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4권- 강림한 검 :: PHASE.4 저스티스

"무슨 꼴이야, 이게!"

회의실은 처음부터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스크린에는 전날 궤멸된 파나마 기지가 비치고 있었다.

"JOSH-A가 성공했어도 파나마가 함락되면 아무 의미도 없잖아!"

그린 랜드로 이동한 지구 연합군의 새로운 사령부에서 연합의 수뇌진이 긴급 회의를 열고 있었다. 섬 지하에 있는 방의 일면은 내압 유리로 되어 있고, 그 밖은 흔들흔들 푸른 빛이 춤추는 바다 속이었다. 때때로 물고기 떼가 지나가는 창 밖의 풍경은 너무도 여유롭고 아름다워서 실내의 살벌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파나마 항의 보급로가 끊기면 달 기지는 금방 고갈되고 말아! 이래서는 반격 작전은 꿈도 못 꾸잖아!"

이번 파나마 함락으로 지구군은 우주로 가는 창구를 잃고 완전히 지구에 갇히고 말았다. 적지에 대한 발판인 달 기지는 지구로부터의 보급이 없으면 적의 공격이 없어도 자멸하고 만다.

"빅토리아 탈환 작전의 입안도 서두르고는 있지만… 매스 드라이버를 손상 없이 되찾으려면 역시 그리 쉽지만은 않아."

그들에게 남겨진 수단은 둘. 하나는 이미 자프트 측에 함락당한 우주항을 되찾는 작전인데, 구체적으로는 아프리카 남부의 빅토리아 항이 목표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브 쪽은 어떻게 됐지?!"

한 명의 수뇌가 몸을 내밀고 물었다. 그렇다. 그들은 매스 드라이버를 가지고 있는 중립국 오브에 우주 항을 내 놓으라는 교섭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담당자가 답답한 듯 고개를 저었다.

"재차 요청을 했지만 우즈미 나라 아스하 놈이 워낙 완고해서! …도무지 허락을 안 해 주는군!"

"이런, 이런…."

그 때까지 관심 없다는 듯 창 밖의 물고기 떼를 보고 있던 남자가 빙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립국이라서… 그런가요?"

중립이라는 단어를 너무도 깔보는 것 같은 어조로 말한 이 남자는 이 방에서는 가장 젊었다. 금발에 흰 피부를 가진 훤칠한 미남으로 30대 후반이라는 연령에 비해서도 젊게 보였다.

"안 되죠, 그러면. 다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인류의 적과."

그는 책상을 손 끝으로 두드리면서 끈적끈적한 어조로 말하다가 한 명의 수뇌에게 주의를 받았다.

"아즈라엘. 그런 말투는 삼가게. 우린 '블루 코스모스'가 아니야."

"이거 실례했군요."

남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양손을 펴고 사과했다. 그의 이름은 뮬터 아즈라엘. 이런 젊은 나이로 군사 기업을 경영하고 있고 지구 연합군의 군수 산업 연합 이사를 맡고 있는데, 그에게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각지에서 반 코디네이터 사상을 내세우며 로비 활동과 테러를 저지르는 '블루 코스모스'…. 그 단체의 실질적인 리더가 이 남자인 것이다. 그런 인물이 이런 자리에 태연히 있다는 것 자체가 방금 수뇌가 한 말을 우습게 느끼게 한다.

"하지만 어째서 다들 이런 때조차도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나라를 인정해 주려는 거죠?"

아즈라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제 중립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요?"

"오브도 엄연한 주권 국가 중 하나니 어쩔 수 없지."

수뇌부 중 한 사람이 건성으로 반론했다. 그도 오브의 반항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말투에서 알 수 있었다. 지구 상의 국가라면 당연히 같은 편을 들어야 한다는 교만한 논리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공통 인식이었고, 그 이외의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지구의 한 나라라면 오브도 연합에 협력해야 마땅하죠. 아닙니까?"

아즈라엘은 그것이 사뭇 자명한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진절머리가 나는 듯 일어섰다.

"…뭐하다면 제가 오브와의 교섭을 맡아 볼까요?"

"뭐라고?"

그 제안에 수뇌들이 허를 찔려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들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아즈라엘은 말했다.

"지금은 몰라도 여하튼 매스 드라이버가 시급히 필요하죠? 어느 한 쪽, 혹은 양 쪽이?"

"그건 그렇지만…."

"여러분에게는 빅토리아 작전이 있으니 분담하는 편이 효율적이겠죠."

마치 거래를 진행시키는 듯 이 죽음의 상인은 막무가내로 어느 틈엔가 수뇌들을 납득시켰다.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자, 그는 바다와 접한 유리창에 다가가서 밖을 내다 보며 후훗, 즐겁게 웃었다.

"어쩌면… 그것의 테스트도 할 수 있을지 모르고 말이죠."

혼잣말처럼 한 말에 수뇌들이 놀란 듯이 말했다.

"그 기체를 쓸 생각인가, 자네는?!"

"그건 그 쪽 하기 나름 아닌가요? 아스하인지 누군지가 소문대로 완고한 사람이라면…."

아즈라엘은 돌아 보며 천진하게조차 보이는 미소를 떠올렸다.

"…조금 굉장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죠."

 

 

"최후 통첩이라고?!"

우즈미가 소리쳤다. 오브 행정부 회의실에는 이미 수장들이 모여 현 대표 호무라를 중심으로 지구 연합군 측에서 보내 온 통고문을 보고 수런대고 있었다. 호무라가 무거운 표정으로 통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현재의 세계 정세를 감안하지 않은 채 지구의 한 나라로서의 책무를 저 버리고 완고하게 자유와 안녕만을 추구하며, 더군다나 여러 번에 걸친 협력 요청에도 거부하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는 오브 연합 수장국에 대해 지구 연합군은 그 구성국을 대표해서 다음과 같은 요구를 통보한다."

강경한 문체에 우즈미의 얼굴이 굳었다.

"첫째, 오브 연합 수장국 현 정권의 즉각 퇴진. 둘째, 군의 무장 해제 및 해체."

수장들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이것은 마치….

"48시간 이내에 이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경우 지구 연합군 구성국은 오브 연합 수장국을 자프트의 지원 국가로 간주하고 무력으로 대처하겠다."

마치…가 아니다. 이것은 항복 권고이자 틀림 없는 선전 포고였다. 실내에 흐르는 차가운 침묵을 깨뜨리고 우즈미가 호통을 쳤다.

"대체 무슨 수작이야, 이게!"

그 말에 자신들의 진영을 정당화하기 위한 규탄이 덧붙여졌다.

"파나마가 함락되니 이제 체면이고 뭐고 차릴 여유도 없어진 건가, 대서양 연방 놈들!"

우즈미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수장 한 사람이 냉엄한 현실을 보고했다.

"이미 연합군 함대가 태평양을 남하 중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매스 드라이버와 모르겐 레이터겠지요."

호무라가 문서를 살짝 탁상 위에 놓고 눈 앞에 있는 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이것이 억지라고 소리 높여 주장해도… 이미 대서양 연방을 거스를 수 있는 나라는 없으니…."

수장들이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유라시아는 이미 피폐해졌고, 적도 연합, 스칸디나비아 왕국 등 끝까지 중립을 관철해 온 나라들도 이미 연합에게…."

유라시아는 지난 알래스카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어 대서양 연방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이 없어졌다. 힘이 없는 다른 중립국들은 압력에 굴복하여 연합의 그늘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이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들도 선택해야 할 때…인 것 같군요…."

내츄럴이냐, 코디네이터냐. 수장들은 절망 어린 표정으로 눈짓을 나누었다.

"사태를 눈치 챈 카펀테리아 기지에서도 회담 요청이 와 있습니다만…."

"흥! 적의 적은 같은 편이라는 건가?"

자프트로서도 이번 사태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모처럼 고생해서 파나마를 함락시켜 지구 연합군을 지구에 가두어 놓았는데 오브의 동향에 따라서는 그 고생도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지구 상에서 몇 안 되는 코디네이터 거주 국가인 만큼, 오브와 플랜트는 수면 밑에서는 교류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플랜트 측은 오브의 높은 기술력이 연합에게 넘어가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세계를 둘로 나눌 생각인가, 대서양 연방은?! 적과 아군으로!"

우즈미는 격앙해서 내뱉었다.

"그리고 오브는 그 이념과 법을 버리고 명령에 따라 주어진 적과 싸우는 나라가 되는 것인가?!"

그 물음에 수장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들도 대서양 연방의 방식을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자신의 안녕을 생각하는 자도 있겠지만 국민을 생각하면. 하지만….

"연합 쪽에 붙으면 플랜트가 적, 플랜트 쪽에 붙으면 연합이 적…."

우즈미의 말에 수장들의 고민은 배가되었다.

"설사 연합에 들어가서 오늘의 싸움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내일은 파나마와 같은 꼴이 될 거요! 진영을 결정하면 어찌 됐건 전쟁은 피할 수 없소!"

그런 것이다. 지금 압력에 굴복하여 연합에 붙는다 해도, 그것으로 이 평화가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자프트는 반드시 매스 드라이버를 파괴하러 올 것이다. 그래서는 고개를 숙인 의미가 없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오브의 군사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섣불리 위협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고 주위에서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지구 연합군이, 혹은 자프트가 전력을 다한다면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앞날에는 파괴밖에 보이지 않기에 수장들은 어두운 얼굴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을 깨고 호무라가 입을 열었다.

"여하튼 피난 명령을…."

"호무라 대표…."

그것은 국민 모두에게 가까이 닥친 운명을 알리는 행위였다. 자신들의 나라가 사라진다는 것을…. 그들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수장, 마이리가 불쑥 중얼거렸다.

"아이들이 시대의 흐름 때문에 죽는 것만은… 피하고 싶군."

 

 

저스티스로 플랜트를 떠난 아스란은 지구에 있었다. 마치 순찰을 도는 것처럼 그는 알래스카와 파나마의 참상을 보러 돌아 다녔고, 이윽고 모든 것이 끝났던 장소로 돌아왔다. 태평양에 떠 있는 작은 섬…. 그 자신도 못 보고 지나칠 만큼 흔한 남양의 작은 섬에 그는 저스티스를 강하시켰다. 파도 치는 해변에는 이지스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스트라이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오브가 회수해 갔을 것이다.

눈이 아플 정도로 흰 모래 사장, 선명한 바다 색, 싱그러운 녹음…. 그 때와 같은 섬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불과 몇 주일 전 자신은 이 곳에서 친구와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떠올릴 때마다 그를 죽도록 괴롭혔던 아픔은 이렇게 같은 장소에 서 있어도 엄습해 오지 않았고, 그는 그리움이 섞인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덩그러니 구르고 있는 이지스의 머리를 부드러운 파도가 씻어 내리는 모습은 묘한 태평스러움조차 느끼게 했다. 그가 이 곳에서 벌인 싸움은 자신의 감정에 의한 몹시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 싸움이 공적인 자리에서 개인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각도로 평가되고 칭송 받는 것이 그에게는 화 나는 일이었다. 마치 자신의 개인 물품에 값을 매기는 것 같아서….

그러나… 이 개인적인 싸움이야말로 모든 싸움의 기본이었다. 죽임을 당했기에 죽이고, 죽였기에 죽임을 당하는…. 그것이 점점 커져서 알래스카와 파나마의 참상에 이르고, 앞으로도 어디까지 커질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정말로 마지막에는 평화로워지는 거야?!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소녀의 외침이 귀에 되살아 났다. 그것도 이 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불현듯 시선을 느끼고 아스란이 돌아 보자, 이지스의 잔해 뒤에서 작은 머리가 허둥지둥 숨는 것이 보였다. 놀라 쳐다보니 어린 아이의 얼굴 하나가 엿보였고, 바로 옆에도 하나가 엿보였다.

"무슨 일이지요?"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 오자, 아스란은 그 쪽을 쳐다보았다. 이런 작은 섬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이지적이고 조용한 얼굴의 남자가 지팡이를 짚으면서 나타나더니, 눈을 감은 채 바람을 살피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해 뒤에서 이 쪽을 살피던 아이들이 우르르 뛰쳐 나와서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오브 근처의 섬에 마르키오 님의 전도소가 있어요.

라크스의 말을 떠올렸다. 이 사람이 마르키오 도사일 것이다. 마르키오는 아스란의 기척을 느꼈는지 불현듯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아크 엔젤의 격납고에는 전 승무원이 집합하여 정렬해 있었다. 그들의 앞에 선 마류가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재 이 오브를 향해 지구 연합군 부대가 진격 중입니다."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의아해 하던 승무원들이 하나 같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지구군에 가담하여 함께 플랜트를 치는 길을 취하지 않는다면 자프트 지원국으로 간주하겠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승무원들 사이에서 "뭐야, 그게?" 라든지 "말도 안 돼."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키라는 마류 뒤에서 눈치를 살피듯 서 있는 군복 차림의 카가리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았다. 과거에는 자국의 참전을 희망하던 그녀였지만, 그 후로 여러 가지 생각한 바가 있었던 것이리라. 마류는 승무원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오브 정부는 끝까지 중립을 관철하기 위해 지금도 외교 노력을 하는 중입니다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지구군의 대응을 보는 한 전투를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류도 분노를 참는 것 같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라는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카즈이가 몸을 떠는 것을 보았다. 그는 창백해져서 떨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간신히 도망쳐 온 이 평화의 나라에서조차 전쟁이 물 밀듯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오브는 전 국민에게 도심부 및 군 관련 시설 주변에서의 퇴거를 명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방어 태세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마류는 여기서 숨을 쉬고 승무원들의 얼굴을 훑어 보았다.

"…우리들도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승무원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서 지금까지 함장으로 의지해 온 젊은 여성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현재 아크 엔젤은 탈주함으로, 우리들은 자신의 입장조차 분명치 않은 상황에 있습니다. 오브 사태에 대해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할 길이 없고, 또한 저도 당신들에 대해 지금은 그 권한이 없습니다."

다들 그 말에 방금 전 이상으로 동요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너무도 오래 명령을 따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의 당혹감을 이해하면서 마류는 말을 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모레 오전 9시에 전투가 시작됩니다. 오브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우리들은 직접 판단해야 합니다."

마류는 뚜렷한 어조로 말했다. 오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해 과거 자신들이 소속되었던 조직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것이 된다. 병사들의 당혹감은 컸다. 카가리는 불안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키라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함을 떠나고자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신속하게 퇴함하여 오브 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피해 주십시오."

마류에게 전혀 자신들을 붙잡을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승무원들은 웅성거렸다. 그러나 그들 또한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따를 뿐이라면 알래스카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런 일에 한 번은 의문을 가진 그들이기에 결론까지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류는 차근차근 승무원들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저처럼 미덥지 않은 함장을 지금까지 따라 주셔서… 고맙습니다."

거기서 눈물을 글썽거린 그녀는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미덥지 않은 함장….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키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우유부단함이 그들을 이 곳까지 이끈 것이리라. 의문을 품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일이다. 의문을 버리고 자신의 맹신에 따라 싸우는 자는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자를 멸할 때까지 싸움을 그치지 않는다. 나는 옳은가? 이것은 잘못 된 일이 아닌가? 다른 길은 없는가? 의문을 품었기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산한 뒤 승무원들은 의논을 시작했고, 어떤 이는 혼자서 생각에 잠기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거주 구역으로 향하는 키라에게 카가리가 따라와서 말을 걸었다.

"키라…!"

키라는 뒤를 돌아 보았고, 열심히 달려오는 카가리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따라 잡은 후에도 답답한 듯 양 손을 꽉 쥔 채 안절부절 못했다.

