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2권- 사막의 호랑이 :: PHASE.1 레셉스

뜨겁다. 온 몸의 피가 끓어 오르는 것 같다.

열 때문에 혼탁해진 머릿속에 과거의 정경이 무작위로 떠오르면서 흘러 지나갔다.

경보음이 멈추지 않는 조종석. 계기판은 대부분 엉터리 숫자를 표시하거나 침묵했으며, 모니터는 온통 노이즈로 가득 차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열된 공기가 폐를 압박했다.

'여긴 어디지?'

키라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구조를 요청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비좁은 조종석 벽이 짓누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가 나 좀 살려 줘! 이 곳에서 나가게 해 줘!'

키라의 비명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두렵고 고통스러워서 정신이 아찔해졌다.

문득 손에 가벼운 감촉이 느껴지면서 낯익은 새의 지저귐이 들렸다.

'토리…?'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얇은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면서, 토리를 손에 얹어 내민 아스란의 어깨와 머리카락 위로 내려 앉았다.

─언젠가 또 다시 만날 수 있어….

그 때 확신했듯이 그들은 다시 만났다.

─어째서 그런 것에 타고 있지? 코디네이터인 네가… 어째서 지구군의 모빌 슈트 따위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찬 아스란의 외침.

─나와 같은 코디네이터인 네가 어째서 우리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째서…? 아스란, 나도 모르겠어.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하지만… 설령 아스란에게 총구를 겨누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만 해.'

모니터 가득 펼쳐진, 눈이 시릴 만큼 푸른 별. 지구라고 불리는 넓은 대지에 그리움과 친숙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금 키라는 이 순간 압도적인 공포밖에 느끼지 못했다.

추락한다. 어마어마한 질량의 인력에 사로잡혀 터져 버릴 것 같다.

문득 심각한 표정으로 종이 꽃을 접는 소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괜찮아. 저 오빠가 우릴 위해 싸울 테니까….

손을 마주 잡고 미소 짓는 프레이와 어린 소녀가 멀리서 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소녀가 프레이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오자, 키라가 잠시 멈칫했다. 무중력 공간에 떠오르는 작은 몸을 끌어안기 위해 손을 뻗었다. 따뜻한 몸에 손이 닿는다. 키라는 어린 소녀의 부드러운 몸을 한숨과 함께 끌어 당겼다.

<오빠….>

귓가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는 거짓말쟁이야.>

손바닥이 미끈거리자, 키라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때는 이미 늦었고, 겨우 자신의 과오를 떠올렸다.

<왜… 우릴 지켜 주지 않은 거야?>

폭발로 소녀의 몸이 사방으로 떨어져 나가고, 키라의 손에는 피 묻은 종이 꽃만 남았다. 목이 막히고 숨이 차 오른다.

'난 고통 받아 마땅한 걸까? 연옥의 불길 속에 던져진 게 아닐까? 동포를 배신하고 그들과 싸우면서도, 소중한 존재조차 지킬 수 없으니….'

하지만 이제는 벗어날 수 없다. 좁은 조종석 안에 갇힌 채, 그는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동포들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바람이 잔잔해졌다.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고요한 모래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생명의 존재를 거부하는 뜨거운 대지조차 잔잔한 별빛이 드리워지자 꿈처럼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도시와는 달리 하늘 가득 눈부신 광채를 발하며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거대한 실루엣이 가로질렀다.

지구 연합군 제８함대가 총력을 기울여 지상으로 보낸 신형 전함 아크 엔젤은 본래 목적지에서 크게 벗어나 아프리카 대륙 북부 사막 지역에 내려 앉았다.

"열이… 내리지 않아…."

밀리아리아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눈 앞에는 고열에 시달리는 키라가 있었다. 프레이가 곁에 앉아서 이마에 배어 나오는 땀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감염증에 의한 열이 아니고, 내장에도 아무 이상이 없어."

지구로 내려오기 전에 탑승한 군의관이 의무실 진찰대 곁에 서서 토르와 사이에게 설명했다.

"우선 수분을 섭취하게 하고, 체온을 낮추는 수밖에 없어. 나도 코디네이터를 진찰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말이야."

젊은 군의관의 말에 토르 일행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군의관이 진정시키듯이 말했다.

"그들이 우리보다 신체 기능이 훨씬 뛰어나니까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외관 상으로는 똑같아 보이지만 체내의 모든 성능이 다르다면서? '보다 강인한 육체, 뛰어난 두뇌'라고 하더군. 죽을 만큼 큰 병에 걸리는 일이 없을 뿐더러 저항력도 강하지. 그러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낙천적인 군의관의 모습에 토르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군의관이 말했다.

"조정석 내부 온도가 몇 도였는지 알고 있니?"

"아, 아뇨…."

"우리라면 아마 살아 남지 못했을 거다."

그 말을 들은 소년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군의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총을 맞으면 죽을 테고, 때로는 열이 날 수도 있겠지. 그런 위험 부담이 우리보다 훨씬 적지만…. 이 쯤이야 뭐…."

"우리들과 '성능'이 다르다…."

토르는 사이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아크 엔젤에 탑승한 이후로 키라가 자신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종종 있었다. 같은 남자로서 보고 들을 때마다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고, 그 때마다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곱씹게 되었다.

토르는 설명을 늘어놓는 군의관을 무시하고, 키라 곁에 있는 밀리아리아 쪽으로 다가갔다.

"밀리, 프레이…. 나랑 교대하고 가서 좀 쉬어."

토르가 말을 걸자, 프레이가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키라의 팔을 담요 위에 얹으며 무덤덤하게 괜찮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프레이, 넌 여태껏 계속 간호했잖아? 이제 우리들한테 맡기고…."

"다들 바쁘잖아? 난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그래도…."

걱정하는 사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프레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곁에 있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다시 시선을 키라에게 돌렸다. 프레이의 거절하는 태도에 사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여태까지 말 없이 키라를 바라보던 밀리아리아가 토르의 어깨에 기대어 속삭였다.

"…다행이야."

"뭐가?"

"키라가 코디네이터라서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지금쯤…."

눈물을 글썽이는 밀리아리아를 본 토르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다. 만일 키라가 내츄럴이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 토르는 가슴 속에 따뜻한 감정이 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여자 친구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응…. 맞아…."

'밀리아리아는 착한 아이다. 이런 여자 친구가 있어서 난 정말 다행이야….'

 

 

"여기가 알래스카."

무우의 손가락이 모니터의 한 위치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밑으로 쭉 내려가면서 세계 지도를 횡단했다.

"그리고 이 아래쪽…, 바로 이 곳이 현재 위치지."

손가락이 멈춘 곳은 아프리카 대륙의 북단에 가까운 위치였다. 무우는 손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짜증나는 곳으로 내려왔군. 완전히 적의 세력권이잖아."

마류와 무우는 함장실에서 머그컵을 쥔 채 회의 중이었다.

"할 수 없죠. 그대로 스트라이크와 떨어질 수는 없었으니까요."

