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9권 인 라이브러리 -3- 초콜릿 코트

▒▒▒▒ 인 라이브러리 Ⅲ ▒▒▒▒

 

「도서관? 정말이야?」
토오코 쨩의 입에서 튀어나온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유미는 눈을 깜박였다. '그렇다면 왜 못만났지' 라고 입밖에 내기 전에 토오코 쨩이 선수를 쳤다.
「하긴 도서관과 장미관을 잇는 길은 몇 갠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도중에 만나지 못하고 엇갈린 거겠죠.」
「그치만」
유미는 리포트 용지를 꺼내 사치코 님의 메세지와 자기가 쓴 의미불명의 문자가 나열되어 있는 종이를 뒤집어 백지에 간단한 도형을 그렸다.
「지금, 여기지. 그리고, 도서관이 여기. 그러면 그 사이에 있는 교사(校?)가──어라?」
1년 반 동안을 다닌 고등부 교사. 손바닥 보듯 훤한 구역이지만, 막상 평면에 옮기려 하니 꽤나 어렵다. 배치도를 앞에 두고 시작부터 악전고투를 하고 있자, 토오코 쨩이 때마침 「실례. 교사는 이런 형태로 이쪽 방향이에요.」라고 옆에서 적절하게 수정해주었다.
「응, 맞아맞아. 그래서 있지, 내가 사치코 님이라면 이 루트를 지나갈 거라고 생각해. 목적지가 처음부터 도서관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제대로 간다면 그게 도서관으로 가는 최단루트다. 유미는 샤프 뒤꼭지로 임시지도 위를 더듬어갔다. 사치코 님은 가끔씩 우주인 같은 말과 행동을 보이시곤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평범한 인간이니 벽을 통과한다거나 건물을 뛰어넘거나 하실 순 없다. 그러니 장미관과 도서관, 이 두 점을 자로 곧게 그은 선을 따라 강행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따라서 대개 교사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걸어 이동하는 셈이 된다.
「토오코도 그 루트를 거꾸로 해서 왔어요. 괜히 교사 뒤를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
「사치코 님도 마찬가지겠지?」
「네」
그럼 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 걸까.
「토오코 쨩, 도서관 어디에 있었어?」
「열람실요. 로사 키넨시스는 어디에?」
「책을 반납하러 가셨으니까 역시 열람실이겠지.」
도서관 안에는 그 외에도 회의실이나 서고 등 여러 공간이 있지만 이용자 대부분은 열람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토오코 쨩이 열람실을 나서기 전에 사치코 님이 이미 도착했다고 하는 건?」
「토오코가 한참동안 출입구 근처에 있는 대출 카운터 옆에 있었지만 못 봤어요. 로사 페티다와 요시노 님이 오셨을 때는 알아봤는데 말이죠.」
「레이 님이랑 요시노 양, 도서관에 갔었구나.」
그렇다면 좀전의 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설마 사치코 님이 레이 님보다 먼저 도서관에 도착했다는 경우는 없겠지.
「토오코 쨩 있지, 여기 오는 도중에 어딘가 들르지 않았어?」
최단(이라고 생각되는) 루트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상황이 생겼다면 그 때 엇갈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토오코 쨩은 「안 들렀어요」라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들렀다고 한다면 토오코보다는 로사 키넨시스 쪽이 아닐까요?」
「어딜?」
「그야...... 교실이든 어디든.」
「그렇구나. 그럼 이해가 가지만.」
복도를 한창 걷고 있는데 뭔가 잊어버린 물건을 떠올리고는 자기 교실에 들렀다가 다시 도서관으로. 그거라면 시간을 끄는 한 원인이 될 수도 있다──만.
「그렇다고 해도 늦으시네요.」
토오코 쨩이 나직이 말했다.
「그렇지? 역시 토오코 쨩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미도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무심코 일어섰다. 토오코 쨩이 장미관에 온 지 이래저래 20분은 지났다. 다시 말해, 사치코 님이 여길 나가신지 적어도 20분 이상 되었다는 얘기다. 또 오는 도중에 사치코 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토오코 쨩의 증언을 통해 부재시간은 대략 30분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교실에서 반 친구랑 한창 이야기중이시라면 그 정도는.」
「날 기다리게 해놓고? 그런데도 수다 같은 걸 떠실까.」
말하고 나서 유미는 생각했다. 사치코 님의 경우 「귀여운 동생이니까 기다리게 하면 불쌍해」라고 생각하실까, 아니면 「동생은 가족이나 마찬가지니 조금쯤 기다리게 해도 괜찮아」라고 생각하실까.
「로사 키넨시스가 그럴 생각이 없어도 부득이하게 자리를 뜨지 못할 가능성은 있어요. 한창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혼자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럼 안녕'이라고는 못하겠죠?」
「심각한 얘기..... 란 말이지.」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죠.」
흐음.
「잠깐 보러 갔다올까.」
「네?」
「사치코 님을 구하러.」
「마중하러,를 잘못 말씀하신 건?」
「그렇게도 말하지.」
유미는 창 옆으로 걸어가 밖을 내려다 보았다. 장미관 출입구 근처에도, 1층 교사 창 너머에도 사치코 님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이대로 있다간 또 5분, 10분 간단히 지나갈 성 싶다.
「마음대로 하시죠.」
토오코 쨩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섰다.
「토오코는 돌아갈게요.」
「잠깐.」
유미는 토오코 쨩 옆에까지 달려가서 팔을 붙잡았다.
「부탁이」
토오코 쨩은 「이럴 줄 알았지」라는 표정으로 붙잡힌 팔을 뿌리쳤다.
「집보기라면 사양하겠어요.」
「그런 거 안 시킨다니까.」
「그럼 뭐죠?」
「5분만 기다려줘.」
「5분?」
「여기 정리하려고.」
「그리고 나서요?」
「토오코 쨩이랑 같이 나갈 거야.」
「하?」
「그러니, 다시 한 번 부탁할게. 미안하지만 내가 3학년 소나무반을 둘러보고 올 동안, 여기 복도 이 근처에서 대기해줬으면 해.」
유미는 아까 두 사람이 공동제작한 지도의 한 점을 「이 근처」라며 가리켰다. 거긴 최단 루트상의 한 점으로, 사치코 님의 교실로 갈라지는 곳이기도 했다.
「서로 엇갈리지 않도록 말인가요?」
토오코 쨩은 잠깐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그 정도라면 같이 행동하죠.」
「고마워─.」
유미는 토오코 쨩의 두 손을 쥐고 붕붕 흔들었다.
「이럴 시간이 어딨어요. 앞으로 3분 남았다구요.」
「햐아」
이렇게 해서 유미는 사용한 컵을 후다닥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탄 사치코 님의 차는 아까우니까 단숨에 꿀꺽. 급히 마시느라 잠깐 목이 막혔다. 토오코 쨩은 그런 유미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지난 주까지는 이런 상황이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도와줬지만, 오늘은 조금도 도와주질 않는다. 「학원제까지의」 도우미라는 명찰을 떼낸 지금, 토오코 쨩 안에서도 분명히 선을 그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참견일 수도 있겠지만 서로 엇갈릴 경우를 생각해서 로사 키넨시스에게 메모를 남겨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서로 엇갈리지 않기 위해서 토오코 쨩이 있는데도?」
「만일의 경우도 있으니까요.」
토오코 쨩은 튀는 애처럼 보여도 의외로 신중하다.
「그도 그렇다.」
하지만 일리있으니 리포트 용지 새 페이지에다 「도서관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써두기로 했다.
「......」
망설이던 끝에 기껏 정한 문구가 사치코 님과 같다니 한심하다. 하지만 본인 앞으로 「언니를 마중하러 다녀오겠습니다」라는 건 이상하고, 「잠깐 나갔다 올게요」라면 어디로 가는 건지 조금도 전해지질 않는다.

