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4권- 강림한 검 :: PHASE.1 의문

"키라? …키라, 토르, 들리나요?"

함교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서 무전기에 대고 외치는 밀리아리아의 목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응답하세요, 키라? …토르?"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소녀의 목소리에 점차 불안의 기색이 번져 가는 것을 승무원들은 그저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녀 옆에 앉아 있던 사이는 마치 무서운 것을 본 것처럼 옆 모니터에 'SIGNAL LOST' 라고 표시된 문자를 쳐다보았다. 등 뒤에 있는 토노무라와 찬드라는 몸을 경직시킨 채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 듯 보였다. 마류는 꼼짝도 못한 채 저 높이 하늘을 불태운 폭발이 있었던 곳을, 망막에 새겨진 그 빛의 여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그런….'

얼마 전부터 그녀의 사고는 거기서 정지되어 있었다.

'그런…, 그런 일이….'

그 때 사고의 무한 반복을 차단하듯 앞에 있는 모니터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방금 그 폭발음은?!」

추락한 스카이 글래스퍼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 무우의 목소리에 마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폭발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잠시 망설인 후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현재 스트라이크와 스카이 글래스퍼 2호기 모두… 모든 교신이 끊겼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겨우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거대한 폭발, 그리고 그와 동시에 통신과 식별 번호가 모두 끊긴 기체. 모니터 안에서 무우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도 마류와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 함교에 있는 승무원들은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키라? 키라, 응답해! 토르?!"

소녀의 목소리는 이제 공포에 가득 찬 것으로 변해 갔다.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류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 했다. 그 때였다.

"여, 여섯 시 방향! 레이더에 반응! 숫자 셋!"

카즈이의 겁 먹은 목소리가 함교에 울려 퍼지자, 마류는 놀라서 돌아 보았다.

"AMF-101=딘입니다! 도착 예정 15분 후!"

승무원 모두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반격 준비!"

"무립니다! 현재 반 수 이상의 화기가 사용 불능이에요!"

나탈이 격한 어조로 반론했다.

"이래선 모빌 슈트의 습격에 10분도 버티지 못합니다!"

그러자 밀리아리아가 더욱 목소리를 높여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키라…, 키라! 들려?! 응답해. 딘이…."

필사적으로 호출을 계속하는 그녀의 앞 쪽으로 나탈이 손을 뻗어 무전기의 스위치를 껐다. 놀라서 쳐다보는 밀리아리아에게 나탈은 냉철하게 명령했다.

"이제 그만 둬. 야마토 소위, 케니히 이등병은 모두 MIA다. 무슨 뜻인지 알지?"

밀리아리아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숨을 삼키는 것을 다들 경직된 채 들었다. 미싱 인 액션(Missing In Action). 전투 중 행방 불명. 행방 불명이라고 하지만 그 의미는 '전사'나 다름 없었다.

"그럴…리가…."

밀리아리아가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탈은 일부러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받아 들여!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다음에 죽는 건 너야!"

그 말을 마류도 괴로운 마음으로 들었다. 밀리아리아가 벌떡 일어나 함교를 나가는 모습을 승무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지켜 보았다. 파손된 부분의 보수는 진척이 되어 이제 곧 아크 엔젤은 비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마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재촉하듯 토노무라의 목소리가 상황을 고했다.

"딘 접근! 도착까지 11분!"

그 때 파일럿 시트 앞 콘솔(항행 원격 조종용 무선 시설의 하나)에 녹색 램프가 켜졌다.

"파워가 돌아왔습니다!"

노이만이 절박한 와중에도 안도감이 깃든 목소리로 소리치자, 마류가 명령했다.

"이륙한다! 출력 최대!"

복구된 엔진이 우웅 소리를 내며 함이 떠올랐다. 마류는 조급하게 뒤쪽에 소리쳤다.

"2호기와 스트라이크의 최종 확인 지점은?!"

"일곱 시 방향의 작은 섬입니다!"

찬드라가 대답했지만 나탈이 못마땅한 듯 외쳤다.

"이 상황에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마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이 맞다. 돌아가서 스트라이크와 2호기를 확인하는 사이에 딘에게 따라 잡힌다. 그렇다면….

그녀는 함 내 전화로 무우를 호출했다.

"소령님! 1호기는요?!"

「틀렸어! 아직 출격 못 해!」

마찬가지로 조바심 가득한 어조로 무우가 대답하자, 마류는 수화기를 두들겼다. 그러는 사이에도 보고가 들어왔다.

"딘의 사정 거리에 들어갑니다!"

"함장님!"

나탈이 소리쳤다.

"이탈하지 않으면 당합니다!"

"하지만…!"

사이가 필사적인 어조로 그녀에게 호소했다.

"어쩌면… 키라와 토르도 탈출했을지 모르잖아요!"

나탈은 성가신 듯 그를 흘낏 보았다. 마류는 카즈이를 돌아 보았다.

"본부와의 접촉은?!"

"응답 없습니다!"

원군도 부를 수 없다. 돌아갈 수도, 머물러서 싸울 수도 없다. 그러나 사이의 말대로 그들이 죽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함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 소년들을 버리고 도망쳐도 되는 걸까? 다시 고민하는 마류에게 나탈이 마침내 분노의 목소리를 터뜨렸다.

"함장님! 승무원 전원에게 죽으라고 명령하실 생각입니까?!"

마류는 손톱이 박힐 만큼 강한 힘으로 양 손을 움켜 쥐었다.

'그런 길을 강요할 수는 없어.'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타전을 계속 해. 그리고 섬의 위치와 구원 요청 신호를 오브에…!"

"오브?!"

나탈이 되물었다.

"인명 구조니까 오브라면 받아 줄 거야!"

동맹 관계도 아닌 나라에 부탁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소식이 끊긴 두 사람은 오브의 소년들이다. 나탈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반론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나라에는…!"

그녀의 말을 끊고 마류는 호통을 쳤다.

"책임은 내가 집니다!"

나탈이 압도되어 침묵하자, 함교에는 토노무라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딘 접근! 거리 8,000!"

마류는 앞쪽으로 다시 몸을 돌리고 떨릴 것 같은 목소리를 참으며 명령했다.

"기관 최대! 이 공역(空域)에서의 이탈을 최우선으로 한다!"

 

 

"회수한 겁니까?"

"애당초 우리 물건이야. 방치했다가 다시 적에게 쓰이기라도 하면 열 받잖아!"

정비사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무우는 그 쪽을 쳐다보다가 파손된 버스터가 트레일러에 실려 반입된 것을 발견했다. 잠시 복잡한 마음이 스쳤다. 원래 아군의 기체였던 것은 맞지만 여러 번 쓰라린 경험을 한 탓에 함 내에 그것이 있다는 것에 불안감이 느껴졌다. 마치 그 모빌 슈트가 갑자기 일어나서 이 쪽으로 다가올 것 같은….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버스터의 파일럿은 이미 구속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만약 사람이 타고 있더라도 동력계가 파괴된 기체는 공격은 커녕 일어날 수도 없다. 만약 가능했다면 애당초 파일럿이 항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멍하니 버스터를 쳐다보던 무우는 급격한 가속에 조금 비틀거렸다.

"이탈하는 거야, 함장?"

그것이 당연한 결단이었다. 지원할 기동 병기도 없고, 손상이 심해 반격도 여의치 않은 함으로는 적의 새로운 공격에 대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결단을 내릴 때까지 마류가 겪었을 심적 갈등을 상상하니 괴로움이 느껴졌다. 정비사들이 오가는 가운데 문득 무우는 비틀비틀 걷는 소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원 기동 병기의 관제를 맡고 있고 함교의 승무원 중에서는 무우와도 비교적 친한 밀리아리아였다. 그녀는 뭔가를 찾는 듯 격납고를 둘러 본 후, 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 챈 무우는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다가가는 곳은 스카이 글래스퍼의 시뮬레이터였다. 그곳에서 찾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듯 멈춰 선 밀리아리아에게 무우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토르…?"

밀리아리아는 시뮬레이션 시트에 손을 얹은 채 멈춰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최근 이 곳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그녀와,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하는 토르의 모습…. 무우가 다가가자 밀리아리아는 돌아보았다.

"토르는요…?"

그 물음에 무우는 움찔했다. 책망 받고 있는 듯한 심정이었다. 밀리아리아는 그의 얼굴에서 뭔가를 느낀 듯 갑자기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 눈에 필사적인 빛이 감돌았다. 받아 들이기 힘든 현실을 어떻게든 부정하려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계속 부정하기만 하면 그 현실이 번복되기라도 하듯.

"MIA라니… 그럴 리가…! 그러니까…."

돌연 기운이 빠진 듯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제나 밝았던 소녀의 아픈 모습을 보고 무우는 무심코 위로의 손길을 뻗으려다 도중에 멈추었다. 이 손으로 그녀를 만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녀의 연인을 전장으로 내몰고 헛되이 죽게 한 자신에게 그녀를 위로할 자격이 없었다.

'어째서!'

무우는 피가 나올 만큼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는 일이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왜 자신이 살아 남고 인생을 갓 시작한 어린 소년들이…?

'어째서…?!'

"제기라아알!"

그는 허공에 멈춘 손을 굳게 쥐고는 시뮬레이터 기체를 두들겼다.

 

 

한 편, 자프트의 잠수 모함 쿠스토에서는 이자크가 통제실로 달려가 함장 먼로에게 고함 치고 있었다.

"아스란과 디아카는?!"

먼로는 힐끔 그를 쳐다보고, 그 뺨에 감겨 있는 붕대를 살핀 후 말을 돌리듯 물었다.

"이제 괜찮은 거냐?"

적의 공격을 받고 추락한 충격으로 입은 상처였다. 다시 스트라이크에게 상처를 입은 굴욕에 이자크는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그것보다 지금은 더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함이 움직이고 있잖아?"

그는 패널을 보고 쿠스토의 진로가 북쪽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 쪽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책망하듯 말했다.

"상황은 어떻게 된 거야? 녀석들은 귀환했어?"

일방적으로 퍼붓는 그에게 먼로는 질린 듯한 시선을 던졌지만 곧 눈길을 돌렸다.

"…두 사람은 행방불명이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자크는 잠시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행방불명?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

함장은 여전히 그와는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상황을 전했다.

"먼저 버스터와의 교신이 끊겼고, 얼마 후 큰 폭발이 있은 뒤에 이지스와의 교신도 끊겼어."

이자크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조급하게 물었다.

"구조 신호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도 담담했다.

"둘 다 없었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구조 신호를 포착했다면 함은 그들을 구조하러 갔을 테니까. 다시 말해… 다시 말해, 이건…. 이자크의 머리가 그 다음부터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는 굳이 눈 앞의 문제에 집착하며 그 결론을 뒤로 미루려고 했다.

"스트라이크와 '다리 달린 전함'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다리 달린 전함'은 보즈만 부대가 추격하고 있어. 우리들에게는 크루제 대장으로부터 귀환 명령이 떨어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이자크는 마침내 분노를 터뜨렸다. 납득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납득할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지금까지 쫓아 온 사냥감을 결국 붙잡을 수 없었다는 것, 그럼에도 이런 어중간한 상황에서 카펜테리아로 되돌아 가야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지금 혼자만 남았다는 것.

"말도 안 돼…. 당장 함을 되돌려!"

이자크는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기세로 함장에게 다가갔다.

"그 두 사람이 그렇게 쉽게 당할 리 없어! 괜히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고!"

아무렴, 두 사람이 당할 리가 없다. 그들은 모두 적색 파일럿 슈트를 입는 게 허용된 에이스들이다. 니콜에 이어 디아카와 아스란까지?!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먼로는 분노에 불타서 항의하는 이자크를 차갑게 나무랐다.

"그렇다면 상황 판단도 냉정하게 할 수 있을 텐데? 말했잖나, 우린 귀환을 명 받았다고."

거기서 이자크의 표정을 쳐다보다가 괴로운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이자크는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마치 동정 받는 것 같아서…. 왜 불쌍하게 보여야 하는 것인가? 디아카도 아스란도 분명 무사할 텐데 어째서 마치…, 전멸한 부대의 생존자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러나 먼로는 냉철하게 말했다.

"수색에는 다른 부대가 나설 거야."

"하지만…!"

다시 물고 늘어지려는 이자크를 제지하듯 그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브가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도 있어. 이해할 수 있지?"

질문의 형태로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명령이었다. 이자크는 더 이상 반론할 수 없어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오브를 떠난 비행정 알바트로스 안에서 카가리는 안절부절 못하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크 엔젤의 구조 요청을 받고 직접 현지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조정석에는 키사카가 앉아 있었다.

