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계셔 (マリア樣が見てる) 9권 체리 블라썸 -3- 로사리오? 묵주?

로자리오냐 묵주냐(ロザリオか默珠か)

 

 

                                       1

 

월요일.
여느때보다 조금 일찍 등교한 노리코는, 곧바로 예전의 벚꽃나무 앞으로 간다.
강당 뒷편의 그 장소다. 거기에 가면 시마코씨를 만날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둘이 만난다고 하면, 그 장소 이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ごきげんよう)."
약속했던 것도 아닌데 그녀는 거기 있었다.
벚꽃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노리코를 향해 미소를 지어준다.
"정말로 있을 줄이야..."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만 같다.
"그럼 어째서 온거지?"
"어째서.. 라고 물어봐도...."
벚꽃은 벌써 거의 져가고 있었다.
꽃구경 왔다는 핑계를 대기엔 아무래도 부족한 듯..
"만나고 싶었어요."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나도야."
시마코도 노리코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와 노리코는 열심히 무언가 할 말을 찾는다.
"저... 생각해 봤는데요, '말하지 않는'건 '거짓말'을 하는 거랑은 다른게 아닐까요? 게다가 시마코씨 마음 속은 크리스천이잖아요. 어쩌다 태어난게 절간이었다고 해서 그게 시마코씨 책임도 아닐테고... 하느님을 배신하는 그런 행위는 아닌거 같은데. ...뭐랄까 잘은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가만히 듣고있던 시마코는 이윽고 노리코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꽤나 잘 설명하던데?"
"저, 저기..."
쳐다보는 눈길이 부끄러워져서,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린다.
실제로 상대가 불상이나 마리아 조각상 이라면 시선같은건 이쪽에서 보내는 일방통행일테니 아무리 성스러운 모습이어도 상관 없겠지만, 상대는 같은 사람이다. 그것도 굉장한 미인이니 만큼, 이상하게 두근두근 해버리는 거였다. 비록 같은 여자끼리라지만...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노리코는 마음이 급해진다.
시선을 돌린채 우물쭈물 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거다.
'맞아.'
학교를 그만두지 않도록 시마코씨를 설득한다는 당초의 목적을 아직 수행하지 않았어.
"저.. 저는..."
"응?"
"제 경우는, 불상 애호가인데도 여기 다니고 있어요."
허둥대며 내뱉은 그 말은, 그다지 설득력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말을 꺼낸 이상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어서, 그대로 계속 이어가기로 한다.
"입시전날 불상을 보러 쿄토까지 갔었는데, 큰눈 때문에 기차가 끊겨서 돌아올수 없었어요. 덕분에 1지망은 날려버리고... 부모님에겐 비밀로 하고 나머지 전형료를 빼돌려서 여비로 썼거든요. 그래서 친척분 때문에 응시했던 여기에 입학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어서...."
불쑥-
횡설수설 하다보니 시마코씨의 얼굴이 갑자기 다가왔다.
그렇게 느낀 것과 거의 동시에, 노리코의 목에 그녀의 양손이 감겨온다.
"옛--?!"
껴안은 거라는 걸 알아채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고마워, 이제 됐어."
"시마코씨...."
"괜찮으니까. 아직 그만두거나 하지 않을꺼야. 오늘도 이 말을 전해주고 싶어서 널 기다렸어."
"그랬군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게 느껴진다.
그럼 내 바보같은 이야기 따윈 일부러 꺼낼 필요까진 없었다는 거네...
"그런데"
노리코는 시마코에게서 떨어지며 되묻는다.
"지금 '아직은' 이라고 하셨나요?"
그 말이 왠지 걸린다.
"응, 너랑 만나기 전.... 그전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 뿐이야. 나때문에 누군가가 곤란하게 된다면, 역시 이곳에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하거든."
"그래도 시마코씬 여길 좋아하죠?"
"물론이야."
시마코는 고등부 건물쪽을 정감있게 바라본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더 좋아지니 큰일이야. 작년 이맘때 쯤에는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치도 못했는데."
"그럼...."
"그렇다 해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여기에 다닐 필요는 없는거야. 어디에 있어도 교리는 배울수 있는거고 그 가르침에 따를수 있는 거니까."
"시마코씨...."
왠지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만 같아 보인다.
그런 시마코씨가 애처롭게 느껴져, 노리코의 가슴이 저며온다.
"좀더 편하게 생각할 순 없는걸까요?"
"편하게.. 라니?"
시마코가 고개를 갸우뚱거릴때 예비종이 울렸다.
"그래도 학교 안에서 이런 얘기를 나눌수 있다는거, 지금까진 상상도 못했던 일이야."
"저라도 괜찮으시면 언제든지 이야기 상대가 되어 줄께요."
그러니까 이제 더이상 혼자 고민하지 말아요.....
노리코는 그 한마디를 혼자 삼킨다.
"그럼 갈까?"
시마코가 한발 먼저 걸음을 나선다.
두 사람은 생각할수록 신기한 관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2

