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2권 어린 양들의 휴가 -5- 무중모색

-무중모색(霧中模索)-

 

 

1.

 

"적송, 낙엽송."
숲속에서 사치코님이 손가락을 가리킨다.
"침나무."
천천히 걸으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가르쳐주신다.
"단풍나무... 가을이 되면 잎이 빨갛게 물들어."
사치코님은 이 주변의 나무에 대해 대단히 박식하셨다. 식물뿐만이 아니라, 가끔씩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소리에도 일일이 발을 멈추며 "저건 노랑딱새",  "큰유리새의 울음소리야" 라며 유미에게 가르쳐 주셨다.
목요일.
사치코님은 드물게도 일찍 일어나셔서는 아침식사 전에 산책하자며 유미를 불렀다.
"조심해. 거기 부러진 가지가 있어."

언제부터 안개가 꼈는지 두사람은 하얀 세계에 파묻혀 있었다. 똑바로 걸어가고 있는 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우유빛 짙은 안개는 자기 주변 이외의 것을 완전히 덮어가고 있어서, 정말로 길 위를 걷고 있는지조차 점점 자신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어 방향을 바꿨다가 아침이슬 투성이인 양치류에 발을 건드려 섬뜩해진다.
"이슬도 좋아해."
눈을 가늘게 뜨는 건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붙잡을 곳 없는 미세한 물방울을 오감을 예민하게 하여 느끼려고 하는 것이다.
"너한테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
그 때 유미는, 사치코님이 이 지역 전체를 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사치코님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별장이 있는 숲 주변의 자연. 그래서 가이드북에 실려 있는 가게나 산책코스, 미술관, 그런 것은 이 곳이 아닌 어딘가 먼 마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 사치코님에게 있어서 그런 것들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겐스케씨가 매일 아침 바이크로 사가지고 오는 빵을 맛있게 먹는다. 키요씨가 요리하는 야채랑 고기는 이 주변에서 구한 것이다. 근처의 아주머니가 직접 만들어 주신 잼. 은퇴해서 취미로 양봉을 하고 있다는 할아버지한테서 받은 진한 벌꿀. 조금 떨어진 연못에서 재배한, 신선한 와사비. 모두 다 사치코님은 마음에 들어 하신다. 하지만 그뿐이다. 자신이 사러 가지도 않고, 만드는 곳을 구경하러 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루종일 별장 안에 있어도 불편이 없다. 사치코님에게 있어서 이 곳은, 안락함을 제공하는 아이들의 방. 그리고 언제나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그 방에, 유미를 초대해준 것이다.
"언니."
유미는 눈앞에 있는 팔을 잡았다. 어쩐지 안타까워져서, 가슴이 뜨거워져서 두 번 다시 언니를 혼자두고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왜 그러니? 안개가 무서워?"
사치코님의 말에 유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있으면 괜찮아. 장난꾸러기 요정은 혼자 있는 사람만 노리니까."
손을 꼭 잡고서 걷기 시작했다. 안개 저편에서 겐스케씨가 바이크의 라이트를 비추면서 돌아왔다.

 

 

2.

 