'녀석은 무사할까…?'

카가리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본 키라의 쓸쓸한 미소가 아른거렸다. 헤어진 지 아직 이틀도 되지 않았다. 함께 보낸 시간은 얼마 안 되는데 무슨 까닭인지 애착 같은 것이 느껴져서 그의 안부가 걱정돼 견딜 수가 없다. 키라가 항상 슬픈 것 같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일까? 알바트로스가 고도를 낮추었다. 구조 요청이 있었던 지점은 오브와 가까운 곳에 있는 태평양의 군도 중 하나였다. 비행정은 그 섬의 해안에 착륙했다. 해치가 열리는 시간조차 답답하게 느끼던 카가리는 해치가 열리자마자 모래 사장으로 내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숨을 삼켰다. 주위에는 검게 그을린 쇳덩어리가 흩어져 있었다. 나무들은 쓰러졌고 땅은 크게 파헤쳐졌으며 여기 저기 빔에 탄 모래가 유리 모양으로 녹아 굳어 있었다. 파도는 모빌 슈트의 거대한 머리를 찰랑 찰랑 씻어 대고 있었다. 넓은 범위에 흩어져 있는 폭발 흔적의 중심지에는 철회색으로 색이 바뀐 스트라이크가, 무참하게 박살 난 그 기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곳에서 벌어진 엄청난 전투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 참상을 목격하고 카가리는 잠시 얼어 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빨간색 기체는 자폭한 건가…?"

옆에서 들려 온 키사카의 독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거의 원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로 주위에 흩어진 파편은 해변에 떨어져 있는 머리로 보건대 이지스가 분명했다. 그 기체의 탑승자인 소년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모닥불에 비친 조용한 얼굴이….

"그 녀석이…?"

먼저 도착해 있던 병사가 쓰러져 있는 스트라이크의 조종석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카가리는 튕겨 나가듯 달려갔다. 가슴이 답답했다.

"…키라!"

키라는…, 키라는 어떻게 됐지?

"카가리!"

키사카의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는 스트라이크를 기어 올라가서 조종석을 에워싸고 있는 병사들을 밀쳐 냈다.

"그만 둬! 카가리!"

조종석 안의 무참한 모습을 예측한 키사카가 그것을 카가리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제지했다. 그러나 그 전에 카가리는 사람들의 울타리 틈새로 조종석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키라…!"

눈 앞의 참상에 카가리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조정석은 흐물흐물 녹아 내렸고, 내부는 모두 타 버려서 과거의 흔적은 찾아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보리라고 예상했던, 그리고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그 곳에 없었다.

"키라…?"

파일럿 소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 카가리를 보고, 그 곳에 키라의 시신이 있는 것으로 짐작한 키사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끌어 안았따.

"카가리…."

그러나 카가리는 외쳤다.

"녀석이… 없어! 안은 텅 비어 있다고!"

"뭐라고…?"

키사카도 놀라서 조종석을 들여다 보았따.

"폭발로… 어디론가 날아간 건가…? 아니, 탈출한 걸지도!"

카가리는 다시 샘솟은 희망과 불안을 얼굴에 떠올리며 기체 주위를 허둥대며 돌아 보았다. 키사카도 태도를 바꾸어 척척 지시를 내렸다.

"주변의 탐색을 서둘러라!"

병사들이 흩어졌고 카가리도 그들 틈에 섞여 탐색을 시작했다. 쓰러진 나무를 뛰어 넘어 초조한 마음으로 키라의 이름을 몇 번이고 외쳐 불렀다. 얼마 후, 해안 쪽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사카 소령님! 저 쪽 해변에!"

"키라?!"

카가리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해변에 쓰러져 있는 그림자와 그것을 둘러 싼 사람들이 보였다. 희망과 불안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키라… 살아 있어? 아니면…? 그러나 그녀의 의문은 다시 송두리째 뒤집어졌다.

해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붉은색 파일럿 슈트를 입고 있었다. 한 쪽 팔이 기묘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고, 헬멧을 파도가 때리고 있었다. 바이저 안쪽에는 전에 모닥불 옆에서 본 차분한 얼굴이 보였다. 카가리는 곤혹스러워 하며 멈춰 섰다.

'아스란…!'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이 뒤척이며 희미하게 신음 소리를 냈다. 카가리는 총을 그 인물에게 겨눈 채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들어?"

상처를 치료 받고 언더 셔츠 차림으로 누워 있던 아스란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가 다친 곳이 아픈지 얼굴을 찌푸렸다. 알바트로스 안에 수용된 그는 왼팔이 골절되고 이곳 저곳을 다치긴 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는 진단을 동행한 의사로부터 받았다. 아직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지 아스란은 주위를 멍하니 둘러 보다가 카가리를 보고 그제야 자신에게 겨누어진 총구를 깨달은 듯 했다. 카가리는 총을 겨눈 채로 침대에 다가가 상대가 갑자기 덤벼 들더라도 대처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발을 멈추었다.

"여기는 오브의 비행정 안이야. 해변에 쓰러져 있던 너를 발견해서 수용했어."

카가리의 설명에 아스란은 아직 멍한 표정으로 "오브?" 라고 되물었다. 그 얼굴에 느릿하게 조소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중립인 오브가 나한테 무슨 용건이지? 아니면… 지금은 지구군인가?"

그는 질문을 던진 후 나른한 듯 침대의 헤드 보드에 등을 기댔다. 카가리는 울컥했지만 상대의 체념한 것 같은 태도에 곤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질문이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그녀는 하마터면 떨릴 뻔했던 목소리를 꾹 참으며 질문을 던졌다.

"스트라이크를 해치운 게… 너야?"

고개를 숙인 아스란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의 눈이 거기에는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 갑자기 크게 치켜 떠지는 것을 카가리는 숨을 삼키며 지켜 보았다.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는 침묵 후, 아스란은 낮게 말했다.

"…그래…."

그것은 긍정이었다. 카가리의 몸 속에서 부글부글 피가 끓는 것 같은 기분 나쁜 감각이 퍼졌다. 그녀는 권총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에 꾹 힘을 주며 물었다.

"파일럿은 어떻게 됐지?! 너처럼 탈출한 거야, 아니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는 격렬하게 떨었다.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야…, 키라를…!"

마치 상대에게 매달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아스란은 얼어 붙은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 상대에 대한 조바심이 일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이제 거리를 유지하는 것 따위는 다 잊은 채, 그녀는 아스란에게 다가가 언성을 높였다. 아스란은 그런 그녀의 태도를 눈치 채지 못한 듯 허탈하게 허공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녀석은… 내가 죽였어…."

카가리는 숨을 삼켰다. 예상했던 대답. 섬에 상륙했을 때부터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이미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런 일이…! 키라가 이 녀석에게…?!'

돌연 폭발적인 분노가 치밀어 그녀는 아스란의 멱살을 잡았다. 상대가 부상자라는 것도 잊은 채 난폭하게 그 몸을 흔들었다. 아스란은 저항도 하지 않고 당하는 대로 몸을 맡긴 채 중얼거렸다.

"죽였어…, 내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지스로 달라 붙은 다음… 자폭했지. 탈출할 수 있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카가리는 눈을 크게 뜬 채 그 고백을 들었다. 아스란은 쥐어 짜 내듯이 겨우 말했다.

"그것 외에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어! 녀석을 해치우려면…."

"너, 이 자식…!"

카가리는 외치며 상대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다.'

그녀의 일부가 그렇게 말했다. 그 때는 주저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아니! 그 때 죽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키라는…. 키라는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분노의 후회가 카가리 안에서 부풀어 오르며 방아쇠에 걸쳐 있는 손가락을 떨리게 했다. 세차게 흔들린 후 침대에 팽개쳐진 아스란은 아직 멍한 표정으로 카가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는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눈에서 갑자기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카가리는 놀라 총을 거두었다.

'지금이라면… 아니, 지금 그를 죽여 봐야 소용 없다…. 이미 너무 늦었다… 키라는…, 키라는 죽고 말았다.'

"젠자아아앙!"

그녀는 아스란의 몸을 떠밀듯이 물러나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런데…."

그녀의 등 뒤에서 아스란이 혼자 중얼거렸다.

"어째서 나는 살아 있는 거지…?"

신기하다는 듯 아이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때 탈출했기 때문인가…?"

카가리는 울컥해서 고개를 돌려 노려 보았다. 무심코 다시 그녀의 손에 들린 총이 적병의 얼굴에 겨누어졌다. 아스란은 여전히 허탈한 표정으로 총구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서는 아직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불현듯 그렇군, 하고 모든 것을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가 나를 쏠 것이기 때문인가…?"

그 묘한 침착함에 화가 나서 카가리는 소리쳤다.

"키라는… 보고 있으면 조마조마하고… 도통 마음 속을 모르겠고… 툭하면 우는 녀석이야…! 하지만 정이 많고… 좋은 녀석이었단 말이야!"

이런 것을 이 녀석에게 가르쳐 줘 봤자 소용 없다. 아스란에게 키라는 일개 적군에 불과하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불쌍한 키라! 언제나 괴로워 보였고, 혼자서 울고…. 마지막으로 본 덧없는 미소가 떠올라서 카가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알고 있어…."

아스란의 허탈한 목소리에 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역시… 변하지 않았구나. 옛날부터 그랬어, 그 녀석은…."

상처 입은 적병의 얼굴에 그리워하는 것 같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카가리는 놀라 쳐다보았다.

"너…?"

"울보에… 응석받이에… 우수하지만 적당 적당한 녀석이었지…."

"키라를… 알고 있어?!"

카가리는 침대로 다가가서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물었다. 아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 아주 잘…. 어렸을 때부터 쭉…."

'뭐라고…?!'

아까와는 다른 전율이 카가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아스란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미소를 머금고 중얼거렸다.

"…친구였거든."

"친…구…?"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카가리에게 현기증 같은 감각이 엄습했다. 그런…!

"그런데 어째서…?!"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아스란의 멱살을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네가 녀석을 죽인 거야…?!"

친구에게…,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에게 살해 당했다고? 그런…, 그런 잔혹한 일이 일어날 리 없다! 키라가 그런 잔혹한 죽음을 당하다니…!

'어째서 그런…!'

"…모르겠어."

아스란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나도…!"

그 얼굴이 돌연 격정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고통에 몸을 비틀며 외쳤다.

"헤어진 후… 다시 만났을 때는 적이 되어 있었어!"

"적…?"

카가리가 멍하니 되물었다.

"함께 가자고… 몇 번이나 말했어! 녀석은 코디네이터야! 우리들의 동지라고! 지구군에 있는 편이 더 이상하잖아! 안 그래?!"

방금 전까지의 무기력한 모습과는 딴판으로 아스란은 소리쳤다. 카가리는 멍하니 그 얼굴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녀석은 내 말을 안 듣고… 우리들과 싸워서… 동료를 다치게 하고…!"

아스란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굳어 갔다.

"니콜을… 죽였어…!"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증오였다. 카가리는 오싹했다.

"그래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키라를… 죽인 거야…? 네가…?"

어렸을 적 친구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 건가? 그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면서 자신의 기체를 자폭시켜서…? 그렇게까지 해서 키라의 목숨을 빼앗아야 했나…?

"적이야! 녀석은 이제…!"

아스란은 울며 외쳤다.

"그렇다면 해치울 수밖에 없잖아!"

"이 바보가!"

카가리도 외쳤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야!?"

답답한 마음이 상대의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떨리게 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해야만 하는 거냐고!"

아스란은 격렬하게 대답했다.

"녀석은 니콜을 죽였어! 피아노를 좋아하고… 아직 열 다섯 살의… 그래도 플랜트를 위해서 싸웠던 녀석을…!"

"키라도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싸웠을 뿐이야!"

카가리는 몸을 떨면서도 소리쳤다.

"그런데! 어째서 죽어야 하는 거야!? 그것도 친구인 너한테…!"

"큭…"

아스란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며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 넘쳤다. 그는 짐승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카가리는 멍하니 그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이 소년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고 있다. 자신의 행위 자체가 그에게 가해진 벌이다. 카가리의 온 몸에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괴로운 마음이 교차하며 출구를 찾아 부풀어 올랐다.

'너무해…! 어떻게 이토록 심한 일이 용인될 수 있는 걸까? 친구가 친구를 죽이고, 친구가 친구에게 살해 당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이것은 전쟁. 적이라면 친구라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중한 것을 잃고 만다. 증오가 증오를 부르고, 더 이상 그것을 치유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어두운 순환의 고리.

"살해 당했기에 죽이고… 죽였기에 살해 당하고…."

