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12권 어린 양들의 휴가 -2- 배추흰나비의 꿈

-배추흰나비의 꿈은(紋白蝶のみる夢は)-

 

 

1.

 

가령 소풍가기 전날이라든가 시험공부를 위해 밤샘을 하고난 후처럼, 내일을 위해 빨리 잠들어서 조금이라도 수면을 더 취해야 할 때에 꼭 잠이 안오는 건 왜일까. 자야돼, 자야돼. 그런 강박관념이 눈을 더욱 초롱초롱하게 만든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자야돼"라고 생각하면 안돼', 라고 암시를 건다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빠져나올래야 나올수 없는 불면의 바닥없는 늪. 푸욱-푸욱-. 그렇게 되면 더이상 어떻게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건 수업중일때처럼 절대로 잠들면 안될 경우에는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킨다. "잠들면 안돼" "잠들면 안돼". 그렇게 명령하면 뇌는 어째선지 잠들려고 잠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시험삼아 거꾸로 명령해 보았다. "빨리 잠들면 안돼, 잠들면 안돼". 하지만 머리 한쪽구석에서는 "내일을 위해 자야돼"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그 정도로 잠들 리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유미가 그 날 꿈나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침대에 누운지 약 2시간 후. 자명종이 울릴 때까지 앞으로 3시간을 남겨두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유미는 찡그린 얼굴로 계단을 내려왔다. 완벽하게 이른 아침. 눈꺼풀이 생각대로 열리질 않는다. 그럴 수밖에. 아직 아침 5시니까.
"잘잤니. 유미.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구나."
부엌에서 주먹밥을 만들던 엄마가 싱글벙글 돌아봤다.
"밥은? 먹을 수 있겠어?"
"으음."
어떻게 할까. 자기 위장에 물어본다. 평소라면 아침부터 든든히 먹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오늘만큼은 소화기관도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다.
"그럼 요구르트라도 먹도록 해. 공복이면 차에서 멀미나기 쉬우니까."
"그럴게."
유미는 냉장고를 열고, 시리얼과 요구르트, 딸기잼을 꺼냈다. 좍좍좍, 질척질척, 추욱. 카페오레잔 속에 마구 섞고 있는 동안에 겨우 눈꺼풀도 가벼워졌다. 식탁 위에는 이미 매실장아찌가 들어간 주먹밥이 완성되어, 랩에 싸인 채 보기좋게 나열되어 있었다. 
"도시락 만들었으니까 차안에서 먹도록 해. 역에서 파는 도시락도 나쁘진 않지만, 왠지 분위기 안 나니까. 소풍갈 때는 엄마가 만든 주먹밥이 제격인걸."
엄마는 플라스틱 바구니 뚜껑을 열고 어떠냐는듯이 보여준다. 안에는 허브를 발라올린 흰살 생선튀김, 그리고 아스파라거스랑 치즈를 베이컨으로 감아 구운 것과 방울토마토구이.
"굉장해."
유미는 시리얼을 섞은 요구르트를 먹으면서 외쳤다. 모두가 엄마가 만든 소풍용 도시락의 정석메뉴다. 의욕에 넘쳐 아침 일찍 일어나 만드신 듯하다.
"2인분 담아둘테니까. 사치코님과 같이 먹으렴."
"고마워요. 맛있을 것 같애."
칭찬받은 엄마는 기분좋은 듯 방울토마토 꼭지에 관한 지식 등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신이 나서 주먹밥의 김을 마는 타이밍에 얘기가 다다랐을 때, 잠에서 덜 깬 눈을 한 아빠가 머리를 긁적이며 주방에 들어왔다. 
"오, 소풍인가."
아빠는 남은 도시락 반찬이 담긴 접시에서 방울토마토를 몰래 집어 입 안에 넣었다.
"그래요."
"아아, 유미짱이 오가사와라 댁 별장에 놀러간다고 한 날이 오늘이었나. 그래 몇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5시 50분에 M역 개찰구요. 아빠, 역까지 태워주신다고 하셨죠?"
"오, 그랬지 참."
우-. 아빠는 손뼉을 한번 치더니, 열쇠함에 손을 뻗어 차 키를 꺼내 꽉 쥐고선, 현관을 향한다. 우우-. 이대로 그냥 나갈 듯한 기세다. 하다못해 저 파자마랑 수염, 자다 일어난 듯한 머리, 그리고 눈곱을 어떻게든 해야 해. 유미는 아빠 등을 떠밀며 일단 세면장으로 끌고 갔다. 그러자.
"아빠는 유미한테 약하다니까. 나같았으면 걸어가라고 하셨을 거면서."
아래가 시끄러워서 잠을 깼는지, 어느새 2층에서 내려온 유키가 세면장 앞 복도에 서있었다.
"안녕."
"안녕."
자다 구겨진 파자마를 입고 있는 유키는 정말 아빠랑 꼭 닮았다. 잠버릇까지 똑같다니, 질려서 더이상 뭐라고 할말이 없다.
"유미짱은 여자애니까."
아빠는 치솔에 튜브치약을 바르며 말했다.
"게다가 요렇게 귀엽잖아. 인적없는 길을 혼자 걷게 했다가 나쁜 남자한테 끌려가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니까."
"아버지란 감사히 여겨야 한다니까."
유키가 웃었다.
확실히 그래. 자길 닮은 딸을 가리켜 염치도 없이 "귀엽다"라고 말하다니 대단하다. 보답으로 한번 껴안아 줄까도 생각했지만, 아빠가 한창 양치질중이셔서 참았다. 세면장이 치약거품 투성이가 되는 건 좀...
"그헌 허헤셔 유히은 남샤니하 커셩앙해시."
갑자기 아빠가 의미불명의 언어로 말했다.
"에?"
그헌 허헤셔.. 뭐라고요? 다시 물으려니까 유키가 재빨리 통역해줬다.
"그런 점에서 유키는 남자니까 걱정안되지, 래."
"핫."
그 말에 반응한 유미는 무심코 인간번역기를 쳐다봤다.
"....어이."
유미가 생각하고 있는 걸 눈치챈 유키도 떫떠름한 표정으로 누나를 마구 견제해 온다. 쓸데없는 말 하지마, 라고.

