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1권- 엇갈리는 날개 :: PHASE.1 헬리오 폴리스

C.E.(코즈믹 이러) 30년대에 절정을 맞이한 유전자 조작 붐에 의해 인류는 새로운 대립 구도를 그려 냈다.

수정란 단계에서 유전자가 조작되어 태어난 '코디네이터'라 불리는 새로운 인류는 구인류 '내츄럴'들의 위협 대상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코디네이터들은 지능, 체력, 모든 능력에 있어서 내츄럴들을 능가했으며, 비록 숫자는 적지만 학술, 스포츠 등 모든 분야의 정점을 차지했다. 이윽고 이러한 격차로 인해 대립이 발생하고 수적으로 불리한 코디네이터들은 지구 각지에서 박해를 당했다. 고향에서 쫓겨난 그들이 찾아간 안주의 땅은 우주였다.

훗날 코디네이터들의 본거지가 되는 '플랜트'는 C.E.50년대부터 착공하기 시작하여 만성적인 자원 문제에 시달리던 지구에 우주 자원에서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에너지와 무중력을 이용한 공업 생산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익의 일부는 지구상의 강대국이 독점했으며, 그들은 '플랜트'의 무기와 식량 생산을 금지하여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당연히 코디네이터들은 이러한 불합리한 지배와 착취에 반발하여 독립과 대등 무역을 지구 측에 요구했다. 수없이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지만 그 때마다 결렬되었으며, 양 측에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었다. 그리고….

 

C.E.70년, 비극적인 '피의 발렌타인' 사건으로 인해 지구와 플랜트 간의 긴장은 순식간에 본격적인 무력 충돌로 발전했다.

모든 이들이 수적으로 우세한 지구군의 압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당초의 예측은 크게 빗나가고 세상은 피폐해진 채 어느 새 11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럼 다음으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카오슈운 전선, 그 이후의 정보를….」

키라 야마토는 잠시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던 시선을 노트북으로 돌려서 적당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섬세한 얼굴은 동양계처럼 보였으나, 외모만으로 인종을 판단할 수는 없다.

이 곳은 공업 전문 학교 캠퍼스. 녹음이 우거진 공원, 눈부신 햇살, 즐거운 듯이 웃으며 지나가는 젊은이들─ 지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일상 풍경이다.

하지만 그들이 밟고 지나가는 잔디 밑으로는 두께가 약 100m 이상 되는 합금 프레임이 깔려 있으며, 그 아래로 우주가 펼쳐져 있다.

이 곳은 헬리오 폴리스. 지구의 위성 궤도 상 L3에 위치하는 우주 콜로니다.

노트북 화면 상단에 띄워 둔 작은 창에서는 아나운서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새로 도착한 정보에 의하면, 자프트군은 지난 주말에 카오슈운 우주항 전방 6km 지점까지 도달했으며….」

이 때 햇빛을 반사시키는 작은 날개를 펄럭이며 캠퍼스 상공을 일주한 토리가 돌아오더니, 은록색 날개를 움직여 키라의 노트북에 내려 앉았다. 토리는 작은 새 모양으로 만들어진 애완용 로봇으로, 키라의 소중한 친구다.

토리를 볼 때마다 키라는 그것을 선물해 준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괜히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야."

헤어지는 날, 소년은 열세 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검은 머리, 온화하고 고요한 시선…. 내리 깐 눈동자는 인상적인 바닷빛이다.

그와 키라는 네 살 때부터 월면도시 코페르니쿠스에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다. 둘은 언제나 함께였다.

"플랜트와 지구 사이에 전쟁 따윈 없을 거야."

"응…."

하고 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피난을 가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키라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들은 총명한 소년들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사회 정세나 부모의 의향에 따르는 수밖에 없어서 결국 이별을 받아 들였다.

친구는 고개를 떨군 키라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키라도 곧 있으면 플랜트로 올 거지?"

그 말에 담긴 희망이 키라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겨우 고개를 들자, 친구는 아름다운 바닷빛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웃었다. 키라는 그 색을 무척 좋아했다.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그렇게 믿으며 헤어졌다. 그 후로 벌써 3년이 흘렀다.

"어? 새로운 뉴스냐?"

갑자기 어깨 너머로 들려 오는 목소리에 키라는 정신을 차렸다.

"토르…."

같은 공업과에 다니는 토르 케니히였다. 밀리아리아 하우도 함께 있었다.

노트북 화면의 창에서는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폭음, 허둥지둥 도망가는 사람들, 도시의 빌딩이 반쯤 무너진 것으로 보아 근처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작년에 '플랜트'의 군사 조직인 자프트군이 지구 침공을 개시했다. 중립국 오브의 콜로니인 이 곳 헬리오 폴리스도 개전 당시에는 지상에서 벌어지는 전황을 숨 죽여 지켜 보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익숙해졌는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카오슈운에서 7km 떨어진 지점인 이 곳까지 격렬한 전투음이….」

아나운서가 격앙된 목소리로 보고한다.

"저런, 지난 주에 저랬으면 카오슈운은 벌써 함락되었겠는데?"

토르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노트북을 닫았다.

약간 경솔한 면이 토르의 단점이다. 하지만 키라는 뒷끝이 없고 쾌활한 토르를 좋아했다.

"카오슈운이면 여기서 별로 멀지 않잖아. 본토는 괜찮을까?"

반대로 밀리아리아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브 본토가 전쟁터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안심해."

낙관적인 토르의 말투가 예전에 친구가 했던 말과 겹쳐진다. 키라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도 그들은 전쟁이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때까지는 아직, 노트북을 닫으면 끝나는 화면 상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래~!"

어디선가 화사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캠퍼스 내 일렉카(Electric Car의 준말, 전기 차) 대여 포트에서 떠들고 있는 소녀들 중에 프레이 알스터의 모습을 발견한 키라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불이 붙을 것 같은 빨간색이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러운데, 지금은 약간 상기된 표정이다. 고상한 기품이 풍기는 외모와 우아한 몸가짐이 장미꽃 같은 화려함을 연상시켰다. 많은 소녀들 중에서도 금방 눈에 띄는 존재였다.

제대로 말 한 번 건네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키라의 심장은 멋대로 쿵쾅거렸다.

"앗, 밀리아리아! 너라면 알고 있겠다!"

프레이를 둘러싼 소녀들이 이 쪽을 돌아 보며 말을 걸었다. 뒤쪽에서 얼굴을 붉힌 프레이가 "그만 좀 하라니까!" 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프레이가 말이야, 사이 아가일에게 러브 레터를 받았대! 그런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입을 싹 다물고 있잖아!"

"뭐라고?!"

흥분이 전염되었는지 밀리아리아도 큰 소리로 되물었다.

그들이 더욱 자세히 캐물으려 했을 때, 키라의 등 뒤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타지 않을 거라면 먼저 가도 괜찮을까요?"

선글라스를 쓴 여자와 그 뒤로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말을 건 사람은 앞장 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하지만 학생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정중하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기묘한 위압감이 담겨 있었으며, 젊은 여자다운 부드러움을 거부하는 듯한 날카롭고 딱딱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먼저 타세요."

토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들 어색한 표정으로 길을 비키자, 그들은 성큼성큼 걸어서 일렉카를 타고 떠났다.

"난 이제 몰라! 갈래!"

프레이가 겸연쩍은 분위기를 뿌리치듯이 외치며 다음 일렉카에 올라 탔다. 같이 있던 소녀들이 각자 "기다려 줘~!" 라고 외치며 소란스럽게 뒤쫓아 갔다.

포트가 고요해지자 토르가 느닷없이 키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했군. 사이도 제법이야. 키라, 안 그래?"

"뭐? 무, 무슨…."

당황하는 키라에게 밀리아리아가 "파이팅!" 이라고 격려하듯 미소 지어 보이며, 토르를 따라서 일렉카에 올라 탔다.

"자, 잠깐만 기다려. 내가 뭘…."

키라는 혼자서 말을 더듬고 있었다.

 

 

"참 태평스러워."

간선 도로를 일렉카가 자동 조종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짧은 검은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이름은 나탈 버질.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콜로니를 방문하여 극비리에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비슷한 또래 중에는 벌써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녀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옆 좌석에 앉은 아놀드 노이만이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에 마주친 학생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헬리오 폴리스는 중립국 오브에 속하는 공업 콜로니다. 오브 본토는 적도 바로 밑에 위치하는 태평양의 군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산도의 지열을 이용한 뛰어난 공업력과 우주항 운영으로 발전한 국가다.

이 시대에 우주항을 갖춘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에너지 자원이 고갈된 지구는 주로 우주 자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도 부근이 셔틀 발진에 적합하다는 이유로 저위도 지역이 새삼스럽게 주목받게 되었다.

작년 3월에 발생한 자프트 군의 지구 침공 작전 '오퍼레이션 우로보로스'도 주된 목표물은 우주항이었다.