"키라…, 저기…, 그러니까!"

"진정해. 그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안절부절 못하면 다들 불안해 하잖아."

"그런가? 그래…. 아니, 하지만!"

키라의 지적에 그녀는 더욱 허둥대며 예복의 깃을 고쳤지만, 역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

"오브가 전쟁터가 되다니! 이런 일이…!"

키라는 온화한 눈으로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얼마 후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난 오브가 취한 길이 옳다고 생각해. …가장 힘든 길일지도 모르지만…."

"키라…."

카가리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키라는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카가리도 진정해. 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나도 지킬 테니까…."

그는 조용한 결의를 담아서 말했다.

"아버님과 모두가 지키려고 하는 오브라는 나라를 말이야."

쳐다보는 카가리의 눈이 금세 촉촉해지더니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키라에게 안겼다.

"키, 키라─!"

"익…."

매 번 겪는 일이기는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안겨 드는 카가리 때문에 키라는 당황했다.

"아니, 그러니까… 응?"

그는 허둥대면서 목 놓아 울고 있는 카가리를 달래려고 했다. 누구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한 그녀이니 이번 일은 분명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그녀를 키라는 바람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이 여자고, 이처럼 가볍게 남자에게 안기면 안 된다는 자각을 좀 더 가져 주기를 바랐다.

사복으로 갈아 입고 짐을 챙겨 든 카즈이를 보고 사이는 역시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 카즈이는 내리는구나."

말을 걸자 카즈이는 마치 꾸중을 듣는 듯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이는 안 내릴 거야?"

불안하게 묻는 카즈이에게 사이는 조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남을 거야…. 공격 받는 건 오브고, 지금은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심사숙고해서 정한 일이었다. 토르에게 일어난 일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 곳에 남으면 그런 식으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

"…방금 집에도 전화해서 그렇게 말하고 왔어."

그 결심히 부모님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 때문에 그만 둘 수는 없다.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카즈이는 그의 결의가 굳은 것을 알자 절박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갑자기 떠올린 듯 말했다.

"아, 밀리는 내리겠지? 여자니까…."

"카즈이…."

사이는 여전한 그의 태도에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카즈이는 움찔했다.

"왜…, 왜…?"

사이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은 이제 신경 쓰지 마."

"뭐…?"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면 그걸로 된 것 아니야?"

사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자, 카즈이는 눈을 크게 떴다. 처음 군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을 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저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런 것이었다고 사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보고 결정한 일이 아니라는 것.

자신이 그러고 싶으니까,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분명히 자신은 키라처럼 모빌 슈트를 타고 싸울 수 있다. 돌연 강림해서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하는 히어로 같은 일은 할 수 없다. 하지만 키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도 죽는 것이 두려울 것이다.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자신이 싸워야 하느냐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의지로 되돌아 왔다. 도망치지 않고, 눈길을 돌리지 않고. 그래서 그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도망치지 않고 눈길을 돌리지 않고, 다른 것은 다르다고 말하며 원하는 미래를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웃으며 말할 수 있다.

"다들 다르니까 말이야…."

카즈이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만 내린다고 하면 다들 날 겁쟁이라거나… 비겁자라고 생각할 것 아냐!"

"카즈이…."

"그래, 어차피 난 비겁자야!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따윈 없어! 전쟁이라니… 그런 건 할 수 있는 녀석이나 하라고!"

"알고 있어…."

사이는 갑자기 그가 불쌍해졌다.

"맞지 않을 뿐이야, 너한테 전쟁 따윈…. 넌 마음이 여리니까."

"사이…."

카즈이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마음이 여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 다녔다. 그 뿐인 것이다. 사람은 각각 다르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사이는 이번에야말로 싱긋 웃었다.

"평화로워지면 다시 만나자. …그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어."

자신은 물론이지만 이런 정세에서 함을 내린 카즈이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 불안을 감추고 사이는 친구의 어깨를 툭 친 후 손을 내밀었다. 그를 쳐다보는 카즈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이… 나, 역시…."

"그러니까 그만 둬. 그런 건… 나중에 후회하니까."

사이는 손을 꼭 잡고 등을 두들겨서 그를 보냈다. 카즈이는 몇 번이고 돌아 보면서 통로에게 멀어져 갔다.

 

 

밀리아리아의 모습을 본 디아카는 내심 기쁨을 감추고 일어섰다. 그 후로 그녀는 한가해지면 디아카에게 식사를 가져다 주었다. 쌀쌀맞지만 제대로 그를 상대해 주는 사람은 그녀 뿐이었다. 전사한 남자 친구를 생각하면 복잡한 마음이 들지만, 이런 곳에 계속 갇혀 있는 처지에서는 얼마 안 되는 이 시간이 하루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뭐, 무뚝뚝하긴 하지만 내츄럴 치곤 얼굴도 예쁘고….'

디아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켜 보고 있을 때 놀랍게도 밀리아리아는 구금실의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 심문? 이송?"

어느 쪽도 별로 반갑지 않다. 플랜트로 돌려보내 준다면 모를까, 다른 군 시설로 이송되어 밀리아리아와 헤어지는 것은 왠지 싫었다. 그러나 소녀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이 함은 또 전투에 나가게 됐어. 오브로 지구군이 쳐들어 오니까."

"…뭐?"

디아카는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 여자는? 그런 그에게 밀리아리아는 그의 파일럿 슈트를 대충 건네 주고 말했다.

"그러니까 넌 이제 됐대. 뭐… 석방이라고나 할까?"

그 말을 끝으로 발길을 돌리고 냉큼 나가 버렸다.

"…아! 자, 잠깐 기다려!"

비둘기가 콩알 탄을 맞은 것 같은 얼굴로 굳어 있던 디아카는 허둥지둥 자신의 슈트를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 봐! 어떻게 된 일이야, 이게?!"

"방금 말했잖아!"

여느 때처럼 쌀쌀맞지만 그 어조에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긴장감이 흐르는 것을 디아카는 느꼈다. 밀리아리아는 그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걸으면서 대답했다.

"지구군이 공격해 오니까 아크 엔젤은 싸우는 거야! 그리고 네가 여기 있어 봤자 별 수 없잖아! 그러니까 내려."

그녀의 대답은 디아카의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너희들이 지구군과 싸우는 거냐고?!"

이 녀석들은 지구군이 아니었던 건가? 적어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구군이었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지구군과 싸우는 거지? 게다가 '공격해 온다'는 건 또 뭐야? 디아카의 머리는 의문 부호로 가득했다. 그 질문에 밀리아리아는 딱 잘라 대답했다.

"오브가 지구군 편을 안 들어서 그래."

"…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욱 알 수 없게 된 디아카는 완전히 발을 멈추었다.

"뭐야, 그게? 내츄럴은 역시 바보야?"

"…미안하구나."

돌아보며 힐끔 째려보자, 디아카는 자신의 조심성 없는 입을 저주했다.

'하지만 바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 내츄럴이 내츄럴 편을 듣지 않고, 그 때문에 동포에게 공격 받는 상황은….'

그러나 밀리아리아는 그 이상 토라지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얼른 가는 게 좋을 거야. 공격이 시작되면 엄청 혼란스러워질 테니까. 미안하지만 뒷 일은 혼자 알아서 해!"

"그렇긴 해도…. 아, 이 봐! 버스터는?!"

곤혹스러워 하며 디아카가 묻자, 무자비한 대답이 되돌아 왔다.

"그건 원래 이 쪽 물건이야! …모르겐 레이터가 가져갔어."

"익…."

최악이다. 기체를 잃고 내츄럴 나라에 방치되다니, 무슨 낯짝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침공을 앞두고 혼란스러운 이 나라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낙담하는 디아카를 힐끔 보고 밀리아리아는 약간 동정심을 느꼈다.

"이렇게 돼서… 미안해!"

그 말을 남기고 휙 달려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자 디아카는 자신만을 챙길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쫓아가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너, 너도 싸우는 거야?!"

"난 아크 엔젤의 CIC 담당이야!"

밀리아리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새침하게 말했다.

"그리고… 오브는 내 나라이기도 하니까…!"

디아카는 불현듯 가슴이 찡해졌다. 그렇게 대답한 밀리아리아의 모습이 실로 눈부셨기 때문이다.

 

 

<요구는 부당한 것이므로 따를 수 없다. 오브 연합 수장국은 앞으로도 중립을 관철시킬 의지에 변함이 없다.>

오브 영해선에 집결한 지구 연합군 함대는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해상을 가득 메운 것처럼 보였다. 함대 기함 '하우웰'의 함교에서 주위의 군복과는 달리 혼자 튀는 정장을 차려 입고 마치 자신의 배인 양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아직 젊은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뮬터 아즈라엘이었다. 그는 오브에서 온 최종 회답을 손에 들고 쿡쿡 웃었다.

"흐음…. 과연 우즈미 나라 아스하 전 대표는 기대를 저 버리지 않는 사람이군요."

동의를 구하듯 옆에 서 있는 함대 사령관 댈러스를 쳐다보았다. 댈러스는 이 방약무인한 옵저버에게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침묵하고 있었다. 사령부에서 이 남자의 요구에 전면적으로 따르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아즈라엘은 그의 불쾌감 따위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혼자 계속 주절거렸다.

"솔직히 말해 회피해 버리면 어떻게 할까 생각했었거든요, 그것의 테스트…."

그에게는 이번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일인 모양이었다. 마치 쇼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댈러스는 더욱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오브가 싸우지 않고 항복해 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예전부터 그 곳의 군사 기술에는 전 세계가 한 수 접었던 나라기 때문이다. 연합의 모빌 슈트 개발도 오브 국영 기업의 협력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다. 그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남양의 작은 섬나라라고는 해도 간단히 함락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번 임무의 중요성은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병력을 쏟아 붓더라도 이겨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죽어 가는 것은 그의 부하들이다. 그것을 유람하는 듯한 태도로 이야기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여전히 즐겁게 말했다.

"부디 끝까지 힘을 내 줬으면 좋겠네요."

 

 

보수 작업이 끝난 아크 엔젤의 독은 사람의 그림자도 드물어서 고요했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었다. 마류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그들은 다시 전장에 나선다. 이 판단은 과연 옳았을까? 다시 그런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싸움을 부정하기 위한 싸움…. 그것 자체가 대단한 모순이다. 그러나 오브가 연합의 요구에 응하더라도 어찌 됐건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싸움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제 무엇이 옳은지도 알 수 없었다. 창 밖을 쳐다 보며 한숨을 쉬었을 때 등 뒤에서 누가 말을 걸어 왔다.

"왜 그렇게 침울해 있는 거야, 함장?"

무우가 함교로 올라왔다. 그는 마류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결국 퇴함은 열한 명. 다들 대단해. JOSH-A에서의 일에 어지간히 열 받은 모양이야."

그렇다면 승무원들 대부분이 함에 남은 셈이 된다. 하지만 그들을 남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무의식 중에 그들에게 결정을 강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군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기준이 되는 규범과 명령, 그리고 명확한 목적지가 있었고, 마류도 승무원들에게 엄격한 명령을 내릴 때는 그것에 기댈 수 있었다. 당시부터 그런 것들에 의문을 지녔고 반항하듯 행동에 나선 적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눈 앞에서 사라지자 이번에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해야 할지 몹시 불안했다. 문득 그녀의 입에서 지금까지 한 적이 없는 질문이 튀어 나왔다.

"소령님은… 왜 돌아오신 건가요, JOSH-A에서…?"

그 때부터 무우는 이미 명령을 위반한 셈이었다. 가라고 명령 받은 전속지를 내팽개치고 아크 엔젤에 돌아온 시점에서. 그를 부추겨서 그런 행동에 나서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뭐?!"

무우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은 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 와서 물을 줄은 몰랐어."

그리고 대답 대신 마류의 허리를 쑥 끌어 당기더니 입을 맞추었다. 기습 키스에 마류는 너무 놀라 얼어 붙었다. 그녀도 지금까지 꽤 많은 일들을 겪어 왔다. 군에 들어온 후로 발칙하고 주제를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의 성희롱을 당한 적도 있지만, 어떤 상대건 손을 댄 것을 후회할 정도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상대를 때리지도, 집어 던지지도 않고 그 감촉에 몸을 맡겼다.

입술이 떨어지자 무우는 가까운 곳에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자못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얼굴이 너무도 멋지게 보여 마류는 없는 자존심을 모두 끌어 모아서 소리쳤다.

"저, 저는… 모빌 아머 파일럿을 싫어해요!"

무우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아, 난 지금 모빌 슈트 파일럿이라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반론은 두 번째 키스에 의해 차단되었다. 어찌 됐건 어떤 반론도 의미가 없었다. 상대를 때리지 않은 시점에서… 아니 좀 더 전부터 그녀의 본심을 상대는 이미 훤히 꿰뚫고 있었을 테니까.

'이것이 대답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무우가 되돌아 와 준 것. 다들 함에 남아 준 것. 그것이 마류에게는 대답이었다.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실례합…."

문이 열리는 소리에 허둥지둥 몸을 뗀 두 사람은 함교에 들어온 노이만 일행이 입을 쩍 벌리고 그 자리에 굳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자극이 조금 강했나 보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것 같군요, 오브와 지구군의 전투는…."

마르키오가 슬프게 중얼거렸다. 어젯밤 그의 전도소에서 묵었던 아스란은 수신된 뉴스 영상을 보면서 그저 멍해 있었다.

"어째서 오브와 지구군이…?"

'내츄럴과 내츄럴이 싸운다고…? 왜?'

지구 연합군의 목적이 매스 드라이버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멸하면서까지 손에 넣으려는 그 생각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동포가 아니던가.

"사람은 쉽게 적이 되는 법이죠…."

마르키오의 독백에 아스란은 불현듯 깨달았다. 같은 동포 간의 싸움…. 그것은 자신과 키라도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보면 그들의 싸움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을 둘러싼 여러 가지 것들이 복잡하게 얽히자 마지막에는 정말로 서로를 미워할 정도까지 되어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한 남자 아이가 아스란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나한테 볼 일이라도 있는 건가? 흐뭇한 심정으로 몸을 숙인 아스란의 정강이를 갑자기 그 아이가 걷어 찼다.

"자프트 따위! …내가 크면 전부 해치워 버릴 거야!"

"오로!"

마르키오가 언성을 높이자 아이는 냅다 줄행랑을 쳤다. 아이들의 보호자인 이 은자는 아스란에게 고개를 돌리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 아이는 카펀테리아 점령전 때 부모를 잃은 터라…."

아스란은 깜짝 놀랐다. 걷어 차인 아픔보다 천진한 아이가 증오심을 보인 것이 더 충격이었다.

"퍼뜨리는 것은 쉽지만 없애기는 어렵습니다, 전쟁은…."

마르키오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사람은 쉽게 적이 된다. 그렇구나. 이런 것이었어….'

아스란은 창 밖으로 멀리 오브 쪽을 쳐다보았다.

'이런 일은 정말로 끝내야 한다.'

 

 

시계가 9시를 가리켰다. 기함 하우웰 함교에서 아즈라엘이 쾌활하게 외쳤다.

"시간입니다!"

그 순간 지구 연합군 함대에서 순항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개전의 도화선이 점화된 것이다. 영해선상에 늘어서 있던 오브 호위 함대가 오브를 노리고 발사된 미사일을 요격하기 시작했다. 지구 연합군 함대에서 전투기가 날아 올랐고, 오노고로 섬 해안선에서는 M1=아스트레이 부대가 죽 늘어서서 수비를 굳혔다. 개전 소식은 오노고로의 독에 있던 아크 엔젤에도 전해졌다.

