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시드 -4권- 강림한 검 :: PHASE.3 프리덤

"그것이 작전이었나요?"

마류 일행의 설명을 듣고 키라가 희미한 혐오감과 믿기 힘들다는 마음을 담아 물었다. 설명을 한 본인들도 사령 본부의 의도를 이야기하다 보니 새삼 같은 기분에 빠졌다.

"아마도…."

무우가 전에 없이 어정쩡한 어조로 긍정했고, 마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에게는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았어."

아무 것도 모른 채 본부를 지키기 위해 분전하는 아군 병사들을 미끼 삼아 적과 함께 몰살시킨다는 발상에 커다란 사악함이 느껴졌다. 최소한 '죽어라.' 라고 명령했더라면…. 하지만 마류는 깨달았다. 그것이 군대라는 조직이다. 말단 병사들에게 뭐든 알릴 필요는 없다. 그들은 상관의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고 반론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 때로는 대국을 위해 죽는 것도 요구 받는 존재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

"본부는 자프트의 공격 목표가 알래스카라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그것도 꽤 오래 전부터…."

무우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하에 사이클롭스 같은 걸 장치해 놓을 리가 없어."

속은 척 한 후 다시 속인다. 지금쯤 자신들을 버린 장교들은 적에게 통쾌한 보복을 했음에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문득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키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플랜트도… 마찬가지예요…."

"플랜트…?"

마류는 무심코 물었다.

"너… 플랜트에 갔었니?"

"예."

키라는 문득 이 쪽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셨겠지만, 저도… 처음에는 제가 죽은 줄만 알았어요."

 

 

잠결에 키라는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어머, 분홍아! 안 돼…. 그 쪽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렇다…. 천천히 눈을 떠 보니 그 곳은 천국이었다. 그 때의 키라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사방에 녹색 잔디가 펼쳐져 있고 주위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서 숨을 쉴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폐로 들어왔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분홍색 머리카락을 하늘 하늘 나부끼는 천사가 자신을 들여다 보며 생긋 미소 짓는다.

"어머…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 그렇구나.'

묘하게 편안한 기분으로 키라는 생각했다.

'난…, 죽은 거야.'

데굴데굴 분홍색 공이 굴러 왔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공 한복판에서 두 개의 눈이 빛나면서 그것은 「하로, 안녕.」 이라고 말했다. 어딘가에서 이것을 본 적이 있다. 키라는 시선을 되돌려서 방금 전 천사라고만 생각했던 사람도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크스… 씨…?"

그가 이름을 부르자 소녀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머…. 그냥 라크스라고 불러 주세요, 키라."

아무래도 천국은 아닌 모양이다. 라크스 클라인이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면 모를까….

"하지만 기억해 주셔서 기뻐요."

'그나저나 어째서 라크스가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머리로 느릿느릿 생각하고 있자니 또 다른 발소리가 다가왔다.

"어, 그가 눈을 뜬 모양이군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돌려 보니 30대 후반의 검은 머리 남성이 맹인 특유의 살피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예, 마르키오 님."

"놀라셨나요, 이런 곳이라서?"

마르키오라 불린 남자의 말에 키라는 그제야 자신이 넓은 정원에 설치된 일광욕실로 보이는 유리 건물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들 그렇게나 반대했는데 라크스 님이 침대는 꼭 이 곳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하지만 이 쪽에 두는 편이 기분 좋잖아요, 방보다…. 안 그래요?"

라크스가 동의를 구하듯 키라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이 곳은 저에게도 기분 좋은 장소이긴 합니다만."

마르키오가 미소 지으며 말하자, 라크스가 "그렇죠?" 라며 기쁜 듯 웃었다. 그렇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벽이 유리인지 어떤지는 관계 없지만, 넘치는 꽃 향기는 그에게도 기분 좋은 것이리라. 키라는 자신이 아무래도 좋은 것을 굳이 생각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좀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은….

"전…."

키라가 중얼거리자 마르키오가 대답했다.

"당신은 다친 채 저의 기도 정원에 도착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온화하기는 했지만 과장된 위로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제가 이 곳으로 데려 왔지요."

─ …이 …였어!

기억의 단편이 의식에 떠올라 키라의 심장이 돌연 크게 뛰었다. 온화한 목소리, 부드러운 침대, 달콤한 꽃 향기….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기분 좋은 것들의 감각이 한 순간에 색이 바랬다.

─이 녀석이 …을… …였어!

"아…."

키라는 바동바동 몸을 일으키다가 그 순간 엄습해 온 온 몸의 통증에 신음했다.

─이 녀석이 토르를 죽였어!

주르륵 되살아 난 자신의 사고에 키라는 압도되어 몸을 떨었다.

─죽여 버리겠다!

"아아… 아…!"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죽여…!

되살아 난 기억. 그 곳에는 증오 뿐이었다. 키라는 떨면서 걱정스러운 듯 자신에게 다가온 라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 아스란과 싸우다…."

라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렇다. 그렇게나 강한 증오를 품고 그것을 터뜨린 상대…, 그것은 아스란이었다. 그 깊은 죄책감에 몸이 떨렸다.

"죽었어야… 했는데…."

폭발의 섬광을 떠올렸다. 그 불꽃에 타서 자신은 죽었어야 했다. 그것이 올바른 결말이었는데….

"키라…."

라크스의 부드러운 손이 살며시 키라의 손을 잡았다. 그 따뜻함에 눈물이 흘러 넘쳤다.

'아프다….'

온 몸이 아프다. 아프다. 토르는 죽었다. 나를 구해 주려다 죽었다. 지키지 못했다. 나도 죽였다. 아스란의 친구를 죽였다.

'아프다.'

아스란의 증오가, 자신의 증오가 온 몸에 박혀서 욱신욱신 아프다. 눈물이 하염 없이 흘러 넘쳐서 자신과 라크스의 손을 적셨다.

"전… 그의 동료를 죽였고…."

눈 앞에서 폭발한 모빌 슈트. 파일럿의 이름을 외치는 아스란의 비통한 목소리….

"아스란은… 제 친구를… 죽였어요."

한 순간에 으스러진 조종석. 파편과 함께 흩날린 친구의 피…. 가슴을 쥐어 뜯고 싶어지는 답답함에 키라는 신음했다.

"그래서…."

오로지 상대의 죽음을 바랐고, 그래서….

'나도 죽었어야 했는데…!'

갑자기 라크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아스란을 죽이려고 하셨군요?"

키라는 눈물로 흐려진 눈을 들어 옆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스란은 그녀의 약혼자인 것이다.

"그리고 아스란도 당신을…."

그러나 믿기 힘든 말을 들었다는 충격은 그 얼굴에 없었고, 친구가 서로를 죽이려 했다는 것에 대한 혐오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소의 부드럽고 포용하는 것 같은 표정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그녀는 냉철할 만큼 맑은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나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전쟁에서는…."

키라는 충격을 받고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용서도 책망도 하지 않고 그저 그 곳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적과 싸운 거죠? …아닌가요?"

'적….'

나는 너의 적…. 과거 자신에게 타일렀던 말. 키라는 멍하니 그 말을 음미했다.

"적…."

무우는 말했다. 우리들은 살인자가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죽이지 않으면 지킬 수 없으니까, 전쟁이니까, 적이니까…. 그래서 키라와 아스란이…, 친구와 친구가 서로를 죽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런 것일까…?'

그의 마음 속에서는 격렬하게 의문이 소용돌이 치며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진정이 되자 키라는 자신이 플랜트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구의, 어딘지도 모를 작은 섬에서 싸우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이 어떻게…. 안 그래도 상처를 입고 혼란스러운 머리로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방금 전에 만난 마르키오 도사의 전도소가 그 섬에 있었고, 우연히 그에게 용건이 있어서 섬을 찾아 온 고물상이 키라와 아스란의 전투와 맞닥뜨렸다고 한다. 그리고 파손된 스트라이크의 조종석에서 부상 당한 키라를 꺼내 마르키오에게 데려다 준 모양이다. 키라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고물상이라는 직업 상 그 남자가 기계를 다루는 데 해박했다는 것. 만약 그가 비상용 셔터를 억지로 열고 구해 내지 않았다면 셔터와 파일럿 슈트에 의해 폭발 자체에서는 지켜졌다고 해도 키라는 과열된 조종석 안에서 서서히 불 타 죽었을 것이다. 그 후 마침 평화 교섭의 중재자로 플랜트에 호출된 마르키오가 키라의 정체를 숨기고 이 클라인 저택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물론 남태평양에 덩그러니 떠 있는 그 섬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가 불가능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마르키오가 일부러 이 곳으로 키라를 데려 온 것은 과거 라크스로부터 키라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 있어서 그에게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곧 비가 올 시간이네요."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던 키라는 그 말에 돌아 보았다. 차 세트를 들고 있는 라크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안에서 차라도 드실래요?"

키라는 그 말에 따라 일광욕실로 돌아갔다. 천국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키라에게 이 곳은 역시 낙원에 가까운 장소였다.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장소. 무엇을 하라거나 그런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는 사람은 없다. 죽이라고 명령하는 사람도….

'싸움이 없는 장소.'

키라는 매일 바다를 바라보거나, 라크스와 조용히 차를 마시거나, 꽃의 이름을 배웠다. 신기하게도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죽은 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 과거의 자신이 쫓아와서 그 그림자로 키라를 위협했다. 토르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렀다. 라크스는 항상 그런 그의 곁에서 다정하게 지켜 봐 주었다.

"키라의 꿈은 항상 슬퍼 보이는군요."

어느 날 그녀는 울고 있는 키라를 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신기하게도 그녀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거나 꾸밀 필요가 없었다. 라크스는 즐겁게 키라의 곁에 있어 주었지만, 이 쪽이 부담감을 가질 만큼 보살펴 주지도 않았다.

"…슬퍼."

키라는 대답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나도 많이 죽였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라크스의 손이 다정하게 키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지켜 낸 것도 많잖아요?"

라크스는 그에게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일시적인 위로도, 달래기 위한 거짓말도, 격려의 말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신비한 사람이다…. 키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녀는 그저 키라를 보살피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서 다시 걸음을 내디딜 순간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광욕실에는 이미 아담한 원탁도 준비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3인분의 컵과 직접 구운 과자 류가 놓여 있었다. 실내에는 키라와 라크스 외에 마르키오의 모습도 있었다. 유리를 때리는 빗방울을 보면서 문득 키라는 중얼거렸다.

"이상해…."

"예?"

일광욕실의 바닥에 주저앉아 분홍색 하로와 놀고 있던 라크스가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나는… 이 곳에 있는 거지…?"

문득 마음 속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그러자 라크스는 물었다.

"키라는 어디에 있고 싶나요?"

그 물음에 키라는 비의 커튼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회색으로 흐려진 세계처럼 그의 마음 속도 흐려서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그는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이 곳이 싫으신가요?"

키라는 돌아 보았다.

"이 곳에 있어도… 괜찮을까…?"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묻자, 라크스는 꽃이 피듯 웃었다.

"전 '물론이에요!' 라고 대답하겠지만요."

확실히 이 곳은 평화롭고 아름다우며 마음이 안정되는 곳이다. 라크스도 있다. 이 곳에 있으면 더 이상 싸움의 공포도, 내츄럴 속에서 사는 고독도 맛보지 않을 것이다. 이 곳이 '약속의 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곳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마르키오가 입을 열었다.

"자신이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은 언젠가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맹인 도사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SEED를 가진 자'니까요."

"당신은 'SEED를 가진 자'라네요."

라크스가 마르키오의 말을 이어받은 후 키라를 쳐다보며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SEED를 가진 자'…. 전에도 마르키오가 그 호칭으로 키라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키라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는 민간 종교가라고 하는데 그의 사상에 기반을 둔 말일까? 키라는 무종교 가정에서 자란 아이 답게 무의식적으로 그런 마르키오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조용한 존재감에 어딘지 끌리는 것이 있었던 만큼 그 신앙에 깊이 파고들다가 환멸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작용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말의 의미도 묻지 않았다.

