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1권- 엇갈리는 날개 :: PHASE.3 라크스 클라인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은백색 모래 시계.

안으로 움푹 파인 가느다란 중앙 부분을 지렛목으로 삼아 천천히 회전하는 거대한 구조물─ 천칭봉형(천칭봉: 양 끝에 두 개의 바구니를 매단 짐꾼의 들 것)이라고 불리는 신세대 우주 식민 위성이다.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원뿔과 태양 광선을 받아 들이기 위한 세 장의 대형 거울로 구성되어 있다. 주 소재는 유기물질이며, 회전하는 원뿔 밑 부분에 주거 지역이 있다. 외벽에 빽빽하게 펼쳐진 고압선 사이는 자체 복구가 가능한 유리로 채워져 서로 반사하면서 탁한 은색으로 빛나고 있다. 거의 백 개에 달하는 그것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것이 바로 '플랜트', 코디네이터들의 본거지다.

베사리우스에서 내린 아스란과 라우는 군 전용 항구에서 떠나는 셔틀을 탔다. 기내에는 다른 손님이 한 명 있었다. 나이는 40대 중반, 날카로운 외모의 그 남자는 군 전용 항구에서 보기 드문 양복 차림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아스란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반면에 라우는 평상시와 똑같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자라 국방 위원장 각하, 함께 탑승해도 괜찮겠습니까?"

"신경 쓰지 말게. 나는 이 셔틀에 타지 않았으니까."

남자는 무표정하게 말하며 아스란 쪽을 쳐다 보았다. 아스란은 어색하게 머리를 숙였다.

"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서먹서먹한 대화에 아스란은 외로움을 느꼈다. 부친과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식으로 밖에는 접하지 못했다.

남자의 이름은 패트릭 자라. 최고 평의회의 의원이자 국방 위원장이며 아스란의 부친이다.

"보고서에 첨부된 자네 의견에는 나도 동의하네."

셔틀이 출발하자, 패트릭은 라우에게 보이듯이 출력된 보고서를 손바닥으로 쳤다.

"문제는 그들이 이토록 성능이 뛰어난 모빌 슈트를 개발했다는 점이지. 파일럿 따위는 어찌 됐든 상관 없어."

부친의 말에 아스란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 아스란을 부친은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 보았다.

"그 부분은 내 임의대로 삭제했다. …탈취 못 한 나머지 기체의 파일럿이 코디네이터라는 보고는 온건파에게 쓸 데 없는 반론의 구실 거리를 던져 주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자네도 자신의 친구가 지구군과 내통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을 거야."

라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마치 키라가 더러운 죄인이 된 것 같은 말투다. 아스란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내츄럴이 조종해도 그만한 성능을 발휘하는 모빌 슈트를 그들이 개발해 낸 것이다. 알았나, 아스란?"

"…네."

아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자신이 점점 더러워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늘 전쟁이 싫었다. 그러나 어느 새 스스로 총을 쥐게 되었다. 키라가 자신을 질책하는 것도 당연했다. 키라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겠다고 말했다. 자신에게는 과연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있는 걸까? 키라 이외에…?

그들이 탄 셔틀은 천천히 플랜트의 한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에이프릴리우스 원'으로 불리는, 최고 평의회 의장이 통치하는 도시다.

 

 

"재확인했습니다. 반경 5000 안에는 적함 반응이 없습니다. 완전히 본 함을 놓친 모양입니다."

토노무라의 보고에 승무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르테미스 쪽으로 주의가 쏠린 덕분이야. 그렇다면 그나마 감사해야겠군."

무우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저희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어요."

마류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아르테미스에서는 아무 보급도 받지 못했다. 지구를 끼고 반대 방향에 있는 달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헬리오 폴리스에서 황급히 챙겨 넣은 물품만으로는 얼마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무우가 마류 곁으로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실제로 얼마나 남았지? 많이 위험한가?"

"식량은 비상식으로 때울 수 있지만… 문제는 탄약과 물입니다."

"물이라…."

"여하튼 대책을 세워 봅시다. 물은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하고…. 피난민에게도 협력을 요청해야겠어."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달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항해 예정 코스 시뮬레이션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이게 최선인가? 더 제대로 된 항로를 잡을 수 없나?"

나탈이 가시 돋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렵습니다. 이 이상 지구 궤도 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데브리 벨트와 접촉합니다."

"데브리를 통과할 수 있다면 훨씬 빠를 텐데."

마류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노이만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 속도로 뛰어 들었다가는 저희들까지 데브리의 목록에 오르게 되겠죠."

데브리 벨트란 지구를 둘러싼 우주 쓰레기가 모이는 우주 구역이다. 인류가 우주로 진출한 이후, 폐기된 인공 위성이나 우주 개발에서 파생된 무수한 폐기물이 우주 공간에 내버려져 왔다. 그 곳은 지구 인력에 끌린 우주 쓰레기가 한 군데로 밀집하여 떠 다니는 이른 바 대형 쓰레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무우가 잠시 중얼거렸다.

"잠깐, 데브리라…."

뭔가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는 단정한 얼굴에 대담한 미소를 띠면서 마류를 쳐다보았다.

"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기적의 사나이인가 봐."

 

 

엘리베이터가 하강함에 따라 구름 틈새로 에이프릴리우스 시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형 거울의 반사광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몇몇 푸른 섬들. 이들이 기적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스란이 무미건조한 군함 내에서 몇 주일 씩이나 지냈기 때문이 아니다. 탁한 은백색으로 빛나는, 자체 복구가 가능한 유리 너머로 생명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무정한 우주 공간이 존재한다. 그 속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약하디 약한 인간들의 삶은 그러기에 더욱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아스란과 라우는 플랜트 지렛목에 해당하는 중앙 부분에 설치된 우주선 정박소로부터 주거지를 향해 쭉 뻗어 있는 전체 길이 60km에 달하는 장대한 샤프트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라우는 좌석에 앉아 컴퓨터로 자료를 읽고 있었으며, 아스란은 서서 아름다운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벽면 모니터에는 뉴스가 보도되는 중이다.

「그럼 다음으로 '유니우스 세븐', 추도 1주년 식전을 맞이하여 어제 클라인 최고 평의회 의장께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아스란과 라우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화면에는 40대 후반의 품위 있는 외모의 남자와 그의 곁에 얌전히 서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아스란의 눈은 무의식 중에 소녀를 향했다.

그녀의 모습은 어느 한 군데 각지고 딱딱한 부분이 없었다. 출렁거리며 물결치는 긴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분홍빛으로 물들어,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와 잘 어울렸다. 커다란 눈동자는 환상적인 빛을 띠고 있었으며 둥근 볼을 건드리면 금세라도 웃을 것 같은 그녀의 이름은 라크스 클라인이다. 클라인 의장의 외동딸이자 플랜트 최고의 가수, 그리고….

"그러고 보니 저 소녀는 자네 약혼녀로군."

라우의 목소리에 아스란은 자신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서둘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플랜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장의 말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위에는 이미 그녀와 아스란의 미래가 결정된 것처럼 말한다. 아스란도 라크스를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며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들이 결혼할 사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그녀는 이번 추도 위령단 대표를 맡았다지, 아마? 대단한 사람이야."

라우는 아스란의 동요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라 장관님과 클라인 의장님의 피를 이어받은 자네들의 결합은 차세대에 더할 나위 없는 빛이 될 거다. 기대하마."

"…감사합니다."

공허하게 느껴지는 라우의 칭찬에 아스란은 어색하게 머리 숙여 답례했다.

 

 

스트라이크의 정비를 끝마친 키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파일럿이라면 자신의 기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지 말라는 무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고했어."

먼저 식사를 시작한 토르와 밀리아리아가 웃어 보였으며, 사이가 서먹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프레이를 살짝 건드렸다. 식탁에 준비된 식사는 전함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했는지 상당히 검소한 식단이었다. 키라가 의자에 앉자마자 프레이가 결심했는지 말을 걸었다.

"아… 저기, 키라. 지난 번엔 내가 잘못했어."

"응? 뭐가?"

갑자기 머리를 숙이는 프레이를 보고 키라가 당황했다. 토르가 말했다.

"…아르테미스에서 있었던 일, 기억 안 나?"

─저 아이가 코디네이터란 말이에요!

─코디네이터의 배신자….

지난 일이 떠오르자 키라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리고 사실이잖아?"

그러자 프레이의 표정이 풀렸다.

"…고마워."

그리고 곁에 앉은 사이를 올려다 보며,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사이 좋은 두 사람의 모습에 키라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꼬마들, 여기 있었구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정비사인 머독이 입구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함장님이 찾으시던데?"

그들은 함교에 모였다. 호출된 용건은 보급을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모두는 반색하며 물었다.

"보급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디서요?"

무우는 약간 어색한 말투로 말 끝을 흐렸다.

"받을 수 있다고 할까, 셀프 서비스라고나 할까…."

마류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데브리 벨트로 향하는 중이다."

"데브리 벨트…?"

소년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사이가 먼저 말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설마?!"

"너 제법 눈치가 빠르구나."

농담하듯이 무우가 사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류는 여전히 무거운 말투로 설명했다.

"데브리 벨트에는 우주 공간을 떠 다니는 각종 물건이 쌓여 있어. 그 곳에는 물론 전투에서 파괴된 전함도 있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후에 '보급'의 말 뜻을 알아차린 키라 일행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 설마 거기에서 보급을 받으려는 것은 아니겠죠?"

"할 수 없잖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린 굶어 죽어야 하니까."

다 포기했는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무우가 말하자, 소년들의 얼굴에 당혹함과 혐오감이 떠올랐다. 예상했던 반응에 마류가 한숨을 쉬었다.

"너희들은 이번에 작업선을 타고 선외 활동을 보조해 주길 바란다."

그녀 자신도 무우의 제안에 내심 강한 반발을 느끼고 있었다.

"죽은 이들의 잠을 깨우러 가는 것이 아냐. 그저 우리들이 살아 남기 위해 필요한 것을 버려진 것들로부터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을 뿐이다."

자신의 말이 궤변으로 들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 우리들은 살아 남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쓰레기를 뒤지는 도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될지라도.

 

 

열두 명의 평의회 의원들이 둥글게 굽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과 마주 보는 형태로 아스란과 라우도 좌석에 앉았다. 중앙에 앉은 자가 방금 뉴스를 통해서 본 시겔 클라인, 즉 라크스의 아버지이자 평의회의 의장, 플랜트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 원수다.

플랜트는 전부 열두 개의 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각 도시는 각자 특화된 연구 분야를 갖고 있으며, 각자 한 명씩 최고 평의회의 의원을 선출한다. 그들 열두 명의 협의를 통해 플랜트의 의사가 결정된다.

그리고 아스란의 부친이 의원 중 한 명이듯이, 열두 명 속에는 이자크, 니콜, 디아카의 부모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년들이 부모 덕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유능한 자의 유전자를 물려 받은 그들이기에 에이스 파일럿으로서 최전선에서 활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의원들 앞에서 라우가 경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과를 통해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만, 저희들의 행동은 결코 헬리오 폴리스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으며, 붕괴의 최대 원인은 오히려 지구 연합군 쪽에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당당히 주장한 뒤 라우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아스란의 뇌리를 스쳤다. 그 때 부대원들에게 D장비를 명령한 시점에서 이미 라우는 헬리오 폴리스에 끼칠 피해를 예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의원들은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역시 오브는 지구군 편이었군! 조약을 무시한 것은 그 쪽이야!"

"하지만 아스하 대표는…."

"지구에 사는 자의 말을 누가 믿겠나!"

논쟁이 불거진 회의장에 낮은 목소리가 다른 의원들의 논쟁을 일축하듯이 울려 퍼졌다.

"그보다 크루제 대장."

패트릭 자라였다.

"지구군의 모빌 슈트가 과연 그만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손에 넣을 가치가 있나?"

라우는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차분하게 대답했다.

"경이적인 성능에 대해서는 실제로 그 기체에 탑승했으며 탈취하지 못한 마지막 1기와 교전 경험이 있는 아스란 자라의 보고를 들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치 대본이 준비된 연극 무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스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쪽에 준비된 스크린에 이지스의 영상이 나타났다. 그 다음에 전투 상황을 포착한 영상으로 바뀌자 의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우선 이지스라는 호칭이 붙은 기체에 대해서…."

원치 않은 무대에 오르게 된 햇병아리 배우와 같은 기분을 맛보며 아스란은 보고를 시작했다.