지구 연합 대 플랜트라는 구도로 시작된 이번 전쟁은 지구 상의 연합 비가입국까지 끌어들여서 장기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정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 밖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나란히 늘어선 가게마다 신선한 상품이 넘쳐 흐르고, 사람들은 느긋하게 쇼핑을 즐기고 있다. 전쟁에 휩쓸려 전전긍긍하고 있는 지구를 보고 온 나탈은 이러한 평화를 받아 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노이만도 왠지 모를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일렉카는 광산 지역으로 이어지는 센터 샤프트로 향하고 있었다. 샤프트 쪽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대로 들어간 일렉카가 자동으로 움직였다. 이 부근은 무중력 상태였다. 센터 샤프트는 헬리오 폴리스의 척추나 다름 없으며, 원통형 콜로니의 중앙을 향해 쭉 뻗어 있다. 센터 샤프트와 원통형 내벽을 무수한 지주가 엇갈리듯이 연결되어, 지표와 센터 샤프트 간 이동 수단과 회전하는 외벽을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맡고 있다.

센터 샤프트 내부에는 공업 지역이 들어서 있으며, 무중력이라는 조건을 이용한 공업 생산물을 주로 지구를 대상으로 생산하고 있다. 콜로니 끝부분에는 우주항이, 반대편에는 예전에 우주 공간을 표류하던 소행성이었던 광산이 붙어 있다. 현재 일렉카는 다름 아닌 광산 내부를 향하고 있다.

이 블록은 사기업 모르겐레테의 소유지다. 일렉카는 소행성 깊숙이 감춰진 거대한 조선소에 도달하더니 멈추어 섰다. 이 장소야말로 그들의 목적지였다.

눈 앞에 있는 감시대에 서서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거대 전함을 내려다 보았다. 전체 길이 345m, 돌출된 함교 밑으로 양 쪽에 웅크리고 앉은 짐승의 앞다리를 연상시키는 말 발굽 형태의 뱃머리가 길게 뻗어 있고, 함체 중앙에서 좌우로 펼쳐진 양현의 날개는 대기권 내에서 비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종래의 전함과는 전혀 다른 거대한 외관은 함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요새라고 부르기에 적합해서, 노이만은 탄성과 함께 그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아크 엔젤─ 지구 연합군이 모르겐레테에서 극비리에 건조한 새 전함이다.

그들이 남 몰래 헬리오 폴리스에 입국한 이유는 이 전함에 승무원으로 탑승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그들─ 나탈 버질 소위, 아놀드 노이만 상사,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인 재키 토노무라 하사는 모두 지구 연합군 제８함대에 소속된 군인이었다.

"함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데 거기서 뭘 하고 있나!"

채찍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에 전함을 바라보던 노이만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나탈 버질 소위는 이미 통로를 반쯤 지나서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그와 토노무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능하지만 엄격하고 규율을 중시하는 융통성 없는 그녀에게는 전함의 아름다움도 아무런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어서 갈아입고 5분 뒤에 사관 부스로 집합! 서둘러라!"

나탈의 지령이 떨어지자, 무중력 통로를 이동하면서 노이만은 다시 한 번 흘끗 하고 등 뒤의 아크 엔젤을 돌아보았다.

'대천사(Arch Angel)'라는 이름에 걸맞게 저 전함은 현재의 교착 상태를 타파하고 우리들을 구원해 줄 것임이 분명하다….

노이만이 그런 달콤한 희망을 가질 만큼 전함은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헬리오 폴리스는 종래의 원통형 콜로니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체 길이 32km, 직경 3km에 달하는 거대한 원통을, 태양광선을 모으기 위한 세 장의 거울이 가늘고 긴 꽃잎처럼 둘러싸고 있다. 거대한 원통을 회전시키는 원심력에 의해 콜로니 내벽에 중력이 만들어진다.

헬리오 폴리스의 특징을 꼽으라면, 곁에 딸린 자원 채굴용 소행성을 들 수 있다. 멀리서 이 콜로니를 향해 가가가면 마치 우주 공간에 떠 다니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에서 막대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아스란 자라는 천천히 바위 덩어리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기밀복을 입은 그림자가 수십 명 눈에 띄었는데, 한 명씩 콜로니 내부로 이어지는 배기구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아스란도 바위에 몸을 붙이고 손목시계를 흘끗 쳐다 보았다. 자신의 호흡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시계가 예정 시각을 가리키자 배기구의 감시 장치가 멈추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들은 거침없이 순서대로 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예상대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콜로니 내부로 잠입하여 사방으로 퍼졌다. 명령이나 질문은 일체 나누지 않았으며, 낯선 장소를 이동한다는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완전히 통제된 움직임으로 공장 지역의 주요 장소를 선택하여 검고 작은 물체를 설치했다.

설치가 끝나자, 물체에 달린 계기판이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숫자는 폭발까지 남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데스, 너무 난감한 표정 하지 말게."

곁에 있는 남자가 쓴웃음을 짓자, 아데스는 더욱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곳은 헬리오 폴리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우주 공간이다. 소행성 뒤에 두 척의 전함이 대기 중이었다. 자프트의 나스카 급 '베사리우스'와 로라시아 급 '가모프'였다. 아데스는 베사리우스의 함장이었다. 듬직한 체구와 각진 턱을 가진 그는 자신의 본심을 입에 담았다.

"평의회의 답변을 들은 뒤라도 늦지 않을 텐데요…. 대장."

대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독특한 은색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금발,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육체, 마스크로 감춰지지 않은 얼굴의 나머지 부분이 그가 미남임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는 라우 르 크루제, 유능함과 가차없는 전투로 적과 아군 양 쪽에 알려진 이 부대의 대장이다.

그는 아데스의 질문에 "그래서는 너무 늦지." 라고 대답했다.

"내 직감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 대가를 우리 목숨으로 치러야 할 것이라고."

라우는 손에 든 사진을 손 끝으로 튕겼다. 초점이 흐린 불명확한 사진이지만, 그 곳에는 거인처럼 보이는 장갑(裝甲)의 일부가 찍혀 있었다.

"지구군의 신형 병기가 저 곳에서 운반되기 전에 탈취해야 해."

 

 

"대위님?"

트레일러에서 누군가가 부르자, 마류 라미아스가 뒤돌아 보았다.

정비 담당의 코지로 머독 상사가 수염을 깎지 않은 텁수룩한 얼굴을 창 밖으로 내밀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럼 저희들 먼저 전함에 가 있겠습니다~!"

"잘 부탁해!"

주위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자연스레 마류도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여기는 모르겐레테의 지상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여기저기서 분주히 일하는 남자들로 활기찬 분위기와 더불어 혼잡스러웠다. 그 속에서 남자들과 똑같은 작업복 차림이면서도 어깨까지 내려오는 밤색 머리카락을 흔들며 지시하는 마류의 모습은 단연 눈에 띄었다. 스물 여섯 살인 그녀는 지구 연합군 소속 대위였다.

"대위님, 이 일이 끝나면 한 잔 하러 가지 않을래요? 헬리오 폴리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며…."

그녀는 이 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최고 상관이지만 미인이기 때문에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상관 모독죄로 영창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나?"

젊은 하사관에게 마류가 이렇게 대답하자, 곁에 있던 하마나 상사가 통쾌하게 웃어 제꼈다.

"너 같은 애송이가 이 아가씨한테 작업을 걸다니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이 녀석아."

다들 계획이 종료되는 순간을 눈 앞에 두고 들떠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마류는 감회가 새로웠다. 극비리에 'G' 계획을 시작한 지 수 개월, 그녀는 처음부터 헬리오 폴리스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다.

모르겐레테에서 새 전함 아크 엔젤과 함께 개발, 제조된 지구 연합군의 신형 비밀 병기는 'G' 라고 불렸으며,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 'G'가 드디어 완성되어 반출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 신형 병기는 간단한 조정을 끝낸 뒤, 마류가 부함장을 맡을 아크 엔젤에 이송되어 비밀리에 헬리오 폴리스를 출항하기로 되어 있다.

'이제 겨우 어깨의 짐을 덜게 되었다.' 라고 마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접근 중인 자프트 함에 알린다! 귀함의 행위는 우리 나라와의 조약에 크게 위배된다. 즉시 정선을 명한다!"

통고도 없이 접근한 자프트의 전함 두 척을 포착한 헬리오 폴리스 관제 구역에 비상 경보가 울려 퍼졌다.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이 콜로니는 전함의 입항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사리우스와 가모프는 정선 권고를 무시했다. 모든 통신에 잡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관제 담당자가 소리 질렀다.

"강력한 전파 간섭입니다! 자프트 군이 발신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관제실에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자프트 군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었다.

"이거 완전히 노골적인 전투 행위 아냐!"

이 때 마침 항구에는 한 척의 화물선이 입항하고 있었다. 화물선의 함교에서도 긴박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적은?!"

"두 척입니다! 나스카 급과 로라시아 급. 전파 간섭 직전에 모빌 슈트 발진을 확인했습니다!"

"애들은?"

"벌써 모르겐레테에 도착했을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군. 루크와 게일은 '뫼비우스'에서 대기! 아직 나가지 마라!"

선내 인터폰을 통해 지시하는 자는 20대 후반의 훤칠하게 생긴 금발의 청년이었다. 꽤 단정한 외모지만 긴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초연한 분위기와 함께 입가에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시를 끝내자 그는 곧바로 격납고로 향했다. 그 곳에는 화물선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빌 아머─ 우주 전투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일반 선적을 가장하고 있지만 이 배의 승무원은 모두 군인이다. 검은 파일럿 슈트를 걸친 남자는 무우 라 프라가 대위로, '엔듀미온의 매'라는 별명을 지닌 지구 연합군의 에이스 파일럿이다. 그들의 임무는 몇몇 파일럿 후보생을 헬리오 폴리스까지 데려다 주는 일이다.