10시가 지나자 아야노코지 키쿠요님이 사치코님을 방문했다. 키쿠요님은 토오코짱과 같은 나이로, 오가사와라 가문의 별장에서 500미터 떨어진 조부모님댁 별장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숙제 가르쳐주세요."
키쿠요님은 영어판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와 영일사전 몇 권, 그리고 B5판 노트를 테라스의 테이블 위에 쿵하고 놓았다. 
"숙제는 <연보라빛(若紫, 와카무라사키>의 일역이거든요.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의 미묘한 해석의 차이를 이해하고 현대어로 바꿔야만 하는데, 어려워요."
일본의 고전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또 일본어로 바꾸다니. 학교가 다르면 숙제도 다르구나. 틀림없이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겐지이야기의 저자)도 놀라고 있을테다.
"키쿠요짱. 저기 있지, 숙제는 자신이 해야하는 법이야."
사치코님은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꽂은 뒤 덮었다. 다자이의 <츠가루>는 이미 예전에 독파. 지금 읽고 있던 것은 세익스피어다.
"지금까지 계속 가르쳐 주셨잖아요. 전 매년 사치코 언니가 공부를 봐주시는게 즐거워서 별장에 오는걸요. 전부 다 부탁드리는 것도 아니니까요. 언니 옆에서 숙제를 하다가 모르는 부분만 가르쳐주시면 그걸로 족해요."
키쿠요님은 순간 유미에게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올해는 유미님이 계시니까 키쿠요 같은 애는 아무래도 상관없으시단 건가요?"
설마 자신을 끌어들일 거라곤 생각도 못한 유미는 솔직히 말해 당황했다. 공부를 봐주고 안봐주고는 사치코님과 키쿠요님의 문제이며, 유미는 어쩌다 그 자리에 같이 있는 존재였을 뿐이니까.
"유미는 관계없잖니?"
물론 사치코님도 그리 말씀하셨다. 하지만 키쿠요님은 "정말인가요?"라면서 갑자기 일어섰다.
"유미님은 비겁해요."
"엣!?"
"밤낮 사치코 언니를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저한테는 아주 조금의 시간도 할애해주지 않으시는군요. 진짜 욕심쟁이."
"키쿠요짱."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사치코 언니는 이제까지 키쿠요가 어리광부려도 그런 무서운 얼굴하신 적 없으신걸요. 언니는 역시 변하셨어요. 이건 분명히 유미님이에요."
키쿠요님은 털썩 테이블 위에 엎드려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치코님이래도 이런 식으로 울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키쿠요님의 등을 손으로 토닥거리며 "울지 마렴"하고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키쿠요님은 눈물로 뺨을 적시면서 사치코님 품에 안겨들었다.그리고는 울면서 "언니" "언니"하고 몇번이나 불렀다. 나무에 앉아 쉬지않고 울어대는 매미에게도 지지 않을만큼 격렬하게.
"전 2층에서 책읽고 있을게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기 힘들어서, 유미는 책을 안아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유미... 미안해."
"아뇨."
간신히 미소지으며, 그대로 도망치듯 객실을 빠져나가 계단을 올라갔다. 난 잘못한 거 없어. 아마도.
하지만 아마 키쿠요님을 울린 범인이 그녀가 말한대로 "유미님"이란 건 알고 있다. 나중에 나타나서는 동생자리를 차지한... 확실히 그 말대로다. 예전부터 사치코님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리라고 상상은 간다.
노마크였던 유미가 사치코님의 동생이 되고난 뒤, 한때 신데렐라에 비교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 이런 생각이 든다. 이야기 속의 신데렐라는, 그 후 정말로 행복해졌을까.
왕자님이 사는 궁전에 홀홀단신으로 뛰어든 그녀는, 그 자리가 거북하진 않았을까. 예전의 재를 뒤집어쓴 생활을 그리워한 적은 없었을까.
방에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마음>은 앞으로 열몇페이지면 끝나지만, 책을 펼칠 기분이 아니었다.

사치코님을 좋아해.

하지만 서로 좋아하기만 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다른 누군가가 슬퍼하는 경우도 있다. 한 개인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무인도에 가서 살면 될 문제도 아니다. 유미는 천정을 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더라도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건 소중한 일이야.
어웨이 경기의 유미는 자기자신이 서포터가 되어 "파이팅"하고 응원했다.

 

 

3.

 