마류가 기계적으로 커피를 홀짝이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망설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우가 말한 대로, 사하라 북쪽 지중해 연안에서 대서양 연안에 걸친 아프리카 공동체는 친 플랜트임을 표명한 국가 연합이자 이미 자프트 군이 장악한 지역 중 하나다. 전함 아크 엔젤은 그야말로 적진 한가운데 홀로 내버려진 상태나 다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승무원은 무우를 제외하면 실전 경험이 전무한 부사관이나 병사가 대부분이며, 함장은 고작 스물 여섯에 불과한 마류 자신이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자프트가 설치한 뉴트론 재머의 영향으로 지상은 강력한 전파 장애에 시달렸고, 아군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는 커녕 교신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자프트 군이 지하 깊숙이 설치한 뉴트론 재머는 그 정확한 숫자와 위치를 알 수 없으며, 철거할 방법도 없다. 핵 분열을 차단시키는 장치로, 종래의 최종 병기인 핵 미사일 등을 전부 무력화시켰다. 그 때문에 지구는 핵 분열에 의한 에너지 생산을 포기해야 했고, 심각한 에너지 위기에 직면했다. 본래 물량이나 인적 자원이 훨씬 풍부한 지구 연합군이 플랜트에 맞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신형 모빌 슈트 X넘버 스트라이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래스카 본부로 운반, 대량 생산하는 수밖에 없다.

마류의 판단은 정확했다. 전투 때문에 대기권 돌입 각도가 어긋난 스트라이크를 확보하고자, 아크 엔젤은 연합군 세력권 내로 강하하려던 당초의 예정 코스를 포기했다. 그 결과, 스트라이크를 미처 전함 내로 수용하지는 못했지만 상부 갑판에 착함시켰고 분실 위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덕분에 승무원 전원이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다가 만일 알래스카에 가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마류는 암울한 표정으로 머그컵을 들여다 보았다. 물론 이런 감상이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신형 모빌 슈트는 물론 조종석에 있던 소년의 목숨을 아까워했다. 가차 없이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여하튼…."

그녀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본 함의 목적 및 목적지에 변동 사항은 없습니다."

문득 맞은편에 앉은 무우가 "괜찮나?" 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든 마류는 상대방이 온화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네…."

가까스로 미소를 띤 마류는 무우의 다음 질문에 표정이 굳어졌다.

"부함장과도…?"

부함장, 나탈 버질. 마류는 그녀가 멋대로 내린 명령을 떠올렸다. 스트라이크를 대기권 돌입 한계점까지의 위태로운 전투에 내보낸 순간을….

나탈은 지금까지 수 차례에 걸쳐 독단적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 선 판단을 내렸고, 마류가 수긍할 수 없는 판단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기에 적당히 눈 감아 왔지만, 규율로는 징벌 대상이나 다름 없다.

'차라리 징벌을 가하는 편이 나을까?'

나탈은 우유부단한 마류를 얕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그렇제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허무하게 울려 퍼졌다.

"그럼 됐어."

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가서 꼬마의 상태를 확인한 뒤 눈을 붙여야겠어. 당신도 자는 편이 좋을 것 같군. 함장이 그렇게 비실비실해서야 되겠어?"

여느 때처럼 농담을 던지고 손을 흔들면서 함장실을 나가는 그를 배웅한 뒤, 마류는 식은 커피를 개수대에 부어 버렸다. 그리고 모니터 지도를 어두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떡해야 할까.'

그녀는 목적지를 알면서도 어떻게 그 곳에 도달해야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스란, 여기 있었군요."

니콜의 목소리에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란이 고개를 들었다.

"이자크 일행은 무사히 지구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방금 연락을 받았어요."

파일럿 대기실에 들어온 니콜이 기쁜 표정으로 보고했다.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아스란은 이자크, 디아카와 함께 지구 중력에 사로잡힌 채 추락한 친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키라…, 무사할까?'

이자크가 지구로의 강하에 성공했다는 것은, 거의 같은 기본 성능을 지닌 스트라이크에 타고 있던 키라도 무사하다는 뜻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린 친구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그들은 이미 대기권 돌입 각도를 통해 아크 엔젤과 스트라이크의 강하 예상 지점을 추측했다. 그 곳은 자프트가 지배하는 지역, 즉 키라에게 적진 한가운데나 다름 없는 장소였다.

"귀환은 미정이라고 합니다. 잠시 지브롤터 기지에 머물 거라고 하더군요."

니콜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순진하게 동료들의 무사함을 기뻐하는 니콜을 보자, 아스란은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문득 그의 침묵을 의아하게 생각했는지, 니콜이 입을 다물고 아스란을 쳐다보았다. 아스란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물었다.

"…이자크의 부상은 어때?"

"아."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은 니콜이 대답했다.

"전쟁터에서 그만큼 활약한 걸 보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래…, 맞아."

한 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대기실에서는 모빌 슈트가 있는 아래쪽 갑판을 볼 수 있다. 정비대 위에는 아스란의 이지스와 니콜의 블리츠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모함(母艦) 가모프가 제８함대와 함께 격파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빌 슈트는 이 곳 베사리우스에 수용되었다.

니콜이 유리창에 기댄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뭐가?"

"결국 우리는 마지막 1기의 스트라이크와 신형 전함의 탈취…, 파괴조차 실패했잖습니까."

아스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지 못한 니콜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해가 안 가요…. 그야 물론 X넘버의 성능은 괄목할 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도 같은 모델이 4기나 있었는데…. 그 다리 달린 군함만 해도 장갑이나 화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적 전함이 아니잖습니까. 천하의 크루제 부대가 그걸 놓치다니…."

니콜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은 뒤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 일로 대장님께서… 다시 귀환 명령을 받으셨다죠?"

사물에는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아크 엔젤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격파를 피하면서 자신들의 손에서 빠져 나갔다. 당초 크루제 부대는 이번 임무가 이토록 힘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란은 내심 적함의 기적적인 행운을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우의 입장을 걱정하는 니콜 앞에서 그는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위원회는 크루제 대장님조차 손댈 수 없는 전함이라고 판단하겠지…."

아스란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의견은 키라의 앞길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까…?'

그토록 강한 적을 상대로 병력 소모를 아쉬워한다면 지상 부대는 더 이상 추궁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반대라면…? 강력한 적을 가능한 빨리 제거하고자 한다면…?

"…아스란?"

니콜이 말을 걸자, 아스란이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아, 아냐. …아무튼 걱정할 필요 없어. 이번 귀환도 다른 작전에 관한 일 때문인 것 같으니까…."

"그런가요?"

니콜이 안심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가 대기실에서 떠난 뒤에도 아스란은 씁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아스란의 머릿속에는 지상으로 내려간 동료도, 연이은 패배와 상사의 입장도,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니콜의 모습조차도 없었다. 지금은 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소년,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중력의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친구의 모습밖에 없었다.

 

 

"매뉴얼은 어제 대강 읽었지만 정말 웃기는 기체더군…. 스트라이커 팩을 장착할 수 있다니, 내가 무슨 배달부야?"

아크 엔젤의 사출 장치 앞에서 무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눈 앞에는 와이어로 고정시킨 유선형 기체가 놓여 있었다.

스카이 글래스퍼. 아크 엔젤과 스트라이크 지원용으로 제작된 지상형 전투기. 스트라이크의 파워 팩을 탑재할 수 있는 이 기체는 그대로 스트라이커 팩의 화력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전력 소모가 심한 스트라이크에 재빨리 새로운 배터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비사 머독이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대위님… 아니 소령님이 어디든지 배달한다, 이건가요?"

"할버튼 제독님 덕분이라지만 이 상황에서 승진해 봤자 뭐가 달라지나?"

새로운 계급으로 불린 무우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할버튼 제독이 승무원 전원을 1계급 특진시킨 것은 인원을 제대로 충원시켜 줄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해서 정한 일이었다.