클라인 의장이 말 없이 패트릭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대본의 의미를 어느 정도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

"…이상, 데이터에서 알 수 있듯이 하드웨어의 성능은 저희 자프트의 차세대 주력으로 현재 진행 중인 시그를 웃돌았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크루제 대장님의 보고가 틀림 없음을 저는 믿습니다."

보고를 끝내고 아스란은 자기 자리로 물러갔다. 의원들은 그의 보고를 들은 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것을 만들어 내다니…. 내츄럴 주제에…."

"아직 시험 단계였다고 하지 않던가요? 겨우 5기의 모빌 슈트 가지고…."

"하지만 여기까지 진행했다는 것은 대량 생산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가서 후회하겠다는 겁니까?"

'그렇군.'

아스란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공포심이다.

내츄럴보다 능력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그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들보다 열등한 종족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비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취하는 상대방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니면 예전의 박해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또는….

"이것은 내츄럴의 확고한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전쟁을 계속해서 확대할 생각인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계속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면 우리들 쪽이…."

혹은 자신들을 생성한 종족에 대한 적대 행위 그 자체─ '어버이를 죽인 자식'이라는 금기를 범한다는 근원적인 공포가 아닐까…?

"지금 그런 말을 하자는 것이…."

"정숙! 의원 여러분, 정숙하시오!"

그들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불을 붙인 자는 다름 아닌 패트릭과 라우다.

우스웠다. 세상에서 최고로 불리는 두뇌들이 모여 있는데도 그들이 보여 주는 모습은 옛날과 다름 없는 감정의 충돌이었다. 그토록 공포라는 감정은 강렬하다.

어지럽던 회의장이 겨우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러자 패트릭의 무게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싸우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들 입을 다물고 뒷말을 기다렸다.

"평화롭게, 온화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 우리의 소원은 그 뿐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패트릭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을 무참히 짓밟은 자들이 누굽니까?! 자신들의 편의와 욕망을 위해 우리 코디네이터들을 구속하고 이용해 온 자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피의 발렌타인…, '유니우스 세븐'의 비극을!"

 

 

"구축함이다. 엔진을 공격당한 모양이군."

데브리 벨트에 떠 있는 잔해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다지 손상이 심하지 않습니다. 탄약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사이는 조종석에 앉은 파르 하사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 느꼈던 '도굴'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감은 작업용 작업선을 타고 밖으로 나오는 체험에 대한 흥분과 보물찾기 비슷한 느낌에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파르가 이렇게 중얼거리자 할 말을 잃었다.

"타고 있던 사람들이 무사히 탈출했으면 좋으련만…."

기관부에 뻥 뚫린 구멍이 마치 무덤 입구처럼 여겨졌다.

스트라이크는 토르와 밀리아리아가 탄 작업선을 보호하듯이 나란히 데브리의 바다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우주선의 외벽으로 보이는 잔해를 밀어 내자 눈 앞에 이질적인 광경이 나타났다.

"아…."

"아앗…!"

"…이것은…?"

키라와 토르 일행은 동시에 소리 질렀다.

눈 앞에 얼어 붙은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예전에는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말라서 얼어 붙은 보리가 주위에 가득했으며, 간간이 멀리 보이는 농가 건물이 진공 속에서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감압으로 부풀어 오른 채 얼어 붙은, 마치 그 플랜트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는 듯한 바다다. 중앙 샤프트는 무참히 부러지고, 중간 부분에서 뜯겨 나간 고압선 주위에 흔적만 남은 외벽의 자체 복구 유리가 산산 조각 난 채 들러붙어서 바다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은 예전에 플랜트였던 곳의 잔해다.

선외 작업복을 착용한 키라 일행은 진공 상태인 대지에 발을 내딛었다. 다들 자연스레 말 수가 줄어 들었다. 텅 빈 풍경이 칠흑 같은 우주 공간보다 쓸쓸해 보였으며, 마치 가족이 없는 집에 돌아 간 듯한 외로움을 느끼게 했다. 가만히 발 소리를 죽인 채 도로를 걸어서 창고로 보이는 건물로 다가갔다. 문을 연 순간, 밀리아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키라는 얼어 붙은 표정으로 눈 앞에 떠 다니는 부유물을 바라 보았다. 붕괴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이 창고로 들어 왔나 보다. 아이를 감싸듯이 품에 안고, 등을 굽힌 여인의 처참한 시체였다. 꽉 끌어 안은 엄마의 팔에 가려져서 아이의 성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곁에 아이의 것으로 추측되는 눈알이, 곰 인형과 함께 떠 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과거에 이 플랜트에 살던 사람들 모두 다, 눈 앞에 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유니우스 세븐'─, 피의 발렌타인의 무대가 된 장소의 현재 모습이었다.

 

 

"우리는 243,721명이나 되는 동포를 잃었소."

그 중 한 사람은 레노아 자라로, 아스란의 모친이자 패트릭의 아내였던 여자다.

플랜트의 역사는 굴욕의 역사였다.

지구 각지에서 내츄럴의 박해를 받던 코디네이터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우주로 결정했다. 지구는 플랜트에게 에너지와 공업 제품을 생산하도록 했으며, 일부 강대국이 이윤을 독점했다. 강대국은 플랜트에게 무장 및 식량 생산을 금했으며, 식량 공급을 미끼 삼아 플랜트를 조종했다.

양자의 관계가 심각해지자, 플랜트는 에너지와 공업 생산물을, 지구는 식량 수출을 중단했다. 그런 와중에 플랜트에 있어서 중요한 식량 생산지였던 유니우스 시에 속한 유니우스 세븐에 지구 연합군이 핵 미사일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유니우스 세븐은 붕괴되어 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최소한의 요구만으로 조기 종전을 위해 애썼소. 하지만 내츄럴들은 우리의 노력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지 않았습니까?!"

패트릭 자라의 열변을 의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 이후 그들은 두 번 다시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핵 융합 반응 억제 장치인 '뉴트론 재머'를 실용화하여 지구와 플랜트 주변에 설치했다.

'유니우스 세븐', '피의 발렌타인'이라는 단어는 코디네이터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패트릭 자라는 조용하면서도 굳은 의지를 담아 이렇게 말했다.

"싸우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말이 결정타가 되었다.

 

 

"저 물을…?! 진심입니까?!"

아크 엔젤의 함교로 돌아간 키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곳에는 1억 톤 가까운 물이 얼어 붙어 있어."

나탈은 아무런 이유도 설명도 없이 단지 진실만을 말했다. 그들은 유니우스 세븐의 잔해로부터 물을 운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보지 않았습니까?! 저 플랜트는 몇 십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인데…!"

키라는 필사적으로 항의했다. 코디네이터인 키라에게 있어서 그 곳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비슷한 심리적인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마류가 말했다.

"물이 그것밖에 없었어."

키라는 할 말을 잃었다.

"누구라도 가능하다면 그 곳을 피하고 싶겠지."

무우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할 수 없잖아! 우리는 살아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

 

 

"아스란."

회의장에서 나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스란은 반사적으로 경례 태세를 갖추었다.

"클라인 의장 각하."

"너무 격식 차리지 말게나."

"아뇨, 이것은… 그러니까…."

아스란은 허둥지둥 들어 올린 팔을 내렸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클라인은 안쪽 벽을 올려다 보았다. 그 곳에는 거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에비던스 01', 통칭 '고래석'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생 척추 동물의 화석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생물은 고래와는 분명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몸통에서 날개로 보이는 골격이 튀어나와 있었다.

C.E.18년, 탐사선 '치오르코프스키'가 목성에서 이 거대한 돌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것이 다른 은하계에서 날아 온 운석의 일종으로 추측되자 지구에서는 크게 논란이 일어났다. 단 하나의 돌이 지구 외 우주 생명체의 존재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이 돌은 '에비던스(존재 증명)'라고 불리게 되었다.

"겨우 자네가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그 아이가 일 때문에 자리에 없구나. 너희들은 언제쯤 느긋하게 만날 수 있을까."

클라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네…, 죄송합니다."

두근거리며 아스란이 고개를 숙이자, 클라인이 다시 웃는다.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지."

그는 문득 회의장 입구로 시선을 돌리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또 다시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자네 아버님의 의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말이다."

고상한 외모에 피로한 기색이 깔린다. 시겔 클라인은 온건파였다. 아스란의 부친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최근 1년 동안 클라인은 패트릭을 비롯한 급진파의 의견에 밀리고 있었다. 예전부터 지구 측과의 교섭이 잦은 그로서는 마음 고생이 여간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의장에서 패트릭과 나란히 대화를 나누며 나온 라우가 아스란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지구 측의 새 전함과 모빌 슈트를 추격한다. 라코니와 포르토 부대가 내 지휘 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출항은 72시간 뒤다."

"넷!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클라인 의장 각하."

아스란은 클라인을 향해 다시 경례한 뒤 라우를 따라갔다.

홀로 남겨진 클라인 쪽으로 패트릭이 다가가, 두 사람은 잠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우리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어째서 이렇게 전쟁을 확대하려 하는가?"

클라인이 나지막이 묻자, 패트릭이 대답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을 방해하는 자들을…."

 

 

과거에 해변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얼어 붙은 해안에 밀리아리아가 양 손 가득 안고 온 꽃다발을 던졌다.

물론 아크 엔젤에 생화가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그녀와 친구들이 색종이를 꺼내 손수 접은 종이 꽃이다. 피난민 중에 유일한 어린 소녀와 함께 만들었다.

분노의 형상으로 굳은 바다 위로 작은 꽃들이 날아간다. 예전에 이 플랜트에서 사람들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달리고, 웃고, 성장하고, 숨을 쉬었었다. 얼어 붙은 대지 위에서, 전함 안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묵념을 올렸다. 그것은 비록 자신을 위한 일시적인 마음의 위로에 불과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덤은 지구인의, 그들 죄의 낙인이었다.

작업이 시작되었다. 키라는 스트라이크로 주변 우주 구역을 경계하면서 잘라 낸 얼음 덩어리와 탄약을 운반하는 작업선을 지켜 보고 있었다.

 

 

꽃이 휘날린다. 바람을 타고 꽃잎이 흩어지는 모습을 아스란은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묘비가 있었다. 레노아 자라, C.E.33~70. 아스란의 어머니 묘였다.

하지만 그 밑에 유해는 안장되어 있지 않았다. 유니우스 세븐의 다른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함께 지낸 아주 짧은 시간, 어머니는 크나큰 애정을 담아서 그를 키웠다. 그래서 떨어져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머니처럼 뛰어난 인재가, 그리고 그 이상으로 소중한 누군가의 가족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게 바로 전쟁이다.

─우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방금 전에 아버지가 한 말이 아스란의 귓가를 맴돈다.

─싸우지 않고 지킬 수 없다면….

그렇다. 앉아서 기다려도 평화는 오지 않는다. 전쟁이 싫다고 외치면 전쟁이 사라지는가?

아니다. 아스란은 다시금 자신의 의지를 확인했다.

─싸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두커니 서 있는 아스란의 손목시계에서 비상 호출 신호음이 울렸다.

 

 

스트라이크 조종석에 경계 경보가 울려 퍼졌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키라는 깜짝 놀라서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데브리 벨트 너머로 뭔가 움직이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모빌 슈트다! 키라의 몸에 전류 같은 긴장이 흘렀다. 그 사이에 컴퓨터가 기종을 분석했다. 모니터에 떠오른 문자는 'ZGMF-LRR704B'─강행정찰 복좌형 '진'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키라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크 엔젤의 물자 반입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만일 진에게 들켜서 지원군이 몰려 온다면…!

키라는 빔 라이플의 저격용 스코프를 눈 앞으로 끌어 당겼다. 조준기 속에서 뭔가를 탐색 중인 진을 포착했다. 포착 완료를 알리는 전자음과 함께 눈 앞에 '발사'라는 단어가 깜박거렸다.

'가…! 제발 사라져 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말고 이대로 이 구역에서 사라져 달라는 키라의 기도가 통했는지, 진은 버니어를 가동시켜서 이탈하려 했지만 그 직후 뭔가를 발견한 듯이 되돌아 왔다. 키라는 놀라서 모니터를 응시했다. 아크 엔젤의 작업선이 진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이 바보! 어째서 발견한 거야!"

진이 라이플을 들어서 쏘는 것이 보였다. 총탄이 작업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째서…!"

키라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 줄기 빔이 똑바로 뻗어서 진의 동체를 뚫고 폭발하자, 주위가 밝게 빛났다.

「고… 고마워, 키라!」

스피커로부터 카즈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포착된 작업선에 그가 타고 있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스트라이크, 무슨 일인가?!」

카즈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에 섞여서 아크 엔젤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고 키라는 무선 스위치를 꺼 버렸다.

