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2권 어린 양들의 휴가 -6- 천사의 노래

-천사의 노래(天使の歌)-

 

 

1.

 

사이온지 유카리님의 별장에 도착한 것은 6시 조금 지나서였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사이온지 별장이 눈에 띄는 높은 나무 하나없이 탁 트인 부지에 세워져 있어서, 숲을 통과해서 온 유미는 마치 시간이 역회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미는 나비같은 하얀 원피스를 입었다. 사치코님은 별장 뜰에서 채 피지 않은 산백합(山百合) 한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셨다. 옷에 꽃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수 수술을 하나하나 떼내 주시면서. 사치코님은 옅은 그린에 하얀 꽃모양이 프린트된 원피스를 고르셨다. 유미와 마찬가지로 흰색이라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으면, 마치 일부러 맞춰 주문한 것 같았다.
"각오는 돼있니?"
사이온지님의 현관 앞에서 사치코님은 마치 전쟁터에라도 나서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유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는 장담은 없다. 또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 부끄러울 일이 없다면 당당하게 있으면 그만이다. 심호흡을 하고선, 초인종을 울렸다. 즉시 안에서 유카리님이 맞으러 나와서는 두 사람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어서 오세요. 사치코 언니, 유미님."
유카리님은 금빛실이 매듭으로 들어간 핑크색 초롱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사탕포장지같아서 움직일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 예뻤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딱딱한 인사는 그만하기로 해요. 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유카리님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고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님, 오가사와라 사치코 언니가 오셨어요. 그토록 기다리시던 후쿠자와 유미님도 함께요."
그토록 기다리시던.
의심이 너무 지나쳐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 말투가 맘에 걸렸다. 유카리님이 부름에 나타난 사람은 호리호리한 몸매의 감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었다. 적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의 이곳저곳에 드레스와 같은 색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아주머님. 이 애가 제 동생이 된 유미예요. 그토록 기다리셨다면서요?"
선물인 치즈와 와인을 건네주면서, 사치코님은 태연하게 빈정거렸다. 하지만 사이온지 부인은 그 말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럼. 물론 기다리고 있었고말고. 귀여운 동생이 생겼다고 주위에서 평판이 자자한걸. 어서와요 유미양."
"안녕하세요. 금일 초대해주셔서...."
"오늘밤은 예절같은 건 던져버리고 마음껏 즐기는 파티야. 많이 먹고, 많이 마시고... 아, 미성년은 물론 쥬스지만. 아무튼 즐기도록 해. 하지만 벌써 건배해 버렸으니. 미안하게 됐구나."
유키라님의 어머님은 이미 술이 들어가 기분좋은 듯했다. 치즈는 고용인에게 맡기고, 와인을 든 채로 "병따개 병따개" 하며 걸어가 버렸다. 이미 파티는 시작한 모양이라서, 회장에는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오가사와라 별장의 3배는 되어보이는 1층 객실은 아마 이런 파티를 열기 위해서 만들어진 듯하다. 벽 옆에 놓인 테이블에는 유명호텔에서 가져온 듯한 요리랑 음료수가 빽빽이 나열되어 있고, 가운데 있는 그랜드피아노에서는 아마 프로 피아니스트일 것으로 짐작되는 여성이 대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한 곡을 골라 생연주중이었다.
"음료수 가지고 올테니까 여기에 있어."
사치코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음료수가 진열된 코너로 향했다. 거기 있는 프로 바텐더같은 사람한테 주문하면 취향대로 음료수를 만들어 주는 듯하다. 잠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유미에게 다가와 말했다.
"안오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 토오코짱."
옷깃과 소매가 꽉 조인 스커트, 플레어라고 하는 고풍스런 디자인의 드레스는 익숙한 세로롤 머리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렇게 충고했는데도... 유미님, 혹시 마조아닌가요?"
오렌지 쥬스를 쭉하고 다 마신 뒤, 토오코짱이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가요? 전 몰라요. 이 파티, 단순한 친목회가 아니니까요."
"그런 말 해본들..."