 

장미관을 나와 교사 안에 들어가자 인적이 끊긴 복도는 조용했다. 요즘 들어 갑자기 추워져서 복도 창문도 교실 문도 단단히 닫혀있는 탓인지, 교실에 남아있는 학생들의 목소리도 그다지 복도에 새어나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면 주눅이 들어 그리 떠들 맘도 안 생기기 때문에, 유미는 약속한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토오코 쨩과 조심조심 두 세 마디 밖에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럼 미안하지만 여기서 기다려줘.」
그렇게 말하고 뛰어가려고 하자, 뒤에서 토오코 쨩의 목소리가 들렸다.
「뛰지 않으셔도 돼요. 약속대로 기다릴테니까요.」
「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이쪽 사정으로 붙잡아놓고 있는 만큼 유미는 빠른 걸음으로 척척 나아갔다. 언니의 반인 3학년 소나무반은 자주 다니는 곳이다. 복도창에서 새어나오는 실내등 불빛이 마치 유미를 보고 「이리온, 이리온」하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실례합니다─.」
3학년 소나무반 교실문을 열자, 안에 남아 있던 몇 명의 학생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후쿠자와 유미 쨩.」
제일 문 가까이에 있던 학생이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평안하세요. 저기, 우리 언니는──.」
「사치코 양? 여기엔 없는데.」
「그런 것 같네요.」
쓰윽 둘러보면 언니가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금방 알 수 있다.
「오늘은 장미관에 간 거 아니었어?」
「아, 방금 전까진 그랬는데요, 잠깐 나갔다가 좀처럼 돌아오질 않아서요.」
유미가 설명하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사치코 양이라면 도서관에 갔어.」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라고 생각했더니, 학생들 사이에서 불쑥 얼굴을 내민 사람은 『리리안 학보』전임 편집장, 신문부의 츠키야마 미나코 님이었다. 하지만 분명 반이 다를텐데.
「미나코 님이 왜 여기에?」
무리에서 혼자 빠져나와 다가오는 미나코 님에게 유미가 물었다.
「난 뭐 자기 반 말고는 친구가 없는 줄 아니.」
「죄송합니다.」
그야 그렇겠지. 미나코 님 하면 특종을 쫓아다니는 모습만 떠오르지만, 신문부 이전에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의 학생이기도 하다. 평범하게 수업을 듣고, 평범하게 친구랑 수다를 떨기도 할 것이다.
「어디서 사치코 님을 만나셨어요?」
아까 「사치코 양이라면 도서관에 갔어」란 말을 받아 유미가 질문했다. 그러자.
「으음, 그러니까...... 한 30분 전인가. 저쪽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그 때 도서관에 간다고 그랬지. 설마 사치코 양 아직 안돌아왔어?」
「네에」
「그거 늦는데. 책을 반납하기만 할 거라고 얘기한 것치고는──.」
미나코 님은 손목시계를 보며 중얼거리더니 뒤의 친구에게 손을 들었다.
「미안.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실례할게. 다들 평안해.」
그러고서 그대로 교실을 나가니까, 유미도 그 뒤를 쫓아가 3학년 소나무반 교실 안과 미나코 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저기, 괜찮나요?」
「행방불명이라고 들은 이상 신경쓰이는걸.」
「행방불명이라고 정해진 건」
「아무튼 지금 상황에선 내가 마지막 목격자잖아?」
'도와주마' 라고 팔을 걷어붙인 미나코 님. 하지만 마지막 목격자라고 해도 지금 목격자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유미와 미나코 님 둘 뿐이다. 토오코 쨩은 사치코 님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뭐어 도와준다고 하니까 유미는 친절을 받아들여 걸으면서 사정청취를 하기로 했다.
「미나코 님은 아까 저쪽 복도에서 만났다고 그러셨죠?」
저쪽은 유미와 토오코 쨩이 걸어온 복도가 있는 방향이다. 역시 루트는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헤어질 때 사치코 님은 그대로 도서관 방향으로 가셨나요?」
「그게, 잘 모르겠어.」
「네?」
「만난 건 분명히 복도지만, 헤이진 건 다른 곳이거든.」
만난 건 복도고, 헤어진 건 다른 장소. 그리고 그 헤어진 장소에서는 상대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판단할 수 없다...... 수수께끼냐?
「정답은 화장실. 우연히 만나서 이런 식으로 둘이 걸으며 얘기를 잠시 나누다가 도중에 난 화장실에 들렀지.」
「화장실인가요.」
「지저분한 이야기라 미안하지만 아까까지 중정에서 동생 마미하고 한참 열을 올리며 대화하다가 식을 즈음 되니까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서 말야. 사치코 양과 복도에서 만났을 때도 실은 화장실에 가던 중이었어. 하지만 얘기를 시작한 화제가 덜 끝나서 사치코 양이 따라와줬거든. 그래서 화장실 안과 밖에서 얘기를 나누고 적절히 마무리짓고는 사치코 양이 한발 앞서 화장실을 나간 거야.」
아아, 과연. 그렇다면 사치코 님이 도서관에 갔는지 어떤지 분명히 말하기 어려울 만도 하다.
「그래. 유미 양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서둘렀구나.」
미나코 님은 이해했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친구와의 화장실 타임을 희생해서까지 서둘렀다는 사실은 그것대로 어쩐지 복잡한 기분이었다.

 

