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2권- 사막의 호랑이 :: PHASE.2 새벽의 사막

아크 엔젤은 전투 지역으로부터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착륙했다. 이미 새벽 동이 트기 시작했고, 푸른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짙은 하늘 아래 서광이 사구를 붉게 비추었다.

목적과 세력이 불명확한 버기 카 집단은 전함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스트라이크는 그들을 살피듯이 중간에 서 있었다. 디액티브 모드 즉 PS 시스템이 꺼진 상태의 스트라이크는 장갑 바탕색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강철 색을 띠고 있었다.

아랍 계열로 보이는 남자들이 버기 카에서 내렸다. 연령층이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성깔 있어 보이는 그들 대부분은 민족색이 짙게 드러난 의상이나 위장복 등을 입고 있었으며, 어느 모로 보나 정규군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쿠를 상대로 심심풀이로 싸우는 자들이 있을 리는 없다.

나탈이 좌석에서 일어난 마류를 향해 다가가면서 물었다.

"아군…이라고 판단하십니까?"

"적어도 총구를 겨누지는 않는군."

마류는 잠시 망설인 뒤 그렇게 대답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여하튼 가서 대화를 나눠야겠어. 상대방도 그럴 생각이겠지. 잘 하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마류는 자신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승무원들은 왠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류가 나탈을 향해 미소 지었다.

"뒤를 부탁해."

해치 앞에는 스카이 글래스퍼에서 내린 무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플을 손에 쥔 몇몇 승무원이 달려 와서 해치 주위에 몸을 숨겼다.

"이번 손님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아."

무우가 평상 시처럼 능청스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권총의 카트리지를 확인, 장전했다.

"난 사격에는 영 자신이 없는데…."

그리고는 한숨과 함께 허리에 찬 총집에 권총을 집어 넣었다.

'엔듀미온의 매'라고 불리며 진을 몇 기나 격추시킨 무우가 사격에 서투르다는 것은 의외여서, 마류는 가볍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 약간 긴장이 풀렸다. 무우가 일부러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류는 그가 곁에 있는 것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지금 그녀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격 솜씨가 아니라 이런 감각이다.

"열겠다."

무우가 해치를 여닫는 단추를 눌렀다. 싸늘한 새벽 공기와 함께 모래 바람이 밀려 들어왔고, 마류가 그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마류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도 연장자에 해당하는 우람한 체격의 사내가 마류 앞으로 걸어 왔다. 그가 이 집단의 우두머리인 모양이다. 짙은 수염을 기르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그가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류와 무우를 천천히 뜯어 보았다.

"저희들을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드려야 하겠죠?"

그 남자는 마류의 얼굴을 한참 동안 뜯어 보았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과묵한 눈이다.

"지구 연합군 제８함대 소속 마류 라미아스입니다."

그녀의 말에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 제８함대는 전멸했다고 하던데?"

마류는 그 소년을 노려보았다. 우두머리 사내가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입을 다물게 했다.

"우린 '새벽의 사막'이다. 내 이름은 사이브 아슈만. …답례 따윈 필요 없어. 우리가 당신들을 도와 준 게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마류는 사이브 아슈만의 검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자 상대방이 씩 웃으며 같은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우린 우리의 적을 쓰러뜨렸을 뿐이야."

그 말은 곧 이들이 이 지역의 반(反) 자프트 파라는 뜻이다. 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레지스탕스라고나 할까.

"'사막의 호랑이'를 상대로 싸우고 있나?"

무우가 어이 없다는 말투로 묻자, 사이브가 시선을 그 쪽으로 돌렸다.

"…당신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군."

"나는 무우 라 프라가. …이 근처에 아는 사람은 없는데?"

무우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사이브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호오, '엔듀미온의 매'와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무우와 마류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막 한복판에서 핸드 런쳐를 손에 쥔 채 기습 공격을 일삼는 게릴라 부대 치고는 놀라운 정보통이 아닌가.

"정보가 많으신 모양이군요. 그럼 저희들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지구군의 신형 전함 아크 엔젤 말인가? 크루제 부대에 쫓겨서 지구로 도망쳐 왔겠지. 그리고 저게 바로…."

사이브가 한 쪽에 서 있는 스트라이크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뒤쪽에서 그의 말을 가로막듯이 약간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X105…, 스트라이크라고 불리는 지구군의 최신 기동 병기. 그 원형이죠."

마류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그 곳에는 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서 있었다.

다른 레지스탕스와 마찬가지로 방탄 재킷을 착용했으며, 남자처럼 거친 태도로 금색에 가까운 날카로운 눈동자를 스트라이크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옆모습 밖에 보이지 않는 그 소녀는 주위 사람들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띠었다. 인종 자체가 다른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소녀의 정체보다, 그녀가 입에 담은 말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렇게 자세한 정보를 어떻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일까…?

마류가 소녀를 계속 응시하자, 그 시선을 가로막듯이 사이브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자, 서로 통성명이 끝났으니 이제 다 끝난 거다. 우리도 갑자기 재앙의 씨앗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물론 당신들도 이런 곳에 내려온 것을 재앙으로 여기고 있겠지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도 사이브의 시선은 마류 일행으로부터 뭔가를 끌어 내기 위해 끊임 없이 반응을 살폈다. 그것은 이 쪽도 마찬가지였다. 마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들의 힘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자 사내가 방심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대화를 하려면 우선 총부터 내려야 하지 않겠어?"

그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주위에 배치한 병사들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다. 해치 그늘 아래 대기하던 승무원들을 향해 마류가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제 됐죠?"

"저기 파일럿도."

사이브가 거대한 파수꾼처럼 그들의 회담을 지켜 보던 스트라이크를 턱으로 가리켰다. 마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스트라이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야마토 소위! 어서 내려 와!」

스트라이크의 외부 마이크를 통해 마류의 지시가 들려 오자, 키라가 해치를 열었다. 무중력 상태와는 달리 지상이라, 자동 사다리에 발을 얹고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키라는 마류를 향해 걸어 가면서 헬멧을 벗었다. 드러난 소년의 얼굴을 보고 레지스탕스가 웅성거렸다.

"뭐야, 저게 파일럿이야?"

"아직 꼬맹이잖아?"

그 중에 놀라서 숨을 멈춘 사람이 있었다. 그러더니 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키라 앞으로 뛰어 나왔다.

"넌…?!"

그녀의 느닷 없는 행동은 신중히 서로를 살피는 회담에서 돌출 행위나 다름 없었다. 모두가 순간적으로 흠칫했고, 무우는 소녀가 키라에게 해를 끼칠까 봐 총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무우의 움직임을 견제하듯이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부스스한 긴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있으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키라와 소녀는 주위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녀는 소리를 지르며 키라에게 손을 휘둘렀다.

"네가 어째서 저 따위 것을 타고 있는 거야?!"

키라가 반사적으로 소녀의 주먹을 붙잡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방금 전의 전투에서 스트라이크와 접촉을 시도했던 소녀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예전부터 키라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손을 붙잡힌 게 분한지 키라를 노려보았다. 짐승처럼 이글거리는 금색 눈동자가 낯설지 않아서 키라는 눈을 크게 떴다.

"너…, 혹시 그 때 모르겐 레이트에 있던…!"

자프트가 헬리오 폴리스를 습격한 운명의 날, 카토 교수를 만나러 온 소녀가 있었다. 그 후 서로 전투에 휩쓸려서 그녀는 피난용 대피소로, 키라는 스트라이크로 향한 뒤 소식이 끊어졌다. 그 뒤로 아직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오래 전 일처럼 느껴졌다.

키라가 잠시 주춤하자, 소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으…, 어서 놓지 못해! 이 바보야!"

그녀의 다른 한 손이 키라의 볼을 쳤다. 키라는 소녀의 손을 놓고 볼을 감싼 채 뒷걸음질 쳤다.

"카가리!"

우두머리가 질타하자, 이름을 불린 소녀가 힐끗 쳐다본 뒤 마지못해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한 번 더 강렬한 표정으로 키라를 노려본 뒤, 동지들이 있는 쪽으로 물러갔다.

얻어 맞은 통증보다 혼란스러움이 앞섰다. 키라는 멍한 표정으로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저 소녀가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둘 다 무사히 지브롤터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이는군.」

통신 모니터에 독특한 마스크를 쓴 금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프트의 전선 기지 지브롤터. 제８함대와의 교전 중 지구 중력에 이끌려서 낙하한 버스터, 듀얼과 함께 파일럿인 디아카 엘스만과 이자크 쥴이 이 곳에 수용되어, 상관의 지시를 받기 위해 통신기 앞에 서 있었다.