 

요즘 자주 학교 얘기를 하게 됐네? 라며 스미레코 아줌마가 지적해주었다.
"그런가...."
차를 마시던 노리코는 별 생각없이 대답한다.
그냥 보기에 대충 탄듯한 스미레코 아줌마 특제 로열 밀크티는, 이게 또 의외로 맛있다. 차를 타는게 꽤 익숙하다고나 할까?
할아버님 댁은 유서깊은 가문이었다니까, 스미레코 아줌마는 옛날엔 양가집 영애였을런지도 모른다.
차모임 같은데서 여러 차레 차를 준비해봤던건 아니었을까...
"그래. 막 입학했을 땐, 집에 와도 학교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어. 친구라도 생긴거야?"
"글쎄? 친구라긴 좀 그렇고... 그저 점심시간이나 방과후 같은때 잠깐 얘기하는 정도야."
"보통은 그런걸 친구하고 부르지 않니?"
"그렇네."
그치만 나이도 한살 많은데...
그러고 보니 스미레코 아줌마도 연상, 타쿠야 오빠도 연상.
혹시 난 동년배보단 연상이랑 잘 어울리는 건지도 몰라.
시마코씨와는 가끔 그때의 벚꽃나무 아래서 만나게 되었다.
약속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저 가고싶을때 가는것 뿐이다.
만날때도 있는가 하면, 못 만날때도 있었다.
하지만 못 만났을 때에도 실망되거나 하진 않는다.
시마코씨는 학생회를 이끌어 갈 로사 기간티아의 입장이 있으니 바쁘기도 할테고.
게다가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이라는건, 의외로 즐겁기도 하는거다.
언제부터인지 노리코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도 금방 시마코를 찾아 낼 수 있게 되었다.
복도나 교정이나 안뜰에서 그녀가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찾아낼 자신이 있다.
때때로 생각해보곤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건 대체 무얼까?
동정?
'그런게 아니야.'
우정?
'그거랑은 조금 느낌이 달라.'
시마코씨를 좋아한다.
같이 있으면 마음도 편해지고...
하지만 그런 거만으로 되는걸까?
그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기만 하는, 그런 관계인 채로 괜찮은 걸까?"
시마코씨를 위해서 무언가 해주고 싶어.
노리코는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하게되곤 한다.
대체 내가 무얼 할 수 있는거지...
"모르겠어-"
그 말과 더불어 노리코는 탁자 위에 엎드린다.
"그래 그래. 아무 일도 아닌 것 같고 고민할수 있다는게 젊음이란 거지."
과자상자를 꺼내들며 스미레코 아줌마가 웃는다.
"대단한게 아니라구?"
"무슨 고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한 십년쯤 지난뒤에 돌이켜 보렴."
"십년이라...."
현재 열 다섯살인 사람에게 십년이란 굉장히 긴 세월처럼 느껴진다.
열 다섯살의, 적어도 네배 이상은 살아왔을 누군가랑은 다르단 말이지.
"스미레코 아줌마. 혹시... 굉장히 신앙심 깊은 크리스천이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떤 이유로 계속 하느님을 배신한 채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쳐. 어떻게 하면 도와줄수 있을까?"
"뭐야 그거? 네 고민얘기가 아니었던 거야?"
"난 신앙심 깊은 크리스천이 아니야."
"하긴-"
왠지 스미레코 아줌마라면 상담해도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월의 지혜, 란 녀석에게 조금 기대를 걸어나 볼까?
"글쎄다... 하느님께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받는건 어때?"
"그럼 큰일이 벌어진단 말야."
"그럼... 크리스천 때려치면 되잖아."
"엄청난 말 하네..."
"그외엔 아까 말했듯이 '세월'일까? '세월이 약'이란 말도 있잖아"
스미레코 아줌마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연다.
"...아니면, 뭔가 큰 사건이라도 터진다거나."
"사건?"
"그래."
냉장고 안을 뒤지더니 랩이 씌여진 접시 하나를 꺼내온다.
"커다란 사건이 터져버리면 말이지, 결과가 어떻든 한번에 끝장나 버리는 거야. 그야말로 고민따위 할 시간도 없을걸?"
"그런건가...."
하지만 큰 사건이란 거, 그리 흔하게 굴러다니는게 아니야.
그렇다고 내가 일으킬 수도 없는거고....
"그렇지만, 그런거만 생각하고 있다간 죽도 밥도 안되거든."
스미레코 아줌마는 탁자 앞에 돌아와선, 과자를 먹어 달아진 노리코의 입안에 단무지를 한조각 넣어 주었다.