물론.
아빠. 당신의 아들은 남자애지만, 귀여워서 나쁜 남자가 노리고 있어요.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못한다. 후쿠자와 남매는 마주보던 눈을 서로 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 아침준비를 시작했다. 아무튼 지금 들은 말은 아빠의 전기면도기를 씻어낸 물과 함께 세면대 배수관으로 흘러보내는 편이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2.

 

"오, 쫙 빼입었는데."
샌달을 신고 현관을 나서자, 신문을 가지러 밖에 나갔던 유키가 누나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웃었다.
"그럼 안돼?"
유미는 입술을 약간 뾰족이 내밀며 동생을 째려보았다. 물론이지 하며 미소로 가볍게 받아치지 못하는 것이 17세 소녀의 유치함인 것이다.
"아니, 잘 어울려. 나들이옷."
"나들이옷이라고 하지마."
어울린다니, 칭찬이라면 칭찬이겠지만 썩 유쾌하진 않다. 유미는 주먹진 왼손을, 신문들고 돌아오는 동생의 머리를 향해 날렸다.
"근데말야 평소에는 별로 안입었잖아. 원피스같은 건."
유키는 웃으면서 팔을 들어 대충 머리를 가드하고는 내뺀다.
"교복은 원피스야."
"이런 경우에 교복은 같은 레벨로 안쳐주는 법이야."
"뭐 그렇긴 하지만."
유미는 얌전히 주먹을 내렸다.
실제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새로 산 지 얼마 안되는 새하얀 프랑스풍 슬립 원피스를 거북해하고 있다는 걸.익숙치 않아서 그런걸까. 평소의 자신과 다른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자른 다음 날 느끼는 감정과 조금 닮았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인데도 익숙치않은 얼굴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하는 마음에 불안해진다. 어울린다는 소릴 들어도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그만 과격하게 반응하고 마는 것이다. 우연히 그 자리에 있다가 민감한 옷 화제를 꺼낸 유키는, 딱하지만 이 누나의 엉뚱한 화풀이 비슷한 쁘티 히스테리를 그저 불행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 원피스말야."
유키는 팔장을 끼며 중얼거렸다. 질리지도 않고 아직 할말이 남아있나 생각했지만 신경이 쓰여서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배추흰나비같아."
칭찬도 비방도 아니다. 그저 감상일뿐. 유미는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배추흰나비.
하얀 나비같은 원피스.
레이스도 무늬도 달려있지 않은, 뒤에 달린 리본이 포인트인 심플한 디자인. 어떤 장식도 없는 만큼, 아주 고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물론 함께 지낼 언니가 부끄러워하지 않게끔 의식하고 고르긴 했지만, 입고 있는 사람이 옷에 죽어버리지는 않을까, 나 같은 사람이 입어도 정말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나비같은 원피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퍽이나 가벼워졌다. 
둥실둥실 팔랑팔랑.
양배추밭에서 볼 수 있는 배추흰나비라면, 화려한 호랑나비보다 훨씬 더 자신에게 잘 어울려 보이니까.
하지만 이 잘난 유키에게 순순히 고마움을 표시하기는 싫다. 이해해 주길 바래. 단 한마디 말에 곧장 기분이 풀린 것처럼 보이는 건 왠지 분하니까.
"배추같은 거 안달려있다 뭐."
"그거 개그야?"
"어랏."
유미는 그만 웃고 말았다. 유키도 웃었다. 별 재미없는 시시한 개그인데도 한번 웃기시작하니까 어쩐지 멈출 수가 없어서 한동안 두사람은 계속 웃었다.
"자, 유미짱. 도시락."
현관에서 나온 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온케이스를 주셨다. 때마침 아빠가 주차고에서 차를 꺼내 문앞에 대어 놓았다.

