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4권 산들바람 솔솔 -5- 하나데라 대난투

                               - 하나데라 대난투 -

 

 

                                        1

 

 다른곳도 이런지는 모르겠어.
 그치만 우리학교랑 하나데라를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남학교 축제쪽이 왠지 더 대담하고 시끌벅적한 느낌이 든단 말야..
 우선, 교문앞부터!
 학원제를 알리는 특대 사이즈 간판은 아예 글자가 땅바닥까지 삐져나와 있을 정도.. 교정을 걷고 있자니 예술인지 그냥 낙서인지 분간이 안가는 화살표나 일러스트들이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고, 나무들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듯 갖가지 물건들이 매달려 있곤 하는거다.
 그나저나 대체 왜 저런 것들이 매달려 있는거지? 레코드판, 장화, 꽃다발, 우산, 냄비, 개목걸이 등등.. 하나하나 세고 있자니 끝이 없겠어.
 일단은 교문앞에 방문객을 받는 코너가 있긴 한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있잖아? 개중엔 시장에 들렀다 온듯한 아주머니까지 보인다. 저건 분명히 이쪽 길이 집에 가는데 가까워서 지나가는 걸꺼야. 우리학교였다면 이렇게 개방적인 풍경은 절대로 볼 수 없었겠지?
 아무튼.. 세분 장미님들과 그 뷔통들을 합한 리리안 여학원 산 백합회 임원 6명은, 교문 앞에서 유우키와 앨리스, 다카다에게 에스코트 받으며 하나데라 교내로의 기념할만한 첫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야?
 닌자가 전단지를 나눠주질 않나, 등에 간판을 짊어진 타잔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인기 만화의 주인공들이 각자 주제가를 패러디해서 부르고 다니기 까지.. 여긴 분명히 하나데라 일텐데 어딘가 다른 세계로 잘못 들어와버린 것만 같아.
 리리안 여학원의 교복을 발견한 남학생들이 너나 할것없이 '오옷-!'이란 소리를 지른다. 개중엔 박수를 쳐대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
 "괜찮아요, 여러분께 폐를 끼치지 않도록 충분히 얘기해 뒀거든요"
 유우키가 이미 얼음처럼 굳어버린 사치코님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만약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정학이나 퇴학처분 뿐만 아니라 해당 동아리까지 폐부시켜 버릴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나데라에선 각 동아리마다의 전통이란게 꽤나 중요한 모양이다. 졸업한 뒤에도 선후배 관계는 계속 이어져 갈 정도라니, 어떤 동아리가 없어져 버린다는 건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명예롭지 못한 일인가봐. 그럴 바엔 스스로 자퇴하는게 낫다고 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라나?

 조금 걷자 양갈래 길이 나왔다.
 당연히 그 가운데 마리아님 조각상이 서 계실리는 없는거고.. 정면으론 울창한 숲.. 아니 야산이라고 부르는게 낫겠지?
 "유키치, 리리안 여학원 분들을 어느길로 모시는게 좋을까?"
 갑자기 다카다가 큰 소리를 낸다.
 "글쎄.. 갈때는 오른쪽, 올때는 왼쪽은 어때?"
 유우키까지 지지않을 정도의 큰 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그렇게 해"
 평소땐 차분한 앨리스까지 큰 소리네..?
 대체 무슨 일이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왜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게다가 국어책이라도 읽는것처럼 어색하잖아..
 "아- 알겠어, 일부러 모두한테 들리도록 얘기한거지? 체육계열하고 예능계열 어느쪽 에서도  불만이 안나오게끔 말야"
 요시노가 소곤거리며 물어본다.
 "딩동댕~ 요시노, 정답이야. 꽤 예리하네"
 앨리스가 합격벨이라도 누르는 것같은 동작을 해 보였다. 아무래도 여기선 통학로까지 파벌마다 따로 쓰나봐..
 처음에 가게될 오른쪽 길은 조금 힘든 코스였다. 가운데 솟아있는 산을 따라가듯 이어져 있어서 길이 험하다. 나무들이랑 돌로 이루어져 있잖아? 누가 산길 아니랄까봐...
 "여긴 꽤 좋은 운동이 되겠어"
 레이님이 나무 뿌리를 건너뛰며 통나무 계단을 오른다.
 "괜찮으세요? 갈때는 이렇지만 돌아가실땐 포장도로니까.."
 유우키의 그 말에 산 백합회 임원들이 모두 다행이라는 듯 안도했다.
 하지만 여긴 리리안이 아닌 하나데라의 교내,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냥 손바닥을 마주치는 정도로 기뻐하기로 한다. 그래도 만세삼창을 하지 않은건 정말 다행이었어...
 "단, 산자락을 멀리 돌아가는 길이라 시간은 좀 걸리지만요..."
 "예...?!"
 그 한마디에 모두의 입가에 지워진 미소가 싹 사라져 버렸다. 참고로 짧지만 험한 길 쪽이 쳬육계열, 길지만 평범한 길 쪽이 예능계열. 어느쪽이 더 편한건지는 걸어보지 않으면 글쎄..
 "유우키씨는 매일 어떻게 다니세요?"
 그나저나 과연 산속에 세워진 절간의 따님이라니까. 시마코는 전혀 숨찬 기색이 안보이네?
 "오늘의 여러분들 하고 똑같아요. 등교할때와 하교할때 각각 따로 다니거든요"
 유우키는 두 파벌중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회장이 됐었지..
 "전 왼쪽길로만 다녀요"
 앨리스의 말이 이어진다.
 "전 오른쪽 입니다"
 이건 다카다의 대답. 두사람 다 납득이 갈만큼 어울리는 대답이었다.
 만약 내가 하나데라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어느쪽을 골랐을까? 한동안 고민해본 유미였지만 결국 유우키처럼 갈때랑 올때를 나눠서 다녔을꺼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동생을 따라하려는건 아닌데.. 후쿠자와네 남매는 우유부단한 것까지 닮았단 말야.

 등산하는 것만같던 길이 끝나고 길지만 포장된 길과 합쳐지는 지점이 되자 다시금 여러가지 볼꺼리로 손님을 맞고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뭔지모를 할인티켓이나 공연물이랑 그 공연시간이 적혀진 티슈 따위를 나눠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다들 열심인 모습이다.
 저쪽에선 커다란 펜더 인형옷을 입은 사람이 어린 애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고 있는게 보인다. 그 앞을 지나가려 할때, 어린애가 아닌데도 유미는 사탕을 받아 버렸다. 그 사탕 포장지는 핑크색 바탕에 노란색 무늬들이 놓여 있었다.
 "아.. 고마워요"
 그 팬더 인형은 유미 머리에 손을 올리곤, 마치 애들한테 하듯이 쓰다듬은 다음, 다시금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간다.
 "유우키네 들이 계속 노려보고 있어서 아무도 우리한테 다가오지 않는데.. 저사람 대단하네"
 레이님이 조금쯤 호감어린 시선으로 몇번이나 그 팬더인형 쪽을 되돌아 본다.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까 대담해 졌는지도 몰라"
 그건 말이 되네..
 "그나저나 왜 저한테만 사탕을 준 걸까요?"
 유미는 방금 받았던 사탕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그러자 유우키가 웃으며 딴지를 걸어온다.
 "이중에서 유미가 제일 어린애 같아 보였던거 아냐?"
 "뭐-?"
 제일 어린건 노리코잖아! 게다가 난 4월에 태어났으니까 내가 요시노나 시마코들 보다도 조금은 더 언니란 말야.
 "뭐 어떻니? 유미 넌 단걸 좋아하잖니. 아마 그 팬더씨는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사치코님이 위로해 주셨지만 그건 전혀 위로가 안된다구요! 단걸 좋아하다니.. 그거야 말로 어린애 같은 이미지만 생기잖아요..
 "그럼 그거 필요없는거니? 내가 받아갈까?"
 "이건 제가 받은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사탕을 쥔 손을 뒤로 숨겨 버렸다.
 "그것 보렴"
 사치코님이 '역시 받아서 기분좋은 거잖아'라며 놀리신다.
 으.. 실수다. 저런 단순한 장난에 딱 걸려버리다니..
 그치만 날 갖고 노실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는건, 사치코님도 조금은 이곳 분위기에 익숙해져 왔다는 얘기 맞지? 좋아 좋아.
 "걸어다니면서 먹으면 안되"
 "예--"
 유미는 들고있던 가방을 열어 사탕을 넣으려 했다. 그때 사탕 포장지에서 문득 '호(好)'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응?'
 깜짝 놀라 버렸잖아..
 다시한번 바라보니 이번엔 '소(小)'라는 글자도 보인다. 무늬라고만 생각했던 노란색 부분이 알고보니 전부 글자였던 거다.
 "추리소설 동호회...?"
 유미는 사탕 포장지에 적힌 글씨를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팬더 인형이랑 사탕이라.. 그게 추리소설 동호회랑 어떤 관계가 있는거지? 그쪽이 더 미스테리 같잖아.
 그건 그렇고, 추리소설 동호회란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것만 같은데...
 "유미"
 사치코님이 혼자 뒤쳐진 유미를 부르신 탓에 서둘러 사탕을 주머니 속에 쑤셔넣곤 열심히 뛰어보는 거였다.

 

 

                                        2

 

