 아데스였다. 그는 탈출하려는 기색도 없이 마치 이 쪽에 경의를 표하듯 직립 부동의 자세로 경례하고 있었다. 무심코 아스란의 손도 올라갔다.

「베사리우스….」

한숨 같은 디아카의 목소리에 그 역시 과거의 동료 함이 맞게 될 운명에 복잡한 심정을 곱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사리우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뒤 쪽으로 멀어졌고, 이윽고 등 뒤의 어둠이 거대한 폭발로 붉게 물들었다. 아스란은 경례 자세 그대로 그 최후의 광채를 지켜 보았다.

'이제 돌아 갈 수 없다.'

아스란 일행은 이리하여 처음으로 자신들이 잘 아는 존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셈이 되었다. 비록 모든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과거 동료였던 자의 피로 손을 물들이고 그 시체를 밟고 넘어가야 한다. 아스란에게는 그런 자신들이 너무도 모순된 존재로 생각되었다.

그래도 여기서 패배할 수는 없다. 시작한 것을 끝낼 때까지 그들에게 죽음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 광망(光芒)을 듀얼에 탑승해서 싸우던 이자크도 보고 있었다.

"베사리우스가…?!"

그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 빛을 쳐다보았다. 제８함대와 함께 침몰한 가모프의 최후가 그의 뇌리에서 되살아 났다.

"큭…!"

그는 굳게 주먹을 움켜 쥐었다. 아데스와 친한 승무원들,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적의 섬멸을 바랐던 정비병이 저 빛 속에서 사라졌다. 가모프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가모프와는 다르다. 저 함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을 쏜 것은 디아카, 아스란, 라크스, 발트펠드…. 그들의 동포들인 것이다.

'용서 못 해! 용서할 수 없어!'

이자크는 눈물을 참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기함의 격침에 다른 함과 모빌 슈트 부대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이 봐! 어떻게 하지? 베사리우스가….」

「추격은? 이터널을….」

「바보! 지구군에게 등을 보이는 꼴이 되잖아.」

통신 회선은 혼란에 빠진 병사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 때, 라우 르 크루제의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쪽도 철수한다. 잔존 부대는 델타 제로에 집결하라.」

"크루제 대장님…."

지휘관의 침착한 목소리를 듣자, 병사들의 동요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자크는 라우의 침착한 태도가 믿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지구군과 싸워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여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냉정한 목소리가 이자크의 신경을 거슬렸다.

라우는 어째서 태연한 거지? 지금까지 같이 싸워 왔던 동료들의 죽음에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건가? 속고 있는 것은 자신인가, 디아카인가?

증오와 의무감, 그리고 의혹에 이자크의 마음은 흔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병사와 함께 안에서 빨간 머리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탈은 함장석에 앉은 채 돌아 보다가 프레이 알스터가 자프트의 제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챘다. 자신이 원하던 모빌 슈트를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아즈라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 앞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헤~에, 네가?"

노골적인 시선에 노출되자, 프레이는 움츠러들었다. 아즈라엘은 그녀의 겁 먹은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갑자기 물었다.

"그래서? 열쇠란 게 뭐지? 정말 가지고 있는 거야?"

프레이는 조심 조심 소중히 가지고 있던 디스크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아즈라엘은 다짜고짜 그것을 가로채서 재미있다는 듯 살펴 보았다.

"흐음. 왠지 진짜 같은데? 누가 준 거지?"

"크…크루제 대장이오. 가면을 쓴…."

프레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나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이 소녀는 라우 르 크루제와 함께 있었던 건가?

"…흥. 그렇군."

아즈라엘이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인사도 없이 용건이 끝났다는 듯 함교를 뒤로 했다. 나탈은 그를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히 교육시켰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함장석에서 일어났다.

"…버질 중위님?!"

프레이는 그녀의 모습을 이제야 비로소 눈치 챈 듯 했다. 나탈은 그녀 답지 않게 기운을 북돋듯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프레이 알스터. 몸은 괜찮아?"

그녀가 말을 건 순간, 프레이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더니 울면서 나탈에게 안겨 들었다. 예기치 못했던 까닭에 나탈은 관성 그대로 뒤로 떠밀렸다. 프레이는 그녀의 가슴에 매달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소리를 내어 흐느꼈다. 보아 하니 학대를 받은 것 같지는 않지만, 자프트에 붙잡혀 있는 동안 어지간히 불안했던 것이리라. 나탈은 내심 당황했지만, 소녀를 위로하기 위해 허공에 뜬 채 어색하게 어깨를 안아 주었다. 이런 역할은 자신과는 잘 맞지 않는다. 아마 마류라면 잘 할 수 있겠지만.

