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사 :: 나의 친구 살바토레에게

나의 친구 살바토레에게 - 이야기를 시작하며

 

 

살바토레 씨*,

당신은 철학잡니다. 스스로 철학자라는 걸 알지 못할 뿐이지 당신은 분명 철학잡니다. 인생의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그 독특한 방식을 보면 당신은 철학자고말구요. 살바토레 씨가 그리스 철학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항상 지니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언제고 꺼내 볼 수 있는 그런 철학책을 쓰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알기 쉬운 말로 인류 최초의 철학자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써 보기로 한 겁니다.

 

왜 하필이면 그리스 사람 얘기냐구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부터 해야겠군요. 사랑하는 살바토레 씨, 당신은 이탈리아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예 '아테네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볼 때, 태양이 쨍쨍 내리쬐고 사람들이 말 많기로 유명한 지중해 주변의 넓은 땅은 모두 그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볼투르노 강 어귀까지가 그리스라는 나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위 쪽으로는 지리로 보나 사람들의 행동으로 보나 로마 제국 사람, 에트루리아 사람, 북유럽 사람들이 살고 있지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 대화조차 잘 안 통한다는 건 당신도 알 겁니다. 그 사람들하고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는 그리스 낱말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아고라제인'이라는 말인데, 다른 나라에는 이 말과 꼭 맞아 떨어지는 말이 없어서 복잡한 문장을 몇 개 늘어놓아야 겨우 뜻이 옮겨질 수 있습니다.

아고라제인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들을 지껄이고 있는지 마을에나 한 번 내려가 본다'는 뜻입니다. 얘기도 나누고, 물건도 사고 팔고, 친구들도 만난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는 말이지요. 별 뾰족한 생각도 없이 그저 집을 나서서 점심 때까지 이리저리 어슬렁거린다는 뜻이니까, 우리네 말로 '기웃거린다'는 게 더 적당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손짓 발짓 다 해 가면서 눈치껏 아는 체도 하고, 시끌벅적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끈적끈적한 용암 같은 그 무리에 완전히 뒤섞여 버린다는 뜻이라고나 할까요. 이 말에서 나온 '아고라잔타'라는 말이 있는데, 아고라제인 식의 걸음걸이를 나타내는 말이지요. 양손은 뒷짐을 지고, 절대로 곧장 앞으로 가는 법이 없이, 느릿느릿 걷는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일이나 관광을 하러 코린토스든 포추올리든 그리스 땅에 발을 들여놓은 외국 사람은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면서 소리 높여 토론을 하기도 하고, 이내 자리를 뜨는가 싶으면 서너 걸음도 못 가 또 다시 뭔가 아는 체하기를 끝없이 되풀이하니까요. 우연찮게 축제라도 벌어졌는가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건 당신도 알다시피 그리스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아고라제인의 한 장면이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지요. 한 마디로 그리스 철학은 남녘 사람들의 이런 길거리 습관에 큰 신세를 지고 있는 겁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파이드로스>의 시작 부분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소크라테스 : 친애하는 파이드로스여, 그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파이드로스 : 오, 소크라테스. 나는 케팔로스의 아들 리시아스와 있다가 성 밖으로 산책을 가는 중이오. 당신과 나의 친구, 아쿠메노스의 충고대로 야외에서 산책을 하려는 거요. 회랑을 따라 걷는 것보다는 기분이 더 상쾌해진다고 하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아테네 친구들은 생산적인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지요.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에 열을 올리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지 일에 관한 한 맹탕이었으니까요. 시장에 내다 팔 상품이라든가 물건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조차 꺼렸지요. 당시 아테네의 시민은 약 2만 명이었는데, 2부 리그 소속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노예와 이방인이 20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팔자 좋은 시민들 입장에서야 빈둥거릴 만한 까닭이 충분히 있었던 거지요. 힘든 일을 하거나 생계를 꾸려가는 일을 맡아 줄 사람은 충분히 있었던 데다, 아직 소비주의 바이러스에 전염되지 않았던 터라 아테네의 시민들은 작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정신적인 대화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겁니다.

 

 

다시 철학 얘기로 돌아와서, 내가 이 책을 쓰기로 마음 먹은 까닭을 말해 보겠습니다.

 

철학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삶의 한 부분입니다. 크고 작은 문제를 풀어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지요. 나 같으면 의무 교육인 중학교 과정에 꼭 포함시켰겠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철학은 군 복무처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민의 의무는 아닙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과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학교에서도 철학보다야 요새 인기 좋은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대로라면, 푸줏간 주인조차 전자 계산기로 거스름돈 계산을 하는 세상이니, 수학 과목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겠지요. 그렇다면 철학이란 도대체 뭘까요?