「지난 전투 때는 수고 많았다.」

그들을 격려한 상관을 향해 디아카가 비아냥거리듯 웃었다.

"그야 물론…, 죽을 뻔 했습니다만."

내열 캡슐도 없이 모빌 슈트만으로 대기권 돌입을 시도했다. 지구 연합군이 개발한 PS 장갑 덕분에 대기 마찰열에 모빌 슈트가 버틸 수 있었고, 다행히 낙하 지점이 지중해였기 때문에 가까스로 수면에 내려 앉았다. 그렇게 살아 남은 디아카는 말짱한 모습으로 농담을 던졌지만, 두 번 다시 시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모니터에 비치는 상대는 그들의 상관인 '가면의 남자' 라우 르 크루제였다.

「다리 달린 전함과 스트라이크를 격추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자네들이 본의 아니게 지구로 내려간 것은 오히려 행운인지도 몰라.」

한 번 노린 먹이는 놓친 적이 없다는 그가 아크 엔젤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가면에 가려진 그의 얼굴에는 분한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고, 통신 내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디아카는 상관의 그런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다리 달린 전함은 앞으로 지구 주둔 부대의 표적이 되겠지만, 자네들도 당분간 지브롤터에 머물면서 그들을 뒤쫓도록.」

그는 일단 말을 끊고, 마치 놀리듯이 디아카를 쳐다보았다.

「물론… 기회가 닿으면 그들을 처치해도 좋아.」

통신이 끝났다. 디아카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옆에 서 있는 동료를 올려다 보았다.

"저 말은 우주로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야?"

의자를 빙글 돌리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둔군과 함께 다리 달린 전함을 찾아서 땅 위를 기어 다니라는 소리냐고?"

디아카는 물론 함께 지구에 내려온 이자크 쥴도 우주군의 에이스 파일럿이다. 크루제 부대 소속이라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아무리 전투 중이었다 해도 자신들의 실수로 지상에 낙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모빌 슈트는 우주에서 싸워야 빛을 본다고 디아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연한 생각이다. 그들은 코디네이터 제２세대이며, 우주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랐다. 태어났을 때부터 우주에 몸 담아 온 그들에게는 지상에 있는 것이 훨씬 부자연스러웠다.

완전히 의욕을 상실하고 축 늘어져 있던 디아카가 문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자크가 느닷없이 얼굴 반 쪽을 가린 붕대를 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봐, 이자크…."

디아카는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자크는 지난 스트라이크와의 전투 때 파손된 헬멧 바이저에 의해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지구로 강하하기 전에 그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가했다. 디아카는 이자크의 부상에 대해 물어 보지 않았다. 곧바로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그다지 심하지는 않을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디아카는 붕대 밑에 드러난 이자크의 상처를 보고 경악했다. 이자크의 얼굴을 끔찍한 흉터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워낙 섬세하고 날카로운 외모라 그 얼굴에 새겨진 상처 자국이 더욱 처참하게 느껴졌다. 디아카는 상처로부터 눈을 돌리지 못했다.

현대 의료 기술이라면 이 정도 상처 쯤은 흔적도 없이 지울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상처는 이자크 스스로가 남겨 둔 것이 분명하다. 지구군 모빌 슈트에 당했다는 모욕감이 이자크에게는 더 큰 상처였던 것이다.

이자크는 상처 투성이의 얼굴을 분노로 일그러뜨리면서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기회가 닿으면… 이라고?"

그는 풀어 버린 붕대를 꽉 쥔 채 소리 질렀다.

"당연히 내가 쓰러뜨릴 거다! 이번에는 반드시… 내 손으로 말이야!"

 

 

부드러운 모래 바다에 튀어 나온 작은 섬 같은 바위 산에 아크 엔젤이 접근했다. 강하 지점에서 동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전함이, 버기 카가 유도하는 대로 암석 사이를 지나 천천히 이동했다. 그 곳 주민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전함의 위용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바위 산에 둘러싸인 계곡 밑으로 아크 엔젤이 양쪽 날개로 튀어 나온 암벽을 깎으면서 착지했다. 적의 정찰기에 대비해서 승무원과 모빌 슈트가 그 위에 은폐용 위장 그물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이브!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바위 산 안쪽에서 한 남자가 달려와 사이브 아슈만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레지스탕스의 우두머리는 무뚝뚝하게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손님이다. 사이좋게 지내."

마류, 무우, 나탈은 사이브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바위 산이 바로 그들 '새벽의 사막'의 거점이다. 예전부터 있었는지 이 곳 저 곳에 동굴이 뚫려 있었고, 안에는 무기와 탄약 혹은 생필품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어수선한 인상을 주었다.

물자 반입을 점검하던 젊은이가 젊은 여사관들이 지나가자 휘파람을 불었다. 마류는 살짝 웃어 넘겼지만, 나탈은 기분이 상했는지 눈을 흘겼다.

그들은 사이브를 따라 내부 사령실에 도착했다. 희미한 전등불이 켜진 방에는 통신기와 정보 분석용 컴퓨터 등 기계류가 즐비했고, 중앙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무우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하군. 하지만 정말 이 곳에 살고 있나?"

"여긴 전선 기지야. 다들 마을에 집이 있지. 아직 불타 버리지 않았다면."

벽으로 걸어 간 사이브가 전열기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마류가 "마을이라뇨?" 라고 되물었다.

"탓실, 물라, 버나디아에서 온 녀석들도 있어. 우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니까. …커피 마실 건가?"

법랑 컵에 검은 액체를 부으며 사이브가 묻자, 마류는 답례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컵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 그는 무뚝뚝하게 원하는 컵을 쓰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떠났다. 마류는 허공에 떠 있는 손을 무안하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컵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나탈이 걸음을 재촉했기 때문에 마류는 어쩔 수 없이 커피를 포기하고 사이브를 뒤따랐다.

"전함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거대한 전함은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지만, 바위로 둘러싸인 이 곳이라면 감추기에 안성맞춤이다.

아까 그 금발의 소녀가 다가와서 사이브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한 뒤 다시 떠났다. 그 모습을 본 무우가 누구냐고 묻자, 사이브는 과묵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리의 승리의 여신이지."

"응?"

무우가 묘한 표정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여신이라고 부르기에는 여성스러움이 약간 모자라다고 느낀 모양이다.

"이름은?"

"……."

대답이 없자, 무우가 파란 눈으로 사이브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여신님이라도 이름 쯤은 있을 텐데?"

사이브가 커피를 홀짝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카가리 유라."

그는 컵을 탁자에 내려 놓고 그 위에 지도를 펼쳤다.

"당신들은 알래스카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노골적으로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마류는 잠시 그의 태도를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곧 지도에 집중했다.

"우선 이 곳 아프리카 대륙에서 벗어나야 되겠군. 물론 자프트 세력권이라고 해도 사막이 대부분이라 군대가 버티고 있진 않겠지만…. 사흘 전에 빅토리아 우주항이 습격당한 이후로 놈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지."

담담하게 정세를 설명하는 사이브의 말과 마류의 놀란 목소리가 겹쳐졌다.

"빅토리아 우주항이?"

"사흘 전이라고?"

무우도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프리카 공동체는 원래 친 플랜트 파에 속해. 끝까지 저항하던 남아프리카 통일 기구도 결국 지구군에게 버림 받은 모양이야. 방어선은 매일같이 변하고 있어."

현재 아프리카 대륙은 크게 양분되어, 북쪽에서 서쪽에 걸쳐 대륙의 70% 정도가 친 플랜트 국가인 아프리카 공동체, 남부는 지구 연합게 가까운 남아프리카 통일 기구라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다. 자프트의 지구 침공 작전 '오퍼레이션 우로보로스'는 적도 부근에 설치된 모든 우주항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미 카오슈운 우주항이 함락되었는데, 이번에는 빅토리아 호를 메워서 건설한 거대한 빅토리아 우주항까지 자프트에게 넘어가다니….

"이제 남은 것은 파나마 뿐이군…."

마류가 암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용케 버티고 있군요."

무우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명랑하게 웃자, 사이브가 그를 째려 보았다.

"우리들에게는 자프트나 지구군이나 다 똑같아. 둘 다 지배하고 약탈하는 존재들일 뿐. 평화로울 때는 부를 독점하고, 싸울 때는 자신들의 몫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우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류가 당혹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이 곳은 A.D 이전에 지중해 무역으로 크게 번성한 선진 도시로, 연안에는 지금도 로마 유적이 남아 있다. 훗날 아랍 민족이 정착했으나 19세기에 유럽 국가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고 그 후 몇 차례 동란을 겪은 뒤, 현재는 아프리카 공동체의 일개 국가로서 지도 상에 위치한다. 사이브가 강대국의 논리에 휘둘리는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분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적어도 그들이 현재의 지배자를 선택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무우는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럼 어째서 우릴 도왔지?"