카가리는 자문하듯 말했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에는 평화로워지는 거냐…?"

그것은 전에 그녀의 아버지가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결연하게 마음을 굳혔다. 몸을 웅크린 채 흐느껴 우는 상처 입은 소년…, 죽은 자를 기리며 눈물을 흘리는 적 병사를 보면서….

'나는 결코 증오하지 않겠어. 키라의 죽음을, 그 대가를 다른 사람에게 치르게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어. 결코…! 이 고리를 어딘가에서 끊어야만 한다면…. 아무리 싸워도 끝이 없다고… 슬프게 중얼거린 그 소년을 위해서도….'

 

 

"수비대 '블루 리더'로부터 입전. '우리들은 지금부터 이탈한다'. 이상."

반쯤 허탈 상태에 빠져 있던 마류는 파르의 보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공에서는 알래스카 수비대의 항공 기동대가 날개를 흔들고 날개등을 점멸시키며 떠나 가는 참이었다.

"엄호에 감사한다, 라고 전해."

피곤함이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마류는 지시했다. 딘 부대의 추격을 받으면서 전투 지역을 가까스로 이탈했을 때 비로소 알래스카와의 접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아…! 제 18 레이더 사이트로부터 선적 조회."

카즈이가 익숙하지 않은 태도로 전했다.

"알래스카에는 처음 입항하는 거니 어쩔 수 없지. 데이터를 보내 줘. 문제는 없을 거야."

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단숨에 함교의 분위기가 풀렸다. 제８함대와 합류한 시점에서 아크 엔젤은 식별 코드를 받았지만 그것을 활용할 기회는 지금까지 없었다. 다시 말해 그 후로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우군과 접촉했다는 말이다. 제공권 바로 앞까지 적에게 쫓겼던 만큼 다들 무사히 안전한 장소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좀처럼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살았어. 조금만 더 수비대가 늦었다면 당했을 거야."

토노무라가 안도한 듯 말하자 사이가 돌아 보았다.

"하지만 딘이 꽤 고분고분 물러 갔네요."

"고작 3기로 방공권 안까지 들어가서 알래스카와 싸울 생각은 없었겠지, 그 쪽도."

찬드라가 당연하다는 어조로 말하자, 사이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알래스카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CIC의 대화를 차단하듯 나탈이 꾸짖었다.

"언제까지 잡담만 하고 있을 거야? 아직 제２전투 배치라고."

그것은 마류에 대한 꾸짖음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차 싶어서 돌아 보았다.

"미안, 이제 괜찮겠지. 당직이 아닌 사람은 휴식해도 좋습니다."

그녀도 다른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방금 전 전투 때문에 지쳐 있었고, 이제 안전하다는 실감이 별로 일지 않아서 전투 배치를 푸는 것을 깜박하고 있었다. 나탈이 짐짓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겨우 긴장이 풀린 마류에게 통신이 들어왔다. 머독이었다.

"무슨 일이죠?"

'이제 와서 정비반에서 무슨 용건이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마류에게 머독은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함장님이 좀 말려 주세요! 프라가 소령님이 다짜고짜 기체를 수리해 놓으라고….」

"예?"

우군의 제공권에 들어 왔으니 더 이상 출격할 일은 없다. 그런데도 무우는 왜 스카이 글래스퍼의 수리를 재촉하는 걸까? 마류는 이유를 몰라서 눈을 크게 떴다. 머독은 조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보조 연료통을 달고 꼬마들의 탐색에 나선다며 말을 안 들어요!」

마류는 아연실색했지만 동시에 이해했다. 그녀가 격납고로 달려갔을 때, 무우는 정비사들을 재촉하면서 그 자신도 수리에 매달려 있었다.

"소령님! 발진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달려가서 마류가 고했지만 무우는 돌아 보지도 않았다.

"정비반을 이제 쉬게 해 주세요!"

거듭해서 명령하자, 그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오브에서는 아직 아무 연락도 없었지?"

"예…, 하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 두 소년의 생사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무우는 그들의 소식을 알기 위해 제 발로 전투 구역으로 돌아 가려는 것이다. 선배 파일럿으로서 소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동시에 무우 답지 않게도 느껴졌다.

"함은 이제 안전하니까 괜찮지 않아?"

아이처럼 고집을 부리며 무우는 말했다.

"아뇨.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마류도 완고하게 주장했다. 무우가 조바심을 내며 돌아 보았다.

"하지만 녀석들… 만약 탈출했다면…!"

"알고 있어요!"

마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도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함장…."

무우가 그녀의 기세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소령님을 혼자 내보낼 수는 없어요! 그러다 당신까지 잃는다면 저는…."

마류는 아차 싶어 말을 삼켰다. 어떻게 된 모양이다. 평정을 잃고 감춰 오던 감정까지 드러내고 말았다. 무우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뜨거워진 뺨을 가리듯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오브와… 그 아이들을 믿고… 참으세요."

키라의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이 괴로웠다. 그들의 부재를 믿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진짜다. 그러나 그녀의 이성은 소년들의 전사를 받아 들이고 있었다. 전장에서는 수없이 되풀이되어 온 흔한 일에 불과하다. 무우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키라와 토르…. 순수한 선의로 동료들과 함을 지키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전투에 임한 소년들은 아군의 세력권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산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자신들은 뻔뻔하게 살아 남은 것일까? 이 목숨은 아이들의 피로 얻어진 것이다.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소년들을 방패 삼아 자신들은 살아 남았다. 그 받아 들이기 힘든 사실과 죄책감이 마류 일행으로 하여금 그들의 생존에 집착하게 했다. 무우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소년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그들에게 뭔가 해 주고 싶었다. 여느 때의 현실적인 판단과는 다른 행동에 나선 것도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음을 마류는 아플 만큼 알았다. 자신도 그 아이들을 찾으러 가고 싶다. 모든 것을 내팽개쳐도 된다면….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아직 자신은 이 함의 함장인 것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곱씹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 무우가 손을 얹었다. 그 큼직한 손이 어깨를 꾹 잡는다.

"알았어."

뭔가 쑥스러운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무우는 그 자리를 떠났다. 마류는 열심히 눈물을 참았다. 어깨에 잠깐 닿았던 따뜻한 손의 무게가 마치 아린 상처처럼 느껴졌다. 살아 남은 목숨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일은 지금의 그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키라가 돌아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이에 잠들어 버렸던 프레이는 시간을 보고 놀랐다. 전투가 시작된 것은 아침 나절. 이미 저녁이 다 됐는데 키라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장교실을 나와 키라를 찾다가 식당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나오는 정비사들과 엇갈렸다.

"하지만 스트라이크 없이 알래스카로 들어가 봤자…."

"설마 야마토가 당할 줄이야…."

대화의 일부가 귀에 들어와서 그녀는 무심코 돌아 보았다.

'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키라가 어쩌니 하는 얘길 한 것 같은데….'

그 때 그녀에게도 친숙한 얼굴이 보였다. 카즈이가 함교 쪽에서 걸어 오고 있었다. 그라면 키라가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카즈이, 저기…, 키라는?"

그녀가 묻자, 카즈이는 곤혹스러운 듯 시선을 돌리고 작게 말했다.

"MIA."

"뭐?"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고 프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즈이는 조금 소리를 높였다.

"전투 중 행방 불명…. 확인되지 않은 전사를 말한대. …군에서는 그렇게 불러."

"뭐라고?"

프레이는 여전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행방 불명? 전사…? 카즈이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키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는 건데.'

"토르도 마찬가지야. …자세한 건 다른 사람에게 물어 봐. 내가 아는 건 그것 뿐이니까."

전혀 이해를 못했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 프레이를 놔 둔 채 식당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프레이는 언성을 높였따.

"잠깐만 기다려! 그러니까 키라는 어디 있냐고!"

"그러니까 나도 몰라! 살아 있는지 어떤지조차!"

카즈이는 제지하는 프레이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잠깐! 뭐야, 그게?"

그런 적당한 대답 밖에 안 해 주다니 이 녀석은 너무도 불친절하다. 그래선 키라가 마치, 마치….

"…아마 죽었을 거야."

카즈이는 내뱉고 자신의 말에 겁을 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 됐지?"

다시 멈춰 세울까 봐 겁이 나는지 그는 서둘러 떠났다. 프레이는 망연자실했다.

'죽었다고…? 카즈이는 무슨 말을 한 거지? 돌아온 후에 이야기하자고 키라는 말했는데.'

그가 돌아오면 싸운 것에 대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자신은 전부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키라가 용서해 준다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잘 대해 주려고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키라가 죽었다고…?'

그것은 그녀가 바랐던 결말이었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 키라가 죽는 것.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그것을 기뻐하기는 커녕 현실을 받아 들일 여력조차 없었다.

'그럴 리 없어. 키라가 죽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어.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용서 받는 것도, 잘 대해 주는 것도 불가능한데.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프레이는 완전히 혼란에 빠진 채 통로에 멍하니 서 있었다. 돌아갈 집을 잃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아가일 이등병."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사이는 뒤돌아 보았다.

"예?"

상자 두 개를 들고 있던 나탈은 그것을 사이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내린 명령에 그는 온 몸이 굳었다.

"케니히 이등병과 야마토 소위의 유품을 정리해."

"유품이오?!"

그는 움찔하며 항의의 시선으로 상관을 쳐다보았다.

"그런…. 하지만 아직…!"

토르도 키라도 아직 사망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유품'을 정리하라니! 그러나 나탈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함장이 MIA라고 인정했어. 이게 규정이야."

사이는 말을 삼켰다. 나탈은 약간 언성을 낮추고 말을 이었다.

"유품을 쳐다보며 슬퍼하고 있다간 다음에 자신이 당해…. 전쟁터란 그런 곳이야."

떠나 가는 나탈의 발 소리를 들으면서 사이는 상자를 쳐다보고 망연자실했다.

'유품이라니….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의 흔적을 이런 작은 상자에 넣은 후에 잊어버리라고…?'

조금씩, 조금씩 현실이 밀려 들어왔다. 키라와 토르가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하지만 그래도 사이는 이 두 사람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다. 왠지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청소년으로서 평범한 생활을 보내 왔던 그들이 어느 틈엔가 전쟁터에 와서 어느 날 갑자기 친구들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는다. 눈을 떠 보니 그것은 꿈이었고, 키라와 토르는 저 쪽 길 모퉁이에서 지금이라도 웃으면서 나타날 것 같은데. 그는 허탈한 발걸음으로 토르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려다 놀라 멈추어 섰다. 어두운 방 안에서 밀리아리아가 무릎을 감싸 쥔 채 웅크리고 있었다.

"밀리아리아…."

무심코 사이는 두 개의 상자를 자신의 몸 뒤쪽으로 숨겼다. 그녀가 그것을 보고 뭐냐고 묻기라도 할까 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유품'…. 그런 단어를 그녀에게 들려 줄 수는 없다. 그녀는 멍한 태도로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사이 쪽으로 돌렸다.

"토르한테서 연락은…?"

사이는 대답하기 곤란했다.

"…아직."

소녀의 눈에 절망이 떠오르는 것이 보여서 그는 허겁지겁 덧붙였다.

"하… 하지만 괜찮을 거야, 분명…."

스스로 생각해도 싫어질 만큼 위선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감을 속이기 위해 다시 말을 이었다.

"함장님이 오브에 수색을 부탁해 놨고, 본부로 가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말을 하면 할 수록 공허감이 늘어갔다. 사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그런 것을 믿지 않는지. 그러나 밀리아리아는 그의 말에 매달리듯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럴 거야…. 그럴 리가 없으니까…."

끝까지 연인의 죽음을 믿지 않는 소녀의 모습에 사이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만은 사이가 포기해 버린 가능성을 계속 믿고 있는 것이다. 토르와 키라가 살아 있다는…. 하지만 어느 샌가 그 눈동자에 돌아왔던 생기도 곧 흐려지더니 밀리아리아는 무릎을 안고 공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밀리…."

사이는 그녀에게 다가가려다 손에 들고 있던 상자의 존재를 깨달았다. 밀리아리아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것을 살짝 커튼 뒤에 감추고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당에라도 가자.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안 돼."

손을 잡아 끌자 밀리아리아는 고분고분 일어나 따라 왔지만 스스로 걷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는 듯 했다. 사이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보호하듯 천천히 통로를 걸었다.

"젠장! 그렇게 쿡쿡 찌르지 말라고!"

갑자기 앞쪽에서 소란이 일었기에 사이와 밀리아리아는 발을 멈추었다. 언더 셔츠에 피가 묻어 있고 손이 뒤쪽으로 묶인 금발의 소년이 뒤쪽에서 총이 겨눠진 채로 걸어 오는 것이 보였다.