5시 30분.
아침 이른 시각이니까 도로는 한산할 것이다. 15분이면 여유있게 M역에 도착하겠지. 약속장소는 개찰구. OK. 시간은 충분하다.
전차 냉방에 어깨가 차가워지지 않도록, 연록색의 가디건을 걸쳤다. 아참, 모자. 그리고 저금통을 털어 올여름에 산 하얀 양산도 꼭 챙겨놔야지.
"잊은 것 없니?"
"응."
유미는 여행가방을 들었다. 엄마가 젊었을 때 쓰셨던 등제 사각바구니. 
"손수건, 티슈, 그리고 지갑은 챙겼어?"
"챙겼다니까. 걱정도 많아."
유미는 허리를 쑥 내밀고는, 핸드백같은 작은 숄더백을 "봐요"라면서 엄마에게 보여줬다. 그 안에는 자잘한 것들이 전부 들어가 있었다. 
"정말로 짐꾸리다 잊고 깜박한게 없는거지?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곧장 택배로 보내줄테니까."
"네~에."
주의사항을 늘어놓으면서, 유미 뒤를 따라온다. 몇살이 되든, 엄마는 자식들의 자잘한 것까지 챙기려 하시는 것 같다.
"승차권은 사치코님이 준비하신댔지? 잊지말고 표값은 제대로 드려야한다. 가급적 빨리."
"네~네~."
여러 개의 짐을 들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운전석에 계신 아빠가 웃으며 뒤돌아 보셨다.
"M역까지 부탁합니다."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문을 닫자, 유키가 차로 다가오길래 창을 내렸다.
"무슨 일이야?"
유미가 윙하며 창을 내리자, 유키는 자기 볼에 집게손가락을 갖다대며 말했다.
"릴랙스, 릴랙스. 기껏해야 별장이잖아?"
그렇게 딱딱해 보였을까. 유미가 동생을 흉내내 볼을 잡아당겨보니, 과연 어느샌가 얼굴근육이 굳어 있었다.
"전쟁터 가는 것도 아니니까. 짧은 바캉스, 즐겁게 지내라."
"....고마워."
유키가 차에서 떨어지자, 아빠가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상당히 믿음직스런 동생분이시군요."
"정말이야. 질 것 같다니까."
이미 한참 옛날부터 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뒤돌아보니 집앞에는 엄마와 유키가 아직 있었고, 꽤 작아져 보이는데도 아직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릴랙스, 릴랙스)
유미는 아주 쪼끔, 동생을 흉내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긴장할 것 없어.
기껏해야 별장이잖아, 라고.
그 곳에서 언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는거야, 라고.

 

 

3.

 

M역 개찰구에는 5분전에 도착했다. 사치코님은 커녕 젊은 여성의 모습조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지만, 2분정도 기다리니까 북쪽 입구 방향에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크림색 여름스웨터와 그에 맞춘 가디건, 그리고 청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미인이 날렵하게 걸어오다가 유미를 발견하고선 가볍게 손을 들었다. 평소 인상이랑 너무 달라서인지 처음에는 못알아보고 있었지만,
"유미."
들려오는 목소리가 같다. 서서히 다가오는 얼굴이 같다.
"에, 에엑"
그건 틀림없이, 오가사와라 사치코님이었던 것이다.
"도도도"
혼란스러운 유미는 약속된 패턴처럼 공사현장에서 도로에 구멍파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오가사와라 가문의 아가씨께서 피서지에 외출한다고 하시니까 틀림없이 원피스 아니면 프레어 스커트를 입고 올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을 부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맞출 생각으로 원피스를 고른건데. 하필이면 청바지인가. 이건 이미지상 평소의 유미 스타일 쪽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도도도"의 "도"는 "어째서(도우시테,どうして)"의 "도"다.