 

 

                                       3

 

"노리코."
가정과목 실습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누군가가 부른다.
여긴 2학년 교실 앞이다.
노리코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니, 말을 건네온 본인이 교실에서 나왔다.
"아.. 시마코씨."
노리코랑 같이 걸어온 토우코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곤 '꺄-" 하고 소리를 지른다.
마치 길가다 인기 스타랑 우연히 만난 팬들 같다.
"잠깐 시간좀 내줄래?"
고개를 끄떡이자 시마코씨는 계단 근처의 아무도 없는 곳으로 노리코를 데리고 간다.
서로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미안해, 요즘은 노리코가 있을만한 때 거기 가는게 힘들어서...."
언제부터인지 시마코는 노리코에게 리리안 특유의 호칭을 붙이지 않게 되었다.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인지, 처음부터 그렇게 불린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런거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 '마리아 제'의 준비 때문에 여러가지로 바쁜거죠? 아침 일찍 나와서 밤늦게 돌아가고... 몸은 괜찮은 거예요?"
"으응, 고마워."
시마코씨의 얼굴이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바뀐다.
아마 갈수 없었던 이유를 얘기해 두고 싶어서, 길가던 노리코를 우연히 보자마자 불러 세운 것일테지.
'따로 약속했던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욘 없는데 말야.'
뭐.. 그런 점이 시마코씨다운 거겠지만.
"맞아, 노리코에게 물어보려던게 있었는데."
시마코씨는 조금 목소리를 낮춘다.
"너.. 혹시 묵주도 좋아하니?"
"묵주?"
"응, 할머니한테 받았던 묵주알 속에 부처님 조각이 들어있던게 생각나서..."
"꼭 보여주세요!"
불상에 관련된 말을 듣자, 노리코의 목소리가 한층 커져버린다.
시마코는 '조용히' 라고 한 뒤에 웃었다.
"그렇게 말할거 같았어. 내일 가져올테니, 점심때 그 장소에서 기다려"
"우와!"
그럼 내일봐, 라고 말하며 시마코씨는 교실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사람의 대화를 바라보던 토우코들을 발견하자 웃음을 보인다.
"다음 시간이 피복 만들기니? 어떤걸 만들거지?"
"치마예요, 로사 기간티아.'"
"그래? 예쁘게 만들어지면 좋겠네. 열심히 하렴."
"예.. 옛!"
'저런- 천하의 토우코도 목소리가 떨리고 있네.'
시마코씨의 상냥함과 섬세한 부분이 후배들한테 인기있는 거겠지.
때때로 잊어버리곤 하지만 이럴때면 항상 떠올리게 된다.
시마코씨는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의 스타, 로사 기간티아라는 걸 말이다.