"월급이 오르는 건 좋은데…, 언제 쓸 수 있을까?"

무우가 지적한 대로 현 상황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

"꼬마들이 야전 임관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키라는 소위. 파일럿이니까 당연하죠."

그렇다. 지구로 강하하기 직전에 지원병으로 채용된 키라 일행도 지금은 각자 계급이 있다. 사이와 토르는 이등병이지만, 키라는 파일럿이라는 입장 때문에 사관 계급을 부여 받았다.

"휴~, 그런 꼬마들까지…."

기체를 점검하면서 무우가 한숨을 쉬었다.

"하하하, 곧 있으면 제 몫을 하겠죠."

웃어 넘기는 머독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무우가 중얼거렸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제 몫을 못하면 곤란하단 말이야…."

예상치 못한 장소에 착륙했다는 사실은 승무원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그다지 실감이 안 나는지 대부분 침착하게 받아 들였다. 기동 병기 상태를 정상으로 유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임무라 다른 일에는 관심 없는 머독은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놓인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물론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도 곤란하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사관들도 난감하다. 아마 다들 헬리오 폴리스에서 출발한 이후 여태까지 위태로운 줄타기를 경험했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된 것이 분명하다.

"아 참, 꼬마는 열이 내렸나요?"

머독이 묻자, 무우는 겨우 생각에서 벗어났다.

"아침에 내렸다고 하더군. 스트라이크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녀석의 몸이 튼튼한 건지…. 그나저나 키라가 가끔 저걸 '건담'이라고 부르던데?"

정비대에 세워진 스트라이크를 가리키자, 머독이 끄덕이며 웃었다.

"기동 화면에 표시되는 Gemeral Unilateral Neuro-Link… 뭐라고 하는 문장의 머릿글자를 따서 읽었나 봅니다. 군 측에서는 첫 글자를 따서 'G'라고 불렀죠."

'애칭이라 이건가? 그 모빌 슈트도 완전히 키라의 애기(愛機)가 되어 버렸군.'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른 무우를 향해 스트라이크를 정비하던 승무원이 "대위님." 이라고 말을 걸었다.

"소령님이라니까, 소령님."

호칭을 정정하는 머독을 가로막으며 무우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여기 떨어져 있던 이것, 쓰레기 맞죠?"

정비사가 한 손으로 조종석 내부를 가리키며 다른 한 손에 종이 뭉치를 들어 보였다. 무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한테 물어 봐!"

정비사가 조종석을 다룰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할 점은 파일럿마다 각자의 징크스와 부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남의 눈에는 쓰레기로 보일지라도 본인에게는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정비사는 한숨을 쉬며 그것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었다.

 

 

"어머, 키라가 깨어났니?"

밀리아리아가 기쁜 듯이 말했다. 대답하는 사이도 안심하는 표정이다.

"응, 이제 괜찮다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어. 식사는 프레이가 가져다 줬고…. 아, 저기 돌아오는군."

토르와 마주 앉은 사이가 식당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프레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밀리아리아가 프레이에게 말을 건넸다.

"키라는 좀 어때?"

"이, 이제 정말 괜찮아. 식사도 했고…. 군의관님이 오늘 하루 안정을 취하는 게 좋다고 하셨지만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아."

프레이가 약간 말을 더듬었다.

"역시 우리들과는 신체 구조가 다른가 봐…."

잠시 무거운 공기가 깔리자,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밀리아리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다행이다. 이제 한 시름 놓았네."

"간호하느라 너도 많이 피곤할 텐데 좀 쉬지 그래…?"

걱정하는 사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프레이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난 괜찮아. 식사도 키라랑 함께 했어. …그가 빨리 건강을 되찾아야 하니까."

사이에게 등을 돌린 프레이는 컵에 음료수를 따른 뒤 곧바로 식당에서 나가려 했다.

"프레이…, 잠깐만."

사이가 팔을 붙잡고 멈춰 세우자, 프레이는 고개를 돌려서 도전적인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이래?"

"왜… 라니…?"

사이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프레이의 태도에 당황했다.

'아크 엔젤에 탑승한 이후로 틈만 나면 사이에게 어리광을 부리던 프레이가 왜 갑자기 변했을까?'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사이…, 너와의 관계는 아빠가 정하셨던 거야…. 하지만 이젠 아빠가 안 계시잖니…."

"뭐라고…?"

"정식으로 정한 것도 아니고 상황이 많이 변했으니까, 굳이 옛 약속에 구애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프레이의 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지고, 특히 사이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프레이는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나갔다.

"프… 프레이!"

정신을 차린 사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프레이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통로를 걸어 가면서 프레이는 중얼거렸다.

"소용 없어…. 난 내기에 이겼는걸."

그 말이 곁에 없는 사이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 되새기는 것인지는 모호했다.

사관 구역 앞에서 어느 정비사가 프레이를 불러 세웠다.

"이 봐. 지금 키라한테 가려는 거지?"

"…그런데요?"

"그럼 이걸 전해 주지 않겠어? 조종석에 떨어져 있던 건데…."

상대방이 내민 것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 뒤, 프레이는 그것을 받아 쟁반 위에 얹었다.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얼굴을 든 키라가 문을 열고 들어온 프레이를 보고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샤워 했니? 괜찮아?"

다정한 목소리에 키라는 어색하게 끄덕이며 긴장된 표정을 감추려는 듯이 젖은 머리카락을 닦았다.

밤새 열에 시달리는 동안 프레이가 곁에 있었다고 한다. 내심 기쁘기도 했지만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코디네이터를 혐오하는 그녀가 어째서 코디네이터인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걸까? 상대방의 호의를 기대하면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스스로에 대한 금기와 배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저기, 키라. 이거…."

문득 프레이가 쟁반 위에서 뭔가를 집어 들자, 키라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비하던 사람이 전해 주라고 하더라. 조종석에 떨어져 있었대."

프레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키라는 얼어 붙은 듯이 프레이의 손바닥 위에 놓인 종이 꽃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지켜 줘서 고마워….

악몽이 현실이 된다. 키라에게 종이 꽃을 건네 준 어린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곧이어 무참한 폭발 장면이 그 기억을 잡아 찢는다. 듀얼의 라이플이 셔틀을 꿰뚫자 산산 조각 나면서 대기 속에 불타 버린 기체. 그 안에 소녀가 있었다. 헤어질 때 믿음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키라를 쳐다보던 소녀는 불길 속에서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그 해맑던 눈동자와 작고 부드러운 손, 순진한 미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키라?"

프레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부르자, 키라는 정신을 차렸다.

"아…, 응. 그래…, 고마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종이 꽃을 받으려고 키라가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꽃을 받아 든 순간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키라…?!"

서 있을 수가 없어서 키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슴 속에서 무거운 응어리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압박감을 느끼며, 키라는 종이 꽃을 움켜 쥔 채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꽉 악문 이 사이로 오열이 터져 나왔다.

"키라…, 왜 그래?"

프레이의 손이 등에 닿는 순간,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아이를… 난…."

키라가 쥐어 짜듯이 외쳤다.

"지켜 줄 수 없었어!"

지켜 주고 싶었는데…. 안전하게 지상으로 내려갈 수 있었던 수많은 생명이 자신의 결단력 부족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주 짧은 순간에…. 키라만이 그들을 지켜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동포를 죽이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설령 전력을 다해 싸워도 승리를 보장할 수 없는 상대라 할지라도, 망설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켜 주지 못했다…!'