 하나데라의 학생회실은 학교건물 안에 있었다.
 그냥 일반교실 옆에 있긴 하지만 화장실이랑 계단 사이의 안쪽이라는, 조금 안어울리는 곳이 출입구다. 그 방 안쪽은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의 학생회실인 장미의 저택 2층 회의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꼭 오래된 잡동사니 창고같은 분위기 라고나 할까?
 아무리 둘러봐도 학생회실이란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고 그런 방 한가운데 나무로 된 책상이 놓여져 있는게 보인다.
 대충 훑어봐도 빨래판이나 나막신, 커다란 연, 움직이지 않는 시계 같은 것들이 보인다. 저것들은 대체 어디에 쓰이는 거지? 왜 이곳에 놓여있는 건지 도무지 알수가 없는거다.
 아무튼, 오후 1시반에 학생회실에 들어온 산 백합회 임원들은 고바야시를 비롯해 기다리고 있던 하나데라쪽 학생회 임원들 4명이랑 오늘의 예정에 대해 회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세분 장미님들은 앉아계신 곳까지 올라온 도전자들에게 낼 퀴즈를 심사해 주시구요, 정답을 맞춘 사람에겐 표시를 해주시면 됩니다. 2시에서 3시 반까지 90분 정도 걸릴꺼라 예상되구요. 장미님들 옆에는 우리 애들이 한명씩 붙을 꺼예요. 게임 도중에 생기는 돌발상황에 대해선 전부 저희들이 대처할 테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꺼예요. 음.. 그밖에 뭐 궁금하신게 있나요?"
 고바야시가 우리쪽을 둘러보며 물어본다.
 어째서인지 저 애는 회계인데도 혼자 나서길 좋아해서 어느샌가 사회자 역할을 맡아버리는 알수없는 존재였다.
 "아니예요, 여러분께 전부 맡기겠어요"
 미리 대강의 내용을 들어 뒀으니 특별히 지적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게다가 한사람당 한명씩 보디가드(?)가 붙는다고 하니 아무래도 세 장미님들은 조금쯤 마음이 편해지셨나 보다.
 "그럼 저희들은 잠시 나가 있을테니 뷔통 여러분들은 옷을 갈아입으세요"
 그말을 뒤로하고 남자애들은 방을 나갔다. 앨리스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몇가지 도와 주었지만 일단은 남자여서 아쉬워하는 얼굴을 하며 방을 나섰던 거다.
 "우리도 나갈까?"
 시마코가 예의상 유미들에게 물어본다.
 "응? 아니..."
 언니들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새삼스레 얼굴붉힐 사이도 아니고.. 아니, 창피해 하는게 되려 더 창피한 거다. 쉬르가 된지 아직 3개월째인 시마코랑 노리코라면 또 모를까...
 "그것보단 좀 도와줬음 좋겠어"
 벌써 세탁 비닐을 뜯고 옷을 꺼내든 요시노가 레이님께 옷핀을 건네면서 말을 꺼낸다.
 "알았어. 근데.. 이건 앨리스 꺼니?"
 "응, 역시 크잖아.."
 요시노는 교복을 입은채로 바지를 덧대어 보곤 중얼거렸다.
 "별로 키차이는 나지 않을꺼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애는 남자애 였구나. 소매도 기장도 다 크네? 잠깐 사치코, 옷핀 갖고있는거 있어?"
 "있어"
 사치코님은 바느질 세트에서 옷핀을 2개 꺼내서 레이님께 건넨다.
 요시노가 얼른 옷을 갈아 입는다. 결국 지참한거 하나랑 레이님꺼 한개, 사치코님이 건네준 2개까지 해서 총 옷핀 4개로 기장을 맞췄다.
 유미들이 갈아입고 있는 옷은 하나데라의 교복이었던 거다. 세 장미님들이야 공식 게스트들 이시니 리리안의 교복을 보여주는게 필수! 하지만 그 뷔통들에겐 그런 제약이 없었다.
 한번 무대위로 올라가 버리면 1시간 반동안 내려올수 없는 언니들을 도우려고 온 거니까..
 그런데 리리안의 교복을 입은채로 무대 밑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퀴즈 참가자들이 혼란스러울런지도 모르는 거다. 그래서 나온 타협안이 장미님들 이외엔 게임이 진행될 동안 하나데라의 교복을 입기로 한 거였다.

 유미들이 빌려입은 교복은 하나데라 학생회 임원 중에서 키가 작은 사람들 세명이 각자 여벌의 교복(물론 깨끗하게 세탁된 녀석이다)을 가져온 것이었다. 요시노는 앨리스의 것을, 노리코는 고바야시 것을.. 그리고 유미는 당연하지만 동생인 유우키 것을 빌려입은 거다.
 그나저나 키가 작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다카다나 야쿠시지씨 들하고 비교했을때의 얘기.. 그나마 앨리스는 연약한 인상이 있었지만, 유우키나 고바야시는 평균적인 고등학생 이었던 거다. 게다가 유미들 세명은 여자애들 중에서도 그다지 키가 큰편이 아니었다. 교복을 빌려 입은것 까지는 좋았지만 세명 모두 옷이 너무 컸던 거다.
 "소매는 걷어입으면 된다지만 바지는 한사람당 옷핀 4개는 필요하겠어. 아무래도 모자라네.."
 벌써 해버린 요시노를 제외하면 2인분인 8개가 더 필요했다. 유미랑 시마코, 노리코가 가진걸 다 내놔도 옷핀이 8개나 있을리가 없어...
 보통 휴대용 바느질 세트에 들어있는 옷핀은 한개, 많아야 두개 정도? 예상했던 대로 전부 모아봤지만 3개밖에 나오질 않았다. 아무래도 한사람 몫이 모자라잖아..
 "어디 빌려올 곳이 없을까?"
 레이님이 혼자 중얼거릴 동안 노리코가 바지단을 걷어올려 접고는 '전 이걸로 괜찮아요'라며 옷갈아 입기를 끝내 버린다. 유미도 그걸 따라해 보려고 했지만...
 "한사람이라면 모를까 둘이나 바지걷고 어슬렁 거리는건 좀 그렇지?"
 "응...."
 장미님들의 저 반응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멍청해 보이는가 보다. 그것뿐이라면 그냥 넘어갈수도 있는 문제지였만 괜히 눈에 띄어 버리면 일부러 하나데라의 교복을 입은 의미가 없는 거잖아. 그건 안되지.. 어쩔수 없이 유미는 접었던 바짓단을 도로 내렸다.
 "유우키 녀석.."
 이럴때면 언제부터인지 나보다 키가 커진 동생녀석이 원망스러운 거다.
 "아예 꼬매 버릴까?"
 어차피 동생껀데 뭐.
 나중에 되돌려 놓으면 문제 없잖아? 다행히 바늘도 실도 준비되어 있고...
 "그럴시간 없다니까"
 요시노가 시계를 가리킨다.
 "그런말 할 동안에 꼬매 버리면 되잖아"
 이런쪽이 특기인 레이님이 바느질 세트를 주섬주섬 꺼내든다.
 "입고 있는채로 할수는 없잖아. 유미가 옷을 갈아입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말한거야"
 "아.. 그치만 말야.."
 황장미 자매는 유미를 내팽겨 둔채 둘이서만 토론 모드로 돌입해 버리는 거였다.
 "뒷굽이 높은 구두가 있으면 해결 되겠지만 남학교에선 그런거 없겠지..?"
 농담인건지 진심인건지.. 사치코님은 유미가 입은 바지가 유미 다리보다 얼마나 더 긴건지 확인해 보며 그렇게 되뇌였다.
 "굽이 높은 신발..?"
 사치코님의 혼잣말을 듣던 유미의 뇌리에 문득 떠오르는게 있었다.
 "이거, 좀 빌려야 겠어요"
 학생회실의 잡동사니들 속에서 유미가 집어든 것은 나막신 한켤레 였다.
 얼른 신어보니 높이도 딱 맞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막신 특유의 소리가 나긴 하지만 그쯤이야 뭐.. 갑자기 키가 커지니까 왠지 세상이 달라보여..
 그러고 있을동안, 요시노가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둘둘 말아 올리고 있었다. 하나데라 학생처럼 보일 필요까진 없었지만 긴 머리를 휘날리고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눈에 뜨일 테니까 말야.
 "노리코는 지금 그대로도 상관 없겠어. 유미는 어떻게 할래?"
 "글쎄요.."
 역시 리본으로 묶은 머리도 눈에 띈다는 점에선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리본을 풀어 봤지만 아침부터 계속 묶고 있어서인지 벌써 머리가 눌려 있었다. 이래서야 빗으로 빗어주는 정도로는 어림없겠어..
 "물이라도 묻혀 볼래?"
 "드라이기도 없잖아요..."
 "그렇겠다.."
 여기엔 빨래판도, 분재 화분도, 어딘지 모를 나라의 전통가면 같은것도, 곰인형 까지 있었지만 당장 필요한 드라이기는 없는거다.

 "맞다, 유미.. 너 수건을 갖고 있었지?"
 "아.. 예"
 '잠깐 꺼내보렴'이란 말에 수건을 건네주자 그걸 펼친 사치코님이 유미 머리에 둘러 주셨다.
 "터.. 터번(- 중동지역 남성의 고유 의관. 색상이나 크기, 모양에 따라 신분이나 출신을  나타낸다)이예요? 아님..."
 아무튼 싫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수건은 눈깜짝할 사이에 유미의 머리에 둘러져 뒷쪽에서 묶여 버렸다.
 "오- 그거 괜찮네"
 "나막신이랑 잘 어울리잖아"
 의외로 모두들 재미있어 하잖아? 유미는 얼른 손거울을 꺼내 비춰본다. 그러자...
 "이.. 이건!"
 거울속에 비친 유미의 머리는 해적 부하 나부랭이 같았다.
 아니, 그보단 대청소 할때의 우리 아빠모습 같다고나 할까..? 뭐.. 이런말 해봤자 유우키 말고는 못알아 듣겠지만 말야.
 그래도 이건 꽤나 괜찮은 생각일 런지도 몰라. 수건으로 덮고 있으면 눌린 머리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말이지.
 이런저런 이유로 그냥 수건머리로 만족하기로 했다. 결국 이걸로 뷔통 전원의 변신이 끝난 거다.

 "오옷- 유키치랑 쏙 빼닮았네?!"
 옷갈아입기가 끝나고 되돌아온 고바야시가 제일먼저 손가락질 하며 웃어댄다.
 "뭐라구? 그거.. 욕이지?"
 후쿠자와네 남매는 서로 동시에 항의해 봤으나..
 "어차피 90분만 참으면 되는 거잖아"
 전혀 이쪽 얘기는 안듣고 있잖아? 게다가 '얼굴 뿐만 아니라 하는 말까지 똑같아'라며 모두의 웃음꺼리가 되어 버린다.
 "그나저나 네 교복, 왜이렇게 여기저기 뜯어져 있는거야?"
 유미는 아까 팬더씨한테 받았던 사탕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동생 교복을 찬찬히 뜯어본다. 같은 기간동안 입어왔을 앨리스의 교복은 말그대로 깨끗한데 말야. 고바야시의 교복조차 앨리스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뜯어지진 않았는데...
 "신경 꺼, 그래도 이것보단 낳잖아"
 유우키는 자기가 입고있는 교복 소매를 들이 밀었다. 응? 뭐야..?! 소매가 아예 반쯤 떨어져 있네?
 "왜 그래?"
 "학생회장은 체력승부거든. 자.. 빨리빨리 운동장으로 나가야지"
 동생 녀석은 시간을 확인하곤 등을 돌려버렸다. 아무래도 신경쓰이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앨리스가 유미에게 넌지시 귀뜸해 준다.
 "유키치는 나랑 달라서 활달하거든"
 "응?"
 "학생회장 이랍시고 가만히 앉아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여기저기 잘도 뛰어다니거든. 눈치도  빠르고 신경도 잘 써주고.. 드물긴 하지만 말을 잘 안듣는 애들한테 힘으로 밀어 붙이기도 해. 그래서 항상 교복이 너덜너덜 한거야"
 "그래..?"
 평소에 집에선 보지 못했던 동생 녀석의 또다른 일면을 본듯한 느낌이야. 저게 힘으로 밀어 붙이다니.. 믿을수 없어! 아무래도 집안에서랑 집밖에서랑 전혀 다른 성격인가 보네?

 "문앞에 이런 상자각 버려둔게 누구야?"
 그런 동생 녀석이 문을 열자마자 큰소리를 낸다.
 "얼래? 어떻게 된거지? 조금 전까진 없었잖아"
 하나데라쪽 사람들에 이어서 유미네들도 복도로 나와본다. 그러자 꽤 커다란 상자각이 문앞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너비가 70센티는 될 정도의 크기다. 게다가 갈색으로 꼼꼼하게 칠까지 되어 있잖아? 이게 여기 놓여진지 오래 됐다면 분명히 벌써 눈치를 챘을텐데...
 "연극에 쓰일 소품이나 전시품중 하나 아냐? 옮기던 중에 뭔가 일이 생겨서 잠깐 여기다 두고간게 아닐까?"
 다카다가 그 상자를 한켠으로 치우면서 그렇게 말했다. 계단 옆이기도 해서 종종 이런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일부러 학생회실 앞에 둘껀 없잖아. 금방 가지러 올꺼면 이렇게 안쪽까지 밀어넣어 두진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학생회실에 보내온 거라면 뭔가 메모라도 한장 붙어있어야 하는거 아냐?"
 "빈 상자각 같은거 주문한 기억도 없잖아"
 "그거 안이 빈거야?"
 "응.. 비었어"
 "그럼... 일부러 여기다 버리고 갔다는 얘기네?"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바보녀석도 있냐?"
 "글쎄.. 그래도 시비를 거는것 치곤 빈 상자각 하난 좀 약한데?"
 남자애들은 그 상자각을 둘러싸고 머리를 맞대어 본다. 그래봐야 여기 두고간 범인이 없으니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인거다.
 "아무튼, 이대로 방치해 둘순 없어. 30분이 지나도 치우지 않으면 불이익이 갈꺼라고 경고는 해두자"
 유우키가 어디에선 종이랑 굵은 마커를 꺼내와 무언가를 적고는, 그대로 상자각에 붙였다.

