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사 -下- 회의주의자들, 신플라톤주의자들

회의주의자들

 

지금 내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것도

언젠가는 상대적인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피론]

 

플레이스타르코스의 아들인 피론은 기원전 365년과 360년 사이에 파이돈이 세운 학교가 꽃을 피웠던 도시, 엘리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화가로 밥벌이를 해 보려고 했지만 실력이 변변치 못해 그 일을 집어 치운 사람이다. 카리스토스의 안티고노스에 따르면 엘리스의 공공 체육관에 그가 그린 성화 봉송자 그림은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림을 포기한 그는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고, 소크라테스 학파의 철학자인 브리손의 집에 드나들기도 했는데, 뒤에는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압데라의 아낙사고라스에게서 철학을 공부했다.

 

기원전 334년에는 스승 아낙사고라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정벌에 참여했는데, 10년 동안 이곳 저곳을 둘러 보며 동방의 가르침을 두루 맛볼 수 있었다. 오늘 날에도 그렇지만 그 무렵 동양에는 마술사나 고행자, 명상을 주로 하는 종교의 수행자 등 정념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추구하는 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고행자들이 즐비했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일화가 있다. 페르시아에 칼라노스라고 하는 한 사제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밀려 들어오자 화형대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화형대가 완성되자 그 앞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침입자들을 위해 복을 빌어 준 다음 활활 타오르는 불꽃 위에 드러누웠다. 스스로 작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온 몸이 타는 동안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동양의 고행자라곤 본 적이 없었던 피론은 그 장면에 기겁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어렵긴 하되 의지의 힘으로 고통을 다스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피론은 그 뒤 인도에 가서 도교론자들과 나체 수행자 등 다른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을 만났는데, 이들과의 만남에서 그는 최후의 평온에 도달하려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음', 곧 '무위(無爲)*'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위(無爲)'란 도가의 가르침으로 남에게 양보하고 대응하지 않는 것이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답변이라는 것이다.

 

나이 마흔에 고향 엘리스로 돌아온 그는 그 곳에 회의학파의 첫 학교를 세운다. 하지만 학교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기를. 그의 학교는 리케이온이나 '정원'처럼 제대로 된 학교가 아니었다. 특별히 강의 시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쩌다 생각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생의 문제에 대해 한 마디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젊은이들과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몰려 다녔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한 수 가르쳐 준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상의가 되곤 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피론주의자 또는 회의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의 가르침의 골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마음의 상태, 곧 '판단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포케)'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마음의 상태(아파시아)', 그리고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인 '심정부동(아타락시아)'에 이르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손에 장을 지지겠노라고 확언할 수 있는 가치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아름답거나 추한 것, 본질적으로 좋고 나쁜 것, 본질적으로 옳고 그른 것, 본질적으로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철 같은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 심한 병을 앓는 것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피론의 심정부동, 곧 평정심에 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그의 일화들을 전해 주는 사람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이다.

피론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 조금 무미건조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열띤 토론을 하다가 상대방이 자리를 떠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허공을 향해 하던 말을 계속하고, 질문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스승 아낙사고라스와 거리를 걷다가, 스승 어른께서 진흙 구덩이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피론은 전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하던 말을 계속했다. 잠시 뒤,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스승 아낙사고라스가 쫓아 와 제자의 초연함을 칭찬했다고 하니 그 제자에 그 스승인지라 우리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 피론이라는 사람은 초연함이 지나쳐 좀 부주의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말에 의하면 그가 외출을 할 때면 끊임 없이 마차에 치일 뻔한다든가, 구덩이에 빠질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나이 아흔이 되도록 아무 사고 없이 잘 살았는데, 그것은 십중팔구 제자들이 교대로 그의 곁을 지키면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무 글도 남기지 않았지만 티몬, 아이네시데모스, 누메니오스 등의 제자들이 그의 몫까지 대신해서 써 주었다.

 

회의주의자들의 행적은 소피스트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이유는 제쳐 두더라도 소피스트와 회의주의자 모두 다 진리가 존재하는가 하는 데에 의혹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두 부류의 철학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피스트들은 변호사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쉽게 말해 자유 직업인의 냄새를 풍긴다는 말이다. 반면에 회의주의자들에게서는 소피스트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지식인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소피스트들은 진리를 부정하면서 말을 밑천으로 실적을 올렸지만, 회의주의자들은 '아파테이아', 곧 정념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랐다. 소피스트들은 신뢰의 대상을 진리로부터 인간에게로 옮겼지만 회의주의자들은 어떤 이상이나 인간에게도, 진리나 인간이나 말 중 어느 것에도 신뢰를 두지 않았다. 그들의 좌우명은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다" 는 것이었고, 티몬의 말처럼 "나는 사물의 원인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을 묻는 일 자체에도 관심이 없다" 는 것이었다.