몸을 웅크리고 울부짖는 키라의 어깨를 따뜻한 팔이 감싸 안았다.

"키라…. 내가 있잖아…."

키라는 고개를 들고 자신을 끌어 안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프레이는 미소 지으며 가만히 키라의 머리를 끌어 당겼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모든 것을 용서하는 미소, 피부에 닿는 따스함에 키라는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를 잡듯이 힘껏 매달렸다.

"내 마음이… 널 지켜 줄 거야…."

달콤한 속삭임이 귀를 통해 온 몸에 퍼졌다. 키라는 프레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다정한 손가락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다. 키라는 곁에 있는 따뜻한 육체에 매달리는 것 이외에는 부서진 마음을 수습할 방도가 없었다.

 

 

"토르, 어서 일어나!"

토르는 제복 소매에 한 쪽 팔을 집어넣은 채, 아직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밀리아리아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어휴! 제대로 입지 못해?"

"응…."

"그런 꼴로 함교에 들어갔다가는 버질 중위님한테 한 소리 듣겠네!"

당직을 서기 위해 함교로 향하던 그들은 문득 사이의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프레이…. 이런 시간에 미안하지만…."

가만히 통로 안쪽을 들여다 보자, 프레이의 방문 앞에서 말을 거는 사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둘이서 제대로 얘기할 시간이 나지 않아서…. 낮에 그 일에 대해서 말인데…."

프레이가 사용하는 침대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사이가 말을 걸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토르와 밀리아리아는 발 소리를 죽여서 그 곳을 떠나 잠시 말 없이 걸었다. 토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둘이 약혼했었다는 사실도 놀라워."

"약혼이 아냐. 그냥 그런 얘기가 있었을 뿐이지."

"그게 그거잖아?"

여태까지의 경위를 잘 모르는 토르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처럼 평범한 연인 사이라고 생각했어."

"응,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간섭이 꽤 심한 아버지셨잖아? 딸의 남자 친구도 직접 고르셨을 것 같아…."

"그래…."

그렇게 말한 뒤, 그 사람이 이미 고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어갔다. 한참 뒤에 밀리아리아가 불쑥 말했다.

"프레이…, 이상하지 않아?"

"응…?"

"전에는 키라를 싫어했다기보다는…."

"코디네이터를 싫어했었지."

토르가 간단히 말하자 밀리아리아가 눈을 흘겼다. 토르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코디네이터를 싫어하는 프레이가 키라를 대놓고 혐오한 적은 없지만, 노골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이번에 헌신적으로 키라를 간호하자,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은 밀리아리아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변화를 처음에는 기뻐했지만, 지금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프레이는 학교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였지…."

갑자기 토르가 말을 꺼냈다.

"키라는 예전부터 프레이를…."

그 사실을 밀리아리아도 알고 있다. 한 살 아래인 프레이 알스터는 학년이나 전공은 달랐지만, 마침 밀리아리아와 같은 써클에 속해 있어서 함께 어울리는 키라와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밀리아리아와 토르는 키라의 마음을 재빨리 눈치 채고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그 당시 프레이와 사이가 이미 그런 관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토르의 말에 밀리아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에게는 키라와 사이, 둘 다 똑같이 소중한 친구다. 두 사람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다투는 광경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그보다 밀리아리아는 토르에게 자신이 느낀 미묘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뭔가 일그러진,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감각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밀리아리아는 그저 불안한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화제의 '대천사'는 어떤 상태인가?"

적외선 스코프를 들여다 보던 마틴 다코스터는 상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여전히 변동 사항 없습니다!"

뒤돌아 보자 사나운 인상을 주는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사막용 위장복을 입은 늠름한 체구에, 햇볕에 그을린 약간 긴 얼굴의 그에게는 독특한 야성미가 넘쳐 흘렀다.

"뉴트론 재머의 영향으로 지상의 전파 상황이 엉망 진창이라, '그녀'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겠군."

그렇게 말한 남자는 손에 쥔 컵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다코스타가 몸을 긴장시켰다.

"무슨 일입니까?!"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부하 앞에서 상관이 별안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아니, 이번에는 모카 마타리를 5% 정도 줄여 봤는데 의외로 맛이 괜찮군!"

마시는 커피에 대한 감상인 모양이다. 다코스타는 갑자기 허탈감을 느꼈다.

그의 상관은 커피를 직접 제조하는 은밀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아무리 커피 산지가 가깝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커피를 그저 검고 쓴 물이라고 생각하는 다코스터는 속으로 빈정댔다. 하지만 상관은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컵의 액체를 마시면서 아이처럼 기뻐했다.

"다음에는 시바 모카를 사용해 볼까?"

겉으로는 농담을 즐기는 괴짜로 보이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그가 바로 자프트 군 지상 부대의 으뜸 가는 명장이자 일류 파일럿인 앤드류 발트펠드, 통칭 '사막의 호랑이'다.

작전 수행 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발트펠드는 사구(砂丘)를 내려갔다. 빈 컵을 뒤로 휙 내던지자, 다코스터가 허둥지둥 그것을 받았다.

달빛에 드리워져 하얗게 빛나는 사구 밑에는,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기체의 그림자와 헬리콥터, 버기 카와 그 주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내들의 모습이 있었다. 발트펠드의 모습을 본 사내들은 재빨리 대열을 갖추었다. 발트펠드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지구 연합군의 신형 전함 '아크 엔젤'에 대한 작전을 개시한다!"

목소리는 우렁차지만 소탈한 말투였다.

"목적은 적함 및 탑재 모빌 슈트의 전력 평가다!"

그의 말을 들은 어느 파일럿이 히죽거리면서 질문을 던졌다.

"적을 쓰러뜨리면 안 됩니까?"

그러자 발트펠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야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만 상대가 크루제 부대가 번번이 놓치고, 할버튼이 제８함대를 희생하면서까지 지상으로 내려 보낸 전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일단은 그렇다."

아무렇지 않게 덧붙인 한 마디를 들은 병사들의 얼굴마다 자신감이 미소와 함께 떠올랐다. 상관과 병사들 사이에 강력한 연대감이 형성되었다.

"그럼 제군들의 무사와 건투를 빈다!"

그 목소리를 신호 삼아 병사들이 일제히 경례하자, 발트펠드도 한 손을 들어 답했다. 다코스터가 구령했다.

"전원, 탑승!"

병사들이 사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조종석에 들어감과 동시에 다코스터가 운전하는 지휘 차량에 발트펠드가 올라 탔다.

"음~, 역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좋다니까."

느긋하기만 한 남자의 눈동자에 얼핏 사나운 광채가 떠오른다.

"자, 전투하러 가자!"

 

 

토르 일행이 함교에 들어가서 교대 시간임을 알리자, 조종석에 앉아 있던 노이만이 "왜 이렇게 늦었냐!" 면서 살짝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토르가 실실 웃으면서 좌석에 앉았다.

뒤쪽에서는 카즈이와 찬드라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함의 배열(排熱)은 블랙 홀 배기 시스템을 통해서 냉각 되니까, 위성에서 발사되는 적외선 탐사만 무사히 넘기면 문제 없을 거야."

아크 엔젤의 배열은 외부 공기를 유입시켜서 냉각함으로써 탐지가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그런 시스템이 없다면 이렇게 탁 트인 장소에 느긋하게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찬드라가 계속해서 설명했다.

"레이더에 의존할 수 없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니까…."

"뉴트론 재머라…, 자프트가 뭐 하러 이렇게 불편한 것을 퍼뜨렸는지 모르겠어요."