 [ 경고
  30분 이내에 가져가지 않으면 이 상자각을 처분한다.
  그럴 경우, 원 주인에게 일정한 패널티를 부여할 테니 각오해 둘것!
  13:45 하나데라 학생회장 후쿠자와 유키치]

 "이제 됐어. 그럼 가볼까?"
 유우키는 마치 아무일 없다는 듯이 한걸음 내딛었다.
 처음부터 일련의 행동들을 봐왔던 산 백합회 임원들은 서로 말없이 시선을 교차한다.
 .....남자애들 이란건 어딘가 대단하단 말야.

 

 

                                        3

 

 운동장 중앙에는 빨강/노랑/흰색으로 칠해진 3개의 감시탑 풍의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주변에는 게임 참가자처럼 보이는 남학생들이 게임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게 눈에 들어온다.
 교복에 체육복, 각 동아리 유니폼에다 코스프레(*주1)까지 눈에 띄어서 무대뿐만 아니라 참가자들도 가지 각색이다.
 그런 가운데 리리안의 교복이 나타나자 모두들 좌우로 비켜서 길을 만들어 주었다.
 절대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공지를 모두들 지키고 있는거다.
 세개의 무대는, 무대위의 공간에서 지면까지 경사진 판자가 덧붙여서 있어서 미끄럼틀 처럼도 보인다. 그 반대쪽에 사다리까지 붙어 있으니까..
 "설마.. 저 사다리로 올라가야 하는거니?"
 실제 올라갈 곳을 쳐다보자, 사치코님 뿐만 아니라 시마코까지 조금 무서워진 모양이다.
 원래 1층 지붕 정도 높이라고 들었었지만 그보단 조금 낮은것도 같은데 말이지..
 생각했던것 보다 낮긴 하지만 그래도 2미터는 가볍게 넘기는 정도? 평소에 사다리를 탈 일이 없던 사람에겐 조금 무리인 걸지도 몰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저흰 사다리를 쓰지만 여성 분들을 위해서 이동식 계단도 준비해 뒀거든요. 하나밖에 없어서 한분씩 차례로 타셔야 하긴 하지만요"
 유우키의 말이 끝나자 마자 도우미 역할의 남학생이 바퀴달린 계단을 끌고 왔다. 비행기 탈때 쓰는 트랩처럼 생긴 녀석이었는데, 원래는 도서관의 서고에서 쓰이는 거란다.
 "그럼 저부터 올라갈께요. 죄송하지만 노란색 무대에 붙여 주실래요?"
 레이님은 사다리라도 상관없다는 투였지만 교복이 치마란걸 생각해 내시곤 계단을 쓰시기로 하신것 같다. 발걸음도 가볍게 제일먼저 무대위로 올라가 버리신다.
 노란색 다음은 흰색 무대에 이동식 계단이 붙여졌다. 시마코는 그녀답게 조심조심 한계단씩 올라간다.
 마지막인 사치코님은 좀처럼 첫발을 내딛지 못하고 계신 상태로, 계단 앞에서 빨간 무대위를 쳐다만 보고 계셨다.
 "저기.. 역시 제가..."
 "괜찮다고 했잖니, 유미"
 아직 '제가 대신 올라갈께요'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사치코님은 유미를 노려본다.
 "아.. 아뇨. 저도 잠깐 올라가 보고 싶어졌거든요. 안되나요?"
 "저 위에 말이니?"
 "예,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서..."
 "어쩔수 없는 애구나"
 "저.. 조금 무섭거든요. 저랑 같이 올라가요"
 유미는 사치코님의 손을 잡고 계단으로 다가갔다. 혼자가 아니라서 안심하신 건지, 아니면 유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인건지 사치코님은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없이 무대위에 올라 가신다.
무대 위쪽은 약 한평(*주2)이 조금 넘을까 싶을 정도의 공간으로, 탁 트여서 시원해 보인다. 운동장 옆에있는 체육관이나 학교 건물까지 한눈에 다 보일 정도다. 무대위로 기분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그래서인지 유미는 그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새나 곤충들을 떠올려보곤 하는거다.

 "아.. 여기가 언니가 앉으실 의자네요"
 무대 위에는 경사진 면의 반대편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거 꽤 튼튼하네요. 이정도면 걱정 없겠어요"
 유미는 우선 먼저 앉으며 안전하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의자가 무대위에 견고하게 묶여 있으니 무대채로 넘어지기 전엔 별탈 없을테지.
 "그래..."
 사치코님은 유미가 일어나자 마자 의자에 앉으셨다.
 조금이긴 하지만 눈높이가 낮아졌다는 것과 땅바닥이 바로 보이지 않게 됐다는 점 때문일까? 긴장했던 표정이 약간은 풀어진 듯 보인다.
 "이봐- 유미"
 유우키가 사다리를 타고 무대위로 올라왔다.
 "너, 계속 여기 있을꺼야? 계단 치워버릴 껀데.."
 "세명이 있기엔 역시 비좁겠지?"
 사실은 계속 사치코님 옆에 붙어있고 싶은데..
 보디가드 역할인 유우키를 못믿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있는쪽이 훨씬 더 사치코님이 힘을 내시는데 도움이 된다고 자부하는데 말야...
 "3명 뿐이라면 별 문제되진 않겠지만, 막상 게임이 시작되면 한명 더 늘어나잖아"
 유우키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린다.
 "도전자들은 이쪽 경사면을 기어 올라오지만, 퀴즈를 할땐 요 앞에 설 테니까 말야"
 요 앞이라는 건, 지금 유미가 서있는 위치를 말하는 거다. 빨간 테잎으로 한 면이 30센티 정도의 사각형이 만들어져 있다.
 "사치코님은 여기 앉으시고.. 유미랑 나, 둘다 몸집이 큰 편은 아니니까 뭐.. 상관 없겠지?"
 유우키는 그냥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막상 게임이 시작되면 아무래도 번잡할꺼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있어봤자 자리만 좁아질 뿐일테고... 하지만 여기에 사치코님 혼자만 두고 가자니 걱정되거든.
 "처음에만 여기 있을께. 적당할 때쯤에 내려갈 테니까"
 이 높이랑 게임 양쪽 모두에 사치코님이 익숙해 지실때쯤 말이지..
 "게임이 시작되면 저 계단은 방해되니까 바로 치워버릴 껀데도?"
 "사다리로 내려갈 꺼니까 상관없어"
 "사다리로?"
 유우키랑 사치코님이 거의 동시에 되묻는다.
 "치마가 아니니까 괜찮아"
 "유미한텐 그런것 밖에 문제될께 없는거니?"
 "...예?"
 무슨 뜻인거지?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해봐도 치마라면 아래쪽에서 누군가 훔쳐볼것 같아서 싫다는것 밖엔 딱히 떠오르는게 없는데...
 "너 굉장하구나. 난 이 높이에서라면 절대 사다리는 못탈것 같은데.."
 사치코님이 진짜로 감탄하고 있는게 보이네? 그랬구나.. 높이가 문제였던 거였어.
 "유미가 할수 있다면야 그런 거겠지 뭐.."
 유우키가 아래쪽에 신호를 보내자 이동식 계단이 멀어져 간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다카다는 흰색, 고바야시는 노란색 무대위에 서 있었다.
 "사치코씨, 슬슬 시작할께요"
 유우키가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뒤 다른 무대쪽에 눈길을 보냈다. 저쪽 두명이 끄떡이는걸 확인하자 확성기를 꺼내들고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을 시작한다.

 "지금부터 '하나데라 대난투'의 두번째 스테이지, '리리안 진법'을 시작한다!"

 두번째 스테이지 라는건, 벌써 어딘가에서 첫번째 스테이지를 했다는 얘기인 걸테고.. 그럼 세번째, 네번째로 이어지는 걸까?
 멍하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소라나팔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걸 신호로 각 도전자들이 무대 쪽으로 쇄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왓--!'
 의자에 앉아있던 사치코님에겐 잘 안보일 런지도 모르겠지만, 서있는 유미에겐 자기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의 엄청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물소떼의 대 이동 이나 설탕물에 모여든 개미떼들 같아.. 아무튼, 이리저리 뒤엉켜서 대혼란!
 "유, 유미..."
 땅속에서 울려나오는 것만 같은 저 소리에 움츠러든 사치코님이 도움의 손길을 바라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함성 소리와 무언가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 그 외에 여러가지 소리들이 섞여서 흡사 역사 드라마에 나오는 전투씬을 보는것만 같다.
 "언니, 괜찮아요"
 유미는 의자옆에 무릎으로 앉아서 사치코님의 손을 꼬옥 잡아본다.
 처음 한마리.. 아니, 처음 도전자가 올라오는 순간부터 장미님들의 역할이 시작되는 거다. 하지만 아직은 어느 무대 위에도 도전자가 올라오진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무대로 이어지는 경사면은 그냥 판자가 아닌거다.
 노란색 쪽은 겨자같아 보이는 노란 소스가 경사면에 발라져 있어서 계속 미끄러지기만 한다. 하얀색 쪽은 그냥 흰색 가루가 뿌려져 있는것 뿐이어서 쉬워 보이지만, 경사면에 오르기 전에 먼저 밀가루속에 파묻힌 사탕을 입으로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게끔 되어 있었다.
 유미가 있는 빨강색 쪽은 경사면이 다른 무대들 보다 조금 높은데다 거친 새끼줄이 달랑 하나 매달려 있을 뿐이다.
 근데.. 다른 두 무대는 각자 색상에 맞게끔 만들어져 있는데 왜 우리쪽만 이런거지?
 유미의 의문은 첫 도전자가 올라온걸 보자 바로 풀렸다. 새끼줄을 잡았던 손바닥이 빨갛게 되어 있었던 거다. 게다가 줄을 놓고 서로 다툴때 생긴건지, 얼굴에도 긁힌 상처가 있어서 피가 조금 나 있었다.
 "그럼 처음으로 올라온 체조부의 이시구로, 1번에서 백번까지 문제중에서 몇번을 고르시겠습니까?"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 도전자에게 문제지가 든 상자를 들어보이며 유우키가 묻는다. 그 안에는 각각 문제가 적혀있는 카드가 백장 들어있는 거다.
 "1번!!"
 체조부의 이시구로가 망설임 없이 외친다.
 "1번 문제는.. 아쉽게도 '꽝!' 입니다. 다시 도전해 주세요. 이쪽으로 내려가시고..."
 매정하게도 커다랗게 '꽝!' 이라고 적혀있는 1번 카드는 금새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젠장.."
 처음으로 올라왔으면서도 꽝이 되어버린 불상한 그애가 경사면 옆에 좁게 덧대어져 '출구'라고 써진 판자위를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모습을 곁눈질 하며 두번째 도전자가 올라와 선다.
 "그럼 다음분은 몇번을 고르시겠 습니까?"
 "럭키 쎄븐, 7번!"
 "7번.. 정말 럭키군요. 꽝이 아니네요. 그럼 문제.. 원소기호 7번은 무엇이죠?"
 "음...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게 두번째 도전자는 스스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이과쪽 보단 문과쪽에 밝은 사람인가 보다.
 그나저나 문제들 이란게...
 '모 작가의 베스트셀러 제목은?' 이라거나 '기본으로 갖춰야 할 조미료 종류는?' 이라거나 고전문학을 가르치시는 스즈키 선생님의 사모님 성함은?' 이라거나 '9x7은 얼마?' 같은 문제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
 운좋게 알고있는 문제를 뽑아서 정답을 맞추는 사람은 열명중 겨우 2~3명 정도다. 생각외로 '꽝'도 많이 섞여있고 말야..