키라가 원탁에 앉고 라크스가 차를 따르고 있을 때, 일광욕실의 문이 열리며 시겔 클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키라도 이 저택의 주인과는 여러 번 만난 상태였다. 최고 평의회 의장 지위에서 물러나 아스란의 아버지에게 그 자리를 물려 준 후로는 정치적인 직무를 맡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은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조금도 느끼게 하지 않을 만큼 그는 온화하고 예의 바르게 키라의 몸 상태를 물은 후, 마르키오에게 몸을 돌렸다.

"역시 무리였습니다. 도사님의 셔틀도 지구로 가는 건 현재 발진 허가가 나오지 않아서…."

평화 교섭이 실패로 끝나서 마르키오는 지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셔틀은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의 영향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아이들이 기다리겠지만 라크스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느는 것은 기쁩니다."

"저도요, 도사님."

온화한 대화를 호출음이 중단시켰다. 일광욕실의 유리 일각이 모니터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시겔 님께 아이린 카나바 님으로부터 통신입니다.」

집사의 공손한 말과 함께 모니터가 외선 통신으로 바뀌자, 사나운 표정의 젊은 여성이 나타났다.

「시겔 클라인! 우리들은 자라에게 속았어!」

인사도 없이 쏘아 붙이는 말에 클라인은 놀라 몸을 내밀었다.

「발동된 스핏 브레이크의 목표는 파나마가 아니야.」

다음 순간 모니터 안의 여성이 입에 담은 단어에 키라는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알래스카였어!」

"뭐라고?!"

더욱 긴박한 분위기로 나누어지는 대화가 점점 멀어지는 듯 했다. 키라는 자신이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린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키라…."

걱정스러운 듯 어깨를 쓰다듬는 라크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키라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알래스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나왔던 그 지명. 키라는 지금까지 자신이 거짓된 평온 속에 있었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지금 그 곳에 있을 사람들의 얼굴이 잇달아 그의 눈 앞에 어른거렸다. 지금까지 며칠 동안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얼굴들이…. 동시에 엄청난 공포가 엄습해 와서 그는 잠옷의 가슴 자락을 붙잡고 신음했다.

'싫어…, 싫어…!'

마음이 거부 반응을 일으켜 숨이 막혔다. 다시 그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건가?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아픔, 고독과 증오에 사로잡혀 짐승처럼 서로를 죽이는 그 악몽 같은 나날을…?

'싫다!'

그러나… 공포에 떨면서도 동시에 키라는 이해하고 있었다. '약속의 땅'이 어디에 있는지를….

비는 개어 가고 있었다. 키라는 아이처럼 유리에 뺨을 대고 밝아져 가는 하늘과, 젖어서 촉촉해진 뜰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라크스가 말을 걸어 왔다.

"키라…?"

평온하고 아름다운 이 곳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키라는 돌아보며 말했다.

"…난 갈 거야."

라크스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말을 예측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디로 가실 건데요?"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이었다.

"지구로… 돌아가야 해."

키라가 느릿느릿 대답하자, 그녀는 그 온화하기는 하지만 냉철한 어조로 지적했다.

"왜죠? 당신 한 사람이 돌아간다고 해도 싸움은 끝나지 않아요."

그것 역시 사실이다. 이미 자신에게는 아무런 무기도 없고, 지구로 내려갈 수단조차 눈에 띄지 않으며, 설사 갈 수 있다고 해도 어찌 됐건 모든 것이 늦을 게 분명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한 그녀가 자신을 붙잡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키라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사실…, 그것만을 키라에게 제시한다. 그래서 키라는 자신을 동정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그런 감상 속으로 도망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더욱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는 조용한 결의 속에서 라크스에게 대답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아무 것도 끝나지 않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전해지지 않는다.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일어서서 걷는 쪽을 선택했다. '약속의 땅'은 이 곳이 아니니까…. 라크스는 온화한 눈으로 똑바로 키라를 주시했다.

"다시… 자프트와 싸우실 건가요?"

키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지구군과?"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난… 그 동안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알고 싶었어."

그는 미소 지으면서 소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라크스는 처음으로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전쟁이기에,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죽여야 하고, 적이기에 사랑하는 사람과도 싸워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전쟁터에서는 살아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사람을 죽인 죄가 사라지는 것일까? 친구와 싸우는 것이 정당화될까? 그것이 적이라는 이유 만으로, 전쟁을 하고 있기에 죽이지 않으면 죽으니까…. 그 이유만으로? 그렇다면… 그 이유가 잘못 된 것이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싸우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서로를 상처 입힌 괴로움 끝에 키라는 겨우 그 대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혼을 서로 나눈 듯 묘한 친근감이 두 사람의 침묵을 메웠다. 얼마 후, 라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녀는 돌아보며 의연한 목소리로 집사에게 지시했다.

"그 쪽에 연락을…. 라크스 클라인이 평화의 노래를 부릅니다, 라고…."

그리고 몇 분 후, 키라는 라크스에게서 건네 받은 자프트의 군복으로 갈아 입고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눈 앞에는 라크스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 일 없이 보냈던 나날들과 너무도 대조적인 분주함에 키라는 어리둥절했다.

"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자프트 군인의 인사는…."

갑자기 라크스가 하얀 손을 들어 경례를 해 보였다. 키라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것을 흉내냈다. 지구군의 방식과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앞으로 데려갈 장소가 어떤 곳인지 그것으로 어렴풋이 알았다. 예상대로 차에서 내려 긴 엘리베이터로 무중력 지점 부근까지 상승해서 라크스가 들어간 곳은 군의 시설로 보이는 블록이었다. 키라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녀를 따랐다. 도중에 몇 사람의 자프트 병사와 마주쳤지만, 라크스가 싱긋 웃고 키라가 배운 대로 경례를 하자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고 지나쳐 갔다. 라크스가 VIP로 취급 받는 까닭에 키라는 그녀를 안내하는 연락관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실제로는 반대로 키라가 그녀를 따라갈 뿐이었지만.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통로를 나아가자 보안 체크를 필요로 하는 문이 나왔고, 그 앞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두 명의 기술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라크스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진짜인지 위조한 것인지 모르지만 키 슬릿에 ID 카드를 통과시켜 문을 열었다. 라크스와 키라는 발을 멈추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 곳은 격납고나 무언가의 공장인 듯, 높이도 바닥 면적도 상당히 광대한 공간이었다. 조명이 꺼져 있는 까닭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소리가 반사되는 정도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캣 워크 위를 걸어 가다가 라크스가 어느 지점에서 난간을 붙잡고 멈추었다. 키라도 그 옆에 섰다. 어두워서 잘 알 수 없었지만 뭔가 거대한 구조물이 눈 앞에 있는 듯 했다.

그 때, 갑자기 라이트가 켜지며 눈 앞에 떠오른 물체를 보고 키라는 크게 숨을 삼켰다. 네 개의 안테나가 튀어 나온 이교(異敎)의 신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머리….

"건… 담…?"

스트라이크의…, X넘버의 그것과 비슷한 모양의 모빌 슈트가 두 사람의 눈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기체의 색은 디액티브 모드를 나타내는 어두운 철회색. 등에는 시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날개가 보였다.

"조금 달라요. 이건 ZGMF-X10A=프리덤이에요."

라크스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건담' 쪽이 강해 보여서 좋은 것 같네요."

그리고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멍청히 서 있는 키라에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탈취한 지구군 모빌 슈트의 성능을 참고해서 자라 새 의장의 지시 아래 개발된 자프트 군의 최신예 기체라네요."

그래서 스트라이크와도 닮은 것이다. 아마 PS 시스템과 콤팩트하게 개조된 빔 병기도 도입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신예기라면 자프트에서도 극비로 취급 받는 것일 텐데…. 키라는 그저 압도되면서 물었다.

"이걸… 왜 나한테…?"

라크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지금의 당신에게 필요한 힘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녀는 문득 깊은 시선을 키라에게 향했다.

"마음 만으로도… 힘 만으로도… 안 돼요. 그래서…."

마음 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힘 만으로는 바꾸어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한다.

"키라의 바람에… 가고 싶다고 바라는 곳에 이것은 불필요한가요?"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미소 지으며 그저 똑바로 키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존재에 헤아릴 수 없는 의지를 감추고….

"넌… 누구지?"

자신도 모르게 키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소녀는 대답했다.

"전 라크스 클라인이에요, 키라 야마토."

그렇다. 그들은 각각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다.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그들은 만났고, 그리고 이 때 몸 깊은 곳에서 서로를 이해했다. 키라는 단 한 마디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것을 맡길 만한 사람으로 인정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이었다. 라크스는 미소 지었다. 차를 따라 준 일에 대한 감사를 듣는 것처럼 태연한 미소로…. 그녀에게는 아마 이것도 누군가의 잔에 차를 따르는 것과 같은 행위일 것이다.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자신이 줄 수 있으므로 준다는…. 파일럿 슈트로 갈아 입은 키라의 손을 이끌고 라크스는 프리덤에 올라 탔다. 흉부 위에서 해치가 열리더니 조종석에서 좌석이 솟아 올랐다. 그 앞에서 키라는 문득 깨닫고 돌아 보며 물었다.

"…괜찮겠어?"

얼빠진 일이지만 그제야 비로소 이 행위가, 남겨 두고 가는 라크스에게 굉장한 위험을 초래하는 폭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국가의 중요 기밀을 적의 병사였던 사람에게 넘기다니, 제３자가 본다면 반역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라크스는 그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저도 노래할 테니까요, 평화의 노래를…."

키라는 이해했다. 그녀 역시 걸음을 떼기로 했다는 것을.

"…조심해."

"예, 키라도…."

라크스는 키라에게 다가갔다. 그 미소가 다가오더니 부드러운 입술이 뺨에 닿았다.

"…저의 힘과 함께."

"응…."

짧은 키스 후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 보면서 키라는 미소 지었다. 그녀가 키라를 믿는 것처럼 키라도 라크스를 믿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을 묵묵히 받고 자신의 믿음대로 싸우는 일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다녀오세요."

마지막으로 라크스는 우아하게 인사한 후 캣 워크 위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 본 후, 키라는 조종석으로 들어가 기체에 전원을 넣었다. 엔진이 구동되는 소리와 함께 OS가 기동되며 모니터에 시스템 이름이 물 흐르듯 떠올랐다.

 

Generation

Unsubdued

Nuclear

Drive

Assault

Module….

 

키라의 입가에 무심코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도 'GUNDAM'이다. 아마 나포한 기체의 OS명을 본 기술자 중 누군가가 장난 삼아 붙인 이름일 것이다. 전방위 모니터가 켜지고 계기 패널에 잇달아 빛이 들어왔다. 키라는 재빨리 스펙을 확인하며 기체를 기동시켰다. 무장은 머리 부분에 MMI-GAU2 피크우스 72mm 근접 방어용 기관포, 허리 부분에 MA-MO1 라켈터 빔 사벨과 MMI-M15 쿠시피어스 레일 포, 등에 달린 날개에 M100 파라에나 플라즈마 수속 빔을 장비하고 있고, 손에는 MA-M20 루프스 빔 라이플이 들려 있었다. 어느 하나를 뜯어 보아도 런처 스트라이크의 아그니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화력이었다. 이 정도의 파워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며 분주히 눈을 움직이고 있던 키라는 어느 한 단어에 눈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뉴트론 재머 캔슬러…?"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키라는 알고 있었다. 이 기체는 핵 에너지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기술이 지구 연합군의 손에 넘어 간다면 플랜트는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피의 발렌타인'이 반복되는 것이다. 새삼 키라는 자신에게 맡겨진 물체의 중대함을 실감하며 스로틀과 레버에 힘을 주었다. 버니어 슬러스터에서 가스가 분출되며 기체에 접촉되어 있던 케이블이 튕겨 날아갔다. 공장 안에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음만으로도…."

키라는 똑바로 진행 방향을 응시했다.

"힘만으로도…."

문 쪽에 서 있던 라크스가 미소 지은 후 문을 닫았다. 위쪽 에어 록 해치가 잇달아 열리며 별이 깔린 하늘이 보였다. 진공의 바다 저 편에서 푸르게 빛나는 별을 향해 키라는 날아 올랐다. 그 손에 새로운 검을 들고….