오후가 되자, 쿄고쿠 키에코님이 찾아왔다. 아야노코지 키쿠요님은 그 후 사치코님이 울음을 그치게 한 뒤, 약 한시간 정도 공부를 봐주고는 기분좋게 돌아간 듯하다. 학교에서는 여왕님처럼 대접받는 사치코님이, 누군가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이란 유미에게는 정말 상상하기 힘들었다. 속과 겉, 공과 사,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의 입장에 맞춰 남들과 어울리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자, 어디 그럼. 키에코님에 관해서인데. 그녀는 사치코님을 자신의 별장 다과회에 초대하러 왔다고 한다. 키에코님의 어머님께서 몸이 안좋으시니 병문안 겸해서 놀러오시라고 전하러 온 것이다.
"그러네. 쿄고쿠 아주머님은 오랫동안 못뵈었으니까."
사치코님은 "어떻게 할까" 하며 좀처럼 결정하지 못했다. 가는 편이 좋겠지만, 그다지 마음이 내키질 않는 태도여서, 유미는 자만일지도 모르지만 자기에게 신경쓰느라 망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키쿠요님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리라. 그래서 유미는 등을 밀어주기로 했다.
"다녀오시는게 어떨까요?"
"유미, 넌?"
"독서감상문 책을 읽어야 하거든요. 여기서 집보고 있을게요."
사실 <마음>은 이미 다 읽었지만, 거짓말도 하나의 방편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언니가 기분좋게 외출할 수 있다면야 그리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 유미님도 오시는게 어때요?"
"낯선 사람이 찾아가서 방해했다가 키에코님의 어머님의 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되니까요."
"그래요? 아쉽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키에코님의 그 표정은 "사양하도록 해"라고 눈에 보이도록 말하고 있었다. 분명 기분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3시 티타임에 키요씨가 만든 파운드 케익을 후다닥 먹어치우고는, 사치코님은 쿄고쿠 가문의 별장으로 키에코님에게 끌려갔다. 배웅하고 현관으로 돌아오자, 키요씨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유미님, 잠깐만.."
"네."
이끄는대로 부엌에 들어가자, 키요씨는 주위를 경계하듯 두리번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딜 어떻게 찾아봐도 이 아담한 부엌에는 사람이 숨을만한 공간같은 건 없었다.
"쿄고쿠 아가씨 얘깁니다만."
"에?"
쿄고쿠 아가씨라면, 지금 막 사치코님과 나간 키에코님이다. 
"오시자마자 테라스를 지나쳐 곧장 부엌으로 들어오셔서는 저에게 꼬치꼬치 캐물으셨습니다."
"캐묻다니, 대체 뭘요?"
"유미님에 대해서요."
"저에 관해서-"
자신에 대해 여러가지로 뒷조사하고 기쁨을 느끼는 인간은 대체 이 세상에 어느 정도 있을까. 물론 유미는 그 얘길 듣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특히 상대는 자신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확실히 말해서 불쾌. 아니 그보다 오히려 뭔가 섬뜩하다.
"처음에는 유미님과 친해지려고 물어보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곧 집안이라든가 학교성적 등으로 이야기가 옮아가자, 저도 점점 두려워져서요."
"집안이라든가 성적..."
"물론 그와 같은 것은 모르니까 대답할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대답해버린 것도 있다고 키요씨는 고백하고는 머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좀더 주의깊게 처신했어야 했습니다."
들어보니 그건, 유미와 사치코님이 월요일에 여기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라든가, 3일간의 생활이라든가, 실없는 얘기들뿐. 대단한 정보는 아닌 듯 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알려져서 곤란한 일은 없으니까요."
"네. 물론 그 말씀대롭니다. 단지."
"단지?"
"이런 말씀드리기엔 뭣합니다만, 어제 오신 아가씨들은 혈통이나 가문같은 걸 상당히 중히 여기셔서요."
조금 걱정된다. 키요씨는 볼에 손을 대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 분들을 조심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말씀하셔도요. 대체 뭘 어떻게 조심해야 좋을지 유미는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4.

 