 벌써 30명 정도의 도전자가 경사면을 타고 올라와서 번호를 외치곤 퀴즈를 풀거나 혹은 못풀고 사라져 갔다.
 그때쯤엔 사치코님도 점점 익숙해 지셔서 정답을 맞춘 사람에게 '축하해요' 라고 말을 건네며 정답 스티커를 붙여 주기도 하고, 맞추지 못한 사람에겐 '아까웠어요'라며 위로의 말을 해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사치코님이 도전자 무리가 잠시 뜸한 틈을 타서, 가져온 손가방 안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휘젓는게 보였다.
 "무언가 찾으세요?"
 "응, 젖은 수건.. 없어도 괜찮아. 아마 학생회실에 두고온 가방속에 넣어 놨나봐"
 "그럼 제가 가서 가져올께요"
 자세히 쳐다보니 사치코님의 이마와 목에 땀이 흐르고 있잖아?
 "손수건은 있으니까 괜찮아. 유미, 가지 말아주렴"
 "아니예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사치코님은 팔을 잡고 멈춰 세우려 하셨지만, 그 손길을 살짝 피해본다. 게임이 시작된지 벌써 30분 가량이 지났으니 이제 슬슬 내려가려고 생각하던 참이었던 거다.
 "유미, 위험하니까 나막신은 거기 양동이에 넣고 맨발로 내려가"
 "응, 알았어"
 유우키의 말대로 신고있던 나막신을 벗어서 눈앞의 양동이에 던져 넣었다. 그 양동이엔 무대 높이랑 같은 길이의 끈이 매달려 있어서, 작은 물건이라면 위/아래로 서로 건네줄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나중에 사치코씨의 수건도 거기에 넣고 날 부르면 내가 당겨 올릴께"
 "알았어"
 맨발로 내려가서 양동이로 먼저 내려둔 나막신을 꺼내신고 있자, 지나가던 요시노와 마주쳤다.
 "요시노-"
 "유미구나. 좀전에 우리 레이가 목이 마르다고 양동이에 써서 내려보냈거든. 그래서 마실꺼 사오는 길이야"
 요시노는 스포츠 음료랑 오렌지 쥬스, 그리고 차가운 캔 커피를 품에 안은채 웃어 보였다.
 "근데.. 넌 어디가니?"
 "사치코님의 젖은 수건을 가지러 학생회실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려던 참이야"
 "서로 바쁘구나. 그럼 난 가볼께"
 요시노는 '바쁘다 바뻐'라고 중얼거리며 노란색 무대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잠시 그쪽을 돌아보고 있자니 요시노가 양동이에 음료수를 집어넣고 고바야시에게 들어올리게끔 시키고 있는게 보인다.
 하얀 무대쪽은 뭐하고 있을까 싶어서 눈길을 주자, 걱정스런 눈빛의 노리코가 무대위를 쳐다보고 있는게 보였다.
 무대위의 시마코는 노리코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여유조차 없을만큼 바뻐 보인다.
 무언가 할일을 받아도 큰일이지만 아무말 없는것도 큰일이야.. '뷔통'의 입장에서 해야하는 일이란건, 여러모로 속사정이 깊은 거다.

 아까 봤었던 갈색 박스는 아직도 문앞에 놓여 있었다. 이미 경고시간은 지나버렸지만, 유우키네들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라 아직 처벌되지 않은채다.
 "앨리스~~"
 노래라도 부르는것 처럼 이름을 부르면서 학생회실 안으로 들어가자, 실내를 지키며 책상에서 무언가 쓰고있던 앨리스가 고개를 든다.
 "응? 유미.. 어쩐 일이니?"
 "뭣좀 찾을려구. 사치코님 가방은.... 아, 여기있네"
 깔끔한걸 좋아하시는 사치코님의 가방속은 언제나 정리된 상태여서 찾던 물건은 금방 눈에 띄었다. 비닐봉지 안에 들어있는 손수건 크기의 젖은 수건. 지난 여름 내내, 사치코님은 종종 이걸로 더위를 식히시곤 했던거다.
 계절상으론 벌써 가을이라지만 아직까진 꽤 더운 날들이 이어진 탓에, 당분간은 이녀석의 도움을 더 받고 계시는 거지..
 "이벤트 쪽은 어떻게 됐니?"
 "그거..? 분위기 꽤 좋아"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듯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인다.
 "그래? 다행이네.. 나도 보기보단 바빴어. 미아찾기 코너에 방송실, 그리고 분실물 코너 같은건 따로 있는데도 이상하게 이쪽으로들 오거든..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려던 참이야. 여기서 긴급 연락책으로 자리를 지키는것 뿐인데 말이지.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왠지 다른 사람들이 그걸보고 덩달아 모여든단 말야"
 파리 날리는 가게엔 아무도 안들어가려는 거랑 마찬가지야, 라며 웃는다. 제대로 예를 든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의외로 맞는 말인지도 몰라.
 "이제 50분 남았네? 사치코님한테 조금만 더 부탁드린다고 전해줘"
 "알았어. 앨리스도 힘내"
 유미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걸어 나왔다. 사치코님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앨리스랑 한가하게 잡담을 할 시간이 없는거다.

 학생회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을때, 유미 눈에 문득 화장실 앞의 수도꼭지가 보였다.
 "아무래도 차갑게 해서 가져가는게 낳겠지?"
 가방안에 들어있던 젖은 수건은, 꽤 미지근하게 되어있는 상태였다.
 우리 언니가 조금이라도 더 기분좋게 써주길 바라는게 '쉬르'로써 당연한 생각인 거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즉시 그쪽으로 가서 수건을 꺼내어 수도꼭지를 틀어본다. 쏟아져 나오는 물은 유미의 생각대로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살짝 젹셔서 가볍게 짠 수건을 비닐봉지에 도로 집어넣는데, 누군가 등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봐, 후쿠자와"
 "응?"
 뒤돌아보니 처음보는 남자애 4명이 유미를 둘러 싸듯이 서있는게 보인다. 이런 상황을 기분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을테지..
 서둘러 학생회실로 돌아가려 하자 그중 두명이 재빨리 앞을 가로막아, 어느새 앞뒤로 두명씩 포위되어 버렸다.
 오른쪽으로 한발짝 내딛자 똑같이 한발짝씩, 왼쪽도 마찬가지.. 마치 농구에서 상대를 마크하듯 4명이서 점점 포위망을 줄여오고 있다.
 "누.."
 누군가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유미를 둘러싼 4명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잡혀버리고 말꺼야.. 그래, 강행돌파다! 유미는 앞에있는 2명 사이를 노려보며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이녀석, 기다려!"
 다행히 뚫었다고 생각한 순간, 유미는 손목을 잡혀 버렸다.
 "입부터 막아!"
 나머지 세명에게 붙잡힌 상태로 입에 테잎이 발라져 버린다.
 바둥바둥 벗어나보려 힘을 줘 봤지만 4대 1 상황.. 게다가 저쪽은 4명 다 남자인 거다.
 '비겁하잖아...!'
 눈가리개가 씌워진데다 손발이 묶인 상태로 들려저 버렸다고 생각한것도 잠시, 유미는 좁은 공간속에 넣어져 버렸다.
 '혹시.. 상자각?'
 아까 봤던 갈색 상자를 떠올렸을땐, 이미 '영차'라는 구호와 더불어 들어 올려져 움직이는 상태였다.
 '어디까지 끌고 갈꺼야..?!'
 몸으로 이리저리 부딛쳐 보지만 뚜껑으로 덮혀진 상자속에선 나갈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밖에서 상자를 때려오자 유미는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거긴 위험한 곳이예요'
 카나코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유미님은 조심성이 없으세요. 남자따윈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모자랄 만큼 위험한 존재라구요!'
 카나코.. 이젠 충분히 알겠으니까 자꾸 꾸짖지 말아줘. 이제와서 반성해봤자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밖에 안되는 거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대책이라도 세우는게 낫겠어.
 '응? 그러고보니 후쿠자와라고 불렀었지?'
 저 4명은 나라는걸 알고서 이런짓을 하는거야?
 하지만 저 애들, 오늘 처음본단 말이야.. 게다가 이런 취급을 받을만한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아니면...'
 유미한텐 그다지 원한은 없지만 리리안 여학원에 대해서 뭔가 감정이 있어서 벌인 짓일런지도...
 '바보같은 유우키녀석!'
 리리안에서 온 손님들한테 불미스러운 일이 없게끔 다 조치를 취해 놨다구?! 지금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고 있잖아..!
 '명색이 학생회장이란 녀석이 그정도 통솔력도 없는거야? 바보~~!!'

