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8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 -2- 체인지

<<체인지할래?>>

 

 

1

 

세상에는 비록 남자라 한들 여장에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인간도 잔뜩 있다.
"좋겠다 좋겠다 여자역이라니, 유키치 넘 부러워. 요 녀석 요 녀석 요 녀석"
오히려 나서서 하고 싶어. 그렇게 바라는 남자도 확실히 존재한다. 이 곳에도 약 한 명.「제 2 원고」라고 적힌 「산백합회판 토리카에바야 이야기」대본을 둘둘 말아, 할 수만 있다면 교체해 주길 바라는 동급생의 어깨를 흥분에 휩싸여 바보바보하며 때리고 있다.
"여자역이 아니라니까. 여장해서 누나랑 체인지하는 역이지"
"그게 그거지 뭐"
"그게 그거가 아냐"
유키 입장에서는 그 부분을 확실히 해두고 싶은 모양이다. 유미한테는 앨리스 말처럼 여자역이나 여장이나 그리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솔직히 동생의 집착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만, 앨리스와 유키가 장난치는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는 언니를 보고 있자니 조금은 기쁘게 느껴졌다. 남자와 접촉하는 것이 질색인 사치코님도 앨리스와 유키한테 만큼은 면역이 생긴 모양이다. 둘 다 남자다운 면이 없어서 그럴 거야. 이렇게 말하면 유키는 그리 기뻐하지 않겠지만.
2학년이 무사히 수학여행을 마치고 학교에 복귀한 그 주 토요일. 오늘은 하나데라 도우미들이 연극회의 겸 연습 겸 의상체크 겸 해서 리리안 여학원에 와있다. 나이순으로 3학년은 닛코/갓코, 야쿠시지 아키미츠/토모미츠 형제. 덧붙여서 쌍둥이.
이어서 2학년. 우선 근육 불끈불끈의 타카다 마가네 군.
계산마니아 코바야시 마사무네 군.
남학교에 피어난 한 떨기 꽃, 앨리스. 본명 아리스가와....(본인 요청에 의해 생략)... 군. 아니, 양.
마지막으로 연년이지만 유미랑 같은 학년인 동생, 후쿠자와 유키. 이상 6명. 여학교 피복실이라는 꽤나 여성스러운 방에 있는 탓인지, 아니면 자기들 배 이상의 여학생들한테 둘러싸여 쑥스러운 것인지, 하나데라 멤버들은 아까부터 계속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한 명, 앨리스만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생기가 넘쳐 흘렀다.
"유미양의 남자역도 분명 멋질 거예요. 사치코님 정말 훌륭한 아이디어입니다.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학원제까지, 아니 학원제가 끝나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뒤를 따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분부만 내려주세요. 기꺼이 도와드릴 테니까요"
"앨리스, 너무 까불어"
5명중 가장 늦게 태어났지만, 일단은 학생회장인 유키가 가볍게 주의를 줬다. 하지만 그 정도로 앨리스의 흥분을 잠재울 순 없지.
"어쩔 수 없잖아. 여학교 학원제라구. 평생 참가는 무리라고 포기하고 있었단 말야. 아앗, 이거 가봉한 의상?"
수예부 부원들이 준비실에서 차례차례 의상으로 보이는 개어둔 천을 들고와 책상 위에 솜씨좋게 펼쳐놓고 있었다.
"아아 멋져라. 한번 입어보고 싶어"
"앨리스"
또 다시 유키.
"알았어, 알았다구"
"괜찮아. 그냥 위에 걸쳐보는 정도라면. 아직 다 안모였으니까"
사치코님이 의상과 배역 이름을 맞춰보면서 말했다.
피복실에는 여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지만, 아직 1학년 동백나무반 트리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예부나 발명부 부원들이 왔다갔다 하는 탓에 누가 있고 누가 없는지 좀 헷갈리긴 하지만.
"정말요!?"
"더럽히지만 않는다면 말야. 자, 슬리퍼 벗고 저기 비닐시트 위에서 입어보렴"
레이님이 기모노[着物. 비단으로 만든 일본 전통의상의 총칭]를 적당히 골라 앨리스에게 건네줬다.
"넷! 명심하겠습니다!"
레이님이 일러준 곳에서 허둥지둥 의상을 걸쳐보는 앨리스. 그 광경은 여자애가 옷갈아입는 모습 그 자체. 벗어서 단정히 개어놓은 하나데라 교복이 애수를 느끼게 한다.
"... 어울려"
가만 보고 있던 요시노양이 유미한테 살짝 말했다.
"응"
"레이짱한테는 미안하지만, 딱 잘라 말해 앨리스가 아씨[姬君(히메기미) : 귀인의 딸에 대한 경칭. 토리카에바야 주인공]에 더 어울리는 느낌이야."
"아, 음, 그러니까.."
직선거리로 약 1.5미터 전방에 레이님이 서있었기 때문에, 유미는 동감은 해도 소리내어 찬성을 표시하기는 곤란했다. 하지만 친척인 요시노양은 하고픈 말 다 해버린다.
"만약에 말야. 앨리스같은 아들과 레이짱같은 딸이 있다고 해봐. 그럼 아버지도 덜컥 바꾸고 싶어질 만도 하지."
"아, 그럼 레이님과 앨리스가 주인공하면 어떨까? 「토리카에바야 이야기」"
"참아줘 유미짱"
레이님이 돌아서서 급히 다가왔다. 우웅~. 역시 레이님은 등 뒤에도 귀가 달린 모양이다.
"농담이라도 그런 얘기는 하지 마"
눈이 무서워. 과거 누군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현실화되는 광경을 레이님은 몇 번이나 봐왔기 때문이겠지. 앨리스는 아주 마음에 없는 것도 아닌 눈치지만.
"그럼 일단 한번 해보고 나서, 더 나은 쪽을 주인공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야?"
사치코님이 얘기에 끼어들며 개어놓은 기모노를 유미에게 건네주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주인공이 두번 세번 바뀌는 일이 용납될 수 있겠니? 게다가 3학년은 무대출연 이외의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주인공역을 어떻게 감당하겠어?"
대본작성에 무대감독에 오늘처럼 의상이라든가 장치문제로 다른 클럽과 의논하기도 하고... 하긴 그 말대로니까 유미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꾸로 주인공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두 사람 다 어려운 일을 떠맡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깊이 따져들어가 보고 싶은 맘도 있었다.
"그럼 하나데라 여러분, 좁지만 준비실에서 옷을 갈아입어 주세요. 준비가 끝나는 대로 부를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그 때까지는 멋대로 나오지 말라구. 여자는 여기서 갈아입을 거니까. ─ 그런 의미인 것이다. 앨리스는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걸치고 있던 여성용 의상을 벗고 자기 이름의 스티커가 붙은 남성용 기모노를 안아들고서 준비실로 모습을 감췄다.