지구군이 파괴한 대지, 학살 당한 코디네이터의 기념비에 그는 기도했다. 하지만 그에게 기도할 자격 따윈 없다.

학살을 저지른 지구 연합군에 가담하여 싸우는, 같은 코디네이터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키라가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그 때 또 다시 전자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키라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다른 적이 나타났나…?!'

하지만 이번에 모니터에 비춰진 것은 적기가 아니었다.

 

 

"넌 정말 물건을 잘 주워 오는 것 같아."

나탈의 목소리에는 씁쓸함과 약간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뒤섞여 있었다.

아크 엔젤 격납고에는 키라가 발견해서 인항해 온 구명선이 놓여 있었다. 마류와 무우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버림 받은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오는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머독이 외부에서 조작하여 문을 열었다.

해치가 스르륵 열리면서 주변에 대기한 병사들이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하로, 하로….」

힘 빠지는 음성과 함께 튀어나온 것은 분홍색으로 칠해진 원형 물체였다. 귀가 날개처럼 퍼득거리며 움직이고, 원 한가운데에 둥근 눈이 두 개 빛나고 있었다. 애완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로봇인 모양이다. 누가 나올지 대기하고 있던 일동은 완전히 긴장이 풀렸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해치 안에서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오자, 키라는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렸다.

가볍게 물결치는 엷은 분홍색에 시선을 빼앗겼다.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카락과 긴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해치에서 나온 사람은 키라와 비슷한 또래의 소녀였다. 매끈하고 흰 피부, 가느다란 팔, 다정하고 애교로 가득한 얼굴에 띤 미소는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소녀가 무중력 공간 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마치 비누 거품처럼 덧없이 약해 보였다.

"어머… 어머나?"

관성으로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녀의 몸을 키라가 손을 내밀어서 붙잡았다.

"고마워요."

소녀가 가까이 다가와 싱긋 웃었다. 봄 하늘처럼 부드러운 푸른 눈동자에 키라는 볼을 붉혔다.

문득 소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키라의 제복에 달린 배지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어머어머?"

그녀는 빙글빙글 돌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여긴 자프트의 함선이 아닌 모양이군요?"

잠시 후에 나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밀지 마, 이 녀석아."

"무슨 소리 안 들리냐?"

사관실 문 앞에는 구경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키라는 맨 앞 줄에서 이리 저리 밀리고 있었다. 톨을 따라서…라기보다는 톨에게 붙잡힌 채로 끌려 와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피는 사이에, 사이와 카즈이, 그리고 토노무라와 파르 하사까지 찾아와서 밀치락 달치락 하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소년들을 나탈이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 보았다.

"너희들은 아직 선적 작업이 남아 있을 텐데?! 당장 작업장으로 돌아가!"

소년들은 잽싸게 달아났다.

실내에는 분홍 머리의 소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키라를 발견하자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키라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복도를 뛰어 나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조용해지자 마류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실례. 그건 그렇고…."

"저는 라크스 클라인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친구인 하로예요."

소녀는 사관들 앞에서 분홍색 로봇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하로가 다시 한 번 「하로, 하로, 라크스.」 라고 힘 빠지는 음성으로 말하자, 무우는 머리를 부여잡았고 나머지 두 사람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클라인이라…, 그러고 보니 플랜트의 최고 평의회 의장 이름이 시겔 클라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무우가 정신을 차리고 그렇게 말하자, 라크스가 기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어머나, 시겔 클라인은 제 아버지세요. 알고 계셨어요?"

순진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놓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건지, 세 사람은 라크스 앞에서 더욱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높으신 분이 어째서 이 곳에 왔죠?"

"네, 전 유니우스 세븐의 추도 위령제를 위해 사전 조사하러 왔어요."

라크스가 여전히 귀여운 목소리로, 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자 마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지구군 전함과 마주쳐 버렸죠. 수색하겠다고 해서 허락했는데, 지구 분들은 저희들의 행선지와 목적이 마음에 안 드셨던 모양이에요. 저희 함선이 소란스러워졌죠."

소녀의 부드러운 눈썹이 슬픈 듯이 약간 찌푸려졌다.

"…전 주위 분들에 의해 구명선을 타게 되었지만…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구군 분들이 진정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무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 우주 구역에서 최근에 파괴된 민간선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다. 그 민간선이 포격 당한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설명이다.

 

 

사관들이 떠난 뒤, 라크스는 벽면 모니터로 다가갔다. 외부 상태가 비춰지고 있었다. 무수한 잔해들이 떠돌아 다니는 가운데 부서지고 황폐해진 대지가 진공의 어둠 속에 드러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하로를 무릎 위에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기도하자, 하로…. 모든 이들의 영혼이 편히 잠들도록…."

부드러운 얼굴에 슬픔이 가득 차고, 건드리면 바로 녹아서 사라질 것 같은 덧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모든 것을─ 자신이 타고 온 함선의 최후도, 앞으로의 자신의 운명도 전부 말 없이 받아들인 듯한 투명한 시선이 긴 속눈썹에 가려졌다.

몇 시간 후, 선적 작업을 끝마친 아크 엔젤이 발진했다. 마지막으로 유니우스 세븐에 다시 한 번 기도를 올린 뒤, 그들은 달을 향해 진로를 돌렸다.

 

 

아스란은 베사리우스 해치 앞에서 부친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 아들을 배웅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패트릭은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아스란, 라크스 양 소식을 들었느냐?"

"라크스 말입니까…? 아뇨."

"추도식을 준비하려고 유니우스 세븐으로 향하던 시찰선의 소식이 끊어졌다."

패트릭 옆에 서 있던 라우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아스란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시찰선에는 라크스가 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녀를 걱정하는 한편, 아스란의 두뇌는 그 정보와 부친의 상관성에 대해 계산했다. 그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이질감을 느끼면서 라우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대장님, 설마 베사리우스로…?"

"이런, 자네는 너무 냉정한 것 아냐? 물론 우리는 그녀를 찾으러 가야지."

"하지만 아직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민간선인데…."

"아니, 이미 탐색하러 보낸 윤 로 부대의 '진'도 소식이 끊겼다."

그 말을 들은 아스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라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유니우스 세븐은 지구의 인력에 이끌려 현재 데브리 벨트 안에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위치지만."

그렇다. 신경에 거슬리는 위치임에 분명하다. 지구와 너무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 연합군이 주위를 배회하다가 애꿎은 민간선을 공격할 리는 없겠지만….

생각에 잠긴 아스란에게 패트릭이 말을 걸었다.

"라크스 양이 너희 약혼자라는 사실을 전 플랜트 시민들이 알고 있다. 그러니 네가 소속한 크루제 부대가 여기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수야 없지 않느냐."

하고 싶은 말이 끝났는지 패트릭은 등을 돌렸다. 그 상태로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겼다.

"그녀는 플랜트의 인기 스타야. 부탁한다. 크루제, 아스란."

부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스란은 가벼운 증오심을 담아서 중얼거렸다.

"…그녀를 구해서 영웅처럼 돌아오라는 뜻인가요?"

"혹은 그 시체를 품에 안고 울면서 돌아오라는 뜻이겠지."

곁에 선 라우가 말하자, 아스란은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때때로 이 상관은 배려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잔인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라우는 그의 시선을 감지하고 가만히 웃었다.

"어쨌든 자라 위원장께서는 자네가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신 모양이야."

 

 

식당에서 소녀들이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려 오자, 키라가 발을 멈추었다.

"싫다고, 싫어!"

"프레이, 왜 그래?!"

프레이와 밀리아리아가 식사가 담긴 쟁반을 앞에 두고 다투고 있었다. 키라가 들어가서 곁에 앉은 카즈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네가 데리고 온 여자 아이 식사 때문에 저래. 밀리아리아가 프레이에게 가져다 주라고 부탁했더니 프레이가 싫다고 우겨서…. 그것 때문에 저러는 거야."

프레이가 외쳤다.

"난 싫어! 코디네이터한테 가는 건 너무 무섭단 말이야…!"

"프레이!"

밀리아리아가 허둥지둥 그녀의 입을 막았따. 프레이도 키라를 보고 자신의 실언을 알아 차린 모양이다.

"아… 무, 물론 키라는 달라. 하지만 그 아이는 자프트 출신이잖아? 코디네이터는 반사 신경이 뛰어나다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책임질 거야? 응?!"

하필 키라에게 동의를 구하려 하다니…. 키라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자, 곁에서 카즈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갑자기 널 공격하지는 않을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프레이는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그 때….

"어머, 누가 누굴 공격해요?"

태연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와 키라는 반사적으로 뒤돌아 보았다.

그 곳에는 분홍색 머리, 긴 치마를 입은 화제의 소녀─ 라크스 클라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다들 꼼빡 없이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어머, 제가 놀라게 해 드렸나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느긋한 표정으로 라크스는 계속 말했다.

"실은 제가 목이 말라서…. 그리고 말씀 드리기 민망하지만 배도 고프거든요. 이 곳이 식당 맞죠? 뭐라도 먹을 수 있으면 고마울 텐데…."

"…자, 잠깐만요!"

겨우 정신을 차린 소년들이 허둥대며 말했다.

"열쇠가 잠겨 있지 않았나요?"

"뭐야! 자프트 아이가 어딜 멋대로 돌아 다니는 거야?!"

"어머나, 멋대로 돌아 다니는 게 아니랍니다. 전 분명히 여쭤 봤거든요? 나가도 괜찮겠냐고…."

순진한 눈을 크게 뜬 라크스에게 당황한 키라가 물었다.

"그래서 나가도 괜찮다고 허락했나요?"

"실은 아무도 대답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세 번이나 여쭤 봤답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고…."

"…그게 바로 멋대로 돌아 다니는 거라고요~."

카즈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라크스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지 미소를 지으며 프레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전 자프트가 아니랍니다. 자프트는 군대 명칭이고 정식으로는…."

"다, 다 같은 소리잖아! 어차피 코디네이터니까!"

"같지 않아요. 분명히 저는 코디네이터입니다만 군인은 아닌 걸요?"

라크스는 귀엽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큰 눈동자로 프레이를 바라 보았다.

"당신도 군인이 아니죠? 그렇다면 저와 똑같은 입장이로군요."

보는 사람을 살살 녹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라크스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따뜻한 공기가 흘렀다. 이 소녀는 왠지 모를 온화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프레이는 내민 손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뭐야. 시, 싫어…! 어째서 내가 너 따위와 악수를 해야 해?!"

그 표정에는 노골적으로 혐오감이 떠올라 있었다. 프레이는 악을 쓰며 외쳤다.

"코디네이터 주제에, 친한 척 하지 마!"

키라가 숨을 죽였다.

결정적인 단절…. 키라도 같은 깊이의 상처를 입었다.

저렇게 사랑스럽고 순진한 소녀를 눈 앞에 두고도 그녀가 코디네이터라는 이유만으로 프레이는 저런 심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서 다가가도 소용 없다. 그들이 코디네이터라는 사실은 변함 없기에…. 키라는 차가운 절망이 가슴에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나저나 보급 문제가 끝나서 한시름 놓았더니, 이번에는 핑크 공주님이라…."

무우가 마류를 쳐다보며 놀리듯이 경례했다.

"함장님, 고민거리가 끊임 없이 발생하는군요."

남의 일처럼 말한다고 마류는 생각했다. 다만 최근에 그녀도 무우의 스타일에 많이 익숙해졌다. 평상시에는 불성실해 보이지만, 일이 터지면 가장 의지가 되는 남자였다. 보급 문제 뿐 아니라, 여태까지 그의 재치에 도움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혹시 저런 능청스러운 태도는 계산된 것이 아닐까. 어깨에 너무 힘을 주고 있는 마류의 긴장을 풀기 위해서. '아니, 저건 성격이 분명해.' 라고 생각하면서, 마류는 입을 열었다.

"그 아이를 이대로 달 본부까지 데려갈 생각은 아니겠죠…?"

"달리 도중에 들를 만한 장소가 있나?"

"하지만 달 본부로 데려가면 그녀는…."

"엄청난 환영 파티가 마련되겠지."

무우가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플랜트 국가 원수의 외동딸이다. 외교 상으로 중요한 교환 조건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가능하다면 민간인 소녀에게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마류가 머뭇거리자 등 뒤에서 나탈이 비웃듯이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들은?"

그녀가 눈으로 가리킨 곳에 부조종석에 앉은 톨이 있었다.

"저렇게 전함을 조종하고 전투를 치른 저들도 아직 민간인이잖아요?"

"버질 소위, 그건…."