"부상자란 말이야, 나는! 원, 참! 언제까지 내버려 둘 생각이야?!"

앞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는 승무원들 속에서 노이만의 모습을 발견한 사이는 무심코 다가가서 물었다.

"저 녀석은 누구죠…?"

노이만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버스터의 파일럿이야."

사이는 놀라서 다시 그 쪽을 쳐다보았다. 지난 번 전투에서 조종 불능에 빠진 버스터의 탑승자가 투항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소년이 자프트의 파일럿…?

"…젊네."

노이만의 말대로 거뭇한 피부와 금발을 가진 이 파일럿은 사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자프트의 병사니 그도 코디네이터겠군, 하는 당연한 사실을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 곳에 없는, 자신과 친한 유일한 코디네이터를 떠올리고 사이는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스산함을 느꼈다. 그 때 끌려 가면서 그들 앞을 지나가던 자프트 병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이의 옆에 있던 밀리아리아를 발견한 모양이다.

"이 함에는 이런 여자애도 타고 있는 거야?"

사이가 보호하듯 밀리아리아의 어깨에 손을 두르자, 자프트 병사는 야유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바보 같이! 왜 우는 거야? 울고 싶은 건 난데!"

짜증을 내며 내뱉은 그 어조가 너무도 이 쪽을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아 사이의 머리에 피가 확 몰렸다.

'이 녀석이…, 이 녀석들이 토르와 키라를…!'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 들려는 그를 노이만이 직전에 제지했다.

"그만 둬! 포로에 대한 폭행은 금지돼 있으니까!"

사이는 으득 이를 갈면서 움켜 쥔 주먹을 떨었다. 포로는 그들을 내려다 보는 눈으로 지나쳐 갔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것 같은 눈초리에 사이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래. 네 눈에는 우리들이 원숭이 같겠지! 하지만 키라는 그런 눈으로 우리들을 본 적이 없었어!'

밀리아리아가 갑자기 사이의 팔을 붙잡았다. 닿은 손은 격렬하게 떨렸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은 지나쳐 간 포로를 향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밀리…, 보지 마."

사이는 허겁지겁 그녀의 어깨를 끌어 당겨 자신의 몸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그러나 밀리아리아의 크게 뜬 눈은 그것을 꿰뚫고 여전히 적 병사를 쫓고 있었다.

"사이…, 저 사람이…?"

"자, 가자."

사이는 억지로 그녀의 등을 떠밀며 걷기 시작했다. 포로를 지켜 보는 사람들 속에서 사이는 프레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멈춰 서서 젊은 자프트 병사의 뒷모습을 타는 듯이 강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이어 나타난 큰 키의 남자를, 방에 있던 소녀가 일어나서 맞이했다.

"데려갈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금발의 소녀가 침대에 앉아 있던 아스란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보고하는 목소리를 아스란은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아스란…."

그 말에 아스란은 그녀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카가리라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난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널 데리러 왔어. 자프트의 군인은 오브에 데려갈 수 없거든."

'오브…? 그래, 이 소녀는 오브의 공주님이었지.'

왠지 머리가 멍해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처방 받은 진통제 탓인가…? 카가리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너, 괜찮아?"

그녀는 격려하듯 아스란의 팔을 잡아 끌어 일으켜 세웠다. 아스란은 저항하지 않고 일어나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소녀에게 문득 웃음을 흘렸다.

'괜찮냐고?'

아까는 자신이 부상자라는 것도 고려하지 않고 난폭하게 취급한 주제에.

"…역시 별난 녀석이야, 넌."

아스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왜 이 녀석은 나 같은 걸 걱정하는 거지?'

"고맙다고… 해야 하려나…?"

그는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구해 준 것을 감사해야 할지, 저주해야 할지 지금의 아스란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나는 살아 있는 거지? 키라를… 죽였는데….'

끝없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모든 것이 한 꺼풀의 막을 통한 것처럼 흐리게 느껴졌다. 지금 걷고 있는 자신도 꿈 속처럼 생각되었다.

"아, 잠깐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아스란은 느릿느릿 돌아 보았다. 카가리가 달려 오더니 목에 매고 있던 체인을 풀었다. 그녀는 발돋움 하듯 아스란의 목에 그것을 걸었다.

"하우메아의 수호석이야."

무뚝뚝함 속에서도 배려를 느끼게 하는 어조로 말했다.

"너도… 보고 있으면 위태위태하니, 보호를 받도록 해."

아스란은 자신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붉은 돌을 내려다 보고 훗, 웃었다.

"키라를 죽였는데도… 말이야?"

카가리는 날카롭게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이제… 아무도 죽게 하고 싶지 않아…!"

그 똑바른 시선에 아스란의 머릿속에 끼어 있던 안개가 잠시 걷혔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하지만 무엇으로부터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 강한 시선을 들여다 보았다.

'이 소녀는… 누구지…?'

얼마 전에도 품었던 의문이 다른 의미를 띤 채 잠시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 후 아스란은 보트를 타고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자프트의 헬기로 운송되었다. 해치에서 몸을 내민 이자크가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호통을 쳤다.

"너!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거야!"

매도하면서도 아스란이 팔을 다쳤다는 것을 깨닫자 무릎을 꿇고 해치에서 손을 내밀어 탑승하는 것을 도와 주었다.

"…스트라이크는 해치웠어."

엇갈리면서 아스란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자크는 잠시 못 말리겠다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러니까 마치 그가 정말로 자신의 몸을 걱정해 주는 것 같다고 아스란은 멍하니 생각했다.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다.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뭘 그리 멍청하게 서 있는 거야? 얼른 거기에 누워! 부상자니까!"

이자크가 무뚝뚝한 어조로 뜻밖의 배려를 하면서 헬기의 간이 침대에 아스란을 눕혔다. 아스란은 잠에 빠지면서 어쩌면 이것은 꿈일지도 모른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걱정해 주다니 꿈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 꿈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베링 해 위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새하얀 함이 육지로 다가가고 있었다. 북쪽 끝의 땅 알래스카. 지구 연합군 통합 사령 본부 'JOSH-A'는 유콘 강 지류의 하구 부근에 있었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그 전모를 볼 수가 없다. 사령 본부 시설 대부분은 유콘 델타 지하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극지의 지하에 뻥 뚫려 있는 공동(空洞) 중앙에는 거대한 인공 지반이 떠 있는데, 상하 혹은 가장자리 부분의 암반과 무수한 서스펜션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때문에 내부는 지반의 움직임과 거의 무관해져서 지진은 물론이고 핵 미사일의 공격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인공 지반 위에는 군 관련 시설이 늘어서 있고, 광섬유를 통해 도달하는 햇볕이 그것들을 비추고 있어서 지상의 시가지를 통째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규모도 그렇고 외관도 그렇고 지하 공간에 건설된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이것이 JOSH-A, 지구 연합군의 통합 최고 사령주였다.

만신창이의 아크 엔젤이 관제관의 유도에 따라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에 그대로 돌입하자, 폭포 뒤에 감추어진 메인 게이트가 그 거대한 함체를 받아 들였다. 그 모습은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한 방의 거대한 모니터에 낱낱이 나타났다.

"아크 엔젤…. 설마 도착할 줄이야…."

장교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동료 함의 무사를 확인한 그 어조에는 안도가 아니라 오히려 곤혹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할버튼의 집념이 지켜 주기라도 한 걸까요?"

이미 죽은 장교의 이름이 나오자 야유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그에 답했다.

"지켜 준 건 코디네이터 아이였죠."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말게, 서덜렌드 대령."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 장교에게 씁쓰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때, 모니터 화면은 군의 공식 서류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중요할 때 왔는데 스트라이크와 그 파일럿이 MIA라는 건 뭐랄까, 다행이로군."

화면에 비친 서류에는 키라 야마토의 이름이 있었고 그 위로 커다랗게 MIA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GAT 시리즈는 앞으로 우리들의 상징이 될 만한 물건입니다. 하지만 그걸 코디네이터 아이가 조종한다면 말이 안 되죠."

서덜렌드라고 불린 장교의 말에 다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

"결국 녀석들에게는 대적할 수 없다는 실례를 눈 앞에서 보여 주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모든 기술은 이미 계승되어 더욱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들을 위해…."

서덜렌드의 말에 맞추어 모니터 화면이 전환되더니 잇달아 모빌 슈트의 영상과 스펙이 표시되었다. 거대한 두 문의 포를 등에 장착한 기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등에 거북이 등딱지 같은 기구를 짊어진 기체, 가변 기능이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삼각 날개를 장비한 기체….

"아즈라엘에게는 뭐라고 할까?"

한 장교의 물음에 서덜렌드가 대답했다.

"문제는 모두 여기서 수정한다, 라고 전해 뒀습니다."

그는 서류를 책상 위에 놓더니 득의 만만한 미소를 떠올리며 그 위에서 깍지를 꼈다.

"불운한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그리고 아마… 앞으로 일어날 일도…."

그 자리에 늘어선 장교들은 그 말에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이름이 새겨진 서류가 하나의 목숨을 나타낸다는 것 따위는 그들은 이미 잊고 있었다. 끝으로 서덜렌드가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푸르고 청정한 세계를 위해…!"

 

 

「작전 통합실에서 제８함대 소속함 아크 엔젤에 통지!」

무사히 JOSH-A의 독에 정박한 아크 엔젤에게 본부의 연락관으로부터 통신이 들어 오자, 마류는 그것을 경례하고 받았다.

「발신, 군 사령부 윌리엄 서덜렌드 대령. '오랜 기간에 걸친 격전의 노고를 치하한다'.」

연락관은 통지문을 사무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사정 청취를 해야 할 사태이기도 하므로 귀 함의 승무원들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현 상태로 함 내 대기를 명한다'.」

마류는 의표를 찔린 듯 무심코 되물었다.

"현 상태로… 말입니까?"

연락관은 쌀쌀맞게 수긍했다.

「그렇다. 파나마 침공에 대한 소문 때문에 이 곳도 아주 바쁘거든. 뭐, 일단은 쉬고 있도록.」

마지막 말은 그가 개인적인 위로를 담아 한 말이었지만 담담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통신은 끊겼다. 마류와 나탈은 당혹스러워 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알래스카에 도착하는 것. 단지 그것만을 목표로 고독한 싸움에서 살아 남아 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목적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런 취급이라니. 환영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좀 더 분명한 대응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자신들의 임무는 이 함을 전달하는 것이니, 본부에 도착하면 적당한 후임에게 함을 인도하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자프트의 파나마 공략전이 임박한 정세에서는 여기까지 손이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긴박한 정세이기에 더욱 이 함과,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애타는 마음으로 마류는 입을 열었다.

"역시… 할버튼 제독님의 말씀이 옳았던 걸까…?"

"예…?"

나탈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죽은 장교의 말을 떠올린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들은 전장에서 얼마나 많은 병사가 죽고 있는지 숫자로 밖에 몰라!

답답하다는 듯 내뱉은 상관의 말을 떠올리고 마류는 기분이 깊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 함 때문에 공격 받고 붕괴된 헬리오 폴리스와 아르테미스, 그리고 제８함대를 비롯해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자신들은 이 곳까지 왔다. 종국에는 나이도 안 찬 소년들의 목숨까지 희생해 가며. 그렇게까지 해서 도착한 것에 과연 의미가 있었을까? 이 함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 그리고 지금은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신형 기동 병기 'G'를 보면 그 유용성을 본부가 분명히 인식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대응만 봐도 이미 넘긴 데이터가 유효하게 활용되는 것조차 기대하기 힘들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싸움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아스란은 멍하니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또다시 수송기가 도착하더니 해치가 열리고 안에서 자우트와 진이 나타났다. 카펜테리아의 자프트 군 본부에서는 눈 앞에 닥친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지구 연합군 측에 마지막으로 남은 파나마의 매스 드라이버를 빼앗는 것이 목적인 이번 작전을 위해, 각지에서 혹은 우주에서 모빌 슈트와 전함이 카펜테리아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 분주한 모습은 아스란이 요양하고 있는 본부의 병실에서도 살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바닷빛 눈에는 그것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노크 소리가 나서 그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크루제다. 들어가마."

물결치는 금발을 나부끼며 상관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아스란은 잠시 무덤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장님."

뒤늦게 상대가 경의를 표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떠올리고 그는 일어나서 경례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라우는 그것을 제지했다.

"그대로 있도록."

"…죄송합니다."