카즈이가 진저리 치면서 말했다. 덕분에 적군 레이더에 감지되지는 않지만, 아군과 연락을 취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훨씬 컸다.

"물론 영향이나 피해가 적지 않지만, 핵 미사일이 날아 다니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만일 유니우스 세븐 공격 직후에 핵으로 보복 당했다면, 지금쯤 지구는 남아 있지 않을걸?"

그 말을 들은 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다지 기분 좋은 상상이 아니다. 유니우스 세븐 공격. '피의 발렌타인'이라고 불리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지구와 플랜트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결렬되었다. 그 직후 자프트 군이 지구로 쳐들어와서 적도에 나란히 설치된 우주항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모든 우주항을 점령하면, 지구를 둘러싼 고리가 완성된다는 이유로 작전 명을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신화 속 뱀의 이름을 따서 '오퍼레이션 우로보로스'라고 명령했다. 코디네이터는 작전 실행의 제１단계로, 지구 곳곳에 뉴트론 재머를 투하했다. 만일 그들이 뉴트로 재머 대신 핵을 발사했다면, 하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토르는 적이 이성적인 코디네이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애당초 지구 연합군이 무슨 생각으로 핵을 사용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들이 보복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걸까?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보복이었다. 자프트가 투하한 뉴트론 재머 때문에 지구에서는 전파와 원자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개전 직후 지구는 심각한 에너지 위기에 빠졌고, 아직도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이것이 자업자득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토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데브리 벨트에서 목격한 유니우스 세븐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참히 파괴되어 주민 모두가 죽음을 맞이한 플랜트가 어두운 진공 속을 떠 다니는 그 쓸쓸한 광경이….

토르가 심각한 기붕에 잠겨 있을 때, 함교 문이 열리면서 나탈 버질이 들어왔다.

"이상 없나?"

그녀의 질문에 방금 전까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찬드라가 차렷 자세를 취했다.

"네! 이상 없습니다!"

조종석으로 걸어 가던 나탈이 노이만에게 들고 있던 음료수 중 하나를 건네 주었다.

"선각 부위의 일그러짐에 대한 자료는 나왔나?"

"네, 간이 측정이지만 응력의 일그러짐은 허용 범위 내에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노이만이 말하면서 키보드를 두드리기 위해 평상 시 습관대로 음료수에서 손을 떼었다. 이 곳이 우주 공간이라면 음료수가 든 팩이 같은 위치에서 둥둥 떠 다녔겠지만, 당연히 지구에서는 어떤 물체든 중력에 이끌려 낙하한다. 나탈은 툭 떨어진 팩을 주워, 민망한 표정을 짓는 노이만에게 건네 주었다.

"소위, 언제까지 무중력 상태에 빠져 있을 건가."

"죄, 죄송합니다."

곁눈질하던 토르가 가까스로 웃음을 참는다. 하지만 토르도 그간 무중력 상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한 층 높은 곳에 있는 통신석을 향해 뛰어 오르려고 하거나 CIC에 다이빙하는 등 실수를 연발했다.

"중력장이 균일하지 않군. 지하 동굴의 영향 때문일까?"

계기판을 보면서 나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토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게 뭡니까?"

"전쟁 전의 자료라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이 부근에 석유나 천연 가스 폐광이 있다고 하더군."

나탈이 앞에 있어서 그런지 노이만이 평상 시보다 약간 근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폐광…?"

"요컨에 땅 속에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는 소리지. 섣불리 착륙했다가는 위험하다는 뜻이야."

그 말을 들은 토르가 머쓱해졌다.

"저…, 그럼 여긴 괜찮은 겁니까? 자는 사이에 땅이 푹 꺼지는 건 아닐까요?"

"하하하,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당연히… 괜찮겠죠?"

노이만이 가볍게 웃으면서 나탈을 돌아다 보았다. 하지만 상관은 말 없이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음료수를 마셨다.

"……."

노이만의 미소가 굳었다.

"…괜찮지… 않습니까?"

이 때,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CIC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본 함이 레이저로 투사되었습니다!"

나탈은 급히 고개를 돌리고, 토르는 몸을 경직시켰다.

"…측정 조준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찬드라가 보고한 내용은 명확했다. 누군가 이 쪽을 공격하려 한다는 뜻이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적밖에 없다.

 

 

「제２전투 배치 발령! 반복한다. 제２전투 배치 발령!」

야간에 함선 내에 울려 퍼지는 경보음을 듣고, 마류와 무우 등이 벌떡 일어나 서둘러 제복을 입고 방에서 뛰어 나왔다. 여태까지 프레이의 방 앞에서 말을 걸던 사이도 아쉬운 표정으로 함교를 향해 달려 갔다. 사이가 떠난 방에 경보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적이라고?!」

사관실에서 꾸벅꾸벅 졸던 키라가 경보음을 듣고 소리치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 동작은 마치 궁지에 몰린 짐승과도 같았지만, 눈에 떠올랐던 두려움이 한동안 포식자의 표정으로 변했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서둘러 주워 입었다.

"더 이상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거야….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는 상의를 손에 쥔 채 방에서 뛰어 나왔다.

문이 닫히자, 그의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시트 밑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등이 나타나면서 어깨 위로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 내렸다. 프레이는 나른한 듯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키라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잠시 들은 뒤, 베개에 몸을 던졌다.

"…후… 후훗."

입술에서 메마른 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떤 뒤, 자신의 어깨를 끌어 안고 시트 속에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지켜…줘…."

자신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을 스스로 비웃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내기에 이겼으니까. 키라를 전쟁에 휘말리게 하는 것에 성공했으니까….'

"그래…, 넌 싸우고 또 싸우다 죽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빠를 지키지 못한 코디네이터, 아빠를 죽인 코디네이터! 이것이 그들에 대한 프레이의 복수였다.

일찍 모친을 여읜 프레이에게 아버지는 유일하면서도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는 딸을 그야말로 애지중지 키웠고, 원하는 모든 것을 주면서 자신의 날개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프레이의 좁디 좁은 세상은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가 혼내지 않으니 멋대로 행동했고, 아버지가 사이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와 사귀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코디네이터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녀도 그들을 혐오했다. 

프레이에게는 아버지가 숨 쉬는 공기와도 같았고, 자신이라는 진주를 감싸며 지켜 주는 조개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누구를? 나를 이런 처지로 몰아 넣은 게 누구지?'

누군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자신이 이토록 상처 받았기 때문에, 어딘가에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닌 단순한 격정이다.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억지나 다름 없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 싼 좁은 세상에서 살아 온 그녀가 표적으로 선택한 것은 가장 가까이 있던 적, 코디네이터인 키라 야마토였다.

그가 아빠를 지켜 주지 못해서….

그가 적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그가 코디네이터라서….

그래서 그녀는 군에 지원했다. 키라가 전쟁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리하여 그녀가 의도한 대로 키라는 돌아왔다. 이게 바로 그녀의 '내기'였다. 설령 그것 때문에 전쟁에 휘말린 사이와 밀리아리아가 위험에 처한다 해도, 프레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더라도, 그런 것은 전혀 상관 없다. 그저 키라에게, 코디네이터들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키라는 그녀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친구를 죽이면서까지 싸울 것이다. 코디네이터끼리 싸우면서 서로 멸망해 버리면 좋을 텐데.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 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가증스러운 코디네이터에게 안기더라도, 아빠의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모두 다, 죽여 버려…."