남자들이 사라진 피복실에서 다들 옷을 입어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헤이안시대라서 전통 기모노다. 여성진의 의상은 12단[헤이안  시대 귀족여성의 정장차림으로 12겹의 옷을 걸침]을 간소화한 옷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고등학교 문화제에서 사용할 의상에 비단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옷감은 백화점세일같은 데서 싸게 파는 걸 중심으로 값싼 천을 대량으로 사들여 홍차랑 양파 같은 걸로 물들였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걸쳐야 할 건 네 벌.
우선 빨간 하카마[품이 넓고 주름이 들어간 옷. 통치마 형태와 너른바지 형태가 있음]. 이건 헐렁헐렁하고 질질 끌리는 바지. 겉에선 눈에 잘 안띄므로 허리에 고무줄을 넣은, 좀 큼지막한 파자마 바지같은 느낌. 이어서 옷깃과 소매만 안쪽에 몇 겹이나 겹쳐서 꿰멘 기모노를 입는다. 이걸로 여러 벌을 겹쳐 입은 것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아무래도 12단은 만드는 것도 입는 것도 무리니까. 그 다음 웃치마(裳)라고 하는 세로로 반 뚝딱한 플리츠 스커트 같은 걸 허리 뒤로 감싸고, 마지막으로 몸 전체에 기모노를 걸치면 완성. 머리카락은 예산상 가발을 구입하기 힘들기 때문에 폭이 넓은 검은색 수건을 헤어밴드처럼 머리에 둘러서 남은 부분을 뒤로 축 늘어뜨린다. 가까이서 보면 「뭔가 아닌데..」 같지만, 떨어져서 보면 이게 또 상당히 괜찮다.
이 발명부의 역작은 수녀님의 베일에서 힌트를 얻었다나 뭐라나. 실제로 유미네들이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매듭을 지으면 틀어올린 머리[?そぎ(빈소기). 여성이 성인되면 틀어올리는 머리]처럼 보일 것 같아」라는 아이디어가 호응을 받아, 클럽에 들고가서 더 개량할 생각인 듯 하다. 주인공이기도 한, 대납언[大納言(다이나곤). 헤이안시대 정3품 관직]의 딸, 아씨의 의상을 몸에 걸치고 있는 동안, 유미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내 껀 좀 크지 않아?"
"어디? 아, 정말이네"
아무리 헤이안 시대의 공주님들이 질질 끌고 다닌다지만, 나란히 옷을 갈아입고 있던 요시노양의 치마와 비교해 끌리는 부분이 더 많은 느낌. 주인공이니까 치마 길이는 서비스, 같은 시스템이라곤 생각할 수 없으니, 이건 분명한 사이즈 미스. 하지만 이런 사태를 염두에 두고 가봉한 거니까.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서 여길 이렇게 집으면 요시노양이랑 비슷하게 되는데"
옆에 있던 수예부 부원한테 거들어 달래서 가봉바늘로 고정시키려 하자, 사치코님이「안돼」라며 급히 다가왔다.
"멋대로 고치지 마. 그건 나중에 유키씨가 입을 거니까"
"아?"
현재 예산으로는 다른 사이즈로 같은 옷을 두 벌 만들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후쿠자와 남매는 한 벌의 의상을 교대로 입어가며 무대에 서야 하는 것이다.
크면 작은 것도 겸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유미보다 큰 유키에게 사이즈를 맞춰 의상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과연 그렇군 하며 끄덕여 보지만, 역시 이렇게 질질 끌리면 신경쓰인다. 방향전환할 때 사이즈가 딱 맞는 요시노양은 능숙한 치마놀림을 보여주지만, 그보다 좀더 긴 치마는 몸의 움직임에 따라오질 못했다. 그래도 발이 드러나지 않는 여성용 의상은 그나마 낫다. 남녀 교체해서 유미가 남성옷을 입었을 경우 숏다리로는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으니까.
"잘 생각해 보렴, 유미"
사치코님의 말씀.
"하나데라 학원제 때 전례가 있었잖니"
"하나데라요?"
"유키씨 교복"
"아아"
그러고보니 하나데라 학원제에서 유미가 유키 교복을 입었을 때에도 바지가 길어서 난처했었지. 그 때는 확실히─.
"언니, 설마 저보고 또 나막신을...."
아씨가 걸을 때마다 딸깍딸깍.
공가[公家. 조정에서 벼슬을 지내는 신분이 높은 사람 혹은 가문]의 도련님도 딸깍딸깍. 하지만 드러난 발에 나막신이라면 젊은이라기보다 오히려 까마귀텐구 [カラス天狗. 수도승 복장에 까마귀부리와 날개를 가진 상상 속의 괴물]의 이미지. [보통 남자들의 기모노 정장에는 조리라는 짚이나 가죽 등으로 만든 신을 신으며, 나막신은 평상복인 유카타일 때 신는다]
"그걸 신으라고는 안할게. 하지만 키를 높이긴 높여야 하니까"
사치코님은 어디선가 상자를 들고 와서는 유미에게 내밀었다. 뚜껑을 열어보자
"이건..."
"마이코[舞妓. 나이 어린 기녀. 에도시대 때부터 주로 교토의 기원(祇園. 신사의 옛 명칭)부근에서 활동하던 연회석에서 춤을 추는 소녀]가 신는 나막신이야. 시대고증은 제쳐두고 요전번의 나막신보다 훨씬 기모노에 잘 어울려"
"네..."