그녀들은 모두 남겨진 자들이었다. 과거의 동료들은 모두 가 버리고, 자신들은 그들을 해치워야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소녀도 남겨졌던 것이다. 예전의 나탈이라면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며 일축했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매달리는 소녀의 체온에 약간의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응."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 옆에서 여자가 전화를 걸고 있다. 과거 어딘가에서 경험한 듯한 상황이다. 무우는 뚝뚝 떨어지는 링거 액을 보면서 생각했다. 비록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의무실 침대고, 그 여자가 한 척의 전함을 지휘하기 위해 함교와 통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흔한 일상을 연상시키는 광경이 그의 곤두서 있던 신경을 달래 주었다.

"다들 지쳐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래? 그럼 부탁할게."

마류는 통화를 끊고 침대 옆 의자에 놓여 있던 두꺼운 파일을 집어 든 후 그 곳에 앉았다.

"키라가… 쓰러진 모양이야. 이터널에 착함하자마자…."

무우는 생각을 중단하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건 아니라는데…."

마류는 안쓰러운 시선을 무릎 위에 있는 파일로 내려뜨렸다. 무우는 그 말에 안도하면서도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무리도 아니지."

키라에게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모르고 살아 온, 알아서는 안 되었던 출행의 비밀을 가장 충격적인 형태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프레이 알스터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재회…. 그렇다. 힘든 하루였다, 무우에게도….

파일을 연 마류는 무우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발견하고, 연인의 그런 사진을 발견한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듯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그 후 무우 일행은 멘델의 히비키 박사 사무실에서 가져온 파일을 읽었다. 그것은 학술적인 보고서라기보다는 히비키 박사가 매일 매일 적은 메모장 같은 것이었는데, 오히려 무우 일행에게도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었다. 거기에는 라우가 이야기한 것 이상의 사실이 적혀 있었다. 무우의 아버지 알 다 프라가가 아내, 다시 말해 무우의 어머니와 대립해서 그녀의 영향을 받고 자란 무우에게 불만을 품었다는 것 등….

프라가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온 명문 가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족은 투기나 사업에 이상할 정도의 감을 가지고 있어서, 프라가 가문이 붙은 쪽에 손해는 없다는 전설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져 온 재산을 맡길 사람으로 무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이윽고 자신 이상으로 어울리는 자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알은 이상적인 후계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히비키 박사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라우는 아버지 밑에서 어떤 식으로 자랐을까? 무우의 어머니는 아들을 자유분방하게 키웠고, 하인들의 아이들과 차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주종 관계와는 상관 없이 어울렸고, 무우도 외아들의 고독 따위는 느끼지 않고 즐겁게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방식을 몹시도 싫어했다. 따라서 라우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교육 방침 아래 자랐을 것이다.

라우는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어렴풋이 무우의 머릿속에 되살아 나는 광경이 있었다.

집 안에 처음 보는 아이가 있었다. 무우보다 두 살 아래인 그 남자 아이는 어느 틈엔가 무우의 뒤에 서서 창백한 얼굴로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사는 애니?' 라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무우만 쳐다보았다.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무우는 지금까지 자신이 꿈을 꾸거나 유령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어린 남자 아이에게는 표정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야…."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무우는 입을 열었다.

"교만하고, 제멋대로에 의심이 많았어. 내가 어릴 때 죽었지만, 그런 인상 밖에 없었지. 하지만…!"

그렇다. 아버지는 죽었다. 화재가 났던 것이다. 저택이 모두 불타 버릴 만큼 큰 불이었다. 그 화재로 무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 방화의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범인은 붙잡히지 않았다. 무우는 뒤늦게 불쾌한 전율과 함께 깨달았다.

'그 녀석이 한 짓이다.'

멋대로 자신을 만들어 내고 그 후 버리고 간 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믿어져?! 이런 게…!"

마류는 그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어째서… 이런…!"

무우는 고개를 돌리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내뱉었다. 라우는 버림 받았다. 그가 '실패작'이었기 때문이다. 유전자에는 테로메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세포가 만들어지고 유전자가 복제될 때마다 짧아져서, 이윽고 생물이 늙음과 함께 테로메아가 줄어 든 유전자는 재생 능력을 잃는다. 예전부터 복제에 수반되는 문제점 중 하나로 거론되었던 이 테로메아 문제를 히비키 박사도 극복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무우의 아버지 알 다 프라가의 체세포로 만들어진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알과 같은 길이의 테로메아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우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고령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였다. 즉, 아버지는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과 같은 수명 밖에 남지 않은 자를 얻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란 말인가.

그나마 아버지는 괜찮다. 터무니 없는 실수를 했다고 투덜대고, 불만스러웠던 아들에게 주의를 되돌리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실수를 그 삶 자체에 짊어진 자는 그 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마스크 뒤에서 나타난 얼굴은 말 그대로 무우의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이랬을 거라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저택이 불타 버린 후, 무우는 친척집에 맡겨졌다. 라우가 그 후 어떤 경위를 거쳐 플랜트로 가서 코디네이터인 양 행동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경위가 평범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당신 탓이 아니야, 무우."

마류가 속삭이며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해 준 것이 기뻤다.