"안녕(おはよう)."
사치코님은 평소처럼 유미의 가슴 언저리에 손을 뻗었다가, 거기에 타이가 없다는 걸 깨닫고선 옷깃도 없고 흐트러지지도 않은 네크라인을 살짝 어루만지며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평소의 "평안하세요"가 아닌 건, 학교가 아니라서 그런걸까. 아니면 지금이 정말 이른 아침시간이라서 그런걸까. 하지만 그 자그마한 위화감이 싫지 않았다.
"귀여운 원피스네. 잘 어울려."
예의상 한 말이든 아니든, 언니의 칭찬은 기쁜 법이다. 유미는 흐물흐물해지는 걸 버티며, 미소로 답했다.
"언니야말로 새 청바지 잘 어울리세요."
아무렇지 않게 입고 있지만, 이게 또 비싸보이는 청바지였다. TV에서 본 빈테지물 특집에서 진열되어 있던 물건이랑 아주 비슷해 보였다. 저건 확실히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고가인, 그래, 커다란 냉장고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어.
"아, 응. 발렌타인 데이트 때 유미가 골라준 걸 가끔씩 집에서 입고 있었더니, 할아버님께서 사주셨어."
오가사와라 그룹 회장이 직접 사다구해준 상품. -그렇다면 틀림없이 진짜겠지. 그걸 거침없이 자기 사이즈에 맞춰 바지단을 잘라낸 것이다. 어째 점점 금전감각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럼 갈까?"
그렇게 말하는가 싶더니만, 사치코님은 빙글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에?"
유미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갈까, 라뇨. 개찰구는 여긴데요.
하지만 사치코님은 점점 북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대로 가다간 역 북쪽입구로 나가 버리게 된다. 하지만 전차를 타려면, 개찰구로 들어가 플랫홈에서 전차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는데.
아무튼 뒤를 쫓아가다가, 유미는 퍼뜩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언니는 빈손이었어.
설마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북쪽 입구의 로터리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주차시켜둔 한 대의 검은 차가 유미의 눈에 들어왔다. 그건 틀림없이 오가사와라 가문의 자가용이었다. 단지 자가용이라고는 해도, 운전하는 것은 오가사와라 가문 사람이 아닌, 고용된 운전수지만.
"뭘 놀래고 있어. 차로 간다고 말했잖아?"
예상치 못한 현실에 머리 회전이 따라가지 못하게 된 유미를 돌아보며 사치코님이 말씀하셨다.
"아뇨. 못들었는... 데요."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사치코님이 너무나 자신만만한 바람에 유미는 약간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확실히 난 말했어."
"하지만..."
못들은 건 못들은거라구요. 언니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들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했어."
"못들었어요."
둘 다 양보없다.
그렇다면 어느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건 경솔한 판단이리라. 누구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니까.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한 번 이런 경우가 있었다. 보물찾기 이벤트때, 카드를 묻기 위해 파낸 구멍의 깊이를 둘러싸고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분명히 츠타코양이 끼어들어서, 수수께끼를 남기긴 했지만 어쨌든 원만하게 수습했었다.
지금 이곳에는 아쉽지만 중재해줄 친구는 안보인다.

(안보이지-)