 

 

그리고 검은 강림했다. 키라는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고 있었다. 다들 지쳐 있어서 뭔가를 생각할 힘도 잃고 탈진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동정하면서 키라는 물었다.

"그래서 아크 엔젤…, 마류 씨 일행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그 물음에 비로소 그들의 머리에 '장래'에 대한 걱정이 떠오른 듯 했다. 무우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고, 마류는 당혹스러운 듯 우물거렸다.

"어떻게 하다니…?"

"뉴트론 재머와 자기장의 영향으로 지금 통신은 전혀 되지 않습니다."

토노무라가 습관적으로 보고하자, 노이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응급 처치를 한 후 자력으로 파나마까지 갈까요?"

무우가 허탈하게 말했다.

"환영해 줄까, 이것 저것 알아 버린 우리들을?"

그러자 마류도 맥이 풀리는 사실을 입에 담았다.

"명령 없이 전열을 이탈한 본 함은 적 앞에서 도망친 함이 되겠지요."

그 말에 다들 진절머리가 난 표정을 지었다.

"원대 복귀해도 군법 회의인가?"

"또 죄가 추가되는구나."

노이만과 찬드라가 얼굴을 마주 보며 말하고 어깨를 축 떨구었다. 고생 고생하며 도착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견책과 배신…, 적과 함께 죽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위반하고 살아 남았는데, 살아 남은 것에 대한 심판을 받기 위해 다시 우군으로 가야 하는 건가? 그들이 아니더라도 허탈해질 것이다.

"왠지… 뭘 위해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됐어."

마류가 초연하게 중얼거리자, 다들 어깨를 떨구었다. 똑같다고 키라는 생각했다. 전쟁이기에 적을 해치우려고 같은 편까지 희생시킨다. 이 '작전' 자체는 성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프트는 이 작전에 의해 전력이 크게 손실되었다. 적에게 준 타격이 잃은 것보다 큰 이상 전략 상으로는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한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이것이 군이라는 조직이고 전쟁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명령을 내린 자의 죄가 사라지는 것일까? 버림받은 병사들의 죽음이 보상되는 것일까?

"이런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무엇과 싸워야 한다고, 마류 씨는 생각하시나요?"

키라는 물었다. 마류 일행은 놀라 그를 쳐다보고 우물거렸다. 그런 어른들을 똑바로 쳐다본 후, 키라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북단의 하늘에는 아직도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오로라가 휘날리고 있었다. 키라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들은…, 저는 '그것'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플랜트에 도착한 아스란은 곧바로 국방 위원회 본부로 향했다. 본부 로비에 한 발짝 들어간 그는 놀라 잠시 발을 멈추었다. 주위는 소란스러웠다. 직원들은 살기 등등하게 뛰어다녔고, 병사와 지휘관들은 큰 소리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확연히 사람이 많은 로비를 지나치다가 아스란은 돌연 귀에 들어온 단어에 움찔해서 돌아 보았다.

"전멸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 없잖아?!"

'전멸? 무슨 소리지? 설마 그건…?'

주위를 돌아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오는 젊은 지휘관을 발견하고 아스란은 달려갔다.

"유우키 대장님!"

사관 학교 시절 신세를 진 적이 있는 대장이다. 레이 유우키는 말을 걸어 온 아스란을 발견하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스란 자라! 무슨 일 있어, 이런 곳에서?"

"아뇨…."

상황을 설명한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리고 불안에 사로잡혀 아스란은 조급하게 물었다.

"그보다 이 소란은 대체 뭐죠?"

유우키는 질문을 받자 약간 동요했다. 그리고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핏 브레이크가 실패한 모양이야…."

"예?!"

아스란은 숨을 삼켰다.

"그럼… 파나마는…?"

"그게… 파나마가 아니었어."

유우키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스핏 브레이크는 작전에 JOSH-A로 변경됐지. 위쪽에서 전부터 극비리에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야…."

"…알래스카였나요?!"

아스란도 곧바로 아버지의 의도를 이해했다. 하지만 유우키를 비롯한 지휘관들도 진짜 목표를 통보 받지 못했던 듯, 그는 그 사실 자체에 석연치 않음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제쳐 두고 그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건 아직 모르지만… 전멸이라는 보고도 있더군."

"그럴 리가…!"

아스란의 목소리가 상기되었다. 이자크와 라우도 스핏 브레이크에 참가했을 것이다. 헤어진 지 하루 밖에 되지 않은 이자크의 얼굴이 떠올라 오한 같은 충격이 엄습했다.

'전멸…? 이자크까지?! 죽지 말라고 말하며 헤어진 게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그리고 너에게는 한 가지 더 나쁜 소식이 있다…."

유우키는 목소리를 낮추고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흘렸다.

"극비리에 개발되고 있던 최신예 모빌 슈트 한 기가 누군가에게 탈취 당했는데…."

그 말에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어서 얼빠진 듯 서 있던 아스란은 상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탈취된 최신예 모빌 슈트…. 그 말을 듣고 아스란은 떠올렸다. 셔틀과 스쳐 지나간 낯선 기체…. 그것이 그 모빌 슈트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이번에야말로 아스란은 경악했다.

"그것을 인도한 게 라크스 클라인으로 밝혀져서 지금 국방 위원회는 발칵 뒤집어졌지."

발 밑의 공간이 사라진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런…! 설마!"

아스란은 있는 힘껏 외쳤다.

"라크스가… 그런 일을! 설마…!"

항상 조용했던 그의 변모에 유우키는 조금 놀란 듯 몸을 뒤로 뺐다. 아스란은 그 후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뛰쳐 나갔다. 그 때 그는 결례라는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라크스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모빌 슈트에 대한 것을 알 리도 없는 그녀가, 아니 그 이전에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그녀가 그런 수상한 일에 가담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 분명 이것은 뭔가의 착오다. 모두 착오일 것임이 분명하다!

아스란은 본부의 중추로 가는 통로를 더듬어 가다가 오퍼레이션 룸에서 새어 나오는 절박한 대화에 저절로 몸이 굳었다.

"뭐 하고 있나? 지브롤터에서도 원군을 보내라!"

"무인 정찰기로는 안 돼! 지금 필요한 건 상세한 보고란 말이다!"

"그런 얘긴 듣지 못했어! 어디서 나온 정보야, 그게?!"

정보는 꽤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모양이다. 그 사실이 분명 심상치 않은 사태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했다. 아스란은 빠른 걸음으로 그 곳을 통과한 후 국방 위원장 집무실 앞에서 비서관에게 고했다.

"인식 번호 285002, 아스란 자라. 의장님의 명을 받고 출두했습니다!"

대기하는 시간을 위가 타는 것 같은 심정으로 기다리다가, 곧 "들어 오십시오." 라는 비서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돌진하듯 안쪽 문으로 향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당장 아버지에게 사정을 듣기 위해 초조한 마음으로 입실한 아스란은 집무실 안의 닿으면 베일 것 같은 긴장된 공기에 압도되어 멈추어 섰다.

"사용된 것은 사이클롭스인 듯 합니다. 기지 지하에 상당한 규모의 어레이를…."

"크루제는?!"

"아직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만 무사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보좌관의 대화를 멍청히 서서 듣고 있던 아스란은 그 보고에 휴,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라우는 무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자크도…. 그 때 기세 좋게 문이 열리며 다른 보좌관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아이린 카나바를 비롯한 몇 명의 평의회 의원들이 사태의 설명을 요구하며 회의장에 모여 들고 있습니다."

패트릭은 매서운 시선을 그에게 던진 후, 문 옆에 서 있는 아스란을 발견하고는 "잠깐 기다려라!" 라고 짧게 지시했다.

"임시 최고 평의회의 소집을 요청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보좌관의 말을 듣자 패트릭은 증오스럽게 코웃음을 쳤다. 하필 이럴 때…,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카나바를 비롯한 클라인 파의 반응은 이해가 된다. 아마 아버지는 평의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JOSH-A를 함락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는 의회의 승인을 얻지 못한 셈이 된다. 아버지의 원래 의도는 압도적인 승리만 손에 넣으면 일부 의원이 무슨 말을 하건 여론의 지지를 얻어 무마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박은 실패로 끝났다. 이래서는 사후 승인은 커녕 의장 자리도 위험하다.

"어찌 됐건 카펀테리아에 잔존 부대의 확인을 서두르게 해라! 책임 회피는 하지 마! 필요한 건 냉정하고 객관적인 보고니까!"

패트릭은 앞의 보좌관에게 호통 친 후, 두 번째 보좌관을 다시 쳐다보았다.

"클라인 가족의 행방은?!"

그 말에 아스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보좌관은 책상 앞에 다가가서 대답했다.

"아직, 입니다. 꽤 용의주도하게 루트를 만든 것 같아서…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깨닫고 아스란은 다시 설마, 하고 생각했다. 라크스 가족은 최신예 기체가 탈취된 후 곧바로 모습을 감추었다는 말이리라. 게다가 국방 위원회에서조차 발자취를 쫓지 못할 만큼 용의주도하게, 그래도 라크스와 시겔 클라인을 떠올리면 도저히 그런 행동과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쳇." 하고 증오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원수를 놓치기라도 한 듯, 그리고 그는 마음을 굳힌 듯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믿기 힘든 명령을 했다.

"사법부를 움직여라. 카나바를 비롯해서 클라인과 친교가 깊었던 의원은 모두 구속한다."

아스란은 숨을 삼켰고, 보좌관도 생각지도 못한 명령에 당황했다.

"하… 하지만…."

그러자 그의 망설임을 날려 버리듯 패트릭은 격하게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스파이를 끌어들인 라크스 클라인! 함께 도주해서 행방을 감춘 그 아버지! 누설된 스핏 브레이크의 공격 목표!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간단한 도식 아닌가!"

아스란은 아버지의 입에서 튀어 나온 암시에 전율하며 다시 동요했다. 다시 말해 그는 라크스 가족이 플랜트를 배신하고 지구 연합군에 가담하여 작전 내용을 흘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클라인이 배신자다! 그런데 나를 추궁하려는 건가, 그 녀석들은?!"

패트릭은 분노에 사로잡혀 호통쳤다.

"놈들이 더…, 아니 놈들이야말로 클라인에 가담하여 숨겨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아스란은 그저 망연자실하게 아버지의 일방적인 논리가 교묘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듣고 있었다. 확실히…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추론은 성립된다. 자프트의 상층부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스핏 브레이크의 목표를 지구 연합군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그러나 애당초 누설을 겁내 패트릭이 평의회 의원들에게도 밝히지 않았으니, 이미 의원도 아닌 클라인이 그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았다.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도식… 이라기보다 어린 아이처럼 알기 쉬운 도식으로 바꿔 버린 게 아닐까? 클라인과 카나바 등이 아무리 패트릭의 강경 자세에 대립하더라도 플랜트의 병사들을 지구 연합군에게 팔아 넘기는 짓을 할 리는 없다고 아스란은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플랜트의 총의를 대표하는 자시에 설 수 있을까? 그러나 이렇게 패트릭은 자신의 실패를 일방적으로 클라인 파에 떠넘기고 또한 과실을 추궁하려는 입을 봉하고 말았다. 그 사실이 아스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보좌관은 패트릭의 기세에 겁을 먹었는지 "알겠습니다." 라고만 대답하고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방에 자신과 아들만이 남자 패트릭은 크게 한숨을 쉬고 의자에 앉아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 약한 몸짓에 아스란은 무심코 방금 전까지의 의문을 잊고 다가갔다.

"아버지…."

다시 샘솟은 육친에 대한 마음은 다음 순간 차가운 시선으로 가라앉았다.

"뭐냐, 그게?!"

채찍질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아스란은 바로 자세를 고치고 경례했다.

"…실례했습니다, 자라 의장 각하!"

패트릭은 잠시 품평을 하는 듯한 눈으로 아스란을 쳐다보았다. 그 눈이 항상 아들을, 자신이 기대하는 기준과 대조해 보고 '아직 부족해.'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아스란은 화가 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심정이 되었다. 이번에도 패트릭은 불만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마치 실망스럽지만 아들이 이 녀석 뿐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상황은 알고 있겠지?"