"도운 게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하긴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군."

무우가 미소 짓자, 수염에 가려진 사이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 전함을 대기권 내에서 어떻게 다룰 건가?"

"그렇게 고도를 높일 수 없습니다."

나탈이 대답하자, 사이브는 지도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산맥을 넘을 수 없다면, 지브롤터를 돌파하는 수밖에 없겠군."

"이 전력 가지고? 무모한 소릴…."

무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 침공의 발판으로 삼고자 자프트는 지브롤터 해협에 전선 기지를 설치했다. 그 거대한 세력권을 아크 엔젤 단 한 척으로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열심히 홍해로 빠져나가서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지."

사이브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어차피 남의 일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그 항로의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태평양이라…."

"보급로를 확보하지 않고 돌파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군요."

"하지만 그 밖에 다른 방법이…."

"대양주 연합은 완전히 자프트 세력권이라면서? 적도 연합은 아직 중립 지역일까?"

세 명이 지도 앞에서 머리를 맞대로 회의를 시작하자, 사이브가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왜들 그리 마음이 급해? 벌써부터 그게 걱정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들 앞에 레지스탕스 우두머리가 지도 위 아프리카 대륙의 한 지점을 굵직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버나디아에 레셉스가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되지!"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무우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아…, 열심히 빠져 나가라는 말이 그런 뜻이었나?"

마류가 사이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장소를 바라본 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역시 커피를 가져올 걸 그랬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아크 엔젤을 위장 그물로 덮은 뒤, 스트라이크에서 내려 온 키라를 향해 카가리가 다가왔다.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카가리가 키라를 올려다 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때릴 생각이…." 라고 말하려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얘기했다.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 실수였어. 미안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태도는 전혀 사과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키라가 웃음을 터뜨리자, 카가리는 뜻밖이라는 듯이 노려보았다.

"왜 웃지?"

"왜라니?"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말을 했는지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매사에 진지해서 남이 놀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이 분명했다. 하지만 화 내는 모습도 작은 동물 같아서 귀엽기만 했다.

카가리는 금방 화를 풀고 시선을 돌렸다.

"그 뒤로 네가 어떻게 되었을지… 늘 궁금해하고 있었어."

변함 없이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것이 소녀의 무안함을 감추기 위한 것임을 키라는 바로 알아 차렸다.

키라는 헬리오 폴리스에서 인원이 가득 찼다고 거절하는 대피소에 억지로 카가리를 밀어 넣었다. 자신은 코디네이터이고 상대방은 여자다. 하지만 소녀는 키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만일 낯선 사람이 자신을 구해 준 뒤, 그 직후 콜로니가 붕괴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카가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미안."

키라는 자신도 모르게 사과했지만, 그가 사과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카가리는 도도한 표정으로 그의 사과를 받아 들였다.

"그래. 두 번 다시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키라는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도 자신은 똑같이 행동할 거라고 생각했다.

남 몰래 딜레마에 빠진 키라를 무시한 채, 카가리는 더욱 화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네가 왜 이걸 타고 있지? 왜 지구군에 있는 거야?"

그녀에게 야단 맞을 하등의 이유가 없지만, 왠지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키라는 고개를 숙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은 그 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다음에도 카가리에게 대피소를 양보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과 똑같은 심정이다.

"많은 일이… 있었어."

키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들의 얼굴과 아스란의 비통한 외침, 건네 받은 종이 꽃, 그리고 불타는 셔틀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 많은 일이…."

그의 피곤한 목소리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카가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살피듯 키라를 쳐다보았다. 걱정스러눈 표정을 띤 그녀가 갑자기 소녀다워 보였다.

"그보다… 너야말로 어째서 이 곳에 있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키라가 소녀에게 물었다.

"오브에 살고 있었던 거 아냐? 아니면 원래 지구에 살고 있었니?"

"뭐?! …그, 그건…."

카가리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때, 옥신각신하는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 와서 둘은 함께 뒤돌아 보았다.

"프레이, 기다려 줘! 그래서는 알 수 없잖아. 제대로 설명을…."

"싫어! 이미 다 끝난 얘기야!"

튀어 나온 바위를 지나 프레이와 사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프레이가 키라를 보고 구원을 요청하듯이 달려 왔다.

"키라!"

그녀는 키라의 팔을 양 손으로 꽉 잡고 그의 등 뒤로 몸을 감추었다. 사이가 무안한 표정으로 멈춰 서서 초조한 듯이 프레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키라가 대신 대답했다.

"뭐야?"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키라의 태도에, 사이는 주춤했다.

"프레이한테 할 말이 있어. 너와는 상관 없는 일이야."

"상관 없지 않아!"

키라의 등 뒤에서 프레이가 외쳤다.

"난 어젯밤에 키라와 함께 있었단 말이야!"

카가리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확 붉힌 뒤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리를 피하자, 셋만 남게 되었다.

사이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순진한 표정에, 키라가 견디다 못해 눈을 돌렸다.

"그… 그게 무슨 뜻이야…? 프레이, 너 설마…."

사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프레이가 그 말을 가로막듯이 소리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 없잖아?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

프레이가 키라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키라의 마음 속에 죄책감을 잊을 만큼 어두운 흥분이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사이의 것이 아니다. 키라는 드디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애절한 사랑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키라의 것이다.

"상관 없다고?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프레이!"

언성을 높이는 사이에게 키라가 말했다.

"사이, 이제 그만 해."

"…키라?"

사이가 놀란 표정으로 키라를 바라보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싫어하는 프레이를 억지로 쫓아 다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뭐가 어째?!"

안경 너머로 사이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너도, 너조차 날 배신하는 거냐?'

키라가 눈을 내리깔았다.

"자꾸… 비참하게 그러지 마. 난 어제 전투 때문에 진이 다 빠졌어…."

그는 상대방에게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프레이가 더욱 몸을 밀착시키면서 나란히 걸어가려 했다.

"키라!!"

그 때,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면서 사이가 등 뒤에서 몸을 덮쳤다. 하지만 그 손을 키라가 단숨에 뒤로 비틀었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싸움에 프레이가 겁 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만 해."

키라는 스스로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로 싸우면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대로 가볍게 밀쳐 내자, 놀란 표정으로 사이가 휘청거리다 주저앉았다. 자신과 키라의 힘의 차이에 놀랐는지, 아니면 평상시에 얌전하던 키라가 느닷없이 자신에게 대들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는지 알 수 없었다.

여태까지 키라는 친구들에게 학력이나 운동 신경과 같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츄럴 사이에서 살아 가는 그가 몸소 터득한 처세술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낸 뒤, 키라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거기에는 여태까지 자신을 우습게 보고 프레이와의 관계를 보란 듯이 자랑하던 상대에 대한 약간의 복수심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사이가 키라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얕본 적도 없다. 사이는 나름대로 늘 키라를 걱정하고, 신경 쓰지 않았던가.

'그 마음을 이런 식으로 짓밟아야 하다니.'

잠시 느꼈던 잔혹한 희열이 급속히 부풀어 오른 죄책감에 눌려 시들해졌다.

"…프레이는 다정했어."

키라는 숨이 막힐 것 같아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늘… 날 안아 주면서… 괜찮다고, 날 지켜 주겠다고… 말했어."

목소리가 떨린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싸우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잖아…!"

지금 그 말을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종석 안에 오직 홀로 앉아, 언제 빔을 맞고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 상황. 그런 압도적인 고독감에 짓눌린 채, 동포가 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자신의 동포를 죽여야만 했다. 친구들을 위해서. 그런데 유일하게 손에 넣은 따사로움조차 자신에게서 빼앗으려 하다니.

키라의 외침에 사이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키라…."

떨리는 키라의 어깨에 프레이의 손이 닿았다. 그녀가 키라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끌어 안았다.

"…괜찮아. 난 항상 네 곁에 있을게…."

달콤한 목소리와 뜨거운 체온이, 차갑게 식은 그의 몸을 감싸며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 주었다.

'이제 그녀 없이는 살아 갈 수 없어….'

 

 

"실례합니다, 다코스터입니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열자, 엄청난 악취가 풍겨 와 다코스터는 허둥지둥 코를 막았다. 원래 커피 향기를 싫어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짙은 냄새는 거의 고문이나 다름 없다. 방의 주인은 농후한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를 커다란 주걱으로 휘젓고 있었다.

"으… 대장님, 창문 좀 열지 그러십니까?"