주위를 죽 둘러보다 검은 차 운전석에 대기하고 있던 운전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쳐서 유미는 부랴부랴 인사했다. 저 운전수 아저씨한테 오해의 실을 풀어달라고도 못할테지. 여기선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해.
"예약승차권을 사올까요, 라고 제가 언니께 물었던 걸 기억하세요?"
"응, 물론이지."
사치코님은 끄덕였다.
"우리 집 사람이 갈테니까 그 건은 맡겨줘, 라고 내가 대답했고."
"네."
결국 두 사람은 복습을 시작했다.
"그랬더니 유미는 뭐라고 했었지?"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라고요."
"그럼 너도 알고 있었단 말이네?"
"엣?"
어째서요, 라며 유미는 눈을 깜빡거렸다.
"제가 부탁드린 건 승차권 구입 문제였는데요."
"에?"
거기서 두 사람은 팟 깨달았다. 설마-.
"'그 권(券)'과 '그 건(件)'?" ※둘 다 발음이 같음(켄, けん). 
"거짓말?!"
"그런 바보같은 일이."
믿을 수 없다. 그런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져있었다니.
"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그 건 = 차로 간다'가 되는 건가요?"
가령 "그 권"이 "그 건"였다고 해도, 교통수단은 맡겨줘, 라고 한다면 자동차인지 버스인지 순행열차인지 신간선인지 비행기(는 아무래도 좀 무린가)인지 알 수 없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난 확실히 차車라고 말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는지, 사치코님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차말인가요?"
"응. 차."
"...차, 차."
정말 이렇게 퍼즐 비스무리하게 나간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고 두 사람은 일치단결하고 있었다.
"차, 차."
유미는 "그 권券(건件)"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차"라는 단어만을 검색해봤다. 그랬더니
"아."
"뭔데?"
사치코님이 눈을 빛내며 물으셨다.
"저기, 확실히 그 때, 언니는 몇시에 집에서 나오면 될지 생각하고 계셔서..."
유미는 생각나는 것을 천천히 말로 바꾸어 갔다.
"응. 이른 아침의 이동시간은 잘 모르니까."
"결국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할지도 몰라, 라고 말씀하신 후에."
"후에?"
"'일찍 도착하면 올 때까지 적당히 시간보내고 있을테니까 괜찮아' 같은 말씀을"
"했지."
그러니까 뭐가 문제냐며 사치코님은 멍하니 바라보셨다.
"개찰구에서 널 기다리게 하느니, 내가 조금 일찍 도착하는 편이 나을거라고 했어. 차에 냉방이 들어오니까 그 안에서 기다리면 되.... 아!"
사치코님도 겨우 짐작이 가셨나 보다.
이번에는 "올 때까지(쿠루마데, 末るまで)"와 "차에서(쿠루마데, 車で)"였다. 거짓말처럼 믿기 힘든 착각. 그게 연속으로 일어나니, 각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참 대단한 우연이다.

"후"
"후후후"
샘이 솟아나듯, 보그르르 웃음이 넘쳐오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아가씨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운전수 아저씨가 차에서 나와 말했다. 아무래도 신경써주느라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준 듯하다. 걸어오던 두 사람이 가벼운 말다툼을 하고 있으니까, 나올래야 나올 수 없었는데, 웃음소리가 들려오니 일단락되었나 보다 하고 추측한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후쿠자와님. 짐을 이리 주십시오."
"하"
"이제 알겠지. 유미. 별장에는 이 차로 갈거란 걸."
"에 그러니까.."
"난 매년 차로 갔어."
유미는 사치코님의 피서에 얹혀가는 몸이라,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게다가 머무는 동안은 언니의 행동패턴에 따르는 것이 은밀한 목표이기도 했다.
".....네."
끄덕이며 유미는 운전수 아저씨에게 짐을 맡겼다. 엄마한테 받은 교통비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 틈에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양산이 없어.
숄더백이나 가디건, 모자는 몸에 지니고 있다. 도시락이 든 보온케이스도 확실히 손에 들고있고. 바구니는 방금 맡겼으니 차 트렁크 속에 있을테다. 하지만 하얀 양산만이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왜 그러니? 어서 타."
먼저 뒷자석에 앉은 사치코님이 문을 조금 열며 말했다.
"아, 네!"
유미는 당황하며 차에 올라탔다. 언니의 명령은 동생의 태엽을 감는 기능이 있다. 유미한테만 해당하는 사항일지도 모르지만.
"무슨 일 있어?"
사치코님이 물으셨다.
"아뇨. 아무 것도 아녜요."
유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양산이 없어요"라고 말했다간 사치코님은 출발을 늦춰서라도 찾으러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맙지만, 그건 곤란하다.
언니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다, 모처럼의 외출인데 시작부터 자기때문에 얽혀버리는 건 싫었다.
"운전수 아저씨, 렛츠 고-!"
너무 오버했나, 라고 생각했지만, 활기를 불어넣으려고 신나게 주먹을 위로 쳐들었다.
역주변에 사람들의 모습이 여기 막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은 늘어난 듯하다.
아침 6시. 유미가 평소에 학교에 갈 때 타는 노선의 버스에서 30명정도의 사람들이 역을 향해 내리자, 거의 빈 차 되다시피 해서 출발하고 있다. 그 뒤를 쫓듯, 검은 차가 M역 북쪽입구 로터리를 출발했다.

양산은, 괜찮을거야.
아마, 깜박하고 우리 차 안에 두고 왔을테니까. 
걱정안해도 돼. 편의점에서 우산을 잃어버렸을 때에 비하면, 몇백배도 몇천배도 안전한 장소에 있어. 하지만...

언니와 함께 하얀 양산을 쓰고서 피서지를 거닐겠다는 유미의 꿈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4.