좀전의 장소로 돌아오자 토오코 쨩은 헤어졌을 때랑 똑같은 장소에 똑같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토오코 쨩, 한 가지 알아냈어. 사치코 님은 틀림없이 이 루트를 지나셨지만, 화장실에 들르는 바람에 토오코 쨩이랑 만나지 못한 거야. 어떻게 알았냐면은.」
「신문부 츠키야마 미나코 님이 그렇게 증언하셨다.」
「어라, 어떻게 그걸?」
「이 상황을 보면 그 정도 추리는 자연스럽게 나와요.」
유미의 뒤쪽에는 마치 2인 하오리[*한 사람이 하오리라는 전통의상을 입고 나머지 한 사람이 등 뒤로 들어가 앞 사람에게 음식을 먹이는 극. 참고) 아이즈(I's)에서 이와타카와 이오리가 신입생 환영회 때 한 2인극]의 파트너가 인사하듯 미나코 님이 딱 달라붙어 와서는 「평안하렴, 연극부의 마츠다이라 토오코 양」이라고 명랑하게 인사했다.
「...... 평안하세요.」
토오코 쨩은 웃지도 못하고 화답했다.
「사치코 님, 안 오셨구나.」
유미가 3학년 소나무반에 갔다오는 동안의 사정은 거꾸로 이곳 상황을 보면 대강 짐작이 갔다. 사치코 님이 여길 지나가셨다면 토오코 쨩이 붙잡아놓고 있었을 테니까.
「고마워, 토오코 쨩. 괜히 따라오게 해서 미안해.」
「아뇨. 그럼 이만」
상급생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토오코 쨩은 승강구로 걸어갔다.
「평안해.」
유미가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후, '자아 도서관에 가자'며 한 발 내딛었을 때.
「저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느닷없이 토오코 쨩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뭐, 뭘?」
그 시선은 되물어본 유미가 아니라 똑바로 미나코 님에게 향하고 있었다.
「왜 미나코 님까지 유미 님을 따라가시는 거죠?」
「그야. 당연히 신경쓰이니까. 일이 어떻게 됐는지 내일 돼서 듣기 보다, 지금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단연코 재밌는걸.」
미나코 님이 웃었다.
「그런가요.」
「대답이 시원찮았어?」
「아뇨. 답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토오코 쨩은 저벅저벅 걸어가버렸다.
「대체 토오코 쨩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유미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말이라니. 대화 듣고 있었지?」
미나코 님이 웃으며 앞서 걸어갔다.
「듣긴 들었는데요.」
하지만 표면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는 듯했다. 토오코 쨩 보다는 오히려 미나코 님의 대답 안에.
「그보다 난 오해하고 있었나 봐.」
「하?」
그보다라니. 무슨 말을 받아서 '그보다'라고 하는 건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미나코 님은 손님용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 애, 마츠다이라 토오코 양 말야. 왜 전에 유미 양이랑 사치코 양이 싸웠을 때 내가 참 쓸데없는 걱정을 한 적 있었지? 내 친구 이야기를 끄집어 내면서.」
「아아──.」
생각났다. 분명히 '어떤 학생이 양다리를 걸친 언니에게 졸업식에서 로사리오를 내던지고 디 엔드' 라고 했던 이야기.
「난 저 애가 유미 양의 라이벌이 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는데──아」
얘기 도중이었지만 미나코 님은 도서관 앞에서 한 학생을 발견하자 유미에게 「잠깐 실례할게」하고는 달려갔다.
「평안해. 도서관?」
「아아, 미나코 양」
뒤돌아본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아마 유미와는 접점이 전혀 없었던 3학년이겠지. 연상을 보고 이러는 건 실례인 줄 알지만, 얌전해 보이고 귀여운 타입이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유미는 가급적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하지만 가을 정원은 방과 후 청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낙엽이나 잔가지가 어지러이 널려 있어서, 살금살금 걷는다고 하지만 바스락 혹은 빠직 하는 소리를 내고 만다. 그렇게 조심조심 걷는 유미의 귀에 들을 생각도 없었는데 무심코 들려온 미나코 님의 묘한 말.
「나 지금 열람실에 갈건데, 안에 보고 올까?」
「됐어. 오늘은 반납만 할 거니까.」
그 사람은 손가방에서 책 3권을 꺼내고는 웃음을 지었다.
「주위에서 생각하기보다 본인은 신경쓰지 않아.」
「그래?」
어쩐지 두 사람의 표정으로 보아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발을 멈추거나 방향전환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물론, 우리들 심정은 어떻든 간에, 역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사람은 있긴 있겠지. 하지만 그걸 일일이 부정하러 돌아다니는 것도 우스운 얘기고. 그렇다고 남들 앞에서 일부러 친한 모습을 보일 만큼 넉살이 좋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 사람은 불가사의한 행동을 했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책 반납함에 책을 1권, 또 1권 넣는 것이다. 페관시간 이후라면 몰라도 아직 열람실은 열려 있는데.
「사실은 그녀를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으면 그게 가장 좋겠지만.」
「어렵구나.」
미나코 님이 어딘가 아픈 듯한, 그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어렵네.」
3권의 책을 모두 반납함 입구에 집어넣고는 그 사람은 「평안해」하는 말을 남기고 마리아상으로 이어진 도서관 옆길을 걸어가버렸다. 그 모습이 모퉁이 저 편으로 사라지자, 미나코 님은 「하아─」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영문을 몰라 유미가 가만 보고 있자, 이윽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둘 다 친구니, 고되군.」
「네?」
이유를 물어봤지만 미나코 님이 왜 잔뜩 찌푸린 표정인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둘 다'라고 했으니 필요한 등장인물은 두 명일텐데, 방금 그 사람이 한 명이라고 하면, 다른 한 명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그 때 미나코 님이 말했다.
「유미 양 있지, 아까 무슨 얘길 하고 있었는지 기억해?」
「에 그러니까, 저기, 분명히 토오코 쨩 얘기였죠?」
「조금 더 전에. 양다리 얘기했었잖아.」
미나코 님은 발 밑에 떨어진 굽은 가지를 주웠다. 딱 Y자 형태. 양다리다.
「아아」
그렇다며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라?
「그녀가 그 당사자 중 한 사람.」
미나코 님은 한 지점에서 좌우로 엇비슷하게 뻗은 가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아마, 도서관 안에.」
그건 좀전의 「불가사의한 행동」에 대한 너무나도 설득력있는 대답이었다.

 

 

▒▒▒▒ 쵸콜릿 코트 ▒▒▒▒

인적없는 낡은 온실에, 한 명의 소녀가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는다. 왼손을 눈높이로 올려 시간을 확인하는 행위는 점점 간격이 짧아져 간다. 처음엔 5분에 한 번. 다음엔 3분에 한 번. 그리고 1분에 한 번, 이런 식으로. 그럴 바엔 차라리 그냥 시계만 보고 있는 게 더 나을 것도 같지만, 그랬다간 이번엔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도 금방 알아차릴 수가 없게 된다.
30초에 한 번. 자기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다시 팔을 내린다. 그래도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으며. 약속 장소가 여기였던가. 체육관 옆에 신설된 온실. 어쩌면 거기와 혼동한 건 아닐까.
하지만 확인하러 다녀오는 동안 「그 애」가 온다면──, 그렇게 생각하자 아무래도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쓸데없이 돌아다니다 남들 눈에 띄는 것도 곤란하다.
오늘은,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쵸콜릿을 주고 받는 날. 그렇기 때문에 그 애는 이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약속장소로 선택했음이 틀림없다. 이미 얼마나 기다렸을까. 몸은 벌써 차가워져 있다. 하지만 결코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선 죄악감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차라리 눈이 내렸으면. 그 애를 기다리는 이 죄많은 몸을, 새하얀 눈이 온실과 함께 뒤덮어버렸으면. 그러면 마리아 님도 조금은 가엾게 여겨주실지 모르는데.

─ 야스코(寧子) ─

인간이기에 누구나 잘못을 범한다.
하지만 기나긴 인생.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를 경우도 있다..