불현듯 가슴이 아픈 것을 느끼고 아스란은 침대 위에서 고개를 숙였다. 니콜을…, 라우에게서 받은 병사를 죽게 한 것에 대한 사죄였다. 게다가 디아카는 행방 불명 된 채 그 뒤의 수색에서도 전혀 소식을 알 수가 없고, 자신은 기체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라우는 의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보고는 들었다. 넌 잘 해 주었어."

"아뇨…."

"나야말로 대응이 늦어서 미안하군. …확실히 희생도 컸지만 어쩔 수 없지."

라우는 침대 옆에서 매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큼 강적이었다는 소리니까, 네 친구는."

둥글게 숙인 아스란의 등이 움찔 떨렸다. 라우는 잠시 그의 아픔을 맛보듯 뜸을 들인 후 거침 없이 말을 이었다.

"괴로운 싸움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미겔, 니콜, 발트펠드 대장, 그 밖에도 많은 병사가 그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으니 그를 해치운 너의 공적은 본국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몸을 숙여 고개를 숙인 아스란의 귓전에 소곤거렸따.

"너에게는 네뷸라 훈장이 수여된다더군."

"예…?"

아스란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훈장…? 훈장이 수여되다니 무슨 소리지?'

"그리고… 나로서는 아쉽지만 오늘 부로 국방 위원회 직속 특무대로 전속된다는 통지도 와 있다."

"그럴 리가…. 대장님…."

아스란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것은 진급을 의미하는 통지였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칭찬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움찔 떨었다. 라우는 그의 당황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격려하는 것 같은 미소를 띠었다.

"너도 이제 탑건이야, 아스란. 넌 최신예기의 파일럿이 될 거다. 그 기체를 수령하기 위해서라도 즉시 본국으로 돌아오라더군."

"하지만…!"

'알 수 없다.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아스란은 혼란에 빠진 채 상관을, 아니 오늘 부로 상관이 아니게 된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훈장? 탑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어이 없이 니콜을 죽게 한 자신이… 이 손으로 친구를 죽인 자신이… 어째서? 혼란스러워 하는 아스란에게 라우는 뜬금 없이 물었다.

"아버님이 평의회 의장이 되셨다는 소식은 들었나?"

"아… 예."

그러고 보니 의료진 중 누군가가 가르쳐 준 것 같다. 아니면 직접 아버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라 의장께서는 전쟁의 조기 종결을 절실히 바라고 계시다."

과열 기미였던 아스란의 머리가 그 말에 확 식었다.

"정말 한 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군. 이런 전쟁은…."

전쟁의 조기 종결, 그렇다…. 아스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 전쟁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기 위해…, 고국을 지키기 위해, 그 때문에 자신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도 너도 다시 힘을 내도록."

라우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고 위로하듯 아스란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 병사가 할 일은 싸워서 '적'을 물리치는 것.'

그렇다. 그래서 '적'을 물리친 자신은 칭찬 받을 행위를 한 것이다. 아스란은 시트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 보고 있다가 라우가 방을 나간 것도 깨닫지 못했다. 머리로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그의 마음은 그 논리를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칭찬 받을 만한 행위? 그것이…?'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오로지 공격하고 죽였다. 게다가 상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다. 돌연 숨이 막힐 만큼 선명하게 그 때 일이 떠올라 그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키라─!'

증오를 담아 그 이름을 불렀고, 그 목숨을 빼앗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그 동안의 시간이 악몽 같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다. 그 때 모든 것의 결판을 내기 위해 자폭 장치를 작동시킨 것은 틀림 없이 자신의 손이다. 키라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서. 아스란은 격렬하게 숨을 내쉬며 시트를 꾹 움켜 쥐었다.

'나는… 키라를… 죽이고 말았어!'

그 사실이 처음으로 그의 피부에 직접 와 닿았다. 지금까지 망연자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하고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던 사실이 뒤늦게 그를 엄습했다.

'그럼에도… 어째서 나는 살아 있지? 어째서 살아 남아 훈장을 받고 마치 영웅처럼 떠받들어지는 거지?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다. 그의 손은 이미 키라의 목숨을 빼앗는 스위치를 눌러 버린 후였기에….

 

 

"오르바니의 양보안이라니…. 이제 와서 그런 걸 가져와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새롭게 의장 자리에 취임한 패트릭 자라가 야유하듯 말했다.

"스핏 브레이크는 이미 가결되었던 말입니다."

"나도 물론 이걸 그대로 받아 들일 생각은 없소."

의원복을 벗은 시겔 클라인이 그에게 반론했다.

"하지만 싸우면 반드시 희생자가 나옵니다! 피할 수 있다면 그 편이 좋지 않겠소?"

플랜트의 에이프릴리우스 시의 최고 평의회 회의장에는 각 의원들과, 이미 의장 자리를 패트릭에게 넘긴 시겔 클라인이 앉아 있었다. 클라인의 호소에도 회의장에 떠도는 차가운 공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패트릭도 의장에 취임했고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를 앞에 두고 기세가 올라 있는 급진파에 비해, 의장직에서 물러나 하야한 클라인과 아들을 잃고 강경파로 기운 유리 아말피가 빠진 온건파는 너무나도 힘이 없었다. 에자리아 쥴, 이카즈의 어머니가 이지적인 얼굴에 조소를 띠며 쌀쌀맞게 서류를 물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강화 조건을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같나요? 마치 그들이 이기기라도 한 것 같잖아요!"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오르바니의 양보안'이라 불린 이 강화 조건 안은 '오퍼레이션 우로보로스' 발동 직후에 연합 측에서 나온 것이었다. 뉴트론 재머 공격과 모빌 슈트를 주력으로 한 자프트의 지구 침공에 의해 자신들의 불리함을 깨달은 내츄럴들이 서둘러 마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은 양보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운 것이었다. 어느 정도의 자치를 용인하기는 하지만 플랜트는 개전 전과 마찬가지로 이사국의 관리 하에 둔다는 일방적인 내용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면 강화의 길 따위는 없습니다!"

클라인 파의 아이린 카나바가 호소했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내려 뜨린 그녀는 종합 정보학 박사이자 외교 위원을 맡고 있다.

"이런 시기에 이런 것은 쓸 데 없는 시간 끌기에 불과합니다."

헤르만 굴드가 일축했다. 정치학에 정통하고 국방 위원의 한 사람이기도 한 이 30대 초반의 검은 머리 청년은 열렬한 자라 지지파였다. 하지만 그의 견해는 아마 맞을 것이다.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를 눈 앞에 둔 지금이기에 양보안을 제시하여 침공을 지연시켜 보자는 연합 측의 의도는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의도였다면 좀 더 매력적인 미끼를 준비해야 플랜트 측도 미끼를 물려고 할 텐데, 그런 것에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내츄럴의 어리석음인지 아니면 이런 조건조차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폭적인 양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르바니도 이사국 모두의 의사를 대변하는 건 아니에요. 대화를 한다고 해도 그래서는 곤란하죠."

에자리아가 깔보듯 말하자, 회의장은 찬동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럼! 이제 우리들은 타협의 길을 완전히 버리고 총만을 들자는 소립니까?!"

그런 그들에게 클라인이 통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런 존재입니까, 우리들은?"

그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패트릭의 말에 수그러들었다.

"클라인 전 의장,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그는 일어나서 살짝 우월감을 풍기며 자신이 몰아 낸 경쟁자를 내려다 보았다.

"우리들은 모두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발언은 삼가시길."

"…실례했소."

클라인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면 반론할 여지가 없다. 실제로 국민은 패트릭을 후임 의장으로 뽑았다. 다시 말해 패트릭이 취한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가 된다.

여하튼 오르바니가 제안한 양보안은 양 진형 사이에 놓인 깊은 골을 똑똑히 보여 주는 결과 밖에 되지 않았다. 패트릭은 은근한 어조로 클라인에게 고했다.

"귀중한 의견의 제시는 고맙게 받아 들이겠지만, 뒷일은 이제 현 최고 평의회 위원회가 검토할 일. 사자로 와 주신 마르키오 도사께는 저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게 전하겠소."

클라인은 일어나서 마지막으로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돌아 보았다.

"앞날을 내다 보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시기를…."

그리고 마음을 떨쳐 내듯 회의장을 떠났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홀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득 발을 멈추고 그 곳에 장식되어 있는 거대한 돌을 쳐다보았다. 'Evidence 01'. 이 외계 생물의 눈에는 자신들이 어떻게 보일까? 약간의 차이 밖에 없는 생물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이 가상의 생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날개 달린 생물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보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은하 저 편에 있는 그들 역시 싸우고 있는 것일까….

"알래스카는 핵 공격에도 견뎌 낼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바다 속 깊은 곳을 운항하는 잠수 모함의 브리핑 룸에서 라우 르 크루제가 젊은 병사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지만…. 여하튼 자프트로서는 쓸 생각도 없고."

등 뒤에 있는 패널에는 북미 대륙이 떠올라 있고, 붉게 점등하는 라이트가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 대륙의 북단, 알래스카는 유콘 강의 하구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공략하려면 '그랜드 할로우'라 불리는 내부로 침공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주의하게 건드릴 수는 없지만, 적 본부의 정보는 우리들이 항상 포착해 둘 필요가 있겠지…."

라우의 거침 없는 어조에 특수 임무를 부여 받은 정보병들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리고 이번 정찰은 특수한 임무인 까닭에 비밀을 엄수할 의무가 있다. 누군가에게 모험담을 들려 주고 싶더라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예!"

병사들은 농담 섞인 상관의 명령에 정색을 하거나, 혹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부하들의 얼굴을 보면서 라우는 문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보라는 건 어디서 샐지 모르니 말이야…."

 

 

"밀리아리아…."

눈 앞에 놓인 식판을 아까부터 쳐다보기만 할 뿐,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 밀리아리아에게 옆에 앉아 있던 사이가 걱정 되는 듯 말을 걸었다.

"조금이라도 뭘 먹어야지…."

밀리아리아는 알래스카 기지에 도착한 후에도 실의에 빠져 나날이 야위어 갔다. 사이는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북돋아 주려고 했다.

"자, 밀리. 요구르트 좋아하지?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밝고 명랑했던 그녀의 얼굴은 지금은 창백하고 눈 밑에 기미만이 가득했다.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는 그녀의 태도에 사이는 마음이 몹시 안쓰러웠다.

"밤에 제대로 잠은… 챙겨 잘 리 없겠지…."

그 말의 뒷부분은 혼잣말이 되어 사라졌다. 그 때 정비사들이 대화를 나누며 들어왔다.

"언제 쯤에나 떨어질까, 상륙 허가?"

"본부 기지 안인데 5일이나 나가지 못하다니, 묘하네."

그들은 음료수를 꺼내면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JOSH-A에 입항한 지 이미 5일. 마류도 애가 타서 문의를 했지만 상부는 여전히 '함 내 대기'를 명할 뿐이었다. 당연히 승무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높아졌다. 앞으로 어떤 처분을 받건 최소한 함을 나와서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상륙해서 외출이라도 할 수 있다면 밀리아리아의 기분도 좋아질지 모르는데. 사이 역시 자신들의 마음을 생각도 해 주지 않는 조직의 모습에 적지 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하라고 해도 말이야…, 스카이 글래스퍼 한 기 뿐이니…."

별 생각 없이 중얼거린 정비사의 말에 밀리아리아의 등이 움찔 반응했다.

"회수한 버스터라도 고칠까, 심심풀이로?"

"적기를 고쳐서 뭐 하게?"

"하지만 애당초 그건 우리 것이잖아."

"하하, 그렇긴 하네."

"그래 봤자 어차피 코디네이터가 아니면 조종할 수 없잖아?"

남자들의 대화는 거침 없이 계속되었다. 밀리아리아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깨달은 사이는 허겁지겁 식판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밀리, 가자…."

어색하게 일어선 밀리아리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도중에도 정비사들은 무신경한 대화를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조종할 수 있는 녀석도 없는데 말이야…."

사이 역시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의 껴안듯이 해서 걸음 걸이가 불안한 밀리아리아를 데리고 통로를 걷고 있을 때, 그녀는 약하게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그것에 이끌리듯 사이의 눈도 촉촉해졌다.

'토르가 없다…. 키라가 없다…'

뻥 뚫린 가슴의 구멍은 아무도 메워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통로 옆에서 말을 걸어 온 사람이 있었다.

"사이…, 저기…."

머뭇머뭇 아양을 떠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사이는 움찔 몸이 굳었지만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돌아 보았다. 거기에는 힘 없는 표정의 프레이가 서 있었다. 잠시 사이의 뇌리에 과거에 사랑했던 소녀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샘솟았지만, 곧 후회가 밀려 왔다.