곧이어 항구 게이트를 통해 자프트의 모빌 슈트 '진'이 투입되었다.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지구 연합군의 모빌 아머를 압도하며 전황을 현재와 같이 바꾸어 놓은 데에는 다름아닌 인간형 몸체를 가진 이 기동 병기의 역할이 컸다. 갑옷을 입은 무사처럼 옆으로 퍼진 잿빛 몸통을 지녔으며, 인디언의 깃털 장식을 연상시키는 머리 부분의 센서와 등에 짊어진 날개 같은 추진 장치가 특징이다.

이들 병기는 모두 배터리를 동력원으로 삼고 있다. 종래의 병기에 사용하던 핵 분열 엔진은 자프트가 개발한 뉴트론 재머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뉴트론 재머는 핵 분열 자체의 동작을 저지하기 때문에, 과거의 최종 병기였던 핵 미사일 등은 완전히 봉인되었으며, 그 결과 이들 기동 병기에 의해 전황이 좌우되었다.

진의 돌입을 확인한 무우는 함장에게 통신으로 보고했다.

"전함을 당장 발진시키십시오! 항구를 제압당할 겁니다. 이 쪽도 떠나겠습니다!"

 

 

"크루제 대장이 말한 대로군."

이자크 쥴이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 바이저 너머로도 확인할 수 있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눈썹 위로 반듯하게 자른 은발이 차갑고 예리한 인상을 주지만 지금은 헬멧에 가려져 있다. 일류 파일럿이지만 냉정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때때로 발끈하는 기질이 있다. 아스란은 동료인 이자크를 약간 멀리하고 있었다. 아스란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지 틈만 나면 시비를 걸어 오기 때문이다.

"벌집을 쑤신 것 같잖아?"

디아카 엘스먼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금발에 갈색 피부, 명랑해 보이는 외모를 지녔으나 실은 상당히 냉소적인 성격이다.

그들과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아스란은 모두 자프트 군의 에이스 파일럿임을 상징하는 붉은 파일럿 슈트를 착용했고, 파일럿을 호위하듯이 각 팀 구성원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자프트 함 침공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다. 주위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모르겐레테 공장 부근의 상태를 헬리오 폴리스 내부에 침입한 아스란 일행이 스코프를 통해 관찰하고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밤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중심에 서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후방의 셔터가 열리면서 거대한 컨테이너를 실은 트레일러가 나왔다.

"…저거다."

"역시 내츄럴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이자크가 차갑게 내뱉으며 발신기 단추를 눌렀다.

아스란은 곁에 웅크리고 있는 니콜 아말피가 극도로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가볍게 팔을 두드렸다. 아스란을 돌아 본 니콜은 약간 굳은 미소를 지었다. 색이 엷은 곱슬 머리와 커다란 눈을 가졌으며 하얀 피부와 소녀 같은 용모를 지닌 그는 아스란보다 한 살 아래인 열 다섯 살이다. 내츄럴이라면 아직 어린 아이 취급을 받을 나이지만, 코디네이터의 세계에서는 성인 취급을 받는 연령이다. 뒤에 서 있던 러스티 맥켄지가 비웃듯이 니콜의 등을 툭 쳤다.

"갈 시간이다."

카운터가 '0'을 가리켰다. 공장 구역의 이곳 저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풍에 몸이 날아가는 사람들, 다른 곳에 불이 옮겨 붙어서 화염에 둘러싸인 시설…. 광산 내부의 암벽이 무너져서 바위가 쏟아져 내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항구를 돌파한 모빌 슈트가 모르겐레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건물 외벽이 라이플 탄에 의해 깊게 도려져 나가고, 탄환이 뚫고 지나간 차량이 폭발했으며, 폭풍이 반출 작업 중인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혼란을 틈 타서 아스란 일행은 행동을 개시했다.

 

 

키라가 탄 일렉카는 모르겐레테 사옥으로 들어가 멈추었다. 그들의 지도 교관인 카토 교수의 연구실이 그 곳에 있었다.

"키라, 이제 왔니?"

그들이 방으로 들어가자, 같은 과 친구인 사이 아가일이 고개를 들었다. 컬러 안경을 끼고 화려한 상의를 입고 있지만 외모는 이지적이고 온화했다. 키라보다 한 살 위인 그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생각이 깊어서 자연스럽게 중재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방에는 사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과 친구인 카즈이 버스커크, 그리고 또 한 명, 낯선 인물이 벽 쪽에 앉아 있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지만 키라와 같은 나이거나 한두 살 아래로 보였다.

"…누구야?"

토르가 카즈이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응? 교수님 손님이래.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나 봐."

키라는 약간 이상하게 생각했다. 교수의 '손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은가. 모자 밑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황금색이었고, 흘끗 쳐다 본 얼굴은 작고 둥글었으며, 손발도 가늘고 섬세했다. 이런 어린 소년이 인공 두뇌 공학 분야의 제１인자인 카토 교수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찾아 왔을까?

"이걸 전해 주라고 하시던데? '추가'라고 말하면 알아 들을 거라면서."

사이가 한 장의 미디어를 꺼내서 키라에게 건네 주었다.

"으…! 지난 번에 받은 것도 아직 끝내지 못했는데…."

키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카토 교수의 연구에 관련되는 프로그램 해석을 부탁 받았다. 아무리 키라의 정보 처리가 빠르다고 해도 1학년에 불과한 그를 이런 식으로 부려 먹다니. 속세와 상식에서 벗어난 털털함이 교수의 장점이긴 하지만…. 그런 생각과 함께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추가 분을 받았다. 그런 키라를 토르가 등 뒤에서 꽉 끌어 안으며 목을 졸랐다.

"그보다 어서 편지에 대해서 물어 보라니까~!"

"편지라니?"

어리둥절한 사이의 표정을 본 키라는 다짜고짜 토르의 입을 틀어 막았다.

"아, 아무 것도 아냐!"

프레이 알스터가 귀엽다고 예전에 토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프레이에게 고백한다든지 사귀자고 말할 용기가 생기지는 않았다. 만일 친구인 사이가 프레이와 사귀게 된다면 키라는 자신의 짝사랑을 가능한 한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카즈이까지 합세해서 "토르, 무슨 일이야? 나한테만 살짝 가르쳐 줘." 라고 졸랐다.

문득 키라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벽 쪽에 기대어 서 있던 '손님'이 떠드는 그들을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거의 금색에 가까운 갈색의 놀라우리만치 예리한 눈빛이다. 섬세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눈동자에는 지나치게 야성적인 빛이 감돌았다. 키라와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소년의 얼굴에 초조함이 떠오르는 것을 키라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 때, 느닷없는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

"뭐야?!"

"운석과 충돌했나?"

소년들은 허둥지둥 방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넘어질 정도로 진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전압이 불안정한지 작동하지 않았기에 일행은 비상 계단으로 뛰어 갔다. 마침 뛰어 올라온 직원을 향해 사이가 "대체 무슨 일이죠?!" 라고 물었다.

직원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자프트가 공격했어! 콜로니 내부로 모빌 슈트가 들어왔다고!"

"뭐라고요?!"

다들 그 순간 멈추어 섰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들은 직원이 재촉하는 대로 뒤따랐다. 이 때, 키라의 곁에 있던 소년이 몸을 돌려서 되돌아갔다. 금색 눈동자의 그 소년이었다.

"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그를 따라서 키라도 무의식 중에 달렸다.

"키라!"

등 뒤로 들려 오는 토르의 목소리에, "금방 따라갈게!" 라고 대답한 뒤 키라는 소년을 쫓아갔다.

교수의 손님이라는 소년은 공장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따라 잡은 키라가 팔을 붙잡았을 때, 뒤쪽에서 뭔가 폭발하며 폭풍이 모자를 날려 버렸다. 드러난 얼굴과 붙잡은 가는 팔의 감촉, 무의식 중에 몸을 감싸는 행동….

"여… 여자였어?"

키라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상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여태까지 뭐라고 생각한 거야?!"

화사하고 섬세한 외모라고 생각했지만, 복장과 여성스럽지 않은 퉁명스러운 태도 때문에 키라는 상대를 완전히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계속되는 폭발음에 흩어져 버렸다. 소녀는 키라의 손을 뿌리쳤다.

"왜 따라왔지? 어서 돌아가!"

"가긴 어디로 가? 이젠 돌아갈 수 없어."

방금 전의 폭발로 복도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키라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느닷없이 소녀의 손을 잡고 달려갔다.

"이 쪽이야!"

"놔…. 놓지 못해?! 바보야!"

"바보?!"

약간 울컥한 키라는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깜짝 놀랐다. 소녀가 중얼거렸다.

"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돼…."

"확인이라니?"

키라는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이미 늦었나? 이런 일이 발생할까 봐 여기까지 왔는데…!"

"이봐…?"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키라는 발걸음을 멈추었따. 하지만 다시 건물 안에서 일어난 폭발음에 정신을 차리고 소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일단 피할 곳을 찾는 것이 더 급해! 공장 구역으로 들어가면 다른 대피호가 있어!"