　　　　　◆　　◇　　◆

그걸 깨닫기까지 17년이란 세월을 야스코는 그저 평범한 여자애로 살아왔다. 중등부부터 리리안 여학원 학생이 되고 나서,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스포츠를 하고, 적당히 노는 동안 순식간에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어느샌가 고등부에 진학해 있었다. 평범이란 지루할 수도 있지만 소중한 것이다. 남들과 보조를 맞추어 나아간다. 가끔씩 옆길로 새기도 하지만 길을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헤쳐나갈 수 있는 요령이라고 야스코는 믿고 있었다. 친구들의 권유로 자원봉사부에 입부하고, 거기서 알게 된 한 학년 위의 선배 마음에 들어 1학기 끝난 후 쇠르의 언약을 맺었다. 언니에게 로사리오를 받았을 때, 물론 기쁨이라는 감정으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적지 않은 안도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기들 1학년은 진열대에 나열된 상품이라는 생각에, 비교적 빨리 팔려나가 안심이 되어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다.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야스코니까 2학년이 되어 제일 첫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쁘띠 쇠르(동생)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좋다는 건 아니겠지?」
가드레일 안쪽을 걸으며 같은 반인 카나에(花苗) 양이 말했다. 오늘은 자원봉사부의 봉사일로 방과 후 야스코 일행은 학교 옆 공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아동관에 있는 아이들을 모아 동화책을 읽어줄 예정이었다.
「역시 다정다감한 성격에 솔직한 애가 좋아. 거기에, 데리고 다니면 조금은 폼나는 귀여운 타입.」
「조금은, 그 부분이 키포인트구나.」
야스코는 웃었다. 같은 반의 미즈노 요코 양처럼 「겁나게 폼나는」 미소녀를 동생으로 삼는 날에는 기죽어 다닐 게 뻔하다. 하긴 요코 양 자신이 재색겸비니까 별 신경 안쓸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로사 키넨시스 앙 부통(홍장미 봉오리)으로서 장래 로사 키넨시스 후보란 사실도 감안해 동생을 선택해야만 하니. 좌우지간 큰일이다.
「클럽 후배가 무난하지만, 우리 부 별로 눈에 안띄니까 신입부원도 좀처럼 안 들어오구.」
카나에 양이 투덜댄다. 그녀 역시 동생을 갖고 싶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상대를 만나지 못한 야스코의 동지였다.
「테니스부 같은 데는 떼거지로 몰려드나 봐.」
「나도 들었어. 그래서 '빠른 사람이 임자' 같은 암묵의 룰이 있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부원이 많으니까 상대를 찾기도 쉽다. 상대를 찾기 쉽다는 소문을 듣고 부원이 늘어난다. 어느 시대에도 테니스부는 대성황. 부러운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야스코 양은 찜해놓은 상대라도 있어?」
카나에 양이 넌지시 물어본다.
「구체적으로 '이 애다' 하는 애는 없지만......」
야스코는 드라이 하다 상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중얼거렸다. 
「구체적으로 없다는 건 막연하게는 있다는 뜻?」
별 생각없이 내뱉은 말을 카나에 양은 절묘하게 캐치했다. 야스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기대 하지 마. 비현실적인 얘기니까.」
실은 야스코에겐 전부터 「이런 애가 좋아」하고 생각한 상대가 있었다. 그건 아침 전차에서 늘 같은 칸에 타는 소녀. 리리안이 아닌, 다른 사립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야스코보다 먼저 전차에 타서 거의 늘 같은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때로는 교과서. 때로는 문고본, 또 때로는 게임 공략본. 야스코는 그보다 조금 떨어져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깨보다 조금 긴 머리카락은 언제는 찰랑찰랑. 가끔씩 어깨에서 사르륵 흘러내리면 다시 귀 뒤로 넘기는 그녀의 동작이 참으로 좋았다. 2학년이 되면 저런 애를 동생으로 삼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며 야스코는 그녀를 뒤로 하고 전차를 내린다. 단지 그뿐인 관계.
하지만 야스코가 2학년이 되자 그녀는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아니, 「모습을 감추었다」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야스코가 타던 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의미니까. 새 학기의 시작과 함께 진학 문제로 전과는 다른 학교에 다닐 가능성도 있다. 집이 이사해서 교통수단이 바뀌었을 경우도 고려해봐야 한다. 아무튼 언제나 그 시간, 그 칸의 그 좌석에는 처음 보는 뚱뚱한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그건 야스코의 조그마한 일과가 사라졌음을 증명했다.
예정시간보다 조금 일찍 공립도서관에 도착한 자원봉사부는 활동 예정인 아동코너가 아닌 일반 열람실에서 시간을 때웠다. 오늘 읽어줄 그림책은 이미 충분히 읽어두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리허설할 필요도 없었다. 그보다 학교 아닌 다른 도서관 책장이 무척이나 신선했다.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 도서관도 상당히 충실하지만, 역시 10대 소녀가 이용한다는 전제를 우선시 해서 모아놓은 책이라 다소 딱딱하기 마련이다. 그에 비해 공립도서관은 다양하고, 깊이 있으며, 전문서적에서 가벼운 읽을 거리까지 각 장르가 균형있게 진열되어 있어 자극적이었다. 그건 이용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 참고서와 노트를 펼치고 면학에 매진하고 있는 남학생, 뜨개질책을 음미하고 있는 할머니, 양복 차림의 회사원......
그 때 야스코는 철렁했다.
필기 등의 용도로 쓰이는 책상과는 따로 떨어진 조그만 의자에서 「그 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전차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그 때와 정말로 똑같은 자세로 그 애는 열심히 두툼한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전의 사립 중학교 교복이 아니라 하얀 블라우스에 물빛 꽃무늬가 들어간 플레어 스커트, 그리고 크림색 가디건을 입고서.
「별 일 없었니? 걱정했었어.」
이렇게 달려가서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눈 앞에 있는 그 애는 야스코를 모르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친한 척 말을 걸었다간 분명 놀랄 것이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 어떡하면 좋지? 야스코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 헤어지면 두번 다시 못 만날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왜 그래, 야스코 양?」
「미안, 저기, 잠깐」
심장 고동이 격렬해지자 야스코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토하진 않았지만, 가슴의 울렁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결국, 오늘 동화책 읽어주기는 야스코가 담당한 부분을 포함해 전부 카나에 양이 맡아주었다. 야스코는 간신히 아동도서 코너에서 카나에 양 옆에 앉아있을 수 있었지만, 마음은 일반 열람실에 가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아직 그 애가 그 의자에 앉아있다면...... 그렇게 생각하자 또 다시 식은 땀이 흘렀다

 

「알아왔어.」
다음 날, 교실에서 카나에 양이 말했다.
「하야시 아사카(林?香) 양. 15세. 그 도서관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맨션에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대. 집이 근처인 것도 해서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든 모양이야.」
그건 틀림없이 어제 열람실에 있던 소녀의 프로필이었다.
「어떻게?」
야스코는 그저 멍하니 되물었다. 탐정도 아닌 카나에 양이 어떤 트릭을 써서 단시간에 거기까지 알아냈지? 애당초 왜 그 애를 조사할 생각을 한 거지? 트릭은 간단했다.
「도서관 화장실에서 야스코 양이 이유를 말해줬잖아. 그래서 네가 화장실에 틀어박혀 있는 틈에 잠깐 빠져나가 참견 좀 해봤지. 사서에게 넌지시 물어보거나 해서 말야.」
「물으면 가르쳐줘?」
놀라서 물어보자 「아니」하고 카나에 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인정보는 비밀엄수주의래. 그래도 직접 물어보는게 어떠냐면서 그 애를 소개시켜줬어.」
「그래서?」
「물론 직접 물었지. 그랬더니 이름과 연락처를 가르쳐 주더라.」
「그렇게 간단히?」
아무리 상대가 같은 여자라고 해도 그렇지 젊은 애가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거는데 바로 자기 신분을 밝히나.
「이봐, 어제 우리 교복 입고 있었잖아. 그걸로 신분증명은 된 거야. 같은 학교 학생이면 경계심도 풀어지고.」
「같은 학교......?」
「잘 됐네, 야스코 양. 그 애, 고등부 1학년이었어. 언니는 아직 없대.」
「에?」
「좀더 기뻐하라구.」
카나에 양은 쿡쿡 웃었다.
「동생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동생......」
야스코는 중얼거렸다.
「그래, 동생.」
카나에 양의 맞장구에 점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 애를 동생으로 맞는다. 꿈만 같던 얘기를 현실로 끌어들이기라도 하듯 야스코는 몇 번이나 「동생」이라고 중얼거렸다.