"키라 야마토와 저들은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전투에 참가시키면서, 그 소녀만 도와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는 클라인의 딸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민간인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나탈의 말은 당연했다. 마류는 반론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뼛속까지 군인 기질이 배어 있는 그녀는 마류의 의견이 가소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은 함장 체질이 아니라고 마류는 생각했다.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사관실로 끌려 온 라크스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네… 그래요."

키라는 식사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뒤, 무거운 기분을 감추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라크스는 약간 토라진 표정이었다.

"전 저 쪽에서 다른 분들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런 표정조차 사랑스러웠다. 키라는 눈부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여긴 지구군 전함이라서 코디네이터에 대해서… 썩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아마 나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따끔거리는 가슴의 통증을 지우려는 듯이 애써 밝게 말했다.

"지금은 서로 적이잖아요? …그러니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내츄럴을 옹호하는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섞일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생각이 들자 더욱 쓸쓸해져서 키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안타깝네요…."

라크스는 키라를 바라보며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런 표정이 사라지면서 따뜻하게 감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당신은 참 다정하신 분이에요. 고마워요."

"난…."

키라는 흠칫했다. 왠지 죄책감이 들어서 결국 고백해 버렸다.

"나도 코디네이터입니다."

라크스는 눈을 둥글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놀라서 그런 거라고 키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곧 '코디네이터가 어째서 지구군에 있죠?' 라고 묻겠지.

하지만 키라의 예상은 빗나갔다. 라크스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이 다정한 것은 당신이기 때문이잖아요?"

키라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이 아이는 대체 누굴까…?'

"성함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라크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 미소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키라가 잠시 후에 당황해서 대답했다.

"아, 키, 키라… 입니다. 키라 야마토."

"그래요? 고마워요, 키라 님."

그렇게 불린 순간, 자신이 태고의 기사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키라와 라크스가 나간 뒤, 마음이 불편해지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카즈이가 중얼거렸다.

"…프레이, 너 혹시 '블루 코스모스'냐?"

그가 입에 담은 것은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어느 정치 단체의 이름이다. C.E.30년대에 만연한 유전자 변형에 반발하면서 발생한 이 단체는 "인류여,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고 주장하면서 각종 시위를 벌였다. 그 중에는 테러나 해적 행위로까지 발전하는 위험 분파가 존재했다. 코디네이터 박해 때 선두에 서서 지휘한 자들도 바로 이 '블루 코스모스'였다.

"아냐!"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외친 프레이는 바로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병이 아닌데도 유전자를 조작하는 사람은 역시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 잘못된 존재야."

그녀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너희들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카즈이는 두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맞은 편에 앉은 밀리아리아는 뭔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표정이다.

솔직히 카즈이의 마음 속에는 프레이의 의견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뭐랄까… 잊고 있었지만…."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키라도 코디네이터잖아. 그런 모빌 슈트를 아무렇지 않게 조종하면서 싸울 수 있는 것을 보면…."

물론 키라는 소중한 친구다. 자신들을 위해서 싸워 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그가 없었다면 자신은 진의 공격으로 즉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 자신과 비교하게 된다. 찬드라 하사를 돕기 위해 작업선을 타는 것이 고작인 초라한 자기 자신과.

키라에게 대항심이나 질투심을 느껴도 부질 없는 일이다. 애당초 같은 토대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 감히 그를 이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키라는 코디네이터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카즈이는 자신의 내면이 조금씩 썩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키라가 라크스의 방을 나오자, 마침 맞은편 복도에서 사이가 걸어 오고 있었다. 손을 흔들었기 때문에 키라가 멈추었다. 사이가 다가오며 어색한 듯이 말했다.

"…밀리아리아에게 다 들었어."

"응…."

"너무 신경 쓰지 마…. 물론 쉽지 않겠지만…."

둘은 나란히 걸어갔다.

"나중에 프레이를 잘 타이를게."

요즘 사이는 프레이의 연인이라기보다는 마치 보호자 같았다. 러브 레터에 대해서 듣기 전까지 이렇게 사이가 좋은지 눈치 채지 못했었다. 아니면 다들 모르고 있었을 뿐, 예전부터 사귀고 있었을까?

기분이 가라앉은 키라의 귓가에 어디선가 음악─노래…가 들려 와 뒤돌아 보았다.

무척 투명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가슴에 스며 들어오며 뒤엉킨 응어리를 풀어 주는 듯한 그런 음성이었다. 라크스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키라는 몰랐지만 플랜트의 주민이라면 그녀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노래는 언제나 모든 플랜트 인기 순위의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거리의 모니터마다 그녀의 프로모션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패트릭 자라가 말한 대로 라크스는 모든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 스타였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목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 준다.

차가웠던 키라의 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스며 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다…."

사이도 발을 멈추고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잠시 적군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역시 저 목소리도 유전자 조작 덕분이겠지?"

온화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통신석에 앉은 파르 하사의 눈 앞에서 계기판이 기묘하게 작동했다. 그는 손에 쥔 음료수를 내던지고 계기판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함장님!"

그 목소리에 마류와 나탈이 뒤돌아 보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긴장한 그들에게 파르 하사가 이렇게 외쳤다.

"토, 통신입니다! 지구군 제８함대의 암호 펄스입니다!"

"뭐라고?!"

"쫓아갈 수 있겠나?!"

"해 보겠습니다!"

둘 다 파르 하사가 있는 자리로 달려와서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잡음이 섞여 있지만 독특한 파도 무늬가 계기판에 그려졌다.

"해석하겠습니다!"

파르 하사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잠시 후에 스피커로부터 잡음과 함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쪽은… 제８함대… 몽고메리, 아…젤, 응답….」

함교에 기쁜 환호성이 터졌다.

"할버튼 준장님의 부대야!"

"위치는?!"

"잠시 기다리십시오…. 아직 거리가 멀어서…."

"합류할 수 있다면!"

토노무라와 노이만이 서로 손을 마주쳤다.

"이야, 이제 겨우 마음이 놓이는구나!"

지휘자를 잃고 자기들끼리 힘을 합쳐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도망쳐 다니면서 여기까지 온 그들에게 겨우 작은 희망의 빛이 보였다. 그 빛은 함내를 구석까지 비춰 주는 듯 했다. 선견대 파견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로 여태까지 긴장해 있던 승무원들 표정에 미소가 돌아오고, 피난민들 사이에서도 안정된 분위기가 싹텄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지상으로 내려가면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과도 연락을 취할 수 있으리라. 그런 낙관적인 대화가 오가는 식당에 사이가 새로운 소식을 전달했다.

"아빠가?!"

프레이가 활짝 웃었다.

"그래. 선견대와 함께 오고 있대. 네가 여기 있는지 당연히 모르셨겠지만 우리도 승무원 목록을 전송했거든…."

사이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자신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희망의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함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라크스는 노래를 멈추고 빙글빙글 굴러가는 하로를 끌어 안았다. 그녀는 여태까지 내츄럴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전쟁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상과 체험은 늘 다르다. 그녀는 천천히 하로에게 말을 걸었다.

"퀴즈를 하나 내 줄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요?"

'어디로 가는 걸까…?'

그 대답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함교에 선견대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본 함대의 지정 집결지 도착 시각은 예정대로다. 합류 후 아크 엔젤은 본 함의 지휘 하에 놓이며, 달의 본부대 합류 지점으로 향할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무사히 도착하길 바란다.」

호위함 몽고메리의 코프만 함장이 침착하게 말했다. 마류는 그런 침착함이 고마웠다. 다시 조직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이토록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화면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군복이 아니라 정장 차림의 풍채 좋은 중년 남자였다. 그가 이름을 밝혔다.

「대서양 연방 사무차관 조지 알스터입니다. 먼저 민간인 구조에 힘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류는 속으로 끄덕였다. 프레이의 부친에 대해 사이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부 주요 인물의 딸을 보호한 것이 앞으로의 평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다. 키라 덕분이다.

하지만 알스터가 이렇게 말했을 때 마류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승무원 명단 중에 내 딸 프레이 알스터가 있던데, 가능하다면 얼굴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아크 엔젤 승무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군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부모로서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곁에서 코프만 함장이 난처한 듯이 「사무차관님, 합류하면 곧 만나 뵐 수 있습니다.」 라며 만류했다. 저 사람은 여태까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의견을 억지로 밀고 나갔을 것임이 분명했다.

"프레이의 아버지는 저런 사람입니다."

통신석에 앉은 사이가 쓴 웃음을 지었다.

어느 새 합류 시간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 아크 엔젤보다 먼저 선견대를 포착한 전함이 있었다.

라크스 클라인 탐색이라는 임무를 띤 베사리우스다.

"지구군 함대가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지…?"

아데스가 의아하게 말하자, 레이더 패널을 들여다 보던 라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리 달린 군함이 아르테미스로부터 달을 향한다면 어느 길을 택할까…?"

다리 달린 군함이란,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동물의 앞다리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아크 엔젤의 양현 모양 때문에 그들이 새 전함을 일컫는 용어다.

"보급… 혹은 마중 나온 군함일까요…?"

"라코니와 포르토 부대 합류가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다. 만일 저것이 다리 달린 군함으로 보급 물자를 운반하고 있다면…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지."

"공격하시려고요? 하지만 저희들은…."

아데스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라우의 안색을 살폈다. 라우는 평상시처럼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우린 군인이야. 아무리 라크스 양 수색이라는 임무가 막중해도 단 한 명의 소녀를 위해서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난 후세에 역사가들의 비웃음을 사고 싶지 않아."

 

 

"레이더에 세 척의 전함 포착! 호위선 몽고메리, 버나드, 로우입니다!"

아크 엔젤 승무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레이더 패널을 지켜 보던 파르 하사가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노이즈가 발생했는지 화면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계기판을 조절해도 화면은 계속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린 마류가 창백해지는 파르 하사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바꾸었다.

"재머입니다! 이 근방 일대에 전파 간섭을 받고 있습니다!"

파르 하사의 비명 섞인 목소리에 방금 전까지 흥분했던 함교는 찬 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잠잠해졌다. 그게 무슨 뜻인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선견대는 적에게 발각된 것이다.

 

 

뒤늦게 적함을 발견한 몽고메리의 통신 담당이 외쳤다.

"열원 접근! 모빌 슈트 4기! 진이 3기…."

그리고 나머지 1기는….

"이지스! X303=이지스입니다!"

경악한 담당자의 보고에 코프만 함장이 한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는 신음하듯이 명령했다.

"아크 엔젤로 반전 이탈을 타전! 모빌 아머 발진을 서둘러라!"

"뭐, 뭐라고?! 합류를 못하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옆에서 알스터가 항의하자, 코프만이 소리 질렀다.

"아크 엔젤이 격추라도 당하면 어쩔 겁니까!?"

한편 아크 엔젤도 그 사실을 확인했다.

"이지스라고?!"

마류는 눈을 감았다. 꽉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지난 번 나스카 급이란 말이지?!"

"몽고메리로부터 통신문 도착! '집결 중지, 귀함은 곧바로 반전 이탈하라' 입니다!"

"하지만 저 군함에는…!"

무의식 중에 사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프레이의 아버지가 탄 군함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마류가 마음을 정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지금부터 반전해 봤자 도망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전함 제１전투 태세 준비! 아크 엔젤은 선견대를 엄호하러 간다!"

 

 

아크 엔젤 내에 경보가 울려 퍼졌다. 방을 뛰쳐 나온 키라가 파일럿 탈의실로 향했다. 마침 라크스의 방을 지나가고 있을 때, 철컥 하고 문이 열렸다.

"또?!"

저 놈의 열쇠는 도대체….

라크스가 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커다란 눈으로 키라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어요…."

"곧 전투가 벌어질 테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가 있어요."

"전투…? 어머, 싸우시는 거예요?"

"그래요. 벌써 시작했을지도 몰라요."

"…키라 님도 싸우시는 건가요?"

맑고 엷은 푸른 눈동자가 쳐다보자 키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여하튼 이제 방에서 나오지 마세요. 알았죠?"

애써 다정하게 말하면서 라크스를 방으로 밀어 넣고 다시 문을 잠갔다. 그리고 다시 서둘러 뛰어 가려는데 누군가 강한 힘으로 팔을 붙잡았다.

"키라!"

불안한 표정의 프레이였다.

"전투가 벌어지다니, 무슨 소리야? 아빠가 탄 함선은 어디 있어?!"

아빠의 함선?

사정을 모르는 키라는 내심 당황스러우면서도 예전에 동경하던 소녀에게 팔을 붙잡혔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괘, 괜찮겠지? 아빠가 탄 함선이 공격을 당하진 않겠지? 응?"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 키라는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허둥지둥 입에 담았다.