굳이 공통점을 찾으려면 회의주의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육체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공통점 말이다. 언젠가 키프로스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참주 니코크레온이 아낙사고라스에게 점심을 들겠느냐고 물었다. 아낙사고라스는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이왕 차리는 김에 디저트 내 올 때, 참주 한 사람의 머리통도 함께 대접해 준다면 기꺼이 응하겠노라고. 그 자리에서는 니코크레온도 못 알아 들은 척 했다. 그러나 몇 해 뒤, 아낙사고라스가 키프로스 근처에서 난파되었다가 그에게 구조되었을 때 그는 복수를 하고 말았다. 커다란 절구통에 그를 집어 넣고, 사형 집행인에게 쇠공이로 내리 찧으라고 명했던 것이다. 그 경황에 우리의 회의주의 철학자 양반께서는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아낙사고라스의 껍데기는 찧어 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아낙사고라스를 찧어 버릴 수는 없도다."

 

이 일화는 저 유명한 코미디언 토토의 '파스콸레 이야기' 라는 개그를 생각나게 한다. 이 개그는 친구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다름아닌 토토와 그의 듬직한 친구 마리오 카스텔라니이다. 토토는 거의 발작을 하듯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다. 그를 본 카스텔라니가 묻는다.

"너 왜 웃고 있니?"

"10분 전에 말이야, 미친 사람인지, 마귀 들린 사람인지 한 사람이 오더니 나더러 '파스콸레, 넌 썩은 고깃덩어리야!' 하더라구! 그러면서 내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먹이는 거야."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아무 것도…. 내가 어쨌으면 좋았겠니? 그냥 웃었어."

"그랬더니? 걔가 뭐래?"

"나더러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야. '파스콸레, 넌 멍청한 놈이야. 널 때려서 죽일 거다!' 그러면서 또 주먹을 네 방이나 날리더라구."

"그래서?"

"나? 웃음이 나와서 참을 수 있어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 '이 바보 같은 녀석이 도대체 어쩌자는 거지?'"

"그래서?"

"계속 주먹질을 하는 거야. 발길질까지 해 대면서 이러더라니까. '파스콸레, 넌 썩은 고깃덩어리야. 널 죽이고 말 거야.'"

"그런데 넌 왜 대꾸를 안 했니?"

"내가 뭘? 난 파스콸레가 아니잖아!"

 

 

[티몬]

 

티마르코스의 아들인 플레이우스의 티몬은 무용수였다. 기원전 322년 한두 해를 전후로 해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메가라로 이사를 갔는데 이 곳에서 스틸폰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티몬은 애꾸눈에 술을 몹시 좋아했는데 회의주의자가 된 것은 피론을 알고 나서였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서였다. 티몬을 증오하던 소요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사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오, 보잘 것 없는 인간, 티몬이여. 그대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피론을 만났다고 말을 하는가? 피티아 제전을 보러 가던 순박한 피론 또한 노망 난 노인처럼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플레이우스의 티몬이 남긴 글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몇 개의 단편이 전해지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꿀이 달다고 단언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꿀이 단 것 같다는 말은 확실하게 할 수 있다."

회의주의자들은 외견(현상)의 존재를 인정한다. 인정하지 않는 것은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 곧 불변의 진리를 부정할 뿐이다. 그러므로 회의주의자는 종교 단체나 정치계에서 활동할 수도 있다. 사제가 될 수도 있고, 군인이 될 수도 있고, 지방자치단체에서 활동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하나의 신조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을 부도덕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그 유혹을 벗어 던지자.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언젠가는 상대적인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이것이 바로 '에포케', 즉 '판단 중지'이다. 적군파의 맹신주의자들이나 1968년의 혁명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신념을 생각해 보라. 수 세기를 피로 물들인 종교 박해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에 대해 오늘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티몬이 사라진 뒤 회의주의를 이끈 사람은 기원전 315년 피타나에서 태어난 세우테스의 아들 아르케실라오스로, 중기 아카데미아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리스 철학사에서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플라톤주의자 한 사람이 회의주의 철학의 우두머리가 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베를린 장벽을 넘는 것과 다름 없는 엄청난 사건이다. 그러나 아르케실라오스는 플라톤의 초감각적인 세계로부터 모든 것을 부정하는 피론의 세계로 엄청난 장벽을 넘어 간 장본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인 표현이었고, 도덕적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한 마디로 불변의 도덕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었다. 아르케실라오스는 두 개의 가르침을 융합시켰고, 자신이 세운 아카데미아를 회의주의로 채색했던 것이다.