프레이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키득거렸다.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오는 줄도 모르고, 그녀는 계속해서 웃었다.

 

 

사구 너머로 몇 발의 미사일이 날아 오자, 75mm 발칸 포탑 시스템 '이겔슈테른'이 그것을 요격해서 격추시켰다. 전함 내에 폭발음이 둔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일단 날아갈 수 있게만 해 달라고 하잖아!"

"그게 무리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습니까!"

좌현 사출 장치 갑판에 배치된 스카이 글래스퍼 앞에서 무우와 머독이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파일럿 슈트로 갈아 입은 키라는 조종석까지 단번에 날아갈 수 없다는 중력의 제약을 느끼면서 스트라이크에 탑승했다.

「사구 그늘에 숨어서 공격하기 때문에, 발사 위치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통신 회선을 열자 함교의 대화 내용이 들렸다.

「제１전투 배치 발령! 기관 시동!」

엔진이 시동되면서 가벼운 진동이 함교를 흔들었다. 토노무라의 지시에 따라 스트라이크를 기동시킨 키라는 긴장감을 느꼈다.

「5시 방향에 적기 셋! 자프트 전투 헬기 '아자일' 확인!」

「미사일 접근!」

「적기를 놓쳤습니다!」

나탈의 명령이 끼어든다.

「조명탄을 쏘고 요격하라!」

초조해진 키라가 외쳤다.

"적은 어디 있죠? 스트라이크, 발진하겠습니다!"

「키라? 기다려, 아직….」

밀리아리아가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키라는 무시한 채, 조종석 해치를 닫고 헬멧의 바이저를 내리면서 소리쳤다.

"어서 해치를 열어!"

「잠깐! 아직 적의 위치나 전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조급해 하지 마라. 발진 명령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어!」

토노무라가 다급하게 타일렀지만, 키라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느긋한 소리 하지 마세요! 됐으니까 어서 해치나 열어요! 내가 가서 해치우고 오겠어!"

「키라…?」

모니터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밀리아리아의 불안한 표정을 보지 못한 채, 키라는 계속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말투가 맘에 들지 않지만, 내보내는 수밖에 없겠군.」

약간 퉁명스러운 마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차피 함포로는 세밀한 공격을 할 수 없으니까. 스트라이크, 발진하도록!」

해치가 열렸다. 런쳐 스트라이커를 장착한 뒤, 키라는 사출 장치 위해서 자세를 취했다. 마지막으로 나탈의 명령이 떨어졌다.

「스트라이크, 적의 전투 헬기를 제거하라. 그리고 중력을 잊지 마라!」

사출 장치가 기체를 힘껏 밀어 냈다. 나탈이 미리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다가오는 지표면에 키라는 잠시 주춤했다.

"윽…!"

착지 자세가 흐트러져 휘청거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스트라이크의 발 밑에서 가는 모래가 물처럼 흘러내렸다.

사구 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전투 헬기가 미사일을 발사했다. 키라는 허둥지둥 요격 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일어선 모빌 슈트가 가는 모래에 미끄러져서 다시 균형을 잃었다. 미사일을 맞은 기체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연기가 바람에 씻겨 나가자, 흉부와 복부에 적과 청, 그리고 사지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흰색으로 변한 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잇!"

키라는 전투 헬기를 향해 왼쪽 허리에 고정시킨 초고 임펄스 포 '아그니'를 돌렸다. 하지만 헬기는 순식간에 사구 너머로 사라졌다. 기체가 기울어져서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키라는 모니터를 통해 발 밑을 보았다. 조명탄의 불빛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모래는 마치 액체처럼 흐르는 것 같았다.

"쳇…!"

얼굴을 찌푸린 키라는 스트라이크를 점프시켜 분사기를 내뿜으며 헬기를 뒤쫓았다. 하지만 중력 상태에서는 기체를 계속해서 비행시킬 만한 추진력이 부족했다.

스트라이크는 사구 정점에 착지했으나, 다시 모래에 발이 잠겨서 바닥까지 미끄러지고 말았다. 일어서려고 해도 발 밑이 불안정해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에 키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적기의 존재를 알리는 경고음이 조종석에 울려 퍼졌다.

사구 너머로부터 검은 그림자가 튀어 나왔다.

"뭐야…?"

헬기가 아니다. 캐터필러를 굴리면서 사구를 질주하던 기체는 허공에 떠오른 순간 실루엣을 바궈서 네 발로 땅을 박찼다.

'모빌 슈트…?!'

하지만 그 실루엣은 익숙한 직립보행의 인간형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예상치 못한 형상과 움직임에 키라는 민첩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모래 위를 가뿐히 뛰어 오른 네 발 달린 기체가 야생 동물을 연상시키는 민첩함으로 스트라이크를 향해 달려 왔다. 적의 놀라운 속도에 키라는 자신의 동체 시력을 가지고도 숫자를 파악할 수 없었다.

"으악…!"

그 중 1기가 몸을 던지자, 안 그래도 발 밑이 불안정했던 스트라이크가 쓰러졌다. 그러자 짐승형 기체의 등에 장착된 런쳐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키라!"

폭발음에 휩싸인 스트라이크를 보고 밀리아리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연기가 사라진 뒤 상처 하나 없는 기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것은…!"

아크 엔젤 함교에서 낯선 기체를 목격한 마류가 눈을 크게 떴다. 기체를 확인한 사이가 보고했다.

"적기 다섯! TMF/A-802, 자프트 군 모빌 슈트 '바쿠'로 확인!"

"바쿠라고?!"

네 발 달린 형상으로 등에 날개를 단 청회색 기체는 신화에 나오는 그리핀(독수리 머리와 날개를 가지고, 뒷다리와 몸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처럼 보였다. 400mm 13연장 미사일 런쳐 혹은 450mm 2연장 레일 건을 날개 윗부분에 장착하고, 중력 하의 안정성을 중시한 지상 작전용으로 개발된 기체다. 특히 사막에서 네 개의 발을 이용해 가볍게 뛰어 다닐 수 있으며, 캐터필러의 고속 주행이 가능한 기동성으로 인해 주력 병기로 배치되었다.

지구 상, 게다가 사막이라는 환경에 맞춰서 특화시킨 바쿠를 상대로 범용형 스트라이크는 분명히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실제로 스트라이크는 불안정한 대지에서 진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아그니의 조준을 맞추려 했으나, 다시 바쿠의 공격을 받자 미끄러지듯이 쓰러졌다. 그것을 노리고 캐터필러로 접근해 온 다른 1기가 미사일을 발사했다.

적기의 놀림감이 되어 버린 스트라이크를 본 나탈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슬랫지 해머 발사!"

그녀의 명령에 사이가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 보았다.

"스트라이크에 맞을지도 모릅니다!"

담당자인 토노무라도 항의했으나, 나탈이 단호하게 말했다.

"PS 장갑이 있잖아!"

"하지만…!"

분명히 페이즈 시프트(PS) 장갑은 미사일을 비롯한 실탄을 무효화하는 능력을 가졌다. 다만 그것은 일정한 전력 공급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공격 당할 수록 배터리 소모가 빨라진다. 또한 미사일 직격이 파일럿에게 주는 충격도 만만치 않다.

"명령이다! 저래서는 꼼짝도 할 수 없어!"

불리한 전투를 어떻게든 타개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알겠습니다! 슬랫지 해머 발사!"