 

                                       *

 

 한편, 바보라고 불린 유우키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진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돌풍이 불고 지나갔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앨리스나 고바야시때 처럼 누군가가 몰래 바라보고 있다거나 하는것 같지도 않단 말야.. 뭐랄까.. 꼭 누가 뒤에서 내 험담을 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저주하고 있는것만 같은 느낌이야.
 그치만.. 그게 사실이라면 떠오르는 애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범인인지 알수가 없는거다. 그정도로 후쿠자와 유우키에겐 적이 많았다.
 "유미는 돌아 왔나요?"
 옆에있던 사치코님이 작은 목소리로 물어본다.
 "아뇨, 양동이 속은 비어 있네요"
 유우키가 땅위에 내려졌던 양동이를 끌어 올리며 그렇게 대답한다. 원래 학생회실에 다녀온 유미가 사치코님의 수건을 양동이에 넣고, 유우키가 끌어 올리기로 되어 있었던 거니까...
 "조금 늦는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렇네요..."
 유우키는 시간을 확인해 본다. 유미가 여길 내려간지 벌써 15분. 학생회실까지 5분정도 걸린다고 치면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말야..
 게임쪽도 벌써 2,3번정도 반복된 상태여서 인지, 도전자들 에게서도 처음 올라왔을때 같은 활기는 보이질 않는다.
 그걸 증명해 보이듯, 새끼줄 쟁탈전에서 이기긴 했지만 처음 올라올때 까진 손바닥이 아픈지 끝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중간에 도로 내려가는 애들이 꽤 보인다.
 도중에 참가한 애들이나, 잠시 쉬고 재도전하는 애들이 가끔씩 무대 위까지 올라오곤 하지만 지금은 꽤나 한산해진 상태다.
 무슨 일에든 시기는 있는 법, 이곳 뿐만 아니라 흰색 무대쪽도 노란색 무대쪽도 비슷한 상황 이었다.
 "학생회실에 남아있는 앨리스랑 얘기하느라 시간가는줄 모르는게 아닐까요?"
 마치 방금전에 사치코님의 '조금 늦는건 아닌지 모르겠네..'란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중얼거려 본다.
 "내 심부름으로 갔는데.. 유미는 그럴 애가 아니야"
 헤에- 사치코씨, 꽤나 우리 유미를 감싸 주잖아? 아니면.. 유미가 사치코씨 앞에서만 착하게 구는건지도 모르고.
 "그럼 길이라도 잃은 걸까요? 조금 멍~ 한데가 있으니까.."
 "그런거면 큰일이잖아요?!"
 거기다 과보호 까지? 거참... 사치코씨의 행동은 유우키 입장에선 여러가지로 신선해서 이리저리 딴지를 걸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었다.
 "그래도 주위에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여기까진 쉽게 오지 않나요...?"
 걱정없다는 뜻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역효과 였나보다. 사치코씨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는게 보였다.
 "그런데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건...?!"
 "사치코씨, 조금 침착하세요"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 아닐까요?!"
 "학교 안에서 무슨일이 생긴 거라면.. 화학실에서 뭔가 폭발했다거나 하는 그런거 말이예요?"
 이쪽은 장난삼아 말을 꺼낸건데,
 "정말?! 화학실은 어디죠? 학생회실이랑 같은 건물이예요?"
 사치코씨가 갑자기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다. 하지만.. 그동안 잊고있던 이곳 무대위의 높이를 다시금 확인하곤 어지러워 진듯, 흐느적 거리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무슨일이 생겼다고 한건 제가 아니라 사치코씨 예요"
 유우키가 의자옆에 쭈그려 앉아서 말을 건네자 사치코님은 하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면서 대꾸한다.
 "유우키씨, 유미를 찾아줘요"
 "예...?!"
 "여긴 저 혼자서 맡을 테니까. 문제를 읽고 정답이면 스티커를 붙여주는것 뿐이잖아요? 혼자서도 할수 있어요, 아마..."
 "안되요, 여기에 사치코씨 혼자 남겨둘순 없습니다. 게다가 유미한테 무슨일이 생겼다고 단정지을 만한 상황도 아니구요"
 "동생 이잖아요? 유미가 걱정되지도 않아요?"
 "사치코씨.. 우선 좀 침착해요"
 "아무래도 좋으니까 좀 찾아봐 줘요. 아니면 제말은 못듣겠다는 거예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저 대사를 읊었다면 '니가 뭔데?'라고 울컥 했겠지.. 그치만 사치코씨의 경우는 다른거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명령조여서, 생각없이 '예' 라고 대답해 버릴것만 같은 마력이 있었다.
 "할수 없네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우키가 무대 밑을 둘러본다. 때마침 흰색 무대쪽에 눈에띄는 사람이 보여서 손을 크게 흔들어 불러 본다.

 "닛코우 선배님--"
 "유키치냐--?"
 "이리 좀 와주실래요--?"
 닛코우 선배를 부를때만 해도 분명히 혼자였는데, 어느샌가 두사람이 되어 이쪽으로 처벅처벅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닛코우, 각코우라고 불리는 야쿠시지 아키미츠, 토모미츠 쌍둥이 선배.
 "저사람 이라도 괜찮으시다면 교대할께요. 더이상은 양보할수 없네요"
 "...알겠어요"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저사람'을 확인한 사치코씨는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저정도로 걱정해 주는건 고마운 일이지만, 상대는 어차피 유미잖아. 조만간 '헤헷- 저.. 좀 늦었죠?'라며 나타날께 뻔한건데...
 "유키치, 왜 불렀냐?"
 "무슨 부탁이냐?"
 무대위로 올라온 두 선배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교대를 부탁하자 바로 승낙해 주었다.
 그나저나 저 덩치가 둘씩이나 올라오니, 무대위가 너무 좁아진게 느껴졌다. 게다가 이 압박감은 뭐지? 사치코씨도 조금 쫄아있네...
 "불려진 번호의 문제를 읽으면 되는거지?"
 "정답이면 이 카드에 스티커를 붙여주면 되는거지?"
 두 선배들은 상자속에 든 문제 카드를 이리저리 뒤적이거나, 스티커를 눈위로 들어 보이거나 하면서 즐거워 보였다.
 "선배님, 스티커는 '로사 키넨시스'께서 붙여주실 꺼예요"
 "그러냐.."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학생회가 주최인 이벤트에 다른 애들을 끌어들인 순 없는거다. 뭐.. 이 두사람 이라면 보디가드 역할로는 딱이겠지... 무엇보다 사치코씨가 얼굴을 알고있는 사람이란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유키치, 너.. 화장실 가냐?'
 "큰거냐?"
 닛코우, 각코우 선배들은 둘이서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나보다. 하기사.. 남의 얘기를 끝까지 듣지 않는건 언제나의 일이지.
 ".....그렇다고 해두죠"
 오해를 풀 시간조차 아깝다니까.
 유우키는 사다리를 타고 한발한발 아래로 내려간다. 그때, 유우키랑 엇갈리듯 오랜만에 도전자가 올라온 모양이다. 머리 위에서 '18번!' 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아.. 문제, 위쪽은 벌목 가공소, 아래쪽은 쓰레기장인건 뭘까-요?"
 "엣-?! 무슨 문제가 이래? 너무 어렵잖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도전자의 인상이 가관이었다.
 '어렵다구? 쉬운 넌센스 퀴즈잖아'
 유우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양 다리를 차례로 딛고 바닥에 내려선다.

 ...참고로, 정답은 '연필깎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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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1) 코스프레(コスプレ) : '코스튬 플레이'의 약어.
말 그대로 애니나 영화, 게임, 기타 선호하는 원작의 의상, 표정,동작, 행동양식 등을 이미지화 하는 놀이의 총칭이다.
대부분의 분들은 다 아시는 단어겠지만, 마리미떼 1권을 손대기전에 미리 대상 독자층(?)을 정할때 써놓은 글을 보시면 이 단어에주석을 다는 이유를 아실꺼라 생각합니다.
 * 주2) 원작은 '다다미 3장'크기 라고 되어 있으나, 역시 대상 독자층(?)을 고려해 우리나라분들이 알기쉬운 단위로 대충 변환해 버렸다.
다다미 한장의 크기는 대개 규격화 되어 있어서 길이가 1.8~2m 정도다. 평수 계산법은 (가로 x 세로 x 0.3025) 이므로 대략 한평~한평 반 정도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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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서둘러 뛰어온 탓인지, 학생회실까지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학원제의 열기로 학교안은 어딜가나 들떠있어서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다. 학생들도, 선생님도, 학부형에다 그냥 구경온 사람들까지 그저 분위기에 취해있는 거다.
 체육관이나 강당에선 꽤 규모있는 이벤트들이, 교실마다 유령의 집이나 간이 연극 일일 찻집에 전시회 같은 볼꺼리도 풍성했다.
 운동장에서 학생회실까지 최단거리로 지나 왔지만 눈에 띌만큼 소란을 피우는 교실이 없었던 탓인지, 특정 교실 앞에만 사람들이 몰려있는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오면서 전혀 유미를 찾을수가 없는거다.
 이 건물엔 계단도 여러개 있는데다 오늘은 비상구까지 개방되어 있었으니 혹시 다른길로 나간 건지도 모르지만...
 "깜짝이야! 유키치, 무슨 일이니? 아직 끝나려면 멀었잖아?"
 문을 열어 젖히고 학생회실 안으로 들어온 유우키를 본 앨리스가 놀라며 다가왔다.
 "사치코씨가 유미를 걱정하고 있거든. 자꾸 마중나가라고 해서 잠깐 빠져나온거야. 그나저나 유미 왔었지?"
 "유미 말야? 응..."
 앨리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그치만 벌써 갔는걸? 아직 못만난 거야?"
 "벌써 갔다구?"
 "응, 2시 40분쯤엔 여길 나갔어. 이제 50분 남았으니까 힘내라고 했었거든"
 "정말이야?"
 그말에 서둘러 시계를 확인해 보니 지금은 3시다.
 무대에서 내려온게 한 2시 55분쯤? 그럼 유미는 5분밖에 안걸리는 거리를 15분이나 지나고서도 오지 못한거네?
 "역시 어디선가 헤메고 있는걸까? 이번엔 다른길로 돌아가 보지 뭐. 길이 엇갈렸는지도 모르니까. 앨리스 넌 계속 여기서 자릴 지켜줘. 혹시 유미가 돌아오면 그냥 데리고 있어. 알았지? .......앨리스?"
 "아.. 응?"
 왠지 제대로 안듣고 있는것 같잖아? 어쩐 일인지 얼굴색도 점점 창백해져 가네..?
 "무슨일 있어?"
 "아냐..."
 글쎄, 아니라곤 하지만 왠지 불길한 생각이라도 떠올라서 안절부절 못하는것 같잖아. 혼자서 '설마, 그럴리가..'라고 중얼거리기 까지..?
 "그거, 무슨 소리야?!"
 유우키는 급히 앨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댄다.
 "저기.. 그러니까 말야, 유미가 나가고 얼마 안있어서 밖이 시끄럽길래 잠깐 나가봤거든. 그때 밖에있던 갈색 상자각을 누군가가 들고 가려고 하더라구. 그냥 그랬다구..."
 "상자각?!"
 유우키는 서둘러 학생회실을 뛰쳐 나왔다.
 아깐 분명히 이곳에 방치되어 있었던 상자각은 치워져 있었다. 그치만 그거랑 유미가 안보이는 거랑은 상관 없잖아? 분명 벌점을 때린다는 경고문을 보고 두고간 사람들이 와서 치운 거겠지..

 잠시 그자리에 쭈그려 앉아 아까까지 상자각이 놓여있던 주변을 살펴봤다.
 왠지 그 주변에만 흙먼지가 어지러이 쌓여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기 때문인 걸수도 있는거지.. 상자각을 치울때 남은 건지도 모르는 거잖아.
 "앨리스, 방금 밖이 시끄러워서 나와봤었다고 했었지? 상자각 치우느라 소란스러웠던 거야?"
 왠지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서 그때의 상황을 물어봤다.
 "처음엔 바둥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싸움인줄 알았어. 근데 '영차-'라고 구령을 넣었던것 같아"
 "구령을 넣었다구? 대체 몇명이서 옮긴건데?"
 "3명? 아니다, 4명인가...?"
 "텅 빈 상자각을 4명이나?"
 아까 그 상자각은 흔히 볼수있는 종이박스 였다. 아무리 큰 상자각이라도 옮기는데 4명이나 필요할 리가 없잖아? 안에 뭔가 들어있다면 또 모를까... 안에 뭔가가 들어있다....?!
 "설마...!"
 앨리스가 두손모아 입을 감싸며 숨을 삼킨다.
 "그 '설마' 인지도 몰라"
 복도 구석에 굴러다니던 걸 집어든 유우키가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치코씨 한테도 안주려고 했던걸 깜빡잊고 흘렸을 리가 없어. 아마.. 저항하다 주머니에서 떨어진 걸꺼야"
 유우키가 주먹속에 꽉 쥔 그것은, 유미가 팬더곰 인형한테 받은 사탕이었다.