확실히 잘 어울린다. 그러고 보니 TV에서였나, 마이코가 이런 걸 신고 기원의 거리를 타박타박 걸어다니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본 적은 있지만 사치코님은 어떻게 이런 걸 구하신 걸까. 그냥 순수하게 궁금하다.
"신경쓰지 마. 집에 있던 거니까"
"에엣!"
보통은 없다구요. 집에 마이코가 신던 물건같은 건. ─ 이렇게 무심코 태클을 넣을 뻔 했지만, 생각해보니 오가사와라 가문은 유미가 알고 있는 「보통의 집」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면이 있었더랬다.
"얘도 참. 가족 중에서 누군가 늘 신고 다니기라도 할 줄 알았니. 그냥 창고 안에 있던 거야"
"창고!"
더더욱 평범한 집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오래된 시골집이면 몰라도, 도심지에서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여기는 엄연한 도쿄.
"아마도 할아버님이나 아버님이 잘 아는 마이코한테 받은 거겠지. 나참 일일이 반응하지 말아줘. 자연스럽게 흘려듣도록 해"
"아, .... 네"
그렇게 주의받지 않더라도 사치코님의 할아버님과 아버님 더하기 여성이 화제가 된 시점에서 이미 유미는 굳어버렸다. 이쪽 얘기는 금기. 얼른 발을 빼는 게 좋아. 유미는 묵묵히 사치코님이 건내준 나막신을 신기로 했다.
─ 하지만 오가사와라 가문의 남자들은 도대체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여성진이 옷을 다 갈아 입은 뒤, 하나데라 멤버들을 불러서 본격적인 사이즈 조정에 들어갔다. 수예부원이 인원을 나눠 의상을 입은 배우들을 돌아다니며 긴 지 짧은 지, 큰 지 꽉 끼는 지 등을 체크하고 수선해 간다. 유미도 얌전히 나막신을 신은 채 마네킹 인형이 되어 있으려니까 한 쪽에서 「와앗!」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야쿠시지씨, 두 분 다 정말 크시네요. 소문으로 익히 들었지만. 으음, 어떻게 해야 하나. 기장을 있는 대로 늘려도 좀 모자랄 것 같은데"
야쿠시지 형제는 칭찬받았다고 생각했는지「응, 우리 커」라며 기쁜 듯이 웃었다.
"옷감을 더할까요, 로사 키넨시스? 같은 옷감이면 오히려 이음매가 눈에 띄니까 같은 색에 무늬가 들어간 걸로 해서 한 20cm정도 있으면 될 것 같은데요"
서둘러 다가온 사치코님에게 문의해 보는 수예부원.
"잠깐 기다리도록 해. 이 얘긴 보류하는 걸로 하고"
"보류?"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 하지만 1학년들이 와야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 우선 유키씨와 유미의 의상을 체크할까. 이런 사정으로 죄송하지만 남성분들은 유키씨와 함께 준비실로 가서 대기해 주시겠습니까? 아아, 다른 분들은 그 차림으로 좀더 계셔 주세요"
의상의 끈을 풀려고 했던 타카다의 뒷모습에 대고 사치코님이 알렸다.
"바꿔 입는구나"
기모노를 벗으며 유미는 차분히 말했다.
왠지 생각난다. 1년전,「신데렐라」 의상체크 때, 역시 사치코님과 의상을 바꿔 입었었지. 신데렐라와 언니B. 학원제에서 누가 어떤 역을 할 것인지 결정이 안난 때였으니까. 두 사람이 자매가 되기 전의 이야기. 결국 사치코님이 신데렐라를, 유미가 언니B를 연기하게 되어 무대 위에선 한 벌밖에 입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느 쪽이건 입을 옷은 정해져 있다.
속옷 차림의 유미 대신 수예부 부원이 유미가 벗은 기모노를 들고 준비실 문을 노크했다. 문이 열리자 대기하던 앨리스와 들고 있던 옷을 교환해서 돌아온다. 의상체크도 남자가 같이 있으면 여러 모로 피곤하다. 작년은 카시와기씨를 빼고 했기 때문에 아주 개방적이었지만.
"어머나"
"세상에"
옷을 갈아입은 유미를 보고 그 자리에 있던 여자부원은 일제히 함박 웃음을 지었다.
"정말 닮았네요"
"키를 빼면 분간하기 힘들겠다"
그것도 나막신으로 키를 높이면 수정 가능. 기모노는 체형을 감추니까 정말 누가 누군지 헷갈리게 된다. 유미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한 순간 유키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훌륭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박수가 터져나왔다. 아마 쌍둥이같은 후쿠자와 남매를 향한 칭찬이 아니라「기발한 착상을 한」사치코님의 공로에 대한 박수인 모양이다. 한 템포 늦게 준비실에서 대폭소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유키도 다 갈아 입었나보다.
"남성분들, 다시 들어오세요"
사치코님이 부르자 준비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복도 쪽 문도 덜컹하고 기운찬 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뛰어들어온 것은 1학년 동백나무반 세 처자였다.
"늦었습니... 다"