"프레이, 괜찮아. 우리들도 그 쪽으로 갈 거야."

키라는 위로하듯이 미소 지으며 힘껏 쥐고 있는 프레이의 손가락을 풀어 냈다. 프레이는 계속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달려 가는 키라를 말 없이 배웅했다.

파일럿 슈트로 갈아 입고 격납고로 뛰어 가자, 무우가 탄 제로가 이미 발진해 있었다.

"왜 그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머독의 질타에 대답하면서 스트라이크의 조종석에 올라 타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동안, 밀리아리아가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

「적은 나스카 급에 진이 3기, 그리고 이지스가 왔어! 조심해!」

이지스라는 말에 키라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그 사이에 사이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키라, 선견대에는 프레이의 아버지가 타고 계셔. 부탁한다!」

'그랬구나.'

어깨를 누르는 중압감을 느끼며 키라는 입술을 꽉 물었다.

"…알았어."

짧게 대답한 뒤 그는 스트라이크를 사출 장치로 이동시켰다.

 

 

「아스란! 어디 네 성능을 한 번 보여 줘!」

앞서 가는 진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오자, 아스란은 "그래." 라고 짧게 대답했다.

사실은 라크스의 생사를 한 시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키라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을 떨치고 고개를 들어서 앞을 바라보았다.

적함으로부터 뫼비우스가 발진하여 접근하고 있다. 지구 연합군의 주력 모빌 아머다. 이지스는 발사된 미사일을 가볍게 피하면서 차례대로 격추시켰다. 들어 올린 라이플로 빔을 발사하여 3기 편성으로 돌입한 뫼비우스를 모조리 쏘아 떨어뜨렸다. 기동 성능의 압도적인 차이였다.

이지스는 그대로 적함을 향해 순식간에 접근하고는 기관부에 빔을 세 발 연속해서 명중시켰다. 연쇄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 전함은 기관부를 절단한 뒤 전선에서 이탈했다.

"호위함 버나드, 응답하지 않습니다! X303=이지스, 로우로 향하고 있습니다!"

몽고메리의 함교에서 전황을 전달 받은 알스터 사무차관이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탈취된 아군기의 공격이라고…? 이건 말도 안 돼!"

진이 몽고메리를 향해 날아 왔다. 뫼비우스가 접근을 막으려 했지만 차례로 격추되고 말았다. 점점 눈 앞으로 다가오는 적기를 알스터는 믿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 옆쪽에서 발사된 빔이 진을 명중시켰다.

함교 정면에서 진이 불길에 휩싸였다. 빔이 날아 온 방향에는 하얗게 빛나는 아크 엔젤이 있었다.

"아크 엔젤…?!"

"와 줬구나!"

구조된 줄 알고 기뻐하는 알스터 옆에서 코프만 함장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그는 주먹으로 팔걸이를 힘껏 내리쳤다.

"바보 같으니!!"

 

 

이지스는 모빌 아머 형태로 변환하여 갈고리 부분을 펼쳤다. 그 중심에 580mm 복열 위상 에너지포 '스퀼라'의 포구가 드러났다. 포구로부터 눈부신 에너지가 발사되자, 로우의 함체가 순식간에 뚫렸다. 전함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스퀼라의 가공할 위력을 목격한 키라는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똑바로 전진했다. 이지스도 접근하는 스트라이크를 눈치 챘는지 곧바로 모빌 슈트 형태로 돌아왔다. 서로의 라이플로부터 빔이 발사되었다.

제로는 진 1기를 격추시킨 뒤 다른 기체에 포착되었다. 적기가 가까이 다가오자, 무우는 재빨리 건 배럴을 전개하여 공격을 가했다. 진이 마지못해 회항했다. 하지만 후퇴하면서 쏜 한 발이 제로의 기체에 명중했다.

"쳇! 내 꼴이 이게 뭐람!"

무우는 이를 갈았다.

 

 

"고트프리트 1번 조준 완료! 발사!"

"제로, 귀함합니다! 기체에 손상!"

아크 엔젤 함교에서는 여기저기서 분주히 지시와 보고가 오갔으며, 모니터에는 쉴 새 없이 변하는 전황이 비춰지고 있었다. 문이 조용히 열렸지만 다들 경황이 없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베사리우스로부터 미사일! 로우를 향하고 있습니다!"

"…제길!"

함교로 들어 온 사람은 프레이였다. 상황을 알고 싶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크린에 전개되는 전투 현장을 보고 창백하게 질려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녀의 모습을 가장 먼저 프레이가 발견하고 소리쳤다.

"프레이?!"

프레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면서 앞으로 뛰어 나갔다.

"아빠… 아빠가 탄 함선은 어느 거야…?"

"지금은 전투 중이야! 어서 나가지 못해?!"

마류가 단호히 말하자, 사이가 CIC에서 뛰어 나와서 프레이의 어깨를 끌어 안으며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프레이는 격렬하게 몸부림 쳤다.

"놔! 아빠는 어디 있어?! 어떻게 된 거야?"

스크린 속에서 미사일이 로우에 명중하자, 함선은 폭발했다. 정면으로 바라보던 프레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 때 통신과 함께 모니터에 코프만 함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크 엔젤! 이건 명령이다! 지금 당장 이 곳을 이탈하라!」

"하지만…!"

반론하려던 마류의 목소리는 뒤쪽에서 들려 온 비명에 가려졌다.

"아빠…!!"

코프만의 등 뒤로 알스터 사무차관의 모습이 보였다. 무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프레이가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알스터는 딸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이성을 잃고 코프만에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안 돼! 여기서 아크 엔젤이 물러나면 우린 어떻게 되나!」

「자네! 사무차관님을 구명선으로 안내해 드려라. 여하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곳을 떠나! 알았나?」

코프만은 마류를 향해 명령한 뒤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아빠…, 아빠…!!"

"프레이! 자, 어서 가자! 여기 있으면 안 돼!"

사이는 비명을 멈추지 않는 프레이를 거의 잡아 끌다시피 하며 함교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진 2기, 몽고메리로 향합니다!"

"남은 모빌 아머는 1기!"

그들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힐 때까지 절망적인 전황을 고하는 승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통로에 주저앉은 프레이를 사이가 끌어 안았다. 그의 귓가에 프레이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라는…?"

"뭐?"

사이가 되물었다. 프레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크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키라는? 그 아인 뭐 하고 있는 거야?"

"열심히 싸우고 있어. 하지만… 저 쪽에도 이지스가 있어서…"

"키라가 괜찮다고 말했단 말이야!"

프레이가 있는 힘껏 외쳤다.

"키라도 그 쪽으로 갈 거라고 말했어!"

사이는 프레이를 진정시키면서 일단 거주 구역으로 데려가려 했다. "괜찮을 거야." 라고 되풀이하면서. 그 말이 일시적인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 달리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통로 너머에서 가는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현재 상황과 동떨어진 아름답고 온화한 음색, 다정한 멜로디가 둘의 귀를 적셨다. 갇혀 있는 코디네이터 소녀가 홀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평온한 음색이 한껏 신경이 곤두선 프레이를 자극했다. 프레이는 갑자기 사이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프레이?!"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라크스는 노래를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 보았다.

프레이는 증오가 가득 담긴 얼굴로 라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나드가 폭발했다. 나머지는 몽고메리 한 척 뿐이다. 마지막 뫼비우스가 진에 의해 격파되었다. 자신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탈이 외쳤다.

"로엔그린 발사 준비! 진이 접근 중이다! 스트라이크는 뭘 하고 있지?"

귀함한 무우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안 돼! 이탈하지 않으면 우리도 당한다!」

"하지만…!"

마류는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눈 앞에는 몽고메리가 공격 당하고 있고, 방금 전 프레이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스트라이크는 이지스를 상대하는 것만도 벅차서 엄호를 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진이 바주카 포를 들어 발사했다. 포탄이 몽고메리의 주포를 산산 조각 냈다.

이 때, 아크 엔젤의 함교 문이 다시 열렸다. 뒤돌아 본 카즈이는 자신이 목격한 광경을 이해할 수 없어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의 반응을 보고 다른 승무원들도 돌아 보았다.

프레이가 라크스를 잡아 끌면서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에 눈동자만이 병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아일 죽일 거야…."

갈라진 목소리로 프레이가 말했다. 함교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얼어 붙었다.

"아빠가 탄 함선을 공격하면 이 아이를 죽이겠다고…! 어서 저 녀석들에게 말해!"

소녀가 절규했다. 뒤쫓아 온 사이가 할 말을 잃고 멈추어 섰다.

"그렇게 말하란 말이야!"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스크린 안에서 베사리우스의 주포가 불을 뿜었다. 두 줄기 빛이 우주 공간을 가르고 날아갔다. 목표는 몽고메리. 빔이 함체에 흡수되고…. 다음 순간 소름 끼치는 폭발이 일어났다.

구명선이 발사될 틈조차 없었다. 새하얗게 변했던 스크린이 차츰 조각조각으로 변한 전함─예전에 전함이었던 잔재들을 선명하게 비추었다.

프레이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힘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런 그녀를 사이가 끌어 안았다.

"아… 아앗… 아아아…!!"

신음 소리가 이어지며 망가진 장난감처럼 손발이 어색하게 움직인다. 그런 프레이의 모습을 라크스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소녀들을 감싸고 있던 껍데기가 부서지고 세상이 흘러 들어왔다. 마류는 측은한 표정으로 프레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탈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방금 전에 몽고메리를 잔해로 만든 진과 베사리우스가 새로운 먹이를 찾아 진로를 바꾸었다.

"함장님!"

나탈이 외쳤다. 하지만 마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카즈이의 인터컴을 빼앗듯이 낚아 챘다.

"자프트 군에 고한다!"

그녀는 전체 주파를 통해 방송했다.

"버질 소위?!"

정신을 차린 마류가 만류했지만, 나탈은 무시했다.

"여기는 지구 연합 소속함 아크 엔젤! 본 함은 현재 플랜트 최고 평의회 시겔 클라인 의장의 영양, 라크스 클라인을 보호하고 있다!"

 

 

"라크스 님?!"

베사리우스 함교에서 아데스가 외쳤다. 화면에 보이는 지구군 여사관 등 뒤로 작게 라크스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방송은 계속되었다.

「우연히 구명선을 발견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보호하였으나, 이후 본 함에 대해 공격이 가해질 경우, 그것은 귀함의 라크스 클라인 양에 대한 책임 포기라고 판단하고─」

그녀는 가차 없이 말했다.

「그 건에 대해 본 함이 자유 의지로 처리할 것을 고한다!」

즉, 프레이가 말한 것과 똑같은 일을 하겠다는 뜻이다.

'이 쪽을 쏘면 라크스를 죽인다.'

라우가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참으로 꼴사납군. 엄호하러 와서 불리해지니까 눈에 들어오는 게 없나 보지?"

"대장님…."

아데스가 눈으로 묻자, 라우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전군 공격을 중지하라."

 

 

키라와 아스란도 전투를 중지하고 이 무전을 듣고 있었다. 너무나 노골적인 내용에 키라는 입을 열지 못했다.

「비겁한…!」

아스란이 신음하듯 말했다.

「구조한 민간인을 인질로 삼다니…. 키라, 그런 비겁자들과 함께 싸우는 게 너의 정의냐?!」

키라는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진이 물러갔다. 이지스 쪽에도 귀함 명령이 내려졌다. 아스란은 마지막으로 분개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그녀를 되찾을 거다! 반드시!」

키라는 겸연쩍은 심정으로 이지스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나탈은 인터컴을 벗고, 방금 전부터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노려보는 상관을 돌아 보았다.

"스트라이크와 아크 엔젤을 이 곳에서 격파 당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류는 차갑게 대답했다.

"…나도 알아."

그녀는 다시 모니터로 가서 사라지는 모빌 슈트와 베사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나탈의 판단은 현 시점에서 최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감정이 따라갈 수 없었다. 도굴 다음에는 죄 없는 소녀를 방패 삼아 공격을 저지하다니.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아 남아야 하는 걸까?

물론 그렇다. 임무는 물론이거니와 마류의 양 어깨에는 승무원과 피난민 전체의 목숨이 달려 있다. 그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시 돋힌 말투가 튀어 나왔다.

"…코 앞에 닥친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의지할 만한 선견대는 전멸했고, 적함은 물러갔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 다시 공격을 시작할지 모른다.