 

                                        *

 

 "유우키 녀석이랑 착각했다구?!"
 그게 입에 붙여졌던 테잎을 떼고나서 했던 유미의 첫마디 였다.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잘못했어요..."
 남학생 4명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학생회실 앞에서 둘러쌓였을 땐 인상 험악한 불량 학생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쩔쩔매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냥 소심하고 평범한 애들인것 같네..
 "변명은 아니지만.. 후쿠자와 녀석의 그 특색있는 교복을 입고 있는데다..."
 '그냥 너덜너덜 하다고 하지, 왜?'
 "키도 비슷하고..."
 '이봐이봐, 나막신 신어서 키가 커진게 안보이냔 말야?'
 "얼굴도 똑같은 데다가..."
 '그야 한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거니까..'
 "게다가 유우키 녀석은 종종 그렇게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다닌단 말이예요"
 '그런건 내 알바 아니잖아!'
 사과를 하면서도 한두마디씩 변명을 늘어놓자 유미도 마음속으로 딴지를 걸어본다.
 "아무리 그렇대도..."
 "예.. 어떤 이유가 있든, 쉽게 용서해 주지 않을꺼라는 것 정도는 저희도 잘 알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자기들 아지트에 돌아와서 오늘의 사냥감을 확인해본 이녀석들은 얼굴색이 바뀔 정도로 놀랐던 거다. 예를 들자면.. 그냥 곰이라고 생각해서 잡아 왔더니 왠걸, 실은 멸종 직전의 희귀 팬더곰 이었다는 얘기지.
 여긴 저녀석들의 아지트격인 추리소설 동호회의 전시장 안이다.
 상자각속에 넣어진채 옮겨져온 유미에겐 이곳이 학생회실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도 학교건물 안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어쩌면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런지도 모르고... 무거운 짐(유미)를 들고 온 탓인지, 시간은 꽤 걸렸지만 말이다.
 "이시간에 유우키 녀석이 학생회실에 있을리가 없잖아. 학생회가 주최하는 이벤트에 나가는거 몰랐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는 그리 쉽게 오는게 아니라서 서둘러 작전 변경을 한거라구요"
 "작전변경?"
 "예..."
 놀랍게도 처음엔 혼자있는 앨리스를 납치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아까 앨리스가 말했듯이 계속 사람이 들락거린 탓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나? 거기에 유우키가 혼자서 나타났으니.. 서기보단 학생회장을 납치하는 쪽이 훨씬 낫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단 얘기였다.
 "그치만, 왜? 추리소설 동호회가 학생회 임원을 유괴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거야?"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으며 그렇게 물어봤다. 방석 두장이 깔린 의자리니.. 상자각 속에 있을 때랑은 대접이 180도 달라졌잖아..
 "거기엔 뭐랄까.. 약간 사연이 있거든요"
 "약간? 그럼 별 중요한건 아니란 얘기네?"
 그런 이유때문에 사람을 잘못보고 여기까지 끌려온 난 대체 뭐야? 왠지 한심해 지잖아... 게다가 추리소설 동호회라면 아침에 사탕을 나눠준 데 아냐? 그럼 그 팬더곰이랑 사탕까지 이 유괴사건에 관련된 거야? 너무 동심을 짓밟는 짓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우리 추리소설 동호회는 전엔 엄연한 동아리 였다구요. 그런데.. 요즘 애들은 책같은건 잘 안보는 탓에 부원이 계속 줄어서 지금은 8명밖에 없어요. 그러고보니 지금은 동아리가 아니라 동호회니까 부원이 아니라 회원이라고 해야 겠네요"
 그중 부장처럼 보이는 안경쓴 애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동호회니까 회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근데 여긴 4명밖에 없네? 다른 사람은? 사탕 나눠주고 있는거야?"
 "아뇨, 나머지 4명은 다른 동아리랑 양다리예요. 이름만 빌려주고 있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유령회원이거든요. 사탕 돌리기는 졸업한 선배님이 불쌍하다고 자원봉사를 해주고 계세요"
 그 마음씨 착한 선배는 자기 후배들이 이런 일을 벌인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한채, 아직도 팬더곰 인형을 뒤집어 쓰고 혼자서 사탕을 나눠주고 있나보다.
 ......그사람도 참 안됐네.

 "올해들어 애니 동호회가 승격되서, 그쪽에 동아리방을 뺐겼어요. 게다가 예산도 없어지고 이번 축제때 배정받은 공간이라곤 고작 교실 반쪽짜리 크기라구요..."
 외부 사람한테 고충을 털어놔 봐야 어찌 되는것도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배겼겠지. 그래서 유미를 상대로 호소를 하고 있는 걸꺼야..
 "교실 반쪽이란 말이지..."
 그야.. 여긴 교실치곤 꽤 비좁긴 하네.. 천정을 보니 사물함을 교실 가운데 두고 앞뒤로 나눴다는게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이정도 크기의 공간이 너무하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전시할 것들과 보러올 인원수에 맞는 공간인 거다. 저사람들 입장에서야 어디까지나 자존심 문제라고 주장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할당받은 공간이 비좁다는게 원통해서 학생회 임원을 납치하려고 했던거야?"
 "아니예요!"
 그 비좁은 공간에다 파티션 같은걸로 안쪽에 1/3 정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금 유미랑 추리소설 동호회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거다. 아마 앨리스든 유우키든 유괴해 왔다는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 뒀겠지만, 어차피 여긴 거의 사람들이 안오니까 파티션 같은건 해봐야 상관없을 테지만 말야...
 추리소설이 쓰여진 연표나 명탐정들이 해결한 굵직한 사건들의 지도 같은걸 종이에다 그려서 전시하고 있긴 한데.. 대체 어디가 재미있는 거지? 그쪽 계통에 흥미가 없는 사람에겐 별 감흥도 없을테고, 그쪽 매니아라면 저런 정보쯤은 이미 알고 있을텐데 말야.
 유미의 그 추리가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건 누가 여기에 들어와도 그다지 오래 있지는 않을꺼란 거다. 사람이 없는 전시코너 같은건 '저긴 썰렁한 곳이야'라고 광고해대는 거랑 마찬가지니까 더더욱 아무도 오지않게 되는거지.. 악순환이 이어진다고나 할까?
 보통은 사람이 많이있는 곳에 모여들게 마련인 거다. 이거, 앨리스가 했던 말이였나?
 "실은 말이죠..."
 추리소설 동호회 회장이 말을 꺼낸다.
 "이번 학원제 기간중에 저희가 학생회를 깜짝 놀래킬 만한 행사를 벌인다면, 학생회 임원들 전원이 저희 동호회에 들어오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당연히 동호회에서 동아리로 승격도 되구요"
 "유괴당한 사람은 그런거 찬성 안할텐데?"
 "아녜요~ 이걸 봐달라니까요"
 그말과 더불어 불쑥 내민건 한권의 모음집 이었다.
 "이건 저희가 만든 동인지 거든요. 여기다 오늘 벌인 일을 예고해 뒀어요"
 "'셜록 홈즈와 코고로'(-일본의 대표적인 소설속 명탐정)? 이게 동인지 이름이야?"
 흐응- 이름만 들어도 추리소설이랑 관련된 거라는걸 알겠어..
 "여기, 여길 좀 봐주세요. 특집으로 실린 소설 말인데요.. 제목은 '사라진 학생회장의 수수께끼'거든요. 뭔가 두근두근 거리지 않나요?"
 "하하..."
 조금 대답이 곤란하네...
 이건 뭐.. 복선이 있는것도 아니고 너무 솔직한 제목이잖아. 저런 제목을 듣고 '어떤 내용일까? 읽고 싶어'란 생각은 안들지 않을까? 학생회장이 사라질꺼란 예상 정도는 누구든지 할테고, 저사람들 한테는 미안하지만 너무 센스가 없는거 아냐?
 "'셜록 홈즈와 코고로'는 찍어낼 때마다 학생회에 한권씩 갖다주고 있으니까 여기 실린대로 사건이 일어난다면 이 작품 자체가 대대적인 예고장이 되는거죠. 동인지를 받았으면서 읽지않은 탓에 사건을 막지 못한 거니까 학생회 사람들도 반드시 깜짝 놀랄껍니다"
 저 제목으로 유추해 보면.. 처음엔 유우키 녀석을 대상으로 정한듯 하지만 여의치 않자 대상을 앨리스로 바꾼듯 했다. 그런데 계획을 실행할 단계에서 애초에 목표했던 타겟이 무방비로 나타난 탓에 갑작스럽게 현장에서 계획을 변경했지만, 알고보니 사람을 잘못본 거잖아...
 "바로 그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유미의 추리에 모두들 움츠려 들었다.
 "그럼 이번 계획은 실패로 끝난거네? 어서 날 풀어줘요"
 "그렇게 해드리고 싶지만, 그럼 저희는 끝장이예요"
 꽤나 절박한 표정들이네?
 사람을 잘못봤든 아니든 '리리안 여학원의 게스트 분들께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킨 단체'라는 꼬리표가 달리는건 어쩔수 없는거다. 다시 동아리로 승격된다는 꿈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실수 하나로 아예 사라질 대 위기!!
 "나.. 유괴범이 인질을 죽여버릴 때의 기분이 조금은 느껴져..."
 누군가가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맞아 맞아, 얼굴을 들켜 버렸잖아"
 "그래, 중간에 실수해 버리면 하나부터 열까지 귀찮아 지잖아?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손을 털어버리고 싶어지는 거지"
 "인질을 데리고 도망다닐 수도 없는거고 말야"
 자, 잠깜만 기다려! 어째서 얘기가 그런 쪽으로 흐르는 거야?!
 "유괴범은 검거율이 높아!"
 갑자기 유미가 소리높여 외치자 추리소설 동호회 사람들이 움찔 하며 입을 다문다.
 "그렇다고 TV에서 본것 같은데..."
 "예, 맞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 대답과 더불어 메마른 웃음소리가 반쪽짜리 교실안을 가득 채웠다. 근데.. 유괴범 단체가 이렇게 있어도 되는거야?
 "나, 절대로 말하지 않을께. 약속할 테니까"
 그런것 보단 빨리 풀어달란 말이야!
 "말하지 않으셔도 운동장까지 바래다 드리는게 목격되면 저희들 소행이란걸 알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럼 운동장까지 가는길만 가르쳐 줘요. 나 혼자 갈테니까. 그럼 되잖아?"
 "리리안 교복이 아니라더도 자세히 보면 여자란걸 알수 있으니까 안되요"
 "그것도 모르고 데려왔으면서 무슨..."
 "그거야 학생회실 앞이 어두워서 그런 거예요. 게다가 대충 보면 후쿠자와 유우키로 보여서 안그래도 눈에 뜨인단 말이예요. 여기서 나가는걸 누군가가 보는 날엔, 절대로 의심받는다구요"
 동호회 회장이 파티션 너머 저쪽으로 가서 하나뿐인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되돌아와선 지나다니는 애들이 너무 많다는 절망적인 얘기를 꺼냈다.
 "그럼.. 다시 아까 그 상자각에 들어갈 테니까 상자채로 들고 나가면 되잖아. 학생회실 앞에다 놓고가면 나머진 혼자서 알아서 갈테니까"
 유미의 이번 제안에도 추리소설 동호회 사람들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마찬가지 일꺼예요. 유미씨가 행방불명 된게 들켰다면, 절대로 의심받을 테니까요. 아까 아리스가와 긴타로한테 옮기는걸 들켰거든요"
 과연 추리소설 동호회 라고나 할까? 한가지 가정을 세우면 바로 다음 상황을 계산해 내다니 말야. 하지만 너무 생각이 앞선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지..
 "여긴 추리소설 동호회 잖아. 뭔가 좋은생각 안떠올라요?"
 유미는 사치코님의 젖은 수건이 든 비닐봉지를 빙빙 돌려본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날 어떤 생각으로 기다리고 계실까? 그런 생각조차 할 틈이 없을만큼 이벤트 행사가 바쁘면 좋을텐데 말야..
 "그 추리소설은 어떻게 끝나는데? 사라진 학생회장은 어디서 나오죠?"
 뭔가 힌트라도 얻을려고 동인지를 펼쳐 뒤젹여 본다. 클라이막스는 대개 뒷쪽에 있지, 아마? 하지만.....