선배를 기다리게 했다는 초조감에 아무튼 1초라도 빨리 도착하려는 심정으로 피복실에 들어온 세 명에게는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상상해 볼 여유조차 없었나 보다. 수예부의 열성 덕분에 예상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준 의상, 그리고 그 의상을 몸에 감싼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이 방은 무척 신기한 분위기로 넘쳐흘렀던 모양이다. 노리코짱의「늦었습니다」라는 목소리에 가리어졌지만 토오코짱의 입에서 조그맣게「우와」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자, 카나코짱 어때? 유미짱 예쁘지?"
레이님이 웃으며 굳어버린 카나코짱 앞에 유키를 세웠다.
"잠깐, 레이"
사치코님이 나무랄 것도 없이 한 눈에 알아본다니까요. 닮았다 닮았다 그래봤자 일란성 쌍둥이도 아니고, 성별도 다르니까요.
"....."
카나코짱은 5초 정도 가만히 유키를 보더니 질렸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이「틀린 곳 찾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죠?"
시선을 여장 유키한테서 남장 유미를 향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저기... 카나코짱?"
깊은 의미는 없다니까. 레이님은 그저 가벼운 맘으로 장난친 것뿐이라구. 그러니까 그런 반응을 보이면 곤란해... 라고 생각했다.
"저기 있지, 카나코짱. 항의하려면, 나한테 하라구. 유미짱이 한 게 아니잖아"
거봐, 아니나 다를까 레이님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시잖아. 그런 레이님에게 요시노양은 한발한발 다가가고 있고. 이대로라면 멀지 않은 장래, 반드시 폭발한다. 요시노폭발. 폭발하면 뒤처리가 고생이란 건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카나코짱이 태도를 바꾸는 것 이외에는 레이님의 어쩔 줄 몰라는 멈추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여기서 카나코짱에게 주의를 주면 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 이건 누가 잘못했느냐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더 어렵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자, 아무튼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머릿속으로 골몰하는 여학생들. 그리고 곤혹스러워 하는 하나데라 멤버들.
"레"
"아앗!"
요시노양이 기어코 내뱉은 「레이짱」의 「레」를 유미는 순간 싹 지워버렸다.
"저기, 하나데라 여러분들은 두 사람과 처음 만났죠? 에, 그러니까 이쪽은 마츠다이라 토오코짱. 그리고 그 옆에 호소카와 카나코짱. 이 애들은 노리코짱과 같은 1학년으로 학원제까지 도우미를 해주고 있어요"
난 결국 피에로구나. 유미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무심코 입에서 나와버렸으니까. 이제 주워담을 수도 없구.
"잘 부탁합니다"
누나의 뒤처리를 하려는 건지 유키가 먼저 나서서 인사했지만, 여장하고 있으니까 조금 이상했다.
"누가 유미짱 동생이고, 누가 요시노양 동생?"
속닥속닥 코바야시가 유미에게 물었지만 미안, 무시하기로 했다. 더 이상 이 자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던 중.
"반에서 무슨 일 있었니?"
시마코양이 노리코짱에게 물었다. 조금 늦을 거라고 연락받긴 했지만, 1시간은 「조금」이 아니었으니까.
"청소 끝나고 학원제 일로 회의를 하는데, 예상 이상으로 오래 걸려서요. 간단한 결정을 내리는 것뿐이니까 10분 정도면 끝날 거라 그랬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 좀처럼..."
"그러다 둘로 나눠 옥신각신 하더라구요. 토오코가 보기엔 뭘로 하든 그리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말예요. 뭔가에 집착하는 사람이란 게 있긴 있나 봐요. 나참 귀찮아서 딴 생각하고 있었더니「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라며 양 측에서 비난받고. 괜한 봉변 당할 뻔 했다니까요"
"봉변이라니. 토오코짱"
자기 반의 일을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래서야 반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으려나. 유미는 불안해 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다, 자신이 어드바이스할 입장에 있는 지 없는 지도 의문이고 해서 어쩔까 망설이고 있다 보니, 토오코짱은 눈 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어서 의상을 체크해 보라고 사치코님이 재촉하셨기 때문이었다.