토노무라는 긴장된 표정으로 미사일 발사 단추를 눌렀다. 아크 엔젤의 뒷부분에 있는 미사일 발사관으로부터 대공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밀리아리아가 외쳤다.

"키라, 어서 피해!"

미사일이 발사되자, 스트라이크를 둘러싼 바쿠가 순식간에 그 지점에서 벗어났다. 모래에 발이 걸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스트라이크만이 착탄 충격을 온 몸으로 받아 들였다.

"으아악!!"

아무리 PS 장갑이 보호해 준다고 해도, 폭발로 인해 기체가 튕겨 오르고 격렬한 충격이 조종석을 뒤흔들었다.

키라는 머리를 흔들며 모니터를 노려 보았다. 일단 물러섰던 바쿠가 각자 캐터필러를 굴리거나 다시 네 발로 뛰면서 자유자재로 스트라이크를 몰아 세웠다. 맞서 싸우려고 해도 미끄러운 모래 때문에 조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방금 전의 포격으로 알 수 있듯이, 아크 엔젤의 엄호도 기대할 수 없었다. 새로운 적의 우롱에 키라는 이를 악물었다.

"제길!"

바쿠가 런쳐를 발사했다. 키라는 애써 기체를 일으켜 세우고 스트라이크를 높이 뛰어 오르게 했다. 공중에서 350mm 건 런쳐를 발사했지만, 잽싸게 피한 바쿠는 도리어 스트라이크가 착지하는 순간을 노려서 공격해 왔다. 키라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기체를 허공에 띄우고 이번에는 아그니를 발사했으나, 여전히 바쿠를 맞힐 수 없었다.

이번에는 착지와 동시에 점프를 시도했다. 남의 눈에는 마치 가망 없는 전법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키라의 손가락이 일반인에게는 불가능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접지 압력이 소실된다면 이 쪽에서 맞추면 될 것 아냐!"

작게 내뱉으며 허공에 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스트라이크의 운동 프로그램을 수정했다.

"…사라지는 압력을 상정하고, 마찰 계수는… 모래의 입상성을 마이너스 15로 설정…."

착지하는 순간을 노리고 발사한 미사일을 피하면서, 키라는 다시 기체를 뛰어 오르게 했다.

"아직도 모자라나? 그럼 수치를 마이너스 20으로 수정…!"

손가락이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면이 다가온다. 키라의 전법에 짜증이 난 바쿠가 이번에는 착지점을 향해 직접 공격을 시도했다. 스트라이크가 착지하자 마자, 1기가 뛰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트라이크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키라는 모니터를 노려보면서 페달을 밟고 레버를 힘껏 밀었다. 몸을 낮춰서 바쿠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스트라이크가 그대로 한 발을 들어서 상대방을 돌려 찼다. 네 발 달린 모빌 슈트가 뒤로 튕겨 나가면서 모래 속에 푹 잠겼다.

다른 1기의 바쿠가 등 뒤에서 습격했다. 스트라이크는 몸을 돌려서 아그니의 총받이로 적을 쓰러뜨린 뒤 발로 짓밟았다. 그대로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폭발의 불길이 치솟으며 모래 바다를 환하게 밝혔다.

모니터를 통해 그것을 바라보는 키라의 표정에 망설임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키라는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둘러 싼 적기를 쳐다보았다.

"아크 엔젤은 내가 지킬 거야…."

 

 

"1기를 해치웠다!"

숨을 죽이며 모빌 슈트 전투를 지켜 보던 아크 엔젤 함교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때 찬드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보고했다.

"남서쪽에서 열원 접근! 함포입니다!"

그 순간 열에 들뜬 함교 분위기가 찬 물을 끼얹은 듯이 서늘해졌다. 마류가 명령했다.

"이동! 긴급 회피!"

모래를 날리며 아크 엔젤의 거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이겔슈테른이 전함의 눈 앞에서 미사일을 격추시켰으나, 놓친 몇 발이 방금 전까지 전함이 머물러 있던 보래 위로 떨어졌다. 폭발로 인한 폭풍이 상승 중인 함체를 크게 뒤흔들었다. 진동을 멈추지 않는 함교에서 나탈이 외쳤다.

"어느 쪽이지?!"

"나… 남서 20km 지점으로 추측!"

사이가 보고했다.

"본 함의 공격 장비로는 대응할 수 없습니다!"

토노무라가 암울한 현실을 보고했다. 레이더를 사용할 수 없는 한, 적함의 존재를 포착할 수 없기에 미사일을 유도할 수 없다. 나탈이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였다.

「스카이 글래스퍼, 출격하겠습니다!」

무우의 통신이 들어오자 마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가서 레이더 디지네이터를 조사할 테니까, 그것을 조준 삼아 미사일을 발사해!」

스카이 글래스퍼가 적함을 발견하고 그곳에다 레이저를 투사하면, 레이저파의 반사에 의해 적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다.

"안 돼요! 지금부터 적을 찾으러 가도 소용 없어요!"

나탈이 항의했으나, 무우의 반론에 기가 꺾였다.

「해 보는 수밖에 없잖아! 그 동안 미사일이나 잘 피해!」

그는 내뱉듯이 말하며 통신을 끊었다.

마류는 굳은 표정으로 발진하는 흰 기체를 바라보았다. 급한 대로 적당히 조정을 끝낸 스카이 글래스퍼는 아직 탄약조차 완전히 싣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무우가 말한 대로 직면한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이것 밖에 없다. 방금 전에는 요격 시스템과 회피 행동을 통해 운 좋게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20km 너머에서 날아 오는 미사일을 완전히 막아 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스카이 글래스퍼의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찬드라의 목소리가 함교에 울려 퍼졌다.

"제２파 접근!"

"회피하라! 전원 충격에 대비!"

그렇게 명령할 수밖에 없는 마류는 그저 날아 오는 미사일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토노무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두려워하던 사실을 보고했다.

"직격 접근합니다!"

승무원들은 곧 있을 충격에 대비했다.

"아크 엔젤이…!"

키라는 날아가는 함포의 궤적을 포착하고 신음했다. 만일 저것이 전부 명중한다면 아무리 아크 엔젤이라 해도 무사할 수 없다.

키라의 머릿속에 어린 소녀와 프레이가 손을 잡고 자신을 배웅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째서 지켜 주지 않았어?

한 명은 죽었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뭔가 툭 터지는 소리가 몸 안에서 들린 것 같았다. 키라는 스트라이크를 에워 싼 바쿠를 처절한 눈빛으로 노려 보다가 어깨의 발칸으로 견제하면서 정면으로 공격해 온 1기를 쓰러뜨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미사일이 아크 엔젤을 향해 날아 가고 있었다. 게다가 눈 앞에 있는 다른 바쿠 1기가 끼어 들었다.

"쳇…!"

키라는 아그니를 다시 잡았다. 의식이 예리한 바늘처럼 한 점을 향해 집약되는 순간,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열원이 포구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공격해 온 바쿠의 기체를 꿰뚫고 전함의 눈 앞으로 다가온 선두 미사일에 명중했다. 아그니의 포구에서 발사된 빔이 차례로 함포를 격추시켰으며, 밤 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였다.

스트라이크 조종석에서 살기로 가득 찬 표정의 키라가 중얼거렸다.

"더 이상… 아무도 죽게 하지 않겠어."

'이번에야말로 지킬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반드시 내가 지킨다.'