"오브 군이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CIC로 들어간 파르를 대신해서 사격 지휘관 석에 앉은 사이가 보고했다. 그 보고를 받고 마류가 선언하듯 고했다.

"아크 엔젤, 발진!"

게이트가 열리고 하얀 거함이 해상으로 부상했다. 그 순간 날아 오는 미사일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고트프리트 발사!"

빗발치듯 쏟아지는 미사일을 지상의 M1 부대가 잇달아 격추했다. 미사일 제１파가 끊겼을 때 해안에 지구군의 상륙정이 도착하더니 해치가 열렸다. 그 곳에서 나타난 것은 모빌 슈트 부대였다. 카가리와 키사카가 있는 오브 군 작전 사령실에 보고가 도착했다.

"적 모빌 슈트 부대, 이자나기 해안에 상륙!"

잇달아 상륙해 오는 모빌 슈트의 모습에 카가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구군의 GAT-01=스트라이크 대거였다.

"큭…! 제８기갑 대대를 그 쪽으로 보내!"

지시를 내렸을 때 다시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오노고로 상공에 대형기 접근!"

여러 척의 대형 수송기가 상공에 도착하더니 해치에서 스트라이크 대거를 투하했다. 마치 메뚜기 떼처럼 섬을 덮쳐 오는 모빌 슈트는 지상 시설의 요격을 받으면서도 빔 라이플을 쏘면서 섬 각 지에 내려 섰다. 해안선에 배치되어 있던 M1 부대가 산개하여 적 모빌 슈트를 찾아 달렸다.

그리고 아크 엔젤에서 그 상황을 보고 있던 키라와 무우가 출격했다. 키라는 프리덤, 그리고 무우는 스트라이크로 첫 출전이었다. 그러나 M1 부대도 대거 부대도 실전에 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숫자에서 앞서는 개더를 상대로 고전하는 M1 부대 옆에 프리덤이 내려 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여러 대를 록 온 한 후, 다섯 개의 포구에서 빛을 뿜었다. 조준당한 대거는 한 순간에 전투 능력을 빼앗겼다. 이런 혼전 상태에서 정확하게 적만을 해치운 수완은 역시 대단했다. 그 엄청난 전투 능력에 적 뿐만 아니라 아군까지 멍해져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때 에일 장비의 스트라이크가 날아 오더니 빔 라이플로 대거 한 기의 조종석을 명중시켰다. 첫 출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과감성이었다. 모빌 슈트의 조작에 익숙치 않아도 경험이 많은 무우 다웠다. 오노고로 섬은 모빌 슈트가 뒤엉킨 혼전 상태가 되었다.

한 편, 영해 선상의 하우웰에서는 파일럿 대기실에 세 명의 소년이 대기하고 있었다. 금발에 장신, 그리고 어딘지 고귀한 분위기조차 느껴지는 용모의 한 소년은 갑판 의자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개구쟁이 같은 얼굴의 붉은 머리 소년은 게임기에 열중했고, 다른 한 명의 얌전해 보이는 하얀 피부의 소년은 아이 마스크를 하고 느긋하게 소파에 누워 있었다. 양 쪽 귀의 이어폰에서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올가 사브나크, 크로트 브엘, 샤니 안드라스…. 그들은 지구 연합군의 이른 바 비장의 카드였다. 세 사람 모두 서로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눈치는 없었다. 소년들은 연합의 제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소매를 걷어 붙이거나 대충 걸쳐 입는 등 풍기에 엄격한 상관이 봤다면 눈살을 찌푸릴 만한 차림이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그들은 파일럿 슈트로 갈아 입고 연구원으로 보이는 연락관에게 한 사람씩 약품 앰플을 건네 받았다. 소년들은 무뚝뚝하게 그것을 삼키더니 각자 자신의 기체로 향했다.

「아, 너희들.」

소년들이 기체를 기동시키고 있을 때 함교에서 통신이 들어오더니 아즈라엘의 얼굴이 모니터에 비쳤다.

"음?!"

소년들은 하나같이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즈라엘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마치 어린 아이들을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명심하세요. 매스 드라이버와 모르겐 레이터의 공장은 파괴해선 안 됩니다. 알겠죠?」

샤니가 불쑥 대답했다.

"다른 건 아무리 부숴도 괜찮지?"

"다시 말해 그런 뜻이군."

크로트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올가는 단정한 얼굴을 천박하게 일그러뜨리더니 내뱉었다.

"시끄러, 너희들."

이윽고 해치가 열리며 3기의 모빌 슈트가 사출되었다.

 

 

아크 엔젤은 지구 연합군 함정과 새까맣게 몰려 오는 전투기를 상대로 오브 함대에 섞여 전투를 계속 하고 있었다. 함교에서 토노무라가 숨을 삼켰다.

"적 모빌 슈트… 아니, 모빌 아머? 접근!"

모니터에 날아 오는 적기가 비치자, 그 이상한 형상에 다들 눈을 크게 떴다. 검은 색 기체는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날개와 맹금류 같은 갈고리를 가진 모빌 아머 타입이었는데, 대기권을 비행하는 것도 가능한 듯 했다. 마치 인면조를 연상시키는 그 기체 위에는 등에 거대한 두 개의 포를 짊어진 모빌 슈트가 타고 있었다. 색깔은 강렬한 느낌까지 주는 청록색과 오렌지색의 두 가지로 오른손에는 긴 바주카 포를, 왼손에는 그것보다 구경이 작은 포가 두 문 돌출된 실드를 들고 있었다. 어느 기체건 본 적도 없고 아크 엔젤의 데이터 베이스에도 당연히 해당하는 기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거와는 다른 계통의 신형기인 듯 했다. 그들 기체는 똑바로 아크 엔젤을 향해 날아 오더니 청록색 기체가 등에 장착된 포로 강렬한 빔을 쏘았다.

"회피!"

맞기 직전에 터져 나온 마류의 지시에 노이만은 재빨리 함수를 오른쪽으로 돌렸고, 열선은 함의 왼쪽으로 빗나가서 바닷물을 증발시켰다. 지켜 보는 승무원 앞에서 검은색 모빌 아머는 마치 털어 버리듯 자신의 위에 있는 모빌 슈트를 오노고로 섬에 내려 놓고 선회하여 다시 아크 엔젤을 향해 날아 왔다. 그리고 공중에서 그 기체가 변형하더니 모빌 슈트 형태가 되었다. 오른손에는 두 문의 포를 장비한 실드를 장착하고 있고 머리 부분에도 에너지 포로 보이는 포구가 보였다. 이지스처럼 변형 가능한 기체…. 게다가 단독으로 대기권을 비행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검은색 모빌 슈트가 놀랄 만한 기동성으로 아크 엔젤에 육박했다. 이겔슈테른의 요격을 피해 단숨에 달라 붙으려 했지만, 아크 엔젤의 위기를 깨달은 프리덤이 날아와 그 날아오던 기세로 옆에서 걷어차 날려 버렸다. 위험에서 벗어난 승무원들이 후우,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 프리덤의 등 뒤에서 바다를 가르고 솟구친 것이 있었다.

"3기 째…?!"

이번에도 이상한 형상의 모빌 슈트가 바다 속에서 튀어 나온 기세 그대로, 가까운 곳에 있던 오브 호위함을 들고 있던 거대한 낫으로 두 동강을 냈다. 공격을 받은 함정이 손 한 번 못 써 보고 격침되는 것을 마류 일행은 멍하니 지켜 보았다.

강철을 무 베듯 자른 무기는 마치 사신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낫이었다. 카키색을 기조로 한 이 기체는 등에 거북이 등딱지를 연상시키는 리프트를 짊어지고 있었고, 그 리프트에서 기체 양 측면으로 거대한 실드가 튀어 나와서 마치 세 방향을 병풍으로 둘러싼 것처럼 보였다. 양 측 면의 실드 내부, 정확히 말하면 기체의 어깨 부분에 2문의 긴 포신이 장비되어 있고, 또한 리프트 윗부분에도 포구로 보이는 것이 확인되었다. 3기 모두 GAT 시리즈의 특징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각각 기능을 심하게 특화시킨 듯 어딘지 불길할 정도로 과도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방금 전 프리덤에 의해 날아간 검은 기체가 태세를 바로 잡고 오른손의 빔 포를 쏘았다. 프리덤은 그 사격을 피하며 신형 모빌 슈트 2기와의 전투에 돌입했다.

디아카 엘스만도 그 전투를 오노고로 섬의 해안 부근에서 보고 있었다. 아크 엔젤의 구금실에서 '석방'된 후, 그는 이 섬 이 곳 저 곳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도망칠 수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피난 명령이 떨어진 후로 섬을 떠나는 시민들을 운반하는 배가 여러 척 있었기에 거기에 묻어 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그 이전에 카펀테리아 기지에 전화 한 통만 해도 되었다. 그렇게 하면 자프트 군이 마중하러 와 주었을 것이다. 전에 이 곳에 잠입했을 때처럼. 그러나 뭔가가 그의 발을 이 곳에 묶어 두고 있었다. 몰수 당한 기체에도 아쉬움이 있었고, 지금 귀환한다고 해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내츄럴 따위에게 사로잡히고 게다가 기체까지 잃은 자신은 사람들의 좋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 이유만으로 이런 위험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웃음이 겁나서 목숨을 버릴 정도라면 애당초 투항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디아카는 죽는 것이 싫었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죽음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전투를 계속해 온 것은 내츄럴을 상대로 자신이 죽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츄럴들은 어째서 싸울 수 있는 것일까?'

디아카는 밀리아리아를 떠올렸다. 멍청하고 굼뜨고 약하고 만날 훌쩍 훌쩍 울었던 주제에, 처음에는 코디네이터인 자신을 겁내며 떨었던 주제에, 그래도 그녀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말했다. 그렇다. 디아카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에 뛰어 들었다. 내츄럴인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런 그녀 앞에서 자신은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되는 것일까? 망설이면서 격전 속에 있는 아크 엔젤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 3기가 나타났다. 오노고로 섬에 상륙한 선명한 청록색의 기체는 별안간 어깨의 빔 포를 쏘았다. 한 순간에 지상의 요격 시설이 날아가며 땅이 움푹 파헤쳐졌다.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그 기체는 다가오는 M1 부대와 전차대를 가차 없이 공격해 갔다. 일격을 얻어 맞은 것만으로 그들 기체는 대파되었고 폭발의 불꽃을 내뿜었다. 압도적인 화력 차이에 그 신형 기체는 마치 전투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디아카는 폭발에 휘말리지 않도록 달리면서 돌연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 게임 감각으로 자신보다 열등한 내츄럴을 죽이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기랄!"

이대로 가다가는 오노고로 섬이 함락되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이다. 그는 분노와 기묘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모르겐 레이터로 달려갔다.

"헬 다트 발사!"

아크 엔젤 함교 뒷부분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어 지구 연합군의 전투기를 격추했다. 선체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나자 함은 폭발의 충격에 흔들렸다. 후퇴해서 태세를 바로 잡으려 했지만 끊임 없이 날아 오는 미사일과 몰려 드는 전투기가 그것을 방해했다. 신형 모빌 슈트 2기는 프리덤이 열심히 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 누가 뭐래도 물량으로는 지구 연합군 쪽이 단연 위이고, 게다가 대거 부대와 3기의 신형기의 존재는 막강했다. 지금은 그 중 2기가 프리덤에 집중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어쩌면 그 2기 만으로 오브 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전함으로는 모빌 슈트의 기동성과 화력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현 상태에서는 아크 엔젤도 쏟아지는 미사일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때, 후방에서 굵은 빛줄기가 날아 오더니 그 에너지에 닿은 미사일과 전투기가 한 순간에 폭발했다.

'엇?!'

생각지도 못한 엄호 사격에 당황하는 함교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얼른 물러나! 아크 엔젤!」

밀리아리아가 숨을 삼켰다. 그것은 그 포로…, 디아카의 목소리였다.

"저 녀석…, 어떻게…?!"

오노고로의 해안선에 초고 임펄스 장거리 저격 라이플을 든 버스터의 모습이 있었다. 밀리아리아로서는 오래 전에 도망쳤어야 할 자프트 병사가 왜 자신들을 엄호해 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없기는 해도 그녀의 가슴에는 훈훈함이 퍼졌다.

 

 

먼 상공에서 아스란 자라는 해상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저스티스에 탑승한 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멀리서도 오브의 시가지, 그리고 군 본부가 있는 오노고로 섬에서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눈 밑에서는 오브 함대와 지구 연합군 함대가 격렬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는데, 보고 있는 사이에도 포화에 노출된 오브의 호위함이 침몰해 갔다.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는 아무리 높은 군사 기술을 가진 오브라고 해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아스란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지만 문득 오브의 함선들에 섞여 있는, 너무도 특징적인 흰 전함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다리 달린 전함'…. 아크 엔젤이 왜 오브 측에서 지구군과 싸우고 있는 거지?! 의문과 동시에 가슴 떨림을 느낀 그는 해상에서 어지럽게 날아 다니는 모빌 슈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격렬한 사격을 퍼부으며 교차하는 모빌 슈트…. 아스란은 모니터 상에서 그들 기체를 확대했다. 2기에 관해서는 조합할 데이터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1기에 대해서는 컴퓨터가 바라던 대답을 내놓았다. ZGMP-X10A=프리덤….

"…키라!"

탈환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프리덤을 완전히 파괴하라…. 그것이 명령이었다. 지금이라면 프리덤은 연합의 2기를 상대하고 있어서 이 쪽의 존재를 모를 것이다. 격파하는 것은 쉽다.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는 아스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하지만… 그 명령은 과연 옳은 것일까? 명령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다. 자신은 임무에 따라 싸울 뿐인 일개 병사다. 알고는 있어도 망설임을 떨치지 못했다. 자신의 다리를 걷어차고 도망친 그 아이의 눈에 생생히 맺혀 있던 증오가 가슴을 찌르며 묻는다. 네가 믿는 정의는 무엇이냐고. 눈 앞에서는 다시 1기의 연합기가 가세해서 프리덤을 농락했다. 키라는 분전하고 있었지만, 3기를 상대로 언젠가는 궁지에 몰릴 것이 눈에 선했다.

'키라… 넌 무슨 생각이지? 무슨 생각으로 그 기체를 받아서 계속 싸우고 있는 거냐? 군인도 아닌 네가….'

눈 앞에서 어지럽게 뒤엉키는 모빌 슈트…. 자신이 쏘아야 할 것은 과연 어느 쪽의 기체인가.

"큭…!"

아스란은 충동에 사로잡힌 듯 저스티스를 몰았다.

키라는 고전하고 있었다. 카키색 기체를 향해 빔 라이플을 발사했지만, 그 기체에 닿기 전에 빔이 크게 방향을 바꾸었다.

"빔이 구부러졌어?!"

그 사이에도 검은 색 기체가 파쇄구를 엄청난 기세로 휘둘렀다. 키라는 그것을 피하며 카키색 기체에 레일 건을 쏘았지만 이것도 실드에 막혀 튕겨 나갔다. 빔도 실탄도 통하지 않다니…! 연합의 신형 기체는 생각했던 것 이상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기동성도 높았다. 파일럿은 코디네이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OS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내츄럴이 이런 기체를 자유롭게 조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M1=아스트레이에 탑재되어 있는 OS는 기체의 많은 움직임을 컴퓨터가 보조하게 해서 내츄럴의 조종을 가능하게 했다. 대거에도 비슷한 OS가 탑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변칙적인 움직임에는 약하고 반응 속도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신형 기체에는 그런 OS의 특성이 느껴지지 않았고, 반응 속도도 빨랐으며, 내츄럴은 하기 힘든 복잡한 조작도 쉽게 해 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키라는 더 이상 궁금해 할 시간이 없었다.