카나에 양의 「참견」에는 애프터 서비스가 딸려 있었다. 그녀는 기왕 탄 배라며 하야시 아사카와 만나도록 주선해준 것이다. 마리아상 앞에서 야스코는 아사카의 목에 로사리오를 걸었다. 아사카는 그 날 자원봉사부에 입부 신청서를 냈다. 하지만.
「뭐?」
자원봉사부 월례회의가 끝나고 잡담을 하다가, 아사카가 자기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니까요, 전 학교에 걸어다녀요. 중학교 때도 근처 공립학교여서 지금까지 버스나 전차로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정기권을 들고 다니는 게 조금 부러워요.」
「아사카 쨩. 그건 아주 배부른 소리라구.」
야스코의 언니가 쯧쯧 하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런가요?」
「만원 전차, 끔찍해.」
「하지만 언니랑 함께라면 즐거...... 울지도요. 늘 돌아갈 때면 교문까지밖에 같이 있을 수 없어서 좀 쓸쓸해요.」
「어머, 뜨거워라.」
3학년들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회의가 끝나자 카나에 양이 「잠깐」하고 야스코를 클럽하우스 밖으로 끌고 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사람 잘못봤나 봐.」
야스코가 대답했다.
「아차차」
카나에 양은 몸을 뒤로 젖히며 머리를 감쌌다.. 그녀는 두 사람의 중매역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말야, 카나에 양. 난 아사카가 정말로 귀여워. 그러니까 너한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지금은 있지, 전차의 그 애가 아사카를 동생으로 삼은 계기를 준 거구나,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부탁이야. 이 일은 아사카에겐 비밀로 해줘.」
「......그래.」
카나에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봤자 아사카를 상처줄 뿐이란 걸 이해해준 것이다.
「전차의 그 애가 우리 학교 학생이라니, 어쩐지 얘기가 잘 풀린다 했지. 그 애 몫까지 아사카 쨩을 소중히 대해줘.」
「응. 그럴게.」
야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잘 풀린다 했던 얘기」는 분명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야스코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사카를 동생으로 삼고 나서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늘 타고 다니던 칸에서 그것이 입증되었다. 그 애가, 그 좌석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 교복까지 입고 있었다. 순간 전차 통학을 동경한 아사카가 재미삼아 어디서 타고온 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아사카는 아마 모를 것이다. 등교 시간을 거꾸로 계산하면 몇 시 전차를 타는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겠지만, 야스코가 늘 타고 다니는 칸까지는 알 리가 없다. 너무나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던 탓일까. 야스코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 때 처음으로 정면에서 그 애의 얼굴을 보았다. 아사카가 아니다. 고개를 숙인 얼굴은 그토록 닮았는데도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평안하세요.」
그녀는 약간 수줍은 듯이 인사하며 일어섰다. 전차는 M역홈에 천천히 정차했다.
「어째서?」
야스코는 인사도 건너뛰고 바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 사립 중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교는 리리안을 지원했어요. 전에 다니던 학교는 고등학교까지만 일괄교육이라 대학은 없었거든요. 집에서 멀기도 해서 큰 마음 먹고요.」
「늘 타던 칸을 바꾼 건?」
「같은 반에 입학식 직전 다리를 다친 친구가 있어서요. 집이 제일 가까운 사람이 저라서 한동안 같이 등하교했어요. 아무래도 목발을 짚고 다니면 가방 들기가 불편하니까요...... 전철 칸도 리리안 학생이 많은 편이 좋을 것 같아서 한동안 그쪽을 이용했고요. 하지만 어제부터 목발없이 다니게 되어서 제 역할도 끝난 거죠.」
「그래.」
그 다리를 다친 학생을 원망할 일이 아니란 걸 야스코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학생만 다치지 않았더라면 두 달 전인 4월에 자신들은 이처럼 만났을 터였다. 그녀의 이름은 한 마스미(伴眞純). 야스코도 자신의 이름과 반을 일러줬다.
「언니」
M역 북쪽 출구에 내려서자 어째선지 아사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마스미 양도. 평안하세요......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인가요?」
그 말을 듣고 야스코와 마스미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는 사이, 그렇게 불러도 되려나. 대화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인데.
「우연히 같은 칸에 탄 모양이라 내릴 때 인사를 드렸어. 그리고 그대로 얘기를 나누며 온 거야.」
마스미의 설명은 잘못되지 않았다. 단지 그 이전의 이야기가 생략되었을 뿐이다.
「어머, 세상 좁다 얘.」
아사카는 「얘는 같은 반인 한 마스미 양」, 이어서 「그리고 이 분은 시라카와 야스코 님」이라고 소개했다.
「아사카 양이 늘 자랑하는 언니셨구나.」
두 사람이 쇠르란 걸 설명하기 전에 마스미가 말했다.
「소문은 들었어. 공립도서관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며.」
「싫다, 마스미 양도 참.」
아사카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마사미의 어깨를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착잡한 기분에 야스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사카, 여기엔 왜 왔어?」
「조금이나마 버스 통학 기분을 맛보고 싶어서요.」
아사카는 어리광부리듯 아스코의 팔에 매달렸다.
「그럼 방해되는 것 같으니 전 이만.」
마스미가 웃으며 먼저 걸어가버렸다. 쫓아가려는 충동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사라져줘서 안심하고 있었다.
「이상한 소문 퍼트리지 마.」
「이상한 소문이라뇨?」
「운명적인 만남이니 뭐니 하는 거.」
「아아, 제가 그런 거 아녜요. 소문내길 좋아하는 반 애들이 재미삼아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니거든요.」
그렇더라도 그 「소문내길 좋아하는」 패거리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적어도 한 사람한테 아사카가 말했을 것이다. 공립도서관에서 첫눈에 반해 동생이 되었다고.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니까 상관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아사카가 매달린 왼팔이 왠지 몹시도 무거웠다.

 

─ 마스미(眞純) ─

그 사람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그 1년간, 마스미는 언제나 그 전철칸에서 그 사람을 의식해왔으니까.

 

　　　　　◆　　◇　　◆

 