글쎄요. 한 마디로 철학이 뭐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디딤돌이 있었기에 오늘날 이처럼 높고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냈습니다. 과학은 이성을 사용해서 자연 현상을 연구하고, 종교는 영혼이 추구하는 내면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절대적인 어떤 것, 감성과 지성으로 깨달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겁니다. 철학은 바로 이러한 과학과 종교의 중간쯤에 있는 겁니다. 합리주의 철학은 과학에 더 가까운 모습을 갖게 되고, 사물을 신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철학은 종교에 더 가까운 모습을 갖게 되는 거지요. 합리주의 학파에 속하는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이 마치 과학과 종교의 중간에 있어서 양 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주인 없는 땅'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친애하는 살바토레 씨, 선생은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니 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요. 그렇다고 기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만이 아니니까요. 솔직히 말해 철학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일 겁니다. 이탈리아를 통틀어 5천 6백만이나 되는 사람이 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리스의 생각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15만 명 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요.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야 당연히 알아야 할 거고, 철학 시험을 눈 앞에 둔 학생들도 조금은 알 테니까 이들을 모두 합치면 15만 명 정도는 된다는 거지요. 이 사람들을 빼고 나면, 철학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도 겨우 플라토닉 사랑이 어쩌구 하는 말 밖에는 모를 겁니다. 물론 그 말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말입니다. 플라톤이라는 양반이 그 말을 했을 때에는 훨씬 넓은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플라토닉 사랑' 하면 서로 좋아하기는 하되 잠자리에는 함께 들지 않는 남녀 사이라고 아는 게 고작이니까요.

 

 

철학이 '블랙홀'이란 말처럼 알 듯 모를 듯 어려운 것으로 바뀌게 된 데에는 누구에겐가 반드시 책임이 있을 겁니다. 철학 자체가 거북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과목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철학 자체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철학이 뭔지 널리 알리지 않기로 작정을 한 전문가들에게 책임이 있지 않은가 의심이 드는 겁니다. 이탈리아에서 출판되는 철학사 책을 모조리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읽어 본 책들은 모두 철학 교수님들이 쓴 전문적인 글이라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쓴 『서양 철학사』를 제외하면 모두 암호문 같은 말잔치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해 쓴 책인지 아니면 동료 교수들을 위해 쓴 책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이 다루는 모든 분야에는 전문 용어라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었지요. 지금도 '모든 분야'라는 말 대신에 '인지 체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뻔했지만 선생께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거라는 생각이 얼핏 들어 조금 더 쉬운 말을 썼습니다. 사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부터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을 기 죽이려고 자기네만 아는 말을 주문처럼 읊어 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5천 년 전 이집트의 사제들부터, 마술쟁이나 점쟁이 그리고 오늘날의 의사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와 말할 때도 그냥 "몸에 열이 난다"고 하면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굳이 '체온'이니 '고열'이니 하고 어려운 말을 쓰려고 기를 쓰잖습니까?

 

전문 용어를 쓰면 왠지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고 권위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오늘날 자신들의 세계에서만 쓰이는 전문 용어를 갖지 않은 부류나 계층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요. 공항을 예로 들어 봅시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늦어진다는 것을 알릴 때 쓰는 연설문을 들어 봅시다.

"항공기의 도착 지연으로 인해 AZ 642 항공편이 어쩌구 저쩌구…."

그 사람이 자기 아내더러 "여보, 내일 오전 밀라노 행 출발시 공구시 오십오분 항공편을 이용할 생각이오" 하고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그 사람도 자기 아내한테는 '비행기'라는 말을 쓸 겁니다. '항공편'이라는 말은 우리처럼 힘 없는 사람들에게나 쓰려고 자기 마누라한테는 쓰지 않을 거다 이런 말씀이지요.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전문 용어를 들으면 우리처럼 힘 없는 사람들은 괜히 주눅이 들 거고, 그래서 출발 시간이 늦어져도 감히 불평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당신 같은 사람이 도착 지연에 대해 뭘 알겠어. 항공기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미리 알려 주는 것만도 고마운 줄 알고 찍 소리 말란 말이오!" 하고 말할 수도 있는데, 친절하게 알려 주니까 까불지 말라는 태도가 숨어 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나폴리에 콜레라가 돌 때의 일인데, 원인이 조개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조개라는 말 대신에 '패류'라는 말로 방송을 했지요. 패류가 뭔지 모르는 착하디 착한 나폴리 사람들은 그런 몹쓸 게 있나 보다 하면서 맛있게 조개를 먹었습니다.

 

사베리오 과르다쇼네라는 사람이 하는 단골 양복점에 들렀을 때 일입니다. 마침 뉴스 시간이라 나와 사베리오 그리고 파필루초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지요. 파필루초는 한 해 전, 아레나차에 지진이 났을 때 주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고 데려온 잡종개였습니다. 아나운서가 "조련견대(調練犬隊)와 공조체제가 이루어진 지 하루 만에 탈옥수가 체포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자 사베리오가 나에게 물었지요.