 

 

2.

 

늦게 도착한 1학년이 옷을 다 갈아입은 후, 다시 피복실에 모인「산백합회판 토리카에바야 이야기」의 출연자 일동 앞에서 사치코님은 터무니없는 말을 꺼내셨다.
"이 중에서 자기 대사를 완전히 외운 분"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오는 건 대개 출연도 대사도 적은 사람이다. 가령 타카다나 앨리스.
"그래요"
쑥 한 번 훑어본 후, 사치코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언니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줘야지 하고 다 외우지도 않았는데 손을 드는 건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없다. 상대는 사치코님이니까 거짓말은 반드시 들통난다. 나중에 어떻게 될까 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심한 유미는 소름이 끼쳤다.
"그 분들께 죄송합니다만, 머릿속에 든 대사를 전부 잊도록 하세요"
.......

몇 초의 간격을 두고.
"에엣────!?"
일제히 소릴 질렀다.
"그 분들, 뿐인가요?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인가요?"
모두 필사적으로 확인한다. 그야 그럴 만도 하다. 전부는 못외웠더라도, 상당량의 대사를 머릿속에 집어넣었으니까.
"대본을, 바꿀 거야?"
레이님의 질문에 사치코님을 고개를 가로저였다.
"몇 군데 바꿀 곳이 나올 지도 모르겠지만, 되도록 최소한도로 할 거야. 학원제까지 얼마 안남았으니까"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대사를 잊으라는 거야──. 다들 숨을 죽이고 사치코님에게 주목했다. 그러자 이어서 나온 말은, 뭐였냐면은.
"바꾸는 건 배역입니다"
였다.
"에엣──!?"
이번에는「뭔가 온다」고 대비하고 있었기에 다소 충격은 적었던 일동. 아니,「적었던」은 어폐가 있겠다. 여기선「크지 않았던」이라고 해야겠지. 뭐 그게 그건가. 물론 유미도「에엣──!?」절규에 참가했던 한 명이었다. 잘 생각해 보니「배역을 바꾼다」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남들보다 배나 많은 대사를 이렇게까지 외웠는데, 라는 생각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또 다른 주인공인 유키 역시 마찬가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이 거지근성 남매.
"무슨 말이야? 누구와 누구의 역을 교환할건데?"
"전원이야"
"에.....엣?"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다.
"왜?"
"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걸 실행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해. 내 생각이 잘못됐어?"
잘못됐어, 라니요 사치코님. 그야 물론 정론이긴 하지만요, 지금까지 해온 거랑 앞으로 우리들에게 남은 시간을 고려한다면 그리 간단히 결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내일 학원제였다면 나도 이런 무모한 제안은 하지 않아. 2주일이면 수정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말을 꺼낸 거지"
"그렇다곤 해도"
전원의 배역을 바꾸다니. 당치도 않은 생각인 것이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인지 어떤지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저기, 그렇다면 전 주인공이 아니란 말인가요?"
조심조심, 아니 사양하는 눈치로 유미는 사치코님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걱정마. 유미는 그대로 주인공이니까"
".... 네에"
별로 걱정한 건 아닌데. 약간 기대해 본 것뿐이다. 그리고 그 약간만큼 실망도 했다.
"그럼 제가 주인공을 그만두는 건가요?"
당연하다는 듯 유키가 물었다. 걱정도 기대도, 표정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도 아냐"
"하지만 방금 전원 배역을 바꾼다고 하셨잖아요. 사치코씨"
"그랬지"
사치코님은「참 잘 들었어요」같은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유미와 유키씨가 배역을 바꾸는 거야. 그러면 두 사람 다 주인공 그대로지?"
"에엣"
"유미와 유키씨뿐만이 아니라, 남녀 전부 바꿀 생각이야"
"....."
─ 거짓말. 피복실에 있던 사치코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입술이 그렇게 움직였다. 출연자뿐만이 아니라, 의상담당도, 대도구담당도, 소도구담당도 모두 다.
"지금부터?"
"지금부터"
사치코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위에서 이중의「토리카에바야」를 하고 싶어"
사치코님의 눈동자 속에서「진심」임을 확인한 사람들은 곧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맡겨질 일에 대해 계산하기 시작했다. 무대세트는 변경할 필요가 없다. 배역 언급없이 출연자 이름만 들어간 포스터도 그대로 쓸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시 출연자와 의상이다.