언제나 그 사람은 같은 손잡이를 잡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물론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는 공주병급 착각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등 뒤 유리창 너머의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겠지. 그렇더라도 고개를 들면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래서 마스미는 그 사람이 타는 역이 가까워지면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친다.
역 승강장에서 그녀는 언제나 같은 장소에 서있다. 그곳은 계단 근처라서, 때로는 발차벨이 시끄럽게 울리는 동안 승강장으로 뛰어올라와 아슬아슬하게 열린 문 사이로 뛰어드는 장면도 보곤 했다. 그리고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몸을 맡기는 동안, 마스미는 펼친 책에 시선을 떨어트린다. 집중이 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내용이 전혀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다.
M역에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배웅하고는, 안도감인지 허전함인지 모를 기분으로 마스미는 그 다음 학교 부근 역까지 전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다. 흔들림 속에서 늘 생각한다.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이름도 모른다. 나이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언제나 그 사람이 타는 역의 장소와 리리안 여학원 학생이라는 사실. 그것뿐. 하지만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이렇게 매일 아침 같은 전차에서 한 때를 보내는, 고작 그 정도의 관계인 두 사람 사이에서. 고작 그 정도.
과연 고작 그 정도일까. 마스미의 사고는 매일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선 분명 「고작 그 정도의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도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그저 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뒷모습을 배웅한다. 적어도 그건 「고작 그 정도의 관계」 이상의 감정이 담겨있는 느낌이었다.
매일 아침 같은 칸에 타는 건 그녀만이 아니다. 옆에 앉은 샐러리맨도, 맞은 편 자리의 OL도, 조건상으로는 동일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마음이 쏠리는 건 그 사람뿐. 리리안 교복이라설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마스미는 아주 조금 정답에 다가간 기분이었다. 리리안 여학원 교복을 입은 자신을 상상하자 가슴이 고동쳤던 것이다.
가을에 들어서 마스미는 부속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취소하고 입시공부를 시작했다.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 한 곳에만 집중했다. 봄이 되어 리리안 교복으로 몸을 감싼 마스미는 입학식 날 평소보다 일찍 전차에 탔다. '첫날이니까 시간적으로 여유있게' 라고 자기 마음에 변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그 사람에게 보이기가 부끄러워서였다. 알지도 못하는 소녀의 교복 모습 같은 걸 일일이 기억할 리 없겠지만, 그래도 같은 리리안 교복이면 「어머?」하면서 신경을 써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게 위화감이 느껴지는 동안은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스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교복이 신체의 일부처럼 친숙해지지 않으면 그 사람 앞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마스미의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입학 초부터 담임 선생님께서 일을 맡기셨다. 봄방학 때 다리를 다친 급우의 등하교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녀, 츠키야마 미나코 양과 마스미의 집은 사이에 시 경계를 끼고 있어 주소는 완전히 달랐지만, 직선거리로 10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근방이었다.
「미안해. 입학하자마자.」
목발을 짚으며 미나코 양이 말했다.
「클럽 활동 견학하러 가고 싶다거나 그러면 지체없이 말해줘.」
「괜찮아. 딱히 들어가고 싶은 클럽도 없거든. 클럽이야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해. 중간에 입부가 안되는 클럽은 거의 없잖아?」
「하지만, 언니를 원한다면 서두르는 게 좋아. 내 다리 탓에 마스미 양이 운명의 언니와 만나지 못한다면 내가 난처하거든.」
「설마.」
언니라니, 거기까진 그리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라는 말을 듣고 머리속에 떠오른 건 그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러니 난 신경쓰지말고.」
「그치만 혼자서 돌아가긴 힘들잖아.」
「무슨 소리야. 나도 같이 견학하러 가야지. 미안하지만 당분간 신세지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런 미나코 양이었으니까 곧바로 친해졌다. 그녀는 중등부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학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서 다른 학교에서 들어온 마스미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아침엔 뒤에서 두번째 칸이 리리안 학생이 많아 좋다고 해서 언제나의 그 전철칸과는 한동안 멀어지게 되었지만, 원래부터 그 사람을 만나기가 부끄러웠으니까 마침 다행이었다.
그러는 동안 빌린 물건 같던 교복도 몸에 길들여졌고, 「평안하세요」라는 인사도, 마리아상에서 손을 마주모으는 동작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을 무렵, 미나코 양은 목발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마스미도 미나코 양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예쁜 손수건을 받고는 가방 들어주는 일에서 해방되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미나코 양을 도울까 했지만, 그녀는 재빨리 클럽에 입부, 아침이건 저녁이건 정신없이 클럽 활동에 빠져 있었다. 신문부다.
그래서 미나코 양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마스미는 오랜만에 그 전철칸에 탔다. 그 사람은 있을까. 학교에선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혹시 벌써 졸업한 걸까. 하지만,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봐 주었다. 리리안 교복 모습의 마스미를 보고,「어째서?」라고 이유를 물어온 것이다.
리리안 학생투성이인 전철칸을 두 달이나 탔고 학교 안에선 같은 차림의 소녀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 이젠 교복에도 익숙해졌을텐데, 역시 마스미는 그 사람을 침착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리리안 교복에 대한 동경. 그건 같은 교복을 입고 이 사람과 함께 리리안에 다니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라카와 야스코 님. 일러준 이름을 마스미는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했다. 2학년임을 알고 억누를 수 없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역에 내리자마자 사그러들고 말았다.
「언니.」
같은 반의 하야시 아사카 양이 손을 흔들며 야스코 님에게로 달려왔다. 아사카 양이 학교 밖에서 첫눈에 반한 상대가 있다는 이야기는 미나코 양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사카 양이 두 사람을 서로 소개한다. 이미 자기소개를 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아니, 마스미는 도망쳤다. 같은 버스를 타고 야스코 님과 아사카 양이 사이좋게 등교하는 모습을 도저히 지켜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전철칸을 다시 바꿀까' 하고 생각했다. 두번 다시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아사카 양의 등장으로 분명히 알았다. 마스미는 리리안 여학원에 다니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시라카와 야스코 님의 동생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뒤에서 두번째 칸을 타고 등교한지도 1주일쯤 지났을까. 어느 날, 그 전철칸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왜?」
야스코 님은 마스미의 옆에 서서 말했다.
「신경쓰이니?」
단지 그 말만으로 야스코 님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스미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왜, 전철칸을 바꾸었는가. 그건 야스코 님을 만나기가 괴로우니까. 아사카 양이 신경쓰이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 아사카 양은 원래 걸어다니기 때문에 M역에 온 건 그 날뿐이었다고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있을까. 야스코 님의 동생은 아사카 양이고, 자신은 아무리 해도 야스코 님의 동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M역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야스코 님은 한 마디만 남기고 마스미에게 등을 돌렸다.
「날 만나는 게 싫다면 내가 칸을 바꿀 테니까.」
그 때, 그대로 헤어졌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스미는 야스코 님의 팔을 붙잡고 말았다.
「바꾸지 마세요.」
「뭐?」
「저도 안바꿀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두 사람만의 조촐한 밀회가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마스미가 타고 있는 전철칸에 야스코 님이 탄다. 야스코 님은 눈 앞에까지 와서 마스미에게 가방을 맡기고는, 때로는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서로를 바라보며 M역까지의 시간을 보낸다. 역에 내린 다음은 버스. 같이 타지만 그다지 얘기를 나누지 않는다. 같은 반 사람이 타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갈라져 그쪽과 대화를 한다. 아는 사람과 만나지 못하더라도 버스에서 내리면 조금씩 거리를 벌리듯이 걸어간다. 그렇게 하기로 정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룰. 그래도 마스미는 마냥 행복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들어서자 곧 견딜 수 없이 외로웠다. 학교가 방학이라는 건 야스코 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과 똑같으니까.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방학은 숙제만 끝내놓으면 학업에서 해방되어 매일 자기 하고 싶은대로 지내는 꿈같은 기간이었다. 할아버지 댁에서 실컷 지내다 와도 되고, 영화관 순례를 하기도 하고, 또 하루종일 풀장에서 놀기도 하고. 하지만 올해는 뭘 하든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마음 속 어디선가 '지금쯤 야스코 님은 뭘 하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들고마는 것이다.
노인 가정을 방문한다거나 소아과 병동에 가서 책을 읽어준다거나, 수화 강습회에 참가한다거나, 공원 청소를 하러 간다거나 해서 여름방학이라도 자원봉사부는 늘 바쁜 모양이었다. 쇠르의 언약을 맺음과 동시에 자원봉사부에 입부한 아사카 양도 아마 그 활동에 참가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동생이었다면. 마스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사카 양과 마찬가지로 언니 뒤를 쫓아 자원봉사부에 입부해서 언니와 함께 활동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아사카 양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녀의 자리에 자기가 쏙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하지만 타인을 부러워하는 건 무의미하다. 아무리 바란다 해도 마스미가 아사카 양과 바뀔 리는 없으니까. 쓸쓸하고, 외로웠지만. 전화 한 통 걸 수가 없었다. 걸어서, 무슨 말을 하라고.
동생인 아사카 양이라면 용건이 없어도 거리낌없이 전화를 걸 수 있겠지. 하지만 자신은 그럴 입장이 아니다. 아침에 같은 전차에서 만날 뿐인 두 사람. 그 관계에 붙일 만한 이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자원봉사부 활동이 있다고 들은 어느 날 오후, 마스미는 무심코 M역까지 오고 말았다. 같은 전차를 이용한다. 그것만이 두 사람을 이어준다면.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기도하며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줄곧 지켜보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슬슬 1시간. 하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린 것 같지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야스코 님에게 꼬박꼬박 바치는 시간이니까, 그 일 초 일 초가 마치 보물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북쪽 입구 계단을 올라오는 야스코 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스미의 모습을 발견하자 멈추어서서는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멀리 떨어진 개찰구에서도 분명히 보였다.
마스미.
마스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달렸다. 좌측 개찰구에서 우측 개찰구로. 인파를 헤치며. 야스코 님도 뛰어온다. 마스미가 달려오는 개찰구를 향해. 두 사람에겐 주위가 보이질 않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서로 뻗은 손이 맞닿으려는 순간, 자동개찰문이 둘을 막았다.
「이런이런, 승차권이나 정기권, 아니면 카드를 넣어야지.」
역원 아저씨의 웃음 소리가 마치 하늘의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 날, 야스코 님은 M역 빌딩에서 펜던트를 사주었다. 쇼윈도에 장식된 눈물 모양의 유리구슬이 예뻐서 가만이 보고 있었더니 선물해주신 것이다. 값은 얼마 안 했지만, 기뻤다. 기뻤지만, 웃으며 「고맙습니다」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건 마스미에게 있어서 로사리오. 그렇기에 아사카 양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온다. 야스코 님도 웃지 않았다. 단지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아무 말없이 마스미의 손을 꼬옥 쥐었다. 두 사람은 죄를 공유하고 있었다.