코를 틀어쥔 채 말하자, 발트펠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코스터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런 말을 하려고 온 건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안 되겠다. 그가 커피에 열중해 있을 때는… 아니, 애당초 상식이란 단어를 낯선 외국어로 인식하는 그를 설득하려는 것은 무모한 짓이지.'

다코스터는 포기하고 보고를 시작했다.

"출격 준비를 마쳤습니다."

"음."

발트펠드가 갓 끓인 커피를 컵에 따른 뒤,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김을 폐 깊숙히 빨아 들이면서 만족스럽게 한숨 지었다. 안개처럼 자욱한 냄새 속에서 어떻게 그 향기를 구분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저 취미만 아니라면 나쁘지 않은 상관인데…라고 생각한 다코스터는, 발트펠드의 또 다른 기행(奇行)을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단점을 대여섯 개 더 추가했다. 속 편한 상관은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음, 좋아…. 이번에는 하와이 코나를 조금 섞어 봤지."

"…아, 네."

다코스터는 조심스럽게 장단을 맞추었다. 예전에 아무 생각 없이 커피콩에 대해 질문했다가 지겹도록 장황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출격 준비를 끝낸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

"음…, 이것도 나쁘지 않군. 하와이 코나는 조금만 섞어도 존재를 주장하는 것 같아. 난 이런 게 싫지 않거든."

발트펠드가 컵을 내려놓고 성큼 성큼 걸어서 함장실을 나섰다. 갑판 위에는 언제든지 출격이 가능한 상태의 바쿠 3기와 장갑차, 그리고 그 앞에 병사들이 나란히 서서 그들의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트펠드는 변함 없이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레지스탕스 거점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어젯밤에는 장난이 좀 지나친 것 같더군. 말을 안 듣는 아이는 때려서 가르쳐야 해."

그는 말 끝에 농담을 덧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병사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상관을 욕하거나 특별히 아첨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 부대에 발트펠드를 우습게 보는 자는 없다. 괴짜임에 분명하지만, 그의 실력만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목표는 탓실! 전원 탑승!"

발트펠드의 별명은 전쟁이 시작됐을 당시, 그가 사용하던 사벨 타이거형 바쿠에서 유래한다. 테스트 기를 보고 첫 눈에 반한 발트펠드가 반 강제적으로 그것을 손에 넣은 뒤, 머리 부분에 마치 사벨 타이거의 송곳니를 연상시키는 크고 긴 칼날을 설치하고, 안 그래도 눈에 띄는 기체를 노란 색과 검은 색으로 칠했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것에 착안한 플랜트의 한 광고 회사가 전쟁 선전에 이용하기 위해 '사막의 호랑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하지만 그 이름이 적군에게 공포의 대명사가 된 것은, 발트펠드 자신이 획득한 전투 결과에 의한 것이지 결코 군 홍보부의 과대 광고 때문이 아니다.

이 사실을 다코스터와 부하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탓실 근교에서 발트펠드가 차를 세웠다. 낮에는 섭씨 40도가 넘는 사막 지역이지만, 해가 저물면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해서 새벽 무렵에는 10도까지 떨어진다. 습도와 기온을 완벽하게 조절하는 플랜트에서 자란 병사들은 코디네이터의 튼튼한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큰 병을 앓거나 하지는 않지만, 가혹한 환경에 두 손을 든 자들도 적지 않다.

다코스터는 다행히 금방 익숙해졌고, 발트펠드는 변덕스러운 기후를 즐기기조차 하는 것 같았다. 발트펠드만큼 지상 생활을 마음에 들어 하는 코디네이터를 본 적이 없다.

탓실 시는 이미 인가의 불이 꺼지고 가로등과 늦게까지 영업하는 몇 몇 가게에서나 불빛이 새어 나올 뿐,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에너지 위기의 영향 뿐 아니라 원래 이 곳은 전력 소비량이 적은 지역이다. 다코스터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벌써 잘 시간이군요."

"이대로 영원히 잠들게 해 주지."

그 답지 않은 냉혹한 말투에 다코스터가 약간 움찔했다.

"…한 번 해 보고 싶은 대사였어."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농담 섞인 상관의 말투에 다시 힘이 빠졌다. 발트펠드는 진지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경고 15분 뒤에 공격을 개시한다."

"네…?"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다코스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때때로 상관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혹시 자신을 애송이 취급하고 놀리는 게 아닐까 생각 될 때도 있었다.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나?"

재촉하는 상관의 모습에 겨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다코스터가 황급히 경례한 뒤, 차에서 뛰어 내려 앞으로 달려 갔다.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캠프 내에 울려 퍼졌다. 경보음을 들은 사이브가 사령실에서 뛰쳐 나오고, 마류 일행도 서둘러 뒤따라 나왔다.

"무슨 일이야?!"

감시대에 있는 소년이 변성기를 맞지 않은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이… 하늘이 타고 있어요!"

모두들 숨을 죽였다.

"탓실 방향이다!"

사이브가 뒤로 돌아 무전기를 향해 달렸다. 이미 무전기를 두드리던 남자가 잡음이 새어 나오는 스피커를 거칠게 두드렸다.

"안 돼! 먹통이야!"

밖에서 사람들이 고함 치는 소리와 차의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 왔다.

"탄약을 가져 와!"

"저 놈들…! 우리 어머니는 앓아 누우셨는데!"

"어서 타! 우물쭈물 하면 놓고 간다!"

사이브는 다시 밖으로 뛰어 나갔다.

"기다려! 당황해선 안 돼!"

"사이브, 설마 내버려 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냐. 반은 남아 있어야 해! 진정하라고! 별동대가 숨어 있을지도 몰라!"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마류가 무우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무우가 팔짱을 꼈다.

"'사막의 호랑이'가 극악무도하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는데."

"그럼 이건 대체…?"

"글쎄? 내가 그 속을 어떻게 알겠어?"

"아크 엔젤은 움직이지 않는 게 낫겠어요. 별동대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소령님, 대신 가 주시겠어요?"

마류의 말에 무우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걱정하는 척 하면서 강 건너 불 구경이라도 할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마류가 보라는 듯이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스카이 글래스퍼가 제일 빠르겠네요?"

"…그렇지. 그럼 잠시 다녀 와야겠군."

귀찮다는 투로 말하면서 아크 엔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마류가 못을 박았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구조 활동입니다. 나중에 버기 카로 의사를 보내도록 하겠어요!"

"네~."

무우는 뒤돌아 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뛰어 갔다.

그의 곁을 지나 이 쪽으로 달려 오던 카가리가 "아흐메드!" 라고 이름을 부르며 낯 익은 소년이 운전하는 버기 카를 멈춰 세웠다. 사이브는 이미 다른 버기 카를 타고 떠났다. 카가리가 아흐메드의 차에 올라 타자, 오전에 소녀를 보호하려는 듯이 무우 앞에 버티고 섰던 장신의 사내도 뒷좌석에 탔다. 곧 차가 떠났다.

마류는 주위를 향해 큰 소리로 지시했다.

"전원! 곧바로 전함으로 귀환! 경비 태세를 갖추어라!"

 

 

키라도 그 소식을 듣자마자 프레이의 손을 놓고 뛰어 나갔다.

"키라!"

프레이가 그 뒤를 쫓으려고 하자, 사이가 어깨를 잡고 말렸다. 프레이는 몸을 돌리고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손을 뿌리쳤다.

사이는 얼어 붙은 듯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젯밤의 행동이나 키라가 잡아 비튼 팔의 통증보다, 프레이의 차가운 시선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마치 벌레 보듯이 혐오로 가득 찬 시선. 얼마 전까지 누구보다도 가까이 다가와서 어리광 부리듯이 사이를 바라 보던 눈동자가 아니었던가. 사이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토록 코디네이터를 싫어하던 프레이가 키라를…?'

프레이가 최근에 키라를 각별히 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이는 그것을 그녀의 다정함이라고 생각하고, 친구인 키라를 그녀가 받아 들인 것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했다.

'이렇게 한심할 수가…. 그녀의 마음이 변한 것을 눈치 채지 못하다니…. 어째서 그 상대가 키라여야 하지? 토르나 카즈이, 다른 승무원이 아니라 왜 하필이면 키라를…?'

그제야 사이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본심을 깨달았다.

─키라는 코디네이터잖아….

이게 바로 사이의 본심이다. 그는 '코디네이터든 내츄럴이든 상관 없어.' 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해 온 자기 자신의 소중한 친구였지만, 속으로는 한 번도 진심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코디네이터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곁에 있다는 사실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키라가 밉다.'