물론 단순한 친목회라고는 생각치 않았지만, 그래도 유미 일행에게 뭔가 저지를 계획만으로 이렇게까지 성대한 파티를 열 리가 없다는 것도 알겠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조용히 말을 마친 뒤, 토오코짱은 멀어져 갔다. 단순한 친목회가 아니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나와서는 유미에게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토오코짱이야말로 무슨 생각인건지 유미는 좀체 알 수 없었다.
"너희 자매, 정말 대단한 담력이다."
선수교대하듯, 여름슈츠를 입은 청년이 다가와서는 유미 뒤에 비껴섰다.
"카사와기씨..."
토오코짱이 왔길래 혹시나했더니, 역시나다.
"나쁜 장난칠 거란 것쯤은 예상하고 왔을테지. 어째서?"
카시와기씨는 그레이프 후르츠 쥬스를 건넸지만, 유미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카시와기씨 댁에도 제 험담이 들리던가요?"
"응. 뭐 그렇지."
애매모호하게 대답하고선 카시와기씨는 유미가 거절한 쥬스에 입을 댔다. 세상이란 넓은 듯 하면서도 좁다. 카시와기씨 집도 부자같으니까, 이 주위에 별장을 가진 사람들과 접촉하는 건 당연하다.
"언니는 확실히 말안해주셔서요. 그 소문이란 거, 꽤 비참한가봐요?"
"비참... 하다고 해야하나, 뭐라고 해야하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처구니없지."
어처구니없다. 사치코님과 그야말로 똑같은 감상이었다.
"쌀 얘기던가요?"
"아아, '코시히카리 공주'?"
코시히카리 공주?!
".... 그거, 저말인가요?"
설마, 그렇게나 스트레이트한 별명을 붙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윽, 이런. 아직 유미짱 귀에는 안들어갔었나보군."
오 마이 갓-포즈로 카시와기씨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역시 이 사람은 짜증이다.
"그리고 또요?"
"좀 봐주라."
자기가 먼저 접근해온 주제에, 카시와기씨, 빨리도 발뺌한다.
"전부 말해 버리면 마음이 편해질 거예요."
유미가 자라처럼 한번 물은 걸 놓지 않자, 카시와기씨는 마침내 포기하고는 "못당하겠는걸"하며 입을 열었다.
"쿄고쿠 별장에 삿짱만 갔었지? 그건 부인이 병중이라고 들은 네가 병옮는 게 싫어서 거절했다는 얘기야."
"그럴 리가.."
"물론 알고 있어. 넌 그런 말한 적 없겠지. 지독한 얘기야. 실제로 쿄고쿠 부인은 꾀병이었고."
하지만 소문이란 일일이 사정 다 알고 퍼지는게 아니니까, 라며 카시와기씨가 말했다. 과연 그렇다. 완전히 유언비어라고 해도, 한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지느러미가 붙어서 활발히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또 있나요?"
유미가 확인해보자, "아아"하며 카시와기씨는 끄덕거렸다.
"이건 나한테도 책임이 있지만, 삿짱을 별장에 남기고 남자들과 거리를 쏘다녔다는 소문도 돌고 있어."
"남자들이면, 카시와기씨랑 코바야시, 그리고 유키 말이네요."
"아마도. 누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시한 얘기를 퍼뜨리는 할 일 없는 인간들이 꼭 있다니까. 그게 나란 것도 모르고 우리 집에 소문 흘리러 오니까 얼간이라고 밖에말할 도리가 없지."
확실히 유미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왜 내가 이지메를 당해야만 하는걸까..."
사치코님은 돌아오는 도중에, 노신사에게 붙잡혀 얘기중이셨다. 카시와기씨는 조용히 말했다.
"이지메의 이유같은 건 여러가지 있겠지만 아마 이번 유미짱에 한해서 말하자면, 질투에 의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
"질투말인가요?"
"컴플렉스와는 동전의 반대면이지."
"저 사람들한테 컴플렉스같은게 있을까요?"
가지각색의 호랑나비. 귀엽고 조금은 제멋대로인, 약점 같은 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있어. 이 주변의 인간은 거의가 기껏해야 50년정도로 재산을 축적한 집안이야. 사람은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격식을 원하게 돼. 그것만큼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굉장히 부러워 하게 되지."
".....오가사와라 가문."
"그래. 그 집안은 오래된 가문이니까."
건물의 크기, 호화로운 장식, 화려한 파티. 사이온지 별장에 잠시동안 있어 보니, 어쩐지 카시와기씨의 말이 이해가 가는 듯 했다.
"가문, 가문 외쳐대는 인간들은 대개 약점을 느끼고 있는거야. 자 그럼, 그런 인간들 앞에 갑자기 유미짱이 등장한다."
"저요?"
"삿짱의 동생이라면, 오가사와라의 딸이나 마찬가지야."
유미는 그때서야 아, 하고 깨달았다.
"날 흠집낼수록, 오가사와라 가문에 수치를 줄 수 있으니까...!"
"그런 셈이지. 자신들이 더이상 올라갈 수 없다면, 위에 있는 인간을 끌어 내려서라도 우위에 서고 싶다. 그렇게 해서 밸런스를 잡으려고 하는거야."
".... 왠지 슬프네요."
"응. 하지만 거기에만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도 있으니까."
사치코님이 손에 잔을 들고 돌아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도중에 옛날 글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을 만나서말야.....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아뇨. 아무 것도."
유미가 머리를 가로젓자, 대신에 카시와기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유미짱은 삿짱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가 준 쥬스는 안마신대. 그런 얘기였어."
"어머"
사치코님이 가져다준 쥬스는 차가운 레모네이드였다. 사치코님의 잔과 미묘하게 색이 다른 것은 벌꿀을 많이 넣었다는 표시였다.