쿄고쿠 가문에서 돌아온 사치코님은 상당히 기분이 안좋아 보였다. 현관에 들어오자 객실과 테라스에는 얼굴도 안비추고 아무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객실 테이블에서 독서감상문을 쓰고 있던 유미는, 슬쩍 보인 사치코님의 불쾌한 옆모습에 무슨 일인가 하고 뒤를 쫓아갔다. 
"무슨 일 있었나요?"
"아무 일 없었어."
사치코님은 자기 방에 들어가자 쓰고 있던 모자를 침대 위에 내팽개쳤다. 
"가봤더니 어땠는 줄 알아? 키에코씨 형제랑 친척들이 쭉 모여서 가든파티하고 있더라."
"저기, 그럼 키에코님의 어머님은..."
"아주머님? 팔팔하셔. 환자가 대낮부터 샴페인 들이키고 바베큐 고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볼이 미어터지게 먹고 있던걸. 대체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된거냐고 저한테 물으셔도..."
오랜만이라서 그럴까, 참 매서운 히스테리였다. 사정을 모르는 만큼 막아낼 방법도 없으니 여기선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게 상책인가. 유미가 각오를 다질 무렵, 파도가 물러가듯 사치코님의 노여움이 순식간에 수습되었다. 
".... 미안. 유미를 탓할 일이 아닌데."
"아뇨."
이제 익숙하니까요. 아마 자기를 믿고 있기 때문에 안심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치코님은 집안 호랑이니까. 그걸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이 바로 동생이다.
"그만 돌아갈까, 도쿄로."
느닷없이 사치코님이 중얼거렸다.
"왜 그러세요?"
"별 일 아냐. 그냥 지긋지긋해졌을 뿐이야. 몇몇 인간들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치근덕거림에."
사치코님은 침대의 머리맡에 왼손을 뻗고는, 오른손으로 눈을 감쌌다.
"난 그저 유미와 둘이서 느긋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가만 내버려두질 않는거야."
혹시 울고 계신 걸지도 몰라.
"가끔씩 오가사와라라는 성(姓)이 무겁게 느껴져."
유미는 굳이 얼굴을 들여다 본다거나 하는 일없이, 묵묵히 사치코님의 말씀을 들었다. 
"부모님도, 할아버지도 좋아해. 남들 이상으로 수고와 비용을 들여 지금까지 키워주신 건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난 가끔씩 꿈을 꿔. 이 별장 정도의 크기의 집에서 가족 4명이 지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래서 어렸을 때는 회사 여름휴가에 맞춰 가족끼리 여기서 지내는 게 기뻤었어. ....뭘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누가 어디에 있어도 알 수 있는 정도의 크기가 마음이 편한거야. 아버님과 할아버님은 집안에서 가장 시원한 곳을 찾아 거기서 책을 읽고 계시고. 여기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다른 여자 곁으로 가는 일도 없이."
"그래서 여기를 좋아하시는군요."
끄덕. 사치코님의 머리가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는 편이 좋잖아요."
유미가 그렇게 말하자, 사치코님한테서 사라질 듯 작은 목소리가 쥐어짜듯이 나왔다.
"여기서는, 난 널 지킬 수가 없어...!"
"에?"
"쿄고쿠 댁에서, 네 이야기가 나왔어."
키요씨한테서 키에코님 얘기를 들었기에, 유미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있나 보다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얘기였는데요?"
"어처구니없게시리!"
다시 떠올리고는 분노가 치밀어오른 듯, 사치코님은 재차 흥분했다.
"리리안 백서도 그딴 시사한 기사는 싣지 않을거야."
나왔습니다. 리리안 백서.
하지만 이런 경우에 예로 등장하는 학교신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럼 얼마나 시시했는지 가르쳐 주세요."
자신도 판단하고 싶으니까. 내심 불안했지만, 애써 밝게 물어봤다. 키요씨한테도 말했지만, 알려져서 곤란할만한 일은 없으니까.
"쌀 얘기야. 이제 됐지. 네가 들을만한 가치도 없는 얘기니까."
쌀. 쌀이라. 으음. 과연.
그 에피소드라면 부풀리면 부풀릴수록 재밌는 얘기가 될 성도 싶다. 웃을테면 웃어라 같은 느낌. 하지만...
"죄송해요. 언니를 부끄럽게 해서."
"그렇지 않아. 널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모르겠니? 난 널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거야. 내 동생이 되자마자 괴로운 일을 겪게 하는게 가장 싫어."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질 못해 짜증내는 아이처럼 사치코님은 펼친 손바닥을 높이 치켜들고, 마루를 쾅 밟았다. 갈 곳없이 치켜든 양 손은 이윽고 단단한 주먹으로 바뀌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나하고 있으면 즐겁다고,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게끔 하고 싶은데도."
"즐거워요."
사치코님이 소리를 지르며 화내고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자신은 이토록 평온한 기분으로 언니를 바라볼 수 있는 걸까. 유미는 냉정한 자신을 신기하게 여겼다.
"거짓말."
"정말예요.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즐거운걸요."
사치코님의 굳은 주먹이 아주 조금 풀렸다.
"언니와 함께 있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란 걸 어째서 언니는 알아주지 않으세요?"
"유미..."
"그래서 전 언니가 돌아가고 싶다고 하시면 물론 함께 돌아갈테고, 머무르기로 결심하셨으면 마지막까지 함께 하겠어요."
유미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이윽고 사치코님도 굳은 표정을 부드럽게 풀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네 마음이 그렇다면, 예정대로 월요일까지 머물기로 하자."
난 사실은 도망치는 게 가장 싫어. 덧붙여진 말을 듣고서 유미는 사치코님은 역시 그래야죠 하고 생각했다.

 

*　　　*　　　*

 

금요일 오전중에 사이온지 유카리님한테서 파티 초대장이 왔다. 내일 즉 토요일 저녁부터 사이온지 별장에서 파티를 여니까 와주세요 같은 내용으로, 사치코님과 유미앞으로 2통이 와 있었다. 어제는 아야노코지님에 이어 쿄고쿠님, 그리고 내일은 사이온지님, 이렇게 되면 역시 또 한 번 파란이 일듯한 예감이 든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할 것도 말 것도 없어. 갈 필요없으니까."
피낭셰(Financiers)를 입으로 옮기면서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소녀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안가는 편이 좋을거라 생각... 하지만"
폭신폭신한 솜사탕같은 웨이브 머리를 한 서양인형 느낌의 소녀도 중얼거렸다.
"어쩐지 유치하네요. 초등학교 이지메같은 짓이나 하고."
그렇게 말한 건 서양인형 옆의 일본인형. 하지만 그녀 이외의 사람은 그다지 그런 일을 하거나 당한 경험이 없는지 그 비유가 올바른가에 대한 판단없이 그냥 "으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얼핏 보면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베리쇼트헤어의 소녀가 아무 말없이 밀크티를 홀짝거렸다.

토요일 점심 지나서.