프레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녀 앞에서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든 그가 가증스러웠다. 사이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이 또아리를 튼 어둠에 질겁해서 얼어 붙었다.

'난… 이토록 추한 인간이었나?'

 

 

시내는 온통 불바다였다. 탓실은 주위에 펼쳐진 사막의 어둠을 비추는 거대한 횃불로 변했다.

"대장님!"

다코스터가 돌아와 조수석에 올라 타자, 눈을 감고 기다리던 발트펠드가 한 쪽 눈을 떴다.

"…끝났나?"

"네!"

"양 측 인명 피해는?"

"네?"

다코스터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항할 방법이 없는 민간인을 상대로 어떻게 피해자가 생긴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건 전투가 아니라고요."

"양 측이라고 물었을 텐데?"

"…물론 마을 사람 중에는 넘어지거나 화상을 입은 자가 있을 수 있겠죠."

결국 발트펠드라는 남자는 자신의 비위가 상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코스터는 자신의 상관을 그렇게 분석했다. 민간인, 여자와 노약자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면 뒷맛이 씁쓸하기 때문에 가급적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를 인도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필요하다면 도시를 한두 개 쯤 불태워 없애는 일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주민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단지 도시를 불태우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발트펠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지. 우물쭈물 하다가는 집 주인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참다 못한 다코스터가 상관을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기다렸다가 공격하려던 게 아닙니까?"

"이 봐,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 다코스터, 설마 내가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이 곳을 불바다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묻자, 다코스터는 힘 없이 긍정했다. 전쟁이 원래 비열한 행위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에게 말해 봤자 소용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서의 목적은 달성이다! 귀환하자!"

발트펠드가 지시하자, 다코스터는 부대에 그 말을 잔했다. 그는 속으로 상관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을 확신했다.

 

 

스카이 글래스퍼가 밤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았다. 탓실은 레지스탕스의 거점으로부터 동쪽으로 수십 km 떨어져 있지만, 길을 잃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00km 전방이라도 불타오르는 탓실의 불빛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불타는 도시로 다가가자, 무우는 기류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상공을 선회했다.

"…끔찍하군."

그는 무의식 중에 씁쓸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전멸했을지도 몰라…."

무사히 남은 구역은 거의 없었고, 남은 장소도 곧 있으면 불이 붙어서 잿더미로 변할 것 같았다. 거리에는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기체가 기류에 휘말릴 정도로 불길이 높이 치솟아 올랐다. 이 때 무우의 시선이 뭔가를 포착했다. 그는 헬멧 너머로 눈을 돌려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시내 변두리의 낮은 언덕 위에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생존자가 남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주민이 살아 남은 모양이다.

무우는 스카이 글래스퍼를 그 부근에 착륙시키면서 생각했다. 이 곳의 규모로 봐서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겠지만 언덕 이외에 시내 주변에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늘을 저주하고 울부짖으며, 혹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선 채로 타오르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무우가 통신 회선을 연결했다.

"여긴 프라가…, 생존자 확인."

「…다행이군요.」

입자가 거친 화면 너머로 마류가 약간 미소 지었다.

"…실은 대부분이 살아 남은 모양이야."

「네?」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무우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마류가 콜록거리면서 물었다.

「적은 어디에?!」

도시를 불태운 것이 그들과 레지스탕스를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래 속에 숨어 있다면 또 몰라도.

무우가 그렇게 보고하자, 마류가 난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생존자가 있다는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지만, 적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불안했다.

"코디네이터들은 뭘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소령님, 그 발언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니터 너머로 마류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키라가 들으면 기분이 상할 만한 발언이었기 때문에, 무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동안 레지스탕스의 버기 카가 모래 바람을 날리며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차에서 뛰어 내려 각자의 가족을 향해 달렸다.

"아버지, 어머니, 무사하셨어요?"

"얘야! 우리 집이…!"

"사라, 사라!"

여기 저기에서 아내와 아이를 끌어 안는 자, 남편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리는 자, 가족이 무사한지 확인하는 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에는 아크 엔젤의 버기 카가 도착했다. 나탈이 차에서 내려, 이미 조종석 밖에 나와 가족들의 재회를 바라보던 무우에게로 달려갔다.

"소령님, 이건 대체…?"

그녀 또한 도시 주민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 같은 대량 피난민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상자를 이 곳으로 옮기시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도와 주시오!"

사이브가 트럭에서 뛰어 내려 바로 지시를 내리면서 피난민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카가리가 어느 소년이 부축한 노인을 알아 보고 기쁜 듯이 외쳤다.

"얄! 장로님!"

그 이름을 들은 사이브가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그의 아들이었던 모양이다.

"얄, 무사했구나. 엄마와 네네는…?"

"샴세딘 할아버지가 도망치다가 넘어지셔서 지금 그 분 곁에 계세요."

소년이 야무지게 대답하자, 레지스탕스의 우두머리도 겨우 마음이 놓인 듯 한숨 지었다.

"그랬군."

큰 손이 칭찬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자, 긴장이 풀린 얄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사이브는 곧 지휘자의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얼마나 당했죠?"

그의 물음에 장로라고 불린 노인이 주름 진 얼굴을 들었다.

"죽은 자는 없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카가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보자, 무우 일행도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 쪽으로 다가왔다. 장로가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처음에 경고가 있었지. '지금부터 불을 지를 테니 도망쳐라.' 라고 말이야."

"뭐라고요?"

놀라운 내용에 사이브는 숨을 멈추었고, 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야간을 틈 탄 공격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 남을 리가 없다.

"…경고 후에 바쿠가 나타났지. 그리고 태워 버렸어…. 집과 식량, 그리고 연료와 탄약 모조리 다…."

장로는 사막의 햇볕에 새겨진 주름에 힘을 주며 조용히, 그러나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죽은 사람이 없지. 하지만 모든 걸 잃은 우리들은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 가란 말이냐…."

"호랑이 녀석, 완전히 우릴 갖고 노는군!"

사이브가 주먹을 꽉 뒤었다. 그 때, 분노로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옆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하지만 살아 있다면 뭐라도 방법이 있겠지…."

"뭐라고?!"

사이브 일행이 험악한 표정으로 그 말을 한 무우를 돌아 보았다. 무우는 아직도 불길이 가시지 않은 탓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호랑이는 당신들과 싸울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그게 무슨 뜻이지?"

"이건 어젯밤에 일어난 전투에 대한 보복…이라고나 할가. 벌이나 다름 없지. 이 정도에 그친 걸 고마워해야 할 만큼 다정한 사람인 것 같군."

"뭐가 어째?!"

무우의 무심한 한 마디에 카가리가 뛰쳐 나와 서슬이 시퍼런 태도로 추궁했다.

"이 정도라고? 도시가 잿더미가 돼 버렸는데 이 정도라고?! 뭐가 다정하다는 거야?!"

무우는 소녀의 박력에 주춤했다. 키가 조금 작았다면 키라처럼 느닷없이 얻어 맞았을지도 모른다.

"미안. 내 말이 네 맘에 거슬렸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상대방은 정규군이잖아? 진짜로 공격했다면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는 현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 바쿠 몇 대만 있으면 이 도시의 전 주민을 두세 시간 만에 학살할 수 있다. 만일 그랬다면 이렇게 가족과 재회하거나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며 비탄에 잠길 수도 없다.

하지만 그의 말은 오히려 카가리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그 놈은 비겁한 겁쟁이야! 우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도시에 불이나 지르고, 그러고도 승리했다고 할 수 있어?! 우린 언제나 용감하게 싸워 왔어! 어제도 바쿠를 쓰러뜨렸다고!"

그녀는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주위를 둘러 싼 레지스탕스 단원들도 동조하듯이 경멸의 눈초리로 무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쿠를 쓰러뜨린 것은 적이 스트라이크에 집중한 나머지 방심했기 때문이다. 두 번 다시 똑같은 수법에 당할 리가 없다. 적은 코디네이터…, 즉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바쿠를 쓰러뜨렸다'라는 사실이 지나치게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너희들, 어딜 가려는 거냐?!"

사이브의 날카로운 지적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레지스탕스 청년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버기 카에 올라타고 있었다.

"적이 이 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지금 가면 따라 잡을 수 있을 거야!"

"뭐라고…?!"

그들의 대화를 들은 무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 잠깐, 지금 제 정신이야?"

다른 곳에 한 눈을 팔던 무우는 문득 카가리가 자신을 당장이라도 찔러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것을 알아 차리고 서둘러 미소 지었다.

"아… 그게 아니라…, 호랑이는 정말 나쁜 놈이라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소녀는 그의 고막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소리 지른 뒤, 동료들을 향해 뛰어갔다. 버기 카를 둘러 싸고 사이브와 남자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도시를 습격한 직후라 놈들의 탄약이 바닥 났을 게 분명해!"