"야쿠시지 형제의 의상이 작았었지? 그걸 카나코짱이 입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한다면 전부 뜯어고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사치코님의 이 아이디어, 실은 앨리스가 여자 기모노를 걸친 것을 보고 반짝 떠올랐고, 야쿠시지 형제의 의상을 체크하면서 확신한 것이라 한다.
"그렇군요. 같은 기장이라 해도, 여성 기모노 쪽이 직선으로 박음질되어 있는 만큼 편할지도 몰라요"
수예부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성용 하카마는 접어서 감치면 되니까 바로 수정할 수 있어요"
"여성용 하카마는 원래부터 길게 만들었고, 기모노 아래론 거의 보이질 않으니 남성분들이 허리에다 걸친다면"
처음엔 엉거주춤했던 수예부원들도 차츰 엔진이 걸리기 시작했다.
"저기, 무리일 것 같으면 무리라고 말하는 게 ─"
팔찌식 반짓고리를 손목에 차고, 쥘가위를 손에 들고, 당장이라도 폭주할 기세같은 소녀들에게 유미가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무리라니요!?」.
"왠지 의욕이 넘쳐요. 원래부터 가봉이었으니까 수선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죠.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낙승이에요."
소리높여 웃는「팀 의상부」, 말릴 생각이었던 게 도리어 도전자 정신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도 할 수 밖에 없어"
지기 싫어하는 요시노양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기세에 휩쓸려 야쿠시지 형제와 타카다가 「우오옷!」 하며 뒤를 이었다.
"... 이렇게 되면, 연극 연습일을 늘리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오늘과 다음 주 토요일에다 평일에 이틀 정도면 어떨까요? 나머지날은 각자 학교에서 자체연습 하기로 하고요"
코바야시가 머릿속에서 스케쥴 조정의 주판을 튀기고 있다.
"죄송합니다만 누가 리리안 학교측에 허가를 받아주지 않겠습니까?"
"아, 그거라면 괜찮아"
레이님이 손을 들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이번 주와 다음 주 수요일을 하나데라 학원과 모이는 날로 예비 신청해놨으니까"
"여자역을 할 수 있어"
앨리스는 좋아죽는다.
"토오코, 남자역 데뷔네요"
다소 들뜬 토오코짱.
"자, 그럼 다시 한번 물을게. 로사 페티다의 의견은?"
사치코님은 레이님에게 시선을 던졌다.
"확실히, 가능만 하다면 그 편이 재밌는 무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로사 기간티아?"
"저랑 노리코는 그다지 부담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백장미 자매의 장녀, 시마코양이 후쿠자와 남매에게 시선을 던졌다. 맞아. 문제는 주인공 두 사람의 마음. 가뜩이나 대사가 많고, 의상 체인지 같은 것도 있어서 어지러운 연극에, 또 하나 추가되었으니 괜찮으려나. 유미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러네"
사치코님은 돌아서며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까지 천천히 다가가서는 목표로 한 인물 앞에서 발을 멈췄다.
"유키씨"
"아, 네"
"무리일까?"
지긋이 눈을 바라보는 사치코님. 본인은 그럴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을지라도, 눈에 보일 듯한 압력이 유키를 꽈악 누르고 있었다.
"에, 아뇨"
동생인 유미조차, 다소 익숙해졌다지만 이 거리에서 압박받는다면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유키는 바로 함락당했다.
"절대로 무리일 것까지야...."
"그래, 다행이야. 그럼 노력해주길 바래"
".... 네"
여자의 미모는 때때로 최대의 무기가 된다. 동생을 책망해본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기대한 대답을 이끌어낸 사치코님은 유미 앞을 곧장 지나쳐서 원래 자기 위치로 돌아와서는,「그럼 결정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저기, 로사 키넨시스? 유미님에게도 확인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노리코짱이 서둘러 물었다. 그러자 사치코님은.
"유미라면 괜찮아"
자신만만하게 미소짓는다.
"할 수 있어"
"... 언니"
가끔씩.
언니는 이런 식으로 유미를 과대평가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유미는, 언니가 자신의 일처럼 말해주는 것이 기뻐서,
어찌된 일인지 실력 이상으로 분발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역시 그 기대에 응하고 말았다.
"물론 하겠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언니매직.