3기는 싸우면서 알게 모르게 오노고로 상공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 때까지 M1 부대와 스트라이크를 상대로 싸우고 있던 청록색의 세 번째 기체가 그들을 발견하고 엄호할 생각인지 양 어깨의 거대한 빔 포를 쏘았던 것이다. 허를 찔린 키라는 간신히 그것을 피했지만, 그 순간 검은 기체가 쏜 파쇄구를 얻어 맞고 튕겨 나갔다.

"아차…!"

낙하를 막기 위해 버니어를 분사했지만 태세를 바로 잡기 전에 옆에서 카키색 기체가 빔을 쏘았다. 그 사선은 확실히 프리덤을 포착하고 있었다.

"큭…!"

피할 수 없나? 명중한다! 그 순간 눈 앞에 빨간 그림자가 내려 섰다.

"……?!"

빨간색 기체가 자신과 적기 사이에 끼어들어 실드로 빔을 막아 냈다. 미지의 기체의 개입에 놀라 눈을 크게 뜬 키라의 귀에 낯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는 자프트 군 국방 본부 직속 특무대… 아스란 자라!」

키라의 심장이 한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니터에서는 컴퓨터가 멋대로 기종을 확인하고 그 기체가 ZGMF-X09A=저스티스, 프리덤의 형제 기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스란…?!'

「듣고 있나, 프리덤? 키라 야마토 맞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스란의 목소리가 망설임 때문에 떨리는 것을 키라는 머리 한 구석에서 느꼈다.

'아스란…? 그가 왜? 왜… 나를 구해 준 거지…?'

"아스란…?"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온 중얼거림을 아스란이 듣고 희미하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서로에게 집중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검은색 기체가 저스티스를 덮쳐 와, 아스란은 양 쪽 허리의 빔 사벨을 뽑아 들었다. 두 자루의 빔 사벨을 이어서 언비 덱스트러스 할버드로 만들어 휘둘렀다. 키라는 동요하면서도 저스티스를 노리고 온 카키색 기체를 향해 자신도 빔 사벨로 베어 갔다.

"무슨 생각이지? 자프트가 왜 이 전투에 개입하는 거야?"

싸우면서 키라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외쳤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군으로부터는 이 전투에 대해 아무런 명령도 받지 않았어!」

아스란은 뭔가를 떨쳐 내듯 외쳤다.

「이 개입은… 나 개인의 의사야…!」

키라는 숨을 삼켰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왜 구하러 왔느냐고 무우가 물었을 때 키라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스란의 의사…. 그렇다면 그는 키라를 돕고 싶다고 생각한 건가? 동료를 죽인 키라를…? 한 번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던 상대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키라는 열심히 참으면서 싸웠다.

 

 

오노고로의 군 사령부도 돌연 내려온 개입자에 놀라 혼란에 빠졌다.

"또 다른 연합군 기체인가?"

"아니, 달라! 봐, 프리덤을 엄호하고 있어!"

"누구지? 데이터 베이스에는…?"

"해당되는 기체는 없어! 보면 알잖아!"

서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카가리는 눈을 크게 뜨고 모니터에 비친 붉은 기체를 쳐다보았다. 오노고로를 공격하던 1기의 연합기도 새로운 모빌 슈트의 등장을 깨닫자, 동료들을 엄호하려고 생각했는지 버니어를 분출시켜 날아 올라 강렬한 빔 포를 쏘았다. 그 사선 상에는 아군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뒤엉켜서 싸우고 있던 4기는 바로 산개해서 그 열선을 피했다. 청록색 연합군 기체는 개의치 않고 모든 포를 연사하면서 점프해, 부근까지 물러나 있던 오브 호위 함에 올라 탔다. 함교를 박살내고 좋은 발판을 얻었다는 듯 그 곳에서 상공을 날아 다니며 회피하는 프리덤과 저스티스를 노렸다. 오노고로에서는 그 신형기가 새로운 사냥감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기회로 스트라이크, 버스터, M1 부대가 스트라이크 대거를 하나 하나 해치워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기체에 빔을 맞고 쓰러지는 M1=아스트레이의 숫자도 많았다.

"제２방어선 돌파되었습니다!"

"제６특과 중대 교신 두절!"

사령실에서는 아군의 불리함을 고하는 오퍼레이터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파괴되어 가는 지상 시설과 모빌 슈트 부대를 바라보면서 카가리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한편, 해상에서는 오브 함대가 주춤주춤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아크 엔젤 함교에서 마류가 필사적인 목소리를 내질렀다.

"함수를 왼쪽으로 20! 왼쪽 함대를 부순다!"

미사일이 난무하며 쌍방의 위에 쏟아졌고, 높은 물기둥과 함께 불꽃을 흩뿌리며 거대한 철선이 기울어 갔다. 그러나 아무리 공격해도 대치하고 있는 적함의 숫자는 조금도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다들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공에서는 프리덤과 저스티스가 연합의 모빌 슈트를 상대로 날개를 펼치고 계속 싸우고 있었다. 아래 쪽에 있는 기체의 포격을 피하면서 날아 오는 2기를 쏘았다. 카키색 기체가 리프트 중앙부의 빔 포를 쏘자 그것은 허공에서 구부러지며 사선을 예측하고 회피한 프리덤 쪽으로 날아 왔다.

"……!"

키라는 그 빛줄기를 간신히 피했다. 이 기체에는 날아 온 빔 뿐 만이 아니라 자신이 쏜 빔도 굴곡시키는 기능이 갖추어져 있는 모양이다. 그 기체를 향해 저스티스가 리프트 상부의 M9M9 선회 포탑 기관포와 MA-4B 폴티스 빔 포를 연사했지만, 리프트에서 뻗어 나온 실드가 적기를 완전히 감싸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동시에 태세를 바로잡은 프리덤이 아래 쪽에서 MMI-M15 쿠시피어스 레일 포를 쏘았지만, 이것도 실드에 튕겨 나갔다. 그러나 그 때 다시 아래 쪽으로 돌아가 있던 저스티스가 날아가서 격렬한 발차기를 먹였다. 레일 포의 위력에 밀리는 기미였던 적기는 완전히 태세가 무너졌다. 그 2기를 향해 모빌 아머 형태의 검은 기체가 양 어깨의 포구에서 빔을 연사하며 하강했다. 그리고 한 순간에 모빌 슈트 형태로 변하더니 실드를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한 프리덤과 저스티스를 향해 파쇄구를 휘둘렀다. 두 기체는 곧바로 산개하여 사벨을 뽑아 들고 멋진 파상 공격으로 검은색 기체를 압박했다. 마치 몇 년이나 함께 싸워 왔던 것처럼 키라와 아스란은 호흡이 맞는 연계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서로 적으로 싸워 오면서 상대의 전투 습관과 호흡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지만, 키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적대하며 싸워 왔던 상대에게 등을 맡긴다는 행위가 위화감과 동시에 쑥스러운 행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 때, 오브 함 위에 있던 청록색 기체가 점프하면서 거대한 빔 포를 쏘았다.

"아스란!"

키라의 부름에 아스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위!」

바로 위에서 태양을 등진 카키색 기체가 완만하게 구부러진 낫을 들고 덮쳐 왔다. 두 기체는 곧바로 떨어져서 그 공격을 피한 후, 키라가 빔 라이플로 뒤쫓듯 저격했다. 그러나 빔은 다시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튕겨 나갔다. 동시에 키라는 저스티스가 리프트(패툼-00)를 분리해서 쏘는 것을 보고 바로 뛰어 올라 피했다. 프리덤에 의해 가려져 있던 그 공격에 카키색 기체는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패툼-00과 충돌했다. 그 곳에 키라가 레일 포를 쏘아 넣었다. 그 때 아래 쪽에서 강렬한 빔 포가 쏘아 올려지자, 키라와 아스란은 그것을 피했다. 하지만 사선 상에는 카키색 기체도 있었다. 그 일격은 카키색 기체에 명중하기 직전 편향의 영향으로 생물처럼 구부러졌다.

"……? 이 녀석들…."

카키색 기체가 피한 빔은 그대로 검은색 기체로 날아갔고, 그 기체는 간발의 차이로 그것을 피했다.

「같은 편도 태연하게…?」

아스란도 곤혹스런 목소리를 흘렸다. 3기는 서로가 경쟁하듯 프리덤과 저스티스를 향해 돌진해 왔다. 사선이 뒤엉키며 동료기를 스치지만 마음에 두는 기색도 없었다. 너무도 엉망진창인 전법에 키라와 아스란도 상대의 공격을 예측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적기의 움직임이 갑자기 무뎌졌다. 공격을 멈추고 잠시 관성에 따라 낙하했다.

'뭐지?!'

예측할 수 없는 적이어서 키라와 아스란은 다음 행동에 대비하여 방어 자세를 취한 채 상대의 동향을 살폈다. 그런데 비행 능력이 없는 청록색 기체를 모빌 아머 형태로 변한 검은색 기체가 갈고리로 붙잡더니 3기는 모함을 향해 철수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키라는 무심코 중얼거리며 철수하는 3기의 신형 모빌 슈트를 지켜 보았다.

 

 

그 얼마 전 지구 연합군 기함 하우웰에서는 물터 아즈라엘이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직도 군 본부를 제압하지 못했습니까? 이상하네요."

그 손가락은 조급하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사령관 댈러스는 그 말에 발끈한 듯 비꼬았다.

"그렇게 자랑하시던 신형이 생각만큼 활약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만?"

그러자 아즈라엘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부터 그가 자랑하던 신형 기체 '캐러미티', '레이더', '포비든'은 미확인 기체 2기에 묶여 있었다. 기동성이나 화력 면에서 3기와 동등한…, 아니 어쩌면 그것을 초월하는 성능을 보이는 기체였기에 육안으로는 그 전투의 양상을 쫓아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저 두 기체를 상대한다면 아무리 GAT-X넘버의 차세대 기체라고 해도 쉽게 결판을 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상대는 2기에맡기고 캐러미티가 신속하게 군 본부를 치면 될 텐데. 단독으로 그것이 가능한 기체라고 아즈라엘은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쪽으로 마음이 쏠려 버리는 것이 그 파일럿들의 단점이었다.

"그나저나 아크 엔젤 급의 1번 함이 살아 있었을 줄이야…."

아즈라엘은 오브 함대 속에서 한층 돋보이는 그 함에 시선을 돌렸다. 댈러스가 벌레를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내뱉었다.

"탈주함입니다."

"그것이 어째서 오브 따위에 있는 거죠? 이미 데이터도 다 수집했으니 필요 없는데요, 저거."

"머지 않아 눈 앞에서 사라질 겁니다."

'무례한 사령관 치고는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군.'

그렇게 생각하고 아즈라엘이 눈을 가늘게 떴을 때, 돌연 신형 기체 3기의 움직임이 이상해지더니 이 쪽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캐러미티, 레이더, 포비든, 귀환합니다!"

오퍼레이터의 곤혹스러운 목소리에 아즈라엘이 움찔하며 벌떡 일어섰다. 댈러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고?" 하며 중얼거렸다.

"쳇…! 타임 오버인가…."

아즈라엘은 밋밋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작게 내뱉었다.

"쓸모 없는 놈들…!"

귀환한 3기는 전투에서 보여 주던 모습과는 딴 판으로 느릿느릿 움직여서 해치에서 격납고로 수용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게?!"

사령관이 돌아보며 질책하자, 아즈라엘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아, 그만 해요, 그만. 잠깐 쉬자는 소립니다, 사령관."

너무도 제멋대로인 발언에 댈러스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게다가 아즈라엘은 댈러스로서는 더욱 믿기 어려운 말을 꺼냈다.

"잠시 후퇴합니다. 전 군 철수."

"뭐라고?!"

물고 늘어지는 사령관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차피 대거 만으론 어떻게 해 볼 수 없습니다. 오브의 저력은 생각했던 것 이상인 것 같군요."

아즈라엘은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은 사령관의 얼굴에 묘하게 차가운 빛이 깃든 눈길을 돌렸다.

"그것을 빼고 싸우면 전멸합니다."

위협하는 것 같은 발언에 댈러스는 잠시 기가 꺾였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미확인 모빌 슈트 2기는 3기의 신형 기체가 없으면 막을 수 없다. 만약 저 것이 함대를 향해 왔다면 몇 척이 격침되었을지 알 수 없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고 오퍼레이터에게 명령을 내렸다.

"신호탄을 쏴라! 일시 후퇴!"

신호탄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마류 일행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수…?"

오노고로 섬의 군 사령부에서도 역시나 그 신호의 의미를 알고 있는 카가리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신호를 본 전투기와 모빌 슈트 부대가 모두 오브에서 철수하는 것을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3기의 모빌 슈트가 귀환할 때까지 전황은 일방적으로 그 쪽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대로 가면 몇 시간 이내에 오노고로는 함락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다들 철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생각지도 못했던 휴식 시간에 한숨을 돌렸다. 그래 봤자 피할 수 없는 결말을 조금 뒤로 미룬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해상에서는 물러가는 적함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키라가 꿈에서 깬 듯 눈을 돌렸다. 그 곳에는 마찬가지로 공중에 머물러 있는 붉은색 기체가 있었다. 키라는 선을 긋듯 그 기체에서 조금 거리를 벌리고 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와 준 건 고마워."

어색한 목소리로 키라는 눈 앞의 기체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진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키라는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스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기체와 키라 자신은 현재의 오브에 필요한 힘이다. 방심하다 잃는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다.

잠시 망설이는 듯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저스티스는 싸울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려는 듯 라이플을 내리고 흉부 위쪽의 해치를 열었다. 키라의 마음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흔들렸다. 열린 해치 아래에서 시트가 올라와 아스란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나는….」

주저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전해졌다.

「그 기체…, 프리덤을 탈환하거나 파괴…하라는 명령을 본국에서 받았어.」

방아쇠에서 떨어져 있던 키라의 손가락이 다시 떨리면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 시야 속에서 아스란이 뭔가 결단한 듯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너와 그 우군에 적대할 생각이 없어!」

"아스란…."

키라는 눈을 크게 떴다. 아스란은 괴롭게도 들리는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 너와….」

두 기는 파괴된 흔적이 생생한 오노고로 섬의 해안 부근에 내려섰다. 마주 보고 선 기체에서 줄 사다리로 내려 오면서 키라는 아스란이 마찬가지로 땅에 내려 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두 기체를 발견한 오브 병사와 카가리 일행은 다가가다가 아스란의 파일럿 슈트를 확인하자, 놀라서 멀찍이 둘러싼 채 멈추어 섰다. 키라는 술렁이는 고동을 억누르며 조금 떨어져 있는 아스란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상대 역시 뜻을 굳힌 듯 이 쪽으로 걸어 왔다. 지켜 보고 있던 오브 병사들은 키라를 지키기 위해 갑자기 나타난 자프트 병사에게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키라는 그 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는 적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카가리가 퍼뜩 놀랐다.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아스란의 검은 머리와 꾹 다문 입술, 그리고 바닷빛 눈동자가 점차 뚜렷해지자 키라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타까워서 서로 외치면서 따졌었다. 함께 가자는 아스란의 말을 거부하고 이 쪽 편을 선택했다. 왜 그와 싸워야 하느냐며 울었다. 그 때는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것을 받아 들였던 자신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도 이 섬에서의 일이었다.