"우리도 놈들을 추격하겠어! 이런 꼴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남자들은 입을 모아 외치면서 흥분된 표정으로 차의 시동을 걸었다. 사이브가 당황해서 그들을 막았다.

"바보 같은 말 하지 마라! 그럴 여유가 있으면 부상자들을 치료해! 아내와 아이들 곁을 지키라고! 그게 더 중요하잖아!"

하지만 남자들은 더욱 큰 목소리로 주장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봐! 탓실은 이미 끝났어! 집도 식량도 다 타 버렸다고! 그런데 가족이나 붙잡고 울라는 거야, 뭐야!"

"사이브, 설마 우리한테 호랑이의 개가 되라고 말하진 않겠지?"

사이브의 말문이 막힌 틈을 타서 버기 카가 달려 나갔다. 남겨진 사이브는 주체할 수 없는 분을 삭이려는 듯이 모래를 짓밟은 뒤, 누군가에게 턱으로 신호를 보냈다.

"에도르!"

"네!"

사이브의 말 뜻을 알아 들은 남자가 버기 카에 뛰어 올라 시동을 걸었다. 카가리가 달려 왔다.

"사이브, 갈 거예요?"

사이브는 에도르가 운전하는 버기 카의 조수석에 말 없이 올라 탔다.

"…내버려 둘 수 없어."

"저도 같이 갈래요!"

올라 타려는 카가리를 마치 고양이를 밀쳐 내듯 밀어 냈다.

"넌 남아 있어."

그 말을 남긴 채 차가 출발했다.

카가리는 그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없는지 모래 바람에 콜록거리면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사이브의 차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 앞에 아흐메드의 차가 멈추어 섰다.

"어서 타!"

이미 뒷좌석에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장신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카가리의 표정이 다시 환해지면서 차에 올라 타고 동료들의 뒤를 쫓았다.

"나 참…."

무우는 그들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 쉬었다.

"바람도 사람도 뜨거운 동네라니까…."

나탈은 그의 시적인 감상을 무시한 채, 레지스탕스의 무모한 행동에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장비 만으로 바쿠에게 덤볐다가는 전멸할 게 분명합니다!"

"내 말이…."

예상대로 그 말을 전해 들은 마류가 혀를 찼다.

「뭐라고요? 추격이라고요? 왜 그런 한심한 짓을 하죠?」

무우도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는데, 여자들은 때때로 서슴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다. 심지어 모니터를 통해 무우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소령님! 어째서 그들을 막지 않았죠?」

화풀이나 다름 없다.

"그들을 막았다가는 우리와 전쟁을 시작했을지도 몰라. 그보다 도시 쪽을… 어떻게 할까? 우선 물과 식량이 걱정이로군. 워낙 사람이 많을 뿐더러, 부상자 수도 만만치 않거든."

아크 엔젤과 통신 중인 무우의 뒤쪽에서는 나탈이 부상을 입고 우는 아이를 상대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아, 여, 여기가 아픈 건가? 자, 어서 울음을 그쳐라."

아이를 다뤄 본 적이 없는 그녀가 울부짖는 꼬마에게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서 건네 주었다.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정신 없이 과자를 씹어 먹었다. 나탈은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것을 보고 모인 아이들의 모습에 얼굴이 굳어 버렸다.

"아…, 시, 실은 과자가 그리 많지 않거든. 나… 난감하군."

무우는 곁눈질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진땀 흘리면서 아이를 상대하는 나탈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마류에게 얘기해 줄 생각이었다.

한편, 마류는 통신기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야마토 소위를 보내겠습니다. 그냥 놔 둘 수는 없잖습니까. 그 쪽으로는 남은 차량으로 물과 물자를 보내도록 하죠.」

"아, 그럼 잘~ 부탁합니다."

태평스러운 말투로 대답하면서도, 무우는 속으로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이렇게 말하기도 뭣하지만, 그들이 경고 없이 그냥 도시를 태웠다면 이 정도나 되는 난민을 떠맡을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레지스탕스와 아크 엔젤은 자신들 때문에 공격 당한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기에 상당한 물자를 방출해야 한다. 어쩌면 호랑이의 목적이 대량의 난민을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민은 무우 일행에게 짐 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생각을 입에 담았다가는 그 호전적인 여신님에게 얻어 맞을 것이 분명하지만.

 

 

"대장님…, 좀 더 서두르면 안 될까요?"

다코스터가 제복 깃을 잡아 당기면서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그러자 좌석에 떡 버티고 앉은 발트펠드가 한 쪽 눈을 떴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고 싶나?"

"그게 아니라…, 이러다가 추격해 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다코스터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발트펠드는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잠시 후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운명의 갈림길이로군."

"네?"

대화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알 수 없어서 다코스터가 되물었다.

"자주포와 바쿠는 상대가 되지 않아…."

발트펠드가 눈을 뜨고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은 밤의 잔상을 남긴 채 달콤하고 부드러운 파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죽는 편이 낫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정말 그럴까?"

"네…?"

'죽어 본 적이 없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라고 다코스터가 대답하려 했을 때, 바쿠의 파일럿으로부터 통신이 들어 왔다.

「대장님, 후방에 접근하는 차량이 있습니다. 여섯…, 아니 여덟. 레지스탕스의 전투 차량인 것 같습니다.」

다코스터가 무심코 상관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그가 중얼거렸던 말은 이것을 뜻했다. 그는 레지스탕스의 반응을 전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산하고 도시를 태우라고 지시한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역시 합리적인 사람이다. 민간인을 죽이지 않았고, 레지스탕스를 등 뒤에서 치는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최종적으로 그들을 완전히 소탕하려고 한다. 이것은 상대방의 선택에 달렸다. 도발에 넘어가서 지난 밤의 승리에 취한 채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자프트 군을 추격한다는 어리석은 길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레지스탕스들이다.

발트펠드가 깊고 푸른 사막의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죽는 편이 나을까?"

 

 

"카가리, 아흐메드! 안 돼! 어서 돌아가라!"

버기 카 위에서 사이브가 외쳤으나, 아흐메드는 그 말을 웃어 넘겼다.

"지난 번에 바쿠를 쓰러뜨린 게 누구죠? 우리들 아닌가요?"

"이번에는 지하 함정을 준비하지 않았어! 아흐메드, 어서 돌아가라니까!"

과연 사이브는 자신들의 역량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바쿠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주의 깊게 마련한 함정과 스트라이크라는 협력자, 적의 허를 찌르는 기발한 전법, 그 모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기적과도 같은 결과였다. 정면에서 덤빈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젊은 아흐메드는 적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만으로 기고만장했다.

"사이브!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겁쟁이가 되었죠?"

비아냥거리듯이 소리 질렀다.

"함정 따윌 파지 않아도 이길 방법은 많다고요!"

조수석에 앉은 카가리도 손에 쥔 런쳐를 들어 올렸다.

"맞아!"

아흐메드가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으며 사이브의 차를 앞질렀다. 사이브는 입술을 악물었다가 버기 카가 옆을 통과하는 순간, 뒷좌석에 앉은 장신의 남자를 향해 외쳤다.

"키사카!"

이름을 불린 남자가 사이브를 힐끗 쳐다 본 뒤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구를 넘은 곳에서 바쿠와 버기 카의 그림자를 포착했다. 앞서 달리는 레지스탕스는 런쳐를 어깨에 얹고 느릿느릿 네 발로 걸어가는 바쿠를 향해 발사했다.

"받아라!"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발사된 미사일이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짐승에 명중했다. 하지만 바쿠는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외눈을 돌렸다.

"지프를 쫓아! '사막의 호랑이'를 쓰러뜨려라!"

런쳐가 이번에는 무방비 상태의 지프를 겨냥했다. 사선(射線)을 예측한 지프가 급하게 방향을 틀자, 바로 옆에서 모래 기둥이 솟아 올랐다.

"좋았어. 다시 한 번!"

하지만 다음 미사일은 그들 사이에 끼어 든 바쿠의 기체에 맞아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었다.

바쿠가 다가와 거대한 앞다리로 버기 카를 짓밟으려 하자, 카가리가 런쳐를 발사했다. 그 포격이 바쿠의 안면에 명중하자, 카메라가 부서졌는지 앞다리가 잠시 주춤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뒷좌석에 앉은 키사카가 바주카 포를 쏘자, 다른 차량들도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그 중 몇 발이 거대한 강철 다리에 명중했고, 결국 바쿠가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만세!"