 

 

2.

 

사치코님은 묵묵히 서계셨지만, 상대측에서 사람들이 접근해오는 바람에 분주하셨다. 요리를 먹으면서도 인사를 나누고, 예전에 신세진 답례를 하기도 하고, 상대의 가족문안을 묻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유미도 먹는 걸 중단하고 같이 인사했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그 사람이 유미의 소문을 들었는지 어떤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다.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뒤에서 유미를 가리켜 '코시히카리 공주만 하얀 드레스'라며 웃는 사람이 있었지만, 화낼 기운도 없어서 묵살했다.
"자, 여러분. 즐겁게 보내고 계신가요?"
갑자기 마이크를 댄 소리가 났다. 상황을 파악못한 유미 입장에서 보면, 뭐야, 뭐야란 느낌. 사치코님도 햄을 먹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마이크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회자였다.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 등장입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요구대로, 초대객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지금까지 어디서 스탠바이중이었는지 휠체어를 탄 백발의 할머니가 객실의 중앙에 나왔다.
"시작했나."
어느새 카시와기씨가 또 옆에까지 와서는, 두 사람에게 살짝 귓속말했다.
"쿄고쿠 큰부인의 생신파티야. 평소엔 무관심하면서 가끔씩 이벤트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어필하려는거지."
카시와기씨도 참 심한 말을.
"증조 할머님의 생신이셨다니... 몰랐어."
사치코님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초대장에는 그런 말 한마디도 실려있지 않았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증조 할머님. 생신 축하드려요."
유카리님이 꽃다발을 안고 다가갔다. 증조할머님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증조 할머님이 계속 손을 내밀지 않자, 유카리님은 무릎 위에 꽃다발을 놓고선 되돌아왔다. 쥐죽은 듯 조용한 회장. 아무리 기다려도 증조할머님의 "고맙다"는 말이 들려오질 않자, 사회자가 큰 소리로 분위기를 돋구었다.
"미수(未壽:88세를 이르는 말)를 기념하여 증손녀 유카리님이 88송이의 장미꽃을 선물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대한 박수를!"
정신을 차린 손님들은 이제 막 생각난 것처럼 박수를 쳤다.
"지금부터는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시듯이 대부인께서 좋아하시는 음악선물을 증정할 차례입니다. 우선 먼저 유카리님."
유카리님은 그랜드피아노에 앉자, "증조 할머님을 위해서"라며 피아노곡의 대표적인 레퍼토리,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했다. 그렇다고 해서 증조 할머님의 이름이 엘리제는 아니다. 아마도.