 

 

공장 구역 밖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었다. 지구 연합군이 대공 미사일로 맞서고 있었으나, 자프트의 모빌 슈트 '진'이 미사일을 탑재한 장갑차를 닥치는 대로 격파했다. 자프트 잠입 부대는 그 틈을 타서 반출구로 접근했다.

공장에서 나온 세 대의 트레일러가 오도가도 못하고 멈추어 서 있었다. 짐 칸에 각각 한 대씩 모빌 슈트로 추측되는 기체가 실려 있었다. 잠입 부대의 목적은 다름 아닌 그것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눈치 챈 지구군 병사가 라이플을 쏘았으나 곧 잠입 부대원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능숙한 동작으로 트레일러로 다가가면서 이자크가 지시했다.

"운반할 수 없는 부품과 공장 시설은 모두 파괴할 것! 전부 5기라고 보고 받았는데 나머지 2기는 아직 저 안에 있나?"

"나와 러스티 팀이 가 보지. 너희는 저 쪽 3기를 맡아!"

그렇게 외친 아스란이 러스티에게 신호를 보냈다.

"좋았어. 각자 탑승한 뒤 바로 자폭 장치를 해제해!"

이자크는 트레일러에 올라가서 기체에 탑승하려는 디아카와 니콜에게 말했다. 그러고 난 뒤 자신도 조종석에 올라 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아스란은 공장 반출구로 향했다.

 

 

통로를 따라 달리던 키라와 소녀는 이윽고 넓게 뚫린 공간에 도착했다. 격납고처럼 생긴 넓은 공간으로부터 돌출된 복도로 나온 키라는 대피호 쪽으로 걸어가려다 총성에 놀라 고개를 움찔했다. 계단 밑에서는 총격전이 한창이었다. 바깥 쪽에서는 뭔가 터지는 소리도 함께 들려 왔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물체에 놀란 키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 이것…은…."

신화 속 신상을 본떠서 만든 듯한 거인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것은 키라의 시선을 받아 당장에라도 움직일 것만 같았다.

납처럼 둔탁하게 빛나는 잿빛 장갑, 네 개의 뿔이 달린 것 같은 머리, 날씬한 몸체. 자프트의 진과는 뚜렷하게 다른 형태였다.

"지구 연합군의 신형 기동 병기…. 역시…."

키라 옆에서 소녀가 털썩 주저앉더니 난간을 양손으로 붙잡고 쥐어 짜듯이 소리 질렀다.

"아버지…. 어째서 이런 짓을…!!"

그녀의 목소리는 높은 천장에 반사되어 생각보다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이 다가오는 것을 본 키라는 소녀를 난간에서 떼어 내고 뒤쪽으로 몸을 던졌다. 총성과 함께 총탄이 아슬아슬하게 난간을 스치며 날아갔다.

키라는 소녀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며 달려서 대피호 입구에 도달했다. 인터폰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직도 사람이 남아 있나?」

키라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네! 저와 친구를 부탁합니다. 열어 주세요."

「둘이라고?!」

"네."

스피커는 곧바로 응답하지 않았다.

「…여기도 이미 가득 찼다. 좌측 블록으로 가면 37번 대피호가 있는데, 거기까지 갈 수 있겠나?」

키라는 뒤돌아 서 좌측 블록을 바라보았다. 그 곳으로 가려면 총격전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혼자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녀를 데리고 가기에는 어려울 것 같았다.

키라는 인터폰을 향해 외쳤다.

"그럼 한 사람만이라도 부탁합니다! 여자거든요!"

키라의 절박한 목소리와 '여자'라는 단어 때문인지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스피커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알았다. 미안하군….」

문의 램프가 적색에서 청색으로 바뀌며 문이 열렸다. 대피호로 향하는 낙하 통로 안으로 키라는 소녀를 밀어 넣었다.

그 때까지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소녀는 그제서야 겨우 사태를 알아 차렸다.

"어째서… 넌…?"

"난 괜찮아! 저 쪽 대피호로 가기로 했어. 괜찮으니까 어서 가!"

키라는 억지로 문을 닫았다. 유리 너머로 소녀의 입이 "기다려!" 라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곧 아래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램프가 다시 적색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뒤 키라는 달렸다.

"하마나, 브라이언, 서둘러! X105와 303을 기동시켜야 해!"

여자 목소리가 격납고에 울려 퍼졌다. 난간 밑을 내려다 본 키라는 모빌 슈트 그늘에 몸을 감추고 라이플을 쏘고 있는 작업복 차림의 여자를 발견했다. 안 쪽에 있는 또 한 대의 모빌 슈트 쪽에서 총성과 동시에 욕설과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방금 전에 자프트 군이 침공했다고 직원이 말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적이 자프트라면 저들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자프트 병사는 모두 코디네이터들이라서 운동 신경, 시력, 판단력 모든 면에서 내츄럴을 능가한다.

키라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한 자프트 병사가 군인으로 보이는 여자를 등 뒤에서 노리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뒤쪽!" 이라고 외쳤다.

그녀는 키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뒤돌아 적병을 쏘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키라를 바라보았다.

"어린 애잖아…?"

여자가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공격해 오는 자프트 병사에 맞서 싸우면서 키라를 향해 외쳤다.

"따라 와!"

"좌측 블록의 대피호로 가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키라가 큰 소리로 대답하자, 그녀는 라이플을 쏘면서 대답했다.

"거긴 이미 문짝 밖에 안 남았어!"

그 말에 키라는 발을 멈추었다. 그의 판단은 재빨랐다. 주저 없이 난간 너머로 뛰어 내리는 키라의 동작을 여병사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높이가 5~6m 쯤 되었을까. 부드러운 용모와는 다른 민첩함으로 키라는 고양이처럼 모빌 슈트 위로 사뿐히 착지했다.

놀라서 꼼짝도 않는 여자의 뒤쪽에서 모빌 슈트를 지키며 싸우던 남자가 자프트 병사 한 명을 쓰러뜨렸다.

"러스티! 제길!"

붉은 파일럿 슈트를 입은 자프트 병사가 소리 지르며 동료의 목숨을 앗아 간 남자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총탄이 명중했는지 남자가 앞으로 몸을 꺾으며 쓰러졌다.

"하마나!"

여병사가 이름을 부른 순간, 자프트 병사가 뒤돌아서 그녀를 쏘았다.

"윽…!"

총탄이 그녀의 어깨에 명중하여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탄환이 떨어졌는지 자프트 병사는 들고 있던 총을 내던지고 나이프를 뽑으며 달려왔다. 키라도 그 쪽을 향해 달렸다. 그 순간─

"키라?"

나이프를 손에 쥔 자프트 병사가 입을 열었다. 키라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자프트 병사의 헬멧은 방금 전에 죽인 남자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타오르는 불에 반사된 바이저 너머로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아스란?!"

키라의 입에서 그 이름이 무의식 중에 새어 나왔다. 목소리를 들은 상대방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의지가 강해 보이는 커다란 바닷빛 눈동자에 키라의 모습이 비쳤다.

키라는 그 눈동자를 무척 좋아했었다. 온화한 외모는 성장함에 따라 어느 새 예리함을 갖추었으며, 침착함과 총명함도 지녔다. 하지만 3년이라는 세월도 친구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예상치 못한 재회에 둘 다 말을 잃고 서 있었다.

이 틈을 타서 여병사는 부상을 입은 어깨를 감싼 채 총구를 겨누었다. 아슬아슬하게 그 모습을 알아 차린 아스란이 뒤로 몸을 날렸다. 총성이 울려 퍼지고, 방금 전까지 아스란이 서 있던 공간을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다. 놀라서 뒤돌아 본 키라는 몸을 던진 여병사와 함께 모빌 슈트의 조종석으로 굴러 들어갔다.

"뒷좌석에 앉아!"

여병사는 지시한 뒤 모빌 슈트의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나도… 조종 쯤은…."

계기판에 빛이 들어오며 윙…하는 구동음이 서서히 커졌다. 모니터가 밝아지면서 바깥 풍경을 보여 주었다. 좌측 모니터에 붉은 파일럿 슈트가 스쳐 지나가면서 다른 한 대의 모빌 슈트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스란…. 아스란이 자프트 병사라니…?'

그럴 리가 없다. 다정한 아스란은 늘 전쟁이 싫다고 말했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쉴 새 없이 연달아 발생하는 사건에 완전히 넋이 나간 키라의 눈 앞에 놓인 모니터에 문자가 차례로 떠올랐다.

 

－General

－Unilateral

－Neuro-Link

－Dispersive

－Autonomic

－Maneuver…

 

키라는 무의식 중에 붉게 빛나는 머리 글자를 읽었다.

"거… 건담…?"

생명을 부여받은 모빌 슈트의 양 눈에 빛이 들어오며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엔진이 낮게 울리며 거대한 사지가 어색하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 칸에 기체를 고정시킨 볼트가 툭툭거리는 소리와 함께 튕겨져 떨어져 나갔다.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휘청거리며 모빌 슈트가 불길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화염이 잿빛 장갑에 반사되어 우뚝 선 거인의 위용을 붉게 물들였다.

 

 

헬리오 폴리스 주변 우주 공간에서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무우 라 프라가는 자신의 전용 모빌 아머 '뫼비우스 제로'를 타고 한 대의 진과 대치하고 있었다. 붉은 유선형 기체를 둘러싸듯이 배치된 '건 배럴'이 펼쳐지면서 독자적인 동작과 함께 목표물을 공격했다.