 

 

3.

 

세상에는 비록 남자라 해도 여자처럼 감이 예리한 사람이 존재하는 법이다. 이후 수정방안에 관한 의논 등을 겸한 의상체크를 마치자, 벌써 오후 4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한 시간만이라도 새로운 배역으로 대본읽기를 하자고 결정이 나서, 하나데라 학생회 6명과 산백합회 간부 6명, 더하기 두 사람의 도우미는 우르르 대이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목적지는 장미관.
맨뒤에서 나란히 걷고 있을 때 앨리스가 조그만 목소리로 유미에게 말했다.
"나, 미움받고 있나봐"
"에?"
누구한테, 라고 묻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그, 철사한테"
"철사?"
철사라니 그 가느다란 철사?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유미를 보고, 앨리스는 턱으로 앞장서서 서둘러 가고 있는 1학년 멤버들을 휙 가리켰다.
"철사... 라니, 카나코짱말야?"
"꼭 닮았잖아. 1학년 새 얼굴들이 노리코짱과 함께 들어왔을 때 바로 떠오르더라구. 아, 얘네들은 철사와 스프링이다 라고."
"..... 그런 말 하면 못써"
그러나. 말과는 달리 유미는 그만 웃고 말았다. 철사와 스프링이라니.
이런 식의 별명은 결코 칭찬의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너무나 딱 들어맞는 바람에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다.
유미 앞에 있는 몇 명의 그림자 저편에 가리어진 카나코짱과 토오코짱의 뒷모습이 마침 복도를 꺾어지려던 참이었다.
"신경쓸 것 없어"
유미는 앨리스에게 말했다.
"카나코짱은,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래, 남자를 좀 거북해 하는 구석이 있거든. 그러니까 앨리스만 특별히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남성혐오란 말이구나. 나같은 사람도 남자로 취급한다는 거네"
앨리스는 웃었다.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아, 미안"
"아냐, 괜찮아. 상관없어. 굳이 여자 취급받고 싶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랬구나. 저 애, 남자를 싫어한단 말이지. 그럼 역시 날 보고 불쾌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
(여장남자 주제에)
문득 유미의 머릿속에 카나코짱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확실히 좋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건 분명해 보이지만.
"그런데 말야.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안보는 곳에서 카나코짱이 앨리스한테 뭐라고 그랬어?"
"직접 말은 안했지만"
앨리스는 고개를 움츠렸다.
"의상체크 때 등에 왠지 소름이 쫘악 끼치는 거 있지. 그래서 뒤돌아보니 저 애가 있었어. 아, 그렇다고 적의를 드러낸 얼굴이었다든가 그런 건 아냐. 하지만 뭔가 느껴진단 말야. 그러고 보니 한 달쯤 전에도 이런 일 있었더랬어"
"앨리스는 영감이 있다고 그랬지?"
유미는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에이 참, 유키치한테 들었어?"
앨리스한테는 굳이 알리지 않았지만, 전에 카나코짱이 유미를 걱정해서 하나데라 학생회 멤버를 미행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앨리스는「불쾌한 기분」이었다나 보다. 그것이 영감과 직접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감이 예리하다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그 후로 앨리스는 장미관으로 가는 길 내내, 지금까지 자신이 체험한 불가사의한 사건을 몇 갠가 뽑아서 말해줬지만, 유미는 거의 대부분 기억 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선, 카나코짱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또 다른 이유는, 단순히 그 방면 이야기가 질색이었기 때문에. 귀에 들어와도 오른귀로 듣고 왼귀로 흘려보내고 말았다. 자기가 꺼낸 화제이면서 이런 태도는 더할 나위 없는 실례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니까. 이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무튼 말야. 카나코짱은 나한테 맡겨줘. 앨리스는 그다지 신경쓰지 말구. 남성혐오증이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할퀴거나 물어뜯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호언장담한 유미였지만.