"이 틈을 이용해서 태세를 갖출 수도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어디까지나 냉정하고 합리적인 나탈의 대답에 마류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고 있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함으로 되돌아 온 키라는 무우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뭐긴 뭐겠어. 너도 들었잖아? 그게 다야."

무우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키라는 계속 따라가며 따졌다.

"그 소녀를 인질로 삼아서 협박하고….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게 지구군의 방식입니까?"

무우가 정면으로 돌아보았다. 험상궂은 표정이었다.

"이런 한심한 짓밖에 못하는 것도 다 우리가 약해서 그래."

키라는 움찔했다. 그는 언제나 듣고 싶지 않은 말만 한다. 즉, 진실 말이다.

무우는 키라의 어깨를 밀쳐 내면서 중얼거렸다.

"너나 나나, 함장이나 부함장을 비난할 권리는 없어…."

왠지 분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키라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키라는 느릿느릿 군복으로 갈아 입고 거주 구역으로 돌아갔다. 통로 너머에서 천을 찢는 듯한 가는 비명이 들려 오자, 키라는 발을 멈추었다.

"싫어… 싫단 말이야! 아빠… 아빠!"

"프레이…."

사이의 난처해 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키라는 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굴러 나온 음료수 통에 걸려 자동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고 있었다.

의무실 안에는 평정을 잃고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프레이와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사이와 밀리아리아가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울부짖는 프레이의 모습이 문이 열릴 때마다 키라의 시야에 들어왔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야!"

키라가 들어가자, 문이 열린 채 고정되었다. 밀리아리아가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 보았다.

프레이는 흐트러진 옷차림에 머리카락도 뒤엉켜 있었다. 평상시의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변해 버린 모습으로 사이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아빠의 함선….

키라는 지킬 수 없었다.

"프레이…."

머뭇거리며 말을 건 키라를 프레이가 눈을 부릅뜨고 뒤돌아 보았다.

"이 거짓말쟁이!"

프레이의 광기 어린 눈동자에 키라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괜찮다고 말했잖아! 네가 가니까 걱정할 거 없다고 말했으면서! …어째서 아빠가 탄 함선을 지키지 못한 거야?! 어째서 적들을 그냥 보냈냐고!"

"프레이! 키라가 얼마나 힘들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프레이를 사이가 애써 설특해 보지만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듯하다. 그녀는 키라에게 따지고 들었다.

"너, 자신이 코디네이터라고 적당히 싸우는 척 하면서 돌아온 거 아니니?"

그 말이 키라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프레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에 무슨 힘이 있는지 힘껏 키라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아빠를 살려 내…!"

"프레이!"

사이가 둘 사이에 끼어 들어 프레이의 몸을 끌어 안았다. 프레이가 울면서 몸부림 쳤다.

"아빠를 살려 내…. 살려 내, 살려 내란 말이야!!"

키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치더니 문에서 나오자마자 달려 갔다. 밀리아리아가 그를 불렀지만 그냥 무작정 달렸다.

'코디네이터라서….'

코디네이터라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이번에는 코디네이터라서 안 된다는 것인가?

키라의 머리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스쳐 지나 가던 톨이 말을 걸면서 멈추어 선 것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이 곳에는 아무도 없다. 키라의 심정을 진정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서, 친구들을 위해, 아스란을 적으로 만들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싸웠는데…. 자신들은 안전한 장소에 숨어 있으면서 나보고만 혼자 나가 싸우라는 말인가?'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서 다르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프레이가 말한 대로잖아?'

정말로 필사적으로 싸웠나? 은근히 망설이지 않았나? 아스란을 죽이기 싫으니까, 동포의 피로 손을 더럽히기 싫으니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싸우지 못한 게 아닐까? 그 때문에 프레이의 아버지를 지킬 수 없었다면…. 자신이 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이 아닐까…?

키라는 인적 드문 전망실로 들어가 마구 소리 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았다. 유리에 머리를 부딪치자 눈물 방울이 무중력 공간에 둥둥 떠 다닌다.

"무슨 일 있었나요?"

갑자기 옆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란 키라가 뒤돌아 보았다.

라크스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깜박거리며 하얀 손가락이 키라의 얼굴로 다가왔다.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키라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라크스의 손을 밀어 내고 눈물을 닦았다.

…이 소녀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난다.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산책 나왔어요."

방긋 웃으며 라크스가 대답했다.

"멋대로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스파이 취급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우리 분홍이도 산책을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귀를 펄럭거리며 허공에 떠 있는 하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열쇠가 잠겨 있어도 꼭 열고야 만답니다."

키라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제 겨우 잠긴 문이 열리는 비밀이 풀렸다.

라크스는 가볍게 바닥을 차고 허공에 떠올랐다. 함미부에 있는 전망실은 무중력 상태였다.

"…싸움은 끝났나요?"

"아, 네…."

전투가 어떤 식으로 끝났는지 생각난 키라는 말 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 덕분에."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시죠?"

키라는 눈을 들었다. 라크스는 모든 것을 감싸는 따뜻한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누군가에게 털어 놓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자신도 모르게 키라의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난… 실은 싸우고 싶지 않았어요…."

라크스는 말 없이 듣고 있었다.

"나도… 코디네이터고… 아스란은… 무척 친한 친구였는데…."

"아스란?"

키라는 어느 새 소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있었다. 이지스를 타고 있는 적군 파일럿이 어린 시절의 친구라는 것, 자신은 군인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소중한 친구들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키라는 가슴 속에 응어리 진 감정 모두를 낯선 소녀에게 털어 놓았다. 그녀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어느 새 라크스는 키라 곁에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서 있었다. 부드러운 작은 손이 키라의 손을 잡았다.

"그랬군요…."

다정한 한 마디에 키라의 마음 속에서 얼어 붙었던 감정이 녹아 내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키라는 당황했다. 자신이 이토록 누군가의 이해를 필요로 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스란도 당신도 착한 사람인걸요…. 너무 슬픈 이야기예요…."

라크스의 뜻밖의 말에 허를 찔린 키라가 눈을 크게 떴다.

"아스란을 알고 있나요?"

"아스란 자라는 저랑 언젠가 결혼하실 분이에요."

당연한 사실처럼 라크스가 말하며 미소 지었다.

"다정하지만 말수가 적은 사람이죠…. 하지만 이 하로를 선물해 주었어요."

「하로, 하로.」 라고 중얼거리며 떠 다니는 분홍색 로봇을 라크스는 웃으면서 끌어 안았다.

"제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라고 말했더니, 그 다음에도 또 하로를…."

놀라서 뻣뻣하게 서 있던 키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들었다는 말 한 마디에 몇 개씩 하로를 만들어서 가져가는 아스란과 그것을 기쁘게 받아 들이는 라크스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라크스의 집에 가면 멍청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로봇들이 「하로, 하로」 라고 대합창을 하면서 날아 다닐 게 분명하다.

"그렇구나…. 아스란은 여전하군요. 내 토리도 그가 만들어 줬어요."

"어머, 그래요?"

라크스는 눈을 빛냈다.

"네, 다음에 보여 드릴게요."

"기뻐요."

처음에는 놀랐지만, 지금은 공통된 친구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의 거리가 무척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더욱 키라는 가슴이 아팠다.

이 소녀를, 이런 식으로 인질로 삼아서 자신들이 살아 남아야 하다니….

하지만 라크스는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다.

"두 번이 싸우지 않으면 좋을 텐데…."

자신을 배려해 주는 소녀의 다정함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다.

"…안 돼."

키라의 중얼거림에 라크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녀를 아스란에게 되돌려 주어야 해.'

키라는 라크스의 손을 잡았다.

"아무 말 하지 말고 날 따라 오세요. 조용히…."

라크스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저 키라를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망실에서 나온 두 사람의 앞을 토르가 가로막고 섰다.

"…너 지금 뭘 하려는 거야?"

토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키라는 고통스러운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냥 보내 줘, 토르…. 난 이런 게 싫다고!"

토르는 잠시 말 없이 키라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피식 웃었다.

"하긴, 여자 아이를 인질 삼아서 도망치는 건 나쁜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키라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토르가 머리를 가볍게 쳤다.

"도와 줄게."

토르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 뒤 앞장 섰다.

토르가 먼저 가서 다른 승무원들의 눈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찾은 덕분에 세 사람 모두 무사히 파일럿 탈의실에 도달했다. 입구를 토르에게 지키게 하고 키라는 라크스가 입을 우주 작업복을 꺼냈다.

"이걸 입으세요…."

하지만 라크스의 긴 치마를 보니 치마 위에 입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라크스는 키라의 시선을 눈치 채고 생긋 웃었다. 어깨 끈을 풀자 치마가 발 밑으로 떨어졌다. 윗옷 앞자락이 미니 스커트 길이로 남아 있었지만 키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치마를 말아 넣은 작업복 배 부분이 앞으로 튀어 나오자, 토르가 농담 삼아 "지금 몇 개월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을 보고, 곧 잊으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정비가 끝난 격납고에는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키라와 라크스가 스트라이크 조종석으로 들어가자, 토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키라의 무릎 위에 앉은 라크스가 그를 향해서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요."

"글쎄요…. 과연 그럴 날이 올까요?"

토르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을 했는지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키라…."

"응?"

"…너, 돌아올 거지?"

OS를 기동시키던 키라가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서로 엉켰다.

그 때였다.

"야!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아래쪽에서 머독의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토르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심각하게 다시 물었다.

"넌 반드시 우리들 곁으로 돌아올 거야, 그렇지?"

해치를 닫기 직전에 키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째서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까. 키라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눈 앞에 있는데….

"정말이야! 약속했다!"

닫힌 조종석 안까지 토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이렌이 울리고 여기저기서 정비사들이 달려 왔다.

스트라이크가 걷기 시작했다. 키라는 대외 스피커를 통해 말했다.

"해치를 개방합니다! 대피해 주세요!"

사출 장치를 향해서 에일 스트라이커를 탑재했다. 스트라이크의 뒷모습을 향해 토르가 계속해서 외쳤다.

"반드시 돌아와, 키라! 난 널 믿고 있어!"

느닷없이 울려 퍼진 경고음에 함교에 있던 마류 일행은 좌석에서 뛰어 오를 만큼 놀랐다.

"뭐야?!"

"뭐? 스트라이크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키라 야마토!"

격납고 상황을 모니터로 지켜 본 나탈이 외쳤다. 무우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꼬마가 아가씨를 데리고 나간 모양이야! 아차, 벌써 공기 차단 문을 열어 버렸군!」

비록 이름을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나탈은 '아가씨'의 정체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뭐라고?!"

요란스러운 함교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던 마류는, 늘 이성적인 나탈이 흥분한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제법이군….'

 

 

베사리우스 안 자신의 방에 있던 라우는 호출음에 고개를 들었다. 가모프가 도착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욕실에서 나와 통신을 받았다.

「대장님! 다리 달린 군함으로부터 모빌 슈트가 발진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바로 가마."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적당히 닦은 뒤 수건을 내던졌다. 평상시대로 마스크를 쓰기 전에 탁자 위에 놓인 병에서 알약을 몇 개 꺼내 꿀꺽 삼켰다. 그는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가만히 손바닥을 응시한 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마스크를 썼다.

 

 

아크 엔젤에서 벗어난 키라는 전체 주파수를 이용해서 선언했다.

"여기는 지구 연합군 아크 엔젤 소속 모빌 슈트 스트라이크! 라크스 클라인 양을 동행하고 있다. 인도를 제안한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대로 말했다.

"단, 나스카 급은 정지. 이지스 파일럿이 단독으로 찾아 오는 것이 조건이다! 이 조건을 어기는 경우…."

여기까지는 술술 나왔지만 키라는 뒷부분에서 약간 머뭇거렸다.

"…그녀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라크스는 그 말을 듣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평상시와 똑같은 온화한 표정으로 키라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키라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임을 믿고 있었다. 그것은 소녀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성격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아니 틀림없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키라는 생각했다.

 

 

"다리 달린 군함이 또 무슨 속셈이지?!"

베사리우스 함교에서 아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장님! 절 보내 주십시오!」

모빌 슈트 격납고에서 통신이 들어오자, 아데스와 라우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스란이다.

"적의 진의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정말로 라크스 님이 타고 계신지 여부조차…."

「대장님!」

라우는 모니터를 통해 아스란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보고 미소 지었다.

"…알았다.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통신이 끊기자, 아데스가 질문했다.

"괜찮겠습니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상대 측 파일럿도 아직 어린 모양이더군."

라우는 씩 웃었다.

"아데스, 전함을 멈추고 내 시그를 준비시키게."