"녀석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어쩌면 자신조차 없어."

증오. 라우의 마음 속에는 증오 뿐이다. 아버지를, 무우를, 자신을 만들어 낸 자들을 증오하고, 인류 그 자체를 부정하며, 결국에는 자신조차 부정한다.

"그래서… 세계와 동반 자살한다는 거야?"

마류의 목소리에는 공포보다는 연민이 담겨 있었다. 무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키스를 했다.

"그렇게 놔 두지는 않겠어, 내가."

그렇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해도 무우에게는 의무가 있었다. 무서운 재앙의 씨앗을 만들어 낸 자의 아들로서….

 

 

눈을 떠 보니 낯익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라크스, 아스란, 카가리…. 어느 얼굴이나 키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존재다.

"키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라크스의 얼굴이 다가왔다. 다음 순간, 그 얼굴은 다른 소녀의 것과 겹쳐서 키라는 되살아 난 아픔에 굳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굉장히 아팠다. 증오로 가득 찬 남자의 외침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인간은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 것일까?

다시 눈을 떴을 때 키라는 일단 자제심을 되찾은 상태였다. 모두를 걱정 시켜서는 안 된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라크스가 거들어 주었다. 그 손의 자상함조차 애절했다.

"미안…. 고마워…."

미소 지으려 했을 때, 카가리가 무언가 묻고 싶은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손에서 두 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웃으려던 키라의 얼굴이 얼어 붙었다. 한 장은 카가리가 우즈미에게서 받은 것, 그리고 다른 한 장은 그 연구실에서 가져온 액자의 것이었다.

"키라…."

카가리가 입을 연 순간, 키라는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돌렸다. 귀를 막고 싶다. 물어 오면 대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들은 어머니의 태내에서 억지로 분리된 쌍둥이다. 아버지는 나를 실험의 소재로 선택했다. 나는 기계에서 태어난 최고의 코디네이터다, 라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아마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블루 코스모스의 표적이 되어 죽었다는 것을. 키라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라크스와 아스란은 시선을 교환한 후, 아스란이 말 없이 카가리의 손을 잡고 나갔다. 방에는 라크스와 키라만 남았다.

"키라…."

라크스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키라에게는 그것조차 괴로웠다. 자신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저 곁에 있는 온기에 매달리다 그 때문에 언젠가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프레이처럼….

'어쩌면…, 나는 태어나선 안 될 존재였을까?'

깊은 절망감에 빠지면서도 키라는 애써 라크스에게 미소 지으려고 했다.

"괜찮아…."

매달려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누구도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난… 이제 울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

이빨 사이로 간신히 쥐어 짜듯 말하자, 라크스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울어도 돼요."

그리고 부드럽게 키라의 머리를 껴안았다.

"…인간은 울 수 있는 존재니까."

그 말이 키라의 마음을 감쌌다. 키라는 신음했다. 눈물이 샘솟으며 흘러 넘쳤다. 키라는 삐걱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라크스에게 매달렸다.

"키라에게는 슬픈 꿈이 너무 많아요."

라크스는 키라를 꼭 끌어 안으면서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이 전부예요."

라크스에게는 아무 것도 감출 필요가 없다. 그녀는 변하지 않는다. 그저 그 곳에 선 채, 있는 그대로의 키라를 받아 들여 준다. 모든 것이 힘 없이 허공에 떠서 자신의 존재조차 희박하게 느껴져도 그녀만은 대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만큼 확실히 키라의 존재를 긍정해 준다.

인간은 울 수 있다. 우는 것에 의해 슬픔과 고통을 씻어 버리고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래서 키라는 방금 세상에 태어난 아기처럼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도미니온의 자기 방에서 아즈라엘은 컴퓨터를 열었다. 그 손에는 방금 전 프레이에게서 받은 디스크가 있었다. 그는 그 디스크를 컴퓨터에 넣고 읽어 들였다. 이윽고 그 앞에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나타났다. 크루제의 이름을 듣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것은 아즈라엘이 원하던 것이었다. 언제나 그 남자는 그가 가장 원하는 정보를 준다. 그것은 프리덤과 저스티스, 그 두 기체의 데이터였다. 아즈라엘은 정신 없이 키를 조작하여 계속해서 데이터 항목을 전환시켰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뉴트론 재머 캔슬러. 그 단어가 화면 안에서 빛났다. 아즈라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봐라! 난 언제나 옳다! 그 두 기체가 열쇠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누구냐? 다름 아닌 나, 뮬터 아즈라엘이다!'

"됐다~아아!"

그는 기세 좋게 일어나 승리의 외침을 울렸다. 경박한 웃음 소리가 혼자 뿐인 방에 울려 퍼졌다.

'이걸로 이 전쟁은 끝난다! 코디네이터들을, 그 더러운 녀석들을 한 놈도 빠짐 없이 해치울 수 있다!'

열쇠는 발견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마지막 문이 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