건 배럴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지구 연합군을 통틀어서 무우 밖에 없었다. 사각 지역, 혹은 복수 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가능케 한 이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룸으로써, 그는 월면 엔듀미온 크레이터에서 발생한 그리말디 전투에서 진 5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세우고 '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진에 비해 노멀 타입 뫼비우스의 전력은 1/5(즉 진 1기가 뫼비우스 5기 분에 해당하는 활약을 펼친다)이라고 평가하는 현시점에서 이 같은 전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제로 옆에서 동료기가 탄환을 맞고 빨려 들어가듯이 콜로니 광산 구역에 충돌했다.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느끼며 무우는 방아쇠를 당겼다. 스쳐 지나가며 진의 어깨 부위를 명중시키고 개빨리 이탈했다. 제로를 다시 반전시켰을 때, 항구에서 발진한 기체를 모니터 상에서 포착했다.

"뭐야?"

본 적이 없는 형태의 모빌 슈트 3기가 자프트의 로라시아 급 전함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구 연합군의 비장의 무기인 신형 모빌 슈트 'G'-K넘버였다. 극비리로 개발했는데 이렇게 쉽사리 빼앗기다니. 자프트 측에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ㅅ리다. 무우는 이를 갈았다.

 

 

「오롤 기 추락! 긴급 귀환!」

베사리우스 함교에서 라우 르 크루제가 통신 내용을 듣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오롤이 이 따위 전투에서 격추 당했다고?"

아데스 함장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자프트 내 파일럿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 그리고 이 부대에 배치된 자들은 최정예에 속하는 에이스 파일럿 뿐이다. 그런데 중립 콜로니의 군비 시설에 당하다니 말도 안 되지 않는가.

하지만 우주를 쳐다보던 라우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아마도 좀 성가신 파리가 한 마리 날아 온 모양인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말 뜻을 몰라서 되묻는 아데스 앞에서 라우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출격하겠소."

 

 

무중력 샤프트 안에서 나탈 버질이 의식을 되찾았다. 자프트 함 침공 소식을 듣자마자 함장의 지시를 받고 사령 부스를 뛰어 나간 것까지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 직후에 폭발이 일어나고 폭풍에 휩쓸려 어딘가에 부딪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었다.

주위에는 희뿌연 연기가 피어 오르고 폭발에 의한 파편과 피투성이 시체 등이 굴러 다녔다. 참혹한 광경에 나탈은 평상시의 침착함을 되찾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겨우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벗어나 그녀는 벽을 발로 차고 사령 부스로 향했다.

"전함은…, '아크 엔젤'은…?!"

조선소를 마주 보는 사령 부스로 뛰어 든 나탈은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 곳은 폭발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면 유리는 산산 조각 났으며, 겨우 남은 비상등이 시체로 가득 찬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조선소 쪽도 마찬가지로, 파괴된 벽측 통로의 난간이 가까스로 매달려 있었으며, 기증기는 쓰러지고 아크 엔젤은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외관 상 눈에 띄는 손상은 없지만, 내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탈은 실내를 돌아 보았다. 산처럼 쌓인 파편 사이에 병사와 사관들의 제복이 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함장의 시체를 발견했다. 나탈은 무릎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버질 소위님?!"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나탈은 몸을 돌렸다. 노이만 상사가 통로에서 부스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살아 남은 자는 폭발 때 전함에 남아 있던 몇 명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이 정비사입니다만…."

노이만이 앞서 걸어가며 상황을 보고했다. 폭발 충격으로 찌그러진 해치를 통해 그들은 전함에 올라 탔다.

나탈이 모습을 드러내자, 한 방에 모인 생존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반대로, 얼마 되지 않는 생존자들을 본 나탈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사관은 소위인 그녀밖에 남지 않은 모양이다.

여하튼 그들은 함교로 향했다. 함교로 들어가자, 나탈은 파일럿 시트 앞에 놓인 스위치를 차례대로 눌렀다. 하나씩 불이 들어오며 기동하기 시작하는 제어판과 스크린을 확인한 뒤 그녀는 겨우 숨을 돌렸다.

"과연 아크 엔젤이군. 이 정도 충격 가지고는 끄떡도 하지 않아."

"하지만 항구 측 격벽 주변에 파편이 밀집해 있습니다. 완전히 갇힌 거나 다름 없습니다."

노이만의 말에 다시 침울해진 나탈이 이번에는 통신 회선을 열었다. 통신기를 통해 요란한 잡음이 들려 왔다. 아직까지 전파 방해가 계속되고 있기 대문이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크 엔젤이 표적이라면 이미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 없다. 실제로 첫 폭발 이후 공격은 멈춘 상태다. 하지만 전파 방해는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혹시 이건 양동 작전이 아닐까? 자프트의 목적은 모르겐레테였어!"

자신이 도출해 낸 결론에 나탈은 충격을 받았다.

 

 

「헬리오 폴리스 전 지역에 레벨 8의 피난 명령이 발령되었습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서둘러 가까운 대피호로….」

정부 안내 방송이 텅 빈 도시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스란은 탈취한 모빌 슈트를 타고 폭발하는 모르겐레테를 빠져 나왔다.

뒤를 쫓아서 탈취하지 못한 마지막 1기가 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키라 야마토….'

헤어지는 날 마지막으로 본, 눈물을 글썽이던 친구의 얼굴이 아스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하고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가능성을 부정했다.

'키라일 리가 없다. 키라는 달에 있다. 이런 곳에서… 하필 지구 연합군의 신형 병기와 연관되어 있을 리가 없다.'

남은 부품과 제조 공장을 파괴 중인 진으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아스란, 잘 했다!」

미겔 아이먼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아스란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러스티는 실패했다! 저 쪽 기체에는 지구군 사관이 탑승하고 있다!"

「뭐?! 그럼 러스티는?!」

아스란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파일럿 중에서도 가장 명랑하고 농담을 즐기던 러스티. 그의 쾌활한 성격은 때때로 라이벌 의식으로 경직되는 동료들의 기분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 곳에 없다.

모니터를 통해 흥분한 미겔이 소리쳤다.

"그럼 저 기체를 내가 포획하겠어! 넌 먼저 이탈해!"

 

 

착지한 순간 기체가 크게 기울어지자, 키라는 쓰러지지 않도록 의자 등받이를 힘껏 끌어 안았다. 여병사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각종 레버와 조절판을 열심히 조종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빌 슈트의 동작은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모니터에 외부 카메라를 통한 영상이 비춰지고 있었다. 키라는 그것을 보고 입을 벌렸다. 낯익은 도로, 일상적인 풍경이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도로 위에는 파편이 널려 있고, 소화 시스템이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지 이곳 저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화면 구석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키라는 놀라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이?! 토르! …밀리아리아…!"

잔해 사이를 뛰어가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도 대피호를 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때 진이 머신 건을 쏘자, 76mm 탄이 발 밑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던 기체가 또다시 좌우로 휘청거렸다.

"으악!"

요동치는 조종석에서 쓰러진 키라는 여병사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물러서 있어! 죽고 싶나?!"

"죄, 죄송합니다!"

키라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모니터 너머로 사벨을 휘두르며 뛰어 들어오는 진을 목격하고 키라는 비명을 질렀다.

여자도 함께 비명을 지르면서 조절판의 단추를 눌렀다.

사벨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잿빛을 띤 장갑이 순식간에 색을 바꿨다.

'당한다!'

숨 죽인 키라의 눈 앞에서 진이 멈추어 섰다. 충격과 함께 키라가 탄 모빌 슈트는 하얀 양팔을 들어 진의 사벨을 막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사태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키라에게 여병사가 내뱉듯이 말했다.

"진의 사벨 따윈 '스트라이크'에게 흠집 하나 내지 못해!"

"스트라이크…?"

그녀가 방금 전에 조작한 것은 페이즈 시프트 시스템이다. 페이즈 시프트－위상 전이(位相轉移) 시스템은 예전부터 이론으로는 연구되고 있었다. 하지만 병기에 응용한 것은 이 X넘버가 처음이다. 일정 전류를 흘려 보내면 위상 전이가 시작되어 장갑이 경질화되며 미사일 등 실탄을 비롯한 거의 모든 물리적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강도를 지니게 된다.

현재 스트라이크의 장갑은 본래의 은회색에서 가슴과 배가 선명한 파랑과 빨강, 사지는 눈부신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진의 후방에 서 있는 탈취된 기체도 마찬가지로 페이즈 시프트를 활성화했는지 짙은 잿빛을 벗어 던지고 선명한 붉은 색으로 변해서 날아갔다.

또다시 진이 공격을 시작했다. 여자가 트리거 단추를 눌렀다. 스트라이크 머리 부분에 설치된 발칸 포에서 75mm 탄이 발사되었지만 하나도 명중하지 않았다. 이 때 키라는 깨달았다.

'이 기체는…. 혹시…?!'

진이 일격을 가하자, 스트라이크가 휘청거리며 후방 건물에 파묻힌 후 겨우 멈추었다. 진은 연달아서 조종석을 향해 사벨을 휘둘렀다.