그는 쌀쌀맞게 아스란에게 말했다.

"예…, 아뇨, 하지만…!"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아서 아스란은 물고 늘어졌다.

"전 믿기지 않습니다! 라크스가 스파이를 끌어 들였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패트릭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안색을 살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라크스 가족이 반역자의 오명을 쓰고 만다. 하지만 패트릭은 모니터를 턱으로 가리키며 "봐라." 라고 말했다. 그가 조작하자 벽 모니터에 조금 거친 영상이 나타났다.

"공장의 감시 카메라 영상이다."

아스란은 숨을 삼켰다. 거대한 모빌 슈트의 상반신, 그 앞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자프트 제복을 입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을 나부끼고 있었다.

"프리덤의 탈취는 이 직후에 이루어졌다."

영상이 확대되며 라크스의 얼굴이 비쳤다. 거친 화면에서도 뚜렷하게, 하얗고 꿈꾸는 듯한 그 얼굴은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은 카메라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아스란은 꼼짝도 못하고 그 영상을 쳐다보았고, 패트릭은 그의 동요를 보자 멸시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증거가 없으면 누가 그 여자에게 혐의를 두겠나? 네가 뭐라고 해도 이것은 사실이다!"

영상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스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라크스 클라인은 더 이상 너의 약혼녀가 아니다. 아직 비공개지만 국가 반역죄로 수배 중인 도주범이지."

그렇구나. 아스란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자신들은 약혼한 사이가 아닌 건가?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 틈새로 흘러 내리는 것 같다. 키라, 니콜, 디아카, 이자크와도 헤어졌고, 마침내 라크스까지…. 그는 신음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들었다.

"넌 탈취된 X10A 프리덤의 탈환과, 파일럿 및 그가 접촉한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 시설, 그 모두를 없애는 임무를 맡도록 해라."

너무도 극단적인 명령에 감상적인 기분은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고, 아스란은 놀라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험악한 얼굴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공장에서 X09A 저스티스를 수령해서 준비가 끝나는 대로 임무에 착수해라. …탈환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프리덤을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책상의 호출 스위치를 눌렀다. 아스란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잠깐만요. 접촉한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 시설까지 모두 제거하라는 겁니까?"

자신이 명 받은 내용에 동요하며 묻자, 아버지는 차갑고 어두운 눈으로 아스란을 올려다 보았다.

"…X10A 프리덤과 X09A 저스티스는 뉴트론 재머 캔슬러를 탑재한 기체다."

아버지가 한 말의 의미가 머릿속에서 이해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해가 되자 방금 전의 지나칠 정도로 과격한 명령이 납득되었다. 뉴트론 재머 캔슬러…. 그런 것이 만약 지구 연합군에게 넘어간다면…!

"그런…!"

그는 눈 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감각과 싸우면서 외쳤다.

"어째서 그런 것을!"

핵에 의해 사라진 유니우스 세븐…. 한 순간에 진공으로 흩어진 수만 명의 목숨…. 그 중 한 명은 아스란의 어머니, 그리고 패트릭의 아내였다. 그런데도 그 비극을 되풀이할 수 있는 것을 어째서?!

"플랜트는 모든 핵을 없애기 위해, 그것을 위해 뉴트론 재머를 쓴 것이 아니었나요?"

답답한 마음으로 아스란이 따지자, 패트릭이 차갑게 대답했다.

"이기기 위해 필요해졌다, 그 에너지가!"

아스란은 멍하니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느 샌가 방에는 유리 아말피의 모습도 보였다. 방금 전의 호출로 부른 것은 그였던 모양이다.

"…이번 일은 신속하게, 그리고 최대한 은밀하게 처리해야 한다."

패트릭은 이제 평소의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다짐하듯 말했다.

"너의 임무는 중대하다. 알겠나? 모든 노력을 다해라."

아스란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최종 체크까지는 아직 여덟 시간 정도 더 걸리니까 그 때까지 매뉴얼을 머릿속에 넣어 두도록 해."

유리 아말피의 말을 들으면서 아스란은 앞에 있는 기체를 올려다 보았다. 플랜트 근처에 있는 공장에서는 아직 작업 요원들이 X09A 저스티스의 기체에 달라붙어 있었고, 열린 몸체의 엔진부에서는 핵 에너지를 가리키는 특유의 마크를 볼 수 있었다. 아직 믿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문득 유리가 한숨을 쉬며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어. 니콜도 그녀의 노래를 좋아했는데…."

아스란은 그 이름에 몸을 경직시켰다.

"정말 죄송합니다, 니콜의 일은…."

참회의 염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자, 유리는 놀라 고개를 들더니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인가? …자네는 그의 원수를 갚아 주었잖나."

그 말에 왠지 몹시 가슴이 아팠다. 유리 입장에서 보면 키라는 아들을 죽인 미운 원수에 불과하고, 아스란은 그 원수를 갚아 준 영웅인 것이다.

"로미나는 이번 일로 완전히 실의에 빠졌지만…."

니콜의 어머니와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아들을 빼닮은 귀여운 사람으로 지구에 강하하기 전에 콘서트장에서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아들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알고는 있지만… 전쟁이니…."

감사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들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바로 자신인데…. 하지만 유리는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래도 니콜이나 자네나… 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싸우고 있는데 어째서 그걸 배신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나는 그게 분해서 견딜 수가 없네!"

아스란은 그 말 역시 복잡한 심정으로 들었다. 유리는 그의 내심을 깨닫지 못하고 분개해서 말했다.

"희생은 이제 진력이 나! 그래서 더욱 뉴트론 재머 캔슬러의 탑재에 힘을 쏟았는데…!"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스란은 물끄러미 금지된 힘을 나타내는 마크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자신들은 '이기기 위해' 싸우게 된 것일까? 아스란은 지키고 싶어서, 어머니처럼 살해 당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그것을 위해 총을 들었던 것인데.

"그것이 지구군의 손에 넘어가면 놈들은 얼씨구나 하고 다시 핵을 쓰겠지…."

유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해…."

이렇게 된 이상 아스란은 아버지의 말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플랜트를 다시 핵의 공포에 노출시킬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파일럿과, 그리고 그와 접촉한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 시설, 그 모든 것의 제거…. 금지된 힘과 접촉한 자들은 한 명도 남김 없이 말살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다정하게 미소 짓는 그 소녀가 있다. 곤혹스럽게 거대한 기체를 올려다 보던 아스란은 문득 유리가 매달리는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탁하네, 아스란."

그 부탁을 거스를 수 있을까? 이 사람은 자신이 죽게 한 소년의 아버지인 것이다.

 

 

완전히 변해 버린 저택의 모습에 아스란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클라인 저택은 이미 관헌의 손에 의해 구석구석까지 수색된 후였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깨졌고, 가구들은 모두 뒤집어졌으며, 서랍 안의 내용물은 난폭하게 바닥에 쏟아졌다. 우아하고 차분한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던 날의 긴장과 기대가 되살아나서 가슴이 옥죄어 오는 듯 아파 왔다. 이렇게까지 철저히 파괴할 필요가 있었을까? 설사 반역의 혐의가 있다고 해도 저택의 주인은 과거 최고 평의회의 의장이고,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플랜트의 모든 국민이 사랑했던 아이돌이 아니던가? 경의도 사랑도 미움 앞에서는 이리도 약하게 허물어져 버리는 것일까? 아스란은 사람의 증오에 당혹스러움과 분노를 느끼면서 안뜰로 나섰다. 뜰로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었다. 아스란은 이번에는 확실한 분노를 느꼈다. 단정한 정원수와 아름다운 꽃들을 무참히 짓밟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들도 살아 있는 것은 똑같은데…. 부스럭,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나서 아스란은 고개를 돌렸다.

「감사! 감사!」

과거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는 화단 속에서 분홍색 공이 튀어 나왔다. 하로였다. 흰 꽃잎들이 무참하게 흩어져 있었다. 아스란은 그것에 다가가서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술래잡기라도 하려는 듯 분홍색 하로는 슬쩍 그 손을 피했다. 안 그래도 한 손을 다친 아스란은 그것을 잘 붙잡지 못했다. 그는 조바심이 나서 타이르듯 로봇을 불렀다.

"하로!"

그러자 하로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아스란을 향해 휙 날아 왔다. 그는 허겁지겁 그것을 받았다. 아무래도 그의 음성에 반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아스란은 문득 깨닫고 방금 전까지 하로가 뛰고 있던 화단을 살펴 보았다. 흰 장미…. 그것은 과거 이 저택을 방문했을 때 라크스가 멈춰 서서 이야기를 해 준 꽃이다.

─이 꽃은 제가 처음으로 노래한 극장이에요….

그 때 크게 꽃을 피운 장미를 만지면서 라크스는 말했다. 아스란이 의미를 알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자, 그녀는 마치 그 꽃처럼 활짝 웃었다.

─기념하는 꽃이거든요….

그리고 지금 그 메시지를 이해한 아스란은 하로를 안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키라는 예전에 자신이 쓰던 방으로 들어가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 방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어서 그가 처음 이 곳을 배정 받았을 때와 똑같아 보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침대 위에 키라의 개인 물품을 넣어 둔 작은 상자가 놓여 있다는 것 뿐이다. 그는 그 쪽으로 걸어가다가 발 밑에서 작게 빛나는 것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프레이의 립스틱이었다. 그녀의 짐은 이것 말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함에 돌아온 후로 그녀의 모습은 볼 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출격했을 때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프레이를 남겨 두고 키라는 달려갔다.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말만 남기고…. 이루어지지 못한 약속. 자신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의 상념을 그리운 지저귐이 끊었다.

「토리.」

녹색의 작은 새가 날아와서 키라의 어깨에 내려 앉았다. 돌아 보자 문 쪽에 사이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있었어. 전원을 끄는 것도 뭐해서…."

자신의 애완용 로봇의 전원을 끄고 집어넣지 않았던 사이의 기분을 생각하자, 키라는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그러자 사이는 다시 묘하게 주눅이 든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 사이."

떠나려던 사이를 키라가 불러 세우며 물었다.

"프레이… 는?"

그녀의 이름을 듣고 사이의 얼굴이 움찔하면서 굳었다. 그는 거북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다.

"…그녀는 알래스카에서 다른 곳으로 전속됐어. 버질 중위님과 프라가 소령님과 함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키라의 태도를 눈치 채고 사이는 덧붙였다.

"아, 소령님은 돌아왔지만 말이야. 버질 중위님과 프레이는 가 버렸어. 지금은 캘리포니아 쯤에 있지 않을까…?"

"…그렇구나."

키라는 조금 안도했다. 그렇다면 프레이도 무사할 것이다. 지금은 만날 수도 없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지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넌…."

사이의 목소리에서 뭔가를 느끼고 키라는 시선을 들었다. 사이는 그의 얼굴을 보자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지금까지 간신히 억눌러 왔던 것을 토해 내듯 외쳤다.

"넌 왜 그런 거야?!"

사이가 갑자기 분통을 터뜨리자, 키라는 영문을 모른 채 눈을 크게 떴다. 사이는 끓어 오르는 격정을 스스로도 멈출 수 없는 듯 했다.

"달라! 나 따위와는 다르다고!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키라는 깨달았다. 사이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프레이의 일이 있었을 때도 키라에게 정면으로 충돌해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미웠던 거야?"

키라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사이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키라…."

사이는 키라의 얼굴을 보며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저으려다가 그 동작을 멈추었다.

"미안…! 그래, 난 네가 미웠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그는 매달리듯 키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을 때… 굉장히 슬펐다고!"

"사이…."

"그래서… 살아 있어서… 돌아와 줘서 정말 기뻐…. 그건 진심이야…!"

안경 뒤의 눈동자에 눈물이 번졌다.

"미안…. 그런데 널 보고 있으면 스스로가 비참해져서 견딜 수가 없어…, 나는…!"

어떤 사람이건 누군가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사이는 키라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있다. 키라는 그것이 기뻤다.

"하지만… 사이도 나와는 다르잖아?"

키라가 그렇게 말하자, 사이는 눈물에 젖은 눈을 천천히 들더니 놀란 듯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네가 할 수 없는 일을 난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키라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넌 할 수 있어…."