여긴 익숙한 장미의 저택 2층... 이 아니다. 틀림없이 오가사와라 가문 별장이다. 객실을 점거하고 다과회를 열고 있는 멤버들은 유미, 레이님, 요시노양, 시마코양 그리고 노리코짱. '그저 장소만 바뀐 산백합회 회의'란 느낌이긴 하지만, 이건 어웨이 경기의 유미가 불안감을 못이겨 꾼 꿈같은 게 아니다. 정말로 현실인 것이다.
황장미자매와 백장미자매가 같은 날에 별장을 찾아와 준 것은 완전히 우연인 것만은 아니었다. 수요일 아침에 보낸 유미의 엽서는 목요일 낮에는 무사히 도쿄 시마즈댁, 토도댁에 배달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상의한 끝에 날짜를 정해 별장방문이 현실화된 것이다. 요시노양과 레이님의 후지산 등반이 금, 토요일 일정이라 겸사겸사해서 쉬어가는 의미도 있었다.
"생각해봐. 유미양이 저렇게 얌전한 문장을 써서 보내다니 따분하다던가 풀이 죽어 있다던가, 둘 중 하나 아니겠어? 그래서 시마코양한테 전화해서 걱정되니까 상태를 보러 가자고 한거야." 라는 요시노양의 얘기.
"자세하게 주소가 적혀 있는 건, 어쩌면 와 주었으면 하는 사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미안해, 지레짐작이었던 것 같아. 주소를 적은 건 사치코님이셨다며?"
시마코양은 약간 멋적은 듯 고개를 움츠렸다.
"그럼 로사 키넨시스께서 오길 바라셨는지도 모르죠..."
노리코짱이 나직이 말했다.
"사치코님이..?"
유미는 중얼거렸다. 사치코님이 요시노양과 시마코양에게 이 장소를 알려준 이유가 마음 속 어디선가 와줬으면 하고 바랬기 때문이라니, 정말 그럴까?
"하지만 어째서?"
"유미님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계실테죠?"
"그런가. 역시 그렇구나..."
날 위해서. 제3자인 노리코짱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마 그럴테지.
"그래서 사치코는 뭐라고 그래. 파티에 간대?"
레이님이 물으셨다.
"뭐라고도... 답장할 필요는 없다고 하시니까, 그 때까지 어떻게 할건지는 모르겠어요. 사치코님, 망설이시는 것 같아서."
유미는 대답했다. 사치코님은, 마츠다이라 가문의 별장에 가셔서 지금 이곳에 안계셨다. 유미를 남겨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망설였지만, 사치코님의 돌아가신 할머님의 주치의셨던 토오코짱의 할아버님이 머물고 계신데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라 외출하신 것이다.