아흐메드가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들의 승리는 여기까지였다. 폭발 때문에 결합 부위에 문제가 발생한 1기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포격을 받아도 꿈쩍하지 않는 나머지 2기가 오히려 레지스탕스를 궁지로 몰아 세웠다. 네 발로 달리던 1기가 허공으로 뛰어 올라 캐터필러 상태로 변환한 뒤, 아래를 달리던 버기 카를 깔아 뭉갰다.

"으아악!"

그 옆을 동료 버기 카가 스쳐 지나갔다. 뒤로 급회전한 바쿠가 그들 곁으로 접근하자, 버기 카가 좌우로 갈라져서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바쿠의 앞다리가 한 대를 밀쳐 내고 나머지 한 대를 짓밟았다.

"자프르! 아히드!"

사이브의 비통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제길!"

아흐메드가 핸들을 꺾어 다른 버기 카를 노리는 바쿠를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다리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 배 밑으로 들어갔다. 카가리와 키사카가 각자 무기를 들고 아래에서 위로 바쿠의 복부를 겨냥했다. 미사일이 터졌을 때 그들은 이미 다리 사이를 빠져 나왔다.

폭발로 인해 잠시 동작을 멈춘 모빌 슈트가 곧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여태까지 입을 열지 않던 키사카가 갑자기 소리 질렀다.

"뛰어 내려!"

그는 말하자 마자 카가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고속으로 주행하는 버기 카로부터 힘껏 뛰어 내렸다.

"뭐…?"

아흐메드는 영문을 몰라서 잠시 주춤했다.

그 짧은 순간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거대한 앞다리가 바람을 가르며 아흐메드가 탄 버기 카를 내리쳤다. 금속이 서로 부딪치는 둔착한 소리와 함께 산산 조각 난 버기 카가 튕겨 나갔다. 키사카의 품에 안긴 채 모래 위를 뒹굴던 카가리가 눈을 부릅떴다.

"아흐메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무참히 짓밟힌 버기 카와 함께 허공에 떠오른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아흐메드!!"

일단 스쳐 지나간 바쿠가 다시 뒤로 돌아 외눈으로 그들을 포착했다. 하지만 바쿠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사이브가 발사한 포탄이 바쿠의 어깨에 명중했다. 키사카는 그 틈을 타서 넋을 잃은 카가리를 끌어 안고 달렸다.

바쿠가 새로운 표적을 발견하고 캐터필러로 변환하여 돌진하기 시작했다. 사이브의 버기 카가 이리저리 도망쳤으나, 그 때마다 방향을 틀어서 뒤쫓았다. 바쿠의 가공할 만한 속력에 비해 버기 카는 엉거주춤 달려 가는 게 고작이었다.

"빌어먹을!"

사이브가 이를 악물고 바주카 포를 들어 올렸다.

그 때, 한 줄기 빔이 바쿠의 옆구리를 지나 모래를 태웠다. 카가리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사구에서 고개를 내민 태양빛을 받으며 날아 오는 선명한 삼색 기체가 눈에 들어 왔다.

"스트라이크!"

첫 번째 공격은 표적에서 크게 빗나갔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러지?"

키라가 조준 스코프를 눈 앞에서 치웠다. 빔 라이플의 사선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목표에서 빗나갔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그는 원인을 깨달았다.

"그렇군. 사막의 열대류 때문에…."

일조량에 의해 기온이 급상승하는 사막은 대기가 심하게 대류를 일으킨다. 이 때문에 빔이 휘어지면서 목표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에일을 장비한 스트라이크는 빔 라이플이 주 무기여서 정밀도가 떨어지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스트라이크를 조작하면서 키라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스쳐 지나갔다. 다시 도약했을 때는 이미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변해 있었다.

허공에서 조준을 맞춘 키라의 눈은 차가웠다. 길게 뽑아 낸 라이플의 총구가 불을 뿜으며 이번에는 바쿠의 미사일 포드에 명중했다. 바쿠의 파일럿이 재빨리 분리시킨 포드가 공중에서 대 폭발을 일으켰다.

"쳇."

키라의 얼굴에 상대방을 물리치지 못했다는 초조함이 떠올랐으나,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모니터를 확인했다.

"적은 3기. 하지만 1기는 움직이지 않는군."

1기의 바쿠는 어디가 파손되었는지 모래 위에 웅크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력에서 제외해도 될 것 같았다.

키라가 착지함과 동시에 날아 온 미사일을 실드로 막으며 모니터를 바라보자, 구석에 누군가가 비춰졌다. 바닥에 늘어진 아흐메드의 몸을 끌어 안고 주저앉은 카가리의 모습이었다. 잠시 눈동자에 씁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키라가 짧게 외치며 달려 오는 바쿠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호오…."

전투를 지켜 보던 발트펠드가 감탄하면서 스코프를 내렸다.

"어째서 스트라이크가…?"

운전석에 앉은 다코스터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구군이 레지스탕스를 도와 주러 왔나…?"

부하의 말을 무시한 채, 발트펠드가 중얼거렸다.

"어제와는 장비가 다르군."

"아, 네. 그렇군요."

"그리고 빔의 조준…, 즉흥적으로 열대류를 계산해서 파라미터를 조절하다니…."

그의 의식은 이미 '왜?' 나 '무슨 목적으로?' 라는 문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저 모빌 슈트는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 곳에서 자신들과 싸우고 있다. 그 이유는 상대방이 결정할 문제다. 그보다 그는 저 모빌 슈트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전투 능력과, 그리고 조종석 안에 있을 누군가에 대해서도….

지난 번 전투 때도 그랬지만, 적의 파일럿은 싸우는 도중에 모빌 슈트 OS를 조작했다. 그만한 프로그래밍 능력, 함포를 격추시킬 수 있는 정확한 사격 실력, 그리고 탁월한 반사 신경과 운동 능력을 가진 지구 연합군의 파일럿…. 신경 쓰였다.

방금 전, 발에 레지스탕스의 포격을 맞고 주저 앉았던 바쿠가 점검을 끝냈다. 캐터필러를 회전시키며 앞발을 움직여서 결합 부분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본 발트펠드가 무선으로 손을 뻗었다.

"커크우드, 교대해라."

「네?!」

무선을 통해 당황한 목소리로 되묻는 파일럿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바쿠의 조종을 바꾸자고 말하고 있다. 내 말 들리나?"

「네, 들립니다! 하지만….」

다코스터가 "대장님!" 이라고 외치는 것을 무시하고 발트펠드가 커크우드를 설득했다.

"나중에 한 잔 쏘지."

「…그럼 다음에는 제발 알코올 성분이 들어간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대장의 블랜드 커피를 마신 적이 있는 파일럿이 마지 못해 대답했다.

"대장님!"

다코스터가 이번에는 비난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모름지기 지휘관은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부하들을 지켜 보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발트펠드는 파일럿으로서 현재 위치까지 올라왔으며, 아직도 현역이다. 아까부터 적 파일럿과 솜씨를 겨루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발트펠드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 부관을 향해 씩 웃었다.

"싸워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지."

 

 

바쿠가 미사일을 연달아 쏘았다. 스트라이크가 그걸 피하듯이 점프하자, 적기도 함께 뛰어 올랐다. 바쿠가 몸을 돌려 발로 차려는 것을 키라가 실드로 튕겨 냈다. 그리고 공중에서 자세가 흐트러진 바쿠에 조준을 맞추었다.

'좋았어!'

타깃 마크가 깜빡이는데, 갑자기 기체 옆으로 충격이 가해졌다.

"윽…?!"

오른쪽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명중했다. 키라가 서둘러 뒤돌아 보려 했으나 연속 공격을 받고 주춤했다.

"쓰러져 있던 바쿠?! 아직 살아 있었군!"

키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에 전력에서 제외시킨 1기가 어느 새 전투에 참가했다. 바쿠 3기가 합류해서 편대를 짜듯이 나란히 서서 캐터필러를 회전시키며 고속으로 돌진해 왔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튕겨 나간 키라가 충격에 신음 소리를 냈다. 머리를 흔들고 고개를 들자, 모니터 가득 미사일이 접근하고 있었다.

"쳇…!"

머리에 한 발을 맞았지만 다행히 카메라는 무사했다. 그러나 자욱한 연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그 틈을 타서 바쿠가 정면으로 달려 왔다.

"으아악!"

즉시 머리 부분의 발칸을 발사했으나, 적은 강렬한 킥을 스트라이크의 가슴에 날렸다. 급격히 가해지는 압력에 쇄골 관절이 삐걱거렸다. 가까스로 버니어를 가동시켜 아슬아슬하게 지면과의 충돌을 피했으나, 상공에 있는 바쿠의 사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정 사정 없는 미사일 발사에 키라는 정신 없이 기체를 조종했다.