같다는 것, 다르다는 것…. 사람들은 무심코 그것에만 눈을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모두가 같을 필요가 있을까? 조금 공부를 잘 한다고 해서, 운동을 잘 한다고 해서, 모빌 슈트를 조종할 수 있다고 해서… 그런 것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정하고 우열을 매기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인간의 가치는 그 자신이 소중하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 하물며 다른 사람이 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에 가치 따위를 매길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죽건 슬퍼하는 사람은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머리가 좋아서도, 용모가 아름다워서도 아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키라가 키라인 것처럼, 또한 사이가 사이인 것처럼…. 사이는 찬찬히 키라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이 때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만난 것이다.

 

 

'화이트 심포니'…. 페인트가 반 쯤 벗겨진 간판이 걸려 있는 버려진 홀 앞에서 아스란은 차를 세웠다. 화이트 심포니. 그것이 그 장미의 이름이었고, 라크스가 처음으로 콘서트를 연 옥토벨 시에 있는 홀 이름이기도 했다. 아스란은 차에서 내리려다가 잠시 망설인 후 권총을 집어 들었다.

'이걸로 라크스를 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섬뜩해져서 그는 그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 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프리덤과 접촉한 모든 자의 제거다. 임무라면 그는 라크스를 쏘아야 한다. 그것이 플랜트를 지키기 위해 군인인 그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아스란은 의무감에 몰리면서도 그래도 약간의 희망에 매달려 보기로 했다. 모든 것이 어리석은 오해일 것이다. 라크스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사실이라도 분명 그녀는 누군가에게 조종되어 이용 당했음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배후에 있는 자와 대항하기 위해서도 총이 필요하다. 반드시 그녀를 되찾고 말 테다. 아스란은 굳은 결심을 하고 권총을 쥐고 코트 밑에 감추었다.

낡은 문을 최대한 살며시 열고 아스란은 새카만 엔트런스 홀로 들어갔다. 이 곳이 폐쇄된 지 몇 년이나 지났을까? 바닥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고, 걸어 보니 깨진 유리가 발 밑에서 우직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희미하게 노래가 들려 왔다. 아스란은 걸음을 재촉해 홀로 통하는 방음 문을 밀어 젖혔다. 그 순간 노래가 뚜렷해졌다. 무대에는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폐허를 흉내 낸 세트를 비추고 있었고, 그 무대 위에서 라크스가 노래하고 있었다. 풍부한 목소리가 홀 구석 구석까지 울려 퍼져서 아스란은 머리를 얻어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었다. 맑으면서도 섬세하고 동시에 압도될 정도의 힘이 내재된 목소리였다. 가슴 속에서 돌연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폭발했다. 상실의 아픔과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지켜야 할 것에 대한 마음과 의문….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아스란은 눈을 감았다. 그 때 하로가 그의 손에서 뛰쳐 나갔다.

「하로, 하로. 라크스, 라크스.」

"어머, 분홍아."

객석을 통통 뛰어 가는 분홍색 하로를 향해 라크스는 노래를 멈추고 양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안에 하로는 뛰어 들었고, 라크스는 객석 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당신이 데려 오셨군요. 고마워요."

그 당당한 태도에 아스란은 울컥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객석을 가로질러 무대로 올라갔다.

"라크스!"

"예?"

라크스는 무대 의상으로 보이는 노 슬리브 드레스에 몸을 감싼 채 세트의 잔해 더미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건?"

아스란이 언성을 높여 묻자, 라크스는 오히려 되물었다.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 곳으로 오신 게 아닌가요?"

왜…! 아스란의 가슴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 부정하지 않는 거지? 왜 그녀는 이렇게나 차분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거지?

"그럼 정말인가요, 스파이를 끌어 들였다는 게…?"

그는 비통하게 외쳤다.

"왜 그런 짓을…!"

'당신까지 나를 떠나려는 건가? 왜?!'

그러자 라크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스파이를 끌어 들이는 일 따윈 안 했어요."

아스란은 놀라면서 매달리는 것 같은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그가 바라던 말이 아니었고…, 오히려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키라에게 준 것 뿐이에요, 새로운 검을…."

라크스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의 키라에게 필요하고, 키라에게 어울리는 것이었기에…."

그 미소는 잔혹하게조차 보였다. 아스란은 얼어 붙은 듯 굳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키…라…?"

─내가… 너를 쏘겠다!

한 순간 섬광이 되살아났다. 키라의 몸을 불태운 그 섬광이…. 숨이 막혔다. 아스란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키라는… 녀석은…."

"당신이 죽였나요?"

그 말이 아스란을 꿰뚫었다.

'그렇다. 내가 키라를 죽였다.'

알고 있었던 사실. 스스로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했던 인식임에도 라크스가 한 말이 쐐기를 박듯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러나… 별안간 라크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키라는 살아 있어요."

냉정을 자랑하는 아스란의 두뇌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얼마 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살아…있어…? 키라가… 살아…있다고?'

그 의미가 뇌에 스며든 순간 아스란은 혼란에 빠졌다.

"거짓말!"

그는 겁 먹은 듯 소리치며 마치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기라도 한 듯 눈 앞의 소녀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대…대체… 무슨 꿍꿍이입니까, 라크스 클라인?!"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지? 그런…, 하필이면 그런 거짓말로 나를 혼란시키려 하다니…!'

키라가 살아 있다…. 그 가능성에 매달리고 싶다는 마음과 희망을 가졌다가 배신 당할 것에 대한 공포가 그의 뇌리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녀석이… 녀석이 살아 있을 리가 없어…!"

아스란의 얼굴이 지금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렇게나 괴로워하며 필사적으로 궁지에 몰아서 간신히 끝냈는데…! 그랬는데…. 녀석이 살아 있다면 다시 같은 괴로움을 맛보아야 한다. 더 이상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라크스는 그의 동요를 보고도 전혀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스란이 다소 침착성을 되찾은 듯 하자 입을 열었다.

"마르키오 님이 저에게 데려 오셨어요. 오브 근처의 섬에 마르키오 님의 전도소가 있지요. 키라도 그 곳에서 당신과 싸웠다고 말했어요."

그 말은 아스란에게 다시 충격을 주었다. 되는 대로 꾸며 댄 말로는 생각할 수 없는 구체적인 사실이 나오자, 있을 수 없는 점과 점을 잇는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아스란의 머리는 그녀의 말을 거부했다. 믿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자 그 표정을 보고 라크스가 차갑게 말했다.

"말은 믿지 않나요? 그럼 직접 보신 것은요?"

아스란은 다시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전장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플랜트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나요?"

이번에 그녀가 지적한 것은 아스란에게 방금 전과는 다른 꺼림칙한 전율을 가져왔다. 전장에서 헛되이 사라진 어린 목숨…. 그 목숨을 되살릴 수도 없는데 '이기기 위해' 아버지들이 집어 든 핵의 불…. 편견의 논리로 덮어 씌운 죄…. 그것을 입에 담는 자들을 구속함으로써 억눌러 온 반대 의견….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라크스는 의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스란이 믿고 싸우는 건 뭔가요? 수여 받은 훈장인가요? 아버지의 명령인가요?"

"라크스…!"

아스란은 외쳤다. 그 목소리는 애원하는 것처럼 괴로워 보였다. 확실히 자신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이끌어 가는 플랜트의 방향에, 그리고 싸우는 것 자체에…. 그러나… 자신은 군인이다. 명령에 따라 적을 죽이는 것이 의무고,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인 것이다. 플랜트를 지키기 위해…. 그런 아스란의 고뇌를 헤아리지 않고 라크스는 연거푸 말했다.

"…그렇다면 키라는 다시 당신의 적이 될지도 몰라요."

그녀는 훗 웃었다.

"그리고 저도…."

아스란은 놀라서 말을 꿀꺽 삼켰다. 겨누어진 총에도 아랑곳도 하지 않고 눈 앞에서 얌전하게 미소 짓는 이 여자는 누구인가? 이 사람이 과거 자신의 약혼녀였던 라크스 클라인인가? 언제나 온화하게 누구에게나 미소 지으며 초연하게 느껴질 만큼 천진난만한 그 소녀와 동일 인물인가? 자신이 아는 라크스 클라인은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스스로는 잘 아는 줄로만 알았던 이 낯선 인물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사뿐히 일어섰다. 그녀는 아스란에게 다가오면서 물었다.

"적이라면 저를 쏘실 건가요, 자프트의 아스란 자라?"

'그렇다…. 적이라면 쏴야 한다. 그럴 각오로 온 게 아닌가? 그것이 명령이라면….'

그러나 라크스를 앞에 두고 아스란의 손은 떨렸다.

"난…."

라크스는 그런 그를 동정도 증오도 없는 눈으로 그저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 때 어딘가에서 억누른 목소리로 "라크스 님!" 이라는 경고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홀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라크스는 슬쩍 입구로 눈길을 돌렸고, 아스란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지키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홀에 여러 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쳐들어 왔다. 그리고 무대 위의 두 사람을 객석에서 포위하듯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스란 자라."

한 사람이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걸어 왔다.

"과연 약혼자로군요. …저희들의 수고를 덜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스란은 사태를 파악했다. 자신은 미행 당한 것이다. 아버지는 결코 아스란을 믿고 이 일을 맡긴 것이 아니었다. 라크스를 잘 아는 사람으로 그를 이용하여 그녀에게 안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뿐…. 아버지가 자신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소속된 조직에 가지고 있던 충성심을 짓밟는 행위였다.

"자…, 물러 나십시오."

아버지의 부하가 은근하게, 그러나 깔보는 듯한 어조로 재촉했다. 아스란은 분노가 깃든 시선으로 쏘아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국가 반역죄를 저지른 도주범입니다. 피치 못할 경우에는 사살하라는 명령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막아 설 생각입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벌써 거기까지 사태가 진척된 건가…?'

새삼 아스란은 한기 같은 것을 느꼈다. 당사자에 대한 심문도 없이, 시간을 들여 검증한 것도 아닌데…. 이 상황은 마치 거추장스러운 존재를 멋대로 제물 삼아 제거해 버리려는 의도로만 여겨졌다. 분노와 곤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스란 앞에서 남자들은 조금씩 무대로 접근해 왔다.

라크스를 그들에게 넘겨도 되는 것일까? 설사 그녀가 배신자라고 해도 그 죄는 법에 의해 공정하게 심판 받아야 한다. 이런 녀석들에게 넘긴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될지도 모른다. 추궁 받는다 해도 호송 중에 도주를 꾀했다…라는 말로 얼마든지 얼버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숫자에 포위되어 있고 아직 상처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아스란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그저 총을 겨눈 채 서서히 좁혀 오는 남자들의 포위망을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스란이 다시 라크스를 등 뒤에 숨기면서 주춤 뒤로 물러섰을 때… 홀에 두 방 째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을 발사한 것은 아스란도, 남자들 중 한 사람도 아니었다. 객석에 있던 한 사람이 총성과 함께 털썩 쓰러졌다. 남자들의 주의가 다른 곳에 쏠린 틈에 아스란은 라크스의 몸을 안고 달렸다. 그 순간 홀의 어둠을 꿰뚫는 총성이 난무했다. 조명실과 2층 관람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누군가가 잇달아 패트릭의 부하를 쓰러뜨렸다.

"제기랄!"

방금 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도망치는 아스란 일행에게 총을 겨누어 봤지만, 곧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윽고 홀에 원래의 정적이 되돌아 왔을 때에는 패트릭의 부하 중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크스 님…!"

무대 한 쪽 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스란 일행에게 햇볕에 그을린 빨간 머리 남자가 달려 왔다. 라크스는 아스란의 품에서 나와 싱긋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아스란…."

꽃을 선물 받았을 때처럼 태연한 미소에 아스란은 다시 곤혹스러워졌다. 그녀는 방금 전의 총격전에 동요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두 예상했던 일이라는 뜻인가? 그리고 이 남자들은 누구지? 아직은 젊어 보이는 빨간 머리 남자는 힐끔 아스란을 쳐다본 후 라크스를 재촉했다.

"이제 되셨습니까, 라크스 님? 저희들은 가 봐야…."