"왜?"

사이의 쌀쌀맞은 대답에 프레이는 뭔가 말을 하긴 했지만, 마침 그 때 통로 쪽에서 녹색 새가 날아와 사이의 어깨에 앉았다. 키라의 애완 로봇 토리였다. 프레이는 그것을 보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토리.」

작은 새는 곧 날아 올라 이번에는 프레이에게 내려 앉으려 했다.

"싫어!"

그녀는 겁 먹은 듯 양손을 휘둘러 토리를 떨쳐 내려고 했다.

"그만 둬."

사이가 제지하는 사이에 토리는 도망쳐서 다시 통로 어딘가로 가 버렸다. 프레이는 마치 망령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벽에 매달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동정심이 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이는 더욱 쌀쌀맞게 말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하지 않겠어?"

"사이…."

프레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이는 그것을 못 본 척 하며 흐느끼는 밀리아리아의 어깨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의무실에 도착하자 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안에서 기다려…. 의사한테 약이라도 좀 받아 가자. 조금은 자야 기운을 차리잖아…. 알았지?"

아이를 타이르듯 말하고 밀리아리아의 등을 떠밀어서 의무실에 들여 보냈다. 눈 앞에서 문이 닫히자, 그는 몸을 돌려 기다리고 있던 프레이에게 물었다.

"…나한테 무슨 용건인데?"

"무슨 용건… 이냐고…?"

그 차가운 말투에 프레이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토르가 없고… 키라도 없어서… 다들 슬퍼하고 있어…."

사이는 고개를 돌렸다.

"…나도 슬프고."

프레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그 반응에 사이는 약간 짜증을 느꼈다.

"그러니까 난… 지금 너를 위로해 줄 수 없어…."

그는 짜증을 참고 최대한 온화하게 말을 골라 했다.

"미안하지만… 다른 녀석에게 말해."

그래도 역시 말에 가시가 돋고 말았다. 프레이는 자신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키라가 사라졌기에 그를 대신할 보호자를 찾고 있을 뿐. 지금은 사이도 그런 그녀의 태도를 알고 있었다.

프레이는 믿기지 않는 듯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설마 사이가 그녀를 거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리고 마치 자신이 키라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화가 났다. 물론 사이는 전에 한 번 키라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기는 했다. 프레이를 빼앗은 그를 증오하며…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괴로움이 북받치는 것을 느끼고 사이는 일부러 힘 있는 걸음걸이로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의무실로 향했다. 옆을 지나쳐 가려는 그에게 매달리듯 프레이가 소리쳤다.

"사이! 하지만 나, 사실은…!"

"프레이!"

'그 뒷말은 하지 마!'

"너도 알고 있었잖아! 나 사실 키라 따윈…."

"적당히 좀 해!"

사이가 호통을 쳤다.

"넌 키라를 좋아했잖아!"

"아냐!"

프레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긴 뭐가 아냐!"

스스로도 놀랄 만큼 분노를 느끼면서 사이는 그 사실을 그녀에게 퍼부었다.

"처음에는 어땠는지 몰라…. 하지만 녀석은 착해서…."

그의 뇌리에 눈이 마주치면 항상 슬프게 시선을 돌리던 키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이는 자신만이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키라 역시 상처 입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용서하지 못한 자신의 편협함이 지금은 후회가 되었다.

"그래…, 그런 녀석이라서…!"

키라는 착한 녀석이었다. 어쩌면 그도 이미 프레이의 의도를 깨달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키라는 소중한 보물처럼 그녀를 아끼고 지켰고…, 그리고… 죽었다…! 그런데도…!

"아니야아아!"

프레이는 지금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완강하게 고개를 계속 저었다.

"아냐…, 아냐…!"

그런데도 정작 프레이는 그것을 부정하고 마는 건가…? 사이는 참을 수 없어서 양손을 꾹 움켜쥐었다.

'이래서는 키라가 너무도 불쌍하다!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사람이 이런 녀석이었다니…!'

하지만… 프레이를 비난할 자격이 과연 자신에게 있는 것일까? 한 번은 키라의 죽음을 바랐던 자신에게. 승무원들은 이미 키라의 죽음 따위는 잊어버린 듯 하다. 두 사람의 죽음에 겁을 먹은 카즈이는 얼른 함에서 내리고 싶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키라가 목숨과 맞바꿔 지키려고 했던 것이 이런 것이었나? 불쌍한 키라. 착하고, 뭐든 잘 하고, 강하고…. 녀석의 목숨이 우리들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는데…. 그가 의무실 앞에 멈춰 섰을 때 안에서 뭔가 바닥에 떨어진 것 같은 큰 소리가 났다.

'밀리아리아…?!'

그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의무실에 발을 들여 놓은 밀리아리아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의무실에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아무래도 의사는 외출한 모양이다. 사이가 기다리라고 했기에 밀리아리아는 느릿느릿 의자에 앉았다. 열려 있는 서랍에서 권총이 엿보이는 것을 그녀는 허탈한 눈으로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 봐, 의사 선생!"

갑자기 등 뒤에서 무례한 목소리가 들려 와 그녀는 움찔 일어섰다. 돌아 보니 커튼으로 반 쯤 가려진 진료용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얼렐레?"

그녀를 보고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은 그 인물은 낯 익은 얼굴이었다. 밀리아리아는 숨을 삼키며 주춤 물러섰다. 거뭇한 피부에 금색 머리카락, 짓궂은 표정.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이 소년은 그 때 복도에서 보았던 버스터의 파일럿…, 적의 병사였다. 소년은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표정은?"

밀리아리아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적의 병사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단 둘이 있게 된 상황이 무서워서 참을 수 없었다. 상대는 코디네이터다.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자프트 병사는 내뱉듯 말했다.

"내가 무서워? 신기해 보여? 걱정 마, 꽁꽁 묶여 있으니까!"

일부러 보여 주듯 등 뒤로 묶인 양 손목을 보였다. 그 나름의 야유였다.

"그보다… 너, 또 우는 거야?"

소년은 밀리아리아의 얼굴을 보더니 깔보는 것 같은 어조로 말하고 다시 몸을 바로 눕혔다.

"이런 녀석이 왜 전함에 타고 있는 건지! 그렇게 무서우면 군대 같은 곳에는 왜 들어왔어?"

그저 이질적인 자에 대한 공포로 얼어붙어 있던 밀리아리아는 그가 한 말에 그 공포가 단숨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아니면 멍청하고 무능한 내츄럴 남자 친구라도 죽은 거야?"

모멸을 담아 한 야유에 머리로 피가 확 몰렸다. 멍청하고 무능…? 코디네이터인 그에게는 토르의 목숨 따위는 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 느끼고 있던 공포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이 녀석들이…! 이 녀석들이…!'

그녀는 책상 위에 방치되어 있던 메스를 집어 들고 폭발적인 격정이 이끄는 대로 침대에 있는 적을 향해 내리 찍었다.

'이 녀석들만 없었어도 토르는…!'

"……?!"

자프트 병사는 뛰어난 순발력으로 그녀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그 능력 조차 밉살스럽다. 밀리아리아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그 상대를 메스로 베어 갔다.

"무슨 짓이야! 이 녀석!"

소년의 눈에 공포가 일었다.

"우아아아!"

덤벼 드는 밀리아리아와 그 공격을 피하는 자프트 병사는 그대로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때, 문을 열고 들어 온 사이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밀리아리아!"

다시 메스를 치켜 든 그녀를 사이가 달려 들어 제지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날뛰며 울부짖었다.

"이거 놔!"

"진정해, 밀리!"

사이를 쫓아 온 프레이도 입구에서 멍하니 발을 멈추었다.

"토르가…, 토르가 없는데!"

밀리아리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어째서 이런 녀석이…, 이런 녀석이 이 곳에 있는 거야?!"

그녀의 분노에 호응하듯 바닥에 쓰러진 자프트 병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관자놀이에서는 새빨간 피가 흘러 내려 뺨을 적시고 있었다.

"어째서… 토르가…?"

추켜 올린 손에서 힘이 빠지자 번들거리는 메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사이에게 매달려 흐느꼈다.

"토르가 없는데… 어째서…!"

바닥에서 상체를 일으킨 자프트 병사는 방금 전과는 다른 공포로 얼굴이 굳은 채, 흐느껴 우는 밀리아리아를 쳐다보았다. 그 때 느릿하게 움직인 자가 있었다. 프레이가 반 쯤 열려 있는 서랍에서 총을 꺼내 눈 앞에 겨눈 것이다. 그 얼굴은 검은 증오심에 깃든 채 일그러져 있었다.

"프레이…?!"

사이는 소리쳤고, 밀리아리아는 무디게 빛나는 총구와 끔찍함조차 느껴지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코디네이터 따윈…."

프레이는 소리치며 방아쇠에 걸려 있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모두 죽어 버려─!!"

그 말에 밀리아리아는 움찔 하더니 곧바로 프레이를 향해 달려 들었다. 좁은 방 안에 총성이 울려 퍼졌고, 총알은 빗나가서 천장의 전등을 깼다. 파편이 쓰러진 두 사람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밀리아리아는 프레이의 몸 위에서 자신의 몸을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아직 반향으로 웅, 웅, 하는 귀에 대고 프레이가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밀리아리아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왜 방해하는 거야?! 너도 죽이려고 했잖아!"

프레이의 분노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방금 전 손에 메스를 쥐었을 때 밀리아리아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은 적 병사에 대한 증오심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자신이 죽이려 했던 자를 지키려는 걸까?

"너도 미울 거 아냐?! 이 녀석이!"

밀리아리아는 눈물에 젖은 눈을 크게 뜨고, 외치는 프레이를 쳐다 보면서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토르를 죽인 코디네이터가…!"

'아냐…!'

밀리아리아는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증오로 가득한 프레이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아연실색했던 것이다. 자신도 분명 조금 전까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디네이터 따위는 모두 죽어 버려!

하지만… 그렇다면 키라는? 키라도 코디네이터다. 그리고 그를 잃어서 자신은 슬프다.

"뭐야…? 너도 똑같잖아…!"

프레이의 외침이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너도 나하고 똑같잖아!"

"아냐…."

밀리아리아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그것으로 자신을 타이르려는 듯.

"달라…, 나는…."

아버지가 살해 된 후 마치 사람이 변해 버린 것 같은 프레이. 코디네이터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키라를 조종하고 상처 입히고….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밀리아리아는 어렴풋이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프레이도 키라를 잃어서 슬플 텐데…, 그래서 이 자프트 병사에게 총구를 겨눈 것일 텐데… 그것 조차 코디네이터에 대한 증오심으로 바뀌어 있다. 그런 것과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는 밀리아리아로서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자프트 병사는 피를 흘리고 있다. 자신들과 같은 색깔의 피를…. 그 상처를 입힌 것은 밀리아리아 자신이다. 서로 상처 입히고, 서로를 죽이고… 그런 것과는 다르다!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달라…!"

죽은 자를 앵토하는 것과 적을 증오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바닥에 웅크린 채 눈물을 흘리면서도 밀리아리아는 분명히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난 프레이처럼은 되지 않겠어.'

 

 

"포로를 계속 의무실에 놔 둔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통로를 걸으면서 나탈이 냉정한 어조로 마류에게 진술했다. 매 번 그렇지만 사무적인 내용에 깃든 규탄에 마류는 진절머리를 내며 그 앞을 걷고 있었다.

"하물며 그 곳을 잠시나마 무인지경으로 만들다니…. 지난 번 전투로 병사들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일이 일어날 걸 인식했어야죠."

"그래…."

입항한 이후로 5일이나 대기 상태에 있고, 상부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건 마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번 사건은 그런 울분의 폭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 포로에 관해서는 마류도 깜박하고 있었다. 알래스카 입항과 동시에 본부에 인도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일단 부상 치료 차 의무실에 유치하도록 지시해 놓고 보류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포로에 대해서조차 본부의 지시가 없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래선 마치 포로에게 탈주하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습니까?"

"음…."

언제나처럼 나탈이 말하는 것은 정론 뿐이었다. 그녀처럼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단순 명쾌할까. 명령을 따르고 규칙을 지키며 승리만을 생각할 뿐 다른 것은 모두 버린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무리다.

"이번 사건도 보고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녀의 말에 마류는 건성으로 손을 저었다.

"그래, 그것도 달아 놔."

"함장님."

마류의 자포자기하는 것 같은 태도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나탈의 어조가 사나워졌다.