「토리….」

그 때처럼 머리 위를 토리가 날다가 키라를 발견하고 그 어깨에 내려 앉았다. 그 때는 펜스로 가로막힌 상태에서 만지지도 못하고 마음껏 말도 나눌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는 펜스의 철망 이상의 것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아무 것도 가로막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마주한 친구의 얼굴을 본 순간 키라의 마음은 단숨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 헤어졌을 때… 열세 살의 봄으로….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함께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겪었으며, 증오를 뛰어 넘어서… 이렇게 다시 같은 땅 위에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무서울 만큼 진지한 얼굴로 이 쪽을 쳐다보는 아스란의 눈이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키라 역시 가슴이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아스란…."

간신히 쥐어 짜듯 부르자, 아스란도 굳게 다문 입을 억지로 열고 신음하듯 말했다.

"키…라…!"

마치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 왠지 이대로 30분 정도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 하는 게 아닐까? 울고 싶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심정으로 키라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너희들!"

카가리가 외치면서 달려 왔다. 키라의 머리를 언뜻 스친 불길한 예감. 그대로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두 사람의 목을 끌어 안았다.

"이… 바보─오오!"

키라와 아스란은 카가리에게 눌린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카가리가 다시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들을 올려다 보자, 두 사람 모두 눈짓을 나누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재회를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녀 덕분에 방금 전의 어색함은 완전히 풀리고 두 사람은 열 세 살 때처럼 서로 웃을 수 있었다. 그것은 파괴와 상실 속에서 싹튼 조그마한 희망의 싹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스란은 할 말을 잃었다. 이번 지구 연합군의 오브 침공에 대해 키라가 설명해 준 것이다. 오브가 지구 연합군에도 자프트에도 붙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고 한 것이 침공의 계기가 되었다고. 물론 자프트 입장에서는 오브가 연합에 가담하면 곤란해진다. 그러나 방관자 입장에서 보면 오브의 선택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이상은 좋지만 그러다 나라가 망하면 본전도 못 찾는 것 아닌가. 물론 키라도 그런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힘들다는 건 알고 있어…."

저 쪽에서 음료수 컵을 들고 온 카가리가 두 사람에게 그것을 건네고 그대로 옆에서 귀를 기울였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는 아크 엔젤 승무원들과, 그리고 무슨 까닭에서인지 그들과 함께 오노고로에 있었던 디아카가 멀리서 지켜 보고 있었다. 키라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는 온화한 미소를 떠올리고 힐끔 카가리를 쳐다보았다.

"카가리 아버지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니까…."

그들이 있는 격납고에서는 모빌 슈트의 보수와 정비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고, 두 사람의 등 뒤에는 증인처럼 프리덤과 저스티스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오브가 지구군 쪽에 붙으면 대서양 연방은 그 힘을 이용해서 플랜트를 공격하려고 할 거야."

키라는 말하고 물끄러미 아스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자프트 편에 붙어도 마찬가지야. 다만 적이 바뀔 뿐…. 그래서는 어쩔 수 없어."

아스란은 멍하니 키라의 말을 들었다.

"그런 건 이제 싫어, 나는. 그래서…."

"하지만…!"

아스란은 그런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을 말리기 위해 반론하려 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키라의 맑은 시선에 말문이 막혔다. 얼마 후 키라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네 동료…, 친구를 죽였어…."

갑자기 그 사실을 꺼내자 아스란의 마음은 저절로 가슴에 박혀 있는 기억을 되살렸다. 니콜…!

"하지만 난 그 사람을 몰라. 죽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어…."

키라는 컵의 내용물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조용히 말했다.

"너도 토르를 죽였어…."

아스란은 퍼뜩 놀랐다. 자신이 죽인 키라의 동료…. 분노에 사로잡혀 별 생각 없이 박살 낸 조종석…. 그 때까지 먼 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연합 제복 차림의 소녀가 희미하게 몸을 경직시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너도 토르에 대해서는 몰라…. 죽이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

아스란은 키라의 말을 생각했다. 그렇다. 자신은 그 '토르' 개인이 미워서 죽인 것은 아니다. 그가 제거해야 할 적이었기에,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기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죽였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어떤 것을 사랑했는지….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다. 그것이 군인인 자신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키라는 다르다.

"난… 너를 죽이려 했어…."

아스란은 중얼거렸다. 키라를 알고 있었다. 울보에 응석받이라 항상 아스란을 의지했으며, 어떤 식으로 웃는지, 어떤 일에 눈물 흘리는지, 쭉 봐 왔던 상대를 죽이려고 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증오심으로.

'그가 적이었기에.'

그러나 키라는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아스란…."

하지만 그래서 그들은 깨달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적'의 얼굴을 알고 있기에 죽이는 것을 주저했고, 이해 받지 못해서 답답하게 생각했으며, 증오해서 죽인 후에도 그 죽음을 아픔으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싸움의 허무함, '적'이라는 개념의 어리석음, '전쟁'이라는 시스템의 비인간성을.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계라면 좋겠어."

키라는 문득 먼 곳을 보는 듯 시선을 들었다.

"그런 세계에 쭉 있을 수 있다면…."

싸움이 없는 세계…. 아스란도 상기했다. 싸움 따위는 무관하게 키라와 함께 지낸 그 어린 시절…. 그것이 그대로 계속 되었다면…. 전쟁이 아니었다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집어 삼키고, 모두가 적과 아군으로 나뉘고, 얼굴도 모르는 '적'에 대한 증오심만이 배양되는 이런 환경만 없었다면…. 유니우스 세븐이 붕괴되었을 때, 그 때부터 자신의 인생은 바뀌고 말았다. 전쟁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적'을 죽이는 이 조국을,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행위라 믿고 싸웠고 지금까지 그런 자신의 행위에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키라와 재회하기 전까지는…. 키라의 목소리에 괴로움이 더해졌다.

"하지만… 전쟁은 점점 확산되기만 할 뿐이어서…."

빼앗겼기에 빼앗고, 당했기에 반격한다. 알래스카와 파나마를 보라. 사람이 그것을 어느 정도의 규모로 저지를 수 있게 되었는지를…. 신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이 모두 같은 씨앗인 동포를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베어 버렸다. '적'인 존재는 동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죽여도 상관 없다는 것.

─이기기 위해서 필요해졌다, 그 에너지가….

아버지의 말이 귀에 되살아나서 불현듯 아스란은 몸을 떨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플랜트와 지구는 모두 멸망할 수 밖에 없게 돼…."

'적'이기에…, 같은 편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을 죽일 수밖에 없다. 과거 아스란이 생각했던 것처럼 모두가 생각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정말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만다. 아스란은 키라를 쳐다보았다. 키라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키라는 아스란이 깨달은 것을 알고 미소 지었다.

"그래서 나도 싸우는 거야…."

"키라…."

아스란은 불현듯 목에 칼이 닿은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매달리는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뿌리치고 키라는 일어섰다.

"비록 지키기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나는 이미 총을 쏘았으니까…."

키라가 한 말은 알 수 있다. 이해가 된다. 동요하는 아스란을, 키라가 발판을 올라 가려다가 돌아 보았다. 그 눈에 희미한 괴로움이 어른거렸다.

"우리도 다시 싸우게 될까…?"

그 말에 충격을 받고 아스란은 친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키라는 슬픈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지만 마치 모든 것을 용서하듯 미소 지었다.

"…이만 작업장에 돌아가야겠어. 공격이 언제 재개될지 모르니까."

태연한 말투로 말하고 그대로 떠나 가려는 키라에게 아스란은 매달리듯 말을 걸었다.

"한 가지만 묻고 싶어. 프리덤에는 뉴트론 재머 캔슬러가 탑재되어 있는데, 그 데이터를 넌…."

"여기서 그것을 뭔가에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키라는 발을 멈추고 아스란의 눈을 쳐다보았다.

"내가 쏠 거야."

그 기백에 아스란은 할 말을 잃었다. 물을 것까지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키라가 자신과 같은 기분이었다면, 같은 의문을 느끼고 행동하고 있다면, 뉴트론 재머 캔슬러를, 그것이 초래하는 힘을 봉인하고 싶다고는 생각해도 쓰게 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 힘을 쓰면 현재 오브에 닥친 위기에서 피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그들은 이기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바람은 적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 하나의 적 기와 싸우며 격파하고 있는 이상 같은 행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양자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사이클롭스로, 핵 미사일 한 방으로 수천, 수만 명을 무덤덤하게 죽이는 행위는 어딘지 너무도 인간성이 결여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전쟁'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그들이 싸우고 있는 '적'이다. 그러나 아스란은 군인이다. '전쟁'이라는 시스템의 일부다.

─그렇다면 키라는 다시 당신의 적이 될지도 몰라요….

라크스의 말이 귀에 되살아났다.

─적이라면 저를 쏘실 건가요, 자프트의 아스란 자라?

아스란에게 주어진 임무는 프리덤의 탈환 혹은 파괴, 파일럿과 그리고 그와 접촉한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 시설, 모든 것의 제거. 만약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는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오노고로 섬…, 아니 어쩌면 오브 전체를 모두 없애야 하는 셈이 된다. 모든 것의 제거….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는 휴식을 맛보고 있는 파일럿들, 쉬는 시간도 아껴 가며 모빌 슈트와 함정을 보수하고 있는 사람들, 명령을 전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 다니는 군 관계자…, 눈 앞에 서서 몰래 아스란을 지켜 보고 있는 카가리, 그리고 키라까지… 그들 모두를 죽여야 한다. 이렇게 새삼 생각해 보면 그 명령 자체가 너무도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프트의 아스란 자라라면 그것을 해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한 개인으로서의 아스란은 그 명령에 대해 의문과 혐오를 품었다. 고민하는 아스란에게 갑자기 카가리가 말을 걸었다.

"좋지…?"

"음?"

눈을 들자 소녀는 훗 하고 웃었다.

"…키라가 살아 있어서."

문득 가슴을 찔린 아스란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응…."

그랬다. 그녀는 키라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르키오 도사의 섬에서 구조되었을 때 아스란 자신이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구나."

그녀의 심정 따위는 생각해 줄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나라에 위기가 닥쳤음에도 아스란의 심정을 배려해 주는 다정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스란이 그렇게 말하자, 카가리는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말했어, 확실히. 건성이었지만."

아스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나?"

"응."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때 일 자체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카가리가 울면서 자신에게 따졌던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아….'

아스란은 불현듯 깨달았다. 키라를 죽인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잔인한 짓이라고 말한 것은 그녀 뿐이었다. 그녀만이 아스란을 책망했다. 하지만 그 때 책망 받았기에 아스란은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죽임을 당했다고 죽이고, 죽였다고 죽임을 당하면 그걸로 정말 평화로워지는 거야…?!

그녀는 그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언젠가는 끝내야 한다고.

"키라, 변했지?"

카가리가 마치 자랑하듯 말했다. 아스란은 프리덤 앞에서 다른 파일럿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키라를 눈부신 듯 쳐다보았다.

"…아니."

그가 미미하게 고개를 젓자, 카가리는 조금 불만스럽게 "그래?" 라고 되물었다. 아스란은 미소 지었다.

"역시 녀석이야…."

울보에 응석받이. 하지만… 누구보다 고집이 세고, 한 번 결정하면 결코 굽히지 않는다. 키라는 옛날부터 그랬다. 아스란이 걸음을 내딛자, 카가리는 허둥지둥 따라왔다.

"이 봐, 저기… 너, 어떻게 할 거야, 앞으로…?"

아스란은 발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어."

"또?"

카가리가 못 말리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조금 못마땅했다. 그러니까 마치 자신이 항상 고민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스란은 항상 고민하고 있었다. 계속, 계속…. 키라가 눈 앞에 나타난 이후로. 방금 키라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비로소 그가 자신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키라는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지…?'

"하지만…."

아스란은 중얼거렸다.

"이미 대답은 나온 건지도 모르겠어."

아버지의 얼굴이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언제나 값을 매기듯 자신을 쳐다보던 아버지의…. 나아가야 할 길은 알고 있다.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괴로울 뿐….

갑자기 아스란이 나타나서 디아카는 당황했다. 어떻게 아스란이 이런 곳에? 게다가 어째서 연합의 파일럿과 친구인 거냐? 아니 전 연합군이지만…. 너무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서 디아카의 머리는 포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전 연합군 파일럿과 아스란의 대화에서 '토르'…, 밀리아리아의 연인을 죽인 사람이 아스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눈 앞에서 밀리아리아가 어깨를 움찔 떠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대화가 끝나고 아스란의 친구라는 소년이 떠나자, 그녀 역시 몬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디아카는 무심코 그 뒤를 쫓았다.

"아…, 이 봐…."

말을 걸자 밀리아리아는 멈추어 섰다.

"…왜?"

무시 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억누른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 왔기에 불러 세워 놓고도 디아카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음…. 아, 저기… 그 토르라는 녀석을… 죽인 게… 그 녀석…."

"그래서 뭐?!"

밀리아리아는 기세 좋게 몸을 돌려 디아카를 노려 보았다.

'노려 보아야 할 상대가 다르잖아….'

몸을 뒤로 빼면서 디아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밀리아리아는 살짝 눈물을 지으며 소리쳤다.

"넌 못 들었어, 키라가 한 말?"

"아니… 그게…."

"그 사람을 죽이면 토르가 살아 돌아오는 거야?! 아니잖아!"

디아카는 우는 목소리로 소리치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밀리아리아는 외치며 휙 발길을 돌리고 달려갔다.

"아, 이 봐. …기다려!"

디아카는 허둥지둥 뒤를 쫓아 달렸다. 여자를 울린 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니, 이번 경우에는 저 혼자 운 것이 되는 건가?

밀리아리아는 밖으로 달려 나가더니 사람 눈을 피해 격납고 뒤로 돌아가서 타다 남은 나무에 기댄 채 울음을 터뜨렸다. 쫓아 오기는 했지만 디아카는 옆에 다가가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만약 다른 여자, 다른 상황이라면 아마 다가가서 어깨를 안아 주겠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런 짓을 가볍게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대단한 여자라고, 그는 경의까지 담아 생각했다. 코디네이터와 내츄럴 따위는 관계 없다. 그녀 같은 여자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다. 그 키라라는 녀석도 대단하지만, 그녀도 대단하다. 사실은 슬프고 분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연인이 살해되면 그 원수를 증오하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한 법이다. 니콜이 죽었을 때 자신이 품었던 증오심보다 훨씬, 훨씬 강할 텐데. 한 번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녀를 보았기에 '토르'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스란을 미워하지 않고 그 마음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하고 있다. 이렇게 혼자 울면서 혼자 그 마음과 맞서려 하고 있다.

디아카는 아스란과 키라를 떠올렸다.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아마 키라가 그 스트라이크의 파일럿이었던 모양이다. 그 착해 보이는 소년이 자신들과 쭉 싸워 왔던 파일럿이라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아스란은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적이라니. 가령 자신이 지금 밀리아리아와 싸워야 한다면 도저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괴로움을 안고 지금까지 두 사람은 싸워 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디아카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배려해 주는 행위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긴 구속 생활이 그를 바꾸었다. 그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을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생각할 시간 만큼은 남아 돌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정말로 플랜트와 지구는 모두 멸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키라가 한 말은 그런 디아카의 마음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밀리아리아는 울음을 그친 상태였다. 그녀는 디아카의 모습을 발견하자 마치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아…."