"저... 노리코양?"
"예?"
곤색 천을 재단하던 노리코가 고개를 든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니 꽤나 먼 자리에 있었던 애가 노리코 뒤에 서 있다.
가정과목 실습실은 자리를 떠나 돌아다녀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만큼 혼잡했다.
조별로 사용하는 커다란 책상은 어느 곳도 4명분의 옷감이 펼쳐져 틈이 안보일 정도다.
"무슨 일?"
그다지 노리코와 얘기를 해본적이 없어서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는지, '예쁜 옷감이네요' 따위의 사교용 멘트를 하며 다가온다.
"쿄코, 노리코양의 옷감을 칭찬하러 여기까지 온 거니?"
옆에서 작업하던 토우코가 조금은 가시돋친 말을 내뱉는다.
왠지 모르게 아까부터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부모님의 원수라도 대하는 듯한 눈을 하고 가위로 거침없이 천을 자르곤 하니, 같은 책상을 쓰는 사람들은 무섭게만 느껴지는 거다.
하지만 쿄코는 그런 사정을 모르는 탓에, 토우코의 그런 행동에도 겁먹지 않고는 결심한 듯이 노리코를 향해 한발짝 다가온다.
"아니, 물어볼께 있어서 왔어. 저... 로사 기간티아하고 친해요?"
"예?"
조금 전에 말했던 '예쁜 옷감' 운운 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이어서, 노리코는 바로 반응이 되질 않는다.
"아까 오던 길에 얘기를 나누고 있었잖아요. 2학년 토도 시마코님과..."
"응? 아아.. 시마코씨말이구나"
노리코이 그 한마디에, 주위에 있던 반 친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마코씨, 라구요.....?!"
작업하는 척 하면서 다들 이쪽 얘기를 듣고 있었던 걸까?
"상급생 언니분을 '씨'라고 부르다니...."
"그렇게 친한 사이인 거예요?"
"입학하기 전부터 알고지낸 사이예요?"
"집에 가본 적 있어요?"
"설마, 친척이라거나...?"
담당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탓인지, 모두 일어서서 노리코를 둘러싼다.
"저, 잠깐 기다려...."
불쌍하게도 노리코는 인파 속에 파묻쳐 익사하기 직전이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예요."
제일 처음에 질문했던 쿄코가 대표로 나선다.
"빨강, 노랑, 흰색의 세 장미님들은 우리 고등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중등부 애들에게까지 동경을 받을만큼 인기가 있는 분들이세요. 그러니 그런 분들이 누군가랑 특별히 친하게 지낸다면, 모두가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이해 가죠?"
"응.. 그럭저럭."
분위기에 밀려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고 뭐 직장 동료하고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복도에서 잠깐 얘기하는 정도는 이상할거 없잖아. 겨우 그런 걸로 다들 이렇게 흥분하다니... 그쪽이 훨씬 이해가 안가.
"토도 시마코(藤堂 志摩子)님은 알다시피 품위있고 아름다우세요. 항상 침착하신 데다가 2학년이신데도 로사 기간티아를 계승하셨을 정도. 그런분이 아직 '쇠르'를 갖지 않으신 상태라 모두 들떠있는 거예요."
'쇠르'라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주변이 다시 웅성거리고,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설마... 벌써 자매의 의식을 치루신 거예요?"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뒷쪽에서 들려왔다.
"자매의 의식?"
"이미 로자리오를 받으셨나요?!"
밀고 들어오는 애들 거의 전부가 중등부 출신인듯 하다.
덕분에 그런 쪽을 잘 알지 못하는 노리코를 제쳐두고 점점 이야기가 진행되어 버린다.
"로자리오? 받다니? 게다가 '쇠르'란건 또 뭐지?"