 

 

4.

 

"저, 하고 싶지 않아요"
카나코짱은 물어뜯었다. 앨리스가 아닌 유미를.
"카나코짱...."
「물어뜯었다」라고 하는 건 물론 비유. 반항했다는 의미. 유미는 거품투성이 컵을 그만 떨어트릴 뻔 했다. 대본읽기와 상당히 조잡한 연기연습을 한 번 끝내고 나니 5시 조금 지났기에 오늘은 이만 해산하기로 했다. 노리코짱과 토오코짱이 하나데라 멤버들을 정문까지 데려다 주러 가서, 유미가 카나코짱과 함께 설겆이를 하기로 했다. 앞서 그 말은 이러한 과정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무렵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었다.
"하고 싶지 않다니, 뭘?"
뒤에서 테이블 위를 닦거나 창을 닫거나, 쓰레기를 정리하거나, 예비의자를 방구석에 세워 놓거나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유미는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연극에 참가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에요"
거품을 씻어내는 손을 멈추는 일없이, 카나코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웃 학교 남자들과 연극을 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인데, 어째서 일부러 남자역따위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지─"
"하지만 왜 이제 와서"
대본읽기도 했다. 연기연습도 했다. 그러는 동안, 분명 즐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카나코짱은 모두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동의해 주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하기는"
유미는 거품이 묻은 스폰지를 오른손으로 꾹 짰다.
"우리들이 피복실에 있었을 때 카나코짱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었지. 새삼 이제 와서,란 말을 할 것도 없네"
"....."
"그랬구나. 하기 싫었다니, 미안해. 눈치채지 못해서"
유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카나코짱은 그보다 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누군가의 쇠르(동생)도 아니니 의견을 말할 입장이 아니예요"
하지만 함께 연극을 만들어 나갈 동료다. 유미는 자기 일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카나코짱을 보고 있으려 했지만, 실은 제대로 보질 못했다. 혹시 카나코짱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면, 그건 유미의 잘못이다. 카나코짱을 도우미로 끌어들인 건 다름아닌 유미니까.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그래도 난 카나코짱이 연극에 참가해 줬으면 해"
유미는 생각했다. 왜「이제 와서」이러는가를. 피복실에서 찬반을 물었을 때, 분명 카나코짱에게 직접 물어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대본읽기도 연기연습도 참가한 걸까. 진심으로 그만둘 생각이었다면 하나데라 학원 사람들이 있을 때 선언하는 편이 보다 효과적일텐데. 물론 산백합회의 체면을 염려해서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이 상황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바로 뒤를 돌아보기만 해도 책임자인 홍·백·황의 세 장미님들이 계신데.
"있잖아 카나코짱"
그렇기에 유미는 생각했다. 카나코짱은 그저 알아줬으면 하는 게 아닐까.
학원제 연극을, 하나데라 학원과의 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망가뜨리고 싶다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은 여기에 있다는 걸. 불만을 품은 채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그만두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본심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직설적으로「그만두고 싶다」에만 주목해선 안되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다면 그만두면 된다. 그렇게 잘라버리는 건 손쉬운 일. 하지만 아마 그래선 아무런 해결도 안될 것이다. 유미의 마음 속에 분명 후회가 남을 테니까.
"약속해 줬잖아. 학원제를 도와주기로"
왠지 싫다. 이런 식으로 구속하는 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미는 달리 카나코짱을 붙들어맬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약속같은 건 안할 걸 그랬어"
카나코짱은 헹구고 있던 마지막 컵의 물기를 털어내고는 바구니 속에 엎어두었다.
"아, 카나코짱"
유미는 거품이 묻은 손을 씻고 수도꼭지를 잠그고 나서 쫓아갔다. 카나코짱은 이미 씽크대를 떠나 시마코양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다니고 있었다. 
"약속같은 건 안할 걸 그랬다는 거지"
카나코짱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이는 곧, 아직은 도우미를 계속할 의사가 있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이걸로 우선 안심하기엔 이르다. 카나코짱은 불만을 그대로 남긴 채다. 여전히 하나데라 학생회 멤버와 충돌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어떻게든 해부려야쓰겄네"
그렇게 중얼거린 유미는. 어째서 지금 사투리가 나오냐며, 스스로 태클을 걸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