여병사는 숨을 들이쉬며 공격을 피하고자 정신 없이 페달과 레버를 움직였다. 그 순간, 키라가 모니터를 통해 잔해 사이에 숨어 있는 토르 일행의 모습을 발견했다. 모빌 슈트의 거대한 발이 어색하게 움직이며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밀리아리아가 비명을 질렀고, 토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달려가려고 했으나….

키라는 다짜고짜 계기판을 조작하면서 여자의 손을 밀어 젖혔다. 그리고 눈 앞에 다가 온 사벨을 노려보며 레버를 잡아 당겼다.

몸을 숙인 기체가 진의 사벨을 피하고 그대로 육탄전을 전개했다. 육중한 진의 커다란 몸집이 뒤로 쓰러지는 것을, 지상에서 톨이 눈을 크게 뜨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을 모니터 너머로 확인한 뒤 키라는 한숨을 돌리고 어안이 벙벙해져서 할 말을 잃은 여병사를 돌아 보았다.

"아직 사람이 있어요! 이런 걸 타고 있으니까 어떻게 좀 해 보세요!"

"너!"

여자가 따지듯이 외쳤다. 하지만 키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기판을 점검했다.

"…이런 조잡한 OS로 이 정도나 되는 기체를 조종하다니 말도 안 돼!"

"아, 아직 모두 끝난 게 아냐! 할 수 없잖아?!"

"저리 비키세요!"

쓰러진 진이 다시 일어서서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키라가 외쳤다.

"어서!"

키라의 목소리에 여자가 조종석에서 몸을 일으키자, 키라가 그 자리에 대신 앉았다. 그리고는 좌석 옆에 달린 프로그램 입력 키보드를 꺼내서 놀라운 속도로 입력하기 시작했다. 키라는 프로그램 화면을 노려보는 한편 정면에 있는 진을 포착하고 동시에 도달 예상 시간과 처리 작업에 소요되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 내고 있었다.

"캘리브레이션 절차와 동시에 제로 모먼트 포인트 및 CPG를 재설정…. 쳇! 그럼 유사피질 분자이온 펌프에 제어 모듈을 직결…."

때때로 혀를 차거나 중얼거리면서 키라는 맹렬한 속도로 모빌 슈트의 OS를 재구성해 갔다. 어느 새 진의 사벨이 다가왔다. 키라는 고개를 들고 한 손으로 트리거와 레버를 조작했다. 발사된 발칸 포가 이번에는 명중했다. 그리고 밀어 젖히듯이 진의 팔을 튕겨 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손가락은 일반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속도와 정확함으로 키를 두드리고 있었다.

"뉴럴 링키지 네트워크 재구축─ 메타 운동야(運動野) 파라미터 갱신, 피드 포워드 제어 재기동, 전달 함수─ 코리올리 편차 수정─ 운동 루틴 접속, 시스템, 온라인, 부트 스트랩 기동…!"

머신 건을 다시 움켜 쥔 진의 동작을 보며 키라가 페달을 밟았다. 이에 즉각 반응한 스트라이크가 높이 뛰어 올랐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어색한 동작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진이 뒤쫓아 날아왔다. 키라는 사람과 시설이 적어 보이는 광산 구역을 향해 날아가면서 사양을 살펴 보았다.

"그 밖에 무기는… 남은 것은 '아머 슈나이더'…?"

모니터에 기체 도면이 표시되자 머리 부분 발칸 포 이외에 허리 부분에 수납된 어설트 나이프가 깜빡인다. 키라는 혀를 찼다.

"이것 밖에 없다니!"

단추를 누르자, 기체의 허리춤에서 거대한 나이프가 튀어 나왔다. 그것을 잡고 머신 건을 난사하며 뒤쫓아 오는 진을 향해 뒤돌아 날았다.

"이런 곳에서…."

날아 오는 실탄을 이리 저리 피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스트라이크가 진과 접촉했다.

"그만 두지 못해!!"

키라가 다루는 기체의 속도와 기동성에 아머 슈나이더의 칼날이 적기 목 부분의 연결 부위에 피할 틈도 없이 내리꽂혔다. 전기 회로에서 불이 뿜어졌다. 동작을 멈춘 진은 균형을 잃고 경사면에 쓰러졌다.

좌석 뒤쪽에서 모든 것을 지켜 본 여병사는 놀라운 표정으로 모니터를 본 뒤 키라를 바라보았다. 경악이 가득 찬 눈동자에는 뭔가를 알아 차린 듯한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미겔 아이먼으로부터 비상 연락! 기체를 잃은 모양입니다!」

조종석으로 전달된 통신 내용에 라우 르 크루제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가면에 가려져 있어서 실제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항이 거의 없으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오롤의 추락에 이은 이번 소식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콜로니 내부에 침입한 미겔이 당했다는 사실은 탈취하지 못한 나머지 기체가 그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미 자신의 전용 모빌 슈트 '시그'에 올라 탄 라우는 함교에 있는 아데스 함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가 출발하면 모빌 슈트를 일단 귀환시키고 D장비를 준비하시오."

"D장비… 말입니까?"

그것은 요새 공략용 최고 중장비를 가리킨다. 모니터 너머로 놀란 표정을 지은 아데스에게 미소 지어 보인 뒤, 라우는 기체를 발진시켰다.

시그는 진의 차세대기로 개발된 모빌 슈트다. 진에 비해 날렵한 은백색 몸체에 분사기가 추가되어 추진력이 강화되었다.

헬리오 폴리스로 귀환하려던 제로가 망설이듯이 기체를 되돌렸다. 그것을 목격한 라우가 시그의 조종석에서 중얼거렸다.

"내가 널 느끼듯이 너도 날 느끼는 거냐…? 불행한 운명이군, 무우 라 프라가…."

그의 말투에는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기묘한 희열이 뒤섞여 있었다.

라우의 모빌 슈트가 무우의 모빌 아머에 접근했다.

시그의 접근을 재빨리 눈치 챈 무우는 라이플 저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엇갈린 상태에서 배후를 쳤다. 붉은 뫼비우스의 건 배럴이 전개되면서 사방에서 라우의 기체를 노렸다. 하지만 라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피해 버렸다.

"무우 라 프라가, 네 녀석은 늘 내 길을 방해하는군! 물론 너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겠지만!"

 

 

"저 자식… 라우 르 크루제!"

제로의 조종석에 앉은 무우가 욕설을 입에 담았다. 신기하게도 상대방이 누군지 무우도 느낄 수 있었다. 여태까지 전쟁터에서 수 차례나 서로의 목숨을 노린 숙적이다. 그의 명성과 전투 능력은 이미 숙지하고 있었으나, 감각보다 깊은 곳에서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등줄기를 칼날로 쓰다듬는 듯한 불쾌한 전율을.

두 기체는 잠시 교전을 했는데, 공격하는 척하면서 느닷없이 라우의 시그가 방향을 틀었다.

"헬리오 폴리스 내부로…?!"

헬리오 폴리스 항구로 뛰어 든 라우의 기체를 무우가 뒤쫓았다.

라우는 항구를 순식간에 지나쳐서 콜로니의 척추에 해당하는 센터 샤프트로 향했다. 그리고는 무중력 샤프트 내에서 공장 시설을 방패 대신 이용하면서 뒤쫓아 오는 제로에게 라이플을 겨냥했다. 무우도 라우의 기체를 조준하려 했지만 샤프트를 손상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앞서서 마음껏 공격할 수 없었다.

시그의 라이플이 제로의 건 배럴을 차례로 격파했다. 무우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곧이어 공격을 개시하는 무우를 라우가 가까스로 피했다.

갑자기 시그의 라이플이 샤프트 내벽을 향하는 것을 본 무우는 당황했다.

'안 돼!'

뻥 뚫린 샤프트의 구멍을 통해 라우가 콜로니 내부로 침입했다.

"저 자식이…!"

무우는 뒤따라 구멍을 통과했다. 콜로니 내부의 풍경이 디오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졌다. 무참히 파괴된 도시─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구역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표에 우뚝 선 흰 모빌 슈트가 보였다.

"마지막 남은 기체인가?!"

무우도 키라의 기체를 알아 본 모양이다. 시그가 곧바로 최후의 X넘버를 향해 돌진하자, 무우가 그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했다.

"보낼 수 없지…!"

두 기체는 공중에서 뒤엉키듯이 날아가며 서로를 공격했다. 시그가 쏜 총탄이 제로의 기체를 뚫었다.

"윽…!"

제로가 라우의 공격을 막지 못한 채 검은 연기를 뿜어 내며 추락했다. 시그가 착지하려는 곳에는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X넘버가 있었다.

 

 

"뭐라고요?! 전함을 발진시키라니…, 이 인원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노이만이 항의했다. 하지만 나탈은 기동 작업을 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그를 질타했다.

"우는 소리 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봐! 모르겐레테는 아직 전투 중일지도 몰라! 이대로 모른 척 할 수 없잖아!"

토노무라 하사가 인원 몇 명을 이끌고 들어왔다.

"명령하신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모조리 데려왔습니다!"

"좌석에 앉아! 컴퓨터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서 하면 돼!"

명령을 내리는 나탈을 노이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려 했다.

"밖에는 아직도 자프트 전함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전투를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나도 알아. 전함 기동과 동시에 특장포 발사 준비. 노이만 상사, 할 수 있겠지?!"

나탈이 소리치며 노려보자, 노이만도 결국 수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일럿 시트에 뛰어 들어가 계기판을 향했다.