"예,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여러분."

그 대화와 빨간 머리의 다소 짜증 섞인 태도로 보건대, 이 만남은 라크스의 희망에 의해 위험을 무릅쓰고 주선되었다는 것을 아스란은 깨달았다. 그들은 라크스의 몸에 닥친 위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스란은 그저 망연자실해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라크스의 배후에 있는 조직과 그 계획의 일단을 그는 엿볼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조종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지금의 그녀는 누군가에게 조종 당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대 의상을 입고 우뚝 선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주위에 대한 영향력을 느끼게 했다. 그렇다. 아스란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녀가 라우와 당당히 맞서던 모습을. 그녀는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놓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내부에 원래부터 있던 요소를. 라크스는 마지막으로 돌아 보며 말했다.

"그럼 아스란, 분홍이를 데려다 줘서 고마웠어요."

아스란은 말을 걸어 보지도 못하고 그녀가 동료들에게 보호 받으며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분홍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그녀가 돌아 보았다.

"키라는 지구에 있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아스란은 어깨를 움찔했다. 라크스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후훗 웃었다.

"이야기를 해 보시는 게 어때요, 친구와도…?"

아스란은 홀로 남겨졌다. 끝까지 라크스는 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도, 동의를 구하며 그 곳으로 그를 끌어 들이려고도, 눈 감아 주려고도, 아무 것도…. 그녀의 요구는 오직 하나, 아스란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라는 것 뿐이었다.

'지구….'

그리고 아스란은 결심했다.

저스티스의 공장으로 돌아와서 아스란은 조종석에 앉았다. 전원이 들어오며 시스템이 기동되었다. 이미 스펙은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다.

ZGMF-X09A 저스티스…. 머리 부분에는 GAU5 폴 크리스 기관포가 장비되었고, 가슴 부분에는 MMI-GAU1 사지투스 20mm 근접 방어 기관포를 장비했으며, 어깨 부분은 분리되어 RQM51 바셀 빔 부메랑이 된다. 그리고 프리덤과 공통 장비인 MA-M01 라켈터 빔 사벨과 MA-M20 루프스 빔 라이플을 가지고 있다. 등 뒤에 짊어진 거대한 백 팩 '패툼-00'은 분리가 가능한데, 구울처럼 비행 지원체(리프트)로 사용할 수도, 혹은 단독으로 비행시킬 수도 있다. 이 패툼-00에는 MA-4B 폴티스 빔 포와 M9M9 켈프스 선회 포탑 기관포 두 종이 장착되어 있다.

저스티스…. 이미 정의를 잃어 가고 있는 자신이 쓰기에는 그 이름이 너무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 공정하고 무자비한 여성… 저스티스(재판의 여신)의 의지가 여기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인가?

결국 자신은 라크스의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름답고 착하며 천진난만한 약혼녀…. 자신의 입에 맞는 일면만을 보고 그것으로 상대를 다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키라는 어떨까? 어린 시절부터 함께 시간을 보낸 친구. 그러나 그 친구의 무엇을 자신은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기에 상대가 이해해 주지 않는 것에 당혹스러워하고 짜증을 냈다. 그것은 상대에게 기대는 것일 뿐 진정한 이해는 아니었다. 그렇다. 아스란은 키라의 죽음조차 자신의 것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니콜을 죽게 한 죄의식 때문에 자신을 벌하기 위해 키라의 목숨을 원했다. 사실 그 목숨에 권리 따위는 없는데…. PS 시스템이 켜지며 기체가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키라는…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대의 마음을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

"아스란 자라, 저스티스 발진!"

아스란은 전방에 빛나는 별을 응시하며 새로운 기체를 발진시켰다. 그 역시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만신찬이의 아크 엔젤은 태평양을 남하해 갔다. 결국 마류 일행이 내린 결론은 도망치듯 오브에 몸을 의지하는 길이었다. 아무도 지금은 원대 복귀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지난 번에 이 바다를 건널 때는 그것이 유일한 바람이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오브는 상처 입은 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크 엔젤은 맨 처음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노고로 섬의 비밀 독에 입항했고, 지켜 보고 있던 우즈미 일행은 그 모습에 안도와 안쓰러움이 깃든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카가리는…. 그녀는 배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독에 계류됨과 동시에 함으로 통하는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해치가 열리는 시간도 못 기다리겠다는 듯 열리자마자 뛰어들었다가, 함에서 나오는 일행과 마주치자 허둥지둥 멈춰 섰다. 실려 나온 것은 중상을 입은 병사였는데, 그녀는 그 모습에 잠시 발을 멈추었지만 곧 튕기듯 달려 나갔다.

이미 익숙한 함 내를 그녀는 두리번 두리번 돌아 보면서 거주 구역 쪽으로 갔다. 하나의 통로를 지나치다가 그녀는 몇 발짝 헛걸음을 내딛고 되돌아 갔다. 그제야 찾고 있던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키라!"

그녀는 외치면서 그 소리에 돌아 본 소년을 향해 몸을 던졌다.

"카가… 우왓!"

별안간 달려 든 카가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키라는 그 기세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카가리는 상대에게 입힌 충격 따위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울부짖었다.

"이… 바보…!"

"카가리… 저기…."

"너…! 너! 죽은 줄 알았잖아, 이 녀석!"

있는 힘껏 부딪친 뒷통수를 문지르며 그녀를 올려다 본 키라는 우는 건지, 화 내는 건지, 기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여하튼 눈물로 엉망이 된 카가리의 얼굴을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

카가리는 키라의 멱살을 꼭 붙들고 거의 시비라도 거는 자세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정말 살아 있는 거지…?"

보면 알 수 있는 일인데 달리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살아 있어."

키라는 달래듯 말했다. 맞닿은 몸의 체온과 감각이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카가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시선 속에서 키라는 피식 미소 지었다.

"돌아왔어…."

그 미소에 전에는 없던 차분함을 느끼고 카가리는 아직 눈물이 고인 눈을 깜박거렸다. 그 후 두 사람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가슴이 벅차서 카가리는 어찌 됐건 떠오르는 대로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당연히 이야기는 공통의 지인에게 귀결되었다.

"그래…, 아스란을 만났구나."

무인도에 불시착한 부분까지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키라는 감회 깊게 중얼거렸다.

"너를 찾으러 갔다가 대신 녀석을 발견하고 말았어."

카가리는 힐끔 키라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웠던 증오심이 느껴지지 않아서 카가리는 조금 뜻밖이었지만, 안도하는 심정이었다.

"…굉장히 실의에 빠져 있었어, 그 녀석."

카가리는 아스란을 떠올리자 지금은 순수하게 걱정이 되었다.

"널 죽였다며… 울더라고…."

그 소년은 그 후 뭘 하고 있을까? 어떻게든 키라가 살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 때…."

격납고로 나와 나란히 프리덤을 올려다 본 키라는 문득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그의 동료를 죽였고…, 아스란은 토르를 죽였어…."

카가리는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토르에 대해서는 그녀도 기억하고 있었다. 키라는 괴로움을 참는 것 같은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해 볼 수 없었어. 나도…. 아마 아스란도…."

그 심정은 카가리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도 동료가 살해되자 분노에 사로잡혀 적을 죽이려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색하게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 라고 했지?"

"응."

키라는 그녀를 쳐다보며 그리운 듯 웃었다.

"아스란은 옛날부터 조금 야무진 구석이 있어서 난 항상 도움을 받기만 했어…. 토리도 아스란이 직접 만든 거야. 대단하지?"

태연하게 사이 좋은 친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키라의 태도에 카가리는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어째서 저기…, 그런 녀석과 싸우면서까지… 지구군의 편을 들려고 생각했던 거야?"

"뭐?"

눈을 크게 뜨는 키라에게 카가리는 물고 늘어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하지만 넌 코디네이터고…, 그런… 친구와 싸우면서까지… 왜…?"

사실 키라가 그 쪽 편에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데, 카가리는 안타까워서 그렇게 말하고 만 것이다. 지구군 따위는 버리고 자프트로 갔다면 키라도 아스란도 이런 슬픈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키라는 그 결단을 했을 때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빛을 보였다.

"내가 싸우지 않으면 모두 죽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것은 분명 그랬다. 카가리 역시 키라에게 몇 번이나 구원을 받았다. 그래도 두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코디네이터이기도 하고."

"뭐?"

카가리는 키라의 말에 허를 찔려서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그런 식으로 '코디네이터'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그는 프리덤을 올려다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난 내가 아스란을 죽이거나…, 아스란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몰라…."

아마 아스란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카가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들은 그런 서로의 마음을 떨쳐 버리고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았다. 전쟁은 소년들의 굳은 우정조차 삼켜 버렸다. 키라는 살아 돌아왔다. 그것은 정말로 기쁘다. 하지만 토르는 돌아오지 못한다. 아스란의 동료도 돌아오지 못한다. 이런 일은 정말로 끝내야만 한다. 카가리와 키라는 나란히 서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후우!"

식당 의자에서 몸을 젖히며 사이가 한껏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겨우…."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밀리아리아도 편안한 마음으로 음료수를 마셨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적어도 이제 당장은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겁을 먹는 나날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사이 옆에 앉은 카즈이가 조심 조심 물었다.

"저기…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뭐?"

"우린 이제 군인이 아니잖아."

기대 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카즈이에게 사이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조금 심술궂게 사이가 되묻자, 카즈이는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아크 엔젤은 군에서 이탈했잖아. 그러니까…."

"적 앞에서 도망치는 것은 중죄. 시효 없음."

사이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카즈이는 머쓱한 표정을 지은 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 사실 아직 이거 가지고 있거든…."

그가 주섬 주섬 꺼낸 것은 쭈글쭈글해진 종이를 테이프로 꼼꼼하게 이어 놓은 것이었다. 오래 전 다 함께 찢어 버린 제대 허가증이었다. 그는 그런 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이가 질린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아무 말 없이 가 버리는 그에게 카즈이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매달리듯 밀리아리아를 쳐다보았다. 밀리아리아 역시 무시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제 화가 나는 것을 넘어서 그 좀스러움이 한심했다. 그녀는 음료수 컵을 반납하다가 카운터에 놓인 식판을 발견했다. 방금 전 음료수를 가지러 왔을 때에도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주문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이거 왜 여기에 계속 놓여 있나요?"

주방 안 쪽에 대고 묻자, 조리사가 돌아 보더니 이마를 찰싹 때렸다.

"아, 맞다. 포로의 식사였는데! 부탁한다고 해 놓고 깜빡 했네."

밀리아리아는 한 순간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죽이려 했던 소년이 뇌리에 되살아 났기에 그녀는 기억을 떨쳐 내려는 듯 허둥지둥 그 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 포로를…. 아니 그를 죽이려 했을 때 증오에 가득 찼던 자신의 마음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 소년에 대해서는 이제 밉다거나 두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자신들과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렇다. 그리고 그가 토르를 죽인 것도 아니다.

─내가 아니야….

그것은 안도하며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밀리아리아가 빤히 쳐다보는 것을 깨닫자, 소년은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고 반항적인 태도로 말했다. 실제로 죽이려고 했을 때는 얼굴이 굳었던 주제에. 그야 뭐 죽는 것은 두려울 것이다. 다들 그렇다. 하지만 그가 죽이라고 말한 것은 밀리아리아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그녀는 문득 발길을 돌려 카운터에서 식판을 집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도 불쌍한 녀석일지 모른다. 본부에서는 계속 무시 당했고,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전투가 벌어져서 아마 자신이 아크 엔젤과 함께 사이클롭스에 날아갈 뻔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냥 입 다물고 있는 편이 친절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포로라도 배는 고플 것이다. 굶어 죽기라도 하면 잠자리가 사나워지겠지. 그래서 그런 것 뿐이지, 특별히 친절하게 대해 주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녀가 독방 입구에 서자, 포로는 이 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봐, 이제 그만 적당히…."

"…식사야."

투입구를 통해 식판을 밀어 넣자,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 들었는지 소년은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섰다. 그 당황한 얼굴이 우스워서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상대에 대한 공포심은 완전히 날아갔다. 밀리아리아는 웃음을 참고 일부러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분위기가 어수선하거든. 늦어져서 미안해."