 

아카데미아의 회의주의자 중에 카르네아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아본디오 신부*의 대화에도 나오는 사람이다. 카르네아데스는 기원전 213년에 태어나 128년에 죽었으니 그가 주로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2세기이다.

그는 광범위한 교양과 특별한 언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크리톨라오스와 스토아 학파의 바빌로니아 사람으로 디오게네스와 함께 로마에 대사로 파견되었던 일로 유명해졌다. 사절의 임무는 아테네에 부과된 50탈란톤의 벌금을 탕감해 달라는 것이었다. 세계의 수도 로마에 들어간 세 사람은 이 기회에 로마 사람들에게 그리스 사람들이 연설을 하는 데에 얼마나 타고 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 시청 광장에 간 그들은 저 유명한 '자가당착의 연설'이라고 불리는 연설을 했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연설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정반대 되는 입장으로 열변을 토해 내는 웅변 양식이었다. 로마의 젊은이들은 헬라스, 곧 고대 그리스에서 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 들이던 경향도 있었던 데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기에 미친 듯이 박수를 쳤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지성인들은 이들을 공화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大) 카토*가 이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세 사람이 시민들 사이에서 얻은 성공에 위기를 느낀 그는 원로원을 움직여 이들을 추방하고 만다.

대 카토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엄격한 생활을 하는 사람만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인정도 용서도 없었다. 마닐리우스라는 원로원 의원이 광장에서 부인과 포옹을 했다고 해서 그를 추방시키기까지 한 사람이었으니, 그가 노예들을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 생각했다든가, 노예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간질시켜야 한다고 믿은 사람이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이유가 없으리라. 로마의 지성 대 카토는 노예가 나이가 들면 계속 데리고 있기보다는 팔아 치우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었고, 잘못을 범한 노예는 동료들로 하여금 사형 선고를 내리게 하여 스스로 자기 목을 조여 숨을 거두게 한 사람이었다. 그는 철학이나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의심을 품은 사람이기도 했다.

 

*유명한 알레산드로 만초니(A.Manzoni, 1785~1873)의 소설 『약혼자』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한 사람. 나약하고 신념이 약한 그는 힘 있고 교만한 로드리고 신부의 간섭에 굴복, 렌조와 루치아의 결혼 주례를 거부한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기원전 234~149). 로마의 정치가이자 웅변가. 고리대금을 금지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억제하는 세금을 도입하는 등 개혁을 실현한 그는 그리스의 영향이 로마의 도덕 규범을 훼손한다고 믿고 끊임 없이 그리스를 배격하려고 했다.

 

회의주의자들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되는 것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이들이 당시 흔하던 점쟁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아무 것도 믿지 못하던 이들이 점쟁이에 대해서는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회의주의자인 아를라테의 파보리노스가 하는 말을 들어 보자. 점성술가들을 향한 독설이다.

"이런 속임수와 사기 행위는 항상 남에게 신세를 지는 사람이나, 거짓말로 벌어 먹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들은 밀물과 썰물처럼 몇 가지 현상들이 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천체에 달려 있다고 믿게 하려 한다. 그러나 달이 바다 표면을 조금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구실로, 수도관이나 담을 공동으로 쓰는 이웃 사람들이 의견 차이로 싸우는 일까지 하늘의 말 고삐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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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자들

 

나는 육체를 벗어 던지고 자신으로부터 깨어난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지고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이 때 나는 자신이 가장 숭고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콤플렉스 때문에 그는 자신에 대해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화가나 조각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초상을 그리게 해 달라고 간청하던 아멜리오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우리 둘레에 쳐 놓은 이 껍데기를 끌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것을 오래 보존하려고 하는 까닭을 모르겠네. 마치 오래 오래 두고 볼 가치라도 있다는 듯이 말이네.' 아멜리오스 친구 중에 카르테리오스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당대 최고 가는 화가여서, 아멜리오스는 그를 플로티노스의 강의에 들어가게 했다. 충분히 살펴보고 나서 기억으로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쓴 『플로티노스의 생애』 는 이렇게 시작된다. 플로티노스는 아프리카 출신 철학자로 이집트의 리코폴리스에서 기원전 205년에 태어났는데, 내성적인 성격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상한 아이였다고 하니, 어릴 적부터 일찍이 회의주의자의 싹이 보인 사람이었다. 아니, 여덟 살이 되도록 가끔씩 어머니의 젖을 빨았다고 하는 걸로 봐서, 솔직히 말해 정상이 아닌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233년이 되면 플로티노스는 정신적인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그에게 가르침을 준 여러 스승 중 누구도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그에게 암모니오스 사카스를 소개해 준 것은 그가 그런 상황에 빠져 있을 때였다. 플로티노스는 새로운 스승의 말에는 귀를 기울였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분이야말로 바로 내가 찾던 분일세."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플로티노스는 또 다시 동양의 철학에 대해 알고 싶다는 열정이 자라나게 된다. 이미 피론이 그랬듯이 페르시아인과 마기인, 나체 수행자와 인도의 수행자들이 가르치던 사상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무렵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가 페르시아인들을 공격하는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는 병사로서 이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실현한다.