"저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당신을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나탈을 돌아 본 마류는 나탈이 못 참겠다는 듯 진지한 얼굴에 조바심을 드러내는 것을 확인하고 훗 미소 지었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개인적인 감정으로 상대가 반응해 주는 편이 그나마 개운할지도 모른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우리들에게 규율은 중요한 것이고, 야전 임관이든 긴급 사태든 그건 바뀌지 않는다는 것 뿐입니다!"

"알고 있어, 라고 말하고 싶은 대목이지만…."

미적지근한 마류의 대답에 나탈의 가느다란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군에는 엄격하게 통제되고 상관의 명령을 신속하게 실행할 수 있는 병사와, 넓은 시야로 정세를 살피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휘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대와 함은 이길 수도, 살아 남을 수도 없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마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탈에게 눈길을 돌렸다.

"…실천하지 못하면 똑같은 거겠지?"

나탈의 말은 문자 그대로 군사 교련에서 교관이 말하는 이상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지휘관 입장에 처해 보니 그런 일은 못 하겠다거나,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은 지휘관에 적합하지 않은 셈이다. 그녀의 부관은 여느 때처럼 짜증이 깃든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나탈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결코 자신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못 미더운 상관이라 생각해서 답답해 하고는 있겠지만….

"…내가 지휘관의 그릇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어."

"함장님, 저는…."

마류의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말에 나탈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뭐라고 말하려 했다.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하고 마류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알고 있어, 나탈."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녀가 상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너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자 나탈은 회의적인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하지만 비꼬는 게 아니라 이것이 마류의 본심이었다. 매 번 충돌하기는 했지만 나탈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는 것은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자신은 비겁할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못 내리는 냉혹한 판단을 나탈에게 떠넘겨서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볼 수 있다.

"너라면 분명 좋은 함장이 될 거야…."

미소를 보이자, 나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의외였다. 그 말을 당연하다는 얼굴로 받아 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지만 분명 자신도 아직 상대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생각도 든다. 일방적으로 그녀를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상대라고 단정 짓고 멀리해 왔는데, 좀 더 친해지려는 노력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임무를 벗어나서 좀 더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물론 만약 그런 제안을 해도 나탈은 일축했을지 모르지만.

 

 

부러진 팔이 아직 고정되어 있어서 며칠 만에 입는 제복을 제대로 입을 수 없었다. 아스란은 여느 때보다 무딘 동작으로 가방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창분에서 비치는 석양이 긴 통로를 어쩐지 그리운 오렌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통로 중앙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곳에 서 있던 인물, 이자크 쥴은 아스란이 걸어 와도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곳에 용건도 없이 서 있다는 것은 아스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고집스러움이 이자크 답다고 생각되어 아스란은 살짝 미소를 흘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스란이 다가가자 이자크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벽에서 몸을 일으켜 아스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 소년은 잠시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았다….'

러스티, 미겔, 니콜을 잃었고 디아카는 그 행방조차 모른다. 그리고 지금 자신도 떠나는 것이다. 이자크는 아스란을 노려보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도 곧 그 쪽으로 가겠어."

튀어나온 라이벌 다운 발언에 아스란은 미소 지었다. 그러자 상대는 바보 취급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단정한 얼굴에 울컥한 표정을 떠올리며 눈길을 돌렸다.

"너 따위가 특무대라니…!"

아스란은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 놓고 손을 내밀었다. 이자크는 그 손을 곤혹스러운 듯 내려다 보았다.

"여러 가지로 미안했어. 지금까지… 고마웠고…."

무시 당할 줄 알았는데 이자크는 묵묵히 아스란의 말을 들으며 그 손을 쥐었다. 무뚝뚝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 손에는 아플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 소년의 이런 정이 많은 일면을 눈치 채지 못했다. 충돌을 되풀이하고, 친구를 잃고, 같은 아픔을 나누면서 비로소 그들은 서로를 겨우 이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럼."

아스란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잡은 손을 놓았다. 가방을 집어 들고 걸음을 떼려고 하자, 이자크는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별안간 말했다.

"다음에는 내가 널 부하로 삼고 말 테니까!"

거만한 말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스란도 거기서 서투른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까지 죽지 마!"

이어진 말에 아스란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과연 그런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 것일까…? 의심하면서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것을 끝으로 두 소년은 헤어졌다. 다음에 만날 날이 언제가 될지,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도 알지 못한 채….

 

 

브리핑 룸에 모인 마류 일행은 들어온 장교들에게 경례했다.

"군 사령부의 윌리엄 서덜렌드 대령이다."

그들 맞은편에 있는 중앙 좌석에 앉은 장교가 테이블에 서류를 던지며 말했다.

"제군들이 제８기동 함내 아크 엔젤의 심의, 지휘 일체를 맡고 있지? 앉아라."

그의 쌀쌀맞은 말과 함께 승무원들은 의자에 앉았다. 방에는 아크 엔젤의 주요 장교와 부사관들이 모여 있었다.

"로그 데이터는 이미 나브컴에서 회수해서 해석 중이지만… 꽤 훌륭한 전력(戰曆)이더군, 마류 라미아스 함장."

그것은 분명 빈정거림이 섞여 있는 말이었다.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시작된 청문에 마류는 당혹스러움과 감출 수 없는 반감을 느꼈다.

"그럼… 지금부터 제군들로부터 지금까지의 상세한 보고와 증언을 들을까 한다."

서덜렌드는 그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고려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의사를 진행해 갔다.

"또한 이 청문회는 군법 회의에 준하는 것으로, 이 곳에서의 발언은 모두 공식적인 것으로 기록된다는 사실을 말해 두지. 각자 허위가 없는 발언을 하도록."

이 때 그는 처음으로 시선을 들어 마류를 쳐다보았다.

"…알았나?"

"예…."

마류는 딱딱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파일1 '헬리오 폴리스'에 대한 자프트 군 기습 작전 시의 상황…. 마류 라미아스, 당시 대위의 보고부터 듣겠다."

"예."

마류는 일어서서 보고를 시작했다. 기습을 받았을 때 자신이 스트라이크를 지키기 위해 탑승한 것, 그 곳에 있던 키라 야마토를 피난시키기 위해 조종석에 동승시킨 것…. 지금 돌이켜 보면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그 소년도 지금은 없다…. 별안간 서덜렌드가 그녀의 말을 끊고 물었다.

"그럼 귀관은 그 시점에서 이미 그 소년…, 키라 야마토가 코디네이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는 뜻인가?"

"예…."

마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공업 전문 대학의 학생이라고 해도 처음 보는 기체의…, 그것도 우리 군이 일급 기밀이었던 X넘버의 OS를 순식간에 파악하여 업데이트를 하다니, 평범한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코디네이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흥…."

서덜렌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그 힘을 보고 귀관은 어떻게 느꼈지?"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마류는 망설였다.

"그저… 경이적인 것이라고…."

"흥!"

머뭇거리며 한 그녀의 말에 서덜렌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본대와 연락이 되지 않을 때 프라가 소령의 추적을 피해 온 자프트의 모빌 슈트가 콜로니 안으로 침입했으며, 불운이었다고 밖에는 말할 길이 없지만 스트라이크는 그 때 아무 것도 모르는 민간인, 그것도 코디네이터 아이에게 맡겨졌고, 귀관은 그것을 충분히 제어할 수 없었어. 안 그런가?"

"아뇨! 하지만 그 경우…."

무우가 일어서서 항의하려고 했다.

'불운?'

마류 자신도 그 말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 자신은 그 때까지 정 반대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헬리오 폴리스에서 일어난 일은 불운한 일이기는 했지만, 탈취되지 않은 유일한 기체에 우연히 키라가 탑승한 것 자체는 행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스트라이크는 나머지 4기와 마찬가지로 탈취되었거나 그 자리에서 격파되었을 것이다. 자신 혼자서는 도저히 그것을 지켜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실 확인을 하고 있는 거다, 프라가 소령. 사적인 견해는 삼가기를 바란다."

서덜렌드가 일어 선 무우를 힐끗 보고는 주의를 주었다. 무우는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자프트의 모빌 슈트가 콜로니 안으로 침공하자, 키라 야마토는 그 위력도 알지 못한 채 320mm 초 고 임펄스 포 아그니를 발사하여 결과적으로 적 모빌 슈트를 퇴각시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헬리오 폴리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마류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무지 이 이야기의, 그리고 이 청문회 자체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이 일격은 자프트 군 기습 부대에 심각한 위기감을 주어 2차 콜로니 침공을 초래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서덜렌드의 말에 무우가 다시 반발했다.

"그것은 결과론적인 추측에 불과합니다!"

"…인정한다."

서덜렌드는 쌀쌀맞게 고개를 끄덕인 후, 힐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귀관도 지휘관으로 전장에 나서는 자이니 알 텐데? 귀관이 만약 기습 작전의 지휘관이었고, 그런 신형 병기의 위력을 보았다면 그걸 그냥 두고 볼 수 있을까?"

무우는 말문이 막혔다.

"…아뇨."

"반격은 잘못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의외로움을 금치 못하고 마류도 물었다. 그러자 서덜렌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코디네이터 아이가 함께 있었던 것이… 불운이라고 말하려는 거지."

그 말에는 마류 뿐만 아니라 승무원 모두가 반응했다.

"무슨 소립니까?! 그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하지만… 없었다면 헬리오 폴리스는 붕괴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덜렌드는 반박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듯 말했다.

"흘러간 시간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그가 OS를 업데이트하지 못하는 평범한 내츄럴 아이였다면…?"

그는 차가운 눈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류와 승무원들을 쳐다보았다.

"그 때 스트라이크에 탑승하지 않았다면?"

마류는 할 말을 잃었다. 만약 그랬다면 확실히 자프트는 스트라이크만 격파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기습에 의해 다소의 피해는 났겠지만 헬리오 폴리스는 지금도 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졌겠지. 하지만 그는 그 곳에 있었다."

서덜렌드는 조롱하는 것 같은 눈으로 마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를 스트라이크에 태운 것은 귀관이었지, 라미아스 소령?"

마류는 얼어 붙은 듯 상관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저의 판단 미스… 라는 건가요?"

그가 하려는 말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란 다시 말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모빌 슈트를 적이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것…, 그리고 스트라이크에 탑승한 마류와 키라는 기체와 함께 격파되어 죽었어야 했다는 의미다. 서덜렌드는 자신이 방금 마류에게 죽으라고 한 것이나 다름 없는 말을 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갑게 대답했다.

"우리는 코디네이터와 싸우고 있다, 라미아스 소령. 그 경이적인 힘과. 민간인 아이라도 코디네이터는 코디네이터다. 그것을 보고서도 어째서 깨닫지 못한 거지?"

망연자실해 있는 마류 앞에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놈들이 있기에 세상이 혼란스러운 거다."

마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처음에 느꼈던 위화감은 커지기만 할 뿐, 이제 그녀는 상관이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앞뒤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논리는 기묘하게 뒤틀려 있어서 그 자신의 편견과 증오로 귀결되고 있었다.

"…아크 엔젤은 그 후에도 유라시아 군사 기지 '아르테미스'를 궤멸시키고 선봉대를 전멸시켰으며 결국에는 제８함대까지 잃게 했다."

"곡해입니다! 저희들은…!"

무우가 언성을 높이자 서덜렌드는 차가운 눈을 들었다.

"자네들이, 뭐?"

마류는 그 말을 이어 받았다.

"저희들은 그저 할버튼 제독님의 의사에 따라…."

그러자 서덜렌드는 끈끈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의지가 지구군 전체의 뜻이라는 건가?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됐지?"

'그렇다면 지구 연합군 전체의 뜻은 대체 뭔데?'

마류는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들이 얌전히 적에게 격파되는 것이 지구군의 뜻인가?'

"진정하게, 마류 라미아스. 나는 모든 것이 제군들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니까. 힘든 상황에서 실로 잘 해 줬다고 생각해…."

치하하는 말은 무덤덤하게 울려 퍼졌고 그가 마류 일행의 고생 따위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부각시키기라도 하듯 조롱이 깃든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만한 희생을 치르고 입항한 아크 엔젤은 정작 그 스트라이크조차 잃은 상태인데, 이래선 희생된 사람들이 기뻐할까?"

그렇게 물으면 반론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에도 없는 말일 거라고 문득 마류는 깨달았다. 만약 본심이라면, 지금까지 치른 희생을 아쉬워한다면, 왜 본부는 원군을 한 번도 보내지 않고 스트라이크가 격파되도록 놔 둔 것인가? 그러나 서덜렌드는 차가운 표정을 지우지 않고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고 이 일련의 싸움의 성과와 책임을 분명히 해야겠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마류의 마음 속에서는 의문이 검은 얼룩처럼 퍼져 갈 뿐이었다. 서덜렌드의 말 하나만 보아도 마류와 같은 일선의 병사들의 감각과는 큰 거리가 있었다. 일찌기 할버튼 제독은 말했었다.