무뚝뚝하게 말하자, 상대는 멍청하게 입을 떡 벌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밀리아리아가 입을 삐죽대자, 소년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아, 아니… 설마 네가 가져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방금 너라고 했니?"

밀리아리아는 뻔뻔한 상대를 노려 보았다. 소년은 고분 고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밀리아리아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고개를 휙 돌렸다.

"…밀리아리아야. '아가씨'가 아니라고."

"헤…, 헤헤…."

소년의 목소리에 조금 여유가 돌아왔다.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거야?"

'이 녀석, 너무 건방져.'

"안 돼!"

밀리아리아는 내뱉고 그냥 가 버리려고 했다.

"아, 이, 이 봐!"

소년은 허둥지둥 쇠창살에 달라붙으며 그녀를 불렀다.

"왜?"

"왜라니… 어떻게 된 거야, 이 함?"

그는 이 때다 싶어 호소했다. 아마 다른 누구도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았던 것이리라.

"나는 왜 계속 여기 있는 거냐고?! 게다가 그대로 전투를 벌이다니 정상이 아니야!"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밀리아리아는 내심 그에게 동정을 느끼면서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 곳은 어디야? 난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야?"

소년의 목소리는 필사적이었다. 확실히 이런 곳에 갇혀서 상황도 모른 채 기분 전환할 거리도 없이 방치된다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에 비하면 그는 훨씬 나은 것이다. 적어도 우군을 만나더라도 총살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오브야. 하지만 우리들도 못 내리고 있어. 너 따윈 알 바 아니고."

"…뭐?"

한 박자 뜸을 들였다가 소년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봐, 알래스카에 갔었잖아? 그런데 왜 오브로 되돌아 온 거지?"

밀리아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녀로서도 알 수 없었다.

"…나 이제 가 봐야 돼."

그녀가 침울한 얼굴로 걸음을 떼자 다시 등 뒤에서 "이 봐!" 라고 불러 세웠다. 시끄러운 남자애다. 어쩔 수 없이 돌아 보자, 소년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디아카."

그것이 그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밀리아리아는 쳇, 하며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떠났다.

통로를 걸으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흥…, 이상한 이름이야…."

 

 

"저희들의 이기적인 부탁을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류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 얼굴에는 진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오브 군 본부의 한 방. 아크 엔젤 측에서는 마류, 무우, 노이만, 그리고 키라가, 오브 측에서는 우즈미, 키사카, 카가리가 이 회합에 모였다.

"일이 일인 만큼 승무원 여러분들은 잠시 불편하시더라도 양해해 주기를 바라오. 어찌 됐건 느긋하게 쉴 수 있게는 하겠소."

우즈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크 엔젤 승무원들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구군 본부가 궤멸된 후로 다시 세계는 크게 움직이고 있소. 정보를 수집한 후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게 좋겠지. 당신들이 입고 있는 그 군복의 의미도…."

마류는 힐끔 자신의 군복을 쳐다보았다. 이 옷을 처음 입던 날의 결의는 이미 무참하게 짓밟혔다. 그러나 그 결의 자체도 지금의 그녀로서는 잘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우즈미의 요구로 알래스카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마음 속에는 괴로움과 무력감만이 늘어 갔다. 이야기를 다 들은 우즈미도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이클롭스를 사용했을 줄이야…."

마류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이 군복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적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런 책략은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군."

"하지만 알래스카는 확실히 그것으로 자프트 공격군의 전력 8할을 빼앗았습니다."

키사카가 냉정하게 사실을 서술한 후 내뱉듯 덧붙였다.

"입안자가 멋대로 구상한 희생을 바탕으로… 탁상 위에서 이루어진 차가운 계산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이 일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마류에게는 위안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우즈미가 벽 스크린에 호출한 영상을 보자 곧 그 마음도 시들해졌다.

「…수비군은 마지막 한 명까지 용감히 싸웠다.」

지구군 사령부의 공식 발표 영상이었다.

「…우리들은 이 JOSH-A가 붕괴된 날을 커다란 슬픔과 함께 역사에 새겨야만 한다.」

화면이 전환되며 바로 어제 떠나 왔던 그 전장…, 크게 함몰되어 지금은 하구에 만들어진 커다란 호수로만 보이는 파괴의 흔적이 비치자 마류는 무심코 눈길을 돌렸다. 그 밑에는 수백, 수천의 병사가 수몰되어 있다. 다시 침통한 표정의 보도관이 마치 노래하듯 말을 엮어 갔다.

「…그러나 우리들은 결코 굴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평화로운 대지를, 안전한 하늘을 빼앗을 권리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애당초 코디네이터들이 사는 평화로운 대지, 안전한 하늘에 핵을 쏘아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 버린 게 누구였지? 그런 비꼬는 말이 마류의 마음 속에서 싹텄다.

「…이번에 치른 희생은 크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맞서야만 한다. 지구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미래를 지키기 위해. 지금이야말로 힘을 결집시켜 거들먹거리는 코디네이터들과 싸워야 한다!」

보도관의 위선적인 선동 문구에 더 이상 참기 어려워졌을 때 우즈미가 영상을 껐다. 노이만은 고개를 숙인 채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무우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못 참겠군."

사령부가 자신들이 한 짓을 밝히지 않고, 버려진 병사들의 죽음을 코디네이터에 대한 반감으로 선동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이용할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서양 연방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나라들에게도 한층 강한 압력을 가하고 있소. 연합군으로 참전하지 않는 경우에는 적대국으로 간주하겠다면서…."

우즈미의 조용한 목소리에 마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에 대답하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 오브도 예외는 아니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있는 걸까? 새삼 마류의 가슴에 석연치 않은 마음이 솟구쳤다. 대의를 위해 전선의 병사들을 버린다는 행위도 용서하기 힘들지만, 이미 그 대의조차 잃고 있다면….

"녀석들은 오브의 '힘'이 필요한 거야."

카가리가 내뱉듯 말했다. 적과 아군. 대서양 연방은 세계를 그 둘로 양분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자국이 군림할 생각이다. 작전을 모른 채 알래스카에 남겨졌던 유라시아의 병력은 아군 속에 적이 있다는 도식을 잘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양분한 다음 '적'을 모두 멸하고 자신의 색깔로 세계를 모두 덧칠해 버리려는 것이다. 우리들이 바라던 것은 그런 것이었나?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나라는 코디네이터를 거부하지 않소."

우즈미가 조용히 말했다.

"오브의 법과 이념을 지킨다면 누구든 입국과 거주를 허가하는 몇 안 되는 나라요. 유전자 조작이 옳고 그르다는 문제가 아니오. 다만 '코디네이터니까', '내츄럴이니까' 하면서 서로를 다르게 보는… 그런 사상이 더욱 알력을 낳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자신'과 '그렇지 않은 존재'… 그것이 모든 싸움의 근저에 있다. 서로를 이해하면 그런 구별 따위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세계를 나누어 버렸기에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카가리가 내츄럴인 것도, 키라 군이 코디네이터인 것도 정작 본인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단순한 사실에 지나지 않을 거요."

우즈미가 말하자 키라와 카가리는 눈과 눈을 마주치며 쑥스러운 듯 웃음을 주고 받았다.

"그럼에도 코디네이터는 모두 나쁘고, 적이라며 공격하려는 대서양 연방의 방식에 나는 동조할 수 없소."

우즈미는 일동의 얼굴을 둘러 보았다.

"…대체 누가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거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은 마류 일행 자신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코디네이터를 악으로 보고 멸망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실제로 한 사람의 코디네이터를 함께 싸워 온 동료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하지만…."

그 때 끼어든 것은 무우였다.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만… 실례지만 그것은 단순한 이상론에 불과한 게 아닙니까?"

무우는 거북하기는 했지만 분명한 반론을 입 밖에 냈다.

"그것이 이상적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역시 코디네이터는 내츄럴을 업신여기고, 내츄럴은 코디네이터를 시기합니다. …그것이 현실이지요."

마류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브의 이념은 훌륭하다. 하지만 실제로 코디네이터의 경이적인 힘을 보면 어떻게든 자신과 비교하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때 키라가 동료들부터 고립되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감스럽지만 인간이란 그런 추악한 생물이다.

"알고 있소…."

우즈미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더니 창문을 통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물론 우리 나라도 모든 게 잘 되고 있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라며 포기한다면 언젠가 우리들은 정말 서로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을 거요."

마류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창가에 서 있는 인물의 넓은 등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된 후에는 후회해도 이미 늦소. 아니면…."

우즈미는 돌아보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것이 세계의 법칙이라면 아무 말 없이 따를 거요?"

그렇구나. 마류는 깨달았다. 묵묵히 따르는 길을 선택한다면 지금 이 곳에 이렇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상부의 명령에 따를 뿐 의문을 품지 않고 그저 싸우는 기계로 살다가 죽는다면. 그러나 자신들은 기계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 왔던 것을 모두 버리는 일에는 여전히 망설이게 된다.

"어떤 길을 선택하건 당신들의 자유요. 그 군복을 배신할 수 없다면 손을 써 주겠소…."

우즈미는 마류 일행의 망설임을 보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은 젊고 힘도 있소.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을 거요. 정말로 바라는 미래를…. 아직 시간은 있으니…."

마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때 아직 앳띤 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즈미 님은 어떤 생각이십니까?"

키라였다. 그는 어른스런 조용한 눈으로 똑바로 우즈미를 보고 있었다. 오브의 사자는 소년의 질문이라고 해서 경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듯 뜸을 들인 후 낮게 대답했다.

"그저… 검을 장식해 둘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고는… 생각하고 있네."

키라가 알겠다는 듯 미소를 떠올리는 것을 마류는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뭔가가 확실히 그의 내부에서 변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 전력으로 파나마를 함락시키라니… 본국도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는군."

자프트의 잠수 모함 쿠스토 안에서 먼로 함장이 씁쓰름하게 중얼거렸다. 날아 오느른 모빌 슈트 부대를 쳐다보면서 라우 르 크루제가 함장을 위로하듯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요. 알래스카에서 기세 등등해진 놈들의 발목을 잡아 두지 않으면 의장과 플랜트가 위험하니."

모니터에는 빽빽이 자라난 열대림이 비치고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보이며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매스 드라이버 시설이 엿보였다. 파나마…. 지구 연합군 측에 유일하게 남겨진 우주로 가는 입구. 그 곳을 모빌 슈트 부대가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자프트는 남은 병력을 총동원해 오퍼레이션 스핏 브레이크의 당초 목적지를 알래스카의 설욕을 하는 자리로 선택한 것이다.

"우로보로스의 고리를 닫고 놈들을 지구에 봉쇄하기 위해서라도 파나마의 매스 드라이버는 파괴해 둬야죠…."

먼로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라우에게 물었다.

"궁그닐은?"

"예정대로입니다."

지금쯤 위성 궤도 위에서는 자프트의 수송함이 대기하며 예정 시각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쪽이로군. 강하 때까지 목표점을 제압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어조로 말하는 먼로에게 라우는 대답했다.

"알래스카의 복수전이라면 다들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면 밑에서 큭큭 하고 웃었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라우는 통제실을 떠나 자기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실패는 허용되지 않는다. 실책을 회복하기 위해 패트릭 자라는 곧바로 새로운 작전을 요구했다. 그것은 전략적인 의미도 있었지만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함도 있었다. 클라인 부녀와 카나바 등을 반역자로 몰기는 했지만,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진행시킨 작전의 실패에 대한 여론을 억누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조치에 의문을 품고 클라인 일파에 동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래서는 정권의 전복조차 일어날 수 있다. 패트릭에게는 새로운 승리가 필요한 것이다.

라우는 조소하면서 통로를 더듬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의자에 축 늘어져 있던 소녀가 튕기듯 일어섰다.

"곧 전투가 시작되는데, 보고 싶나?"

라우는 자신에게 겨눠진 총을 완전히 무시하고 똑바로 책상으로 향했다. 소녀가 겨눈 총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라우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대화를 계속하면서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여기 저기 끌고 다녀서 미안하지만, 명령이라 어쩔 수 없군."

"왜…."