마스미는 학교 이벤트가 싫어졌다. 이벤트를 하면 아무래도 쇠르 단위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운동회 하카마 경주, 학원제 교내순례,...... 혼자라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야스코 님과 아사카 양이 쇠르라는 사실을 싫어도 실감할 수밖에 없어서 괴로운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아사카 양은 털실뭉치를 학교에 들고 다녔다. 언니에게 드릴 머플러를 짠다나 보다. 뜨개질을 하는 건 아사카 양만이 아니다. 언니가 있는 반 아이들은 서로 짠 것처럼 크고 작은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스미 양도 뭔가 만들어 보지 그래.」
쉬는 시간, 얘기 상대도 줄고 해서 심심해 하는 마스미에게 아사카 양이 말했다.
「하지만 선물할 상대도 없는데.」
「그럼 자기 꺼라도 짜면 되지.」
사실은 선물하고 싶은 상대가 있다. 하지만 아사카 양 앞에서 뜨개질하던 걸 야스코 님에게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기 꺼라니, 허무하다.」
마스미는 목을 움츠리며 일어섰다. 아무 것도 모르는 행복한 아사카 양이 얄밉게 보였다.
「그럼 네 언니에게 드려도 돼?」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물러나는 게 현명하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돌아보자, 아사카 양은 얘기하는 동안 뜨개질 코를 세는 걸 잊어버렸는지 열심히 다시 세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마음을 놓을 사이도 없이 발렌타인 데이가 왔다.
머플러는 무리지만, 입 안에서 녹아 사라지는 쵸콜릿이라면 드려도 무방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는 의리 쵸콜릿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 방과 후. 낡은 온실로 와주시겠어요?」
마스미는 전차 안에서 그렇게 말했다. 물론 무슨 뜻인지 짐작한 야스코 님은 「알았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전차에서 드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는 싫었다. 마리아상 앞 같은 사치스런 말은 안한다. 아무 구석이라도 좋다. 마스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 안에서 쵸콜릿을 드리고 싶었다.

 

─ 아사카(?香) ─

이미 오래 전부터 아사카는 알고 있었다.
언니와 같은 반 친구의 관계를.

　　　　　◆　　◇　　◆

 

처음에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장면을 본 것은 장난삼아 M역에서 몰래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하지만 그 때는 별로 신경쓰질 않았다. 같은 전철칸에 함께 타는 사이. 확실히 그 때는 그뿐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마스미 양은 입학 초부터 미나코 양과 함께 등하교했으니, 모르는 상급생과 개인적으로 친해질 기회는 없었을테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아사카는 느끼기 시작했다. 언니의 마음 속에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쇠르의 언약을 맺었을 때부터 변함없이 언니는 다정했다. 아니, 서로 마주보고 있을 때면 전보다 더 깊은 다정함을 느꼈다. 하지만, 잠깐잠깐 보여주는 옆얼굴은 말 걸기를 주저할만큼 아사카를 거부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처음 의식한 건 여름방학 전이었던가. 잡담을 하다가 아사카가 자기 반 친구들을 화제로 삼았을 때, 아주 잠깐 언니의 표정이 흐려졌다. 「마스미 양이 말이에요.」 라는 말을 꺼낸 직후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럼 츠키야마 뒤의 하야시(林), 방금 문장 해석해봐.」
선생님이 아사카와는 다른 방향을 보며 지명했다.
「아, 하야시(林)가 아니군. 한(伴)인가.」
고개를 든 마스미 양을 보고 선생님은 곧 말을 고쳤다.
「이거 미안. 하도 닮아서 말야.」
그 땐 그저 성씨가 비슷하다는 말인 줄로 알았다. 하야시(林)와 한(伴). 한자로도 한 글자이고 출석번호도 연속이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마스미 양이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다. 단지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사카의 마음 속에 작은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면, 그건 그 때였을지 모른다.
그러고서 한참 뒤, 마스미 양이 중학교 시절 같은 선로의 M역보다 약간 더 먼 학교에 다녔다는 걸 알았다. '그게 뭐 어쨌는데' 하는 맘도 없지 않았다. '아무런 접점도 없었던 야스코 님이 왜 아사카를 동생을 삼았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억지로 거기서 찾아낼 필요가 있을까. 어느 것도 대수롭지 않은 에피소드다. 모든 걸 연관지어 생각하려 들다니 바보같다.
하지만 마스미 양의 대수롭지 않은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아사카의 눈 앞을 지나칠 때마다 마음의 돌기에 걸려 뚝뚝 떨어져 발밑을 구른다. 그게 쌓이고 쌓여 어느샌가 아사카를 꼼짝못하게 만들었다. 시험삼아 머리 속에서 마스미 양을 언니 옆에 두어본다. 그러자 더 이상의 정답이 있을 수 없을 만큼 퍼즐 조각이 딱 맞춰졌다.