그 후로 유카리님의 사촌이랑 친척들이 차례차례 중앙에 나와 특기인 악기를 연주했다. 증조할머님은 누가 어떤 연주를 해도 그다지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쿄고쿠 키에코님은 플룻, 아야노코지 키쿠노님은 만돌린 등 시간이 지나면서 사이온지 일가 외의 사람들도 악기를 연주하러 등장했다. 토오코짱은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의외로 솜씨가 좋아 놀랬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연주라도 증조 할머님께 말씀이나 박수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손자 부부가 증조 할머님이 마음에 들어하시던 별장을 개축하는 바람에 화내고 계신거야. 키가 큰 나무는 거의 다 잘라내 버려서 운치는 사라졌겠다, 증조 할머님이 다리가 안좋으신 것도 번들거리는 계단에서 미끄러 넘어져 다치신 게 원인이거든."
묻지도 않았는데 카시와기씨는 사이온지 가문의 속사정을 설명해줬다. 증조할머님은 얼핏 치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가족에게 절망하여 마음을 닫고 계신 것뿐이라고.
"그런데 유미짱, 악기는?"
"어렸을 때 피아노를 조금요. 하지만, 공백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더이상 연주 못해요."
대답하면서 유미는, 갑자기 마음 속에 "설마"란 문자가 떠올랐다.
"....그렇게 나오지 않을까?"
"제, 제가요-?"
유미보다 조금 앞서 생각에 미쳤는지, 색스폰연주를 듣고 계시던 사치코님도 난처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무슨 일이 생기리라 경계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방법으로 공격해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어쩌지.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는 바로 그 때,
"유미님."
유카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증조 할머님을 위해서 뭔가 연주해 주시지 않겠어요?"
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작전회의는 어림도 없다.
"뭐든지 상관없으니, 특기인 악기를 말씀해주세요. 대개는 거의 다 우리 집에 있으니까요."
"......."
아무래도 사이온지님 집안은 음악가족인가 보다.
그럼 화태고(일본식 큰북)를, 하고 없을 것같은 악기를 일부러 말해보는 수도 있긴 하다만은, 만에 하나라도 그게 이 집에 있었다간 엄청 창피를 당할 것이기에 바로 기각.
"자, 사양하지 마시고요. 말씀해 주세요."
친절한 말씀입니다만, 공교롭게도 그 쪽의 악기를 다룰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질 않네요.
아마도, 이 경우의 모범해답은 솔직하게 "연주못해요"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못하는 건 못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더더욱 끔찍한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 뻔하니까.
하지만.
아무 악기도 연주할 수 없다니, 대체 어떤 집안에서 자랐을까. - 아직 듣지도 않은 유카리님의 미래의 말을 상상해보고는 공연히 화가 났다. 어떻게 될까,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주목하고 있는 손님들. 그 안에는 상황을 파악하고 성급히도 동정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이 자리를 박살내줄까?"
카시와기씨가 유미한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음만은 고맙게 받아들일게요.
"그럼."
유미는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유미...?!"
사치코님이 손을 잡으며 말렸다. 너무나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건 유미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사치코님. 하지만 맞닿은 손바닥으로 느껴지는건, "이제 됐으니까 그만둬" 라는 마음의 외침.
하지만, 괜찮아요 언니. - 유미는 살짝 손을 놨다.
난 언니가 걱정할만큼 약하지 않아요. 엄청난 데미지를 입더라도 언니의 자상한 미소로 곧 부활할만큼 유들유들한 신경을 갖고 있으니까요.
"부족한 몸이라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습니다만, 생신을 축하드리며 증조할머님을 위해 한 곡."
유미는 유카리님의 증조 할머님에게 먼저 인사를 한 뒤 숨을 들이마셨다.
"마리아님의 마음, 그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아카펠라로, 게다가 '마리아님의 마음'을.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니, 용케도 노래를 부를 생각을 다했구나 싶을 정도로 유미는 자기자신의 배짱에 어이없었다. 하지만 몰랐다고는 하나, 생신에 초대받아서 아무런 선물도 하지않는 것 또한 죄송했으니까, 유카리님이 청해서가 아니라 증조할머님을 위해서 노래를 불렀다.
이탈리아에 유학간 시즈카님처럼 성량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미성도 아니지만, 마음을 담아 부른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고음에서 목소리가 흔들렸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계속한다. 이건 선물하는 노래니까. 
1절이 끝나자 갑자기 간주가 들려 왔다. 돌아보니 그랜드 피아노에 사치코님의 모습이 있었다. 유미의 키에 맞춰 반주를 넣어주고 계신다. 사치코님이 연주하는 피아노에 자신의 소리를 싣는 것이 기분좋았다. 연탄은 아니지만, 연탄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마음이 포개져 왔다. 예민해진 마음이 음의 절정을 찾아내고는 그 한 점을 향해 곧장 소리를  날린다. 노래하면서 유미는 자신이 마리아님의 푸른 하늘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피아노의 음이 사라졌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다 불렀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객실은 소리가 사라져 정적으로 휩싸여 있다.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못하고 실수한 걸까. 불안해진 마음으로 주위를 바라보자, 마침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서는 사치코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치코님은 환한 얼굴로 조그맣게 끄덕였다. 이걸로 됐어, 라고 말하고 있다.