프레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목소리를 쥐어 짜 냈다.

"왜 나를…!"

그렇다. 프레이는 그 후로 라우의 방에 끌려가서 쭉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라우는 무슨 까닭인지 그녀에게서 총을 빼앗지도 않고 방에 열쇠를 채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방에서 도망친다고 해 봤자 어떻게 될까? 밖에는 자프트 병사가 우글우글하다. 설사 발각되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고 해도 밖은 바다. 그 정도는 프레이의 머리로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남자의 의도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포로에 대한 취급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총을 주고 방에 방치해 두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녀를 왜 일부러 JOSH-A에서 데려 온 것인지…. 알래스카가 전멸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녀를 동정해서 그렇게 한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의 미소가 너무도 차가웠다. 라우는 눈을 들어 처음으로 정면에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넌 이미 죽은 몸이야, 프레이 알스터."

프레이는 숨을 삼켰다. 라우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때 내가 총으로 쐈든, 그대로 내버려 뒀든 너는 죽었어."

총을 든 프레이의 손이 더욱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죽어…? 죽었다고…? 내가…?'

"여기서 나를 쏘더라도 그 직후 넌 죽어. 병사들의 손에 의해."

라우는 서류를 분류하면서 쌀쌀맞게 말했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면 남은 건 그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겠군."

프레이는 어안이 벙벙해서 자신의 죽음도 그녀의 죽음도 아무래도 좋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가면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성가신 듯 눈을 들고 물었다.

"…총알은 들어 있잖아?"

그 목소리의 차가움이 프레이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남자는 누구지? 아버지의 목소리로 죽음을 부추기는 이 남자는…. 라우는 힘이 빠져 주저앉은 프레이를 쳐다보고 갑자기 매우 즐거운 듯 미소 지었다. 마치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그녀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전장에서는 목숨 따위는 값싼 거야. 한 순간에 사라지겠지…."

그렇다. 프레이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버지의 목숨도 그랬다. 호위함에 타고 있던 다른 몇 백 명과 함께 한 순간에 우주로 흩어졌다.

'그러면… 나도?'

"…하지만 다들 조국을 위해,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

라우는 마치 달콤한 정담을 나누듯 말을 이으며 프레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래도…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군, 그런 건."

프레이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무슨 까닭인지 이 남자는 자신의 마음까지 모두 간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군복을 입고 있어도 넌 병사가 아니야, …안 그래?"

그렇다. 프레이가 병사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입에 담은 대의는 되는 대로 꾸며 댄 말이었고, 모국에는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으며, 가슴 속에 있었던 것은 복수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키라를….

'키라는 이제 만날 수 없다. 다른 누구와도 이제 만날 수 없어….'

이제 그녀는 저항할 의지마저 빼앗긴 채 총을 든 손을 축 늘어뜨렸다. 자신은 죽은 것이다. 이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이 차가운 남자에게 모든 것을 잡힌 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생사 뿐…. 그것조차 아무도 애도해 주지 않는다.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남자는 무덤덤한 것이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죽음….'

라우는 그녀가 공허한 눈으로 침묵하자, 그 공포를 맛보듯 잔인한 미소를 떠올리며 빤히 쳐다보았다.

 

 

선명한 녹색 대지에 하나, 둘 불꽃이 피었다. 상공에서는 불에 이끌린 날벌레처럼 자프트의 모빌 슈트가 몰려 들었다. 알래스카에서 그 태반을 잃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이었다. 그에 대해 지구군은 고사포로 반격했지만 그 빠른 기동을 따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바다에서는 군과 조노가 잇달아 나타났고, 해안에는 수송정을 타고 진 부대도 상륙했다. 종래의 전차나 지 대공 포로는 모빌 슈트의 화력과 기동력에 대항할 수 없어서 처음에는 수비대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듯 했다. 상황이 변한 것은 정글에 감춰진 게이트에서 한 무리의 모빌 슈트가 나타났을 때부터였다.

회색의 팔과 다리, 가슴 부위는 다크 블루와 빨간 색의 투 톤, 헬멧을 쓴 것 같은 머리를 가진 낯선 모빌 슈트들 앞에서 자프트의 모빌 슈트 부대는 당황했다. 지구 연합군은 모빌 슈트의 양산화에 성공하여 곧바로 실전에 투입한 것이다. GAT-01=스트라이크 대거였다. 그레네이드 런쳐가 장착된 빔 라이플 한 정과 오른쪽 어깨에 빔 사벨 한 자루를 표준으로 장비하고 있는데, 심플한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그 기동성은 내츄럴이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곧 전황은 뒤집어졌다. 아직 싸움에 익숙치 않지만 물량에서 앞서는 지구 연합군이 자프트의 모빌 슈트를 인해 전술로 밀어 붙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무적을 자랑했던 자프트의 모빌 슈트 부대는 처음으로 병기의 정점에서 밀려났다. 진이, 군이, 딘이 잇달아 쓰러져 갔다.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인 역전이었다. 위성 궤도 위에서 몇 개의 컨테이너가 지상으로 투하되었다. 궁그닐…. '신의 천둥'이었다. 그것은 파나마 상공에서 낙하산을 펼친 후 예정 지점에 강하했고, 기다리고 있던 진 부대가 공격을 막으면서 장치를 셋팅했다. 모빌 슈트의 섬세한 손이 장치의 핵 부분에 점화 장치를 잇달아 장착하고 정확한 암호를 입력하자 궁그닐이 기동했다. 진 부대가 대거의 빔 라이플에 쓰러져 가는 사이에 장치의 카운터는 계속 되었다. 카운터가 제로에 이른 순간, 궁그닐은 섬광을 내뿜었다. 방금 전 진이 장착한 점화 장치가 핵 중앙을 향해 일제히 폭발하며 압전소자를 한 순간에 파괴했다. 압전소자의 붕괴와 동시에 그것은 강렬한 전자기 펄스(EMP)를 방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순식간에 전장을 휩쓸었다. 그 순간 모든 전자 기기가 정지했다. 사령부의 시스템이 다운되었고, 전투기는 속도를 잃고 추락했으며, 통신조차 두절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트라이크 대거도 마찬가지였다. 모빌 슈트는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 인형처럼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정글에 버티고 서 있던 매스 드라이버 레일은 EMP에 의해 발생한 강력한 자기장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 당기며 뒤틀렸고, 엄청난 소음과 함께 붕괴해 갔다. 하늘로 솟구친 다리는 곧 바람 앞의 성냥개비처럼 무너져 내렸다.

한편 안티 EMP 시스템을 사전에 장비하고 있던 자프트의 모빌 슈트 부대는 궁그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들은 방금 전의 화풀이라도 하듯 움직이지 않는 대거를 잇달아 쏘고, 전차를 짓밟으며, 사령부의 건물을 무너뜨렸다. 움직이지 않는 모빌 슈트에 갇힌 지구군의 파일럿은 손 써 볼 도리도 없이 기체와 운명을 함께 했다. 자프트의 모빌 슈트 부대는 포대와 기체를 버리고 투항한 병사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 때 이자크 쥴도 딘을 타고 공격대에 참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역전극을 통쾌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동료들이 닥치는 대로 살육을 펼치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그 고양감이 식었다. 그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총알 낭비야…! 움직이지 못하는 적을 쏘는 게 뭐가 즐겁다고!"

이 곳에는 이미 적 따위는 없었다. 그는 기체를 상승시켜 후퇴했다. 그 스트라이크처럼 자신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녀석이야말로 적이라 부르기에 어울린다. 다른 것들은 잔챙이다, 잔챙이…. 게다가 전투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적 따위는 자신은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 뿐이었다. 결코 무서워진 것은 아니었다. 동포가 보여 준 뜻밖의 잔학성이…, 알래스카에서 본 광경이 지금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살육과 겹쳐졌다. 자신들과 내츄럴은 다르다고 믿었건만, 지금 동료들이 하고 있는 음산한 행위 어디에 신 인류로서의 우월성이 있는 건가. 그래, 차라리 알래스카에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호소한 그 낯선 모빌 슈트의 파일럿 쪽이 훨씬 더….

복수심에 사로잡혀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살육을 펼치는 것은 구 인류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자크는 갑자기 깨닫고 오싹해졌다. 결국 그것은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매일 아침 거울 속의 상처를 볼 때마다, 잃어버린 동료를 떠올릴 때마다, 복수심이 끓어 올라서 닥치는 대로 적을 공격한 자신은… 짐승처럼 살육을 퍼붓는 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은가?

궁그닐…. 신의 천둥…. 하지만 자신들 코디네이터는 과연 신에 비견될 만한 존재일까? 이자크의 가슴 속에서도 역시 의문이 싹트고 있었다.

 

 

"뭐라고요, 파나마가…?!"

함교에 전해진 소식에 마류가 놀라 소리쳤다. 그 소식을 가지고 아크 엔젤을 방문한 키사카는 동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날이 밝기 전부터 자프트의 공격이 시작됐다더군.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목표는 매스 드라이버…."

마류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구 연합군의 주력 부대도 파나마에 있는데… 자프트도 필사적인 모양이야."

키사카는 그렇게 말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마류를 살폈다.

"…너희들은 복잡한 심정이겠군."

그들이 자신들을 버린 사령부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며칠 전까지 충성을 바친 조직의 중요한 거점이 공격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걱정이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냥 '꼴 좋다'라는 말로 끝낼 수 있다면 차라리 속 편하겠지만…. 밀리아리아가 불쑥 말했다.

"알래스카에서… 사람이 엄청나게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편, 격납고에서 프리덤의 정비를 하고 있던 키라에게도 그 소식은 전달되었다.

"…그렇군요."

파나마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무우에게서 듣고 소년의 눈빛이 흐려졌다. 무우는 그런 그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본 후 문득 물었다.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예…?"

"지금은 자프트도 지구군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이런 것을 타고 있어."

무우는 새로운 기체 쪽을 대충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그 눈은 날카로웠다.

"…혼자서라도 싸울 생각이야?"

"할 수 있는 일과… 바라는 일을 할 뿐이에요."

침착한 목소리였다.

"이대로는 싫고… 저 자신도 그렇게 끝낼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의 표정에 이끌리듯 무우는 그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과거의 방황과 자기 연민과도 같은 비통함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무우는 숨을 삼키며 소년의 확연한 변모를 살폈다. 멈추었던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들 역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발견해야 한다. 이윽고 대양에 도착할지, 막다른 길에 막혀 사라져 버리는 지류가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키라…!"

격납고에 카가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전히 그녀는 아크 엔젤과 모르겐 레이터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에리카 시몬즈가 와 달래! 뭔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대."

그 말에 카가리를 따라간 키라 일행과 마류가 모르겐 레이터에서 본 것은….

"돌아 왔으니 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모르겐 레이터의 모빌 슈트 개발 주임인 에리카 시몬즈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의 그 M1=아스트레이 공장 블록을 앞장 서서 걸었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모빌 슈트의 모습에 다들 숨을 삼켰다.

'스트라이크….'

새 것이나 다름 없이 보수되어 메인터넌스 베드에 자리 잡은 이 모빌 슈트는 마치 과거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키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이 기체와 함께 겪어 온 여러 전투와 자신이 놓고 온 고독과 고통을 돌이켜 보는 듯….

"개조할 때 네가 만든 OS를 탑재시켰는데…."

에리카 시몬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이번에는 다른 파일럿이 타지 않을까 생각해서…."

키라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우는 태연히 물었다.

"내츄럴 용의?"

"예."

그래도 단 기간에 이 정도까지 고친 거을 보면 그녀들도 이 기체의 성능을 포기하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키라에게는 이것을 훨씬 뛰어 넘는 성능의, 그에게 걸맞는 검이 있다.

"내가 탈래!"

카가리가 위세 좋게 나섰지만 아차 싶어 주저하듯 마류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 쪽이 괜찮다면… 그렇다는 말이지만…."

하지만 마류가 허가를 하기도 전에 무우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안 돼."

"어째서?"

카가리는 기대가 어긋났는지 곧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무우는 씩 웃으면서 그런 그녀를 곁눈으로 내려다 보며 대답했다.

"…내가 탈 거니까."