그러나 플로티노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고르디아누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니었다. 메소포타미아에 발도 들여 놓기 전에 전투에 패배하고 자신의 부하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안티오키아로 도망갔다가 로마까지 피신한다. 이미 나이 마흔을 넘긴 때였다. 막일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었지만 그 때까지 험한 일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지라 살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한다는 것이 철학 학교를 열게 된 것인데, 솔직히 학교라기보다는 철학자 집단인지 종교 집단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에는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 의사, 남녀 젊은이, 과부, 호기심 때문에 들른 사람, 로마의 원로원 의원 등 온갖 잡다한 무리들이 다 드나들었다. 원로원 의원 중에 로가티아누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플로티노스의 가르침을 받고자 자신의 재산과 관직과 노예를 모두 포기했다.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치솟자 귀족 가문의 자제들을 그에게 맡기는 일이 유행이 된 떄도 있을 정도였다. 학교가 있던 건물은 제미나라고 하는 여제자의 소유였는데 이 여자는 뒤에 플로티노스의 아내가 된다.

 

신플라톤주의의 가르침은 감각 세계로부터 벗어나 무아의 황홀경에 이를 때까지 신성과 합일하는 것이다. 무아의 황홀경이란 일종의 정신적인 오르가슴에 이르는 것이다. 스승의 전기를 쓴 포르피리오스는 이러한 황홀경을 평생, 나이 일흔이 되어 단 한 번 경험했다고 하는데, 플로티노스는 무려 네 번이나 경험했다고 한다.

플로티노스를 흠모하던 사람 중에는 갈리에누스 황제와 그의 부인 솔로니나 황비가 있는데, 플로티노스는 이들에게 캄파니아에 철학자들을 위한 도시를 지어 달라고 한다. 플라톤의 법대로 살아 갈 수 있는 도시였으므로 플라토노폴리라는 이름까지 미리 지어 놓았다. 갈리에누스 황제와 솔로니나 황비는 그의 제안에 찬성했지만, 궁정의 신하들 중에서 플로티노스를 시기하던 사람들 때문에 그의 꿈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즉시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은 플로티노스가 생각하는 도시는 6세기 전 플라톤이 시라쿠사에 세우려고 했던 그런 도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거룩하신 플라톤께서는 사회의 구조를 바꾸려고 했던 데에 반해, 플로티노스는 철학자들만 받아 들이는 일종의 평화의 오아시스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는 나이 쉰이 되도록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 동문인 헤렌니오스와 오리게네스와 함께 스승 암모니오스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절대로 글로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하는 까닭은 신비적인 경향이 있는 철학 학파들에게서는 언제나 이런 피타고라스적인 분위기, 다시 말해서 약간의 비밀 사교 집단 같은 냄새가 풍긴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지 말라는 규정을 가장 먼저 어긴 사람은 헤렌니오스였고, 이어 오리게네스와 플로티노스도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플로티노스는 이 때부터 불과 15년 동안 54권의 책을 썼다. 그의 이 작품은 포르피리오스에 의해 여섯 그룹으로 분류되어 '엔네아데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전해진다. '엔네아데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각 그룹의 책이 아홉 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엔네아'라는 말은 아홉을 뜻한다.

플로티노스가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그는 이미 시력을 잃었다. 그래서 단숨에 써 내려가야 했고 한 번 쓴 글은 다시 읽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플로티노스는 피부병 때문에 손과 발이 상처로 뒤덮였는데 이것 때문에 로마를 떠나 민투르나이에 있는 제자의 집에서 만년을 보냈다. 나이 일흔 여섯에 세상을 떴는데, 죽는 순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안에 있는 신성을 우주 안에 있는 신성으로 옮겨 가노라."