"발진 시퀀스 스타트! 비상 사태이므로 프로세스 C30에서 L21까지 생략! 주동력 온라인!"

함장석에 앉은 나탈이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렸다.

"출력, 상승 이상 없음! 정격 출력까지 450초 남았습니다!"

"너무 느려! 헬리오 폴리스와의 전선관 상태는?!"

갑자기 말을 걸자, 토노무라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사, 사용 가능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쪽을 통해서 전력을 나눠 받도록! 전선관 온라인! 전력을 누산기에 접속…."

순서대로 발진 시퀀스가 진행되었다.

"…주동력 접속, 엔진 이상 없음. 아크 엔젤 전 시스템 온라인… 발진 준비 완료!"

노이만이 불안함을 감추며 외치자, 나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밀페 격벽 폐쇄! 전원 충격에 대비하라! …특장포 발사와 동시에 최대 전속! 아크 엔젤 발진!"

 

 

─쿠웅…!

폭발음과 함께 대지가 흔들렸다. 진을 쓰러뜨린 뒤 한숨 돌린 키라는 굉음에 놀라 위쪽을 올려다 보았다.

새로운 모빌 슈트가 샤프트를 파괴하고 날아 내리고 있었다. 진보다 훨씬 날렵하게 생긴 형태의 은색 몸체, 등에 달린 날개 모양도 다르다. 그 뒤로 지구 연합군 모빌 아머가 뒤쫓아 오고 있었다.

"돌아가…!"

좌석 뒤쪽에서 부상당한 어깨를 부여잡은 여병사가 외쳤다.

"모르겐레테로 돌아가! 무기가 없으면 시그를 상대할 수 없어! 그리고 방금 전의 전투 때문에 전력을 거의 다 소모했을 거야. 배터리를 교체해야 해! 전력 공급이 안 되면 페이즈 시프트 장갑도 아무 소용 없어!"

그녀의 말과 동시에 기체에 충격이 가해졌다.

"으아악!"

라이플이 연속으로 발사되었다. 미처 피하지 못해 몇 발이 스트라이크를 강타했다. 스트라이크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으며 충격으로 부상을 입은 여병사가 정신을 잃었다.

"윽…!"

키라는 기체를 조종해서 겨우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시그가 접근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광산의 암벽이 무너져 내렸다. 주위에 자욱이 깔린 흙먼지를 헤치며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전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함이… 콜로니 내부에?!"

자신들이 생활하던 콜로니 도시 위로 전체 길이 300m 이상 되는 전함이 떠 있었다. 그 규모와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외관을 키라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자프트의 모빌 슈트를 목격했는지 전함 함미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시그는 추격해 오는 미사일을 격파하고 콜로니를 지탱하는 샤프트 후방으로 몸을 피했다. 시그의 동작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미사일이 샤프트에 명중하면서 차례로 폭발을 일으켰다. 지표가 삐걱거리듯이 흔들렸다.

"잠깐…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키라는 분노를 느꼈다. 시그가 전함의 공격을 피하는 동안 모르겐레테로 운송하려다 멈추어 선 트레일러를 발견했다.

"이건 무기인가?!"

물어보려 했으나 여병사는 조종석 바닥에 쓰러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도 빨리 치료해야 하는데….'

키라는 입술을 깨물고 모니터에 떠오르는 정보를 바탕으로 '런처 스트라이커'의 파워 팩을 꺼냈다. 크고 긴 포신과 발칸이 한 세트로 되어 있는 팩을 스트라이크 등에 짊어지듯이 맞춰 끼웠다. 왼쪽 어깨 뒤쪽에 320mm의 초고임펄스 저격포 '아그니'를 싣고, 오른쪽 어깨에 120mm 발칸 포와 350mm 건 런쳐 두 종류를 실었다.

시그가 이 쪽을 발견했다. 키라는 손을 뻗어 조준 스코프를 꺼낸 후 들여다 보았다. 다가오는 시그가 포착되고 조준 완료 표시에 불이 들어왔다.

키라는 방아쇠를 당겼다. 스트라이크가 허리에 붙인 채 쏜 '아그니'로부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방출되었다. 잠시 눈 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미리 감지한 시그가 서둘러 피했지만 굵은 빛줄기는 그의 오른팔에 명중하고서도 그대로 똑바로 콜로니 내벽을 향해 뻗어 나갔다.

"아아앗?!"

콜로니 지표가 뜨겁게 달아오른 뒤 외벽과 함께 바깥으로 부풀어 올랐다. 빔이 사라진 뒤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키라는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얼굴이 창백해진 채, 좌석 위에서 얼어 붙었다.

"이… 이런 일이…."

'일개 모빌 슈트에게 이러한 화력을 부여하다니….'

손에 쥐고 있는 무기의 엄청난 위력에 전의를 상실한 키라는 적이 손상된 기체를 돌려서 새로 생긴 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기만 했다.

 

 

아스란 자라는 탈취한 기체를 타고 헬리오 폴리스를 탈출하여 베사리우스로 향하고 있었다.

'키라….'

방금 전에 화염 속에서 바라본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술은 틀림 없이 '아스란?' 이라는 모양으로 움직였다.

설마 이런 장소에서 죽마고우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냐…, 그 녀석이 저런 곳에 있을 리가 없어…."

부정하면서도 마음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키라 야마토를 잘못 볼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순간, 콜로니 격벽 내부로부터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더니 이윽고 크게 폭발했다.

"…!"

공기가 빨려 나가고 그 안에 포함된 수증기가 순식간에 얼어 붙어 흰 구름처럼 휘날렸다. 기류에 휘말린 유출물이 태양 광선을 반사하면서 반짝거렸다. 그 사이를 돌파하듯이 뛰쳐 나온 모빌 슈트가 있었다. 대장기였다. 아스란도 통신을 들을 수 있었다.

「…공격 당했다. 귀함한다!」

'크루제 대장이 공격을?! 대체 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신의 임무는 탈취한 이 기체를 무사히 베사리우스로 가져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스란은 망설였다. 또 다시 어린 시절의 키라 야마토가 어른거렸다.

"…에잇!"

그는 키라가 확실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기체를 되돌렸다.

 

 

"…정말 굉장하다. 이걸 네가 조종했어?"

"건담? 그게 뭐야?"

"그보다 먼저 이 사람을 치료해야지…. 어, 깨어난 것 같아."

마류 라미아스는 천천히 현 상황을 인식하며 자신이 공원 벤치에 눕혀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린 뒤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의 검은 머리 소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다. 곁에 무릎 꿇은 자세로 있는 X105=스트라이크와 조종석 주위에 몰려 서서 소란스럽게 웃고 떠드는 민간인 소년들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눈 앞에 내민 손을 향해 그녀는 권총을 겨누었다.

"기체에서 떨어지지 못해?!"

움직일 때마다 부상 당한 어깨가 욱신거렸다. 그녀를 쳐다보는 소년들의 얼굴에 얼빠진 표정이 떠올랐다. 마류는 다짜고짜 머리 위로 총을 한 발 쐈다.

"무… 무슨 짓입니까?!"

항의하려는 검은 머리 소년의 코 끝에 총구를 들이대고, 조종석에서 소년들이 내려오자 마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이건 군의 최고 중요 기밀이다. 민간인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냐."

소년들이 일제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그녀는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저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의식을 잃고 소중한 기체로부터 잠시라도 떨어진 자신에게도 화가 났지만, 저들도 조금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녀의 눈이 검은 머리 소년에게 고정되었다. 스트라이크와 조종석에서 목격한 그의 능력, 그것은….

"내 이름은 마류 라미아스. 지구군 장교다. 미안하지만 너희들을 이대로 보내 줄 수는 없어. 이유가 어떻든 군의 최고 기밀을 목격한 너희들은 상부와 연락해서 처우가 결정될 때까지 나와 행동을 함께 해 줘야겠다."

예상대로 소년들은 일제히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째서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우린 헬리오 폴리스의 민간인이에요! 중립이라고요. 군대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요!"

"닥치지 못 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들 주제에!"

마류의 꾸짖음에 다들 기가 죽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중립이니까 난 상관 없어, 라고 말하면 그만이라고 아직도 생각하는 거니? 주위를 좀 둘러 보라고!"

소년들은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람 하나 남지 않은 도시, 훼손된 샤프트, 자동 복구 중이지만 뻥 뚫린 구멍 너머로 보이는 우주 공간….

"이게 바로 너희들의 현실이다. …너희들이 사는 세상 밖은 전쟁 중이야."

 

 

"라미아스 대위님!"

소년들에게 스트라이크의 부품을 실은 트레일러의 운전을 맡긴 채 마류가 아크 엔젤에 도착하자, 나탈 버질이 뛰어 왔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귀관이야말로 아크 엔젤을 움직여 줘서 고마워.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어."

"아… 감동의 재회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누군가 곁에서 말을 걸자, 마류가 그 쪽을 돌아 보았다. 파일럿 슈트 차림의 키가 큰 청년이 단정한 외모에 약간 경박해 보일 정도로 넉살 좋은 미소를 띠고 다가오고 있었다.

"지구군 제７기동 함대 소속 무우 라 프라가 대위요. 잘 부탁해."

"아…, 지구군 제２우주 구역 제５특무사단 소속, 미류 라미아스 대위입니다."