 

"유미"
차가 큰 길로 나오자마자, 사치코님이 말했다.
"너, 차에 강한 편이니?"
"차에 강하다고 하시면.. 그건 저기, 차멀미 잘하는지 아닌지를 묻고 계신건가요?"
유미는 다시 물었다. 아까 일도 있었으니까, 잘못듣는 일이 없도록 신중해진다.
"달리 뭐가 있겠니?"
"아뇨. 혹시 차종을 많이 알고 있는지 묻고 계신 건 아닐까 하고.."
"바보구나."
사치코님은 조그맣게 웃었다.
"저기, 그래서요?"
"괜찮다면 이걸 먹어."
꺼내준 건 아주 얇은 종이로 된 작은 상자. 열어보니 핑크색 알약이 줄지어 있었다.
"이건.. 멀미약인가요?"
이야기 흐름상, 그게 자연스럽다.
"그래. 난 집에서 먹고 왔으니까."
"그러셨군요."
예쁘게 정렬된 알약팩이지만, 사용한 듯 알약 2개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사치코님, 전에 카시와기씨의 차로 외출했다가 심하게 멀미하셨다고 그랬지.
평소에 타던 익숙한 차가 아닌데다, 나쁜 도로, 마음걱정, 그리고 카시와기씨의 (아마도) 서툴기 짝이 없는 운전솜씨라는 악조건이 겹친 결과였겠지만, 이번에도 먼 길을 나서기때문에 비록 자가용차라곤 해도 걱정이 되셨나보다.
"전 괜찮아요."
유미가 멀미약을 거절하자 사치코님은 "그래?"라며 한순간 아쉬운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혹시 자매 함께 멀미약, 같은 걸 바라셨나. 이제와서 그런 생각해봤자 이미 늦었다. 약상자는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뒤였으니까.
지금이라도 "역시 먹을게요" 라며 약을 받으면 기뻐하실까.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던 유미가 무의식적으로 무릎 위에 놓아둔 보온케이스 지퍼를 만지작거리자, 사치코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으셨다.
"그건 뭐니?"
그거라니 이것 말씀? 사치코님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틀림없이 유미의 무릎 위였다.
"이것은 도시락인데요."
어쩐지 영문을 번역한 듯한 대답이 되고 말았다.
"도시락? 누가 만들었는데?"
"엄마가요. 아, 드시겠어요?"
"괜찮을까?"
"물론이죠. 엄마가 언니랑 같이 먹으라고 하셨거든요."
케이스에서 꾸러미를 꺼내어 드리자, 사치코님은 그걸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선,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유미는 좋겠어. 난 엄마가 만드신 도시락같은 건 소풍이나 운동회에 들고 가본 적이 없거든."
"어라? 사야코 고모님, 요리못하시나요?
조금 의외. 앞치마를 두르고 조림같은 걸 만드실 듯한 분위기신데말야. 역시 부잣집 부인께선 집안일에는 터치안하는걸까.
"요리는 잘하셔. 문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거지. 언제였더라. 내가 소풍갔다 돌아왔는데도 아직 요리하고 계셨던 적이 있었어. 그래서 대개 가정부가 몰래 만들어준 도시락이나 보험을 걸어둘 요량으로 배달원에게 주문한 도시락 같은 걸 가지고 갔지."
우왓. 왠지 굉장하다.
"저기, 그래서.. 사야코 고모님이 만드신 요리는요?"
"물론 맛있게 먹었지. 하지만 집에서 먹으면 그건 더이상 '도시락'이 아니잖니. '저녁식사'로 이름이 바뀌어 버리는거야."
뭐 그렇게 말못할 것도 없지만.
"아, 하지만. 편의점 냄비우동만큼은 아무래도 빨리 만드시던걸."
"....."
그야, 뚜껑열고 난로 위에 놔두면 끝이니까. 아, 불조절이란 과정이 있었던가. 그렇다곤 해도, 사야코 고모님도 참 극단적인 분이시다.
그건 그렇다치고, 사치코님은 "엄마가 만든 도시락"에 흥미가 있으신 듯하다. 목욕타올과 스카프의 동료쯤 되어보이는 포장꾸러미를 벗기고는 기쁜듯이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예쁜 색조합이네."
반찬은 약간 한쪽으로 쏠려 있었지만, 사치코님은 넋을 잃은 듯 바라보며 웃음짓고 계셨다. 한참동안 그렇게 바라보시길래, 만족하고는 그대로 뚜껑을 닫아버리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 하고 있을 때, 조용히 아스파라거스와 치즈가 들어간 베이컨 말이에 꽂힌 이쑤시개를 쥐고선 덥석 입에 넣으셨다.
"어, 어때요?"
"맛있어."
기분좋아진 유미는 플라스틱 포크로 흰살생선튀김이랑 방울토마토를 부지런히 찔러댔다.
"언니, 주먹밥김은 어떤 걸 좋아하세요?"
"김?"
"파삭파삭한 거랑, 촉촉한 것중에서요. 우리 엄마는 주먹밥 김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시다가-"
유미는 주먹밥만 따로 담은 용기를 내밀며 말했다.
"세상에, 2종류 다 만드셨다구요."
이미 김이 말려 있는 검은 주먹밥과, 그냥 쥐기만 한 하얀 주먹밥, 둘다 2개씩 합계 4개. 하얀 주먹밥에는 부록으로 지퍼달린 비닐봉투 안에 김이 셋트되어 있었다.
"속은 뭐니?"
"매실장아찌요. 더운 날이면 저희 집에서는 방부효과가 있는 매실장아찌가 메인이거든요. 아, 맞다. 멀미에도 잘 듣나봐요. ... 그래서, 파삭파삭이랑 촉촉한 것 중에 어느 쪽으로 하실래요?"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러고보니, 편의점에서도 요즘 두 가지 타입이 비치되는 것 같더라."
사치코님은 비닐봉투에서 김을 꺼내어 하얀 주먹밥을 감싸 쥐었다. 사야코 고모님의 편의점 왕래는, 역시 아직도 계속되나 보다.
사치코님은 주먹밥 하나, 반찬은 이것저것 한 종류씩 해서 차안에서의 아침밥을 마쳤다. 한창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배가 고파진 유미도 촉촉한 주먹밥 하나랑 나름대로 반찬을 먹고선 피니쉬. 둘이서만 먹기는 좀 미안해서 운전수 아저씨도 드리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양손 다 쓰고 있는 상태라 거절하셨다.
"하지만 맛있어 보이는군요. 고속도로에서 한번 휴식할 예정이니, 그 때라도 먹도록 하죠."
"아니면 정체로 차가 못움직이게 됐을 때네."
사치코님이 무릎덮개를 펼치면서 미소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끔찍한 정체도 몹시 기다려질 것 같은데요."
말과는 다르게, 운전수 아저씨의 핸들 움직임은 경쾌하다.
"유미도 편한 자세로 있도록 해. 아직 갈 길이 머니까."
유미가 도시락을 보온케이스에 도로 넣고 있을 때, 사치코님은 무릎덮개를 무릎만이 아니라 목까지 끄집어 올려서 덮고 있었다. 운전수 아저씨는 익숙해져 있는지, 허겁지겁 냉방온도를 올리거나 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잠깐 잘게."
"에?"
"잘 자."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더니, 곧바로 잠자는 숨소리가 들려 왔다.