 

짝, 짝, 짝, 짝.

 

어디서 들려오는걸까. 작게, 그리고 천천히 박수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곳을 알고선 놀랐다. 유카리님의 증조 할머님의 손바닥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손님들은 증조할머님이 처음으로 박수를 보낸 것에 놀라면서도, 오늘의 주인공을 뒤따라 당황하며 박수를 쳤다.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음모의 장본인 유카리님도, 마지못해 박수를 쳤다.
손짓으로 부르는 것 같아 보여서 유미는 휠체어로 달려가 옆에 무릎꿇고 앉았다. 그러자 증조할머님은 유미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고맙구나. 멋진 노래였어. 옛날 생각이 나더구나."
증조 할머님은 옛날 그 노래를 불렀던 추억이 있으신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미는 머리에 꽂았던 산백합을 빼서 드렸다.
"마리아님의 마음, 이구나."
"네."
그건, 그 가사를 마음깊이 새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수수께끼 풀이였다.

 

 

3.

 

"내년에도 다시 놀러와주게나. 천사님."
그런 말을 남기고서, 유카리님의 증조 할머님은 퇴장하셨다. 주역이 사라진 파티회장은 서서히 어수선해졌고, 긴장감이 사라져, 마치는 인사도 생략한 채 자연히 끝나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 언제 돌아갔는지 토오코짱의 모습은 안보였다. 유카리님은 증조 할머님이 퇴장하자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각자 집에서 마중나온 쿄고쿠 키에코님과 아야노코지 키쿠노님도 돌아갔다.
유카리님의 어머님은 소파에서 와인병을 껴안고 취해 쓰러져 있었다. 피아니스트와 사회자는 손님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유미일행도 슬슬 현관으로 향하자.
"데려다 줄까?"
카시와기씨가 두 사람을 쫓아오며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두 사람은 동시에 거절했다. 지금은 단 둘이서 밤길을 걷고 싶은 기분. 언니도 마찬가지인가보다.
"하지만, 너희들 대단하던데."
일단 거절했는데도, 카시와기씨는 상관없이 계속 따라오며 말을 걸어왔다.
"단 한 곡으로 증조 할머님의 마음을 사로잡다니말야."
"언니 덕분예요."
"유미 마음이 전해진거야."
카시와기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매끼리 분위기를 낸다. 또 그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이 카시와기씨답기는 하지만.
"저래뵈도 사이온지 큰 아주머님은 힘이 있으니까, 마음에 든 유미짱을 앞으로는 결코 '코시히카리 공주'라고 웃을 인간은 없을거야. 대신에 '천사양'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나올지도 모르지만."
"천사양...?"
굳이 말한다면 아직은 '코시히카리 공주'쪽이 더 어울릴 듯한데. 천사라고 한 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하얀색이라 그렇게 부른 것 뿐이니까. 검은 옷 입고 왔더라도 '천사양'이라고 하면 도리어 너무 웃긴다.
카시와기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뒤돌아보니, 어느새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내일은 뭘하고 싶어?"
숲속 나무 아래서 사치코님이 물어보셨다.
내일은 일요일이고 도쿄에 돌아가는 날을 뺀다면 별장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유미는 요청을 했다.
"전 빈둥빈둥 지내고 싶어요."
일요일이니까 교회에 나가서 미사에 참석해도 괜찮겠지만, 평소에 그렇게 지내는 것도 아니니까 패스.
"빈둥빈둥?"
사치코님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언니랑 낮잠자고 싶어요."
실컷 게으름피우며.
내일 하루는 신발은 신지 않아도 될 정도의 기분으로. 손님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고 책도 안읽고. 녹색 지붕 아래서, 테라스에 시트를 펴고, 무엇을 할 지는 정하지 않은 채, 빈둥빈둥거리면서 지내는거야.
언니와 단 둘이서. 얼마나 사치스러운 시간인가.
"아아, 멋지겠는데."
사치코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찬성했다. 당연하지. 이곳은 그렇게 지내는 방법이 가장 어울리는 장소니까.