 

 

"함장님! 저건 이탈 행위입니다. 어서 공격을!"

나탈이 소리 질렀다. 그러자 모니터를 통해 무우가 가볍게 말했다.

「그랬다가는 아마도 이번엔 스트라이크가 우릴 공격할걸?」

나탈이 입을 다물었다. 규율에 충실한 군인인 그녀는 이러한 돌발 사태에 대처할 유연성이 없었다. 무우가 히죽거리며 윙크한 뒤, 통신을 끊었다.

마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주위를 의식하고 입가에 힘을 주었다. 기뻐해서는 안 된다. 자신은 함장이기에 이러한 이탈 행위를 허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속으로 키라의 행동에 통쾌함을 느끼고 있더라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리고 이성을 잃고 허둥대는 나탈을 볼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그 소년에게 입맞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스카 급 엔진 정지!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파르 하사의 목소리에 마류가 정신을 차렸다.

"이지스, 접근 중!"

과연 키라가 생각한 대로 모든 것이 잘 진행될까…?

 

 

아스란은 스트라이크 앞에서 분사기를 제어하고 이지스를 정지시켰다.

「아스란 자라?」

너무 긴장한 탓인지 쉰 목소리로 키라가 물었다.

"그렇다."

아스란도 마찬가지로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종석을 열어라!」

아스란은 주저하지 않고 해치를 열었다. 스트라이크의 빔 라이플이 위협하듯이 아스란 쪽을 조준하고 있다. 만일 발사된다면 그의 육체는 순식간에 산산 조각 날 것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키라가 어떤 계략을 꾸민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렇기에 라우에게 발진을 요청할 수 있었다.

곧이어 스트라이크의 해치가 열렸다. 조종석 내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아스란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켜 둔 통신기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 왔다.

「말하세요.」

라는 키라의 목소리에,

「네?」

라는 소녀의 작은 대답이 들렸다.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정말로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야죠.」

「아, 그렇네요.」

키라의 무릎 위에 앉은 인물이 이 쪽을 향해 손을 하늘하늘 흔들어 보였다.

「아스란,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헬멧의 바이저가 빛을 반사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틀림 없는 라크스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친근한 둘의 대화에 왠지 기분이 상한 아스란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확인했다."

「그럼 그녀를 데려가.」

아스란은 해치 위로 나와 몸을 고정시켰다. 그것을 본 키라가 라크스의 등을 밀었다. 진공의 바다를 헤엄치듯이 흘러 온 소녀를 아스란이 신중하게 받아 안았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나눈 뒤, 나란히 서서 스트라이크 쪽을 뒤돌아 보았다.

「키라 님, 여러 모로 감사드립니다.」

라크스가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스란은 둘의 관계에 대해 상상했다. 사로잡힌 라크스에게 키라는 다정하게 대해 줬을 것이 분명하다. '키라는 변함 없구나' 라고 아스란은 생각했다. 매사에 좋고 싫은 것이 뚜렷한 자신과는 달리, 키라는 말수가 적으면서도 남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다. 누구나 키라의 온화한 분위기에 마음을 놓고 다가간다. 그는 역시 아스란이 생각하던 그대로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아스란은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외쳤다.

"키라! 너도 함께 따라 와!"

그렇다. 지금이라면 데려갈 수 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대로 라크스와 키라와 셋이서….

"네가 지구군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키라, 어서 와!"

옛날처럼, 곁에서 다정하게 웃어 주길 바랐다. 가슴이 바싹 타는 욕구지만 부질 없는 소원이었다.

「나도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키라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저 쪽에는…!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친구들이 있어…!」

친구라는 그 한 마디가 아스란의 희망을 산산 조각 내 버렸다. 그렇다. 키라는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다. 키라에게는 자신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럼 할 수 없지…."

아스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외쳤다.

"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널 죽인다!"

「…나도 마찬가지야…!」

대답하는 키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스트라이크의 해치가 닫힌 뒤 하얀 기체가 천천히 멀어져 가는 모습을 아스란은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적 모빌 슈트, 이탈합니다!」

베사리우스에서 아데스가 그렇게 전달하자, 라우가 명령했다.

"아데스, 엔진 시동!"

그리고 동시에 라우가 시그를 발진시켰다.

아크 엔젤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적함으로부터 모빌 슈트 발진!"

 

 

"나스카 급, 엔진 시동!"

마류가 입술을 깨물었으며, 무우가 외쳤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도 라우와 마찬가지로 미리 조종석에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제로가 아크 엔젤로부터 발진했다.

양 측 움직임에 키라는 화가 나기 이전에 당황스러웠다.

"프라가 대위님…!"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나?」

스피커를 통해서 들리는 무우의 목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그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모든 일이 잘 진행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키라는 자신의 미숙함을 깨달았다.

곧 전투가 시작된다. 자신 때문에 아크 엔젤을 위기에 내몰리게 했다는 초조함과 자책이 키라의 가슴을 시커멓게 태웠다. 시그가 다가왔다.

 

 

「라크스 양을 모시고 귀함하라.」

통신기로부터 라우의 지령이 전달되자, 아스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장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키라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 들이는 척하면서 빈 틈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이래서야 자신은 미끼 역할 밖에 안 되지 않는가. 하지만 라크스를 데리고 전투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그 때였다.

"라우 르 크루제 대장."

통신기 스위치를 누르고 라크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당장 멈추세요! 추도 위령단 대표인 제가 있는 장소에서 전쟁을 벌이실 생각입니까? 그런 일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스란은 적잖게 놀랐다. 언제나 온화하게 미소 짓는 라크스의 모습 밖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전투 행동을 중지하십시오. 제 말이 안 들립니까?"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또박 또박 말했다. 잠시 후에 라우의 대답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라크스 클라인.」

라크스는 통신기로부터 떨어지더니 놀란 아스란의 얼굴을 돌아보며 평상 시처럼 방그레 웃었다.

 

 

기체를 돌려 돌아가는 키라와 무우가 어이 없는 표정으로 지켜 보고 있었다. 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면한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뭐가 뭔지 몰라도 우리도 돌아가자! 괜히 추격했다가 함정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무우의 말에 "네." 라고 대답한 키라는 제로를 뒤따라 기체를 돌렸다. 나란히 날아가면서 무우가 말했다.

「그나저나 굉장한 공주님이었어….」

키라는 말이 없었다. 손에 든 새장에서 아름다운 새를 하늘로 돌려 보내 준 심정이었다.

「왜 그래?」

"아뇨…."

키라는 고개를 떨구었다. 눈에서 흘러 나오는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함께 가자고 아스란이 제안했을 때, 얼마나 따라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동포들이 있는 곳으로….

그래도 키라는 이 쪽을 선택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아크 엔젤을 향해 갔다. 자신을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물론 달 함대와 합류하기 전에 다리 달린 군함을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만…."

니콜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저희들이 달 함대의 사정 거리에 들어가기까지 10분 정도 밖에 남지 않습니다."

가모프 함교에서 이자크, 디아카, 니콜 일행이 전략 패널을 바라 보면서 의견을 나누었다. 베사리우스는 본래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라코니 부대로 라크스를 데려다 주는 도중이었으며, 아크 엔젤 추격을 도중에 합류한 가모프에게 인계했다.

"10분이나 된다는 소리네."

"겁쟁이는 입 다물고 있어."

니콜의 신중론을 디아카와 이자크가 여느 때처럼 비웃었다.

"10분 밖에 없는지, 10분이나 되는지,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야. 난 10분 씩이나 남았는데 그대로 방치한다는 게 납득이 안 가."

이자크가 말하자, "동감이야." 라고 디아카도 동의했다.

"기습 공격의 성과는 시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지."

"그건 그렇지만…."

여전히 난색을 표하는 니콜을 무시하고 이자크가 말했다.

"베사리우스가 곧 돌아온다. 그 때까지 다리 달린 군함을 우리 힘으로 격추시킬 수 있다면…."

화려한 공적을 바라는 이자크 다운 의견이다. 게다가 베사리우스가 도착하기 이전이라면 아스란이 없는 상태에서 행동을 개시할 수 있다. 이 쯤에서 라이벌을 크게 밀어 내고자 하는 초조함이 그로 하여금 강행 수단을 취하게 했다.

"어때?"

"O.K."

디아카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머뭇거리던 니콜도 결국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함장실에서 세 명의 사관에게 호된 꾸중을 듣고 나온 키라를 밖에서 기다리던 토르와 밀리아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갔다.

"괜찮니? 무슨 소릴 들었어?"

"너도 화장실 청소 일주일이냐?"

토르가 콜록거리며 묻자, 뒤따라 나온 무우가 "오~,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군" 이라고 웃으며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지나갔다. 그와는 반대로 나탈은 차가운 시선으로 힐끔 쳐다보고는 말 없이 가 버렸다.

키라는 토르를 보고 싱긋 웃었다.

"괜찮아. 화장실 청소라니?"

"토르가 머독 씨에게 혼쭐이 났거든. 그래서 벌로 일주일 동안 화장실 청소래."

밀리아리아가 키득거리고 웃었으며, 막대한 희생을 치른 토르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흥, 어차피 곧 있으면 달 함대와 합류할 거잖아. 그 때까지만 참으면 돼."

키라가 웃으며 토르의 어깨를 잡았다.

"미안. 나도 도와 줄게."

웃으면서 통로를 걸어가는 도중, 갑자기 토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걱정했었어."

"뭐가?"

"이지스를 탄 사람이 네 친구였다면서…. 미안,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었거든."

키라가 놀라서 발을 멈추었다. 전망실에서 라크스와 나눈 대화를 다른 사람이 듣다니? 토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키라의 뇌리를 스친 불안은 다음 순간 자신을 향한 미소에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야. 네가 다시 돌아왔잖아!"

토르는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키라의 가슴에 따뜻한 감정이 밀려 들었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이 곳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키라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채….

통로 모퉁이 그늘에 프레이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창백한 얼굴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부르튼 입술이 움직이며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대로 그냥 두진 않겠어…."

 

 

"이런 저런 일도 많았지만, 이제 조금 남았군."

아크 엔젤은 달 함대와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난관을 거쳐서 이 곳까지 올 수 있었다. 식당에서 사이와 카즈이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들도 지구에 갈 수 있을까?"

피난민들은 함대와 합류한 뒤에 셔틀을 타고 지구로 갈 예정이다. 카즈이의 불안한 목소리에 사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함장님이 그렇게 말했잖아…. '상부와 연락해서 처우를 결정한다'고."

"그래…. 그러니까 달 함대가 바로 그 상부 아닐까? 우린 당연히 하선할 수 있을 거야."

사이의 말에 카즈이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키라는, 어떻게 될까…?"

그 말에 사이는 처음으로 미묘한 문제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키라는 자신들과 함께 하선할 수 있을까? 카즈이는 때때로 키라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다른 친구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실을 꼬집어 내는 경우가 있다.

여하튼 스트라이크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키라 밖에 없다. 지구 연합군이 그를 순순히 놓아 줄까….

 

 

키라가 식당으로 들어가자, 사이와 카즈이가 잠시 난처한 듯이 시선을 돌렸다. 때문에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키라는 눈치 챘다. 가급적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급수기 쪽으로 걸어 갔다. 플라스틱 컵을 집어 들었을 때, 마침 프레이가 실내로 들어왔다.

"프레이…, 이제 괜찮아? 아직 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

사이의 말을 무시한 채 프레이는 똑바로 키라를 향해 걸어갔다. 지난 번 일을 떠올린 키라가 몸을 움츠렸다.

"키라…."

이번에는 무슨 소리를 들을까 겁나서 몸을 움찔한 키라에게 그녀는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지난 번에는 내가 잘못했어."

"뭐…?"

"그 때, 나… 경황이 없어서…. 너무 심한 말을 했지?"

살짝 위로 치켜 뜬 프레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미안해…. 네가 얼마나 열심히 싸워서 우릴 지켜 주는지 뻔히 알면서…."

"프레이! 그건…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키라가 곧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프레이는 마음이 편치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알고 있어! 네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키라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미움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프레이가 용서해 주었다. 그녀 자신도 부친을 여의고 힘든 상태에서 키라를 이토록 배려해 주다니….

"…프레이, 고마워. 나야말로… 네 아버지를 구하지 못해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프레이가 말했다.

"전쟁이 너무 무서워….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갑자기 함내에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제１전투 태세다. 키라는 컵을 내려 놓았고, 사이와 카즈이는 숨을 삼켰다.

긴장된 소리에 뒤섞여서 프레이의 말투가 기계처럼 단조로웠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합류 지점인데…!"