(에--엣!?)

그야 소풍 오다가다 하다보면 자는 사람도 있겠지만, "벌써?"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빠른 수면타임이었다. 아직 M역을 출발한지 20분도 안지났는데. 확실히 소풍이라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버스 안에서 벌이는 레크리에이션도 즐거움 중 하나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두사람이서 가는데, 한 명이 자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언니."
아직 도내라 익숙한 풍경을 혼자서 보고 있어도 재미없다. 차안에는 한 사람 더 있긴 하지만, 운전수 아저씨랑 끝말잇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언니."
살짝 찔러보기도 했지만 꼼짝도 안했다. 마치 수면제 같은 걸 먹은 듯이. 유미는 거기서 퍼뜩 생각났다. 언니는 집을 나설 때 멀미약을 먹었다고 그러셨다.

<졸음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용상의 주의가 머릿 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5.

 

반쯤 토라져 누운 것처럼 눈을 감고, 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자, 차츰 정말로 졸음이 왔다. 그러고보니 어젯밤은 그다지 잠을 못잤다. 무늬없는 배추흰나비가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날아와서는 유미를 양배추밭으로 초대했다. 
잘못됐어 - 유미는 자신의 꿈 속에서 태클을 걸었다. 지금부터 갈 곳은 고원이니까 양배추가 아니라 자작나무같은게 있어야지.
바보구나 유미양. 후지산 정상에 자작나무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요시노양이 웃는다. 왜 여기서 후지산이 나오는거야. 뒤돌아보자 거기엔 분명히 그림으로 그린 듯한 후지산이 눈앞에 솟아 있었다. 후지산은 후광을 반사하고 있고, 예수님의 얼굴을 한 석가님이 머리 위에 X자 포즈를그리고 있었다. 거기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절하고 있는 시마코양. 유미가 다가가자 점괘제비를 뽑아 주었다. 접힌 종이를 펼치니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이 한마디.