자신이 안았던 소녀의 따뜻한 감촉이 손바닥에 떠올랐다. 이제는 망설이거나 하지 않는다. 아무도 상처 받지 않게 할 것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키라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가령 자신의 손이 동포의 피로 물든다 할지라도, 그 상대가 사랑하는 친구라도,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다.

'그녀와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바쿠가 공격을 개시했다. 이번에는 키라가 정면으로 달려 드는 기체에 총구를 겨냥했다.

그 때, 갑자기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키라는 숨을 죽이고 에너지 게이지를 바라보았다. 배터리 잔량이 어느 새 레드 존까지 떨어져 있었다.

"아그니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런가? 빌어먹을!"

적기는 3기, 공격 헬기 미사일도 남아 있었다. 고작 이 정도 에너지 가지고는 도저히 싸울 수 없지만, 상대방이 후퇴를 허락할 리가 없다.

바쿠가 등에 실은 런쳐를 발사하면서 달려 왔다. 스트라이크는 필사적으로 회피했지만, 몇 발이 명중하여 PS 장갑의 에너지가 더욱 낮아졌다. 모든 공격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윽…!"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어. 저기, 아크 엔젤에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가 죽으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궁지에 몰린 스트라이크를 향해 갑자기 상공으로부터 미사일이 떨어졌다.

"……!"

언제 PS 시스템이 끊어질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미사일을 몇 발만 맞아도 스트라이크는 격파되고 만다. 몸을 움츠린 키라의 머리 위에서 미사일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미사일들은 스트라이크에 도달하기 전에 지상에서 발사된 다른 무기에 의해 차례로 격파되었다. 크게 놀란 키라의 눈 앞에서 그레네이드가 헬기 1기에 명중했다. 불을 뿜으며 추락하는 헬기.

불길로 새빨갛게 물든 사구를 넘어 몇 대의 전투 버기 카가 달려 왔다. 차에 탑승한 자들은 손에 든 런쳐에서 그레네이드를 발사하며, 스트라이크를 둘러 싼 바쿠를 향해 과감히 돌진했다. 그 중 한 대가 스트라이크를 향해 똑바로 달려 왔고, 조수석에 앉아 금발을 휘날리는 인물이 기체를 향해 와이어를 발사했다. 느닷없이 전투에 끼어 든 그들의 정체를 몰라 당황한 키라의 귓가에 당당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기 모빌 슈트의 파일럿! 죽고 싶지 않으면 우리 지시에 따르라!」

와이어를 안테나로 이용해서 통신을 보낸 모양이다. 잠시 후에 전송된 정보가 모니터에 떠올랐다. 그것은 이 부근의 지도로 추측되는 도형이었다. 지도 상의 한 지점이 반짝거렸다.

「그 지점에 함정을 준비했다! 바쿠를 그 곳까지 유인해야 해!」

다시 소녀가 지시를 내린 뒤, 이 쪽 대답을 듣기도 전에 통신을 끊었다.

키라는 달려 가는 버기 카를 잠시 응시했다. 상대방이 누군지 모른다. 심지어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자프트와 적대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키라는 곧 마음을 정하고 바쿠의 발 밑을 스쳐 지나가는 버기 카의 뒤를 쫓았다.

갑작스러운 개입에 통제 능력을 잃은 3기의 바쿠는 스트라이크가 점프를 되풀이하면서 달려 가자 뒤따라 왔다. 방금 그 소녀라면 미끼를 물었다고 말했을 텐데, 하지만 미끼가 된 키라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게이지는 서서히 레드 존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키라는 그것을 힐끗 쳐다보면서 주변 지리와 지도를 조합했다.

"저긴가?"

마지막 점프로 지도 상의 포인트에 내린 스트라이크는 바쿠를 놀리듯이 뒤돌아 보았다.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면서 드디어 PS 시스템이 멈추었다. 키라의 등에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쿠가 달려 들었다.

"믿는 수밖에 없어…!"

키라는 충분히 바쿠를 유인해서 그들의 발톱이 닿기 일보직전에 다시 스트라이크를 허공에 띄웠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밟고 있던 장소, 바쿠가 착지한 지면이 폭발음과 함께 내려 앉았다. 그 곳은 이 지역에 무수히 존재한다는 폐광 중 하나였다. 버둥거리면서 땅 속으로 떨어지는 바쿠 3기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폭발에 휩쓸렸다. 3기가 폐광에 떨어짐과 동시에 소녀 일행이 남아 있는 천연 가스에 불을 붙여서 폭발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폐광을 이용한 교묘한 함정이었다.

폭발로 산산 조각이 난 기체의 파편이 벽돌에 뒤섞여 스트라이크 주변에 흩어졌다. 키라는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 앞에 박혀 있는 바쿠의 앞발을 바라보았다. 무참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키라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쁘지도 않았고, 비탄의 느낌도 없었다. 그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철수한다."

발트펠드가 말하자, 부관인 마틴 다코스터가 꿈에서 깨어난 듯 멍한 표정으로 상관을 바라보았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다. 그들은 전투 지점이 내려다 보이는 사구의 그늘에 지휘 차량을 세워 둔 채, 전투를 지켜 보고 있었다.

"이번 전투의 목적은 달성했다. 잔존 부대를 회수하러 가자."

발트펠드는 그렇게 말한 뒤, 지휘 차량을 향해 걸어갔다.

당초의 전투 목적인 적의 전력 평가는 크나큰 희생을 치르면서 충분히 검토했다. 하룻밤에 5기의 바쿠를 잃었다. 심지어 상대는 지상에 갓 내려온, 정보와 장비가 충분하지 않은 전함과 단 1기의 모빌 슈트 뿐이다. 마지막에 개입한 세력은 별도로 치더라도…. '사막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천하의 발트펠드도 이런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나저나… 저 파일럿…."

그는 이 곳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래에 미끄러져서 휘청거리던 모빌 슈트가 전투 도중에 갑자기 다른 기체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파일럿은 바쿠 5기를 상대하면서 전투 도중에 모빌 슈트의 운동 프로그램을 사막에 맞춰서 재입력한 게 분명하다. 원거리에서 날아 온 미사일을 순식간에 런쳐로 격추시킨 솜씨도 물론 놀라운 것이었다.

"저게 내츄럴의 조종이라고…?"

발트펠드는 중얼거리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냉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적적인 전투를 보여 주는가 하면 에너지가 바닥을 칠 때까지 눈치 채지 못하고 싸우면서 자신을 궁지로 몰아 넣다니, 참으로 희한한 적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잠시 등 뒤를 돌아 보았다.

"어쨌든, 오랜만에 적수를 만난 느낌이야. 대천사와 그리고…."

그 시선 너머로, 모래를 흩날리며 질주하는 버기 카와 그것에 둘러싸여 아크 엔젤로 돌아가는 모빌 슈트의 모습이 보였다.

 

 

아크 엔젤 함교에서는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극복한 스트라이크의 모습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때, 밀리아리아의 모니터에 레이저 통신이 들어왔다.

"프라가 대위… 아니, 소령님으로부터 통신문이 도착했습니다! 「적 모함(母艦)을 발견했으나 공격을 포기. 적 모함은 레셉스」!"

그녀가 통신문을 읽자, 마류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레셉스라고?!"

"「반복한다. 적 모함은 레셉스. 지금부터 귀환한다」. 이상입니다."

마류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나탈이 물었다.

"레셉스라뇨?"

"레셉스는… 앤드류 발트펠드의 모함(母艦)이야."

마류는 아직 보이지 않는 적함을 향해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우리의 적이… '사막의 호랑이'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