그 순간 제자들의 눈에는 그의 침대 아래에서 뱀 한 마리가 나와 벽에 난 구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어쩌면 플로티노스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시인이었거나 종교 지도자였는지도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생각 중 몇 마디만 바꾸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나 다름 없었다."

 

 

[플로티노스의 체계]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일자(一者)와 지성(知性)과 영혼(靈魂)이라는 세 위격(位格)이 관념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마치 그리스도교의 성 삼위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는 달리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세 위격은 각 위격의 비중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철학 입문서에는 위격이라는 말 대신에 '기체(基體; 히포스타시스)'라고 되어 있다. '히포스타시스'라는 말은 '아래에 존재하다'라는 뜻이다. '아래에 존재하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는 'hypóstásis', 라틴어로는 'substantia'라고 한다. 실제로 기체는 외견의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초감각적인 세계의 일부가 되는 개념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위격(person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첫 번째 위격인 일자(一者)는 두 번째 위격을 유출하여 창조하였고, 두 번째 위격인 지성은 세 번째 위격을 유출하여 창조하였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위격인 영혼은 감각 세계를 낳았다. 일자는 지성을 포용하고, 지성은 영혼과 감각 세계를 포용한다. '마트리오스케'라는 하나의 인형 안에 또 다른 인형이 들어가고, 그 안에 또 다시 그보다 조금 작은 똑같은 모양의 인형이 들어가는 러시아 인형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 되리라. 일자는 가장 바깥에 있어서 다른 인형들을 자신 안에 포용하는 가장 큰 인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성은 바깥에서 두 번째 있는 것이고, 세 번째인 영혼과 감각 세계는 가장 안에 들어가는 제일 작은 인형이다.

플로티노스의 일자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던 것과 통하는 점이 있는데 파르메니데스의 '하나'와 매우 비슷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 안에 숨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낙시메네스의 '공기'나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과도 닮았다. 따라서 일자는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을 포용한다. 또한 일자는 모든 것이기에 한계가 없는 것이다. 일자의 근본적인 특징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것이니, 이왕 말을 시작한 김에 플로티노스의 세계관을 그보다 앞선 저명한 선배 철학자, 예를 들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과 비교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플라톤의 신은 선, 그 자체, 곧 모든 이데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데아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가 우주를 창조한 신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다. 창조주라기보다는 태양처럼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비추어 눈에 보이게 하는 기능만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은 좀 더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단점이나 미완의 어떤 것으로 보기 때문에 활동 중인 무한의 존재를 부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우주의 밖에 있으면서 자신의 일에만 골몰할 뿐이다. 어쩌면 우주를 중요하게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여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의 모습이 이럴진대 이런 신이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고, 따라서 사유에 대한 사유로 전락하고 만다.

 

플라타노스가 생각하는 두 번째 위격은 '지성(누스)'이요, '정신'이요, 굳이 말하자면 '존재'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존재하는 관념적 현실들의 총합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자가 유일한 것인데 반해, 지성은 다수이다. 지성이 하는 일은 일자를 관상하는 것이요, 세 번째 위격이자 관념적 현실 중 막내인 영혼을 낳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영혼은 감각 세계를 창조한다.

 

플로티노스 체계의 근본적인 원리는 정상과 바닥 사이를 오가는 왕복 운동이다. 삼위의 각 위격은 유출을 통해 하급의 위격을 낳고, 동시에 각 위격은 상급 위격을 관상한다. 물론 일자의 경우는 더 이상 우러러 볼 위의 존재가 없으니 예외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자를 관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플로티노스는 그것이 매우 간단한 일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인 목적 이외의 것을 모두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일자 이외의 것에 우리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애정이나, 일, 여자, 예술, 놀이, 스포츠 등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점이 조금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플로티노스는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무아의 황홀경, 곧 '엑스타시스'가 어떤 것인가 들어 보기로 하자. 엑스타시스는 그리스어로 '자기로부터 일탈함'이라는 뜻이다.

"때때로 나는 육체를 벗어 던지고 자신으로부터 깨어난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지고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이 때 나는 자신이 가장 숭고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법열(法悅)의 상태는 인생에서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이니, 나는 신성한 존재와 하나가 되어 관념적인 모든 존재를 초월한 상태에서 그 분에게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모든 사람이 다 이런 드높임의 경지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음악가와 사랑에 빠진 사람과 철학자…. 이 세 부류에 드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음악가들은 철학의 도움을 받아, 감각적인 소리의 감미로움으로부터 정신적인 감미로움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육체의 아름다움에 머무르지 않고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할 때, 드높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철학자들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철학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아름다운 존재이고, 따라서 관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