 "이게 뭐야? 죽어 있잖아-?!"
 힘없이 책상위로 엎어져 버린다. 이야기 속의 학생회장은 살해당한 뒤, 갈색 상자에 넣어져 체육관 창고 구석에 버려지고...
 "아니.. 진짜로 동생분을 죽이려던건 아니예요"
 추리소설 동호회 회장이 서둘러 변명을 해본다.
 "그야 당연하잖아!"
 "그저 잠시동안만 참아주면 되는 거였어요. 학원제가 끝날때 쯤에 학생회 임원들을 체육관 창고로 몰래 불러내려고 했었는데..."
 "학원제가 끝날때쯤 이라구? 체육관 창고? 잠깐만! 난 더이상 동생대신 잡혀있는건 사절이야.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일이 점점 커지는거 아닌가? 지금 하고있는 이벤트 행사가 끝나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분명히 큰일이 날꺼야"
 행사 때문에 묶여있던 학생회 사람들이랑 산 백합회 임원들이 모두 나서 버리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소문이 날꺼 아냐?
 "그.. 그.. 그럼 어, 어떻게 해야..."
 이봐, 이제와서 우물쭈물 하면 어쩌자는 거야? 남정네들!
 "어떻게 하다니? 자기들이 벌인 일이니까 끝가지 책임져요. 진짜 한심하다니까.."
 저 쫄아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이런 녀석들한테 유괴를 당했었다니.. 내쪽이 더 바보같잖아?
 "야.. 신경질 내고 있어. 혈당치가 내려가고 있는거 아냐?"
 남의 얼굴을 보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 까지?
 "죄송해요. 사탕같은거 밖에 없지만 이거라도 드실래요?"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유미 눈앞에 아까 팬더곰 인형에게 받은거랑 같은 사탕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니, 왠 사탕을 이렇게..."
 그중 한개를 집어드는데 유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 맞다! 그러면 되겠어... 좋아!"
 "가, 갑자기 왜그러세요?"
 유미의 혼잣말이 너무 컷던 탓일까? 추리소설 동호회 사람들이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되물어 왔다.
 "좋은 생각이 났어. 누군가 카시와기씨를 데려와요"
 "카시와기씨? 선배님 말인가요?"
 "맞아, 카시와기 스구루씨. 알고 있을텐데?"
 "그야.. 그런데 갑자기 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서둘러요. 어쩌면.. 아니, 꼭 잘될꺼야. 날 믿어요"
 소심해진 애들의 엉덩이를 때려서 북돋았다. 물론, 실제로 엉덩이를 때린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유상의 얘기다.
 "빨리 빨리!"
 "아.. 옛!"
 회장이란 녀석이 구르듯 방을 튀어 나간다.
 "에구.. 정말 손이 많이 간다니까"
 어째선지 처음 이곳에 왔을땐 생각치도 못한 전개가 되어 버렸잖아? 붙잡혀 온 유미가 어느새 유괴범들 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내리고 있는 거다.
 그나저나 날 믿어 달라니..?
 그 말을 꺼낸 유미 스스로도 대체 무슨 말을 한건지...

 

 

                                        5

 

 "너희들, 대체 무슨짓을..."
 교실(반쪽짜리)에 들어와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카시와기씨가 무서운 얼굴로 후배들을 노려봤다.
 헤에~ 좀 의외네?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흐를 만큼 웃고있던 카시와기씨도 저렇게 화내는 일도 있는 거구나.. 왠지 감동이야. 그런데...
 "이자식!"
 카시와기씨가 주먹진 왼손으로 개중 한명을 붙잡으려 하자 당황한 유미가 서둘러 끼어든다.
 "잠깐 기다려요. 전 아무일 없으니까..."
 "유미...."
 팔에 매달리며 부탁하자 제정신이 든 듯이 유미쪽을 한번 쳐다본 카시와기씨가 어느새 바닥에 무릎을 꿇어 버렸다.
 "미안, 멍청한 후배 녀석들이 잘못을 저질러서.. 정말, 정말로 뭐라 사과를 해야할지.. 미안!"
 꿇어앉은 채로 양손을 바닥에 대고... 저거.. 땅바닥에 엎드려 비는거 맞지?!
 "모두 내가 제대로 통제를 못해서 그래. 구워먹든 삶아먹든 기분이 풀릴때까지 마음대로 해줘"
 "카시와기씨..."
 자존심 빼면 시체였던 하나데라의 왕자님이 꿇어앉아 머리를 숙이다니.. 아마도 저런 모습을 본적이 없었을 후배들이 얼이 빠질만큼 놀라다가 허둥지둥 같은 자세로 꿇어 앉는다.
 "얼른 일어나요. 카시와기씨한테 사과를 받거나 저사람들을 혼내주라고 부른게 아니예요"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카시와기씨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TV의 옛날 사극프로 같은데선 주인공이 악역캐릭터들을 꿇어 앉쳐놓고 호쾌하게 웃어제끼는 장면이 종종 나오긴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정말 기분이 좋았을까?
 "그런것보다 좀 도와줘요. 가급적이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거든요"
 "응?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조용히 일을 처리하자는 얘기를 듣고 카시와기씨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것도 피해자인 유미의 입에서 말이다.
 "카시와기씨, 제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그거야 유미한테 도움이 될만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단 얘기였어. 이런 멍청한 후배녀석들을 감싸주려고 꺼낸 말은 아니야"
 "다른얘긴 필요없고.. 아무튼 입고있는 그거나 얼른 벗어줘요"
 "뭐?!"
 "어서요, 질문은 나중에!"
 엉거주춤 서있던 카시와기씨에게 다가간 유미가 등 뒤의 지퍼를 쥐고 힘껏 내렸다.
 "아, 알았어. 벗을께. 벗을테니까 그 손좀 치워줘. 난 벗기는건 좋아하지만 내가 당하는건 싫어"
 우물쭈물 거리며 인형옷을 벗던 카시와기씨가 '설마..'라고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유미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를 챈것 같았다. 하지만 그 후배들은 아직 상황파악이 안되는지, 인형옷을 뺏겨서 티셔츠에 반바지 모습이 된 불쌍한 선배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유미한테 이런 일까지 하게해야 하다니..."
 카시와기씨는 복잡한 표정을 하며 방금 벗은 인형옷을 건네줬다.
 "이걸로 나한테 하나 빚진 거예요"
 나막신을 벗고 강탈해온 인형옷에 한쪽발을 넣으며 그렇게 말해본다. 그 말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 졌는지, 어느새 카시와기씨는 평소대로 웃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알았어, 고마워. 하지만 유미가 신경써주는건 고마운데 짚을껀 짚고 넘어가야지"
 카시와기씨는 후배들 4명을 돌아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야, 거기 나란히 서서 이빨 꽉 물어"
 남자애들 사이에서 짚고 넘어간다는 건 꽤나 아파보이는 일이네...

 

                                       *

 

 유우키가 갈색 상자각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리소설 동호회의 전시실에 들이닥친건 그뒤로 5분정도 지나서 였다.
 "잘있었냐 유키치?"
 구경꾼이 아무도 없는 전시실 파티션 안쪽에선, 추리소설 동호회 인원 4명과 원래 회원이었던 1명이 책상 2개를 붙여만든 테이블 위에서 트럼프 놀이를 하고 있었다.
 "카시와기 선배.. 어째서...?"
 그야 유우키도 저 선배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정도는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그치만 왜 느긋하게 트럼프 따위를 하고 있는건지, 게다가 거의 속옷이나 마찬가지 상태인 건지.. 여러가지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던 거다.
 "사탕을 나눠주는것 정도론 손님을 끌어모을수 없다는걸 잘 알았거든. 보이는 대로 폐업상태지 뭐. 너도 같이 포커 안할래?"
 "그럴 상황이 아니예요"
 일단 반쪽짜리 교실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하지만 어디에도 유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그래? 무슨일 있냐?"
 카시와기 선배가 되물어 왔다. 벌써 졸업했으니까 이미 추리소설 동호회의 정식 멤버도 아닌데, 마치 자기가 책임자인 것만 같은 태도였다.
 그에 반해, 다른 4명은 말걸지 말아달라는 듯이 트럼프만 보고 있었다. 그게 너무나도 부자연 스러웠다.
 "유미를 찾고 있어요"
 "유미? 여기엔 없어"
 이번에도 카시와기씨가 대답한다.
 "진짜로요?"
 "거짓말 같으면 직접 찾아봐"
 "좋아요"
 상대방이 승낙했으니 서둘러 교실 안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책상 밑, 베란다, 청소 도구함 속, 사물함 안까지 하나하나 열어봤지만 전부 잠겨 있었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좁은 곳에 사람이 들어갈수 있을리가 없는 거다. 아니.. 유미 정도라면 어떻게 우겨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유키치, 유미는 찾았냐?"
 유우키가 교실안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에도 5명은 계속 트럼프를 하고 있었다.
 '카시와기 선배까지 5명인가...'
 추리소설 동호회 인원 4명은 전원 여기에 있다. 유미를 납치해간게 이녀석들이라고 한다면 여기 말고는 가둬둘 곳이 없단 말야..
 '사람 한명을 상자속에 넣어서 옮기는건 꽤 무거워. 그렇게 멀리까진 가지 못했을 꺼야'
 축제로 시끌벅적한 학교안에다 보초도 세우지 않은채 그런 위험한 물건을 방치해둘 리가 없어. 하지만 4명 모두 여기에 있는거다.
 '그렇다는 건...'
 이리저리 물어물어 여기까지 왔지만, 추리소설 동호회가 배후였다는 생각이 틀린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카시와기 선배가 의자 대신에 앉아있는 것에 눈길이 닿았다.
 "저건..."
 본적이 있는 갈색 상자각 이었다. 선배를 비키게 하고 확인해 보니, 아까 경고장을 붙여놨던 자리에 테잎을 뗀 자국이 남아있었다.
 일단 상자각을 열어본다. 하지만 그 안에 유미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한켤레의 오래된 나막신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저건 분명히 유미가 신었던 나막신이야..
 유우키는 그저 망연히 그자리에 서 있었다.
 "유키치..."
 선 채로 트럼프를 계속 하면서 카시와기 선배가 말을 꺼낸다.
 "난 이녀석들이 어떤 처벌을 받아도 할말이 없을만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해. 감싸줄 생각도 없고. 하지만.. 이번 만큼은 유미의 얼굴을 봐서라도 용서해 주는게 어때? 이녀석들도 반성하고 있어"
 "유미?!"
 그 이름을 듣자마자 유우키가 달려들어 온다.
 "지금 유미라고 했어요?!"
 "그래, 정말 착한 애지"
 역시 여기에 있었던 거야. 적어도 카시와기 선배가 오늘 어딘가에서 유미랑 만난게 틀림없어.
 유우키는 일단 '이녀석들'이라고 불렸던 4명을 다시 쳐다봤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트럼프를 하고있는 저 4명 모두, 오른쪽 뺨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 흔적을 보니까 무슨일이 있었는지 대강은 상상이 간다.
 카시와기 선배가 신호를 하자 4명이 일제히 일어서서 '정말 죄송합니다' 라며 깊숙히 고개를 숙인다.
 자백을 한 저녀석 들에게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가려 했지만 '유미 얼굴을 봐서'라는 말이 떠올라 꾹 참아본다.