각자 경례와 함께 자신을 소개한 뒤, 무우가 입을 열었다.

"승선 허가를 받고 싶은데. 내가 타고 온 함선은 자프트 군에 의해 추락했기 때문에…. 이 전함의 책임자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한 사람은 나탈이었다.

"함장을 비롯한 주요 사관은 모두 전사했습니다. 따라서 라미아스 대위님이 그 역할을 맡으셔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뭐…?!"

마류는 충격적인 보고에 얼어 붙었다.

"함장님이…?!"

곁에서 무우가 살짝 물었다.

"…난 문제의 X넘버 파일럿이 될 햇병아리들을 호위하러 왔는데, 그들은 어디에 있지…?"

나탈이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경박해 보이던 무우의 얼굴이 굳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 때 함내 통신이 들어왔다.

「라미아스 대위님, 버질 소위님! 급히 함교로 와 주십시오!」

"무슨 일이지?!"

「또 다른 모빌 슈트입니다!」

죽은 이들을 애도할 틈조차 없었다. 몸이 경직된 마류의 등을 무우가 두드렸다.

"지휘를 맡아! 당신이 함장이야."

"내, 내가…?!"

"그래. 내가 선임 대위지만 난 이 전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니까."

마류와 나탈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스트라이크는 아직 밖에 있나?!"

"회수할 시간이 없습니다. 직접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크 엔젤 발진 준비! 전원 제１전투 배치!"

전함 내에 사이렌이 울려 퍼지자, 밀리아리아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키라… 무사해야 할 텐데…."

토르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힘껏 끌어 안았다.

요란한 폭발음이 콜로니를 뒤흔들었다. 격벽에 새로운 구멍이 뚫리고 그 곳으로부터 진 편대가 침입해 오고 있었다. 함교 CIC로 들어간 무우는 각자 대형 미사일 런쳐와 특화 중입자 포를 장비한 진을 모니터로 포착하고 혀를 찼다.

"거점 공격용 중폭격 장비 아냐? 저걸 여기서 사용하겠다는 거야?"

편대 후방에 반짝 빛나는 붉은 기체가 한 대 보였다. 정보를 분석하던 토노무라가 숨을 들이쉬었다.

"하… 한 대는 X303=이지스입니다!"

탈취 당한 X넘버의 1기다. 함교 내에 무거운 공기가 드리워졌다. 자신들이 애써 만들어 낸 모빌 슈트의 공격을 받아야 하다니….

"벌써 실전에 투입할 수 있단 말인가?!"

마류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그러자 무우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지금은 적군이야. 공격 당하다가 죽고 싶진 않겠지?"

"코린토스 발사 준비! 레이저 유도, 엄중히!"

CIC에 있는 나탈의 지령과 함께 마류가 명령했다.

"페이즈 시프트에 실탄은 무용지물이야. 주포 레이더 운동, 초점 확산! 전투 중에는 콜로니를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본 함은 헬리오 폴리스 탈출을 최우선으로 한다!"

 

 

스트라이크에 탑승한 키라는 병사가 아닌 장교로 판명된 마류 라미아스 대위로부터 파괴된 모르겐레테에서 스트라이크의 부품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을 수행하던 중 진이 돌입하는 폭발음에 깜짝 놀란 키라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진이 장비한 대형 미사일과 긴 포신의 라이플을 알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것을 콜로니 내부에서 사용하다가는…!

"소드 스트라이커…, 검인가?"

키라는 잔해 속에서 꺼낸 컨테이너를 바라보여 그것을 장착했다. 이번에 찾아 낸 스트라이커 팩은 모빌 슈트의 신장을 훨씬 웃도는 장검이었다. 15.78m의 대함도 슈베르트 게벨─ 실검과 수납 빔에 의한 두 종류의 날을 겸비하고 전함 장갑조차 단숨에 베어 낼 수 있는 강도를 지닌 근접 전용 장비다.

"…이거라면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

콜로니에 뚫린 흔적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키라는 스트라이크를 타고 높이 뛰어 올랐다. 그를 향해 진의 대형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경고음이 조종석에 요란하게 울리자, 키라는 무의식 중에 회피 기동을 전개했다. 키라를 따라오던 미사일은 샤프트 뒤로 숨은 스트라이크 때문에 샤프트의 지주와 충돌해서 폭발했다. 센터 샤프트와 지상을 연결하는 지주 샤프트는 마치 밧줄이 끊어지듯이 뜯어지면서 서서히 아래쪽으로 추락했다. 바닥에 깔린 무수한 건물들이 산산 조각 나 버렸다.

"아앗…!"

키라는 비명을 질렀다. 다음 미사일이 또 발사되었다.

'더 이상 콜로니를 훼손해서는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어금니를 악물며 다가오는 미사일을 노려보았다. 스트라이크는 조금 뒤로 물러 선 뒤 미사일과 충돌했다. 화염이 솟아 오르고 기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격추를 확신한 진의 눈 앞에 피어 오르는 연기 속에서 스트라이크가 뛰쳐 나왔다. 키라는 한 발의 미사일을 슈베르트 게벨로 절단한 뒤, 다른 한 발을 어깨로 막았던 것이다.

"아아아앗!!"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두른 키라가 진의 동체를 단번에 절단하자 기체가 폭발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이지스가 상공에서 날아 내렸다. 낯 익은 붉은 기체를 앞에 두고 키라는 눈을 크게 떴다.

"저 모빌 슈트는…!"

아스란과 만난 직후에 모르겐레테에서 날아간 기체였다.

'아냐, 저건 아스란이 아냐. 아스란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람을 해칠 리가 없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키라는 부정했다. 그러나….

「키라… 키라 야마토!」

무선을 통해 들려 온 목소리에 키라는 고개를 들었다.

"아스란? …아스란 자라?!"

「역시 키라였어? 키라 맞아?!」

두 사람 주위에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진의 미사일 런쳐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가차 없이 아크 엔젤을 향해 날아 들었다. 종횡무진으로 날아 다니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공격하는 자프트의 모빌 슈트에 비해, 콜로니 훼손을 신경 쓰며 방어하는 아크 엔젤은 약간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 미사일은 지표와 샤프트에 충돌한 뒤 폭발했다.

날아 다니는 진 1기에 아크 엔젤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명중했다. 추진 가스에 불길이 옮겨 붙은 진이 폭발하자, 이 때문에 다른 지주 샤프트가 손상을 입고 연속으로 폭발했다. 샤프트가 타오르는 긴 꼬리를 흔들면서 지표 위로 쓰러지자 그 충격으로 콜로니 전체가 흔들렸다.

동료를 잃고 집요하게 공격해 오는 진에 맞서 아크 엔젤에서 발사된 미사일은 번번이 빗나가고 샤프트와 지표 위로 떨어졌다.

모빌 슈트 너머로 죽마고우와 맞서게 된 키라는 잠시 넋 나간 표정으로 있었다. 하지만 충격이 가시고 의혹이 확신으로 바뀌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올랐다.

"어째서… 어째서 네가!"

키라는 울음을 참으면서 외쳤다. 군대(살인 집단)에 소속되는 일은 아스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헬리오 폴리스에… 중립 콜로니에, 어째서 이렇게 심한 짓을…!"

아까부터 요란하게 삐걱거리며 과부하를 견디지 못해 몬을 비틀 듯이 흔들리던 센터 샤프트가 드디어 붕괴되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콜로니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샤프트가 분해되기 시작하자, 남아 있던 지주 샤프트가 실이 끊어지듯이 차례로 튕겨 나가며 지표와 충돌하면서 더욱 붕괴에 박차를 가했다. 프레임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뒤틀렸다. 샤프트를 잃은 외벽은 지탱해 줄 지주를 상실하고 회전에 의한 자체적인 원심력에 휘둘리면서 구조체를 따라 도려내듯이 반듯하게 분해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콜로니 전체에 균열이 퍼져 나갔다.

「너야말로…! 어째서 그런 것에 타고 있지?!」

아스란도 소리 질렀다.

「코디네이터인 네가… 어째서 지구군의 모빌 슈트 따위에…!」

공기의 급속한 유출에 의한 난기류가 콜로니 전체에 휘몰아 치자, 이미 붕괴된 건물 파편과 일렉카가 나뭇잎처럼 날아 올랐다. 이곳 저곳에서 불길이 치솟았으나, 연소하기 위한 공기가 모자라자 숨이 끊어지듯이 사그라졌다.

구명정 역할을 맡고 있는 대피호가 일제히 우주로 사출되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헬리오 폴리스가…."

키라는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마주 보고 있는 스트라이크와 이지스의 발 밑에 놀라운 속도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기체에 유출물이 소리 내며 부딪혔다. 낯익은 도시가 붕괴되어 갔다. 건물 지붕이 떨어져 나가고, 유리창이 깨지며, 도로가 균열하면서 그 너머로 시커먼 진공 공간이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난기류가 기체를 뒤흔들자 더 이상 컨트롤할 수 없었다.

"으아아악!"

키라는 비명을 질렀다. 버니어를 가동시켰으나 기류에 휩쓸려 허공으로 빨려 들어갔다.

"키라!"

아스란이 키라의 이름을 외치며 이지스를 이동시켰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난기류에 밀려난 두 기체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스트라이크는 흩어지는 외벽과 함께 끝없는 우주 속으로 밀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