"망설이고 있단 말이지. 과연. 알겠어."
"뭘 알겠단 말야?"
레이님의 말을 듣고, 요시노양이 물었다.
"사치코는 지금 동요하고 있어. 그녀의 경우, 걸어온 싸움은 기본적으로 마다하지 않지만. 적을 알고 있을 때에 한해서란 조건이 붙으니까"
"질 싸움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야?"
"그게 아냐. 질거란 걸 알면서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을 때는 맞서는 게 사치코야. 어떤 식으로 질 것인가, 그 때 자신이 받을 데미지는 어느 정도인가. 확실히 계산해서 말야."
레이님은 시마코양을 사이에 둔 사토 세이님과의 일, 그리고 신데렐라 역을 걸고 전 장미님들과 내기를 한 일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분명 지금까지 승산이 있나없나 관계없이 사치코님은 싸워온 것이다.
"단지 싸워야할 상대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전혀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굉장히 겁장이가 되는거야. 아마 자신이 상처입는 걸 필요이상으로 두려워해서 그럴테지."
과연 오랫동안 어울린 사이. 레이님은 사치코님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쩐지 알 것 같아요."
유미도 끄덕였다. 도망치는 건 싫다고 호언하는 사치코님이, 옛날 좋아했던 카시와기씨를 피해서 도망쳤던 일이 있다. 그건 아마도 카시와기씨와 만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려서, 무서워서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
"유미짱하고의 싸움도 그런 경우야. 제대로 서로 대화를 나눴다면 오해할 일도 없었을텐데도,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두려워서 틀어박힌거지."
"그 앞?"
시마코양이 묻자, 레이님은 딱 잘라 말했다.
"유미짱이 로사리오를 돌려주는 것."
모두 조용해졌다. 아마 로사리오를 주고 받았던 사람이라면, 그게 실제 중량보다 훨씬 더 무겁다는 걸 잘 알고 있을테다. 한번 파국이 났다 복귀한 황장미자매의 경우도 결코 함부로 다뤘던 것이 아니었다. 로사리오에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마 자기 혼자라면 갈거야. 화난 사치코는 가차없는데다, 계산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정확하게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 일격을 먹이고 돌아올테지."
"하지만 이번에는 유미님도 함께예요."
노리코짱이 말했다.
"바로 그거야.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 거지. 상대가 유미짱을 노릴지도 몰라. 지금의 사치코에게는 자기보다도 유미짱이 공격받는 쪽이 더 고통스러울테니까."
예전같으면 유미도 "설마"라고 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틀정도 사치코님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자니, 어째선가 "그럴지도 몰라"라며 납득하고 만다. 사치코님은 새끼를 지키는 어미새처럼 신경질적이 되어 있었다.
"유미양은 어떻게 하고 싶어?"
요시노양이 묻는다.
"난.."
유미는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 어쩌면 좋을까... 아니 그보다,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정답이 아닌 것같은 기분이 들어."
"정답이 아냐..?"
"사이온지님의 파티에 가면, 분명 뭔가 불쾌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안가면 결말이 나질 않는다고 할까. 도망친 대가가 언젠가 몇배가 되어 되돌아올 것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튼 어느 쪽이건간에 사치코님이 정하신대로 따를 생각이지만."
"그럼 갈지도 모른단 얘기네?"
"응"
끄덕이자 요시노양은 어이없다는 듯 입버릇인 "바보"를 날려줬다.
"바보구나 유미양. 스스로 어기적어기적 함정에 걸려들려 갈 필요없잖아. 딴소리말고 돌아가자. 우리들이랑 같이 저녁 신간선으로말야. 돌아가버린 사람은 파티에 갈 수 없으니까. 그 사이온지인지 뭔지하는 아가씨도 쫓아와서까지 추근대진 않을거야."
"우리들은 쾌속열차로 돌아갈텐데, 그 편이 좋다면 환영할게."
시마코양도 권유해 주었다. 하지만 유미는 이번에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고마워. 하지만 안돌아갈거야. 돌아갈 때는 언니와 함께라고 마음먹었으니까."
"유미양... "
그 때, 사치코님이 토오코짱의 별장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산백합회 멤버의 얼굴을 본 첫 마디가.
"와줬구나. 기뻐."-였다.
"평안하세요. 엽서에 쓰여진 이 곳 하우스 넘버를 보고 뻔뻔스럽게 찾아왔어요."
요시노양이 밝게 인사했다.
"이 근방은 타지사람들에게는 마치 미궁같은데요. 번호를 몰랐다면 여기 못왔을거예요."
시마코양이 그렇게 말하자, 사치코님은 자랑스러운 듯 대답했다.
"그렇지? 그래서 함부로 알려주지 않아. 하우스 넘버를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금고 암호숫자같애."
노리코짱이 진지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사치코 비밀기지군."
레이님이 웃었다
"맞아. 비밀기지."
사치코님은 정말 기뻐 보였다. 그래서 산백합회 멤버들을 이곳에 부른 건 역시 사치코님의 인력이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지산 등반은 어떻게 됐어?"
의자에 앉으면서 사치코님은 이야기를 재촉했다.
"어떻게는 무슨..."
레이님이 투덜댄다.
"새벽에 정상에 도착하려고 도중에 오두막에서 하룻밤, 아니 선잠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머물렀는데, 여럿이 뒤섞여 자는 바람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 꾹꾹 눌린 상태지. 요시노를 벽 옆에다 재워놓고선 가드했지만, 옆에 덩치 큰 아줌마가 있어서 코고는 소리 엄청나지, 이까지 갈지, 게다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선 몸부림까지. 진짜 고생했다."
"내광(來光)은?"
"확실히 빌고 왔지요."
요시노양은 V사인을 했다. 유미는 처음 알았지만, 후지산에서 보는 일출은 '내광(來光)'이라고 해서 신앙의 대상으로도 되어 있다고 한다. 리리안 여학원은 카톨릭 학교지만, 요시노양과 레이님은 그런 것쯤 그다지 신경안쓰는 성격이다.
"발이 신발에 쓸려 까져서 지독했다니까."
"까졌어?"
"산에서 내려와 곧장 온천에 들어갔더니 따가워서 혼났다."
다들 보이게끔 레이님이 발을 테이블보다 약간 높이 들어올렸다. 양말을 2켤레나 신었다고 하지만, 역시 익숙치않은 등산화와 산길이라 아무리 레이님이라도 발바닥이 여기저기 벌갰다. 그런데도.
"오른발도 마찬가지야." 라면서 요시노양은 천연덕스럽게 있다.
"요시노는 치사해. 도중에 말에 탔어."
"엣!"
"아, 레이짱. 말하지말라고 했잖아."
들통난 요시노양은 레이님의 어깨를 눌렀다. 하지만 레이님은 아직 한쪽발을 들고 있는 상태라 이런 큰일, 밸런스가 무너져 의자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제대로 낙법을 구사한 레이님은 살펴본 바로는 거의 무사. 아주 조금 다친 부위가 하필이면 까져서 피멍든 부분이었으니까, 결과만 놓고 볼 땐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알 수 없는 사고였다.
"시마코랑 노리코는?"
사치코님은 이번에는 백장미자매에게 물었다.
"요즘은 당일치기로 볼 수 있는 불상과 교회를 순회하고 있어요.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른 겁니다."
아마 별장에 오는 걸 염두에 두고 코스를 바꾼게 틀림없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왔습니다"라는 어감으로 말했다간 사치코님이 신경쓰실테니, 시마코양이 배려해 준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침 일찍 도쿄를 출발해서 유명한 교회와 석불관음상을 보고 왔다는 백장미 자매는 그 후 20분간 듬뿍 그것들이 얼마나 멋졌는가를 눈에 광채를 띠면서 설명했다.