- 전도다난 (前途多難)

그 네 문자가 CG처럼 두둥하고 화면에서 튀어나왔을 때,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유미."
"응.. 아?"
"휴게실이야."
어느새 고속도로에 들어선 모양이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 사치코님은 깨어나신걸까?
"화장실 다녀오자."
갑자기 깨어나서 그런지 입도 몸도 맘대로 움직이질 않는 유미는, 자다 일어난 아이처럼 눈을 비비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침안흘린게 그나마 다행이다.
"길은 아직까진 그리 막히지 않지만, 일단 다녀오는 편이 좋아."
평일이고, 오봉 귀성러쉬 시기도 아닌데다, 아침 일찍 출발했으니까. 쌩쌩 달린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차는 막힘없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언제 몇시에 대정체가 될지 몰라. 그렇게 되면 화장실없는 소형차에 있는 사람은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눈, 떴어? 내려야지."
시키는 대로 문을 열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피부를 쓰다듬는다.
"더워..."
고속도로 휴게실은 온통 주차장이라, 그늘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덥다. 아직 오전중인데도 지면에서 하늘하늘 열기가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자, 유미. 똑바로 걷도록 해."
아직 머릿 속이 반쯤 잠들어 있는지 유미는 약간 휘청거렸다. 그러자 사치코님이 손을 잡고 같이 걸어주셨다.

더운데도, 조금 기쁘다.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도 물론 기쁘지만, 그 이상으로 함께 화장실에 간다는 것이. 화장실에 가는 게 기쁘다니, 듣기 안좋은데다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기쁜 건 기쁜 거니까 어쩔 수 없다. 
학년이 다른 언니와는, 당연한 얘기지만 같은 교실에서 수업받는 일같은 건 있을 수 없으니까 쉬는시간에 "같이 화장실 가자"같은 일은 어림도 없다. 그래서 이건 귀중한 경험인 셈이다. 처음에 냉방으로 차가웠던 사치코님의 손은 외부열기와 유미의 손으로 따뜻해져서, 나중엔 땀이 맺혀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자 화장실은 적당히 혼잡했다. 여름방학이니까 할머니도 엄마도, 언니도, 어린 여자애도 줄서있었다. 아기침대에 누워서, 기저귀를 갈고 기분좋게 다리를 움직이는 아기의 모습도 보였다.
"끝나면 손씻고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
"네."
끄덕이며 줄 마지막에 섰다.
"자, 다음은 유미 차례야. 가장 안쪽이 비었어."
평소에는 그렇게 일일이 챙겨주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척척 지시를 내리는 언니는 믿음직스러웠다.
왠지 어렸을 때로 돌아가 엄마와 외출한 것같은 기분이었다. 용무를 마치고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나서야 비로소 유미도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쥬스 같은 거라도 사갈까?"
옆 세면대에 있던 사치코님이 거울 속의 유미에게 말을 걸었다.
"도시락 답례로 음료수 사줄게."
"아, 그럼.."
이럴 때에는 순순히 얻어먹는 편이 좋아. 언니는 때때로 언니다운 일을 하고 싶어한다.
"음료수보다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손을 닦은 손수건을 가방에 넣고, 유미는 빙글 45도 오른쪽으로 회전해서 좌우 반대가 아닌 진짜 언니를 향해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애네."
말로는 그렇게 불평하시면서도, 사치코님은 조금 기쁘신 듯.
휴게실 매점에 잠깐 줄선 뒤, 소프트 크림을 샀다. (좀 어리광부리고 말았습니다 - 마침표)
다리는 벌써 원상태로 돌아왔지만, 유미는 걸으면서 언니의 손을 잡았다. 오른손에는 맛있는 소프트 크림, 왼손에는 너무너무 좋아하는 언니.
"덥구나."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잡은 손을 풀지 않으니까, 괜찮나보다 라며 그대로 걷는다. 검은 차는 특히나 눈에 띄어서 수많은 차들 가운데서도 곧장 찾아내기 쉬웠다. 휴식을 취하러 갔던 운전수 아저씨는 이미 돌아와 있어서, 두 사람한테 손을 흔들며 차있는 곳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치코님은 손을 끌며 조금 빨리 걸었다. 15분 휴식예정이 5분정도 오버되었다.
"곧 출발할거야. 빨리 먹으렴."
"네에~"
소프트크림 곱하기 오가사와라 사치코님.
그 마음은. 차가울 뿐만 아니라, 맛도 꽤나 부드럽고 달콤할테지.

(멋져!)

- 이처럼 이미 소프트 크림과 나란히 녹기 시작한 유미의 머릿 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