"교수님, 조련견대가 뭡니까?"

나는 되도록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려고 "개라는 말이야"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사베리오가 이렇게 중얼거리더군요.

"제기랄, 조련견대를 일 년도 더 데리고 있었으면서도 모르고 있었다니!"

파필루초는 우리가 자기 얘기를 한다는 걸 깨닫고는 고맙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어 대더군요.

 

정치인들이야 다시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허세를 부리느라 어려운 말을 쓰는 데에는 그 사람들을 따를 재간이 없으니까요. 언젠가 정치인 한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이탈리아는 수표 발행에 의한 대체 방식도 부분적인 해결이 될 수밖에 없을 만큼 심각한 잔돈 처리용 소액 주화의 결핍 상태에 빠졌습니다."

나라 전체에 동전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잔돈 대신 소액 수표를 끊는데, 그 방법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었지요. 마음 같았으면 발가벗겨 놓고 제대로 말을 할 때까지 채찍질이라도 해 주고 싶었습니다! 문제는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너무 쉬운 말을 쓰면 무식하게 보일까 봐 겁을 낸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네 분야를 넘보거나 그 분야를 지나치게 가볍게 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칩시다. 그야말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비밀 누설자라도 되는 듯이 낙인을 찍어 버리고는, 뭐 묻은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코를 실룩거린다 이런 말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지식을 전파하는 일보다는 자신들의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은 문화를 지루하게 하고 따분하게 만드는 데에는 대가들입니다. 박물관에 가 보세요. 어떤 박물관을 가 봐도 널찍널찍하고 삭막한 복도가 하나같이 똑같고, 조각 작품이나 그림에는 설명서 하나 제대로 붙어 있지 않습니다. 정년 퇴직할 날만 기다리는 경비원들의 시무룩한 표정이며, 무덤 같은 적막감…. 야외 공동 묘지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함이면 그래도 나을 텐데 지하 납골당의 적막만이 느껴지니…. 미국의 박물관과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아십니까?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 같은 데서는 어른이건 아이건, 배운 게 많은 사람이건 무식한 사람이건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박물관 안에 간이 상점도 있고 식당도 있을 뿐더러 궁금증을 풀어 주는 비디오도 있고 선사 시대를 복원해 놓은 모형 전시관도 있지요. 이빨을 드러내 놓고 으르렁거리는 정복자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인형도 있고, 카누며 노를 젓는 인디언 추장, '시팅 불'의 인형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박물관은 다윈보다는 디즈니를 생각나게 한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곳을 방문한 사람은 하루가 끝날 때 쯤이면 뭔가 뿌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박식하고 진지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그리스 철학도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거라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이 책을 쓰게 됐다는 말을 하고 싶어섭니다. 살바토레 당신 같은 분도 쉽게 그리스 철학에 다가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겁니다.

 

사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친해지기만 하면 마치 우리 주변의 사람과 닮은 데가 많습니다. 그리스 철학을 알고 나면 어떤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야. 아니 플라톤 같은 사람이지" 하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소피스트니 회의주의자니, 에피쿠로스 같은 사람이니, 견유학파 사람이니 하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양띠니, 소띠니 하는 십이간지보다도 사람의 성격을 잘 표현하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모두 그 어른들의 직계 후손이니까요. 어째서 우리가 그 어른들의 후손이냐구요? 기원전 1184년(트로이아의 붕괴 연도인 이 1184라는 숫자는 정확성이 매우 의심스럽지는 하지만 고대 그리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석 사서였던 에라토스테네스의 난해한 계산 방식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자, 그리스 군대는 귀로의 사나운 폭풍우 때문에, 트로이아 난민들은 정복된 사람의 두려움 때문에, 곳곳으로 흩어져 지중해 연안에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을 뿌려 놓았고 우리에게 피를 물려 준 조상이 된 겁니다.

 