"남의 우는 얼굴을 멀뚱 멀뚱 보지 마! 무슨 용건이야?"

"아니…."

그녀는 우는 얼굴도 예뻤다. 그 생각은 처음 봤을 때부터 변함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그녀의 죽은 연인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디아카는 열심히 다른 말을 찾았다. 꼬드기는 말이라면 잔뜩 알고 있었지만 이런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전혀 데이터 베이스에 없다.

"저기… 그러니까, 아스란은 말이야, 고지식할 만큼 성실해서… 그런 것이 열 받는 녀석이지만… 뭐라고 하나? 차, 착한… 녀석이야."

디아카는 허둥대면서 말했다.

"니콜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고 바보 취급했지만, 녀석 만은 잘 챙겨 줬다고나 할까…? 말했잖아? 착한 녀석이라고. 그래서… 그래서… 니콜이… 죽었을 때… 굉장히 자책하고… 그 때 녀석이 대장을 맡고 있어서 더욱 심했다고나 할까…."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모른 채 아무튼 아스란을 옹호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를 칭찬하는 말까지 입 밖에 낸 꼴이 되어서 디아카는 더욱 횡설수설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미, 미안! 녀, 녀석에 대한 이야기 따위는 듣고 싶지 않겠지? 음…."

어떻게든 위로가 될 만한 말을 안 돌아가는 머리로 열심히 쥐어 짜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지금까지 시종 시비 조였던 밀리아리아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뭐?"

"알았다고! 너 정말 코디네이터 맞니?"

"뭐, 뭐라고?"

발끈하는 디아카 앞을 밀리아리아는 전과 마찬가지로 새침하게 지나 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디아카는 귀를 의심했다. 소녀는 아직 붉게 충혈이 된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 번 웃은 후 그를 놔 두고 먼저 가 버렸다. 디아카는 정신을 차리고 걸으면서 내심 생각했다.

'우는 얼굴도 예쁘지만… 역시 웃는 얼굴이 제일인 것 같아….'

 

 

움켜 쥔 주먹에 피가 번질 만큼 문을 계속 두들겼지만 아무도 도와 주러 오지 않았다. 이 곳은 감옥이다. 강철 벽으로 지어진 사방 10미터 남짓의 방에는 진찰대와 흰 조명만 있었다. 원래는 의무실이었던 이 곳의 선반과 진료 기구들은 모두 치워졌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그들이 부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리와 약품 종류도 없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자해를 하는 것을 녀석들은 겁내고 있는 것이다.

올가 사브나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신음하면서 다시 감았다. 조명의 흰 빛이 눈을 찔러서 뇌를 헤집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오한이 엄습해 오나 싶더니, 곧 불타는 듯 온 몸이 뜨거워졌다. 사지는 계속 잔 경련을 되풀이하여 이제는 일어 설 수조차 없었다. 방에 갇혀 있는 '동료들'도 그와 마찬가지의 고총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크로트는 얼마 전부터 지저분한 욕설을 하면서 벽에 쿵 쿵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 소리가 아픈 머리에 울려서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니는 계속 어린 아이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동료'라고는 해도 올가는 그들에게 친밀감이나 공감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니, 그들의 존재를 특별히 의식한 적조차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그저 거추장스럽거나 짜증난다고 의식하는 일이 이런 식으로 가끔 있을 뿐, 다들 자신의 주위를 날아 다니는 벌레 같았다. 그에게는 '적' 쪽이 훨씬 기분 좋은 존재로 생각되었다. 해치우는 순간, 일시적인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조건 지어져 있었다.

이렇게 되기 전의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매일 지급되는 약, 거듭되는 수술, 되풀이해서 귓전에 속삭이는 목소리…. 그런 것들이 올가 일행에게서 생각하는 능력과 기억, 공포를 포함한 여러 가지 감정을 조금씩 빼앗고 있었다. 녀석들은 그런 식으로 최강의 병사들을 만들어 내려고 한 것이다. 코디네이터에 못지 않은 반사 신경, 운동 능력, 내구력을 가지고 있고, 공포에 겁을 내지도 않으며 적을 해치우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최고의 파일럿을. 올가는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최강의 모빌 슈트를 타고 '적'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불태우며 피를 흘리는 것이 최고로 즐거웠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 몸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약만 충분히 지급된다면.

감마 그리펩탄….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쥐고 있는 약의 이름이다. 그들은 이 약을 정기적으로 섭취함으로써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육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약의 효과가 떨어지면 그것은 견디기 힘든 금단 증상을 초래했다. 지난 번 전투에서 그들이 도중에 복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시간 제한' 때문이었다. 첫 실전은 지금까지 경험한 모의전보다 훨씬 높은 운동성과 스트레스… 그리고 쾌감을 그들에게 주었다. 아마 그 때문에 약의 효과가 지속되지 않았던 것이리라. 연구원들은 괴로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표정도 바꾸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격리되었다. 약도 지급 받지 못한 채 온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방치되었다. 아즈라엘의 말에 따르면 '벌'이라고 한다. 벌써 몇 시간 째 방치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며칠일지도 모른다. 사라진 줄 알았던 공포심이 올가의 가슴에 싹텄다. 약이 끊기면 그들은 이 고통 속에서 서서히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어 간다고 한다. 녀석들은 우리들을 '폐기 처분'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닐까? 고통과 공포는 이미 시간이라는 개념을 잃은 그들 앞에서 문에 채워져 있던 열쇠가 열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느릿하게 열린 문을 올가 일행은 침침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문이 열렸다고 해도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들을 가둔 감옥은 그들 자신의 육체였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습니까? 모든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평소의 쾌활한 태도로 함교에 들어온 아즈라엘이 물었다. 댈러스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억지로 그 쪽으로 돌렸다.

"오브에서 재차 회감 요청이 와 있는데…."

그러자 아즈라엘은 경박한 동작으로 손을 저었다.

"아, 아, 이제 안 됩니다, 그런 건. 이 정도 전력으로도 제압하지 못한 나라인데, 위험하기 그지 없다고요."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없애 버리는 편이 후환이 없겠죠?"

한 나라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가벼운 말투였다.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런 것을 결정해 버리는, 애당초 외부인에 불과한 이 남자에게 사령관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우리 쪽 준비는 곧 끝난다! 문제는 그 쪽 아니었나?!"

"이런, 이거 실례."

오, 무섭네, 라고 말하는 듯 아즈라엘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사실 조금도 이 쪽 의향 따위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럼 얼른 재개해 볼까요? '벌'도 이제 충분할 테고."

댈러스는 그가 말하는 '벌'의 의미도 잘 몰랐다. 그 3기의 'G'와 파일럿에 관해서는 모두 아즈라엘과 그가 데려온 연구원의 관할 하에 있어서 댈러스조차 그 실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면 혐오를 느낄 만한 일을 그들이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으니까. 아즈라엘 쪽도 특별히 설명하려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이 쪽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말을 걸어 왔다.

"아무리 테스트라고 해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뭔가를 보여 주지 않으면…. 데몬 스트레이션조차 안 됩니다."

결국 이 남자에게는 댈러스가 듣고 있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인 듯 했다.

"전 함대 출격 준비! 반복한다. 전 함대 출격 준비!"

함교에서 지시를 전하는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격납고에서 모빌 슈트들이 기동했다. 파일럿 소년들은 전보다 강력한 약을 투여 받고 제각각 해치에서 날아 올랐다. 오브에 대한 침공이 재개되었다.

 

 

다들 피폐해진 채 불안감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오브 군 사령부에 그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금세 숨결이 되살아나듯 관련 시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야라퍼스 본도의 행정부에서는 침공 제개 소식을 전해 들은 수장이 놀라 수런거리고 있었다.

"회담 요청에 대한 대답도 없이…!"

"우즈미 님…!"

지시를 요청 받은 지도자는 그 얼굴을 분노로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이 놈들…! 이것이 대답이냐? 지구군은 한 번 적으로 간주하면 더 이상 이야기조차 듣지 않는 거냐?!"

아스란 등이 있던 격납고에서는 다들 발진 준비에 분주했다.

「모빌 슈트 부대, 항공기 부대, 오노고로를 목표로 진격 중!」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며, M1=아스트레이가 차례 차례 출격했다. 독에 들어가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고 있던 아크 엔젤도 다시 발진하여 적 함대를 향했다. 섬 이 곳 저 곳에서 요격 시설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미사일 착탄이 땅 울림이 되어 전해져 왔다.

"키라!"

아스란은 프리덤으로 향하는 키라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쨌든 오브에 승산은 없어! 알고 있지?"

이상은 훌륭하지만 현실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 아니, 이렇게 하루라도 침공을 막아 낸 것 만으로도 선전한 것 아닐까? 더 이상 피해가 나기 전에 투항하든지… 아니면 키라 일행 만이라도 이 나라에서 도망 치든지… 뭔가 그런 것을 제안하기 위해 아스란은 말했다. 키라는 그 말에 한 순간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슬프게 미소 지었다.

"응….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 미소의 온화함에 아스란은 무심코 말을 삼켰다.

"하지만 승산이 없다고 싸우는 것을 그만 두고 시키는 대로 할 수는 없잖아? 필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니까. 그래서… 나도 갈 거야."

키라는 이미 마음을 굳힌 자의 고요한 분위기로 담담히 말했다.

"솔직히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싸우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 그에게 아스란이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키라는 이미 결정했다. 아스란은 지금까지 이런 상태의 그의 마음을 한 번도 바꿔 본 적이 없었다. 동시에 그의 결의는 아스란의 목에 닿은 칼날이기도 했다. 곤혹스럽게 멈춰 선 그에게 마지막으로 키라는 덧없어 보이는 투명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아스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어."

"키라…."

친구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스란은 답답한 마음으로 가냘픈 그 모습이 프리덤의 조종석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좀 더 시간이 있다면 좋을 텐데. 키라와 아버지와 라크스와… 모두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천천히 생각한 후 결정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연합의 함대와 모빌 슈트 부대는 눈 앞에 닥치고 있다. 결단이 요구될 때는 언제나 시간이 부족한 법이다.

"난감하군."

갑자기 등 뒤에서 비꼬는 투의 목소리가 들려 와서 아스란은 돌아 보았다. 디아카가 이미 파일럿 슈트를 입은 채 등 뒤에서 발진하는 프리덤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디아카…."

아스란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곤혹스럽게 쳐다 보았다. 어제 그가 아크 엔젤의 승무원들 사이에 섞여 이 곳에 있었던 것에도 놀랐지만 지금 마치 출격할 것 같은 모습에도 놀랐다.

"너, 저것의 탈환 명령을 받았다며?"

그 질문에 아스란은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그를 보고 디아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 역시 안 되는 거겠지? 우리 자프트가 개입하면."

책망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스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신의 고민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디아카의 눈이 그의 진의를 캐 내려는 듯 움직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스란은 마침내 속마음을 토해 냈다.

"나는 그 녀석…, 그 녀석들을 죽게 놔 두고 싶지 않아!"

충동적으로 그저 바람에 불과한 말을 토해 냈다. 비웃을 줄 알았다. 그러나 디아카는 그 순간 동지를 만났다는 듯 씩 웃었다.

"드물게… 아니 처음으로 의견이 일치했네."

"뭐…?"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아스란의 등을 툭 치고 디아카는 달려 나갔다.

"서둘러. 멍하니 있다가는 다들 당하고 마니까."

밀려 오는 스트라이크 대거 부대 앞에서 키라는 재빨리 조준을 맞추었다. 다음 순간 여러 대의 대거가 카메라를, 무장을, 다리를 공격 받고 전투 불능에 빠졌다. 그러나 곧 뒤 쪽에서 다른 기체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동료기를 뛰어 넘어 밀려 왔다. 완전히 언 발에 오줌 누기지만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 바로 눈 앞에서 응전하고 있던 M1=아스트레이가 빔을 맞고 유폭을 일으키더니 폭발했다.

그 때, 어제의 3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키사카가 정보를 수집한 결과, 최소한의 데이터가 판명되었다. 화력 위주의 장비를 갖춘 청록색 기체는 '캐러미티', 모빌 아머로 변형이 가능한 검은색 기체는 '레이더', 빔을 구부리는 특수 장비를 가진 카키색 기체가 '포비든'…. 각각 GAT-X넘버의 차세대 기체였다. GAT-X131=캐러미티는버스터의 설계 사상을 계승하여 더욱 화력을 강화한 결과, 등에서 돌출된 125mm 2연장 고 에너지 장거리 빔 포 '슈라크', 오른손에 들고 있는 337mm 플라즈마 사보트 바주카 포 '토데스브록', 가슴 중앙부에 뚫린 580mm 복열 위상 에너지 포 '스킬라', 그리고 왼손의 115mm 2연장 충각 포 '케파 츠바이' 실드 등의 괴물 같은 무장을 가지게 되었다. GAT-X370 레이더는 말할 것도 없이 이지스의 변형 기구를 계승한 기체로, 머리 부분과 오른손에 각각 100mm 에너지 포 '존'과 2연장 52mm 초고·초속 방순포를 갖추고 있고, 왼손에는 파쇄구 '묘르닐'이 있으며, 모빌 아머 형태에서 양쪽 어깨로부터 발사되는 76mm 기관포 M3M3과 머리 부분에 80mm 기관포 M417을 갖추고 있다. 그 밖에 갈고리 밑동 부분에는 단 사정 플라즈마 포 '아후라 마즈다'를 장비하여 갈고리로 붙잡은 적을 쏘고 이탈하는 전법을 취할 수 있다. 그리고 GAT-X252 포비든을 특징짓는 것은 에너지 편향 장갑 '게슈마이디히 판자', 그 빔을 굴곡시키는 실드와, 자유자재로 구부러지는 사선을 가진 유도 플라즈마 포 '프레스베르그'일 것이다. 그 특수 무장은 블리츠의 미라쥬 콜로이드와 통한다. 그 밖에 실드에 내장된 88mm 레일 건 '에크잔', 머리 부분의 75mm 대공 자동 발칸 포탑 시스템 '이겔슈테른', 양 팔 부분의 115mm 기관포 '아름포이어'를 갖추고 있고, 손에 드는 무기로 대형 낫 '니즈헤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3기에는 TP(트랜스 페이즈)라는 PS 시스템과는 다른 장갑 시스템이 도입되어 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실체 탄을 무효화하는 PS 장갑과 비슷한 성질의 것인 모양이다.

3기의 'G'는 프리덤을 발견한 순간 다른 사냥감을 무시하고 똑바로 공격해 왔다. 레이더가 기관포, 포비든이 에크잔을 쏘았고, 캐러미티는 모든 포를 난사하며 프리덤을 노렸다. 키라는 필사적으로 기체를 조종하여 회피했다. 저공에서 피한 빔이 해면에 닿자 폭발하듯 수증기가 일었다.

"큭…!"

이래서는 반격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어지럽게 기체를 조종하는 키라의 앞을 번쩍 빛나는 것이 스쳤고, 포비든이 간발의 차로 낫을 휘둘러 그것을 튕겨 냈다. 동시에 캐러미티와 레이더는 각각 다른 방향에서 쏘아진 빔을 간신히 피하고 후퇴했다.

「키라!」

스피커에서 흘러 나온 목소리에 키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스란?!"

포비든을 공격한 RQM 51 바셀 빔 부메랑은 저스티스의 어깨로 분리되어 레이더를 저격한 리프트는 등으로 되돌아 왔다. 그 붉은색 기체를 키라는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어째서…?!"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럼에도 자프트에 소속된 아스란이 어째서? 3기의 'G'와 싸우면서 아스란이 외쳤다.