 

 

4.

 

월요일 이른 아침. 일주일 전의 약속대로 마츠이씨가 맞으러 왔다. 검은 차가 별장 부지 내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아침산책을 마치고 마침 돌아오던 길이었다. 사치코님이 유미의 양산을 간단히 접어서 뒷자석에 두었다.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쉴 때 꼭 써야할 거라면서. 둘이서 함께 말이다.
배가 부르면 멀미나기 쉬우니까 아침은 적게 먹은 대신에, 키요씨는 유미가 집에서 가져온 용기에 도시락을 만들어 주었다. 메뉴는 무엇인고 하니, - 일주일전에 엄마가 만들어준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키요..."
다 만든 도시락을 보고선 사치코님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매실장아찌도 아스파라거스도 이제 드실 수 있으시죠?"
"...으응"
"유미님의 어머님 도시락은 전부 맛있게 드셨다지요?"
"시끄럽네. 그렇게 다짐안받아도 제대로 먹을거야."
"감사합니다. 덧붙여서 주먹밥의 밥은 우오누마산 코시히카리니까요."
키요씨는 약간 우쭐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웃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한참 듣던 유미는 그제서야 이해했다. 사치코님은, 매실장아찌랑 아스파라거스를 싫어하셨던 거다. 옛날부터 키요씨는 사치코님의 편식을 고쳐보려고 애를 썼다. 무리를 하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서, 기쁜 맘으로 만들었단 얘기다. 돌아가는 날까지 기다렸던 이유는 사치코님이 불만을 토로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키요씨의 작전 승리.

"몰랐다고는 하지만, 죄송해요 언니."
유미는 보온 케이스를 안고서 머리를 숙였다.
"무슨 얘긴데?"
지는 걸 싫어하는 사치코님은, 그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 그리고 또 참고 매실장아찌랑 아스파라거스를 먹을테고.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키요씨와 겐스케씨는 그렇게 말하며 배웅해 주었다. "안녕히 가십시오"도 "또 오십시오"도 아니라, "다녀오십시오". 이곳은 사치코님이 언제 돌아와도 좋은 장소다. 사와무라 부부는 모습이 안보일때까지 계속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가씨들께선 피서지 휴가를 만끽하셨습니까?"
운전석에서 마츠이씨가 묻는다. 출발은 아침 7시였지만, 어제 많이 자서 수면부족은 없다.
"응."
"물론이죠."
창밖을 미끄러지듯이 나무들이 달린다. 반짝반짝, 녹색이 눈부시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멀미약을 먹은 사치코님은 빨리도 무릎덮개를 어깨까지 덮고선 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유미에게도 권했지만, 이번에도 패스했다. 언니의 편안한 숨소리를 들으면 아마 아무리 잠을 충분히 잤다고 해도, 곧 숙면에 빠질게 뻔하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일주일동안 즐거웠다.
"그렇다고는 해도"
눈을 감고 있던 사치코님이 갑자기 생각난듯 웃었다.
"난 그 때 정말로 심장이 파열할 정도로 조마조마했다니까."
"그 때라뇨?"
언니의 이야기는 너무 갑작스럽게 시작해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사이온지 별장에서 유미가 '마리아님의 마음'을 부르기 위해 걸어나갈 때 말야. 나도 참... 싫다."
또 혼자서 생각해내고는 웃는다. 뭐가 그리 재밌나 싶어 물어봤더니 사치코님은 너무 웃다가 흘러나온 눈물을 무릎덮개로 닦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야스키 가락(安來節)을 추면 어쩌나 했다니까, 라고.
-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까진 못하지.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12권 어린 양들의 휴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