 "그나저나 역시 학생회장의 누님이야. 정말 멋진 분이었어"
 추리소설 동호회의 회장 녀석이 말을 꺼냈다.
 "멋진 사람이라구?"
 유미가 대체 무슨짓을 벌인거지?
 "상냥하시면서도 맵고 끊고가 확실하더라구. 그런점이 너무 매력적이야"
 '유미가 말야?'
 "얼른 차게 하는게 좋겠다며 소중한 수건까지 빌려 주시고..."
 '잠깐! 그건 사치코씨 꺼잖아?'
 "얼굴도 귀엽고..."
 '이봐이봐, 유미녀석은 나랑 똑같은 얼굴이란 말야'
 "아무튼, 저희 일동은 유미씨 팬이 되어 버렸어요"
 두손을 모으고, 마치 기도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4명...
 "너희들.. 그이상 지껄이면 왼쪽뺨도 마저 때려준다?"
 더이상 유미를 향한 찬양 따윈 듣고있기 힘들어서 다시금 주먹을 움켜쥐자 카시와기 선배가 중재를 하러 끼어들었다.
 "누나가 매력적 이라는데 뭐 어때? 혹시 질투하는 거냐?"
 질투라구?! 유우키는 카시와기 선배의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지금 유미는 어디있는 거예요?"
 "응? 오다가 스쳐 지나가지 않았어?"
 카시와기 선배는 뭔가 수상하게 웃으며 카드를 책상위에 내려 놓았다.
 "스쳐 지났다구요? 그럴리가.."
 "그래? 불쌍하게.. 눈치 못챘구나"
 "불쌍하다구요...?"
 대체 무슨말을 하는거야? 필사적으로 찾고있는 사람이랑 스쳐 지나는데 어떻게 모를수가 있다는 거지?
 "유미는 네가 들어오기 조금전에 자기발로 걸어 나갔는데?"
 "뭐라구요?!"
 카시와기 선배의 말을 듣고 서둘러 뛰쳐나가려 하자...
 "이봐, 유키치"
 진지한 목소리가 뒤돌아 보게 만들었다.
 "너도 바쁘겠지만 가끔은 건네준 책도 좀 봐주고 그래"
 유우키는 잠시 멈처서서 천천히 뒤돌아 봤다.
 "'셜록 홈즈와 코고로' 말인가요? 그거라면 지금 읽고있는 중이예요. '팬더곰 탐정일지 - 사탕 살인사건'은 꽤 재미있네요"
 "그래..."
 그말을 듣고 카시와기 선배가 경쾌하게 웃어 보인다.
 "유키치는 역시 착한 어린이니까 힌트를 하나 주지. 유미는 말야, 지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거든"
 "예....?"
 그러고 보니 자기발로 걸어 나갔다고 했는데도 나막신은 여기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그건가?"
 "아무래도 떠오르는게 있나보네?"
 분명히 아까 스쳐 지나갔을 꺼야. 그야.. 유미는 아니었지만, 한번 마주치면 절대로 그냥 잊을수 없을만큼 인상에 남는 녀석이니까.
 "그럼 전 이만.."
 유우키가 서둘러 교실에서 나왔다.
 "아까 만났을때 말한마디 해줬으면 됐을텐데..."
 유미에게 원망섞인 푸념을 늘어놓으며 복도를 뛰어간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알아볼수 있을리가 없잖아!

 

 

                                        6

 

 무지 덥잖아.. 유미는 크게 한숨을 내쉰다.
 이건 뭐.. 교복 위에다 모피코트를 덧입은거나 마찬가지! 게다가 지금은 9월, 오래참기 대회를 하자는 것도 아니잖아...
 몸안에서 땀이 넘치도록 배어나온다. 하지만 어디한곳 닦을수가 없다니...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어보긴 했지만 이건 정말 힘든 일이야..
 대체 몇시나 됐지? 습관적으로 왼손을 들어본다. 하긴.. 지금은 인형옷 속에 있으니 시계가 보일리는 없을테지.
 '시계, 시계라...'
 시계란건 학교안 어디에나 있는듯 하면서도 막상 찾으려 들면 잘 안보이곤 한다. 일단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서 건물쪽을 바라보면 눈에 뜨일만한 곳에 큰게 하나 있을법도 한데.. 여긴 우리학교가 아니니까 어디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
 아무튼 운동장으로 나가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1층까지 계단을 내려오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가야하지? 돌아가는 길을 자세하게 듣고오긴 했지만, 여기올때 눈가림 당한데다 상자각 속에 넣어진 채로 왔었던 만큼 어디가 어디인지 상상이 안가는 거다.
 이거.. 헤메고 있는거 맞지? 이럴줄 알았으면 아까 유우키 녀석하고 스쳐 지나갈때 불러 세울껄 그랬나봐.
 그치만 그럴 틈도 없을만큼 동생 녀석은 바쁘단 듯이 뛰어갔었잖아.. 그야 뒤쫓아 갈수도 있었지만, 혼잡한 복도 한가운데서 자리를 비웠던 시간들에 대한것과 지금 하고있는 꼴에 대한 변명을 할 생각은 들지 않았었던 거다.
 그런것 보단 날 걱정하고 있을 언니 곁으로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지 않으면, 그 생각만이 머리속에 가득했었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유우키녀석은 날 찾아 헤메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럼 조금 미안한데...
 "죄송해요, 운동장으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하죠?"
 팔에 무언가 완장을 찬 사람이 지나가길래 일단 말을 걸어봤다.
 "운동장? 그거야 요 앞에 비상구로 나가면 금방이예요"
 "감사합니다~"
 꾸벅~
 가볍게 고개를 숙여봤지만 균형이 무너져 넘어질뻔 했다. 너무 더워서 맥이 빠진데다 머리까지 무거운 거다.
 "괜찮아요?"
 "예.. 죄송해요"
 완장을 찬 학생이 도와준 덕에 다행히 넘어지지 않을수 있었다.
 "별것도 아닌데요 뭘.. 그나저나 그쪽도 지금 하고있는 이벤트에 나갈 꺼예요? 조금 있으면 끝날테니 서두르는게 좋겠네요"
 "저.. 지금 몇시나 됐죠?"
 말이 나온김에 물어본다.
 "3시 25분 이예요"
 그 학생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시간을 확인해 주었다.
 "여러가지로 감사드려요. 그럼 이만.."
 이번엔 감사의 말만 전한 뒤, 방금 가르쳐준 대로 운동장을 향했다.
 "아.. 잠깐! 나갈때 머리를 조심해요"
 친절했던 그 학생은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하긴.. 그럴수도 있겠네. 모두들 지금의 유미를 보곤 마주 웃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하곤 했었으니까.
 비상구를 나갈때, 아까의 충고를 깜빡한 덕에 머리를 부딛쳐 버렸지만, 그 외엔 별탈없이 밖으로 나올수 있었다.
 조금 걷다보니 금방 운동장이 눈에 들어온다. 꼭 망루처럼 높이 세워진 휜색과 노랑, 그리고 빨간 무대가 난공불락의 요새인양 기품있게 버티고 있는게 보였다.
 이젠 저 위에 도전하는 용사들은 보이질 않았다. 격투끝에 화려하게 패해간 자들의 시체들(거짓말이야..)만이 빼곡히 널려있을 테지.. 유미는 망설임 없이 빨간 무대를 향해 걸어 간다.
 저 위에 사치코님이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백미터 남았어..
 낯선 길을 걷기힘든 차림으로 뒤둥뒤뚱 나아간다.
 이제 70미터 남았어..
 지금 유미의 시선은 그다지 잘 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대위에 있는 사치코님의 모습만은 확실히 볼수 있었다. 옆에있는 큰 사람들은 아마 야쿠시지 형제들 이겠지?
 한 50미터쯤 남았을까?
 게임 종료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 펴졌다. 하나데라 대난투의 두번째 스테이지, '리리안 진법'이 이제 막 끝난거다.
 결국 이벤트가 끝날때까지 돌아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미만의 '하나데라 대난투'는 아직 끝난게 아닌거다.
 젖은 수건은 추리소설 동호회 사람들이 불쌍해서 두고 와 버렸다. 늦게온건 둘째치고 심부름 하나도 제대로 못했으니.. 게다가 언니 물건을 내맘대로 다른 사람한테 빌려주고 온 어이없는 동생인 거다.
 거기다 지금 이 모습까지... 날 보고 대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그래도 유미는 계속 걷는다. 입형옷을 벗어버릴 시간따윈 없는거다. 조금이라도 빨리 언니를 보고 싶으니까..
 그때였다.
 무대위에 앉아있던 사치코님이 이쪽을 쳐다봤다 싶었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시잖아? 저 높이인데... 치마를 입고 있는데도 말야...

 '사치코님--!!'

 내가 유미란걸 알수 있을리가 없지. 없을꺼야, 없을텐데....
 유미는 엉켜버릴것만 같은 양 다리로 필사적으로 걸어 나간다. 사치코님이 땅위에 내려서서는 이쪽을 향해 뛰어 오신다. 그리고...
 "유미!! 다행이야..."
 사치코님은 그렇게 외치며 팬더곰 인형을 향에 뛰어든 거다.
 "언니!"
 서로 꼭 껴안은 채, 유미는 마음속으로 부터 감동했다.
 "나란걸 알고...."
 후덥지근한 팬더곰 인형 속에서 땀과 더불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젠 인형옷 같은건 벗어버려도 되지만 이대로 조금 더 언니랑 같이있고 싶어서 가만히 있어본다.
 요시노랑 노리코, 그리고 무대위에서 뒤늦게 내려온 레이님과 시마코까지 무슨일인지도 모른채 다가왔다.
 리리안 여학원의 '로사 키넨시스'가 팬더곰 인형에게 안겨있는걸 보고, 도전에 패한 부상병들도 서서히 모여들었다.
 그래도 두사람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금방 알아낼수 있다던 그 말을 증명해 주셨으니까.
 '아무 소리도 없는 어둠속에 있어도 거기 유미가 있다면 금방 알수 있어'
 .....예, 언니
 '온몸이 붕대로 칭칭 감겨진채 침대에 누워 있다해도 분명히 유미를 찾아낼수 있을꺼야'
 .....예, 언니!
 유미는 그말을 했던때로 돌아가서 끄떡였다.

 더이상의 행복같은건 없을꺼야.

 

 

                                    - 14권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