 

 

6.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빨리 지나가는 법이다. 시계바늘이 4시를 가리키자, 손님들은 슬슬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자고 가도 괜찮은데."
사치코님은 이별이 섭섭한 듯 만류해봤지만, 4명 모두 집에 허락맡고 온 것도 아니었고, 돌아갈 전차표도 이미 준비해뒀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왕이면 사치코님도 함께 돌아가시죠?"
하얀 넘버플레이트 앞에서 요시노양이 살피듯 말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
하지만 사치코님은 웃기만 할 뿐, 집으로 돌아가서 짐꾸리려고는 물론 하지 않았다.
"그럼 학교에서."
"그래. 나중에 다시 만나."
사치코님이 좋아하는 숲속에서, 친구들은 커다랗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4명이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유미와 사치코님은 뒷모습을 배웅하고는, 다시금 조용해진 별장으로 돌아갔다.
"유미"
사치코님이 속삭였다. 어째선지 유미는 그것만으로 언니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았다.
"네."
"괜찮겠니?"
"물론이죠."
언니가 그렇게 정했다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없다. 유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사이온지님의 별장에, 같이 가겠어요." -라고.

 

        *

 

그런데.
이미 잊고만 것인가. 73과 안경의 존재를. 야마구치 마미와 타케시마 츠타코, 이 두 여사를. 
그 무렵, 두사람이 뭘 하고 있었는가 하니, 의외로 유미일행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단지, 본인들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당신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덜컹했으니까요."
언젠가 어딘가에서 비슷한 대화를 반복했던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두사람은, 가까운 듯하면서도 먼 이 지방에서의 재회를 일단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적송, 백송, 침나무. 키큰 나무들은 자연의 천막. 숲에 한발짝 내딛는 것만으로 마치 냉동창고처럼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마미양은 백장미자매를 쫓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츠타코가 물었다.
"그랬죠. 하지만"
마미는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도중에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거 참. 어쩌다가요?"
"이동할 때, 그녀들이 탄 버스를 놓쳤죠."
"하아-"
츠타코는 끄덕였다. 미행중 상대가 버스를 탈 때의 그 고생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얼굴이 알려져 있다면 같은 버스에 타는 건 위험하고, 그렇다고 안타면 미행할 수가 없다. 택시를 잡아서 뒤쫓는다는 대담한 스킬이 있긴 하지만, 고등학생 입장에선 무리다.
"정류장 표시를 보고 어느 절에 갈건지 예상이 가서, 다음 버스로 쫓을 생각이었습니다만."
마미는 머리를 푹 수그렸다.
"거기에 없었단 말이군요."
"그 말씀대롭니다. 부끄럽게도 말이죠."
서둘러 그 곳을 떠난 건지, 아니면 목적지 예상이 빗나간 건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후로 마미는 백장미자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는 츠타코양은요? 분명 황장미자매를 쫓아 후지산 등반의 모습을 필름에 담겠다고 의욕에 불탔었지요 아마."
수확은? 마미가 묻는다. 그러자 츠타코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게 말이죠" 라며 운을 뗐다.
"저도 산에 오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던지라, 하산 직후에 초점을 맞추고 기슭에서 잠복하고 있었죠. 두사람이 어디에서 올라가 어느 근방에서 선잠을 취할까, 그런 것까지 조사해서요."
"만전의 준비를 다하셨군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마무리가 허술했죠."
"그 말씀은?"
"왕로와 복로, 코스가 달랐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기다려도 하산하는 두사람의 모습은 나타나질 않았죠."
"그거 참 안됐군요."
"자신이 조사해서 갔으니까, 자업자득인거죠."
츠타코는 "하하하"하고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거기에 뒤따라 마미도 "하하하"하고 웃었다. 두 사람은 한바탕 웃은 뒤, 거의 동시에 상대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후지산 기슭과 교외의 절. 각각의 장소에서 타겟을 놓친 두사람이 지금 왜 이렇게 같은 숲속에 서 있는가. 이 또한 참으로 기묘한 얘기다. 
"- 서로 생각하는 건 같단 얘기군요."
"결국 우리들 두사람 다 홍장미자매를 포기하지 못했단 말이지요."
기왕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오가사와라 가문 소유별장이 있는 피서지에도 발을 뻗어보자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운이 좋다면, 홍장미자매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그만 기대에 희망을 걸었다. 스타트지점은 달랐지만, 수정후 최종목적지는 같아진 두 사람은, 그때부터 힘을 모아 홍장미자매가 머물고 있을 별장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