대체 무슨 얘긴지 알수가 없어져 떠오르는 대로 물어보자, 여기저기서 안도한 듯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로자리오를 모르신다니..."
"다행이예요, 아직 그렇게 걱정할 만한건 아니네요."
'왠지 저 웃음소리 싫어'
로자리오가 무엇인지 정도는 노리코도 알고 있었다.
'로자리오란건... 그래, 크리스트교에서 쓰는 십자가 달린 묵주잖아.'
하지만 그게 시마코씨하고 어떻게 이어지는 건지, 그 부분이 수수께끼였다.
그러니까, 라며 주위를 둘러싼 애들중 한명이 설명해 준다.
"리리안 여학원 고등부엔 옛날부터 상하간의 유대가 깊어요. 꼭 친자매처럼 선배가 후배들을 이끌어 주고, 후배는 선배 언니분들께 따르는 거죠."
그래도 그것과는 별도로, 개인적인 연결고리가 생길 경우도 있다.
그게 아까 화제가 됐던 '자매의 의식'인 모양으로, 선배로부터 로자리오를 이어받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거였다.
"한명의 선배 언니분에게 동생이 될수 있는건 한명뿐! 일대 일의 관계이니까, 의식을 치루는 것으로 두 사람은 가장 친한 사이란 걸 인정받는 거예요. 제3자가 한수 접어둘 정도로 스테디한 관계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이어진 분들을 '쇠르'라고 불러요."
'쇠르 soeur'란건 언니랑 동생쪽을 통틀어 부르는 호칭이지만 따로 구분해서 부를때는 언니쪽을 '그랑 쇠르 Grand soeur'로, 동생쪽을 '쁘띠 쇠르 Petit soeur'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랬구나...."
노리코가 중얼거린다.
"노리코양, 아직 로자리오를 못받았다고 해서 너무 기운없어 하지마세요."
"그래요. 우리들, 미력하지만 옆에서 응원해 드릴께요."
아무래도 이 애들은 노리코가 시마코씨에게 로자리오를 받고싶어 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이른바 '문화적인 충격'으로 가만히 있던 사이에 마음대로 다른 이유를 붙여버린 것 같았다.
'아... 머리아퍼. 이 학교 대체 뭐야?!'
얕볼수 없는 리리안 여학원!
그저 양갓집 따님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우습게 봐왔지만, 이거 아무래도 엄청난 곳에 들어온 모양이다.
"노리코양, 울지 말아요. 우리들 노리코양 편이니까."
'안울었다니까....'
"노리코양은 머리도 좋고 왠지 다가서기 힘든 분위기도 나고.. 시마코님이 선택하신다해도 분명 누구도 뭐라하진 않을 꺼예요."
왜 얘기가 그쪽으로만 흐르는 거냐구... 당사자를 제쳐두고, 뭐든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저 태도들.
마치 노리코 혼자서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같다.
그나저나 조금 전까지의 흥미와 선망과 약간의 질투가 뒤섞인 시선들이, 언제부터인지 동정과 친밀함과 상냥함이 섞인 눈빛으로 바뀐건 왜지?
역시 여기 있는 소녀들은 마리아님께 사랑받는 선량한 어린 양들인 걸까?
그때, 덜컹 하는 소리와 더불어 옆에 앉아있던 소녀가 벌떡 일어선다.
"조금은 조용히들 해주지 않을래요?!"
계속 아무 말없이 있었기에, 옆에 토우코가 있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째서 모두들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거죠? 노리코양이 로사 기간티아의 쇠르로 뽑힌다니... 그런 일, 그런 일 절대로 있을리가 없어!"
토우코는 눈망울을 적시며 요란스레 뛰쳐나가 버렸다.
"토우코..."
노리코는 뒤따라 가려 했지만, '가만히 놔두는게 좋아요' 라는 소리에 그만둔다.
"토우코양은 장미님들의 동생이 되어서 언젠가는 나도.... 라는 꿈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요. 노리코양이 시마코님과 친하다는걸 알고는 아마 충격을 받은 거예요."
토우코가 나가버린 자리에는, 타이트 스커트를 만들기엔 조금 안어울리는 커다랗고 화려한 장미 무늬의 옷감이 홀로 남겨져 있었다.