'뭐야?!'

키라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방금 전에 비해 바쿠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3기 째의 바쿠가 전선에 참가한 순간부터 그들은 통제되고 고도의 전술을 구사하게 되었다. 적기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키라는 숨 돌릴 여유조차 없었다.

아무리 PS 장갑이 탄두를 막아 준다고는 해도 한계가 있다. PS 시스템 자체가 일정한 전력을 필요로 하는 이상, 공격을 받으면 받을 수록 전력 소모량이 늘어나고 그만큼 한계가 가까워진다. 계속해서 미사일을 맞으면 PS 시스템이 작동을 멈출지도 모른다.

바쿠가 착지한 뒤 다시 같은 대열을 짜고 공격해 왔다. 3기의 미사일이 발사되어 스트라이크를 노렸다.

'만일 저 것이 명중한다면… 당한다!'

돌연 키라에게 그 기묘한 감각이 되살아 났다. 지각이 뚜렷해지고 모든 것이 동시에 감지되었다. 자신을 향해 발사된 십 수 발의 미사일이 그리는 궤적, 바쿠의 튀어나온 콧등에 반사되는 강렬한 햇빛, 캐터필러의 회전 수까지…. 파일럿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키라는 미사일을 충분히 유인한 뒤, 역제동을 걸었다. 스트라이크의 눈 앞에서 미사일이 다발이 되어 서로 부딪치며 요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무렵 키라는 이미 스로틀을 힘껏 밀어내며 페달을 박차고 있었다. 스트라이크가 빙글 회전하면서 바쿠의 정면을 가로질러 옆으로 빠져 나가는 순간, 키라는 실드를 손에서 떼어 냈다. 실드가 바깥 쪽에 있는 1기와 충돌하면서 그 기체를 대열 밖으로 밀어 냈다. 그런 다음 재빨리 공중에서 몸을 돌려 빔 사벨을 발사했다. 바쿠가 몸을 던져 가까스로 그것을 피했으나 대열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착지하는 순간을 노리고 발사된 미사일을 키라는 몸을 굽혀서 어렵지 않게 피했다. 연속 공격을 가하며 뛰어 오른 바쿠는 적의 빔 사벨에 한 쪽 날개를 잃고 땅으로 추락했다.

계속되는 미사일 공격에 스트라이크가 급제동을 걸었다. 발에 설치된 버니어에서 추진 가스가 분사되자 주위에 모래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다. 그 안으로 미사일이 빨려 들어가자 이번에는 굉장한 폭연(爆煙)이 뻗어 나왔다. 1기의 바쿠가 폭발을 피해 그 위를 뛰어 넘었다.

연기가 가시자, 바쿠의 파일럿은 자신과 같은 속도로 병행하듯 저공 비행하는 스트라이크의 모습을 목격했다. 키라가 방아쇠를 당겼다. 열선이 조종석을 꿰뚫자, 사막에 추락한 바쿠가 불길에 휩싸였다. 악에 받친 듯이 달려 드는 마지막 1기를 향해 키라는 사벨을 휘둘렀다. 교차하는 2기. 착지한 바쿠의 등 뒤로 절단된 앞다리가 굴러갔다.

승패가 가려졌다. 물러가는 바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키라가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키라가 내려가자, 레지스탕스 청년들이 왠지 모를 무안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키라는 그 답지 않은 초조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이와 싸운 뒤에 출격해서 위험한 전투를 치른 탓이다. 납작해진 차의 잔해와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 모래 위에 누운 시체가 그의 불편한 심경을 더욱 자극했다.

키라는 드물게 울먹이는 표정으로 자신 앞으로 걸어 온 카가리와 사이브를 향해 낮게 말했다.

"죽고 싶습니까?"

그는 분노를 느꼈다. 버기 카와 런쳐 만으로 이들은 정말 바쿠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곳에서… 아무 의미 없는 개죽음을 당하고 싶나요?"

"뭐라고?!"

그러자 카가리가 울컥하며 반격했다. 그녀는 키라의 멱살을 부여잡고 한 손을 들어 등 뒤를 가리켰다.

"저걸 봐! 감히 저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 곳에는 몇몇 시신이 눕혀져 있었다. 어제 마주친 키라와 나이가 비슷한 어느 소년의 변한 모습이 있었다.

카가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계속해서 외쳤다.

"다들 필사적으로 싸웠어! 싸우고 있단 말이야! 소중한 사람이나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얼마나 열심히…!"

'지킨다고? 지키고 싶어서 싸운다고? 하지만 죽으면 대체 누가 뭘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소년.'

키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실패하고, 그 대가로 키라는 남의 생명을, 소년은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한 채 영원히 같은 잘못을 반복하려고 한다. 키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소리 지르는 카가리의 볼을 힘껏 내리쳤다.

"마음만으로 뭘 지킬 수 있다는 거야?!"

카가리는 눈을 크게 뜨고 키라를 바라보았다.

 

 

꽃 향기로 가득한 희미한 어둠 속에 물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자프트 군이 관사로 채택한 이 곳 호텔은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하면서도 정원에 거대한 분수를 설치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 지역에서 물은 무엇보다도 호사로운 사치품이다.

"앤디."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 곳에서 그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다. 발트펠드는 분수를 쳐다보며 유연한 팔이 자신의 목을 감싸자 미소 지었다.

"앤디, 식사 안 해요?"

"벌써 그런 시간인가? 아이샤."

아이샤라고 불린 여자는 요염한 미소를 흘렸다. 드러난 어깨 위로 내려뜨린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발트펠드의 볼을 스쳤다. 양 쪽에 한 가닥 씩 금색으로 물들인 아름다운 검은 머리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매력적인 외모는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신비로운 검은 눈동자가 교채를 부리듯이 발트펠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사막의 호랑이'의 애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은 누굴까. 발트펠드는 궁금했다. 이런 식으로 관사에 여자를 불러 들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독신인 그는 애인이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웠다. 아이샤가 가진 신비로운 분위기는 애인이나 아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나요? 마틴 다코스터가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에요."

그녀는 일부러 아이처럼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코디네이터는 각자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그것을 완전한 여성으로 존재하기 위해 발휘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발트펠드는 아이샤를 돌아 보았다.

"멋대로 화 내게 내버려 둬. 실은 좋은 일이 있었지."

"어머, 그게 뭐예요?"

"지루한 일상을 날려 보낼 만큼 큰 사건이야."

"알 것 같아요."

뭐가 우스운지 아이샤가 키득거렸다.

지루함. 그렇다. 발트펠드는 지루해 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사막에서의 생활과 자신의 인생을 즐겼다. 그들을 태우려는 듯이 내려 쬐는 태양, 모래 바람으로 뒤덮인 하늘, 활기찬 시장의 모습, 부조리한 내츄럴들. 그들 모두가 발트펠드를 매혹시켰다. 그는 예측할 수 없는 것, 계산기로 튕겨 낼 수 없는 것들을 사랑했다. 그것은 그가 남들보다 훨씬 앞을 내다 보는 두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늘 다른 무늬를 그리는 사막의 문양과 물방울의 모양, 어떤 콩을 얼마나 배합해야 맛있는지 알 수 있는 커피의 맛이다. 그리고 아이샤도 있다.

하지만 모빌 슈트를 타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곳에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능력의 소유자가 없다는 것이 은밀한 불만이었다. 기껏 해야 원정을 나가서 남의 도시를 불태우는 것이 그에게 요구된 임무였으며, 그의 적은 버기 카와 장난감 같은 핸드 미사일로 바쿠에 맞서는 내츄럴 뿐이었다.

"…약자를 괴롭히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오늘은 오랜만에 기분이 상쾌했다. 평상 시에는 잠재워 둘 수밖에 없는 자신의 능력을 극한 상황까지 끌어 낸 상대였다. 그는 그런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이토록 집중해서 부딪힐 만한 존재를 그는 여태까지 찾지 못했다.

아이샤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몸을 기댔다.

"멋지네요."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 있었던 사건에 대한 감상인지 발트펠드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다른 존재를 향한 말일 수도 있다. 아이샤에 대해서는 영원히 파악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애인을 무릎 위에 끌어 당기며 가볍게 키스를 했다.

아이샤가 미소 지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마틴이 너무 걱정을 많이 해서 대머리가 되면, 당신이 책임 지고 가발을 만들어 줘야 할 거예요."

발트펠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하지만 아이샤, 아마도 그의 유전자에는 대머리 요인이 없을걸?"

아이샤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를 쳐다본 뒤, 다시 한 번 키스를 졸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