「우리들도 알고 있어!」

문득 해안 쪽으로 눈을 돌려 보니 버스터가 아크 엔젤을 포위한 전투기들을 향해 초 고 임펄스 장거리 저격 라이플을 쏘며 엄호하고 있었다.

「싸워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아스란…."

키라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스란과 디아카…. 지금까지 몇 번이고 적으로 싸워 온 그들이 키라의 마음을 이해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해치우자!」

아스란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키라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흩어져서 3기의 G를 공격해 갔다.

키라의 가슴을 훈훈하게 한 희망. 그러나 현실은 그들을 차츰차츰 압박해 오고 있었다. 오노고로에 상륙한 대거 부대는 잇달아 군 시설과 M1=아스트레이를 파괴해 갔다. M1 부대 속에서 스트라이크와 버스터는 열심히 침공을 저지하려고 했다. 버스터가 점프해서 쏜 대 장갑 산탄 포가 PS 장갑을 갖지 않은 대거 여러 대를 한 순간에 날려 버렸다. 그러나 1기의 활약으로 막아 낼 수 있는 전세가 아니었다.

해상에서도 아크 엔젤의 고트프리트가 일격에 지구군 함정을 격침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숫자 상의 열세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브 함대는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한 척, 또 한 척 격침되어 이미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함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다들 물러서지 않고 계속 싸우고 있었다.

"전투는 서 아라라기 시가지로 이동. 알겠습니다."

"제３전투 구역 F지휘소는 궤멸했습니다! 이후로 휘하 부대는 B지휘소의 명령에 따라…."

"예…. 예, 알겠습니다. 제 12 방공 대대 궤멸했습니다."

"잔존 M1 부대는 동 이소가미 시 청사에 집결, 부대를 재편…."

오브 군 사령실에서는 오퍼레이터들이 각각 패색이 짙어져 가는 상황을 소상하게 전했다. 오브 전역을 비춘 모니터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나올 만큼 세게 입술을 깨문 채 그것을 쳐다보고 있던 카가리가 그만 참지 못하고 방을 뛰쳐 나가려고 했다.

"카가리…!"

키사카의 손이 재빨리 그 팔을 붙잡아서 멈춰 세웠다. 카가리는 소리쳤다.

"놔! 나도 싸우겠어!"

"바보 같은 소리 마!"

"이런 곳에서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눈에 눈물이 고인 채 호소하는 카가리를 키사카가 꾸짖었다.

"지휘관이 자신의 자리를 떠나면 어떡해! 이제 그만 좀 배워!"

"…하지만!"

참지 못하고 카가리가 오열을 터뜨리자, 키사카는 딱 잘라 말했다.

"우는 것도 안 돼!"

같은 시각, 야라퍼스 섬 행정부 지하 본부에서는 수장들 중 한 사람이 방으로 돌아와 우즈미에게 말했다.

"우즈미 님."

방에는 수장들과 현 대표 호무라의 모습도 있었다. 우즈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준비는 갖춰졌습니다. 작업에는 두 시간 정도 걸린다는군요."

수장의 보고에 우즈미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군. 이미 시간 문제인데…."

모니터에는 시시각각 파괴의 정도가 심해져 가는 시가지와 고전하는 함대, 모빌 슈트 부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우즈미는 느릿하게 일어섰다.

"…좋아. 나도 가겠다."

수장들이 그 말에 숨을 삼켰다. 자신을 응시하는 호무라의 시선을 깨닫고 우즈미는 기묘하게 조용한 시선을 돌렸다. 아스하 가문의 형제는 잠시 묵묵히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역할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 후 우즈미가 명령을 내렸다.

"잔존 부대는 카구야에 집결토록 명령을. 오노고로는 버린다!"

 

 

"오브는 잘 버티고 있군요."

"저 물량 앞에서는 시간 문제겠지만…."

오브 근해에서 이 전투의 양상을 지켜 보는 자들이 있었다. 자프트의 잠수 모함 쿠스토였다. 통제실의 모니터 패널을 쳐다보면서 라우 르 크루제가 중얼거렸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나라야. 지구군이 발끈하는 것도 이해가 돼."

이런 물량을 투입했음에도 이렇게나 버텨 내다니. 영해 선상의 바다 속이라 해상에서의 전투 밖에 모니터할 수 없지만, 또 하나의 주 전장인 오노고로 섬에서도 스트라이크 대거 부대를 상대로 선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 나라에도 모빌 슈트의 실전 배치는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라우는 옆에 서 있는 함장을 쳐다 보며 물었다.

"저 낯선 모빌 슈트들의 데이터는?"

그가 말한 것은 해상에서 어지럽게 교차하며 전투를 계속하는 5기에 대한 것이었다. 그 기동성, 화력, 장갑, 어느 것을 따져 보아도 종래의 것을 크게 웃도는 성능을 가지고 있는 모빌 슈트들이었다.

"최우선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위치가 위치라서…."

"언젠가는 어느 한 쪽과 상대해야 할 날이 올 텐데…."

라우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뭐… 좋아. 자라 의장이 기뻐할 만한 이야깃거리는 되겠지. 뭔가 변화가 생기면 알려 주게."

말을 남기고 그는 옆에 대기하고 있던 이자크를 동반하고 통제실을 나왔다. 이자크는 무뚝뚝하게 침묵한 채 좁은 잠수함 통로를 라우의 뒤에서 걸었다. 라우는 그 얼굴을 힐끔 보고 야유하듯 말을 걸었다.

"따분한 모양이구나, 이자크. 너도 저 안에 뛰어들어 싸우고 싶은 거냐?"

"예…? …아뇨."

이자크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오브는 자프트의 지원도 거부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거듭해서 라우가 말하자, 이자크는 못마땅한 듯 "전 별로…." 라며 우물거렸다. 그런 그를 달래듯 라우가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경과를 보고 나서 카펜테리아로 귀환한다. 파나마에서부터 쭉 좁은 함 내에서 생활하느라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더 참도록 해."

라우는 이자크가 함 내에 갇혀 있는 것을 답답해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의 진짜 불만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자크는 조금 뜸을 들이다 결심한 듯 말을 걸었다.

"대장님…."

"음?"

"뭡니까, 그 여자는?"

돌아 본 상관을 쳐다보며 이자크는 날카로운 어조로 캐물었다. '그 여자'란 라우의 방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구 연합군의 병사인 듯한 소녀를 말한다. 라우는 소녀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았기에 그 존재는 이미 이자크도 알고 있었다.

"포로라면 그처럼 취급하는 것은…!"

존경하는 상관의 생각지 못한 행동에 이자크는 분개하며 조언했다. 그러나 라우가 대답한 것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이자크…, 총을 쏘는 것 만이 전쟁은 아니다."

"예?"

뜬금 없는 말에 이자크는 의표를 찔리고 침묵했다.

"나는 '열쇠'를 찾고 있었다."

라우는 그의 당혹감에 아랑곳도 하지 않고 더욱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운 거다. 아마도…."

'열쇠? 뭔가의 비유인가? 그 소녀가 뭔가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말인가?'

라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인 후 안개 속을 걷는 심정으로 멍청히 서 있는 이자크를 남겨 두고 그 자리를 떠났다. 전부터 라우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많았고, 그 때는 이유를 모르더라도 나중에 돌이켜 보면 그 깊은 생각에 감복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에게 깊은 생각이 있는 것이리라. 아니면 의미심장한 말로 얼버무린 것 뿐인가? 왠지 받아 들이기 힘든 심정으로 이자크는 상관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포비든이 거대한 낫을 휘두르며 프리덤에게 육박해 왔다. 프리덤은 빙글 회전해서 그것을 피하고 몸을 반전시킨 자세 그대로 빔 라이플을 쏘았다.

저스티스는 레이더를 상대하고 있었다. 파쇄구가 붕붕 소리를 내며 날면서 붉은색 기체의 중앙부를 노렸지만, 다음 순간 저스티스는 리프트를 분리시켜 철구는 허무하게 본체와 리프트 사이의 공간을 갈랐다. 저스티스는 라이플을 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레이더에게 육박했고, 그 사격을 피하기는 했지만 레이더는 정면으로 저스티스와 충돌하여 날아가 버렸다. 캐러미티는 저스티스가 분리한 리프트를 향해 등에 있는 슈라크를 쏘았지만 마치 독립된 기체처럼 리프트는 빔 포와 기관포를 연사하며 오히려 캐러미티를 덮쳤다. 빗나간 빔이 바닷물을 증발시켰다.

"쳇…! 끈질기군!"

캐러미티를 조종하는 올가가 증오스럽게 내뱉었다. 그 때, 조종석에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올가는 계기판을 확인하다가 에너지 게이지가 레드 존에 걸려 있는 것을 깨닫고 이를 갈았다.

"제기랄! 이런 바보 같은 모빌 슈트. 벌써 동력이 다 떨어진 거냐?!"

그러자 무전기에서 크로트가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넌 너무 펑펑 쏴 되니까 그래! 멍청아!」

"뭐라고?!"

「돌아갈 거면 혼자 돌아가! 난 모르니까.」

올가는 모니터의 검은색 기체를 노려 보았다. 캐러미티에 비행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열 받는 소리를 한 것이다, 이 녀석은. 그러나 그 때 레이더의 눈 앞에 있는 바다에서 물보라와 함께 붉은색 기체가 튀어 나왔다.

「……!」

크로트는 미처 피하지 못해서 저스티스가 내려친 빔 사벨에 철구가 두 쪽 났고, 기체 일부도 파손되었다. 올가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흥! 바보는 너잖아!"

「뭐라고?!」

소리쳐 보지만 역시 기체가 파손되어 생각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지 크로트는 레이더를 모빌 아머 형태로 전환했다. 이 틈이다 싶어 올가가 냉큼 거기에 올라타자, 곧바로 크로트가 소리쳤다.

「멋대로 타지 마! 이 녀석!」

"시끄러! 냉큼 보급 받으러 돌아가! 너도 그 모양이어서는 별 수 없잖아!"

서로 호통 치면서 그들은 모함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아 있던 포비든은 흰 기체를 상대하고 있었지만, 휘두른 낫이 실드에 막히고 오히려 빔 사벨의 일격을 정면으로 맞을 뻔 했다. 곧바로 샤니는 니즈헤그를 버리고 물러나서 이탈한 동료기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포비든 역시 에너지가 다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하우웰 함교에서 보고 있던 아즈라엘의 유연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 녀석들… 그만큼 강화했는데도 결과를 못 내다니…."

본래라면 배터리가 다 하기 전에 응분의 결과를 내야 할 소재인 것이다. 그 정도의 시간과 돈도 들였다. 모빌 슈트 2기 정도는 해치웠어야 했다. 아즈라엘은 보란 듯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런. 아직 멀었군요."

 

 

오브 전군에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집결 지점은 오브 군도 중 하나인 카구야 섬. 그 곳은 이 싸움의 원인이 된 매스 드라이버 시설이 있는 우주 항이다. 아크 엔젤도 그 섬으로 후퇴하여 현재는 매스 드라이버 시설 가까운 곳에 설치된 가설 독에서 응급 보수를 받고 있었다. 마류 일행은 우즈미의 의도가 매스 드라이버를 등진 채 적을 견제하면서 최후의 항전을 꾀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지구 연합군은 이 시설이 필요해서 오브에 침공한 것이니 시설을 훼손하면 설사 이긴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매스 드라이버 관제실에 호출된 마류 일행은 우즈미 나라 아스하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았다.

"오브에서 탈출하라구요?!"

마류는 자신도 모르게 따지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저희들보고 탈출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즈미 님!"

그들은 원래 지구 연합군이고 의용군으로 참전하고 있기에… 외부인에 대한 배려로 우즈미가 이런 제안을 했나 싶어 그녀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확실히 그녀는 오브 국민이 아니다. 하지만 오브의 법과 이념을 지킨다면 설사 코디네이터라도 받아 들인다고 일전에 우즈미는 말하지 않았던가. 그 이념에 이끌린 자신들도 지금은 어엿한 오브의 국민이다. 그러나 마류의 예상은 다시 빗나갔다. 우즈미는 온화한 눈으로 화를 내는 그녀를 쳐다본 후 그 마음가짐을 칭찬하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들도 이미 알고 있을 거요. 오브가 사라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임을…."

마류는 표정을 굳혔고, 옆에 있던 카가리도 놀라 소리쳤다.

"아, 아버지, 무슨 말씀을…?!"

수장 가의 딸은 그런 미래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류는 알고 있었다. 참전을 결의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오브는 사라진다…. 남해의 낙원, 지구권 전역이 전쟁에 휘말리고 증오심이 세계를 뒤덮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인간으로서 당연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던 매우 한정된 장소. 이 기적의 보석은 아마 오늘을 끝으로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피난했고 지원의 손길도 있으니… 뒷일은 우리들이 책임 지겠소."

우즈미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의 지도자인 이상 자국이 멸망하는 일은 최악의 결말이다. 마류로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이미 이렇게 될 날도 내다 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평화에 익숙한 온화한 국풍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상 사태에 대한 대응은 놀랄 만큼 빨랐다.

"하지만 비록 오브는 사라질지라도 잃어서는 안 될 것이 있소."

우즈미는 온화한 그 눈에 불타는 분노를 드러내며 말했다.

"지구군의 배후에는 블루 코스모스의 리더, 뮬터 아즈라엘이 있소."

뒤늦게 관제실로 들어온 키라와 두 사람의 자프트 파일럿, 아스란과 디아카는 그 말에 표정이 바뀌었다. 마류도 충격적인 사실에 놀람과 동시에 역시나, 라고 생각했다. JOSH-A에서 서덜렌드 대령과 이야기하는 동안 느꼈던 위화감…. 코디네이터에 대한 편견과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 태도는 군 상층부가 이미 블루 코스모스의 사상에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플랜트도 지금은 코디네이터 만이 새로운 인종이라고 주장하는 패트릭 자라의 손에 넘어갔소."

우즈미의 말에 아스란은 괴롭게 고개를 숙였고, 키라와 디아카는 위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마류는 납득했다. 그 역시 그런 플랜트의 실정에 의문을 품고 있었기에 이 쪽 편에 서서 함께 싸운 것이다. 마류 일행이 지구 연합군에 의문을 품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만 알면 그녀는 충분했다.

"이대로 가다간 세계는 이윽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끝없이 싸우는 곳이 될 거요…."

우즈미는 엄숙한 어조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 것이어도 좋은 거요, 당신들의 미래는?!"

마류는 그제야 우즈미의 의도를 깨달았다. 여기서 그들이 오브와 함께 사라지면 세계는 이대로 내츄럴과 코디네이터로 나뉘어 계속 싸울 뿐이다.

"다른 미래를 아는 자라면 지금 이 곳에 있는 작은 불씨를 가지고 그 곳으로 향하시오."

우즈미의 무거운 말이 가슴 속에 울려 퍼졌다. 무심코 쳐다본 마류의 눈을 바라보며 '오브의 사자'는 문득 아버지처럼 따뜻한 눈을 보였다.

"다시 험난한 여정이 되겠지만… 알아 주길 바라오, 마류 라미아스…."

우즈미는 마류 일행을 외부인이라고 생각해서 그 목숨을 돌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를 잇는 자의 하나로, 여기서 사라지는 것보다 더욱 험난한 길을 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류는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의 중대함을 절실히 느끼고 무심코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우는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 들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순간 그녀는 몸 안으로 힘이 흘러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더 이상 함장이라고 해서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다.이 곳에 있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독립적으로 함께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맹우들. 혼자 다 짊어지지 못하더라도 함께 거들어 줄 동료들이 있다. 그녀는 똑바로 우즈미의 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작아도 강한 불은 꺼지지 않는다고… 저희들도 믿고 있습니다."