그 후로도 여러 세기 동안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펠로폰네소스와 아티케 지방이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들의 침략을 당하기 시작하자 그리스 사람들은 차츰 자신들의 땅이 좁다고 느끼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 곳곳에 자신들의 조국을 본딴 폴리스, 곧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했습니다. 새로운 도시에는 당연히 신전과 아고라(중앙 광장), 프리타네이온(시청), 극장, 연무장 등이 빠짐없이 들어섰지요. 이 정도만 얘기해도 고대 그리스는 마치 우주가 생겨 날 때의 빅 뱅과 같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은하계의 온갖 별자리들을 생겨나게 한 대폭발 말입니다. 만약 그리스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우리는 동녘 사람들처럼 생각하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살바토레 씨, 내 말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 조금 아래에는 저 무시무시한 중동이 버티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그 곳은 신앙을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열렬히 취미 삼아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가 아닌가 말입니다. 다행히 우리 측의 승리로 끝난 두어 번의 전투(페르시아인에 대항해서 싸운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회교도들에 대항해서 싸운 푸아티에 전투,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에서 있었던 것으로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이고, 푸아티에 전투는 서기 732년 푸아티에에서 있었던 전투로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카를 마르텔이 승리로 이끈 전투임을 밝혀 둔다)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물려 받은 합리주의 전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아시아 사람들의 공격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까딱했다간 지금까지도 날마다 떼를 지어 메카 쪽으로 이마를 굽신거리고 있을 뻔했다는 말입니다. 천만다행으로 고대의 폴리스를 다스린 사람들은 이집트나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처럼 사제들이 아니라 기도나 신비주의에는 별 재주가 없었던 사람이었지요. 종교 얘기가 나온 김에 그리스 사람들이 신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 보기로 합시다.

 

우선 그리스의 신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신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제우스 신조차 하고 싶은 대로 무슨 일이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우스 신 뿐 아니라 신들을 움직이는 힘은 운명이나 숙명, 곧 호메로스가 말한 '아난케'라는 '필연'이었지요. 이처럼 신이나 고대 도시 폴리스를 다스리던 참주들의 권한이 제한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위대한 민주주의의 교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는 겁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선(善)이란 곧 중용(中庸)과 같은 것이었지요.

 

두 번째로 그리스 시대의 종교는 그리 종교적이라거나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이 가진 단점을 고스란히 가진 존재였으니까요. 서로 싸우거나 곤드레 만드레 취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바람을 피우기도 했지요. 백성들이 신에게 존경심을 가지지 않은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요. 물론 신을 공경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시무시한 하느님, 여호와에 대해 지녔던 외경심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요. 그리스 신들은 때때로 사람이 신이 사는 곳에 올라가서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보살펴 주어야 할 정도였으니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보살핌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고나 할까요.

 

내가 고대 그리스의 종교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종교는 신비스런 의식에 매달리던 미신에서 자연 현상을 처음으로 관찰하기 시작한 과학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현상이었고, 따라서 그 시기는 철학이 태어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일식(日蝕) 전문가였던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인류 최초의 철학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지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직접 필요한 것 말고 다른 문제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을 모두 철학자라고 한다면야 사정이 틀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의 탈레스야말로 인류 최초의 철학자니까요.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해 한두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을 모두 철학자라고 한다면, 철학자의 탄생은 최소한 4만 년은 거슬러 올라가 구석기 시대가 되어야 하겠지요.

 

잠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면 금세 이해가 갈 겁니다.

 

원시인 후누는 그 날 밤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었으니까요. 살이 연하고 부드러운 새끼 사슴을 잡아, 애지중지하는 돌도끼로 배를 가른 다음 약한 불로 먹음직스럽게 구워 냈습니다. 후누의 여자 한나도 터지도록 배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었지요. 한나는 다시 토굴 속으로 들어가고 후누는 밖에 남아 생각에 잠겼습니다. 날씨는 더웠고 잠이 오지 않았지요. 풀밭 위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달도 뜨지 않는 팔월의 밤. 수천 수만 개의 별이 머리 위에서 빛납니다…. 저 반짝이는 불빛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후누의 머리에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지요. 저 하늘 높이 불빛을 밝혀 놓은 이는 누구인가? 하느님이라는 존재일까? …이런 의문이야말로 종교와 과학, 무지한 자의 두려움과 사물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철학이 태어나는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

 

 

*살바토레 씨는 1977년 밀라노의 몬다도리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 『벨라비스타는 이렇게 말하였다』의 주인공 젠나로 벨라비스타 교수가 사는 나폴리 시 페트라르카 가 58번지의 수위실 부조장 대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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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 저자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 백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휴식 시간을 좋아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엔 체육 시간이나 종교 시간을 애타게 기다렸고,

나이가 들어 세미나라든가 회의에 참석할 때에는

오전 열시의 커피 타임이 되어서야 "휴우" 하고 한숨을 쉬곤 했다.

이런 전력을 밝히는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 사이에

'나의 철학자'들을 끼워넣은 까닭을 밝히기 위함이다.

페피노 루소니 토니노 카포네 등 익숙치 않은 이름의 주인공들은

내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제공하는 휴식 시간 같은 존재들이다.

행여 나의 철학자들을 진짜 그리스 철학자라고 생각하고

시험 답안지에 쓰는 덜 떨어진 학생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이 책 편집자께서는 '데 크레센초의 친구들' 이라는 제목을 붙여

옛 철학자 어른들과 구별이 되도록 자상한 배려를 해 주셨으니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