가을 방과 후, 중정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언니의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다. 언니는 2층 창문을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엔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조용히 내려다보기만 하는. 마스미 양이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의 한 장면을 떠올릴 만큼 무척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가련한 연인들은 서로의 가문에 의해 억지로 헤어지고 만다. 두 사람은 다른 건물에서 아사카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5분 정도 서로를 바라보다 헤어졌다. 그 5분이 아사카에겐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느껴졌다. 언니는 자기보다 마스미 양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아사카는 직접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추궁하고 따지고 들면, 어쩌면 언니는 마스미 양과 헤어져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과 언니의 관계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런 거 웃기잖아.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내가 왜 그런 꼴을 당해야 해.
말 잘 듣는 동생이 되어 뒤로 물러서는 것도, 악마가 되어 분노를 쏟아붓는 것도 아사카에겐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이 관계를 시작한 건 언니였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언니가 고개를 숙이고 「쇠르를 파기하고 싶어」라고 부탁하면 되는 것이다. 조금, 아니 좀 많이 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준다면 아사카는 분명 용서해줄 것이다. 거기에 언니의 성의가 보이기만 한다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도, 역시 아사카에게 있어선 너무나 좋아하는 언니이니까.
하지만 언니는 아무 말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도, 아사카의 코가 약간 비뚤어진 머플러를 받고서 답례로 비즈로 만든 꽃무늬가 들어간 귀여운 손가방을 선물해 주었다. 아사카는 손가방에 립크림이랑 핸드크림을 넣고 학교에 매일 들고 다녔다. 적극적으로 뽐내고 다닌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마스미 양의 눈에 띄기만 한다면 좋다고 말이다. 어떤 형태로든 야스코 님의 동생은 자신이라고 어필하지 않고선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런 자신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사카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 아사카는 동생답게 언니에게 드릴 쵸콜릿을 직접 만들었다. 아몬드 대신 볶은 커피콩을 쵸콜릿으로 코딩한 것. 쌉싸름하고, 달콤하며, 가슴을 저미는 맛.
점심 시간, 순서를 기다려 마리아상 앞에서 드렸다. 그게 쇠르의 필수코스라며 아사카가 조른 것이다. 언니는 부탁하면 대개 들어준다. 그건 어딘가 떳떳지 못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사카는 모르는 척, 밝고 귀여운 동생을 연기한다. 언니가 막을 내려주지 않는 이상, 그 역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을 망쳐가는 역이라 할지라도.
괴로웠다. 좋아하는 언니를 의심하고, 반 친구를 감시하다니. 좋아서 이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날, 마스미 양이 들고 온 봉투 안에 쵸콜릿이 들어 있었다. 확인해볼 것도 없이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사카는 마스미 양만을 보며 지내왔으니까.
언제 줄까. 신경을 쓰다보니 어느 덧 방과 후를 맞았다. 이대로 주지 않고 돌아가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스미 양이 허둥지둥 봉투를 들고 교실에서 나갔다.
「앗」
뒤쫓아가려고 하자 미나코 양이 걸레를 살레살레 흔들며 아사카를 불러 세웠다.
「아사카 양은 교실담당 아냐?」
「아...... 응.」
마스미 양은 청소담당구역으로 향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청소가 끝나면 그대로 야스코 님이 계신 곳으로 갈 게 분명했다. 아사카는 교실 청소를 얼른 끝내고 언니 교실을 엿보러 갔다. 언니는 쓰레받기에 쓰레기를 쓸어담고 있었다. 마스미 양은 아직 안 온 모양이다. 여기서 기다리고만 있으면 그 애는 쵸콜릿을 건네주지 못할 것이다. 학교 밖까지는 감시할 수 없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 쵸콜릿을 주는 것만은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동생은 바로 아사카니까. 아사카가 교실 앞문 근처에 서있는 줄도 모르고 언니는 뒷문으로 복도에 나왔다. 뒤돌아보지 않았으니까 아사카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바로 뒤를 밟았다. 마스미 양과 만나기로 했음이 틀림없다. 마리아상 앞에서 쵸콜릿을 건네줬다가는 절대로 용서못해. 그렇게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언니가 가는 방향은 그곳과는 반대였다. 복도를 건물 끝까지 걸어 중정으로 내려갔다. 조금 떨어져 아사카도 뒤를 따랐다. 발렌타인 데이인 오늘 교내에는 아직 학생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비교적 미행하기 쉬웠다.
교사 뒤를 지나 계속 걸어간다. 그 앞은 무도관. 그리고 뒷문으로 통하는 길. 도중에 오래된 온실 안으로 언니가 들어갔다. 밖에서 보니, 사람 그림자는 하나. 마스미 양은 아직 안왔다. 아사카는 길 입구까지 조심조심 물러섰다. 여기서라면 온실에서 자기 모습이 안보인다. 그리고 교사에서 온실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쳐야만 했다.
마스미 양은 올까. 아사카는 오기를 바라는 건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자기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지 않고서는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다. 두 사람에게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뒷문으로 하교하는 학생들을 몇 명인가 떠나보낸다. 10분, 20분, 시간이 흘러간다. 이제 안 오려나. 약속 같은 건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즈음, 교사 옆을 달려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마스미 양.
역시 이런 예감은 바라지 않는 쪽으로 맞는 모양이다. 숨을 헐떡이는 마스미 양은 아사카의 모습을 발견하자 갑자기 속도를 떨어트리며 눈 앞에서 멈추었다.
「평안해.」
아사카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평....... 안해.」
「무슨 일인데 그리 서둘러?」
「응? 아니.」
마스미 양은 말끝을 흐렸다. 설마 야스코 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서두른다고는 말 못하겠지.
「아사카 양이야말로, 이런 곳에서 뭐해?」
「난 언니랑 만나기로 해서. 볼 일이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거든.」
그렇게 말하며 앞을 가로막아선 야스코 님의 동생을 밀쳐내면서까지 해서 마스미 양이 온실로 향했더라면 아사카도 감탄하며 다시 봤을텐데. 하지만 마스미 양은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단지 그 말만 내뱉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이래서야 마치 자기가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것 같다고 아사카는 생각했다. 하지만 비참한 건 오히려 자신. 울고 싶은 것도 분명 자기 자신이었다. 마스미 양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 아사카는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사카......」
언니는 예상 외의 인물이 나타나 놀란 듯했지만, 아사카는 상관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찾았어요.」
「무슨 일로?」
그러면서 앉아 있던 선반대에서 엉거주춤 일어선다. 그렇게 초조해할 것 없는데. 뒤에서 마스미 양이 등장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테니까.
「다음번 공립도서관에 갈 때 말인데요.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요. 언니가 빨리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알았어. 그럼 내 교실로 갈까.」
「언니 교실?」
「여긴 추우니까, 아사카가 준 쵸콜릿을 먹으며 얘기하자.」
언니가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안아줘서 아사카는 「네」하고 조그맣게 끄덕였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될까. 언니의 차가워진 손을 마주잡고 걸으며, 아사카는 마스미 양을 생각했다. 그 애는 어디선가 자신들을 보고 있을까. 어쩌면 교사 뒤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몰라.
마음을 달콤한 쵸콜릿으로 포장한 채 세 사람은 어디까지 걸어갈까. 누군가 이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분명 이대로 계속 이어지겠지. 아무도 그게 바람직한 상태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분하지만,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아직은 「좋아하는」 감정이 우위에 있으니까. 그게 역전되었을 때, 아사카는 목에 건 로사리오를 벗을 수 있을까.
언제가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내일일 수도 있고, 반년 후, 혹은 1년 후일 수도 있다. 언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사카도 따라서 올려다보지만, 그곳엔 단지 잿빛 하늘만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