나라는 멸망한다. 남양의 보석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진 후에도 계속 빛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분주하게 시간이 지나갔다. 아크 엔젤 주위에서는 파손된 부위의 수리를 서두르면서 양 현 측면부에 대기권 이탈용 보조 부스터를 다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쿠사나기의 예비 부스터를 유용한 것이지만 파워는 충분할 것이오.」

모니터를 통해 수장 중 한 사람이 사이에게 설명했다. 사이는 매뉴얼을 들고 지시 받은 대로 계기를 조작하여 프로그램을 입력했다.

「로엔그린의 일제 발사와 동시에 풀 파워가 되오. 그러면 포지트로닉 인터피어런스(양전자 간섭)를 일으켜서 더욱 가속하겠지….」

파일럿 석의 노이만은 토노무라를 보좌하여 대기권 이탈 과정을 체크하고 있었다.

한편, 매스 드라이버에서는 오브의 우주함 쿠사나기의 제４구획이 셋팅된 채 사출용 보호 커버를 끝 부분에 달고 있었다. 과거 헬리오 폴리스와의 정기편으로 이용되었던 이 함은 그 핵이 되는 제４구획만을 분리하여 지상과 왕복하는 효율 좋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아크 엔젤 쪽은 어떻게 되어 가나?"

우즈미는 분주하게 관제실을 돌아 다니면서 지시를 내렸다. 오퍼레이터들은 이미 탈출했기 때문에 관제를 맡고 있는 것은 수장들이었다.

"현재 부스터의 최종 점검 중입니다."

"서두르라고 하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카가리는 그런 아버지의 주위를 따라 다니며 얼마 전부터 계속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아버지, 탈출할 거라면 다 함께 가요! 남겨 두고 갈 수는 없다고요!"

그녀는 키사카를 비롯한 승무원, M1=아스트레이 부대와 함께 쿠사나기를 타고 탈출하도록 명 받았지만, 우즈미를 비롯한 수장들은 이 곳에 남는다고 한다. 나라가 이렇게 된 것에 책임을 느끼는 것은 알지만, 지구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을 운명을 생각하면 자신만 도망칠 수는 없다. 지구 연합군도 일국의 지도자들을 발견하는 대로 죽이지는 않겠지만, 구속하여 이 사태의 책임을 지게 할 게 뻔하다. 그 쪽에서 명분도 없이 일방적으로 쳐들어 온 것 아니냐고 말해 봤자 통할 리 없다. 전쟁에서는 승자만이 옳은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가 자신의 의지를 굽히는 일은 없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아버지를 쫓아 다니며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고 했다.

 

 

"뭐 이대로 카펜테리아로 돌아가도 되지만 말이야."

디아카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적대하고 있는 것은 지구군이고…."

파일럿 소년 세 사람은 가설 독 앞에서 적이 공격해 올 때까지의 짧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란은 디아카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싸우고 있는 상대는 지금까지와 같다. 그러나 키라 일행과 함께 간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다음에는 플랜트와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아카는 별로 걱정되지도 않는 듯 완전히 아크 엔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처럼 보였다. 그저 '녀석들을 죽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만으로. 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 아스란이 고민하고 방황한 결과 가슴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결국 그 마음이었다. 올바른 일을 하려는 키라 일행을 돕고 싶다는 마음.

"…'자프트의 아스란 자라'라고 했던가?"

라크스의 말을 떠올리고 아스란은 문득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거야…."

키라와 디아카가 묻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깨닫고 아스란은 말했다.

"난… 군의 명령에 따라 적을 해치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어쩔 수 없다고…, 그래서 이런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면 된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사실 무엇과 싸워야 했지?"

이렇게 된 후에도 그것은 아직 구체적으로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직에 있으면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적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도 없이 죽이는 게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향하는, 내츄럴이 모두 멸망한 세계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은 '자프트의 아스란 자라'가 아니라 그저 아스란 자라로 살고 싶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반론하고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다. 더 이상… 키라와 싸움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입을 다문 아스란에게 키라가 웃음을 보였다.

"함께 가자…, 아스란."

어린 시절부터 조금도 바뀌지 않은 꾸밈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함께 찾으면 돼, 그것도…."

'그렇구나.'

아스란은 깨달았다. 고민해도 되는 건가? 길이 아직 흐릿할 뿐 잘 보이지 않더라도 더듬더듬 나아가면 된다. 오늘 대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내일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스란과 디아카는 그 미소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해에 정박한 지구 연합군 함대에서 움직임이 일었다.

"레이더에 반응이네! …모빌 슈트로군!"

수장들 중 가장 연장자인 마이리가 소리치자 관제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경보가 울려 퍼지자 키라 일행은 자신들의 기체를 향해 달려갔다.

"라미아스 님, 발진을!"

우즈미가 아크 엔젤을 재촉했다. 카가리는 아직 그 옆에 선 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살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키라 일행은요?」

마류의 물음에 키라가 곧바로 대답했다.

「발진을 엄호하겠습니다! 아크 엔젤은 떠나십시오!」

프리덤, 저스티스 모두 단독으로 대기권 돌입이 가능한 기체이기에 함에 수용되지 않더라도 한계까지 싸울 수 있다. 버스터 만은 단독으로 비행할 수 없고 공중전이 어려운 까닭에 아크 엔젤에 탑승했다.

「쿠사나기는요?!」

"바로 내보내도록 하지. 미안하네!"

우즈미의 대답에 카가리는 이별이 눈 앞에 닥친 것을 느끼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넌 언제까지 꾸물거리고 있을 거냐? 어서 가도록 해라!"

우즈미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아크 엔젤의 엔진이 점화되어 하얀 거함이 가설 독에서 나와 발사 태세에 들어갔다.

「기수를 위로 20, 로엔그린 스탠바이!」

"모빌 슈트 접근! 거리는 15로군!"

모니터에 해수면을 스치듯 날아 오는 신형 'G' 3기가 포착되었다.

「발진을 서둘러 주세요!」

키라의 말과 함께 프리덤과 저스티스가 각각을 요격하기 위해 날아 올랐다. 해상에서는 아크 엔젤이 부상하며 기수를 들고 하늘을 향하는 자세가 되었다.

「로엔그린 발사!」

마류의 호령과 함께 양 전자 파성포 로엔그린이 불을 뿜었다. 양 전자 간섭에 의해 아크 엔젤은 단숨에 가속해서 궤도 이탈 속도인 시속 27,800km에 도달했고 몇 분 후에는 대기권을 이탈했다.

「온다, 키라!」

아스란이 말을 걸어 왔다. 모빌 아머 형태의 레이더에 탄 캐러미티가 멀어져 가는 아크 엔젤에 거대한 포를 겨누었다. 키라는 프리덤을 조종하여 저스티스와 함께 엄호 사격을 개시했다. 레이더는 옆으로 미끄러지듯 그 사격을 피했지만 그 틈에 아크 엔젤은 사정 거리에서 벗어났다.

'남은 것은 쿠사나기 뿐…!'

포비든이 바다 속에서 튀어 나오며 프레스 베르그를 쏘았다. 저스티스는 마치 생물처럼 구부러지는 빔을 피하면서 라이플로 응사했다. 키라는 캐러미티가 연사하는 빔을 오른쪽 왼쪽으로 피하고 실드로 막으면서 빔을 쏘았다.

한편 매스 드라이버 관제실에서는 언제까지고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 카가리를 우즈미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억지로 끌고 가고 있었다.

"아버지…!"

카가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고 했다.

"싫어요! 아버지가 남으면…!"

눈물이 고인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우즈미는 그녀의 팔을 잡아 끌면서 엄격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역할, 너에게는 너의 역할이 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젓는 카가리를 노려보며 우즈미는 호통 쳤다.

"마음을 계승할 사람이 없으면 모두 끝나 버린다! 어째서 그것을 모르는 거냐?!"

카가리는 움찔 침묵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의 의미는 알 수 있다. 자신의 역할도…. 오브가 지구 상에서 사라진다면 더욱 자신이 그 마음을 지켜 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헤어진다면 두 번 다시 아버지와는 만날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그녀의 마음은 이별을 계속 거부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 때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거의 끌려 가다시피 매스 드라이버 발사장에 도착하자, 쿠사나기의 해치에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카가리를 안절부절 못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즈미 님…, 카가리…!"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키사카에게 우즈미는 집어 던지듯 카가리의 몸을 밀쳐 냈다.

"서둘러라, 키사카! …이 바보 같은 딸을 잘 부탁한다."

"예…!"

키사카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지금까지 모셔 왔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카가리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우즈미는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라, '오브의 사자'의 딸이."

"하지만…!"

우즈미의 손이 사랑스러운 듯 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어렸을 때 쭉 해 왔던 것처럼. 충돌한 시기도 있었지만 카가리는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했다. …아니, 한 번은 반항했기에 더욱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없는 애정을 쏟아 부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치기 어린 반항심으로 몇 번이고 철없는 말을 퍼부었다. 이렇게나 일찍 이별이 찾아 올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했을 텐데. 자신은 아버지에게 무엇 하나 해 준 것이 없다. 받았던 사랑을 조금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와는 헤어지지만 너는 혼자가 아니다…."

우즈미는 잠시 망설인 후 품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형제도 있다…."

카가리는 그가 내민 사진을 받아 들었다. 젊은 여성이 양 팔에 한 명씩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별 생각 없이 뒤집어 보다가 그 곳에 쓰인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형제도 있다…."

카가리는 그가 내민 사진을 받아 들었다. 젊은 여성이 양 팔에 한 명 씩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별 생각 없이 뒤집어 보다가 그 곳에 쓰인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키라와 카가리'.

경악하여 자신을 쳐다보는 딸에게 우즈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

키라와 자신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려 했을 때 우즈미는 미소 지으면서 한 발짝 물러섰다.

"네 아버지라서 행복했다…."

그 말에 지금까지의 16년 모두가 담겨 있었다. 그가 떨어지자 그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듯 해치가 닫혔다.

"아앗…!"

카가리는 해치에 매달렸다. 우즈미가 서 있는 계단이 멀어져 갔다. 유리창을 통해 자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버지가 보였지만 그것도 곧 두꺼운 격벽으로 가로막혔다.

"아버지!"

카가리는 허무하게 눈 앞의 해치를 두들겼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발사를 알리는 램프가 점멸하더니 벨이 울려 퍼졌다.

「디비전 C 이외의 전 요원 퇴거를 확인. 올 시스템즈 고….」

관제실의 목소리가 지상을 떠날 때를 고했다.

「파이널 런치 시퀀스 스타트…. 하우메아의 가호가 있기를….」

조용한 기원과 함께 쿠사나기가 레일 위를 힘차게 미끄러졌다. 지금까지 수백 번이나 되풀이해 온 시퀀스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다.

키라는 매스 드라이버에서 굉음이 들려 오는 것을 듣고 저스티스 쪽에 대고 말했다.

"아스란!"

「그래!」

발사 시설에서 총알처럼 쿠사나기가 발진했다. 프리덤과 저스티스는 3기의 'G'에게 빔 라이플을 쏘면서 매스 드라이버로 향했다. 하늘을 향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매스 드라이버 위를 서서히 가속하면서 쿠사나기가 활주해 갔다. 3기는 키라 일행의 의도를 깨닫고 보내 주지 않겠다는 듯 격렬하게 포화를 퍼부었지만, 매스 드라이버가 훼손되는 것을 겁냈는지 2기를 명중시키지 못했다. 가속하는 쿠사나기를 뒤쫓아 가서 프리덤이 손을 뻗었다. 상대 속도를 맞춘 뒤 선체의 튀어나온 부분을 간신히 붙잡고 키라는 돌아 보며 저스키스에 손을 뻗었다. 뒤처져 있던 저스티스가 버니어 슬러스터를 최대 출력으로 내뿜었다.

"크윽…!"

기회는 이번 한 번 뿐이다. 키라는 모든 신경을 모빌 슈트의 손 끝에 집중시켰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저스티스가 뻗은 손을 프리덤의 손가락이 꽉 붙잡은 후, 그대로 힘차게 끌어 당겼다. 저스티스도 무사히 쿠사나기에 매달릴 수 있었다. 격렬하게 진동하는 선체에 몸을 기대면서 키라와 아스란은 호흡을 맞춘 듯 아직도 쫓아 와서 빔을 쏘는 3기에게 포구를 겨누었다. 프리덤의 레일 포와 저스티스의 빔 포가 불을 뿜으며 적기의 앞에 있는 바다를 때렸다. 격렬한 물보라와 수증기가 일며 3기의 시야를 십여 초 정도 가렸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쿠사나기는 레일에서 사출되어 곧바로 성층권으로 향했다. 매스 드라이버 시설에 남아 있던 우즈미는 멀어져 가는 함을 보면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씨앗은 날아갔다…. 이제 됐어…."

마지막까지 철수하지 않고 남아 있던 몇 명의 수장이 서서히 그의 주위에 모여 들었다. 그들은 아이들의 행방을 지켜 본 후 온화한 시선을 나누었다. 우즈미가 확인하듯 쳐다보자, 그들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즈미의 앞에는 보호 장치가 되어 있는 버튼이 있었다. 우즈미는 보호 장치에 열쇠를 꽂았다.

"오브도, 세계도…."

열쇠를 돌리자 버튼에 붉은 빛이 들어왔다.

"놈들이 멋대로 하도록 놔 두지는 않겠다!"

결연하게 말하며 그는 점멸하는 버튼을 주저 없이 눌렀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매스 드라이버 레일의 기초 부분이 불을 뿜었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레일 밑을 따라 잇달아 폭연이 분출되었고, 중력에 의해 천천히 교각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아름다운 다리는 주저하듯 하늘에서 흔들린 후 바다 위로 부슬부슬 파편을 뿌리며 무너져 내렸다. 폭발은 오노고로 섬에서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포기한 모르겐 레이터의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대량의 폭탄이 단숨에 점화되었던 것이다. 남해의 낙원에 어울리지 않는 군사 기술을 만들어 낸 국영 기업은 모든 비밀을 안은 채 높이 불꽃을 내뿜으며 불타 올랐다. 대국의 전횡에 대한 마지막 반격이었다.

불꽃에 휩싸여 이미 볼 수 없게 된 하늘을 올려다 보며 우즈미는 마지막으로 미소 지었다. 지상에 남은 국민들은 호무라 등에게 맡겼다. 지구 연합군의 그늘에 들어간 그들을 기다리는 미래는 결코 평탄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그들이 당당하게 살아 줄 것을 우즈미는 바랐다. 과거 이 나라의 국민이었다는 것을, 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 우주에 뿌려진 종자들이여…. 싸워라.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싸워라. 자신의 신념을 믿으며 결코 굴하지 말고 계속 싸워라….

 

 

그 폭발은 성층권에 도달한 쿠사나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서서히 작아져 가는 고국을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쳐다보고 있던 카가리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이럴 생각으로…. 오브는 그의 목숨. 나라가 망하는 때가 그의 목숨도 끊어질 때다. 마지막으로 닿은 손의 감촉, 자상함에 넘치던 미소가 되살아 났다. 멀어져 가는 불꽃…. 아버지가 켠 결의의 등불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카가리는 있는 힘껏 외쳤다.

"아버지!"

울면서 무너지는 그녀의 등 뒤에서 키사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날, 남해의 보석은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