─녀석들은 전장에서 얼마나 많은 병사가 죽어 가는지 숫자로 밖에는 몰라!

그렇다. 그렇게 된 것이다. 상부의 장교들에게 희생은 서류 상의 숫자에 불과하다. 마류가 쭉 느끼고 있던 위화감의 일부는 그것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헬리오 폴리스, 아르테미스, 제８함대…. 너무도 큰 그 희생에 대해 말하면서도 서덜렌드 등에게 그것들은 아픔을 수반한 사실이 아니었다. 숫자 상으로 보면 분명 아크 엔젤 한 척과 그것들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규탄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만, 본부에서는 아크 엔젤도, 그리고 아크 엔젤이 가져 온 데이터도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스트라이크를 이 곳까지 가져왔는데, 군 상층부에는 그것들이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던가? 그렇다면 자신들의 분전은…, 희생해 왔던 것들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마류는 온 몸에 허탈함이 퍼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질의 응답이 이어졌고, 마류 일행이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로 상태에 빠졌을 무렵에서야 서덜렌드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것으로 본 청문회는 종료한다. 긴 시간의 질의 응답에 수고가 많았다."

방이 확 밝아지자 마류는 지친 눈을 깜박거렸다. 장교들은 성가신 사무 작업을 하나 처리했다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자리에서 일어 섰다.

"아크 엔젤의 다음 임무는 나중에 통지하겠다."

서덜렌드도 일어서면서 쌀쌀맞게 말했다. 그것은 다시 대기 상태로 묶이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것조차 이제 마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녀의 주의는 다시 환기되었다.

"무우 라 프라가 소령, 나탈 버질 중위, 프레이 알스터 이등병 이외의 승무원은 지금까지처럼 함에서 대기를 명한다."

"그럼… 저희들은 어떻게?"

무우도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세 명에게는 전속 명령이 떨어졌다. 내일 아침 8시까지 인사국에 출두하도록. 이상이다."

분주하게 자료를 챙겨 방을 나가려는 서덜렌드를 나탈이 불러 세웠다.

"저기… 알스터 이등병은 어째서…?"

전속의 기준을 알 수 없어서 묻는 그녀를 서덜렌드가 돌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녀가 지원할 때 한 말을 자네도 듣지 않았던가?"

"아…, 예…."

나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듯 했다. 서덜렌드는 거듭 말했다.

"알스터 가문의 딸이기도 한 그녀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겠지. 그 지원 동기와 함께."

─진정한 평화가, 진정한 안심이 싸우는 것에 의해 얻어진다면… 저도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받아 싸우고 싶어서….

프레이는 울면서 그렇게 호소했다고 들었다. 확실히 그 말을 듣고 사이 일행은 자신들도 군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마류는 쓴 맛이 입 속에 번지는 듯 했다. 한 소녀의 진지한 말을 이 사람들은 이용 가치로 밖에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대서양 연방의 관료 가문에다 극적인 죽음 때문에 그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새겨진 조지 알스터의 유족이 자진해서 지구 연합군에 지원했다고 하면, 그 미담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절호의 선전 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마음이 움직여서 군에 들어 온 소년들을 그들은 역시 숫자로만 파악해서 운용할 것이다. 소년들의 마음을, 그 생명의 가치를 돌아 보지도 않고…. 서덜렌드는 짐짓 아는 척 하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활약할 자리는 전선이 아니어도 좋은 거다."

마류는 의문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잘못 되어 있는 것은 그들일까, 아니면 자신일까…?

 

 

"이것 좀 프레이에게 가져다 줄래?"

식당 카운터 앞에서 사이가 그렇게 말하며 식판을 하나 내밀자, 카즈이가 짜증을 냈다.

"뭐? 왜 내가?"

사이는 울컥했다. 밀리아리아의 모습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그는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조금은 카즈이도 협력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럼 됐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양 손에 하나씩 식판을 들자, 카즈이는 그의 분노를 느끼고 허둥거렸다.

"아, 알았어. 내가 들게!"

"됐어."

무시하고 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카즈이가 억지로 그 식판을 빼앗으며 비위를 맞추려는 듯 웃었다.

"방까지는 들고 가 줄 테니까… 건네는 것만 사이가 해. 알았지?"

그래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사이는 더 이상 프레이와 대면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싶은데. 그러나 자신의 매몰찬 태도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사이는 카즈이의 말을 받아 들였다. 통로를 걸으면서 카즈이는 줄곧 말을 걸었다.

"하지만… 설마 밀리가 그럴 줄은…. 포로를 나이프로 찌르려고 했다면서?"

마치 가벼운 이야깃거리라도 꺼내려는 것 같은 어조에 사이는 짜증을 느끼면서 그만 반론하고 말았다.

"그 자프트 녀석이 잘못 했어. …뭔가 헛소리를 한 모양이야."

그의 가슴에 다시 분노가 끓어 올랐다. 연인을 잃고 울고 있는 소녀를 궁지에 몰아서 칼을 휘두르게 만든 적 병사에 대한 분노였다. 이번 일로 밀리아리아는 다시 실의에 빠지지 않았을까…?

"아, 그 녀석 이름은 디아카래. 디아카 엘스먼."

카즈이가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사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헛소리라니 무슨?"

어디서 그런 것을 들었고 어떤 의도로 그런 것을 캐묻는 걸까?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카즈이의 태도에 사이는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

카즈이는 상처 입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곧 다시 말을 돌리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걸까? 이 함, 알래스카에 도착했으니 끝난 거 아냐? 우리들도 제대할 수 있어야 정상인데."

또…? 사이는 짜증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요즘 카즈이는 입만 열면 그 얘기다. 그런 건 입장이 같은 자신에게 물어 봤자 대답해 줄 수도 없는데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것도 몰라. 그런 건 함장님한테 물어 봐."

그렇게 군이 싫다면 애초에 왜 지원한 거야? 사이는 화가 나서 생각했다. 사이가 입대를 강요한 것도 아닌데 카즈이는 마치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처럼 제대 이야기만 되풀이한다. 아니, 강요한 거나 마찬가지였나? 다들 입대를 결심한 그 때 자신만 빠지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의지가 약한 카즈이는 사람들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키라도…. 그것을 생각하면 사이의 가슴은 아팠다. 만약 자신이 말을 꺼내지 않았어도 다들 함에 남았을까? 다들 남지 않았다면 키라는 자유로워지지 않았을까? 만약… 그가 프레이를 따라 입대하지 않았다면 키라도 토르도 죽지 않았을지도…. 그 때는 군에 들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다들 몰랐던 것이다. 카즈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 사람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깨닫고 전율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자신이다, 라고. 사이도 키라와 토르가 죽을 때까지 전쟁이라는 것을 안일하게 보고 있었다. 싸움을 가까운 곳에서 보면서 자신들만이 평화 속에서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싸운 결과 자신이 뭘 할 수 있었나? 두 사람의 목숨을 잃게 했을 뿐만이 아닌가. 그런 자신이 어떻게 카즈이를 책망할 수 있을까…?

어두운 생각에 사로잡힌 채 그는 밀리아리아의 방에 도착했다. 방 안은 그의 마음을 반영한 것처럼 어두웠다. 그녀는 이런 곳에 웅크린 채 토르를 생각하고 있는 건가…?

"밀리아리아, 식사를…."

기분을 바꾸려는 듯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말하려다가 사이는 입구에서 발을 멈추었다. 방에 밀리아리아의 모습은 없었다.

디아카는 어둑한 천장을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건 직후, 그는 상처의 치료를 받고 이 독방으로 이송되었다.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의무실 쪽이 이 곳보다 변화가 많았다. 짜증이 나서 몸을 뒤척이다가 관자놀이에 입은 상처가 베개에 닿아 "아얏" 하는 중얼거림을 무심코 흘렸다. 하지만 아픈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본의가 아니었다. 기체가 파손되어 꼴사납게 투항하게 될 줄이야…. 게다가 상대는 모빌 슈트가 아니었다. 스트라이크의 화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해도 기껏 해야 전투기였다. 그런 전근대적인 병기에 당해 내츄럴들에게 항복하다니, 그로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굴욕이었다. 이제 만약 본국으로 살아 돌아간다 해도 완전히 엘리트 코스에서는 벗어나 버렸을 것이다. 입대를 반대하던 평의회 의원인 아버지는 그 것 봐라, 라고 말할 것이 틀림 없다. 자신이 왜 이런 꼴이 되어 버린 걸까. 그래서 그는 더욱 빈정대는 태도로 행동하며 주위 내츄럴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의 눈에는 연합의 병사 따위는 둔하고 어리석은 구인류에 불과했다. 그래서….

─멍청하고 무능한 내츄럴 남자 친구라도 죽은 거야?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리고 디아카는 얼굴을 찌푸렸다.

"쳇…, 그 말 대로였을 줄이야…."

울부짖으며 자신에게 메스를 내리 찌르려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이 따끔 아파 왔다.

─토르가 없는데… 어째서 이런 녀석이 이 곳에 있는 거야…!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살해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아니었다. 그에게 지금까지 격추한 적의 숫자는 자신의 공적으로 이어지는 점수에 불과했다. 물론 군에 지원한 것은 플랜트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지만, 영웅이 되고 싶다는 치기 어린 자기 과시욕도 있었던 것 같다. 격추 숫자를 경쟁하며 굼뜬 내츄럴을 상대로 전투를 게임처럼 해 오고 있었다. 눈물로 눈이 빨갛게 부어 오른 소녀가 공격해 오리라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자신은… 그 소녀들의 적…. 그녀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원수인 것이다. 그 사실이 차가운 손으로 내장을 헤집는 것 같은 답답함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악당 편에 서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디아카 자신이 악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왜 그 소녀는 나를 지켜 준 걸까…?'

그 직전까지 죽이려 했던 자를 몸을 던져 총탄에서 구한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옷자락이 스치는 작은 소리가 들려 왔다. 디아카는 반사적으로 그 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다음 순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쇠창살 사이로 이 쪽을 들여다 보고 있던 상대가 그의 동작에 겁을 먹은 듯 움찔 물러 섰다. 어제의 그 소녀였다. 그녀는 디아카가 무서운지 빙글 발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무심코 디아카는 소리쳤다.

"기다려!"

왜 소녀는 자신을 겁 내는 것일까? 살해될 뻔했던 건 자신인데. 코디네이터이기 때문인가? 이런 쇠창살 안에 있는데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생각은 디아카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대로 가 버릴 줄 알았지만 소녀는 그의 말에 발을 멈추고 조심조심 돌아 보았다.

"아…."

불러 세운 것까지는 좋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원하는 듯….

"음… 저기…."

디아카는 고개를 돌리고 잠시 말을 흐렸다. 마치 처음으로 여자를 꼬드길 때처럼 갈팡질팡했다. 바보 같다. 이래서야 내츄럴을 얼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힐끔 소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남자 친구는… 저기… 어디서…?"

입에서 나온 말은 꼬드기는 말과는 전혀 동떨어진 말이었다. 죽었느냐…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최대한 상대에게 충격이 덜할 말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자 소녀 쪽에서 그의 질문을 읽어 내고 대답해 주었다.

"…스카이 글래스퍼에 타고 있었어."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섬에서… 너희들이 공격해 왔을 때…."

그 이름이 뭔지 몰라 되묻자, 소녀는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전투기…. 파란색과 흰색의…."

그 기체는 본 적이 있다. 두 기 중 한 기에 그녀의 '토르'가 탑승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니야…."

무심코 안도가 중얼거림이 되어 흘러 나왔다. 소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과 싸웠던 상대는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무사히 불시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기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디아카는 깨달았다. 그것은 어쩌다 자신이 '토르'가 탄 기체를 상대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만약 자신 앞에 그 기체가 나타났다면 디아카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격추시켰을 것이다. 그것을 타고 있는 것이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사실은 생각지도 않고…. 그 죽음을 이렇게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그렇다면 자신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방금 전처럼 우울해져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뭐 해?"

도발하듯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죽이러 왔으면 어서 죽여."

그러나 그 말은 반항적인 말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물끄러미 그런 그를 쳐다보았다.

'왜 죽이지 않는 거지…?'

디아카는 다시 그 의문을 품었다.

'왜 그녀는 나를 구한 거지? 나라면 죽였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은 적인 것이다.

'왜…?'

문득 다시 시선을 돌려 보니 쇠창살 밖에 이미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