"이상하군요. 이 주변에는 우리들이 상상하고 있던 저택은 없는 듯합니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만전의 세큐리티 시스템이 도입된 그런 저택. 찾고 있는 것은 잠자는 공주의 성이 아니라, 쉽게 침입할 수 없는 가시나무 저택.
"천하의 오가사와라 그룹 회장의 별장. 현지에 도착만 한다면, 간단하게 찾을거라 생각했습니다만."
"하다못해 이 네임플레이트에 적힌 수수께끼의 번호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마미는 하얀 플레이트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건 어떤 별장에도 반드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익숙해진 표식이었다. 번호만 있고 이름은 써있질 않거나 혹은 긁혀서 보이지않거나, 그런 경우가 흔했다.
"SAWA가 뭘까요? 그냥 사와(?)씨..? 아니면 사와다(?田)? 사와무라(?村)? 나카자와(中?)나 시오자와(??)일 가능성도 있고"
"뒤에 사와가 붙는 경우 SAWA가 아니라 ZAWA로 탁음화되지 않나요?"
"아아, 그런 케이스도 많죠."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그 장소를 떠나고 말았으니, 선입견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러고보니 오는 도중에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저택이 한 채 있었습니다. 이 주변에서는 잘 안보이는군요."
나무들한테 양보하고 있는건지, 울타리도 낮고, 굳이 말하자면 아담한 건물이 많았다. 
"거기가 바로 사치코님 별장일까요?."
"확실히 플레이트에는 로마자로 KYOGOKU라고."
"KYOGOKU는 오가사와라가 아닌데요."
"아니죠."
두사람은 "흐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태로는 날이 저물 때까지 찾아도 홍장미자매가 있는 별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일일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오가사와라씨 별장인가요?" 라며 묻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슬슬 타임리미트군요."
츠타코가 손목시계를 봤다.
"네. 아쉽지만요."
마미도 끄덕였다.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두 사람은 틀림없는 고등학교 2학년. 통금시간도 있는데다, 무단외박따위 꿈도 못꾼다. 아쉬운 심정으로 역을 향해 걷기 시작한 두 사람은, 거기서 환상을 보았다.
"저기에 보이는 건... 황장미자매."
"설마요."
"아뇨. 보세요."
"아, 진짜다. 백장미자매의 모습도."
느닷없이 두 명작동화가 두사람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성냥파는 소녀'가 언 손으로 켠 성냥불 속에 떠오른 행복한 광경. '플란다스의 개'의 네로가 마지막에 볼 수 있었던 루벤스의 그림. 우연히도 둘 다 한겨울을 무대로 한 슬픈 이야기.
"혹시 지금 겨울이고, 동사직전의 우리들은 눈 속에서 떨면서 행복한 여름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해야 할 신문기자인 마미지만, 비현실적인 일을 모두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런 중얼거림을 통해 알 수 있다.
"꿈이라면 꿈이라서 좋죠. 꿈 속에서 셔터를 누르기만 할 뿐입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좋은 사진만 찍을 수 있다면야 그걸로 좋다고 하는, 카메라광 츠타코가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꿈이라 해도, 쫓아가서 손해볼 건 없겠지. 이왕이면 대담하게 돌격인터뷰라도 해볼까."
마미도 뒤늦게 쫓아갔다. 그 모습에서 '리리안 백서' 신학기 특대호의 여름방학특집으로 대대적으로 채택하자는 꿍꿍이 속이 벌써부터 엿보인다. 그럼 어디, 취재가 잘 되려나. 여기가 실력을 보일 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