키라 일행은 서둘러 식당을 나오다가 통로 반대편에서 "또, 전쟁이야~!" 라고 외치면서 달려 온 피난민 소녀와 부딪혔다.

"미안! 괜찮니?"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어린 소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키라가 손을 내밀자, 그것을 가로 막듯이 프레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미안해. 오빠가 너무 바빠서 그렇단다."

그녀는 다정한 표정으로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생긋 웃었다.

"전쟁이 일어나도 괜찮아. 저 오빠가 우릴 위해 싸울 테니까."

"정말이야?"

어린 소녀가 머뭇거리며 키라를 올려다 본다.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쁜 놈들을 모조리 처치해 줄 거야."

"키라!"

등 뒤에서 사이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섰던 키라가 달려갔다. 어깨 너머로 뒤돌아 보자 프레이와 소녀가 손을 잡은 채 키라를 배웅하고 있었다.

"그래…."

프레이가 중얼거렸다.

"전부 다 처치해 주지 않으면 곤란해…."

"아파!"

프레이가 손에 힘을 주었는지, 어린 소녀가 울먹이며 손을 뿌리쳤다. 프레이는 소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입가에는 칼로 벤 상처처럼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어린 소녀는 왠지 무서워져서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찾아 뛰어갔다.

홀로 남은 프레이는 우두커니 선 채 기계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다, 모두 다… 죽여 버려…."

 

 

"키라. 자프트는 로라시아 급 한 척, 그리고 듀얼, 버스터, 블리츠!"

밀리아리아가 함교에서 스트라이크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스트라이크 스탠바이. 시스템 조정 완료. 진로 확보! 스트라이크, 발진하겠습니다!"

"제８함대도 이 쪽으로 향하고 있어! 조금만 버티면 돼!"

마류가 승무원 전원을 향해 외쳤다. 예상대로 쉽게 보내 줄 상대가 아니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군을 앞에 두고 여기서 무너지면 여태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이겔슈테른 작동, 안티 빔 폭뢰 준비! 함미 미사일 전문(全門) 발사 준비!"

3기의 X넘버가 밀집 편대를 이루어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3기는 순식간에 분산했다. 열린 공간을 하얀 빔이 뚫고 지나갔다. 모빌 슈트가 상대방의 시야를 가로 막으면서 가모프의 공격을 한계까지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회피!"

마류가 외쳤다. 첫 공격은 피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한 발이 아크 엔젤에 명중하여 함체가 마구 흔들렸다.

"윽…!"

자프트 군은 자신들의 회피 연산 능력을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 역시 순순히 보내 줄 상대가 아닌 것 같다.

전개된 모빌 슈트 중, 버스터가 무우의 제로를 제압하고 있었으며 듀얼이 스트라이크와 대전 태세에 돌입했다. 남은 블리츠는 아크 엔젤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발리언트, 발사!"

블리츠는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한 뒤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더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블리츠를 놓쳤습니다!"

토노무라 하사가 당혹스럽게 외쳤다.

"미라쥬 콜로이드를 작동시킨 거야!"

설마 그 무장을 몸소 체험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류는 즉각 지시를 내렸다.

"안티 빔 폭뢰! 대공 유산 탄두 설치!"

그녀의 지시에 따라 폭뢰가 발사 된 후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날아 흩어졌다.

돌연히, 아무 것도 감지되지 않던 공간에서 빔이 발사되더니 폭뢰를 터뜨리며 주위를 비추었다. 당장 마류가 외쳤다.

"빔 각도로 블리츠 위치를 추적하라!"

"유산 탄두, 발사!"

나탈의 지령과 함께 발사된 미사일이 수십 개의 탄두로 나뉘어 산출된 예측 위치를 향해 날아갔다. 미라쥬 콜로이드를 작동 중인 블리츠는 페이즈 시프트가 멈춰 있는 상태다. 미라쥬 콜로이드를 일단 해제시킨 뒤 페이즈 시프트 장갑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이번 공격을 피할 수 없다.

예상대로 미사일의 습격을 받은 블리츠가 모습을 드러내어 실드를 펼치며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사라지려고 하는 것을 수동으로 교체한 이겔슈테른의 연속 공격으로 방해했다.

"…누가 만든 줄 알기나 해?!"

마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애당초 지구 연합군에서 개발한 병기다. 웬만한 전술 쯤은 달달 외우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블리츠가 일단 물러났다. 미라쥬 콜로이드의 사용을 단념한 모양이다. 함교 여기 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공격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닌지 빔 라이플을 쏘면서 다시 돌진해 오는 블리츠에게 아크 엔젤은 필사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이런 곳에서 당하진 않아!"

키라는 신음하며 빔 사벨을 뽑았다. 듀얼이 이를 실드로 막아 냈다. 빔 입자가 요란한 불꽃을 날렸다.

건 배럴을 작동시켜 버스터와 교전을 벌이는 제로가 때때로 모니터 구석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또 다시 가모프의 주포가 불을 뿜어 내며 아크 엔젤을 직격했다.

「라… 돌아와 줘! 블리… …했다….」

전파 방해로 인한 잡음 사이로 밀리아리아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듀얼이 휘두르는 사벨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키라는 아크 엔젤을 비추고 있는 사이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아크 엔젤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크 엔젤이!"

키라는 눈을 크게 떴다. 아크 엔젤에 들러붙은 블리츠가 근접 거리에서 라이플을 쏴 대고 있었다. 과열되어 하얗게 빛나는 전함 장갑에 블리츠의 검은 기체가 어두운 우주 속에서 붉게 비치고 있었다.

─저 오빠가 우릴 위해 싸울 테니까 괜찮아….

키라의 귓가에 프레이의 목소리가 되살아 났다. 손을 잡고 배웅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부시게 빛나는 전함과 겹쳤다.

'이대로 당하게 내버려 두진 않겠어…!'

이 때, 키라의 내면에서 뭔가가 폭발하더니 사벨을 휘두르는 듀얼의 섬세한 움직임을 전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듀얼의 장갑에 생긴 미세하게 긁힌 흔적, 스트라이크의 엔진 소리, 모든 계기판이 가리키는 수치, 뿜어 나와 확산하는 빔 입자의 자취까지 동시에 인식할 수 있었다.

키라는 가볍게 레버를 비틀고 페달을 연달아 밟았다. 스트라이크가 듀얼의 일격을 피했다. 그리고는 사벨을 휘두르는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사벨이 듀얼의 옆구리를 쓸고 지나가자 불꽃이 튀어 올랐다. 불꽃을 감지할 무렵에는 분사기와 버니어를 내뿜었다. 키라는 듀얼을 뿌리치고 곧바로 아크 엔젤로 향했다.

듀얼이 뒤쫓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빔 라이플이 발사되었지만 총신을 어느 각도로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다음 사격을 예측할 수 있었다. 키라는 적당히 빔을 피하고 그저 갈 길을 서둘렀다. 그 시선 너머에 블리츠가 있었다.

"그만 두지 못해!"

키라가 공격하자, 블리츠가 서둘러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키라의 반응이 훨씬 빨랐다. 스트라이크의 무릎 부분이 블리츠의 허리를 걷어 찼다.

이 때, 사각 지역으로부터 뒤따라 온 듀얼이 사벨을 휘둘렀다. 키라는 모니터를 돌려서 다른 한 손으로 계기판을 조작했다. 허리 부분에서 튀어 나온 '아머 슈나이더'를 경이로운 속도로 잡아 챈 뒤, 방금 사벨이 쓸고 지나간 공간을 넘어 듀얼의 장갑을 향해 정확하게 내리 꽂았다. 격렬한 불꽃이 듀얼의 기체를 감쌌다. 듀얼은 뭔가 결정적인 손상을 입었는지 그 후로 잠잠해졌다. 관성의 힘으로 떠 다니는 듀얼을 블리츠가 끌어 안고 그 곳으로부터 이탈했다.

아크 엔젤의 갑판에 서서 키라는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지킬 수 있었다….'

키라는 크게 한숨을 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놈들이 물러갔다! 꼬마야, 잘 했어!」

통신이 들어오자, 키라가 겨우 눈을 떴다. 모니터를 통해 무우가 이 쪽을 바라보고 있다. 키라는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방금 전의 그것은 뭘까…?'

「꼬마… 너….」

"네? 무슨 일인가요?"

키라가 눈을 깜박거리자, 모니터 너머로 무우가 쓴 웃음을 지었다.

「…아니…, 너 정말 대단한 녀석이구나.」

키라는 멍한 표정으로 찬사를 듣고 있었다.

 

 

"디아카, 후퇴하겠습니다! 적 함대가 오고 있어요!"

예정 시간 10분이 흐른 후, 니콜이 말을 걸자 「젠장!」 디아카가 욕설을 입에 담았다.

출격했을 때는 아무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니콜은 생각했다. 아크 엔젤은 예상 외로 강했으며, 블리츠의 미라쥬 콜로이드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원래 그 쪽 병기였기 때문에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방금 전의 모빌 슈트─ 스트라이크의 움직임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만큼 놀라웠다. 그 기동성과 반응 속도…. 파일럿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블리츠가 운반하는 기체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자크, 괜찮습니까? 이자크!"

「아파….」

아까부터 듀얼에서 이자크의 신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파… 불타는 것 같아…!」

심상치 않은 상태에 니콜은 황급히 가모프로 향했다.

 

 

"마중 나왔습니다."

아스란이 말을 걸며 문을 열자, 눈 앞에 분홍색 덩어리가 튀어 나왔다.

「하로, 하로, 아스란!」

그는 날아 온 하로를 서둘러 양 손으로 잡았다. 라크스가 활짝 웃는다.

"하로가 소란스럽죠? 오랜만에 당신을 만나서 기쁜가 봐요."

"하로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습니다."

오랜만에 바라본 라크스의 부드러운 미소에 잠시 넋을 잃던 아스란이 급히 눈을 돌렸다.

"…아스란?"

"아, 아뇨. 저기… 기분은 어떻습니까? 인질로 붙잡혀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전 건강해요. 저 쪽 전함에 있을 때 당신의 친구 분께서 친절하게 보살펴 주셨거든요."

"…그런가요…."

아스란이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라크스가 문득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키라 님은 무척 다정한 분이셨어요. 그리고 강한 분이세요."

"그 녀석은 바보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아스란이 반론했다.

"군인도 아니면서 그런 것에 타고 있다니! 그 녀석은 이용 당하고 있을 뿐이에요! 친구를 인질로 잡혀서…. 그 녀석의 부모가 내츄럴이기 때문에… 그래서!"

라크스의 손이 아스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때문에 그 녀석과…."

흥분이 가라앉자 이성을 되찾은 아스란이 당황스러워했다. 라크스가 감싸는 듯한 깊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아스란의 뺨을 건드리려 했으나, 멋쩍어진 아스란이 한 발 뒤로 물러 섰다.

자신의 약혼녀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눈 것이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렇게 본심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라코니 대장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연락선으로 가시죠."

앞서서 방을 나가려 하자, 등 뒤에서 라크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요즘 당신은 힘든 표정 밖에 보여 주지 않는군요…."

아스란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빙글빙글 웃으면서 전쟁을 할 수는 없잖습니까."

격납고에는 라우가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라크스의 간섭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도, 그는 가면 아래 감정을 감춘 채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라크스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크루제 대장, 여러 모로 도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라우는 미소와 함께 가볍게 경례했다.

"이후로는 라코니가 책임 지고 모셔다 드릴 겁니다."

"베사리우스는 추도식 때 돌아오나요?"

"글쎄요…, 확답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스란을 만나고 싶은 소녀다운 바람이라 생각하며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라크스의 눈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전쟁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희생 당한 분들을 잊지 마십시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라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라우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라크스는 가면 너머의 표정을 살피려는 듯이 가만히 쳐다보았다.

'또 저 표정이다.'

아스란이 약간 동요했다. 예전의 라크스는 이런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여왕처럼, 아니 적과 흥정하려는 노련한 정치가처럼 그녀는 정면으로 라우와 맞서고 있다. 아니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습성을 아스란이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아스란을 돌아 보았을 때, 라크스는 예전과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전쟁은 정말 어렵군요."

쓸쓸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아스란은 대답할 수 없었다. 순진한 소녀의 얼굴과 칼날처럼 예리한 정치가의 얼굴, 둘 다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럼 또… 다시 만나 뵐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라크스는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그 순간, 아스란은 키라를 떠올렸다. 동포를 위해서 싸울 것을 결심한 자신이 또 다른 동포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순을 생각했다.

훗날 커다란 흐름 속에서, 아스란은 이 날 나눈 대화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