 

                                      *

 

대사건의 예감은, 이미 노리코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시작은 신발이었다.
그날은 당번이어서 일지를 쓰느라 여느때보다 귀가가 늦어진 노리코는, 자기 신발장 안이 비어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난 실내화를 신고 있어. 그렇다는 건 구두쪽이 행방불명이란 얘기고...."
누군가가 신발을 잘못 신고간 거라면, 이 안에 그사람의 실내화가 들어 있어야 할텐데 그것도 안보인다.
아니 그 이전에 신발장 칸마다 이름이 써져 있으니 그리 쉽게 잘못 가져갈 리가 없는거다.
"대체 어찌된 거지?"
실내화로 집까지 가야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앞에 놓인 신발털이용 매트 위에 가지런히 정돈된 발레화풍의 검은 구두가 놓여있는게 보인다.
"???  뭐야, 대체?"
신발 안쪽에 '니죠 노리코'라고 쓰여진 구두를 바라보며, 노리코는 생각에 잠긴다.

 

 

                                       4

 

"...그리고 오늘 아침엔 실내화 안에 클립이 들어 있었어요."
"클립?"
노리코의 말에 시마코는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이리저리 바쁜 로사 기간티아였지만, 약속대로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들고 강당 뒷편에 나타난 것이다.
"응, 클립... 그럴때 보통은 압정 같은거 넣잖아요."
"실내화에 압정을?"
그건 아프겠어, 라며 시마코씨는 미간을 찡그린다.
그리고 계란말이를 집으며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거지? 라고 혼잣말을 한다.
"시마코씨... 혹시 순정만화 같은거 안읽죠? 신발 속에 압정넣기라면, 그야 괴롭히기의 표본 같은거 잖아요."
"그래?"
"하긴.. 요즘엔 그런 만화도 거의 안나오긴 하네요."
노리코의 경우 만화책이나 잡지를 살 정도라면 불상 사진집을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용돈을 모으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그런게 있을리 없다.
사촌언니 집에 놀러 갔을때 오래된 만화책을 전부 읽고난 결과 얻은 지식인 거다. 그러니 요즘 출간되는 만화 내용은 거의 문외한이나 마찬가지.
"그건 그렇다 치고..."
설명하려면 그것만으로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 버릴것만 같았기에 일단 얘기를 끊는다.
분명 시마코씨의 책장에는 만화는 물론이고 불상 사진집 같은 것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클립이었던 거지?"
"바로 그거예요."
들어있던게 압정이었다거나, 쓰레기통 속에 신발이 버려져 있었다거나 한다면 훌륭한 괴롭힘이 됐을테지.
하지만 노리코가 당한 일들은 어느걸 보나 어중간한 행위였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했는지 대체 알수가 없는거다.
"우연히 노리코 신발 속에 들어간게 아닐까?"
"5센티나 되는 클립이 우연히? 그것도 양쪽 다?"
"하긴.. 그런데 왜 노리코한테 장난을 치는걸까?."
"......"
노리코는 조용히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한다.
이 사람은 자기가 얼마만큼 인기가 있는지, 그때문에 노리코가 주위로부터 질투받을 지도 모른다는 건 전혀 생각도 못해봤음에 틀림없을 테니까.
"안그래도 로자리오 얘기가 나온 뒤로, 토우코가 얘기도 안하는데 말야..."
이래선 불만이라도 한마디 내뱉을 수밖에.
노리코에게 있어서 학교란 그저 공부하는 장소로만 있어주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왜 이다지도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은 걸까?
"로자리오? 아.. 맞아, 생각났어."
시마코씨는 다 먹은 도시락통 뚜껑을 덮으며 '잊어버리기 전에' 란 말을 하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자, 이거."
내밀어진 그것은, 작은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
"잊어버렸니? 이걸 건네주려고 여기서 만난 거잖아."
"앗!"
묵주구나...
그럴듯한 케이스가 아니라서 금방 눈치채지 못했던 거야.
"여기서 열어보면 안돼."
시마코씨의 손이 노리코의 손길을 멈춘다.
"마리아님께 죄송하잖니. 귀가해서 천천히 보렴. 마음에 들면 당분간 가지고 있어도 좋아."
"....괜찮아요?"
"나는 노리코 정도의 보는 눈이 없거든. 그것보다 아까 로자리오라고 했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뭐야... 다 듣고 있었잖아...'
"그게 말이죠..."
노리코가 어제 있었던 일을 대략 얘기하자 시마코씨는 '로자리오 갖고싶니?' 라며 조금 핀트가 안맞는 질문을 해왔다.
"별로."
"주는거야 어려운건 아니지만, 지금의 네게 과연 필요한 걸까?"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노리코는 고개를 끄떡이며 일어서서는, 깔고 앉았던 손수건을 접는다.
로자리오 같은거 없어도 이렇게 시마코씨랑 만날수 있어.
얘기를 나누는 것도 할수 있고.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서 낙심하고 있는 자기자신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난 시마코씨가 어떻게 얘기해 줬으면 만족할수 있었을까....?'
너만은 특별해, 라는 증거가 갖고 싶었던 걸까?
'그것보다 내가 갖고싶다고 했으면 시마코씨는 로자리오를 주려고 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때, 노리코는 분명히 느낄수 있었다.
난 그저 시마코씨의 마음이 알고싶던 것 뿐이라는 걸...

 

                                      *

 

교실에 돌아오니 책상 한구석에 인기만화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애는 아직 자리를 비운 채다.
주위를 둘러봐도 잡담이나 다음 수업시간의 준비에 바빠서, 아무도 노리코의 책상에 그려진 낙서 따위에 신경쓰는 사람은 안보인다.
범인찾기를 단념하고 다시 한번 책상 위를 바라본다.
"지우는게 아까울 정도로 잘 그렸잖아...."
아직까진 실제로 손해를 입은건 없어.
그저 귀여울 정도의 장난질일 뿐이니까...
'따로 신경쓸 필요까진 없는거 아닐까?'
왠지 그런 생각이 밀려든다.
단순한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그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래도 어쩔수 없는 일이다.
노리코도 시마코씨도, 강당 뒷편에서 묵주 주머니를 건네주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는 사실따위, 지금 이 시점에선 알수 있을리가 없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